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과 오간 편지

이시환 주간님께

김현거사 2015. 2. 2. 15:47

먼저 졸시 한 편 소개합니다

 

<약수터에서>

 

묵언 중이라는 팻말도 없이

바위는 명상에 들고

생노병사가 이런거요

꽃은 피고 다시 져서

윤회를 말한다

원래 세상은 이렇게 청정했거니

누가 세상은 그렇지 않다 했나                    

이끼 돋은 바위 사이

지팡이 짚고 온 늙은이 하나

이리저리 날라다니는 하얀 나비처럼

약수터 물가에 일 없이 서성거리다가

밤에 고인 정화수 한방울

감로마냥 훔쳐간다

 

山詩를 읽으며, 먼저 산에 든 마음을 연작으로 써보자 하였건만, 그리 못한 내 게으름을 생각합니다.

좋은 분 만나 좋은 시 읽음을 감사하게 생각 합니다.

깊은 뜻이야 다 모르지만, 구구절절히 맘에 듭니다.

특히 1번 이시환의 아포리즘은 나의 산에 대한 철학인데... 그걸 어찌.....

김창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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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본 메일 ---------

보낸사람: "동방문학 운영자" <dongbangsi@hanmail.net>
받는사람 :
날짜: 2015년 2월 02일 월요일, 11시 38분 31초 +0900
제목: 산시 감상


Daum 카페

 
산시 감상

저의 볼품없는, 산(山)을 노래한 시들을 읽게 되면 무슨 생각이 들까요?

한 번 틈을 내어 일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무언가 느낌이 있고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면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 속을 해부(解剖)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노력의 대가로 막걸리 한 잔 사겠습니다.


2015. 02. 02.

이시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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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중심소재로 노래한

이시환의 산시[山詩]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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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너무 ‘시끄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혹자는 그 시끄러움을 두고 ‘자유’와 ‘민주’라는 말로 포장하지만 내 눈에는 자유도 민주도 아니다. 무리한 요구, 무례한 외침, 조삼모사 같은 궤변이나 속임수가 난무하는 인간 세상의 욕구충돌 현장이다. 더 비하하자면, 에너지가 넘치도록 먹어대는 사람들의 배설물이고, 썩어서 거름이라도 되어야 할 말들의 찌꺼기뿐이다. 그것들은 늘 요란스럽지만 영양가도 없으며, 그래서 내 실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불행하게도, 나의 머릿속에는 이처럼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다. 늘 내가 먼저 베풀어야 하고, 내가 먼저 양보해야 겨우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위선적인 겸손만큼이나 피곤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난 해 여름철부터 조용히 산행(山行)에 몰두했다. 시간만 나면 배낭을 메고 산으로 갔다. 짧게는 너댓 시간에서 길게는 예닐곱 시간씩 홀로 걸었다. 그런 고행(苦行)은 나를 시험하기도 하고, 나의 체력이나 인내심을 향상시켜 주기도 하고, 몰랐던 것들을 알게도 하며, 그동안 무관심했던 것들에 대해서 새삼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어 주기도 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나의 생명력 곧 나의 시간과 나의 생체에너지를 소비하는 일로서 부정할 수 없는 내 삶의 일부였다.


유독, 산행으로써 몸을 혹사시켜왔던 나의 고행은 지난 해 여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매주 한 차례씩 국립공원 북한산만을 탐방한다. 아니, 그냥 걷는다. 그것이 이미 여름과 가을철을 지나고 지금 겨울철 산행중이다. 거르지 않고 다니다보니 무딘 나에게도 습작(習作)이 늘어난다. 물론, 그것들이 독자의 눈에는 함량 부족이거나 시로서의 결점이 많은 미완성 작일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쓰고 싶은 욕구가 가끔 샘솟는다. 앞으로 이러 나의 고행이 언제, 어디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그 중간쯤에 잠시 뒤돌아보며 나의 습작시를 거두어 독자 여러분에게 선을 보이고자 한다. 립 서비스가 아닌 진솔한 지도 편달을 기대해 본다.


-2015. 01. 20.

이시환







1

나의 경전은

내가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저 산이다.

-이시환의 아포리즘aphorism 39



2

자연의 아름다움이란


돌 하나를 빼어 내어도 무너져 내리고

돌 하나를 더 쌓아 올려도 무너져 내리고 마는

그것, 바로 그것이라네.


-2014. 08. 31.



3

묘산妙山


산에 오르고자

사방팔방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만남의 광장은

붐비는 새벽시장만 같네.


하지만 그 소란스러움도 잠시

그들이 일제히 산에 들기 시작하면

이내 산은 그들을 어디로 다 숨기어버렸는지

산속은 텅 빈 채 고요하기만 하네.


그렇듯, 

저 위에서는 물기만 조금 비쳐도

저 아래에서는 콸콸 흐르는

물줄기를 내어 놓는 것이


실로 묘함이란

그가 품은 세계의 깊이에 있고

그 깊은 곳에서 품었던 것들을

다시금 내어 놓는 비밀에 있네.


-2014. 08. 19.



4

북한산 형제봉에서



북한산 형제봉에 올라

바위에 걸터앉고 보니

그래도 이놈이 든든하구나.

믿음직스럽구나.


훤히 내려다보이는 저 아래 세상이야

말만 무성한 시대이거늘

그 우거진 잡초더미 속에서

숨어 사는 독사에게 발등 물리지 않고

그 거친 욕망의 숲속에서 일렁이는

불길 같은 바람에 흔들리거나 휩싸이지도 않고

묵묵히 스스로를 지켜내는 모습이

실로 든든하구나.

믿음직스럽구나.


한 생을 다 탕진하고서야 쏟아내는

통한의 눈물과 함께 범벅이 된

뉘우침이란 말 아닌 말과

깨우침이란 말 아닌 말이라면

그 절실함이 사람을 바꾸고

능히 세상을 바꿀 수도 있으련만


헤픈 눈물은 있으나 갱신의 뼈저린 노력 없이

너도 나도 좋은 말들만 쏟아놓지만

한낱 앵무새의 지껄임에 지나지 않으며,

제 삶속에서 우러나오는 한 모금의 생수 같은

간절한 말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주어 담은

굴러다니는 말들이고 보면

우리들의 잔칫상은 늘 화려하고 요란스러우나

속빈 강정처럼 우리를 실망시키듯이

도무지 사람을 바꾸지 못하고

도무지 세상을 바꾸지 못하네.


말이 무성한 시대

피곤한 세상을 살며

애써 빈 수레 끌지 말고

두 다리 성할 때에

북한산 형제봉이라도 올라

바위에 걸터앉아 보시라.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각성되지 않고 실행되지 않으면

한낱 바람에 날리는 쭉정이일 뿐

풍파에 시달리고 세파에 멍들지라도

말없이 말하는 네가

차라리 믿음이 가고 정이 가는구나.

마주 보고 서서 서로를 그리워하는

바위 형제의 묵언이여.

네게는 간절함이라도 있고

네게는 나눠줄 체온이라도 있지.


-2014. 08. 05.




5

산에 들어


마침내 9월로 접어드는

기분 좋은 날 아침

큰마음 내어

잠시 깊은 산에 들었네.


골짜기에는 바람 한 점 없고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질 않아

모두가 숨을 죽인 듯

고요하기만 한데


그렇게 

나도 그저 돌부리처럼

선인봉 곁에 비껴 앉아 있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여기서 툭, 저기서 툭, 툭,

도토리 떨어져 구르는 소리에

놀란 다람쥐 귀를 세우네.


-2014. 08.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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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봉(仙人峰) : 신선(神仙)이 도를 닦는 모양의 바위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으며, 자운봉(739.5m) 만장봉(718m) 등과 함께 '도봉산의 삼형제 봉우리'로 불리는데,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암벽 등반가들이 즐겨 찾는 해발고도 708m의 장엄한 봉우리이다.




6

삼천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9월의 중순 어느 이른 아침

의상봉*으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서서

삼천사*에서 되돌아 나오는데


급히 걸어오시는

몸집 작은 백발의 할망구

내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묻는다,

‘저 위쪽에서

밤 떨어지는 소리 못 들었느냐?‘라고.

 

(밤 떨어지는 소리라…)


내 겸연쩍게 웃으며,

 ‘못 들었다…’ 했더니

할망구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되레 무지한 나를 나무라는 듯

‘못 듣긴 왜 못 들었느냐?’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2014. 0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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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봉(義湘峰) :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하며, 북한산성 대서문 쪽으로 있는 해발고도 502m 봉우리이다.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625~702)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데에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

*삼천사(三千寺) :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산34번지에 위치한 불교사원.




7

화계사 뒷산을 오르며


밤새 내리던 비는 그치고

돌연, 찬바람 불어오는데

이 가을 다 가기 전에

꼭 한 번 다녀 가라시기에

모처럼 화계사 뒷산을 오르네.


산비탈에 우뚝 선 나무

제 옷가지들을 벗어 흩뿌릴 때마다

공중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한 무리 새떼 되어 눈이 부시고


이미 알몸으로 칼바람을 맞는 계곡에서는

보잘 것 없는 나목들이 저마다 붉디붉거나

보랏빛 작은 열매들을

한 섬 가득 내어 놓는데

그것들이 보석인 양 꽃인 양

황홀하기 그지없네.


그래도 늦가을이라고

저들은 다 버릴 줄 아는데

그래도 겨울이 다가온다고

저들은 다 내어 놓을 줄 아는데

그대는 무엇을 움켜쥐고

무엇을 걱정하는가.


-2013. 11. 17.




8

문수봉에 앉아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연이틀 촉촉이 내렸다. 목욕재계하고 오른 문수봉의 이른 아침, 맑게 개인 하늘과 내려다보이는 산빛이 태초의 것인 양 아주 깨끗하다. 하늘은 티 한 점 없이 파랗고, 깨끗한 햇살을 받는 산등성이의 나무들은 윤기가 넘쳐흐른다. 모든 경계가 선명하다. 이런 세상이라면 백년도 잠깐 사이에 지나가버릴 것만 같다. 누추해진 이 몸이야 이젠 죽어도 좋다만 그조차 감사할 뿐이다.


-2014. 10.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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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봉 : 북한산의 의상봉에서 시작하는 의상능선에 있는 가장 높은 727미터의 바위 봉우리.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한다. 봉우리 밑으로 고려 때 창건된 문수사(文殊寺)가 있다.




9

인수봉을 바라보며



인수봉에 올랐다 해서

인수봉을 다 본 게 아니듯이


백운대에 올랐다 해서

백운대를 다 아는 것도 아니라네.


혹여, 안방 드나들듯 오르내리며

그의 비밀까지 다 알아버린 뒤라

싫증나거나 이미 났다면

그 주변 영봉에도 오르고

만경대에도 오르고

노적봉에도 올라서서

그 인수봉을 바라보고

그 백운대를 바라시게나.


오르면서 보지 못하고

올라서서도 보지 못했던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 보일지도 몰라.


가깝고도 가까운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러하듯

때로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시게나.


-2015. 01. 18.




10

나의 산행



어느 날, 백운대에 홀로 앉아서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이 어우러진 도봉산이

구름바다 위로 솟아있는 것을 바라보며

‘저곳은 분명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닌 딴 세상’일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네.


어느 날, 자운봉에 홀로 앉아서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가 어우러진 북한산이

장엄한 기둥처럼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저곳은 내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딴 세상’일 거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했네.


그렇듯, 아직 가보지 아니한 곳에 대한

막연한 상상을 부풀리며,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선

꿈을 꾸며 가슴만 두근거리지.


그래도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즐거우며,

그래도 가야할 길을 상상하며 꿈을 꾼다는 게

얼마나 행복하던가.

그래도 꿈을 꾸며 상상할 때가 가슴 설레고,

그래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길을 나서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2015. 01. 19.




11

깔딱고개



신발끈 동여매고서 오르고 오르다보면

숨이 차오르고 가슴 답답해져 더 이상 참기 어려운,

그래서 딱 한번쯤 쉬어갔으면 하는 고개가 있네.


허리띠 졸라매고 경쟁 투쟁하다시피 허둥지둥 살다보면

몸도 지치고 마음까지도 찢겨 다 놓아버리고 싶은,

그래서 딱 한번쯤 뒤돌아보며 쉬어갔으면 하는 고비가 있네.


먼저 간 사람들은

그 때 그곳을 ‘깔딱고개’라 부르고,

그 때 그 고비를 ‘위기상황’ 내지는 ‘전환점’이라 부르지만

그 고통의 정점을 넘어서야 비로소

새 힘을 얻고 새 희망으로 앞만 보고 걸을 수 있네.


가장 참기 힘들고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비마다 놓여있는 그놈의 깔딱고개는

오르막길에도 있고 내리막길에도 있으며,

산행길에도 있고 멀고 먼 인생 항로에도 있네.


-2015. 01 .20.




12

아쉬움


오늘같이 하늘 파란 날에는

목욕재계하고 

인수봉* 위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오늘같이 햇살 쨍쨍한 날에는

마음 가지런히 하고서

백운대 위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오늘같이 춥지만 깨끗한 날에는

온몸으로 세상을 다 껴안으며

만경대 위에 앉아 있어야 하는데….


-2015.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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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仁壽峰) : 서울특별시 강북구와 경기도 고양시에 걸쳐 있는 북한산(北漢山)의 한 봉우리. 백운대(白雲臺), 만경대(萬景臺) 등과 함께 삼각산(三角山), 삼봉산(三峰山)이라 불리어 왔으며, 화강암 암벽이 원뿔모양으로 노출된 암봉(巖峰)으로 그 높이는 803미터로 알려져 있다.




13

산행山行



나는 걷는다.

살아있기에 걷는다.

걸어서 갈 수 있는 데까지

어디든 가보련다.


걸으면서, 

세상이 내게 하는 말을 엿듣고

내 몸이 내게 하는 말을 귀담아 들으며

세상을 향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중얼거려도 본다.


나는 오늘도 걷는다.

살아 숨 쉬고 있는 한 걷는다.

나의 걸음 멈추는 순간이 곧 죽음이고

죽어서는, 

한 줄기 바람이 되고,

불덩이 되고, 물이 되고, 흙이 되어서, 

끝내는 너의 품으로 돌아가련다.


-2015. 01. 14.





14

오봉



세상의 모든 현상이 그러하듯이

세상의 모든 결과에 이유 있듯이


네가 거기 있을 때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게다.


네가 그리 있을 때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게다.


네가 거기, 그리, 있을 때에도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아슬아슬한 

네 위태로움이 더없이 신비롭고


보기 드문

네 신비로움이 더없이 아름다운 데에도


다 이유가 있을 게다

다 이유가 있을 게다.


-2014. 0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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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五峰) : 국립공원 북한산의 도봉산 권역에 있는 다섯 개의 암봉(해발고도 660m)을 지칭하는데 한 능선에 줄지어 있고, 그 밑으로는 ‘석굴암’이라는 불교 사원이 있다.





15

가을 산길을 걸으며


녹음 짙어 하늘조차 보이지 않던 길에

초목들에 단풍이 들기 시작하더니

하룻밤 사이에 다 지고 말아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문득, 새 양탄자가 깔린 길을 걷자니

새삼, 살아가는 일만큼 거룩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달리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하루해는 점점 짧아지고

아침저녁으로는 일교차가 커지면서

가을비가 몇 차례 촉촉이 대지를 적시고 나면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산천의 초목들이 앞 다투어 목숨을 불태우듯

그 잎들에 울긋불긋 물들이기에 바쁘지만

끝내는 모조리 떨어뜨리고 만다.


겨우내 얼어 죽지 않고

새봄을 기다리는 저들의 고육지책이련만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다.


따지고 보면,

생로병사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게 없다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일만큼

진지한 것도 없고,

거룩한 것도 없으며,

아름다운 것도 없어 보이는 것이

내게도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2014. 10. 28.




16

자작나무 숲에 갇히어



어느 날 문득,

가을 자작나무 숲에 갇히고서야

살아야 하는 이유를 깨닫게 되네.


어느 날 문득,

한 순간이었지만 네게 미치고서야

살아야 하는 의미를 깨닫게 되네.


뒤돌아보면 적지 아니한 세월

산다고 마냥 뒹굴었어도

온전히 갇히어보지 못했고,

제대로 미쳐보지 못했기에

내 생의 절망이 없었고

속박이 없었으며

불꽃이 없었던가.


비록, 썩어가는 장작개비가 될지언정

살아서 파란 하늘로, 하늘로 치솟는

저들의 묵언 정진하는 자태가

게으른 나를 흔들어 깨우네.


-2014. 10. 24.




17

황매산 철쭉



이 능선 저 비탈

불길 번져버렸네요.


걷잡을 수 없이

돌이킬 수 없이


꽃 불길

확 번져버렸네요.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던

내게도 옮겨 붙은 듯


화끈화끈 얼굴 달아오르고

두근두근 심장 마구 뛰네요.


-2013. 05. 02.




18

여성봉 앞에서


고작 백년이나 살까 말까하는 내게,

고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입으로 말하는 내게,

비밀스런 그 음부를 다 드러내 보이는

그대 깊은 뜻을 어찌 알며,

그대 속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으리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고

귀에 들리는 것만이 진실이 아닐 터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내 귀에 들리지 않는다 해서

소리 없는 고요함도 아닐 터


그대 건강한 음부를 들여다보며

내 눈을 의심하고 내 귀를 의심해보네만

여전히 신기하고 기이하고 경이로운 것,

대자연의 음부로다.


-2014. 08. 31.




19

북한산성 성곽길을 걸으며



바람이 분다.

매서운 바람이 분다.

머지않아 칼바람 불어올 것이다.

높고 견고한 성(城)을 쌓자.

높고 견고한 성을 쌓자.


매서운 바람이 분다.

칼바람이 불어온다.

머지않아 피바람도 몰아칠 것이다.

높고 견고한 성을 쌓자.

높고 견고한 성을 쌓자.


고개를 들지 마라.

함부로 머리를 쳐들지 마라.

칼바람이 네 목을 노리고

광풍이 네 가슴속을 후벼 놓을 것이다.


그렇게 눈먼 바람이 몰아칠 때에는

성문을 굳게 닫고 낮게, 낮게 엎드려라.

미친바람도 멎을 날 있으리라.

칼바람의 기세도 꺾일 날 있으리라.


그렇다고 성을 너무 좋아하지 마라.

성을 너무 의지하지 마라.

성안에 갇히어 죽으리라.

성안이 쑥대밭이 되고

핏물이 골골에 흐르는 참극(慘劇)이 없도록

성을 너무 믿지 마라.

성을 너무 믿지 마라.


-2015. 01. 07.





20


고행(苦行)



지난 여름은

길고도 짭짤했다.


미련한 짓인 줄 알면서도

산행(山行)을 고행(苦行)으로 여기면서

무던히 땀을 쏟아냈고

심히 몸을 혹사시켰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물러서는

그 완강했던 여름 끝자락에서

찬바람은 쉬이 불어오고

삭신의 구석구석을 쑤시듯

대지엔 비가 촉촉이 내리고

나는 그 소리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인 것이


여름을 난 고단한 이 몸에도

단풍이 들려나보다,

비온 뒤 맑은 햇살 속

노적봉(露積峰)*의 시월 나뭇잎처럼

물이 되어 흐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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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적봉(露積峰) : 북한산의 산성주능선에 있는 봉우리로 높이는 716m이며, 만경대 서쪽 아래에 있다. 봉우리 모양이 노적가리를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여 ‘노적봉(露積峰)’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행정구역상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에 속하며, 이 노적봉 밑으로는 조선시대 ‘진국사(鎭國寺)’라 불리던 ‘노적사(露積寺)’가 있다.


-2014. 10. 04.




21

향로봉에 앉아서



내게 허락된

내 몸 안의 기름이 닳아가는구나.


때가 되면

나의 등잔도 바닥을 드러내고

심지까지 돋우어 가며 태우겠지만

불꽃은 점점 사그라져 갈 것이다.


원하든 원치 않든

마침내 불을 꺼지고

나는 텅 빈 등잔이 되어

어둠의 바닷속으로 잠기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