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자책· 수필

옌따이(煙臺)를 다녀와서

김현거사 2012. 9. 25. 07:22

옌따이(煙臺)를 다녀와서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기나긴 여름날 무더위에 시달려서 등골에 땀이 흘러 베적삼 축축할 때, 상쾌한 바람 불어 소나기 쏟아지니, 단번에 얼음발이 벼랑에 걸려 있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지팡이 지쳤어라 높은 산에 올랐더니 구름 안개 겹겹이 눈 아래 막고 있네 .이윽고 서풍 불어 맑은 햇볕 내려쬐니, 만 골짜기 천 봉우리 일시에 드러나네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낙엽이 소리 없이 강 언덕에 떨어지고, 황혼녘 하늘빛이 흰 파도를 걷어찰 때, 옷자락 휘날리며 바람 속에 섰노라니, 내가 마치 선학(仙鶴) 되어 흰 날개 씻겨진 듯 ,이 어찌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생에 통쾌한 일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나이 들어 친구들과 어디 국내여행 한번 가려해도 이제는 안방 사람 눈치를 살펴야 되는 오그라든 신세다. 그런데 어느날 외국에 공장을 가진 한 친구가 전화를 걸어온다. 자네가 중국술과 골동품과 한시를 좋아하지 않는가. 이번에 같이 가서 몇일 있다 오자. 그리고 불시에  비행기 상석에 태워서 데려가 밤에 산해진미 대접하니, 이 어이 통쾌한 일 아니겠는가>

  옛날 두보는 하장군의 별장에 초대되어 대접을 잘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향그러운 미나리에 붕어회가 싱싱하더라느니, 버들이 우거진 물가에서 배를 저으며 연잎 술잔으로 인사불성이 되었다느니,무려 10편이나 시를 썼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에 나를 초청한 친구도 하씨다. 예나 지금이나 하씨들은 문사 좋아하는 모양이다. 서해로 넘어가는 기내에서 나눈 이야기는 밤에 마실 술을 정하는 것이었다. 중국에는 4천5백여종 술이 
있다.  '바람이 불면 그 향기가 온 동네를 취하게 하고, 비가 그친 후 술병을 열면 향기가 십리까지 간다'는 술은 마오타이(茅台酒)요, 입맛 까다롭기로 유명한 청나라 건륭황제가 이 술을 마시려고 일부러 강남에 7일이나 머물렀다는 술은 양하대곡(洋河大曲)이다. 공자님 집안에서 손님 접대용으로 만든 술은 공부가주(孔府家酒)요,  첫잔 마시면 대숲바람이 몸에 스며들고, 두잔 마시면 입술 사이에 죽향이 흩어지고, 세 잔 마시면 몸의 때가 씻기고, 네 잔 마시면 마주한 친구와 마음을 통하게 된다는 술은 죽엽청주(竹葉靑酒)다. 

술에 대한 설명만 들어도 입맛 땡기지 않는가. 이 중에 마오타이, 공부가주, 죽엽청주는 내가 이미 맛 보았다. 친구는 내게 수정방이 어떠냐고 권했다. 수정방은 중국 3대 명주 중 하나이다. 모택동 시절에는 마오타이, 등소평 시절에는 우량액, 이제는 수정방을 최고로 친다. 값은 돗수 따라 다르지만, 몇십만원 홋가하는 고가품이다. 그러나 나는  두강주(杜康酒)를 부탁하였다. 두강주는 수정방보다 값은 저렴하나, 두보나 소동파가 즐긴 술이다. 또 조조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수백척의 전함을 끌고 양자강을 내려오면서, 스스로 흥에 겨워 창자루로 뱃전을 두드리면서 달빛에 건배하며 마시던 그 술이다. 이 술 마시고, 조조는 그렇다치고, 두보나 소동파 같은 기분으로 취해보는 일이야말로 딱 구미 당기는 일이다. 그러자 친구가 연타이로 전화 걸어 두강주를 시켜놓는다.

연타이는 서울서 생각하기보담 큰 도시였다. 인구 3백만이라 한다. 경치는 속초 같았다. 속초와 다른 점은 해변에 잔디가 깔린 고급 주택가와 아파트와 고층 호텔 많은 점이다. 이상하게도 바다는 우리나라 동해같이 맑아,도로 밑에 바로 해수욕장이 있다. 대륙을 연결하는 큼직한 항구도 있고, 신흥도시라 거리는 깨끗하다. 서울 회장님 오셨다고, 현지사장이 예약한 호텔식당 식탁 위엔 빨간 포장의 두강주 네 병이 얹혀있었다.

원래 '술이란 지기를 만나면 천 잔도 모자라고, 서로 말이 통하지않는 사람과는 반마디 말도 많다'(酒逢知己千杯少. 話不投機半句多)'고 한다. 선수들끼리 무슨 말이 필요한가. 우선 첫 병 개봉하여 향기부터 조심스레 맡아보았다. 길에서 누룩 수레만 만나도 군침을 흘렸다던 두보, 한 말 술에 시 백편 지으면서, 천자가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취선 자칭한 이태백이 떠오른다.

오냐 너 본지 오랜만이다. 50도 독주를 원샷으로 비웠다. 술 향기는 소동파가 좋아하던 죽향,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에 심었던 국화, 이백이 좋아한 연꽃 향기 섞인듯 하다. 달빛도 섞인 것 같고, 시의 향기도 섞인듯 했다. 몇백년 전통 명주를,북쪽 발해만에서 잡아온 게요리와 해삼요리 안주가 받쳐주니, 모처럼 즐김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중국요리는 대륙의 오랜 역사의 산물이요, 문화요, 감성이다. 베이징덕 이외에 이름 모를 육군도 많이 올라왔지만, 나는 주로 해군과 야채를 먹었다. 

해삼요리

술은 독하면서도 향기롭고 부드러웠다. 옛날 고사들이 서로 두 손 모우고 잔 건빠이(乾杯) 하고, 시 한 수 읊기 딱 좋았겠네 싶었다.

이태백이 춘야원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라는 글에서, <천지라는 것은 만물이 쉬어가는 나그네 집이요, 세월이라는 것은 영원을 흘러가는 길손이다. 그 가운데 우리네 덧없는 인생은 짧기가 꿈같거니, 그 동안에 환락을 누린다 한들 겨우 얼마이겠는가! 옛 사람이 백년도 못 사는 인생으로 천년의 근심을 안고서, 낮은 짧고 밤은 길어 놀아 볼 겨를도 없음을 한탄하다가 밤에 촛불을 켜고 밤을 낮 삼아 놀았다고 하더니 참말로 이제야 그 까닭이 있음을 알겠구나!> 하지 않았던가.

인생칠십고래희에 모처럼 친구 덕에 전통 명주의 향기에 맘껒 취해본 뜻깊은 밤이었다.(계속)

'2)전자책·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름  (0) 2012.09.25
청량산 답사기   (0) 2012.09.25
옌따이(煙臺)를 다녀와서 (2)  (0) 2012.09.25
무궁화에 대한 단상  (0) 2012.09.25
전자책(2) 수필 여행기  (0) 2011.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