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김창현
그러나 나는 봄을 오케스트라 혹은 가면무도회로 생각해보곤 한다.
꽃들은 저마다 고운 의상을 걸치고 나온다. 사육제의 밤 가면무도회에 초대 받은 아가씨들 같다. 구례 산동마을 산수유꽃은 노란 옷으로 온동네 돌담을 물들이며 서성이고, 섬진강 다압마을 매화는 얼음같은 살결에 진한 향수를 뿌리고 나서고, 화개동천 십리 벚꽃은 아예 천지를 꽃잎으로 덮어버린다.
산너머 남촌에는 ㄴ가 살길래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같이
메림꽃 필무렵
모란ㅁ이 피기가지는
박목월의 산도화
김소월의 산유화
남녁 봄아가씨들이 이렇게 먼저 봄의 팡파레를 울리면,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의상들이 보인다. 얼굴들이 역의;
치
화려한 장관도 끝났다.뜰에 하얀 딸기꽃 피면 봄이 반쯤 지나간 것이다.간 봄은 서럽고 올 봄은 안타깝다.
뜰에 부드러운 오가피 새싹이 한참이다.술 담그라며 오색온천에서 설악산 가시오가피 열매를 팔길래 가져와 싹 틔운지 5년 되었다.한 줌 뜯어,바나나 한 개,우유 한 잔과 믹서에 갈아서 마시니 쌉스럼한 향기가 좋다.나무인삼으로 불리는 오가피를 이렇게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파트 일 층 사는 덕이다.
텃밭에는 작년에 심은 마늘이 푸르고, 저홀로 찾아와 꽃이 핀 보랏빛 제비꽃 옆에 고추 모종 잘 자란다.
하얀 백목련은 가슴 아프도록 뚝뚝 하염없이 지고말았으나,그 싱싱한 보라빛 꽃술에 볼이라도 비비고싶은 자목련은 지금 한창이다.앵두꽃 바람에 흩어진 서운함을 새로 피는 연분홍 모과꽃이 달래준다.꽃이 차례로 피고지고 봄이 지나가고 있다.천지가 심포니 연주처럼 일사분란하게 연주된다.꽃은 여배우 같다.저마다 화려한 의상 입고 차례로 무대에 등장했다가 사라진다.새들은 노래하고 벌 나비는 춤을 춘다.천지는 연출자,사람은 관객인지 모른다.
나무는 시인보다 섬세한 시를 쓰고,꽃은 화가보다 화려한 빛깔을 그린다.그래 나는 이 天衣無縫 화가들 시인들과 뜰에서 은밀한 친교의 시간을 많이 보낸다.사람은 목단의 진홍빛 꽃잎과 화사한 향기를 제대로 그릴 수 없다.나는 우리집 목단이 작년에 인간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화려한 꽃빛과 향기로 일주일간 나를 황홀경에 빠트린 것을 기억한다.목단은 천재 화가이다.
초록색 가지 끝에 맺히는 은방울꽃의 순결한 흰빛,홍자색 금새우난초의 고결한 품위,은은한 푸른 작은 유리등 같은 꽃 총총히 단 현호색,독일 붓꽃의 오만에 가까울 정도로 고귀한 청자색 푸른 빛에 나는 항상 깊은 감동을 느낀다.이 아름다운 빛들은 직접 유화를 그려본 사람 아니고서는,인간 손으로 그 신비한 칼라의 재현이 불가함을 모를 것이다.신비한 빛을 그리는 화가들이 철 따라 내 뜰에 꽃을 피움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나는 고대광실은 사양하지만,뜰이 넓은 집은 항시 동경한다.가능하면 섬처럼 고립된 영토에서 한 여인과 오직 꽃과 나무만 사랑하며 살고 싶다.
현호색꽃
나는 사람 경탄시키는 보랏빛 오동꽃의 기막힌 향을 향수보다 좋아한다.찔레꽃 하얀 향기,장미꽃 농염의 향기에 늘상 반하고,야래향 천리향 만리향을 화분에 정성드려 키운다.그 나무들을 세련된 향수 뿌린 개성있고 섬세한 여인처럼 사랑한다.오렌지 향 바람에 날리는 한낮,이슬에 장미 향 풍기는 아침,夜來香 향기 온 집안 가득한 밤이면,나는 이들 향기 풍기는 나무 옆에 정겨운 연인마냥 닥아간다.
작년 초여름은 뜰의 살구를 주워 술 담고 향기로운 살구잼 만들어 친지에게 노놔주었다.추석에 배가 노랗게 익었었고,낙목한천까지 노란 모과와 붉은 홍시의 정취를 만끽하였다.정말이지 농익은 노란 살구 향과 붉은 대봉시 맛은 잊을 수 없다.봄엔 아침마다 상치 뜯어왔고,여름엔 풋고추와 도마도 오이 따고,가을엔 고구마 배추 무우 수확했다.땅은 참으로 은혜롭고 불가사의하다.땅은 햇볕과 물을 만나 감미롭고 향기로운 과일을 만든다.땅은 수많은 꽃과 채소와 과일을 품에서 내놓았다.땅은 신들의 나라,유토피아를 선뵈이는지 모른다.
올해도 봄이 지나가고 있다.오월이면 딸기가 빨갛게 익을 것이다.딸기가 기특하다.금년부터 나는 태고의 동굴에 살던 원시인처럼 되려한다.'神市記'에 살던 사람처럼 땅의 神을 믿고,高矢氏 神農氏에게 기도하고,고수례도 지키고 싶다.(09년4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이 노래는 1954년 백설희의 데뷰곡 <봄날은 간다> 첫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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