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수필
김창현
학문도 부귀도 없는 나는,다만 이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평생 꽃을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감꽃 목걸이 만들던 소년,논둑 찔레꽃 사랑한 소년, 진주 칠암동 소녀네 우물가 하얀 탱자꽃 사모하던 소년, 대학시절에 보라빛 오동꽃을 책갈피 압화(押花)로 끼우던 청년, 라일락 벤치에서 시를 읽던 청년, 남해 먼 섬에서 작은 제비꽃에 눈시울 붉히던 청년, 이윽고 세월이 흐른 뒤 달밤에 난을 치던 노인, 이른 봄 매화 찾아 다정한 친구 부부와 남쪽으로 여행 떠나던 노인, 해마다 가을이면 국화를 키워 주변에 나눠주던 노인. 꽃을 사람인양 생각하고 사람처럼 친구하던 노인, 아침이면 정원의 장미와 글라디오라스꽃 자미화 앞에 한없이 오래 앉아있던 노인으로. |
우리나라 범종 중에 가장 소리가 아름다운 종이 상원사 동종(銅鐘)과 경주 에밀레종이다. 상원사 동종은 맑고 은은한 천상(天上)의 소리고,에밀레종은 ‘에밀레 에에에~’사바의 슬품이 끊어질 듯 끊기지않고 한없이 이어지는 이승의 음이다.두 종 모두 희대의 천재가 만든 신품(神品)이다. 새벽에 일어나 불교방송 켜놓고 향을 피우고 종을 친다. 우리집 종은 모양은 에밀레종 같고,소리는 상원사 종 같고,크기는 10쎈티 쯤 된다.30년 전에 조계사에서 산 것인데,종신(鐘身)에 푸른 녹이 가득하고 상서로운 구름 속에 합장한 비천상(飛天像)이 나르고 있다. 절에서는 생사윤회 헤매는 중생 모두 이고득락(離苦得樂)하시라며 종을 친다고 한다.지옥도(地獄途) 아귀도(餓鬼途) 축생도(畜生途)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고를 여의고 낙을 얻으라고 친다고 한다. 나 자신 지옥도 아귀도 헤매는 중생이니,남을 위해서 치는 자비의 타종은 아니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 죽비로 어깨 두드리며 먼저 나를 깨우고 종을 치면,종소리가 혈관까지 들어가 속진을 씻어주고,영혼에 스미는 느낌이다.영육(靈肉)이 종소리에 청신해진다.종소리가 그리 아름다울 수 없다. 종 뒤에 관음죽 심은 큰 화분이 있다.관음죽 아래는 홍옥(紅玉)으로 조각된 포대화상이 앉아 계신다.한가닥 향불은 대밭에 안개처럼 고요히 피어오른다.숲이슬 머금은 진달래 적시고,흐르는 시냇물과 구름 적시는 그윽한 산사의 범종 소리는 아니지만,도심 속에서 대밭 속에 앉아계신 선인을 보며,한줄기 향연기 위에 종소리를 얹는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년초에 엎드려 절함이 건강에 좋다고하여 108참회를 시작하였다.제사보다 젯밥에 신경 쓴 셈이다.나이 들면 대개 척추에 이상이 온다.매번 108번 허리 굽히고 엎드려 절하는 것이야말로 허리에 신통한 묘약이라고 한다.그래 절을 시작해보니 서른번 쯤 절해도 온몸이 따뜻해지고 백을 넘기면 심신이 그리 개운할 수 없다. 기도는 마음을 청정케 한다.엎드려 절하며 마음도 낮추고 겸허해지기 염원한다.하심(下心)토록 참회한다.‘법의 경계에 들어서면 늙고 죽는 것이 없고’(無老死),‘생사나 열반이 항상 조화를 이룬다’(生死涅槃常共和)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운다.이 구절은 엄청난 실존적 초극(超克)을 의미한다.현대 철학보다 더 심오한 철리를 말하고 있다.생사(生死)가 여일(如一)하여 서로 조화(調和)되는 경지란 어디일까?얼마나한 염원과 수련과 내공이 필요한 것일까? 그런데 묘한 일이다.내가 종 치고 절하는 그 시간,우리집 욕셔테리아는 마치 산신도(山神圖)의 호랑이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얌전히 내 옆에 엎드려 있다.간혹 머리를 내 무릅에 비벼대기도 하고,머루알처럼 맑은 눈으로 빤히 나를 지켜보기도 한다.나는 절을 끝내고 신선마냥 호랑이 거느리고 여명의 뜰을 거닌다.뜰에 이제 막 수선화가 피어오르고 있다.소나무에 아침안개가 걸려있다.아침이 그리 청량할 수 없다.(2008년 3월) |
그녀의 정원 隨筆
처음 이 아파트로 이사왔을 때,1층 사는 사람들 모임에서 그녀를 보았다.남편이 대학교수인 숙녀는 젊고 상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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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여행기
욕지도 사람들은 草島를 풀섬 혹은 풀이섬이라 부른다. 내가 하숙한 집 안주인은 삼십 중반인데 동네가 인정하는 미인이었다.풀이섬이 고향인데,남편은 원양어선 선원으로 집에 없었다.허구헌날 풀이섬 경치가 좋다고 노래를 부르며 가보자고 유혹하는 바람에 어느날 그녀와 뗀마를 타고 풀이섬엘 갔다. 호수같은 자부랑깨 항구 밖을 나가니 파도가 어찌나 거센지,K대 미식축구 선수로 힘 자랑 덩치 자랑하던 나는 손으로 뱃전을 바짝 잡고 숨까지 죽이면서 배가 혹시 침몰하지나 않을까 겁 먹었지만,체구는 작아도 섬여인은 태연하다.그 연약한 손목으로 거친 파도를 가르며 내가 보기엔 아슬아슬하게 노를 저어간다. 얼마 후 물밑의 자갈과 헤엄치는 고기들이 투명하게 훤히 보이는,빈 배 하나 물결 위에 한가히 흔들리고 있고, 언덕에 동백나무 무성한 작은 만(灣)에 배를 대었다.배에서 내리니 바람은 부드럽고,공기는 싱그럽다.물끼 머금어 보석같이 영롱한 자갈은 자르르 자르르 소리 내면서 파도에 씻기고 있고,잎이 반질거리는 동백나무 아래 떨어진 붉은 꽃은 카펫을 깐 것처럼 화려하다.고갱이 타이티에서 본 풍경이 이런 원색이었을 것이다.당시 유행한 '그리운 카프리에 섬나라에,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수정처럼 맑은 바닷가에 처녀들 미소가 풍기네.'노래 가사 속의 '수정같은 맑은 물(Christal water)'이란 표현이 단순한 문학적인 수식어가 아니고 실재하는 곳임을 여기서 알았다. 동네로 들어가니,몇 채 집은 동백나무 팽나무 거목 밑에 담도 없이 자리잡고 있었다.그 중에서 장독대 옆에 앵두가 붉게 익고,느긋이 오수를 즐기던 소가 기척에 고개를 들어 딸랑! 목에 달린 방울소리로 정적을 깨던 집이 아줌마네 집이었다. '있나?' '언니야!' 싱싱하게 뻗어간 호박잎이 초가를 덮은 황토벽에 달린 방문이 열리더니,반가움 담긴 한 처녀의 얼굴이 급히 뜰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처녀는 언니보다 더 미인이었다.까무잡잡한 피부에 늘씬한 몸매,가늘고 짙은 눈섶,삼단처럼 늘어진 머리칼이 문득 보들레르의 '식민지 태생의 한 부인에게' 란 시를 생각나게 했다.'고독'이란 영화 속 엘리자벹태일러가 저랬고,동백나무 춘(椿),계집 희(姬),춘희 아니던가. '듀마휴이스'의 소설 여주인공 '춘희'가 저랬겠다 싶었다. 처녀는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연통을 받고 알고 있은 듯 했다. ‘아부지는?' '밀감나무 심으러 산에 갔다.' '나 아부지 보고 오께.' 흘레 시킬 암말 옆에 종마를 데려다놓듯,빈집에 나와 처녀만 남겨두고,언니는 이 말 던지고 산에 가서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언니가 노래 부르며 풀이섬 가자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마당 쳐다보는 일 밖에 둘이 할 일이 없었다.그러다 문득 처녀가 생각난 듯,삶은 볏짚을 바가지로 소에게 갖다준다.소는 코뚜레 위로 혀를 낼름 내밀어 처녀의 손을 햟는다. '소가 몇 살 짜리요?' '..... ....' 처녀는 얼굴만 빨갛게 붉히고 말았다.수줍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계산된 교태와 수줍음의 차이는 인공과 자연만큼 크다.동백꽃같은 그녀에게 동박새처럼 날개 퍼덕이며 힘차게 날아가고 싶었다.낮선 나를 피해 살짝 돌아선 모습은 영판 사슴 같다.어떻게 늘상 산에서 나무하고,바다에서 뗀마 젓고 자맥질하던 처녀가 저렇게 늘씬한 몸매일까. 야생 사슴처럼 살아서 그런갑다.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점심 때가 되자 처녀가 부얶에 들어가더니 불을 부쳤다.이윽고,마당에 굴뚝연기가 낮게 깔려 코끝까지 냄새 풍기더니,처녀가 개다리 밥상을 들고와 내 옆에 놓고 저만치 물러간다.오직 나만을 위해 낮선 여인이 밥상을 채린 것은 이것이 내 생애 처음이었다.아무도 없는 산 속의 빈 집,새신랑같은 기분이 들었다.돌나물과 게장 한 종지,고구마 담긴 소쿠리만 하나 달랑 놓인 밥상이었다. '같이 식사 합시더.' 인사말에 마당의 봉선화 보다 더 붉어진 처녀는 숲매미 소리 나는 뒤뜰로 달아나 버린다. 인적없는 마당의 봉숭아 꽃잎이 햇볕 아래 너무 고왔다. 좀 있다 처녀가 하얀 대접에 물 한그릇 들고오더니 대청 끝에 놓고 저만치 앉는다. '보이소 예.' 날개 달린 사자가 그려진 비사표(飛獅標) 팔각형 성냥통에 성냥을 그어 담배불 부치면서 처녀에게 말 부치니 처녀는 얼굴만 붉히고, ‘보이소 예.’ 은근히 두번째 부르니 그만 홍당무가 되어 뒤뜰로 달아나 버린다. 고개 돌려 돌아보니 지붕을 덮은 감나무만 시퍼런 감을 주렁주렁 내 앞에 흔들고 있었다. 박목월의 시를 속으로 외워보았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한다.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흙담 안팍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한다.쑥대밭처럼 살아라한다.산이 날 에워싸고,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슴,구름처럼 살아라한다.바람처럼 살아라한다. 일부러 점심 굶었는지,해거름이 되어서야 내려온 노인은, '면에서 밀감나무를 무상으로 심으라캐서.' 변명 비슷한 말을 하고 '아부지! 제주도는 밀감나무 하나 키우모,자식 대학공부 시킨다 않캅디꺼?3년만 있으모 우리도 수확합니더.' 언니는 누구 들으라는 것인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설명한다. 마당가에서 언니 얼굴만 보며 배웅하던 처녀를 남겨두고 뗀마 타고 바다로 나오니,섬에 걸린 구름은 주황빛이고,어둠 내리는 바다는 황금빛이다.배가 바다 가운데로 나오자,어느새 멀리 처녀네 토방의 아주까리 등잔불이 별처럼 빤짝인다.‘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조수처럼 밀려왔구나.’장만영의 시같은 달빛이 언니의 노질 따라 하얀 은파를 끝없이 일으킨다. 욕지면 전체서 대학생,그것도 서울서 대학 다닌 사람은 드물던 시절이다.원하면 풀이섬이 나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었다.풀이섬은 멀지않아 오렌지 향기 바람에 날리는 곳으로 변할 것이다.동백꽃은 해마다 붉은 카펫처럼 해변을 덮고,물 속의 풍부한 어족은 혼자의 소유가 될 수 있었다.솔로몬의 영화보다 황야의 한송이 백합이 더 귀하다 하지 않던가.풀이섬 처녀와 낙원의 연인이 될 수 있었다.처녀의 마음은 오염된 도시의 아무 것도 그려지지않은 Tabula rasa(白紙) 였다.그 처녀와 꽃과 약초를 키우며 사색하며 사는 인생도 시도해볼만한 것이었다.아! 그러나 사람은 항상 엉뚱한 길로 가버린다.얼마나 어리석었던가.나는 끝내 궁금해하던 아줌마에게 대답을 않고,유토피아를 외면하고 뭍으로 나와버렸던 것이다. |
속초에 가신다면 隨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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