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세계Ⅰ-인물,산수화
[조선 화가 1668 - 1715]
윤두서 자화상 국보 240호 전남 해남군 조선 숙종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은 화폭 전체에 얼굴만이 그려지고 몸은 생략된 형태로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허목의『미수기언』이나 김시습의『매월당집』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8세기에 들어서는 이강좌, 강세황의 작품들이 전해온다. 이런 자화상 가운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표현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 (一毫不似便是他人)
라는 정통 초상화론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안면의 윤곽선과 수염의 필선에 화력(畵力)을 집중시켰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고, 그 뒤에는 선비다운 기개가 충만 되어 있다. 고개지가 인체 중에 사람의 정신이 깃들이어 있는 곳이 눈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윤두서상〉은 사진 카메라의 눈만 가지고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심정과 내재적인 정신을 외모와 함께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의 화면 구도는 매우 간소하다.
보통의 초상화가 전신(全身)을 그리거나 상반신을 그리고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얼굴만 강조하여 그렸다. 어깨나 목, 또는 웃옷의 묘사 같은 것은 물론 없으며, 배경은 그냥 여백인 채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간소하고 화면에 빈 곳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화면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빈 곳이 그 배후를 충분한 직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경우에는 그 빈 곳은 결코 오래 빈 곳으로 남아 있지 않고 곧 직관에 의하여 채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화면의 빈 곳은 빈 곳이 아니라 무한한 생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자화상〉은 초상화의 묘처인 골법화(骨法化)를 성공적으로 달성해 낸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인물은 정면상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좌우대칭을 이룬다. 얼굴은 단순한 타원형이며 이목구비가 매우 단정하다.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더하여 새까만 탕건 끝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휘어져 있어 머리 전체의 볼륨을 요령있게 시사한다.
그런데 극사실로 그려진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귀가 없다. 목과 상체도 없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는 화면의 상반부로 치켜 올라갔다. 덩달아 탕건의 윗부분이 잘라져 나갔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가 없는 사실적인 얼굴 표현뿐인데 그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초상이 무섭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1995년 <자화상>의 옛 사진이 발견 - 1937년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집하고 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사료집진속』에는 몸부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인상도 어질어 보이는 침착하고 단아한 분위기 자화상은 미완성작임이 확인되었다.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으로 크기는 가로 20.5㎝, 세로 38.5㎝이다.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이다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은 화폭 전체에 얼굴만이 그려지고 몸은 생략된 형태로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허목의『미수기언』이나 김시습의『매월당집』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8세기에 들어서는 이강좌, 강세황의 작품들이 전해온다. 이런 자화상 가운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표현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며 1987년 12월 26일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었다.지본담채(紙本淡彩)이며,가로 20.5㎝, 세로 38.5㎝이다. 10년(숙종 36) 제작되었고,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蓮洞里)에 거주하는 후손 윤형식(고산 윤선도전시관)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의 3재로 불리던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으로,생동감 넘치는 필력을 보여주는 명품이다. 조선시대에는 자화상이 거의 없으며,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이 윤두서의 자화상 외에 강세황(姜世晃)의 자화상 소품이 있으나,세밀한 묘사력이나 깊이 면에서 이 작품에 미치지 못한다.
눈은 마치 거울의 자신을 바라보듯 정면을 보고 있으며,두툼한 입술은 꽉 다물어 강한 인상을 준다. 볼은 약간 살진 편이고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몸체는 없이 얼굴만 그려진 것처럼 보이고, 머리에 쓴 탕건도 윗부분은 생략되었으며, 여러 부분이 미비한 듯하여 미완성의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그동안 윤두서의 자화상은 얼굴만 그려진 그림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는 가슴부분의 옷깃과 옷주름까지 선명하게 표현된 그림이었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사료집진속 朝鮮史料集眞續》제3집에 윤두서 자화상의 옛사진이 수록되어 있는데,이 사진에는 몸 부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원래 상반신의 윤곽선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었으나 종이에 달라붙는 점착력이 약해서 지워져 버린 것이다.
한편,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현미경과 x-선 촬영 및 형광분석법,적외선 등을 통한 과학적 분석을 실시한 결과,미완성작이 아니라 완성된 작품이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만큼 퇴화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생략된 것으로 여겨왔던 귀는 붉은 선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었고, 옷깃과 옷주름도 분명하게 드러났으며,생략되기는커녕 오히려 채색까지 된 사실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자신을 스스로 정시(正視)하는 자세로 오랜 준비 끝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공재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동양적인 철학의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표현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윤두서 자화상의 비밀 한 겹 벗었다
몸체 없이 허공에 둥둥 뜬 호랑이 수염 선비- X선 자외선 쬐자 귀 옷주름 스르륵 ~
그림 뒷면 못봐 몸체 없어진 이유 여전히 수수께끼
그림 중에 얼굴만 달랑 떠 있는 이 초상화, 한 번 보면 잊기 어렵다. 보는 이를 꿰뚫는 눈빛에 날카로운 콧날이며 일어선 수염이 호랑이 상이다. 입을 열면 강직한 바른 소리가 쩌렁쩌렁 세상을 울릴듯하다. 국보 240호 '윤두서 자화상'이다.
조선시대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이 한 점으로 한국 초상화 역사의 중심에 섰다. 공재는 당쟁이 휩쓴 사대부 사회를 버리고 고향인 전남 해남으로 내려가 평생 학문과 예술에 묻혀 대쪽같은 삶을 보낸 선비. 스스로 그렸다 해도 외형 묘사와 내면 표출이 이렇듯 잘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싶다.
4명의 연구관은 지난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특별전에 나온 '윤두서 자화상'을 몇 가지 과학 조사로 분석했다. 윤씨 종가가 보관해온 '윤두서 자화상'이 현미경, X선 투과 촬영, 적외선, X선 형광분석법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얼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왜소하지만 붉은 선으로 분명히 표현됐다. 몸체도 적외선 촬영을 통하자 육안으로 보기 힘든 몸체의 옷깃과 옷 주름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선명한 채색 사실을 알아낸 점도 큰 성과다.
윤두서(尹斗緖)
보물 제 1488호 심득경초상(沈得經 肖像) 160.3 x 87.7 1710
윤두서의 절친한 벗으로 우정을 나누었던 심득경이라는 벗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심득경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두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심득경이 죽은지 석달만에 심득경의 초상화를 완성하였다. 그 초상화를 심득경의 집에 보내어 벽에 걸었더니 생전모습과 하나도 틀리지 않게 그려서 마치 죽은 사람이 되살아 온 것 같아 온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17C 후반 57.5x 37cm
속세를 떠난 고승의 표정에서 고승의 기골이 우러나고 있다. 가사 주름과 자락, 단장등에는 특히 그 원숙한 용묵 용필의 솜씨가 주저 없이 발휘되고 있다.
미인도(美人圖·117×49cm). 윤두서(尹斗緖, 1668∼1715)
화면을 가득 채운 요염스런 여인이 살포시 비껴 틀어 서 있는 모습으로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한지에 그린 수묵 담채화이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 은행 알 같은 두 눈, 앵두처럼 빨갛고 작은 입술, 동그스레한 가련한 얼굴, 배추 포기처럼 부풀은 치마, 모두가 고혹적이면서도 결코 천박스럽지 않다.
두 손은 들어 치렁치렁한 머리를 떠받치듯 매만지는 맵시가 마치 가슴에 불타오르는 열정을 살며시 내비치는 듯 하다. 또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간결한 선과 정확하고도 사실적인 조형에서 조선 여인의 단아한 기품이 그대로 전해진다.
자화상은 전통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상반신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 파격적인 충격을 던져 주는데, 수염의 섬세함이 매우 돋보이는 걸작이다. 1994년 봄, 이 그림은 미국 아써앰서클러갤러리(Arthur M.Sackler Gallery)에서 열린 『18세기 한국미술-우아함과 소박의 미』에 출품되어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 나타나는 미인, 즉 기생은 대부분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교태(嬌態)스럽지가 않다. 조선 시대 기생들은 용모도 뛰어나지만 사대부와 문장가를 상대하면서 음률과 시문에도 밝았다. 특히 한시나 시조도 잘 지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류 시인으로 대접받는다. 조선의 3대 시기(詩妓)는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성천(成川)의 김부용(金芙蓉), 그리고 부안(扶安)의 이매창(李梅窓)이다. 모두 시 잘 짓고 가무에 능한 당대의 문인이었으며 또 음악가며 춤꾼이었다.
전남 해남에 있는 윤두서 일가의 기념관에서 미인도를 훔쳐낸 자는 서산 출신의 땡중인 임모(任某)라는 자였다. 문화재가 돈이 된다고 하자, 그는 큰 물건을 찾아서 기념관 안으로 잠입했다. 보통의 기념관은 복제품이 전시되지만 그곳만은 진품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기념관 안에는 명문가의 유품과 눈이 번쩍 뜨이는 문화재가 즐비했다.
그는 족자에서 미인도 부분만 예리하게 오려 가지고는 도망쳤다. 이 미인도는 신윤복의 미인도(간송 미술관 소장)와 쌍벽을 이루는 그림이다. 다음 날, 기념관의 문을 연 후손은 놀라움에 소리를 지르며 신고를 했다. 곧 경찰과 검찰이 투입되고, 혹시나 해외로 빼돌릴 것이 염려되어 문화재 당국은 항만과 공항까지 검문 검색을 강화했다.
송하선인도(松下仙人圖)
윤두서 은일도 고려대 소장
공재의 화풍은 아들인 낙서 윤덕희(駱西 尹德熙 1685-1766)와 손자인 군열 윤용(君悅 尹熔 1708-1740)에게 이어져 남도화단을 대표하는 가풍이 되었다. 공재의 작품으로는 유명한 자화상을 비롯하여 노승도(老僧圖), 마상인물도(馬上人物圖), 낙마도(落馬圖), 선차도(旋車圖), 채애도(採艾圖), 패하백로도(敗荷白鷺圖), 팔준도(八駿圖), 기마치주도(騎馬馳走圖), 출렵도(出獵圖), 우마도(牛馬圖), 운용도(雲龍圖), 백마도(白馬圖), 은일도(隱逸圖) 등이 있다.
이 은일도는 곧 무너질듯한 절벽 아래에 서서 먼 곳을 한가롭게 보고 있는 고사(高士)를 그린 그림이다. 부벽준법(斧劈준法)으로 한 쪽만 그린 바위절벽, 굴철상(屈鐵狀)으로 그린 나무가지와 풀넝쿨, 철선묘(鐵線描)의 옷 등은 말할 것 없고, 변각소경(邊角小景)에 인물을 그린 것 등이 절파화풍임을 알 수 있다.
윤두서의 하일오수도(夏日午睡圖)
짚신삼는 노인이 백성을 그린 것이라면 이것은 양반의 모습을 그린 양반풍속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자화상에 등장하는 윤두서의 얼굴과 비슷해서 정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숨어있는 자신의 처지를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윤두서(尹斗緖)의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비단 바탕에 수묵, 18.5×19 cm, 윤영선 소장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圖)
공재 윤두서 필 강안처사도(恭齋尹斗緖筆江岸處士圖) 견본담채 22.6 x 25cm 개인소장
윤두서, 「바위에 기대 달을 보다」비단에 수묵, 17세기, 24.x21.5cm, 간송미술관
윤두서. 수하한일도. 지본담채, 26.6 x 16.2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윤두서(1668~1715)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정약용의 외증조가 된다. 그림으로 일세를 울렸는데, 매우 다양한 방면에 재능이 많았다고 한다. 다만 그의 그림은 안견, 김시 조선최대의 화가들과 비견될 정도로 매우 인기가 많았고 뛰어났다. 현존하는 작품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자화상, 심득경 초상같은 명작 초상을 남기고 있어 초상에 매우 능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유전되는 산수작품들은 화보풍의 다소 딱딱한 그림이 많아서, 인물 그림으로는 좋은 그림이 많은 것에 비교된다.
공재는 48까지 살았는데, 그의 죽음이 이르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의 그림이 완숙되기 이전에 그의 명이 다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가 겸재처럼 여든을 넘게 살았다면 아마도 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남았을텐데 말이다. 아쉬울 따름이다.
이 작품은 처음으로 풍속적 소재가 등장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자리깔개나, 품격있는 주변묘사가 다소 언발란스하긴 하지만, 조선에서 최초로 속화적 소재가 등장하는 그림이니 그 의의가 가볍지 않다. 배경은 보다시피 가을이다. 추수가 다 끝난 늦가을 쯤으로 나무는 옷을 다 벗고 있고 새는 멀리날아가는 모습이 꽤 쓸쓸하고 고느적하다. 아마도 농부일 이사람은, 일을 마친 한적함을 쓸쓸한 가을 풍경 속에서 보내고 있다.
손으로 더듬어 물고기를잡다 수탐포어(手探捕魚) 견본담채 25.5 x 27cm
무송관수도(撫松觀手圖) 19 x 18.2 cm / 윤두서 - 남종화 |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
수하인물도(樹下人物圖)
암면묵객도 (岩面墨客圖) - 평암각석(平岩刻石)
윤두서_강안모루(江岸茅樓圖)
진단타려도 낙려 윤두서 견본채색 111.0 × 68.9cm 국립중앙박물관
낙려도(落驢圖) 세부
깨끗한 길, 상서러운 안개가 낀 아침에 복건을 쓴 점잖은 선비가 갑자기 나귀 위에서 미끄러져 그만 고꾸라졌다. 그러자 옆에서 따르던 동자가 기겁을 하여 책봇짐을 내던진 채 주인을 붙들려고 내닫고, 반대편 길을 향해 가던 젊은 나그네는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동자만 혼자 허겁지겁할 뿐 정작 낙상을 코앞에 둔 당사자 얼굴에는 상황에 걸맞지 않게 함박웃음이 만발해 있고, 이들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표정에도 아직 얼굴 가득 허뭇함이 어려 있는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풍채 좋은 선비는 호를 희이선생(希夷)이라 하는 진단이다. 진단은 당나라 말에서 5대 10국의 혼란을 거쳐 송나라 초기까지 산 사람이다. 5대 10국 시대는 중국 역사상 극도의 혼란기로서 황제는 거의가 군인인 절도사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정치는 문란하고 백성의 고초는 말이 아니었다.
진단은 이런 난세에 일찍이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십 년간 무당산에서 복식호흡과 단식 등 신선술을 연마하여 신선의 경지에 오른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희이(希夷)라는 호는 송나라 태종이 하사한 것인데, '심오한 도리를 깨친 분'이란 뜻이다.
노자 『도덕경(道德經)』 제 14장의 "그것은 보고자 해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夷라고 한다. 그것은 듣고자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希라고 한다. 그것은 잡고자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미(微)라고 한다. 이 세가지는 말로 따질 수 없으니, 그래서 통틀어 도라고 한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도사, 은사였지만 동시에 뛰어난 시인이요, 학자였다. 주역을 깊이 공부한 그의 우주관은 천지만물이 일체라는 것과 우주는 기(氣)를 주로 하지만 이(理)가 여기에 함께 갖추어져 있다는 내용으로서 이후 성리학 이기설(理氣說)의 선구를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도교와 유교를 아루른 것으로서 성리학 초창기의 선구적 위치에 있었으며 이후 사상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하락이수(河洛理數)』가 있다.
관련 고사
진단은 여러 왕조가 번갈아 일어서고 새 황제가 등극할 적마다 여러 날 찌푸린 얼굴을 짓곤 했다고 한다. 그것은 저들이 천하를 길이 안정시킬 '참된 군주'가 아니라 잠시 힘으로 권좌를 차지할 '거짓 군주'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흰 나귀를 타고 지금의 하남성 개봉(송의 수도)으로 가던 길에 행인에게서 조광윤(趙匡胤)이란 인물이 송나라를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부터 조광윤을 진정한 황제의 제목으로 생각해왔던 선생은 그 얘기를 듣고 박장대소하며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만 안장에서 미끄러졌는데, 그 다급한 와중에서도 "천하는 이제 안정되었다(天下自此定矣)"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옛말에 어진 이는 세상을 먼저 근심하고 자신의 일은 뒤로 한다고 했거니와, 그렇게 올곧았던 선비 정신이 경황없는 와중에 드러났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이선생이 나귀에서 떨어지면서도 함박 웃음을 지우지 못했던 까닭이며, 송나라가 건국된 960년 정월 초사흘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이른 봄날에 생긴 상서로운 조짐이었다.
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사상 명군의 한 사람이다. 낙양의 진영에서 태어나 진영 속에서 자라 절도사가 되었다. 당시 후주의 세종이 죽고 공제가 일곱 살로 즉위했는데 북쪽 요나라가 침공하여 조광윤은 대장으로 개봉성 밖 진교역에서 야영을 하였다.
그런데 군인들이 이 혼란기에 어린 황제를 중심으로는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 하여 술해 취해 쓰러진 조광윤에게 황포를 입히고 황제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송나라는 건국 과정에서 가장 희생을 적게 치른 나라이다.
조광윤은 왕이 되었어도 과격한 조치를 싫어하고 문관 중심의 정치로 바꾸었는데 그가 남긴 유훈 중에 사대부 언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절대로 죽이지는 말라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송에서는 신법당과 구법당의 정치 싸움에 격화되었을 때도 좌천, 유배는 당할지언정 죽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윤두서의 뜻
윤두서는 진사 시험엔 합격하였으나 당시 남인에게 불리한 붕당정치의 국면을 맞아 일가와 친구들의 불행만 익히 지켜보며, 학문과 시서화로만 생계를 보내다가 1713년 봄에 죽었다.
그는 당파색에 대해서도 '홀로 마음에 맞고 안 맞음을 두지 않았으며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을 일찍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형이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가서 죽었고 큰형과 자신도 모함으로 고생을 치뤘으며 절친한 벗 이잠은 흉서를 올렸다 하여 맞아 죽은 일이 있었다.
붕당 정치의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정치적 불행을 겪은 윤두서가 "사대부의 언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절대로 죽이지는 말라"는 유언을 남겼던 송 태조를 기리는 그림인 <진단타려도>를 통해 숙종이 송 태조처럼 선정을 베풀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의미는 그의 호에서도 나타나는데 공재(恭齋)라는 호 속에 "임금이 어려워해도 옳은 일이라면 힘써 행하도록 질책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군주 앞에서 좋은 얼굴을 하고 비위나 잘 맞추는 것은 공순함이 아니다. 군주 본연의 힘든 임무를 늘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것, 그것이 올곧은 신하의 참된 공순함인 것이다.
윤두서는 고사 속의 인물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면서 넓은 길이 한 중간에서 꺾어져 나가도록 하고 그 끝을 아득하게 여백 처리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오래도록 온 천하가 평화로우리라는 희망을 암시하였다. 또 이른 봄 숲의 위쪽을 아지랑이가 낀 뜻 바림해서 상서로운 분위기를 살린 것도 주제를 뒷받침하는 뛰어난 분위기 표출 방식이라 하겠다.
채색도 주제와 걸맞게 소청록법을 써서 산뜻하기 그지없다. 소청록이란 수묵담채를 바탕으로 그린 위에 석청과 석록 등 광물성 안료를 부분적으로 엷게 더한 것이니, 화폭은 화사하면서도 고상함이 돋보인다.
바위 주름가에 보이는 태점도 약간 넓은 목점 가운데 다시 작은 석록 색점을 더하여 마치 보석이 반짝이는 듯한 효과를 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나귀에서 떨어져도 그저 기쁠 뿐이었던 희이선생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배려라고 하겠다.
숙종의 제시(題詩)
희이선생의 고사는 한 나라의 개국과 관계되는 상서로운 조짐을 묘사한 것이며 아울러 참선비의 고매한 정신을 보여주는 속 깊은 내용이다.
또 희이선생이 늘 주장했던 것이 군주된 이는 금단술이니 신선술이니 하는 개인적인 일에 신경쓸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 것에만 힘써야 한다는 내용이었던 만큼 숙종이 그림을 감상하고 마음에 느껴 손수 시를 짓고 쓴 것도 당연한 일이다.
希夷先生何事忽鞍徙 희이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非醉非眠別有喜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니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夾馬徵祥眞主出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從今天下可無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 걱정 없으리라
歲在乙未伸秋上浣題 을미년 8월 상순에 쓰다
윤두서가 살았던 을미년 1715년 숙종 재위 41년째 되는 때이다. 윤두서는 이해 11월 26일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그림은 국왕이 어람했던 궁중의 보물로 이 시는 숙종의 시이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솔 에서
마상인물도(馬上人物圖)
[출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세계Ⅰ- 인물,산수화 |작성자 ohyh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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