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자책· 수필

전자책(2) 수필 여행기

김현거사 2011. 11. 20. 10:33

1)수필

 

나는 이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隨筆  2008.08.28. 08:24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17

  

                                                                                                                                   김창현

 

 학문도 부귀도 없는 나는,다만 이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평생 꽃을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감꽃 목걸이 만들던 소년,논둑 찔레꽃 사랑한 소년, 진주 칠암동 소녀네 우물가 하얀 탱자꽃 사모하던 소년, 대학시절에 보라빛 오동꽃을 책갈피 압화(押花)로 끼우던 청년, 라일락 벤치에서 시를 읽던 청년, 남해 먼 섬에서 작은 제비꽃에 눈시울 붉히던 청년, 이윽고 세월이 흐른 뒤 달밤에 난을 치던 노인, 이른 봄 매화 찾아 다정한 친구 부부와 남쪽으로 여행 떠나던 노인, 해마다 가을이면 국화를 키워 주변에 나눠주던 노인. 꽃을 사람인양 생각하고 사람처럼 친구하던 노인, 아침이면 정원의 장미와 글라디오라스꽃 자미화 앞에 한없이 오래 앉아있던 노인으로.

 친구를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어린이를 천사로, 여성을 꽃으로 보려했던 사람으로, 모든 사람을 친구로 보려했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가난한 친구를 도와준 벗을 존경하고, 학식 있으면서 겸손한 벗을 존경하고, 부유하면서 티 내지 않는 벗을 존경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언쟁을 한 친구에게 먼저 말 건넨 벗을 존경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세상에는 자신보다 깊은 학식과 겸손한 벗이 많다고 늘상 생각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친구를 소중히 여겨, 반드시 두손으로 잔을 올린 벗으로 기억되고 싶다. 사바를 이별의 프랫홈이라 생각하고, 남에게 아품을 준 친구, 특정인에게 아부하거나, 편 가르거나, 이해관계로 움직이거나, 뒤에서 욕하거나, 우월감 떨치지 못한 속 좁은 친구에게도, 손수건 흔들던 벗으로 기억되고 싶다. 바람이 흘러가듯, 마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그 행방을 몰랐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기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모자라는 자가 살기에 세상은 얼마나 아품이 많았던가? 지혜롭지도, 온화하지도 못한 자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였다. 겉으로 취생몽사(醉生夢死)하면서, 안으로 때와 장소 가릴 것 없이 참회하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른 새벽에 촛불 앞에 기도하고, 달빛 바다에 기도하고, 눈 쌓인 산에 기도하고, 명산대찰과 부처님 예수님께 기도하고, 바람에 기도하고, 흐르는 물, 총총한 별밤에 기도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이 세상 밑바닥 가장 못난 인간으로, 다만 기도 깊었던 노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바람에 불려 어딘가로 날라가는 초라한 낙엽 마음으로, 빗물 속에 떨어지는 꽃의 마음으로, 새벽에 떠나가는 초생달 마음으로, 끝없이 반복된 자신의 죄업을 참회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세상 밑바닥 가장 고통스럽던 인간이면서도, 세상은 아름답고 선하다며,  끝없이 감사기도 올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종소리| 隨筆  2008.08.29. 09:50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18

 

 

 우리나라 범종 중에 가장 소리가 아름다운 종이 상원사 동종(銅鐘)과 경주 에밀레종이다.

상원사 동종은 맑고 은은한 천상(天上)의 소리고,에밀레종은  ‘에밀레 에에에~’사바의 슬품이 끊어질 듯 끊기지않고 

한없이 이어지는 이승의 음이다.두 종 모두 희대의 천재가 만든 신품(神品)이다.  

새벽에 일어나 불교방송 켜놓고 향을 피우고 종을 친다.

우리집 종은 모양은 에밀레종 같고,소리는 상원사 종 같고,크기는 10쎈티 쯤 된다.30년 전에 조계사에서 산 것인데,종신(鐘身)에 푸른 녹이 가득하고 상서로운 구름 속에 합장한 비천상(飛天像)이 나르고 있다.  

절에서는 생사윤회 헤매는 중생 모두 이고득락(離苦得樂)하시라며 종을 친다고 한다.지옥도(地獄途) 아귀도(餓鬼途) 축생도(畜生途)에서 헤매는 중생들이 고를 여의고 낙을 얻으라고 친다고 한다. 나 자신 지옥도 아귀도 헤매는 중생이니,남을 위해서 치는 자비의 타종은 아니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 죽비로 어깨 두드리며 먼저 나를 깨우고 종을 치면,종소리가 혈관까지 들어가 속진을 씻어주고,영혼에 스미는 느낌이다.영육(靈肉)이 종소리에 청신해진다.종소리가 그리 아름다울 수 없다.  

종 뒤에 관음죽 심은 큰 화분이 있다.관음죽 아래는 홍옥(紅玉)으로 조각된 포대화상이 앉아 계신다.한가닥 향불은 대밭에 안개처럼 고요히 피어오른다.숲이슬 머금은 진달래 적시고,흐르는 시냇물과 구름 적시는 그윽한 산사의 범종 소리는 아니지만,도심 속에서 대밭 속에 앉아계신 선인을 보며,한줄기 향연기 위에 종소리를 얹는 것으로 나는 만족한다.  

년초에 엎드려 절함이 건강에 좋다고하여 108참회를 시작하였다.제사보다 젯밥에 신경 쓴 셈이다.나이 들면 대개 척추에 이상이 온다.매번 108번 허리 굽히고 엎드려 절하는 것이야말로 허리에 신통한 묘약이라고 한다.그래 절을 시작해보니 서른번 쯤 절해도 온몸이 따뜻해지고 백을 넘기면 심신이 그리 개운할 수 없다.  

기도는 마음을 청정케 한다.엎드려 절하며 마음도 낮추고 겸허해지기 염원한다.하심(下心)토록 참회한다.‘법의 경계에 들어서면 늙고 죽는 것이 없고’(無老死),‘생사나 열반이 항상 조화를 이룬다’(生死涅槃常共和)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외운다.이 구절은 엄청난 실존적 초극(超克)을 의미한다.현대 철학보다 더 심오한 철리를 말하고 있다.생사(生死)가 여일(如一)하여 서로 조화(調和)되는 경지란 어디일까?얼마나한 염원과 수련과 내공이 필요한 것일까?    

그런데 묘한 일이다.내가 종 치고 절하는 그 시간,우리집 욕셔테리아는 마치 산신도(山神圖)의 호랑이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얌전히 내 옆에 엎드려 있다.간혹 머리를 내 무릅에 비벼대기도 하고,머루알처럼 맑은 눈으로 빤히 나를 지켜보기도 한다.나는 절을 끝내고 신선마냥 호랑이 거느리고 여명의 뜰을 거닌다.뜰에 이제 막 수선화가 피어오르고 있다.소나무에 아침안개가 걸려있다.아침이 그리 청량할 수 없다.(2008년 3월)  

 

그녀의 정원
| 隨筆   2008.09.01. 07:32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11

 

 처음 이 아파트로 이사왔을 때,1층 사는 사람들 모임에서 그녀를 보았다.남편이 대학교수인 숙녀는 젊고 상냥했다.
‘우리 모임을 <가든 클럽>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멋진 제의를 한 그녀를 우리는 <가든 클럽>회장으로 뽑았다.
봄비 오고 크로커스 히아신스 꽃이 필 때 우리는 서로 정원에 찾아가서,그 꽃을 어디서 사왔는지,값이 얼마였던지 묻곤했다.서로 사 온 꽃을 나누기도 했다.

산에 진달래와 벚꽃이 필 때,그녀가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방사선 치료를 받고 머리칼이 빠져 수건을 쓰고있다고 했다.늦봄이었다.슬리퍼 신고,잔듸로 덮힌 정원을 거쳐서 그 집에 가니,그녀가 꽃을 가꾸고 있었다.차 한잔 대접 받은 며칠 후 머리에 수건을 쓴 그녀도 우리집에 와서 화단에서 아내와 꽃을 보며 한참 이야기 나누었다.우리가 선물한 몇송이 장미 들고 돌아가는 그녀 뒷모습은 너무나 쓸쓸했다.그리고 그녀는 목단꽃 붉게 질 때 지고 말았다.

비 개인 여름의 어느 일요일.그녀의 정원에 가보니,남편 혼자 화단을 가꾸고 있었다.자주빛 작은 물망초꽃처럼 애처로운,엄마 잃은 어린 딸이 아빠 옆에 꼭 붙어 따라다니고 있었다.

초가을 아침,그녀의 정원은 너무나 쓸쓸하다.잡초 속에 국화꽃은 가려있다.그녀가 심은 목백일홍 나무는 꽃도 없이 말라있었다.복자기나무 붉은 잎에 하얀 이슬 맺혔다.주인 없는 흔들의자는 비어있고,장미는 가지가 제멋대로 뻗었는데,아름답던 숙녀가 매달아놓은 정원 램프등은 너무나 외로웠다.
‘고운 꽃일수록 일찍 시든다’던 어느 시인의 한탄 바로 그것이었다.

 

| 隨筆   2008.08.30. 08:26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7

 

 결혼해서 처음 들어간 이문동 집은 철로변 13만원짜리 전셋집이다.70년도에 불교신문 기자하면서 장가들 때 부모님 지원 한푼 없이,결혼축의금으로 마련한 집이다.
그곳은 홍수 때 중량천이 범람하여 물에 잠겼던 곳이라 이문동 중에서도 가장 싼 곳이었다.
방 하나에 현관 겸 부엌이 붙고,창문 없는 방은 양철지붕이라 여름에 무척 더웠다.잠잘 때 다리 뻗으면 다리가 벽과 캐비넷에 닿아 다리를 구부리고 자야 했다.가구라곤 신혼이랍시고 마련한 캐비넷 하나와 밥그릇과 숟가락 몇 개가 전부였다.
명동서 출생한 아내는 임신 중 서울 구석배기 이문동 셋방에서 팬티 런닝만 입고 긴 여름 더위에 지쳐있다가,남편이 퇴근해야 겨우 부엌문 닫아걸고 수돗물로 샤워하고,저녂 먹고 더러운 냇물 흐르는 뚝방에 바람 쐬러 가곤 했다.
간혹 어머님이 오시면 우리가 불쌍해서,냄비도 사오시고 연탄도 넣어주시고,꾸깃꾸깃한 용돈도 놓고가시곤 했다.

두번째 살았던 집은 수유리 25만원짜리 전셋집이다.
당시 보통 전세금 30만원보다 5만원 싼 집이었다.
대한불교신문에서 월급 1만6천원 받다가 공개시험 치고 내외경제 수습1기 기자로 합격해 4만5천원 받던 때다.
집주인은 기독교방송 기자였는데,부인이 어떻게 잘난체 하는지,우리는 대문을 못쓰고 화장실 옆문을 쓰게했다.강아지를 데려가니 싫다고해서 남에게 주지않을 수 없었고,거기서 아들을 낳았는데 기저귀물 많이 쓴다고 수도세를 올렸다.
며느리 산간호 오신 어머님이 주인 눈치 보고 굽신굽신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가슴 아리다.고향에 방 아홉개 있던 큰 기와집에 사시던 어머님이다.얼마나 맘이 아프셨으면 나에게 나지막히 '사주를 보니 니가 나중에 큰회사 사장 된다더라.'고 속삭여주시곤 하셨다.돌아가신 어머님께 나는 죄인이다.

세번째 집은 수유리서 더 변두리로 나가서 마련한 창동 정국이네 문간방이다.전세값이 6개월마다 올라서 발버둥치며 저축해도 더 변두리로 밀려갈 수 밖에 없었다.여기서 남산 밑 회현동 신문사까지 버스로 한시간 반이 걸렸다.
주인은 사람이 좋았으나,반지하에 미장원 세든 여자가 고약하였다.여름밤에 간혹 우리는 옥상에 가서 도봉산을 쳐다보며 바람을 쐬었는데,옥상에 놓아두었던 자기 고추장이 누구 손을 탔다고 우리를 의심하는 바람에 근처로 옮겨갔다.

네번째 집은 집장사 집으로 정원이 큰 집이었다.
여기서 아들 돌을 맞자,어린이 프로 때문에 월부로 흑백 TV를 처음 샀으니,재산목록 1호였다.
지금 장가 가고 신도리코 계장인 아들이 당시 '딸랑딸랑 딸랑딸랑 으쓱으쓱' 어린이프로 이 음악만 나오면 춤추며 재롱부리던 일이 새롭다.
그러나 어느날 아침 우리 일가족 3명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을뻔 했고,돈이 없어 병원에 못가고 동치미 국물로 치료한 바람에 그 이후 우리 부부 모두 기억력이 나빠지고 말았다.

진짜 가난하던 시절이었다.그러나 요즘 386세대처럼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소리는 하지 않았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는 냉엄하다.

고등학교 동창 하모군을 퇴근길에 창동서 우연히 만났는데,알고보니 그는 내가 살던 집장사집과 똑같은 큰 정원이 있는 쌍둥이 옆집에 살았다.유명한 하모 서울시 교육감 조카로 집안이 넉넉해서같은 사회초년생인데 그는 대궐같은 집에 살았다.친구 부인은 내가 복학했던 대학 국문과 여학생이라 나도 알고 아내와도 아는 얼굴인데,지하 전셋방 우리집엔 일체 놀러오질 않았다.

대학친구 하나는 대구 부잣집 아들이었다.그는 졸업 후 취직않고 그냥 백수로 놀았지만,부친이 사준 가게가 붙은 마포집과 김포 가도 빌딍이 해마다 1년만 지나면 천문학적 숫자로 값이 올랐다.

열심히 일해도 되지않겠구나.절망감 비슷한 것이 가슴 속에 고이기 시작했다.죽자사자 일하고 쥐꼬리 월급 받아야 무슨 소용인가?명문대 출신이 무슨 소용인가?사회는 그런걸 알아주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 출신인 선배 기자 한 분이 요절하여 가보니,미아리 길음시장 단칸방에서 유난히 미인이던 미망인 혼자서 울고 계셨다.
배고픈 기자를 그만 두고 회사원 되자고 이때 결심했다.

겨울밤 버스에 흔들리며 창동에 내리면,칼바람은 웡웡 귓전을 때리는데,그 겨울 얼어붙은 땅에 떨어진 달빛 아래 시커먼 전봇대 그림자가 꼭 내모습 같았다.나는 왜 이런가?울고싶은 마음으로 포장마차에 들어가 따뜻한 오뎅국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곤 했다.

다섯번째 전셋집은 이문동 과부집이었다.그곳은 경성사범 출신으로 자유당 명동 부녀위원장 지내신 장모님이 몰락해서 버스 정류장 옆 길가에서 구멍가게 하시던 곳이다.아내는 장모님 식사와 빨래 도와주고 애 간식비와 부식비를 보충했다.우리는 저금하느라 눈이 빨개가지고 프라스틱 바가지도 꿰매쓰고 슬리퍼도 꿰매 신었다.
주인인 과부는 자식은 있지 수입은 없지,세든 사람들 갈취하고 살았다.방마다 전기 수도세 분담시키고 자기는 한푼도 안내므로 셋방 사람들이 성토하곤 했었다.

나는 여기서 재산목록 2호 선풍기를 샀다.어찌나 대견한지 시원한 바람을 몇번씩이나 틀어보며 아내와 기뻐하던 그 시절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때 태어난 딸애가 지금은 미국서 박사학위 마치고 결혼하여 일산에 산다.

궁즉통(窮則通)이란 말 있다.
궁하면 통하는 것이다.

월급은 거북이 걸음이고 전세값은 토끼뜀이라,1년 저축해도 오르는 전세값을 못따라갔다.이렇게 평생 살 생각하니 귀도 차지않아서 이판사판 눈 딱 감고 일 저질렀다.

이문동 꼭대기에 축대집이 하나 있었다.
아마 이 집이 이문동 전체에서 가장 작은 집일 것이다.
대지 28평 건평 15평 방 셋.
가격은 230만원이라 했다.아카시아 무성한 돌축대 아래로 청량리서 춘천 다니는 기차 철로가 보였다.

흥국생명보험에서 100만원 빌리고,사내 새마을금고,언론인금고,전세금 합치고도 돈이 모자라,방 세개 중에서 큰방 가운데방 두개는 세주고 나는 옆탱이방 하나만 쓰기로 하고 그 집을 계약했다.
꼬불꼬불 배배 꼬인 골목길 돌아올라가면,오래된 벽돌 엉성하게 쌓아올린 담장 허술한 그 집이 내가 서울서 처음 소유해본 내 집이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집주인이란 생각에 그렇게 행복했다.누구는 셋방살이 끝에 내집 마련하여 자기 이름 적힌 문패를 달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전세살이 4년만에 나는 그야말로 살 떨리는 감격적 내집 입성을 했다.

그 다음 악전고투한 이야기 말로 어찌 다하랴!
배보다 배꼽이 더 컸다.
빌린 돈 이자 갚기 위해 이를 악물고 살았다.출퇴근용 버스표 달랑 두장 들고 신문사 나가면,삼영다방 아가씨가 와서 커피 주문을 받는데,나만 주문을 못한다.
그때 옆자리 선배가,
'이 사람아 집도 집이지만 명색이 기자가 아침 모닝커피 한잔 않고 어찌 일과를 시작하노?앞으로 무한정 당신 형편 될 때까지 모닝 커피 책임질 터이니 내 이름 긋고 마시게.'
한다.
이 분 이름이 이태성이다.

점심은 긋고먹는 배달도시락이었다.춥고 배고프던 시절이라 그것도 일미였다.담배값 절약하려고 하루방 담배 피웠다.명동서 마도로스 파이프 하나 사서,아침에 잎담배 한번 채우면 한모금 피우고 끄고,점심 먹고 한모금,퇴근 전에 한모금 하는 식으로,한달을 하루방 한통으로 때웠다.
편집국의 나이 많은 고참선배 속에 새파란 수습기자가 파이프 물고다니는 모습을 상상해보라.박모 편집국장이 사정을 알고,'자네 파이프 아주 멋있는데?'격려도 해주시곤 했다.

몸 튼튼하기 다행이지,그러다 병이라도 났으면 어쨌을까?
치료비 때문에 모든게 결딴났을 것이다.

좌우지간 이렇게 1년 버티자 나는 모닝커피 내 돈내고 먹을 수 있게 되었고,재산목록 3호인 25만원짜리 청색전화를 놓았다.(백색전화는 100만원 하던 시절이다) 그리고 집의 한 뼘 땅에 배나무 심고,배꽃 감상하며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월을 살았다.

그 후 신문사를 그만두고 기업체로 옮겨갔다.
몇 년 뒤 축대집을 1천2백만원에 팔고,9백만원 대출 얻어 33평 집을 2천백만원에 샀고,그 집을 3층으로 올려 전세 끼고 9천8백만원짜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들 학군 때문에 강남으로 이사 가서 대치동 13평 주공아파트에서 연탄개스 한번 더 먹고,그 다음 17평 신해청아파트,31평 은마아파트 전세살이 끝에,처음으로 1억짜리 서초동 33평 아파트 마련한 것이 내 나이 불혹 넘어서였다.

1억이면 월100만원씩 저축해도 대략 10년 걸린다.그러나 생계비 교육비 쓰고나면,월 100만원씩 저축할 수 있는 가정이 어디 있던가?

좌우지간 강남 아파트 한 채 마련하느라고 청춘시절 20년을 허비했다.
가난의 뜨거운 맛을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나는 집 마련 후부터 토요일 일요일 없이 무조건 회사 나가 일하고,평일에도 밤 10시 전에는 퇴근을 않았다.누구처럼 친구 만나가며 어영부영 한 것이 아니라,독 오른 독사처럼 살았다.다시는 이문동 전세방 시절로 되돌아가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 덕택에 재계에서 지독한 노인으로 정평이 났던 모 회장이 20년간 감탄하며 나를 자기 최측근에 두었을 것이다.
젊은 시절 혹독한 가난은 이래 인생의 스승이다.

그 다음 이사 간 곳은 강남구 삼성동 61평 빌라.이 집은 대리석 바닥에 벽난로에 욕조와 세면기 보일러 전부 외산이다.정원에는 감 모과 매화 철쭉 앵두 체리 청포도 백목련 자목련 백장미 흑장미 피스 백송(白松)까지 있었다.걸어서 강남 중심지 테헤란로 10분 위치에 이런 정원 있는 집은 드물다.

그리고 퇴직하자 2001년에 집을 외국인에게 월세주고,구리 토평 삼성아파트 45평으로 가서 두번 다시 세상 일은 되돌아보지않고 전원생활 하다가,2005년 초에 수지 61평 대우아파트로 옮겼다.

수지는 서울과 거리는 멀지만,전용 텃밭도 있고,거실 하나가 15평이니 내가 서울에 처음 마련했던 이문동 축대집 건평을 전부 합친 넓이와 같다.내겐 과분한 느낌도 들지만,그동안 고생한 아내에 대한 보답인 셈이다.올봄부터 우리 부부는 호미 들고 텃밭에서 상추 도마도 등 무농약채소 가꾸어 자급자족하며 살 것이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젊어 고생은 돈주고도 못산다'지만,어쨌던 이렇게 살았다.

한가지 자랑스러운 것은 과거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고 우리나라 경제를 세계 11위권에 올려놓은 주역은,지금 386세대가 아니라,이렇게 살아온 우리 해방둥이 전후(前後)의 세대라는 점이다.

 

한강을 따라가며| 隨筆    2008.08.30. 07:27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6

 양재역에서 일산 가는 버스는 한남대교부터 쭈욱 한강을 따라간다.반포동 흑석동 여의도 행주산성을 지나 김포대교 건너 일산으로 간다.딸아이가 사는 일산 갈 때 나는 꼭 9700번 버스를 탄다.

강 보며 가는 길은 심심치 않다.
한강은 발원지인 태백산 검용소(儉龍沼)에서 출발하여 514킬로를 흘러 서해에 닿는다.금대봉의 화려한 야생화 꽃밭을 지나서,정선 아우라지 맑은 여울을 지나서,두견새 울음 우는 영월 청령포를 지나서,백로가 나르는 청풍명월 충주호를 지나서,가로등 졸고있는 여주를 지나서,수종사 종소리 아득한 양수리를 지나서,서울로 흘러온다.

그동안 한강은 수많은 인간사를 듣고 본다.애잔한 아우라지 처녀의 사연을,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의 한을,탄금대에 들려오던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아차산에 얽힌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연을,그 외 수많은 민초의 애환을 듣고 본다.

강은 처음 검용소 석회암 암반을 뚫고 나올 때는 폭포를 이루고 힘차게 솟구쳤고,여의도 근처의 강 하구에 와서는 하폭이 호수처럼 넓어지고,물결은 조용하고,유속은 느려졌다
강은 하구에서 서둘러 달릴 필요가 없다.흐린 물 맑은 물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모든 지류를 흡수하여 하나가 되었고,수많은 아품을 품에 머금고 하나로 되었다.그 모든 구별과 아품은 원래 온 곳을 알 수 없고 간 곳도 알 수 없는 구름 같은 것이었다.그리고 서해로 흘러가 어머니 품에 안기듯 그 넓은 품에 안기는 것이다.
강은 바다가 된 것이다.아!스스로 시원(始原)의 고향이 된 것이다.

인생도 강 같았다.강처럼 천리 떨어진 고향에서 시작한 나의 여정도 처음은 폭포처럼 힘차게 출발했다.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고,타향을 전전하며 슬품의 언덕과 환희의 초원과 좌절의 늪을 지나쳐왔다.해 뜨고 달 지는 세월 속에 부드러운 봄비,차그운 가을비 젖으면서 지향없이 흘러왔다.삶의 회포는 가슴 속에 눈물의 호수 만들고,그리움의 섬 만들었다.수천의 노래 부르고,수만의 길을 돌아왔다.
그리고 문득 환갑 고개 넘고,은퇴의 스크린 뒤쪽에 섰다.나는 이제 하구에 도달한 강처럼 유속이 느려졌고,흐린 물 맑은 물 더 이상 구별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청탁(淸濁) 빈천(貧賤)조차 원래 바다엔 없었다.저 앞의 바다를 보면서 알 수 없는 이의 품으로 조용히 밀려가고 있다.

그 강 따라 외손자를 보러간다.인생은 한편의 드라마였다.나는 막이 내리기 직전의 무대 앞에서 일어나는 관객이었고,손자들은 입장권 사들고 들어와 새 좌석 찾는 관객이었다.이쪽 조명은 어두워지고 저쪽 조명은 불이 켜졌다.일산에 도착하면 나는 가녀린 심장의 고동 느껴지는 손자의 어린 몸을 부드럽게 안아주곤 한다.대본 없이 시작된 연극이었다.꿈결같던 드라마 하나 끝나고 새 드라마 하나 펼쳐지는 것이다.

 

2)여행기

 

초도에서 만난 '춘희(椿姬)'   2008.09.04. 11:32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15

 

 욕지도 사람들은 草島를 풀섬 혹은 풀이섬이라 부른다. 내가 하숙한 집 안주인은 삼십 중반인데 동네가 인정하는 미인이었다.풀이섬이 고향인데,남편은 원양어선 선원으로 집에 없었다.허구헌날 풀이섬 경치가 좋다고 노래를 부르며 가보자고 유혹하는 바람에 어느날 그녀와 뗀마를 타고 풀이섬엘 갔다.

호수같은 자부랑깨 항구 밖을 나가니  파도가 어찌나 거센지,K대 미식축구 선수로 힘 자랑 덩치 자랑하던 나는 손으로 뱃전을 바짝 잡고 숨까지 죽이면서 배가 혹시 침몰하지나 않을까 겁 먹었지만,체구는 작아도 섬여인은 태연하다.그 연약한 손목으로 거친 파도를 가르며 내가 보기엔 아슬아슬하게 노를 저어간다.

얼마 후 물밑의 자갈과 헤엄치는 고기들이 투명하게 훤히 보이는,빈 배 하나 물결 위에 한가히 흔들리고 있고, 언덕에 동백나무 무성한 작은 만(灣)에 배를 대었다.배에서 내리니 바람은 부드럽고,공기는 싱그럽다.물끼 머금어 보석같이 영롱한 자갈은 자르르 자르르 소리 내면서 파도에 씻기고 있고,잎이 반질거리는 동백나무 아래 떨어진 붉은 꽃은 카펫을 깐 것처럼 화려하다.고갱이 타이티에서 본 풍경이 이런 원색이었을 것이다.당시 유행한  '그리운 카프리에 섬나라에,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수정처럼 맑은 바닷가에 처녀들 미소가 풍기네.'노래 가사 속의 '수정같은 맑은 물(Christal water)'이란 표현이 단순한 문학적인 수식어가 아니고 실재하는 곳임을 여기서 알았다.


동네로 들어가니,몇 채 집은 동백나무 팽나무 거목 밑에 담도 없이 자리잡고 있었다.그 중에서 장독대 옆에 앵두가 붉게 익고,느긋이 오수를 즐기던 소가 기척에 고개를 들어 딸랑! 목에 달린 방울소리로 정적을 깨던 집이 아줌마네 집이었다.

'있나?'

'언니야!'

싱싱하게 뻗어간 호박잎이 초가를 덮은 황토벽에 달린 방문이 열리더니,반가움 담긴 한 처녀의 얼굴이 급히 뜰로 내려서는 것이 보였다.처녀는 언니보다 더 미인이었다.까무잡잡한 피부에 늘씬한 몸매,가늘고 짙은 눈섶,삼단처럼 늘어진 머리칼이 문득 보들레르의 '식민지 태생의 한 부인에게' 란 시를 생각나게 했다.'고독'이란 영화 속 엘리자벹태일러가 저랬고,동백나무 춘(椿),계집 희(姬),춘희 아니던가. '듀마휴이스'의 소설 여주인공 '춘희'가 저랬겠다 싶었다.

처녀는 우리가 올 것을 미리 연통을 받고 알고 있은 듯 했다.

‘아부지는?'

'밀감나무 심으러 산에 갔다.'

'나 아부지 보고 오께.'

흘레 시킬 암말 옆에 종마를 데려다놓듯,빈집에 나와 처녀만 남겨두고,언니는 이 말 던지고 산에 가서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언니가 노래 부르며 풀이섬 가자고 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고추잠자리 한 마리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마당 쳐다보는 일 밖에 둘이 할 일이 없었다.그러다 문득 처녀가 생각난 듯,삶은 볏짚을 바가지로 소에게 갖다준다.소는 코뚜레 위로 혀를 낼름 내밀어 처녀의 손을 햟는다.

'소가 몇 살 짜리요?'

'..... ....'

처녀는 얼굴만 빨갛게 붉히고 말았다.수줍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계산된 교태와 수줍음의 차이는 인공과 자연만큼 크다.동백꽃같은 그녀에게 동박새처럼 날개 퍼덕이며 힘차게 날아가고 싶었다.낮선 나를 피해 살짝 돌아선 모습은 영판 사슴 같다.어떻게 늘상 산에서 나무하고,바다에서 뗀마 젓고 자맥질하던 처녀가 저렇게 늘씬한 몸매일까. 야생 사슴처럼 살아서 그런갑다.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점심 때가 되자 처녀가 부얶에 들어가더니 불을 부쳤다.이윽고,마당에 굴뚝연기가 낮게 깔려 코끝까지 냄새 풍기더니,처녀가 개다리 밥상을 들고와 내 옆에 놓고 저만치 물러간다.오직 나만을 위해 낮선 여인이 밥상을 채린 것은 이것이 내 생애 처음이었다.아무도 없는 산 속의 빈 집,새신랑같은 기분이 들었다.돌나물과 게장 한 종지,고구마 담긴 소쿠리만 하나 달랑 놓인 밥상이었다.

'같이 식사 합시더.'

인사말에 마당의 봉선화 보다 더 붉어진 처녀는 숲매미 소리 나는 뒤뜰로 달아나 버린다.

인적없는 마당의 봉숭아 꽃잎이 햇볕 아래 너무 고왔다.

좀 있다 처녀가 하얀 대접에 물 한그릇 들고오더니 대청 끝에 놓고 저만치 앉는다. 

'보이소 예.'

날개 달린 사자가 그려진 비사표(飛獅標) 팔각형 성냥통에 성냥을 그어 담배불 부치면서 처녀에게 말 부치니 처녀는 얼굴만 붉히고,

‘보이소 예.’

은근히 두번째 부르니 그만 홍당무가 되어 뒤뜰로 달아나 버린다.

고개 돌려 돌아보니 지붕을 덮은 감나무만 시퍼런 감을 주렁주렁 내 앞에 흔들고 있었다.


박목월의 시를 속으로 외워보았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한다.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흙담 안팍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한다.쑥대밭처럼 살아라한다.산이 날 에워싸고,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슴,구름처럼 살아라한다.바람처럼 살아라한다.


일부러 점심 굶었는지,해거름이 되어서야 내려온 노인은,

'면에서 밀감나무를 무상으로 심으라캐서.'

변명 비슷한 말을 하고

'아부지! 제주도는 밀감나무 하나 키우모,자식 대학공부 시킨다 않캅디꺼?3년만 있으모 우리도 수확합니더.'

언니는 누구 들으라는 것인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설명한다.


마당가에서 언니 얼굴만 보며 배웅하던 처녀를 남겨두고 뗀마 타고 바다로 나오니,섬에 걸린 구름은 주황빛이고,어둠 내리는 바다는 황금빛이다.배가 바다 가운데로 나오자,어느새 멀리 처녀네 토방의 아주까리 등잔불이 별처럼 빤짝인다.‘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조수처럼 밀려왔구나.’장만영의 시같은 달빛이 언니의 노질 따라 하얀 은파를 끝없이 일으킨다.


욕지면 전체서 대학생,그것도 서울서 대학 다닌 사람은 드물던 시절이다.원하면 풀이섬이 나의 유토피아가 될 수 있었다.풀이섬은 멀지않아 오렌지 향기 바람에 날리는 곳으로 변할 것이다.동백꽃은 해마다 붉은 카펫처럼 해변을 덮고,물 속의 풍부한 어족은 혼자의 소유가 될 수 있었다.솔로몬의 영화보다 황야의 한송이 백합이 더 귀하다 하지 않던가.풀이섬 처녀와 낙원의 연인이 될 수 있었다.처녀의 마음은 오염된 도시의 아무 것도 그려지지않은 Tabula rasa(白紙) 였다.그 처녀와 꽃과 약초를 키우며 사색하며 사는 인생도 시도해볼만한 것이었다.아! 그러나 사람은 항상 엉뚱한 길로 가버린다.얼마나 어리석었던가.나는 끝내 궁금해하던 아줌마에게 대답을 않고,유토피아를 외면하고 뭍으로 나와버렸던 것이다. 

 

 

속초에 가신다면| 隨筆

 2008.08.31. 07:57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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