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과 오간 편지

영남문학 장사현 회장님 전

김현거사 2015. 2. 10. 09:07

영남문학 장사현 회장님 전

 

 안녕하십니까? 초면이라 좀 저어되지만, 같은 영남 사람이라,

 이유식 고등학교 선배님 권유로 수필 1편 보냅니다.

                                               김창현 올림

  

       안숙선의 판소리 춘향가                                                     

  그날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안숙선의 판소리 춘향가 시작 전에, 아무래도 판소리는 달빛 아래 듣는 것이 제격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연출가라면
이런 연출을 해보고 싶었다. 

 위에서 배 한 척 흘러내려온다. 배 위의 여인은 머리에 옥비녀, 손에 합죽선을 쥐었다. 수심어린 눈동자로 지리산 응시하다가. 배가 화개장터 쯤 왔을 때다. 월하미인(月下美人)이 이때 해당화같은 붉은 입술 열어 창(唱)을 시작한다.  

 이런 생각 하는새, 막이 오르고, 사회자가 안숙선을 소개했다. 근세 명창은 권삼득 송만갑 임방울 김동진 이화중선 박초월 박녹주 씨, 그 다음 계승자가 안숙선 씨다. 
 추석 앞 둔 노천극장 하늘에 등근 달 뜨고, 바람은 시원하다. 무대 위 주인공은 쥐면 한 줌 손에 쥐일듯 몸매 가날프다. 처음에는 회고쪼의 조용한 허스키로 
단가(短歌) 뽑다가, 갑자기 톤이 탁 변한다. 툭사발 깨지는듯, 저 아랫배 창자 뽑아올리는듯, 걸쭉한 '소리'가 화산에서 용암이 튀듯 귓전을 때린다. 그 순간 판소리 외길 50년 적공(積功)은 이런거다 싶다. 탁! 부채를 펼치는 손동작, 맵시있게 돌아서는 발동작, 허공에 던지는시선, 모두 명품이다. 

 전라도 남원의 기생 성춘향이 광한루에 그네 타러 나갔다가 사또의 아들 이몽룡 만난다. 그 다음에, '사랑가'가 나온다.
 '사랑 사랑 내사랑이야! 어허둥둥 니가 내사랑이야! 만첩청산 늙은 범이 살진 암캐를 물어다가 놓고서, 이는 빠져 먹지는 못허고, 어르르릉 어흥 어루는듯, 북해 흑용이 여의주 물고 채운(彩雲) 간에서 넘노난듯,
저리 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꾸나. 너는 죽어서 버들 유(柳)자가 되고, 나는 죽어서 꾀꼬리 앵(鶯)자가 되어, 유상앵비편편귀로다. 가지마다 놀거덜랑 니가 난 줄 알으려므나. 너는 죽어서 종로 인경 되고, 나는 죽어서 인경채 되야, 아침이면 이십팔수, 저녁이면 삼십삼천, 그저 뎅뎅 치거더면 니가 난 줄 알으려므나. 사랑이야 내사랑이로구나! 어허 둥둥 네가 내 사랑이야.'
 이 대목이 이도령이 춘향이한테 보낸, 시쳇말로 세레나데다. 네가 죽어서 버들이 되면 나는 죽어서 꾀꼬리 될터이니, 버들에 꾀꼬리 날아오면 난 줄 알아라. 저리 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 만첩청산 늙은 범이 살찐 암캐 물어다고 좋아서 어르는듯 하다.

  사랑타령 끝나자, 질펀한 춘사장면이 나온다.  
 '애! 춘향아 말 들어라. 밤이 매우 깊었으니 어서 벗고 잠을 자자.'
'도련님 먼저 벗으시오. 매사는 쥔이라고 하니 쥔 너 먼저 벗어라.' 도련님 거동 보소. 우르르르 달려들어 춘향의 가는 허리 예후리쳐 덤썩 안고 옷을 차차 벗길 적에, 저고리 벗기고, 바지 벗기고, 버선마져 뺀 연후에 덤쑥 안아 이불 속에다 훔쳐넣고, 도련님도 훨훨 벗고 둘이 끼고 누웠으니, 좋은 호(好)자가 절루 생각난다.'
  춘향이 이도령 두 사람 대화는 창자 한사람이 다 한다. 일종의 모노드라마다. 젊잖던 그 옛날 이런 음담패설은 웬일일까. 
판소리 유래가 원래 '광대의 소학지희(笑謔之戱)',나 '무가(巫歌)'라서 그렇다. 장원 급제하면 광대(廣大) 재인(才人)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 할 때 초대하던 것이 판소리다. 시골 장터에서 하던 마당극이 판소리다. 짚씨 낭인 입에서 입으로 구전된 이런 표현은, 남녀칠세부동석 하던 그 시절 안방마님이 얼굴 붉히면서, 은근히 마음 속 갈증을 대리만족 시킨 대목일 것이다.  
 '사랑' 후는 '이별'이다. 서울 가는 이도령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내 몰랐소 내 몰랐소 도련님 속 내 몰랐소. 도련님은 사대부요 춘향 나는 천인이요. 일시 춘흥을 못이기어 잠간 좌정 허였다가 버리난 것 옳다하고 나를 떼랴고 허옵신되, 속 모르는 이 계집은 늦게 오네, 더디 오네, 편지 없네, 손을 잡네, 목을 안고 얼굴을 대니, 짝사랑 외 즐그움에 오직 보기가 싫었겠소?

 독수공방 수절타가 노모 당고 당하오면, 초종 장례 뫼신 후에 소상강 맑은 물에 풍덩 빠져 죽을런지, 백운청산 유벽암자 삭발도승 되올런지, 소견대로 내 할텐디, 첩의 마음 모르시고 금불이요 석불이요? 도통하려는 학자신가? 천언만설 대답이 없으니 이게 어디 계집 대접이며 남자의 도리신가? ' 
 자고로 이별 원망않는 처자 없다. 이때 춘향의 강짜 도와주는 것이 고수의 장단이다. 퉁타당! 탕탕! 장고소리 빨라진다. '조오타!' 감탄사 여기저기서 터진다.
 판소리는 창자, 고수, 청중, 삼박자가 만드는, 이른바 참여예술이다. '사람 헌장 허것구만.' 청중석에서 누가 이런 감탄사 뱉아도 상관 없다. '어따 그 양반 목소리 한번 억세게 크다.' 또 누가 이런 토를 달아도 상관없다. 막걸리에 취한 청중이 왁짜지껄 참여해야 더 신나는 것이 판소리다.
 이별 다음은 시련이다. 시련의 백미(白眉)는 ‘쑥대머리’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 옥방(獄房)의 찬자리에 생각나는 것은 임 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이별 후에 일장서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 글 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이화일지춘대우(梨花一枝春待雨)에 내 눈물을 뿌렸으니, 밤비 내리는 문전 애끓는 소리 비만 와도 임의 생각. 가을비에 오동잎 질 때 잎만 떨어져도 님의 생각, 푸른 물 속 연꽃 따는 아가씨와 뽕 따는 여인네들도 날보다는 좋은 팔자, 옥문 밖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것나.'

  춘향이가 봉두난발로 옥중에서 부르는, 이 쑥대머리는 우리가 꼭 기억해둘 대목이다. 여기 춘향이의 탄식은 오필리아 탄식처럼 애절하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의 가장 유명한 대사처럼 우리가 꼭 알아둘 대사다.

 판소리 춘향가가 굽이굽이 흘러가는 달빛 아래 돗단배에 몸 싣고 들어야 제 맛 날 이유 여기 있다. 별빛 아래 들어야 좋을 이유 여기 있다. 전편에 한과 슬픔이 굽이치고 있다. 이때 한(恨)은 구례 산동마을 산수유처럼 붉게 익어 투두둑 땅바닥에 떨어져야 한다.
   '시련’ 끝나면, ‘재회’가 온다. ‘어사또 출두’로 시작된다.
 '어떤 패랭이 쓴 젊은 사람이 질청으로 뛰어오며 ‘어사또 출두요’ 외치자, 동헌이 들썩들썩, 사또는 사령을 불러 옥쇠 단속하고, 남원 성중이 떠는구나.
 각 읍 수령이 겁을 내어 탕건바람 버선발로 대숲으로 도망가고, 본관(本官)은 넋을 잃고 골방으로 들어가며, 역졸이 수령좌석을 뭉치로 쎄려부시는데, 금병(金甁) 수병(繡屛) 산수병과 대합 쟁반 술그릇 왱그렁 쟁그렁 깨어지고, 거문고 가야금 생황 세피리 젓대 북 장고가 산산히 깨어진다. 

 운봉 영감은 술을 먹다가 느닷없는 ‘출두야!’ 소리에 상 위 수박덩이를 도장 주머니인줄 알고 번쩍 들고 도망가고, 곡성 원은 겁결에 기생방으로 들어가 기생 속곳이 자기 도복(道服)인줄 알고 훌렁 뒤집어쓰니, 그 바지가랑이 사이로 곡성 원님 대그빡이 쑥 나왔지. 이 영감 한참 도망허다 봉께 말 한 마리 있는지라, 겁결에 말을 거꾸로 타고는 '아이고 이 말 좀 보아라. 운봉으로 안가고 남원으로 부두둥 부두둥 가니, 암행어사가 축지법도 하나부다.' 하고, 운봉 하인 여짜오되, '말을 거꾸로 탔사오니 바로 타시오.' 
 해학과 코믹 가득 수령방백 당황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대목은 시련을 재회로 카타르시스 시키는 대목이다. 골 깊으면 뫼 높다고, 청중들은 옥중 춘향이의 고통과 어사또 출두의 극적인 대비로 마음이 확 정화된다.

 이런 마지막 해피엔딩 기법은 우리 선인들이 가장 좋아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춘향전은 <사랑> <이별> <시련> <재회> 네 부분, 기(起) 승(乘) 전(轉) 결(結)이 완벽하다. 소설에서의 극적반전(劇的反轉) 완벽히 구사되었다. 참으로 고전의 원형이구나 싶다. 

 극 끝나자 관중은 무대 위로 한없이 뜨거운 박수 보냈다. 안숙선은 몇번인가 무대로 나와서 절하고 들어간다.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칼라스가 생각났다. 기립박수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수런수런 청중들은 돌아가고, 그들 머리 위에는, 중추(仲秋)의 달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김창현 약력

청다문학회  회장 

남강문우회 부회장

저서  <재미있는 고전여행(김영사)> <한잎 조각배에 실은 것은(소소리)>

       <작은 열쇄가 큰 문을 연다(아남그룹 창업주 자서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