책 한 권에 소개한 동양고전 50

북곽선생과 젊은 과부/ 박지원의 <열하일기>

김현거사 2015. 8. 4. 07:20

 

  북곽선생과 젊은 과부/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건룡황제의 칠순 잔치에 참석하는 조선 외교사절 대표인 그의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청나라 다녀온 여행기이다. 열하는 ‘뜨거울 열(熱)’과 ‘물 하(河)’의 합성어로, 그곳은 뜨거운 온천물이 솟아 겨울에도 강물이 얼지 않았다고 한다. 발원지는 황제의 궁궐 ‘피서산장(避暑山莊)’ 북동쪽인데, 여기에 열하라고 쓰인 비석이 지금도 있다. 현재 이곳은  승턱(承德)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기이한 바위가 곳곳에 솟아있다.

 

 박지원은 왕실의 먼 외손이다. 그의 5대조 박미(朴瀰)는 선조의 딸인 정안옹주(貞安翁主)와 혼인하여 연암(燕巖)의 4대조 박세교(朴世橋)를 낳았다. 박지원은 초시와 복시에서 모두 장원 하였는데, 소과 시험 답안지를 본 영조는 박지원을 불러 놓고 도승지에게 답안지를 읽게 하고, 문장에 감탄, 흥이 일어 책상을 두드리며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서울시 노원구(지금 서라벌고등학교) 부근에 부친의 묘를 모시려다가 숙종 때 영의정 지낸 이유(李濡, 1645∼1721)의 아들 이상래(李商萊)와 산송(山訟)이 벌어졌고, 영조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이상래 부형(父兄)에게 형벌을 가했다.

 그 후 이상래는 벼슬을 포기하고 평생 도성에 들어가지 않았고, 박지원도 이 사건에 부담을 느껴 과거를 포기하고 개성에서 30리 떨어진 연암동(燕巖洞)에 은둔하였다. 당시 35세였던 박지원은 29세의 무인 백동수(白東修)와 함께 개성 화장사(華藏寺)에 올라, 동쪽 봉우리가 하늘까지 솟은 것을 보고, 그쪽 방향으로 가서 검푸른 절벽이 둘러쳐 있고, 시냇물이 흐르는 언덕 위에 자리를 정했다.

 박지원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열하일기는 26권 10책으로 구성된 방대한 책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압록강을 건너간 도강록(渡江錄), 심양의 이모저모를 다룬 성경잡지(盛京雜識), 신광녕에서 신해관까지 말을 타고 가듯 빠르게 쓴 일신수필(馹迅隨筆), 산해관에서 북경까지의 이야기를 쓴 관내정사(關內程史), 북경에서 열하까지 오라는 황제의 명을 받고 급히 열하로 떠나는 여정을 담은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이 있다. 

 당시 사절단의 목적지는 연경이었으나 건룡제가 열하의 피서산장에 있었기 때문에 다시 열하까지 간 것이다.

 

박지원은 1780년 음력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8월 1일 북경에 도착했고, 8월 5일 북경에서 열하로 출발하여 8월 9일 열하에 도착, 건륭제의 칠순 축하연에 참석했으며, 8월 15일 다시 열하를 떠나 8월 20일 북경으로 되돌아온다. 

 지금부터 230년 전 5월에 출발하여 8월에 귀국한 3개월 동안 일기를 쓴 것이다. 이 열하일기의 분량은 그가 평생 저술한 글의 양이 한자로 대략 50만자 인데, 그 절반에 해당된다.

  열하일기의 주 내용은 당시의 날씨, 지형에 대한 묘사, 당시 사귄 열하(熱河)의 문인들과 연경(燕京)의 명사들과의 대화를 적은 것이다. 일기라 문장은 어렵지 않게 평이하게 표현되었으며, 간혹 수필도 실렸는데, 전편에 해학과 풍자가 넘치고 있다.

이 중 황도기략(黃圖記略)은 북경의 이모저모를 쓴 것이며, 공자묘를 다녀와서 쓴 것이 알성퇴술(謁聖退述)이며,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고 쓴 것이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이며, 황제의 천추절을 맞아 주변 국가들이 사방으로부터 공물을 바치기 위해 열하를 향해 몰려든 것을 쓴 것이 만국진공기(萬國進貢記) 이다.  

그 중 유명한 수필 <호질(虎叱)>이 나온다.

 이는 산해관에 들어서서 옥전현이라는 작은 마을을 지날 때, 무심하게 거리를 쏘다니다 한 점포 벽에 쓰여 진 기이한 문장을 발견하고 촛불 아래 베껴 썼다고 한다. 그때  점포 주인이 연암에게 물었다. 

 '선생은 이걸 베껴 대체 무얼 하시려오?'

연암은 이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서 우리나라 사람들께 한번 읽혀 모두 허리를 잡고 크게 웃게 할 작정이오.'

 

 <호질>의 줄거리는 이렇다.

 어떤 고을에 도학 ( 道學 )으로 이름이 있는 북곽선생(北郭先生)이라는 선비가 동리자(東里子)라는 젊은 과부와 정을 통하였다. 어느날 동리자의 아들 한 놈이 소변을 보러나갔다가 동리자의 방에서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래 여섯 아들이 오래된 여우가 사람으로 변해 어머니를 홀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몽둥이를 들고 어머니의 방을 습격하였다. 그러자 북곽선생은 허겁지겁 도망쳐 달아나다가 어두운 밤이라 그만 똥오줌 가득한 거름구덩이에 빠졌다. 겨우 머리만 내놓고 발버둥치다가 요행히 말뚝을 잡고 기어 나오니, 이번에는 '으흥' 난데없이 푸른 불빛이 두 줄기 비치며 집채만한 거물이 그 앞에 서있다.  범이었다. 

그래 북곽선생은

 '대호(大虎)님은 덕이 지극히 넓으신 줄로 우리가 아옵기에, 저희 인간들은 평소 대호님을 극진히 숭상하옵니다. 바라옵건대 이 천한 목슴을 불쌍히 여기사 돌아갈 수 있기를 망극하게 비옵니다.'

하고 싹싹 빌었다.

 범은 선생의 이 말을 듣고, 성을 버럭 내며,

' 예끼 이 못생긴 놈아 듣거라. 너희 인간들은 세상 나쁜 일은 도맡아 하면서, 우리가 개나 돼지를 잡아간다고 욕하지? 그러나 우리는 노루나 사슴으로 배를 채우고, 조그만 버러지는 차마 건드리지 않는다. 우리는 작은 놈은 불쌍히 여겨 살려주는 도량이 있지만, 너희 인간들은 돈 있고 권세있는 놈에게는 쩔절 매고 온갖 아첨을 다하면서, 저보다 약한 만만한 놈에게는 함부러 못살게 굴지 않는가? 또 벼슬을 얻기 위하여 제 계집까지 바치는 놈도 있질 않는가?'

 범은 인간을 욕하며 특히 유학자의 위선과 아첨, 이중인격 등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북곽선생은 정신없이 머리를 조아리고 목숨만 살려주기를 빌었다. 그러다가 머리를 들어보니, 어느새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아침에 농사일을 하러 가던 농부들만 주위에 서서 자신의 이상한 모습을 보고있었다.

당황한 선생은 이에,

'응! 일찍이 밭에 나왔군. 경서에 이런 말이 있잖은가? 하늘이 높으니 우럴러 보지 않을 수 없고, 땅이 넓으니 굽어보지 않을 수 없느니라고. 나는 오늘 새벽 이런 높은 하늘과 넓은 땅에 대해서 예(禮)를 베풀고자 나왔지.'

 

   이 밖에  백이숙제 묘당을 둘러본 관내정사(關內程史), 황교(라마불교)에 대한 특별 보고서인 황교문답(黃敎問答), 천하의 형세를 논하는 심세편(審勢篇), 연암의 우주관과 철학이 잘 나타나 있는 곡정필담(鵠汀筆談)이 있다. 곡정필담에는 조선 후기 한반도의 빛에 대한 학설, 지동설, 티끌을 통한 우주만물 생성론, 자연과 인간의 동일성, 제3세계설이 실려있어 과학적으로도 주목을 끈다. 또 러시아와 몽고가 강성하니 주의하자는 형세에 대한 내용도 있다.

 그 밖에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은 중국 조관들이 황제를 접견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망양록(忘羊錄)에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특히 옥갑이라는 여관에서 비장들과 나눈 이야기를 적은 옥갑야화(玉匣夜話)에는 그 유명한 '허생전(許生傳)'이 나온다.

 연암은 허생전을 청나라 학자들과 변승업이라는 조선 갑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윤영이라는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적어놓았다.

 

 허생전 줄거리는 이렇다.

 허생은 남산 밑에 사는 가난한 선비로, 10년을 목표로 공부를 하다가 아내의 불평 때문에 3년을 남겨 놓고 중단한 뒤, 장안의 갑부 변씨를 찾아가 만 냥을 빌린다. 그길로 안성으로 가 전국의 과실을 매점한 뒤, 값이 오르길 기다려 10배에 팔아 10만 냥을 손에 거머쥔다. 그 돈을 가지고 제주도로 건너간 그는 제주도의 특산물 말총을 사들여 망건값이 오른 후 팔아 다시 10배의 이익을 올린다. 그리고 나서 도적떼의 소굴로 들어가 그들을 설득하여 한 사람 당 백 냥씩 주고 여자와 소 한 마리를 데리고 오게 하여 이천여 명을 무인도에 정착시킨다.

 3년 후, 일본 나가사키[장기(長岐)]에 흉년이 들자 그들에게 양곡을 팔아 은 백만 냥을 갖고 본국에 돌아온 허생은, 백만 냥이란 돈이 다 쓸 데가 없다 하여 50만 냥을 바닷속에 던져 넣고, 남은 50만 냥 중 10만 냥을 변씨에게 주고 나머지는 빈민을 구제하는 데 썼다.
 그후 허생과 친해진 변씨는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그에게 대주고 어영 대장 이완을 허생에게 소개해 준다. 허생은 이완에게 정치·외교·국방에 대한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시하지만 , 이완은 그 모든 것이 사대부로서 지키기 어려운 것들이라며 난색을 표하자, 허생은 이완에 대해 크게 화를 내며 사대부들을 비판한다.

 다음날, 이완이 다시 허생의 집을 찾아가 보니 허생은 세상을 피하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연암동에 은거한 후의 박지원은 곤궁했던 모양이다. 개성유수 유언호(兪彦鎬)가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보관해 둔 칙수전(勅需錢) 1000민(緡)을 그에게 빌려준 일이 있다.  이 돈을 그 뒤 박지원을 따르던 사람이 대신 갚아 주었고,  10여 년 뒤 박지원이 안의현감으로 갈 때 처음 받은 월급으로 그 빚을 갚았다고 한다.  

 가난했던 박지원은 현실적인 청나라 문물을 존중했다. 비록 오랑캐 만주족이더라도 배울 것이 있으면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청나라를 배우자는 ‘북학(北學)’이다.

 그러나 사회 분위기는 여전히 배청숭명(背淸崇明)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걸어 나와 지금의 석촌호수 부근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고두(叩頭)하며 굴욕적으로 항복했던 국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지원은 병자호란이 있던 해(1636)는 자신이 북경에 다녀온 당대(1780) 사이에 이미 긴 세월의 흐름이 놓였기 때문에, 이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왕실 주변 관료들의 많은 비판을 받았다.

 열하일기도 당연히 뭇매를 맞았고, 그래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그저 잡다한 여행 기록이란 의미로 ‘잡록(雜錄)’이라고 스스로 칭했다. 열하일기는 당시 사회에 핫 이슈를 제기한 문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