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 서양화

윤두수 작품세계 1

김현거사 2012. 12. 6. 07:43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작품세계Ⅰ-인물,산수화

 

[조선 화가 1668 - 1715] 

 

 


윤두서 자화상 국보 240호 전남 해남군 조선 숙종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으로 크기는 가로 20.5㎝, 세로 38.5㎝이다.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이다.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은 화폭 전체에 얼굴만이 그려지고 몸은 생략된 형태로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허목의『미수기언』이나 김시습의『매월당집』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8세기에 들어서는 이강좌, 강세황의 작품들이 전해온다. 이런 자화상 가운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표현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터럭 한 올이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 (一毫不似便是他人)
라는 정통 초상화론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안면의 윤곽선과 수염의 필선에 화력(畵力)을 집중시켰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힘이 있고, 그 뒤에는 선비다운 기개가 충만 되어 있다. 고개지가 인체 중에 사람의 정신이 깃들이어 있는 곳이 눈이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윤두서상〉은 사진 카메라의 눈만 가지고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심정과 내재적인 정신을 외모와 함께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화상〉의 화면 구도는 매우 간소하다.

보통의 초상화가 전신(全身)을 그리거나 상반신을 그리고 있는데 반해, 여기서는 얼굴만 강조하여 그렸다. 어깨나 목, 또는 웃옷의 묘사 같은 것은 물론 없으며, 배경은 그냥 여백인 채로 남겨져 있다.

그러나 간소하고 화면에 빈 곳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화면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빈 곳이 그 배후를 충분한 직관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는 경우에는 그 빈 곳은 결코 오래 빈 곳으로 남아 있지 않고 곧 직관에 의하여 채워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화면의 빈 곳은 빈 곳이 아니라 무한한 생각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자화상〉은 초상화의 묘처인 골법화(骨法化)를 성공적으로 달성해 낸 초상화라 할 수 있다. 인물은 정면상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좌우대칭을 이룬다. 얼굴은 단순한 타원형이며 이목구비가 매우 단정하다. 얼굴 전체에서 바깥으로 뻗어난 수염이 표정을 화면 위로 떠오르게 한다. 더하여 새까만 탕건 끝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휘어져 있어 머리 전체의 볼륨을 요령있게 시사한다.

그런데 극사실로 그려진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놀랍게도 귀가 없다. 목과 상체도 없다. 마치 두 줄기 긴 수염만이 기둥인 양 양쪽에서 머리를 떠받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는 화면의 상반부로 치켜 올라갔다. 덩달아 탕건의 윗부분이 잘라져 나갔다. 눈에 가득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가 없는 사실적인 얼굴 표현뿐인데 그 시선은 정면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이러한 초상이 무섭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1995년 <자화상>의 옛 사진이 발견 - 1937년 조선사편수회에서 편집하고 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사료집진속』에는 몸부분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고, 인상도 어질어 보이는 침착하고 단아한 분위기 자화상은 미완성작임이 확인되었다.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으로 크기는 가로 20.5㎝, 세로 38.5㎝이다. 윤두서(1668∼1715)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정약용의 외증조로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이다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이 그림은 화폭 전체에 얼굴만이 그려지고 몸은 생략된 형태로 시선은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하다.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허목의『미수기언』이나 김시습의『매월당집』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8세기에 들어서는 이강좌, 강세황의 작품들이 전해온다. 이런 자화상 가운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표현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우리나라 초상화 가운데 최고의 걸작으로 일컬어지며 1987년 12월 26일 국보 제240호로 지정되었다.지본담채()이며,가로 20.5㎝, 세로 38.5㎝이다. 10년(숙종 36) 제작되었고, 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에 거주하는 후손 윤형식(고산 윤선도전시관)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의 3재로 불리던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으로,생동감 넘치는 필력을 보여주는 명품이다. 조선시대에는 자화상이 거의 없으며,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이 윤두서의 자화상 외에 강세황()의 자화상 소품이 있으나,세밀한 묘사력이나 깊이 면에서 이 작품에 미치지 못한다.

 

눈은 마치 거울의 자신을 바라보듯 정면을 보고 있으며,두툼한 입술은 꽉 다물어 강한 인상을 준다. 볼은 약간 살진 편이고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세밀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몸체는 없이 얼굴만 그려진 것처럼 보이고, 머리에 쓴 탕건도 윗부분은 생략되었으며, 여러 부분이 미비한 듯하여 미완성의 작품으로 보이기도 한다.그동안 윤두서의 자화상은 얼굴만 그려진 그림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는 가슴부분의 옷깃과 옷주름까지 선명하게 표현된 그림이었다.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조선사료집진속 》제3집에 윤두서 자화상의 옛사진이 수록되어 있는데,이 사진에는 몸 부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원래 상반신의 윤곽선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었으나 종이에 달라붙는 점착력이 약해서 지워져 버린 것이다.

 

한편,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이 현미경과 x-선 촬영 및 형광분석법,적외선 등을 통한 과학적 분석을 실시한 결과,미완성작이 아니라 완성된 작품이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만큼 퇴화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생략된 것으로 여겨왔던 귀는 붉은 선으로 분명하게 표현되었고, 옷깃과 옷주름도 분명하게 드러났으며,생략되기는커녕 오히려 채색까지 된 사실을 확인하는 성과를 거두었.

 

자신을 스스로 정시()하는 자세로 오랜 준비 끝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공재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동양적인 철학의 아름다움이 서려 있다.표현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

 

 

윤두서 자화상의 비밀 한 겹 벗었다

몸체 없이 허공에 둥둥 뜬 호랑이 수염 선비- X선 자외선 쬐자 귀 옷주름 스르륵 ~

그림 뒷면 못봐 몸체 없어진 이유 여전히 수수께끼

 

그림 중에 얼굴만 달랑 떠 있는 이 초상화, 한 번 보면 잊기 어렵다. 보는 이를 꿰뚫는 눈빛에 날카로운 콧날이며 일어선 수염이 호랑이 상이다. 입을 열면 강직한 바른 소리가 쩌렁쩌렁 세상을 울릴듯하다. 국보 240호 '윤두서 자화상'이다.

 

조선시대 선비화가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는 이 한 점으로 한국 초상화 역사의 중심에 섰다. 공재는 당쟁이 휩쓴 사대부 사회를 버리고 고향인 전남 해남으로 내려가 평생 학문과 예술에 묻혀 대쪽같은 삶을 보낸 선비. 스스로 그렸다 해도 외형 묘사와 내면 표출이 이렇듯 잘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싶다.


 




걸작이라도 의문은 남는다. 공재는 왜 몸뚱이를 일절 생략했을까. 귀를 없앤 까닭은 무엇일까. 혹시 미완성이었을까. 한국미술사에서 일종의 수수께끼로 내려오던 '윤두서 자화상'의 비밀이 일부 풀렸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의 이수미 학예연구관과 유물관리부 보존과학실팀(천주현 서화보존처리 담당, 유혜선 문화재분석 담당, 박학수 금속보존처리 담당)의 학제간 협력연구가 올린 성과다.

 

4명의 연구관은 지난해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특별전에 나온 '윤두서 자화상'을 몇 가지 과학 조사로 분석했다. 윤씨 종가가 보관해온 '윤두서 자화상'이 현미경, X선 투과 촬영, 적외선, X선 형광분석법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결과는 우수한 완성품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보존 과정에서 사라진 부문이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세밀한 표현 기법이 화면 속에 숨어 있었다. 생략한 것으로 짐작했던 귀는 X선 조사와 X선 형광분석기를 이용한 안료 분석을 해보니 명확하게 그려져 있었다.

 

얼굴의 다른 부분에 비해 왜소하지만 붉은 선으로 분명히 표현됐다. 몸체도 적외선 촬영을 통하자 육안으로 보기 힘든 몸체의 옷깃과 옷 주름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선명한 채색 사실을 알아낸 점도 큰 성과다.

이번 조사에서 아쉬운 점은 액자로 배접한 표구 상태라서 그림의 뒷면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몸체가 사라진 까닭에 대해 오주석, 이태호 교수 등 몇몇 미술사학자가 내세운 가설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수미 학예연구관은 "앞으로 배접지를 떼어볼 수 있는 자연스런 계기가 생긴다면 훨씬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재숙 기자 중앙일보 2006. 8.10

 

윤두서(尹斗緖)
1668(현종 9)∼1715(숙종 41).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효언(孝彦), 호는 공재(恭齋).
정약용(丁若鏞)의 외증조이자 윤선도(尹善道)의 증손이다. 장남인 덕희(德熙)와 손자인 용($용02)도 화업(畵業)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정을 이루었다. 정선(鄭歚)·심사정(沈師正)과 더불어 조선 후기의 삼재(三齋)로 일컬어졌다.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이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으며, 1712년 이후 만년에는 해남 연동(蓮洞)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죽은 뒤 1774년(영조 50)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의 변환기에 활동한 그는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산수화를 비롯해서 회화작품은 대체로 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이 강한 화풍을 지녔다. 그의 말그림과 인물화는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으로 정확한 묘사를 보여주며 해남에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 〈자화상 自畵像〉이 대표작으로 지목된다.


해남의 종가에는 〈자화상〉 외에도 그의 유묵과 서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유작들은 보물 제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가소장 유작들 가운데에는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旋車圖〉와 나물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 採艾圖〉 등 풍속화가 포함되어 주목된다. 이는 김홍도(金弘道) 등에 의하여 유행하는 18세기 중·후반의 풍속화를 예시하여준 것으로, 아들 덕희가 쓴 행장에도 나타나듯이 그의 실학적 태도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실학적 학문에 대한 취향은 그가 남긴 《동국여지도 東國輿地圖》나 일본지도(日本地圖),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그리고 이잠(李潛)·이서(李漵) 등 이익(李瀷)형제들과의 교분이 잘 말하여준다.


또한, 그의 유품에는 중국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의 수용에 중요한 지침서인 《고씨역대명화보 顧氏歷代名畵譜》도 끼어 있어서 그가 남종화풍과 접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 종가 소장의 화첩에는 남종화풍의 산수화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중국적이거나 전통성이 강하지만 18세기 중·후반 이후의 화단을 풍미한 남종화풍과 풍속화의 선구적 위치에 놓여 있기도 하다.


그의 화풍은 아들인 덕희와 손자인 용에게 계승되었으며, 조선 말기의 허련(許鍊)도 해남의 종가인 녹우당(綠雨堂)에 와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전통화풍을 익혔다.그리고 그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회화관은 정약용의 회화론 형성에 바탕이 된다. 학자로서의 뚜렷한 업적은 남기지 않았지만, 풍부한 지식과 실학적 태도는 이익 형제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으로는 〈자화상〉·〈채애도〉·〈선차도〉·〈백마도 白馬圖〉 등이 《해남윤씨가전고화첩》에 전하고 있으며, 이 화첩은 산수(山水)·산수인물(山水人物)·영모(翎毛)·화조(花鳥)·초충(草蟲)·도석인물(道釋人物)·화훼도(花卉圖) 등 60여점의 소품으로 꾸며져 있다. 〈노승도 老僧圖〉·〈심득경초상 沈得經肖像〉·〈출렵도 出獵圖〉·〈우마도권 牛馬圖卷〉·〈심산지록도 深山芝鹿圖〉 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저서로는 《기졸 記拙》과 《화단 畵斷》이 있다.

 

 


 

보물 제 1488호 심득경초상(沈得經 肖像)  160.3 x 87.7 1710

 

윤두서의 절친한 벗으로 우정을 나누었던 심득경이라는 벗이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심득경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두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심득경이 죽은지 석달만에 심득경의 초상화를 완성하였다. 그 초상화를 심득경의 집에 보내어 벽에 걸었더니 생전모습과 하나도 틀리지 않게 그려서 마치 죽은 사람이 되살아 온 것 같아 온 집안이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노승도(老僧圖)

 17C 후반  57.5x 37cm

 

속세를 떠난 고승의 표정에서 고승의 기골이 우러나고 있다. 가사 주름과 자락, 단장등에는 특히 그 원숙한 용묵 용필의 솜씨가 주저 없이 발휘되고 있다.

 

 

미인도(美人圖·117×49cm).  윤두서(尹斗緖, 1668∼1715)

 

화면을 가득 채운 요염스런 여인이 살포시 비껴 틀어 서 있는 모습으로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한지에 그린 수묵 담채화이다. 초승달 같은 눈썹에 은행 알 같은 두 눈, 앵두처럼 빨갛고 작은 입술, 동그스레한 가련한 얼굴, 배추 포기처럼 부풀은 치마, 모두가 고혹적이면서도 결코 천박스럽지 않다.

 

두 손은 들어 치렁치렁한 머리를 떠받치듯 매만지는 맵시가 마치 가슴에 불타오르는 열정을 살며시 내비치는 듯 하다. 또 끊어질 듯 이어지는 간결한 선과 정확하고도 사실적인 조형에서 조선 여인의 단아한 기품이 그대로 전해진다.

  당대의 문인이었던 기생
  윤두서는 호가 공재(恭齋)로 조선 후기의 선비 화가이다. 정약용의 외증조, 윤선도의 증손으로 태어나 정선[謙齋]·심사정[玄齋]과 함께 삼재(三齋)의 한 명으로 불린다. 당쟁이 심화되자 벼슬길은 포기한 채 학문과 서화를 즐기며 일생을 보내다 해남 연동(蓮洞)에서 숨을 거두었다.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고, 특히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묘사로 '자화상(윤영선 소장)'같은 뛰어난 명화를 남겼다.

 

자화상은 전통적인 관례를 무시하고 상반신을 생동감 넘치게 그려 파격적인 충격을 던져 주는데, 수염의 섬세함이 매우 돋보이는 걸작이다.   1994년 봄, 이 그림은 미국 아써앰서클러갤러리(Arthur M.Sackler Gallery)에서 열린 『18세기 한국미술-우아함과 소박의 미』에 출품되어 세계인의 찬사를 받았다. 
  

조선 후기의 풍속화에 나타나는 미인, 즉 기생은 대부분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교태(嬌態)스럽지가 않다. 조선 시대 기생들은 용모도 뛰어나지만 사대부와 문장가를 상대하면서 음률과 시문에도 밝았다. 특히 한시나 시조도 잘 지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류 시인으로 대접받는다. 조선의 3대 시기(詩妓)는 송도의 황진이(黃眞伊)와 성천(成川)의 김부용(金芙蓉), 그리고 부안(扶安)의 이매창(李梅窓)이다. 모두 시 잘 짓고 가무에 능한 당대의 문인이었으며 또 음악가며 춤꾼이었다.

  '조선의 기녀'를 연구한 이탈리아 출신의 빈센차 두르소(함부르크 대학 한국학강사)는 한국 기생에 대한 독특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조선 시대의 기녀는 몸을 파는 창기(娼妓)로만 보아서는 안됩니다. 기녀는 유교 사회의 필요에 따른 사회제도의 일환으로, 그 역할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이 있었습니다.'


  즉, 창기는 변방에 있는 군졸을 접대하는 여자이고, 여기(女妓)는 사졸을 위해 바느질을 해 주고, 관청에 등록된 관기(官妓)는 관리의 수청을 들던 여자들이다. 또 음악과 문장에 능해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여악(女樂)도 있었다.

  땡중과 장물아비
  1990년 1월의 조간신문에, '국내 최고의 미인도 일본으로 반출 기도'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바로 이 미인도를 일본으로 밀반출하려던 일당들이 붙잡혀 쇠고랑을 찬 것이다. 사건의 전모는 이러하다.
  

전남 해남에 있는 윤두서 일가의 기념관에서 미인도를 훔쳐낸 자는 서산 출신의 땡중인 임모(任某)라는 자였다. 문화재가 돈이 된다고 하자, 그는 큰 물건을 찾아서 기념관 안으로 잠입했다. 보통의 기념관은 복제품이 전시되지만 그곳만은 진품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기념관 안에는 명문가의 유품과 눈이 번쩍 뜨이는 문화재가 즐비했다.

 

그는 족자에서 미인도 부분만 예리하게 오려 가지고는 도망쳤다. 이 미인도는 신윤복의 미인도(간송 미술관 소장)와 쌍벽을 이루는 그림이다. 다음 날, 기념관의 문을 연 후손은 놀라움에 소리를 지르며 신고를 했다. 곧 경찰과 검찰이 투입되고, 혹시나 해외로 빼돌릴 것이 염려되어 문화재 당국은 항만과 공항까지 검문 검색을 강화했다.

  그림을 둘둘 말아 서울로 올라온 임모는 즉시 한국고미술협회 회장으로 있던 공창화랑 대표 공창호(孔昌鎬)를 찾아갔다. 공창호는 번듯이 도둑질한 장물인 줄도 알면서도 1천 3백만 원이란 거금을 주고 그림을 샀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그림이라 장물인 줄 모를 이가 없는데, 일확천금만을 노리고 구입한 것이다.


  신문에서는 연일 국보급 문화재의 도난과 해외 반출을 염려하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자 공창호로서도 이 그림을 국내에 팔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골동상과 짜고 이 그림을 일본으로 밀반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일본 내에서 한국의 고미술품은 가장 확실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보증수표이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밀반출하면 거금을 손에 잡기는 여반장이다.    공창호와 그 일당은 무사히 미인도를 일본으로 반출하여 하야시라는 일본인에게 넘겼다. 그후 임모가 경찰에 붙잡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자, 공창호에게도 수배령을 내렸다.

  경찰의 수사망이 사방에서 좁혀 오자 공창호는 긴급히 일본의 하야시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이 잘못되어 구속 직전에 있으니, 그림을 되돌려 달라는 것이다. 국제적 망신을 두려워한 하야시는 눈물을 머금고 그림을 한국으로 되돌려 보냈다. 경찰에 붙잡힌 공창호는 경찰에서 가증스런 거짓말까지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동생이 일본에서 그림을 표구하기 위해 가져갔는데, 지금 부산에 보관 중이다."
  고미술협회장까지 지낸 사람이 도난당한 국보급 문화재를 밀반출했다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미인도는 다시 소장자에게 돌아갔지만 그 이후에 이 그림의 진품을 감상하기는 어려워졌다. 또 다시 있을 지 모르는 도난에 대비하기 위해 영인본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 많은 사람들이 진품을 감상하고 즐길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

 

 

송하선인도(松下仙人圖)

 

 

윤두서 은일도  고려대 소장


인물화를 특히 잘 그렸던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의 인물화인 이 은일도는 절파화풍으로 그린 작품이다. 공재는 겸재(鄭敾), 현재(沈師正)와 함께 조선후기의 삼재에 들 정도로 각체(各體), 병학(兵學), 음악, 실학 등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인 학자이기도 하였다.

 

공재의 화풍은 아들인 낙서 윤덕희(駱西 尹德熙 1685-1766)와 손자인 군열 윤용(君悅 尹熔 1708-1740)에게 이어져 남도화단을 대표하는 가풍이 되었다. 공재의 작품으로는 유명한 자화상을 비롯하여 노승도(老僧圖), 마상인물도(馬上人物圖), 낙마도(落馬圖), 선차도(旋車圖), 채애도(採艾圖), 패하백로도(敗荷白鷺圖), 팔준도(八駿圖), 기마치주도(騎馬馳走圖), 출렵도(出獵圖), 우마도(牛馬圖), 운용도(雲龍圖), 백마도(白馬圖), 은일도(隱逸圖) 등이 있다.

 

이 은일도는 곧 무너질듯한 절벽 아래에 서서 먼 곳을 한가롭게 보고 있는 고사(高士)를 그린 그림이다. 부벽준법(斧劈준法)으로 한 쪽만 그린 바위절벽, 굴철상(屈鐵狀)으로 그린 나무가지와 풀넝쿨, 철선묘(鐵線描)의 옷 등은 말할 것 없고, 변각소경(邊角小景)에 인물을 그린 것 등이 절파화풍임을 알 수 있다. 


 

윤두서의 하일오수도(夏日午睡圖)

짚신삼는 노인이 백성을 그린 것이라면 이것은 양반의 모습을 그린 양반풍속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자화상에 등장하는 윤두서의 얼굴과 비슷해서 정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숨어있는 자신의 처지를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윤두서(尹斗緖)의 송하관폭도(松下觀瀑圖). 비단 바탕에 수묵, 18.5×19 cm, 윤영선 소장

 

 

평사낙안도(平沙落雁圖圖)

 

 

공재 윤두서 필 강안처사도(恭齋尹斗緖筆江岸處士圖) 견본담채 22.6 x 25cm 개인소장

 

 

윤두서, 「바위에 기대 달을 보다」비단에 수묵, 17세기, 24.x21.5cm, 간송미술관

 

 

윤두서. 수하한일도. 지본담채, 26.6 x 16.2cm, 선문대학교 박물관 소장.

 

 

윤두서(1668~1715)는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정약용의 외증조가 된다. 그림으로 일세를 울렸는데, 매우 다양한 방면에 재능이 많았다고 한다. 다만 그의 그림은 안견, 김시 조선최대의 화가들과 비견될 정도로 매우 인기가 많았고 뛰어났다. 현존하는 작품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자화상, 심득경 초상같은 명작 초상을 남기고 있어 초상에 매우 능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유전되는 산수작품들은 화보풍의 다소 딱딱한 그림이 많아서, 인물 그림으로는 좋은 그림이 많은 것에 비교된다.

 

공재는 48까지 살았는데, 그의 죽음이 이르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의 그림이 완숙되기 이전에 그의 명이 다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가 겸재처럼 여든을 넘게 살았다면 아마도 더 훌륭한 작품들이 많이 남았을텐데 말이다. 아쉬울 따름이다.

 

이 작품은 처음으로 풍속적 소재가 등장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자리깔개나, 품격있는 주변묘사가 다소 언발란스하긴 하지만, 조선에서 최초로 속화적 소재가 등장하는 그림이니 그 의의가 가볍지 않다. 배경은 보다시피 가을이다. 추수가 다 끝난 늦가을 쯤으로 나무는 옷을 다 벗고 있고 새는 멀리날아가는 모습이 꽤 쓸쓸하고 고느적하다. 아마도 농부일 이사람은, 일을 마친 한적함을 쓸쓸한 가을 풍경 속에서 보내고 있다.  


 

손으로 더듬어 물고기를잡다 수탐포어(手探捕魚) 견본담채 25.5 x 27cm 

 

 

무송관수도(撫松觀手圖)  19 x 18.2 cm / 윤두서 - 남종화



송하한담도(松下閑談圖)

 

수하인물도(樹下人物圖)

 

암면묵객도 (岩面墨客圖) - 평암각석(平岩刻石)

 


윤두서_강안모루(江岸茅樓圖)

 



진단타려도 낙려 윤두서 견본채색 111.0 × 68.9cm  국립중앙박물관

 

 


 

낙려도(落驢圖) 세부

 

깨끗한 길, 상서러운 안개가 낀 아침에 복건을 쓴 점잖은 선비가 갑자기 나귀 위에서 미끄러져 그만 고꾸라졌다. 그러자 옆에서 따르던 동자가 기겁을 하여 책봇짐을 내던진 채 주인을 붙들려고 내닫고, 반대편 길을 향해 가던 젊은 나그네는 몸을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는 그림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동자만 혼자 허겁지겁할 뿐 정작 낙상을 코앞에 둔 당사자 얼굴에는 상황에 걸맞지 않게 함박웃음이 만발해 있고, 이들을 바라보는 나그네의 표정에도 아직 얼굴 가득 허뭇함이 어려 있는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풍채 좋은 선비는 호를 희이선생(希夷)이라 하는 진단이다. 진단은 당나라 말에서 5대 10국의 혼란을 거쳐 송나라 초기까지 산 사람이다. 5대 10국 시대는 중국 역사상 극도의 혼란기로서 황제는 거의가 군인인 절도사 출신이었다. 그러므로 정치는 문란하고 백성의 고초는 말이 아니었다.

진단은 이런 난세에 일찍이 벼슬길을 단념하고 이십 년간 무당산에서 복식호흡과 단식 등 신선술을 연마하여 신선의 경지에 오른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희이(希夷)라는 호는 송나라 태종이 하사한 것인데, '심오한 도리를 깨친 분'이란 뜻이다.

노자 『도덕경(道德經)』 제 14장의 "그것은 보고자 해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夷라고 한다. 그것은 듣고자 해도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希라고 한다. 그것은 잡고자 해도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미(微)라고 한다. 이 세가지는 말로 따질 수 없으니, 그래서 통틀어 도라고 한다. (視之不見 名曰夷 聽之不聞 名曰希  之不得 名曰微 此三者不可致詰 故混而爲一)" 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도사, 은사였지만 동시에 뛰어난 시인이요, 학자였다. 주역을 깊이 공부한 그의 우주관은 천지만물이 일체라는 것과 우주는 기(氣)를 주로 하지만 이(理)가 여기에 함께 갖추어져 있다는 내으로서 이후 성리학 이기설(理氣說)의 선구를 이루었다.

그의 학문은 도교와 유교를 아루른 것으로서 성리학 초창기의 선구적 위치에 있었으며 이후 사상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하락이수(河洛理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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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은 여러 왕조가 번갈아 일어서고 새 황제가 등극할 적마다 여러 날 찌푸린 얼굴을 짓곤 했다고 한다. 그것은 저들이 천하를 길이 안정시킬 '참된 군주'가 아니라 잠시 힘으로 권좌를 차지할 '거짓 군주'에 불과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흰 나귀를 타고 지금의 하남성 개봉(송의 수도)으로 가던 길에 행인에게서 조광윤(趙匡胤)이란 인물이 송나라를 세우고 태조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부터 조광윤을 진정한 황제의 제목으로 생각해왔던 선생은 그 얘기를 듣고 박장대소하며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만 안장에서 미끄러졌는데, 그 다급한 와중에서도 "천하는 이제 안정되었다(天下自此定矣)"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옛말에 어진 이는 세상을 먼저 근심하고 자신의 일은 뒤로 한다고 했거니와, 그렇게 올곧았던 선비 정신이 경황없는 와중에 드러났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희이선생이 나귀에서 떨어지면서도 함박 웃음을 지우지 못했던 까닭이며, 송나라가 건국된 960년 정월 초사흘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이른 봄날에 생긴 상서로운 조짐이었다.

태조 조광윤은 중국 역사상 명군의 한 사람이다. 낙양의 진영에서 태어나 진영 속에서 자라 절도사가 되었다. 당시 후주의 세종이 죽고 공제가 일곱 살로 즉위했는데 북쪽 요나라가 침공하여 조광윤은 대장으로 개봉성 밖 진교역에서 야영을 하였다.

그런데 군인들이 이 혼란기에 어린 황제를 중심으로는 난국을 타개할 수 없다 하여 술해 취해 쓰러진 조광윤에게 황포를 입히고 황제로 추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송나라는 건국 과정에서 가장 희생을 적게 치른 나라이다.

조광윤은 왕이 되었어도 과격한 조치를 싫어하고 문관 중심의 정치로 바꾸었는데 그가 남긴 유훈 중에 사대부 언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 절대로 죽이지는 말라는 내이 있다. 그래서 송에서는 신법당과 구법당의 정치 싸움에 격화되었을 때도 좌천, 유배는 당할지언정 죽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윤두서의 뜻

윤두서는 진사 시험엔 합격하였으나 당시 남인에게 불리한 붕당정치의 국면을 맞아 일가와 친구들의 불행만 익히 지켜보며, 학문과 시서화로만 생계를 보내다가 1713년 봄에 죽었다.

그는 당파색에 대해서도 '홀로 마음에 맞고 안 맞음을 두지 않았으며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을 일찍이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셋째 형이 당쟁에 휘말려 귀양 가서 죽었고 큰형과 자신도 모함으로 고생을 치뤘으며 절친한 벗 이잠은 흉서를 올렸다 하여 맞아 죽은 일이 있었다.

붕당 정치의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정치적 불행을 겪은 윤두서가 "사대부의 언론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절대로 죽이지는 말라"는 유언을 남겼던 송 태조를 기리는 그림인 <진단타려도>를 통해 숙종이 송 태조처럼 선정을 베풀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의미는 그의 호에서도 나타나는데 공재(恭齋)라는 호 속에 "임금이 어려워해도 옳은 일이라면 힘써 행하도록 질책한다."는 뜻이 숨어 있다. 군주 앞에서 좋은 얼굴을 하고 비위나 잘 맞추는 것은 공순함이 아니다. 군주 본연의 힘든 임무를 늘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는 것, 그것이 올곧은 신하의 참된 공순함인 것이다.

윤두서는 고사 속의 인물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면서 넓은 길이 한 중간에서 꺾어져 나가도록 하고 그 끝을 아득하게 여백 처리함으로써 이제부터는 오래도록 온 천하가 평화로우리라는 희망을 암시하였다. 또 이른 봄 숲의 위쪽을 아지랑이가 낀 뜻 바림해서 상서로운 분위기를 살린 것도 주제를 뒷받침하는 뛰어난 분위기 표출 방식이라 하겠다.

채색도 주제와 걸맞게 소청록법을 써서 산뜻하기 그지없다. 소청록이란 수묵담채를 바탕으로 그린 위에 석청과 석록 등 광물성 안료를 부분적으로 엷게 더한 것이니, 화폭은 화사하면서도 고상함이 돋다.

바위 주름가에 보이는 태점도 약간 넓은 목점 가운데 다시 작은 석록 색점을 더하여 마치 보석이 반짝이는 듯한 효과를 내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나귀에서 떨어져도 그저 기쁠 뿐이었던 희이선생의 마음을 드러내기 위한 배려라고 하겠다.

숙종의 제시(題詩)

희이선생의 고사는 한 나라의 개국과 관계되는 상서로운 조짐을 묘사한 것이며 아울러 참선비의 고매한 정신을 보여주는 속 깊은 내이다.

또 희이선생이 늘 주장했던 것이 군주된 이는 금단술이니 신선술이니 하는 개인적인 일에 신경쓸 것이 아니라 오로지 백성에게 선정을 베풀 것에만 힘써야 한다는 내이었던 만큼 숙종이 그림을 감상하고 마음에 느껴 손수 시를 짓고 쓴 것도 당연한 일이다.


希夷先生何事忽鞍徙 희이선생 무슨 일로 갑자기 안장에서 떨어졌나
非醉非眠別有喜 취함도 아니요 졸음도 아니니 따로 기쁨이 있었다네
夾馬徵祥眞主出 협마영에 상서로움 드러나 참된 임금 나왔으니
從今天下可無  이제부터 온 천하에 근심 걱정 없으리라
歲在乙未伸秋上浣題 을미년 8월 상순에 쓰다

윤두서가 살았던 을미년 1715년 숙종 재위 41년째 되는 때이다. 윤두서는 이해 11월 26일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그림은 국왕이 어람했던 궁중의 보물로 이 시는 숙종의 시이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오주석, 솔   에서

 

 

마상인물도(馬上人物圖)

 
 
마상처사도(馬上處士圖)
 
 
해남윤씨 가전 고화첩의 주마상춘(走馬賞春)
말을 타고 달리면선 주변의 흐드러진 춘푸에 도취된 듯한 봄기운을 완상한는 모습이 실감나데 표현되어 있다. 화면 속에서 움직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버드나무 줄기를 대각선으로 배치하고  바람에 날리는 가지를 유려하게 묘사하여 작품의 구성적 완성미를 이루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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