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수필 쓰는 법/윤수영 선생에게

김현거사 2012. 6. 15. 20:21

윤수영 선생님 전

수필작법이 어렵다고들 하고, 수필작법에 대한 책을 보면 복잡하기만 합니다.

그래 수필 공부하는 법을 나대로 연구해본 것입니다.

참고 되시면 좋겠습니다.

                                 김창현 드림

또하나 글 올립니다.현 문인협회 고문인 평론가 이유식 선생의 수필작법에 대한

<새 시대 수필이론 다섯 마당>의 서평 입니다. 동방문학 2009년 12월호에 실린 글 입니다.

 

 

   쉽게 수필 쓰는 법

                                                                                                                            김창현

 

  수필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쓰면 되는가. 여러 사람이 고민하는 것을 보았다. 은퇴 후 수필가란 것이 되자 나도 이 문제에 부닥쳤다. 그래 여러 수필 이론을 읽어보았으나 아하 이렇게 하면 수필을 쉽게 쓸 수 있겠구나 싶은 글은 없었다. 그래서 늦깍기 나름대로 쉽게 수필 쓰는 법을 좀 연구해보았다. 기존 이론서에 흔한 수필의 성격이니, 역사니 하는 것은 생략하였다.  

 

  隨筆은 글자 그대로 따를 수(隨)에 붓 필(筆)이다. 마음 따라 붓 따라 가면 된다. 그런데 글 쓸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숙제를 앞 둔 아이들처럼 마음은 딴 데로 가버린다. 머리 속이 하얀 백지처럼 비어버린다. 글이 나가지 않는다. 왜 그런가. 이것이 문제다.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

 

  우선 쓸 '꺼리'가 없는 사람은 고양이 쥐 잡는 모습을 한번 자세히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법 하다. 고양이는 항상 쥐를 노린다. 담을 넘어 쥐의 흔적을  살금살금 따라가고, 쥐구멍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기도 한다. 만약 우리도 고양이처럼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 하루 24시간 마음 속의 수필 '꺼리'를 찾고, 쥐구멍 앞의 고양이처럼 신경을 집중하여 거기 매달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한밤 중 자다가도, 새벽에도, 화장실에 앉았다가도, 버스 타고 다닐 때도, 일구월심 고양이 쥐 노리듯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마치 고양이들이 쥐가 나타나면 앞발로 날쌔게 후려치듯이, 떠오른 생각을 즉각 메모하여 꼼짝 못하도록 메모하는 습관을 가졌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글감이 없다느니.여행을 가서 얻어와야 겠다느니 궁색한 소리는 전혀 필요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알다시피 인간의 머리는 컴퓨터보다 복잡하다. 수만가지 기억과 정서가 회로에 저장되어 있다. 아마 국립도서관 책 보다 많을 것이다. 세상에는 인간의 희비애락도 많고, 종교에는 고요하고 맑은 경지도 많고, 산수간에는 꽃 피고 새 울지 않는가. 쓸 '꺼리'는 너무 많다. 우리 마음 속 창고에는 옆 사람에게 할 말이 너무 많다. 독방이 감방에서 제일 괴로운 것은 옆에 말을 건넬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걸 메모하는 습관만 들인다면 일의 반은 해결된 것이다.

 

 그 다음은 암탉을 한번 살펴보자. 암탉은 비가오나 눈이 오나 소중히 알을 품는다. 친입자라도 나타나면 꼬꼬댁 꼬꼬댁 야단법석을 친다. 그러다 어느날 알 속에서 삐약삐약 병아리 소리가 들린다. 병아리는 곧 깃털이 생기고, 날개가 생기고, 아장아장 걸음마도 한다. 수필도 이와 같다. 좋은 소재를 메모했으면 다음은 암탉이 되어야 한다. 마음 속에 수필 소재를 사모치게 품고 다니면 신기한 현상이 일어난다. 생각이 점점 성숙해지는 것이다. 날개가 돋고, 삐약삐약 병아리 소리가 난다. 혹시 암탉을 잡다가 뱃속의 알주머니를 본 적 있는가. 크고작은 알이 줄줄이 달려있는 것을.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잡는 것이 수필 아니다. 떠올랐다 사라지는 생각을 고양이처럼 집요하게 움켜잡고, 암탉처럼 혼신의 힘으로 마음 속에 오래 품어 병아리로 만드는 게 수필이다. 수필 쓸려는 사람은 이런 크고작은 알주머니를 속에 줄줄이 달고 있어야 한다. 그  알주머니 속에서 큰 놈부터 차례로 나오는 놈이 수필 '초고' 이다. 이 초고는 엉성하거나 횡설수설이라도 상관 없다. 엉터리라도 상관 없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먼저 초고 한 편은 써놓고 볼 일이다. 그래야 일이 쉽다. 

 

 일단 초고가 완성되면, 그 다음 과정은 고등어 다듬듯 하면 된다. 도마에 올려놓고, 쓸데없는 비늘 벗겨내고, 꼬리 짜르고, 지느라미 짜르고, 내장 뽑아낸다. 생선으로 구울 것인지 짭짜롬한 냄비찌개 만들 것인지 결정 한다. 구울 것은 칼집 내고, 소금 치고, 어떤 불에 어느 정도 노릿노릿하게 굽는 것이 좋을까 궁리한다. 찌개꺼리는 고추 후추 양념도 칠 준비한다. 간을 어떻게 맞출지도 생각한다. 파도 넣고 생강도 넣어본다. 포도주도 좀 쳐야 잡냄새 없을 것이다. 양념 잘 쳐서 부드럽고 매콤한 요리 만들까, 살짝 쳐서 담백한 맛이 나게 할까, 그것은 각자 맘이다. 

 

  다음 과정은 과메기 말리듯 기다리는 과정이다. 건조대에 걸어놓고 해풍도 쐬고 눈도 맞혀서 몇번 얼였다 녹였다 두어둔다. 시간을 보낸다. 술 빚는 양조과정처럼 적당한 숙성이나 증류 또는 여과과정 거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시간이 약이다. 문장은 항상 며칠 뒤에 보면, 수정하고 추가하고 삭제할 부분이 보인다. 주제가 제대로 전달된 것인지, 전체 배열이 자연스러운지 보아야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글은 죽은 글이다. 마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울어난 글이 좋은 글이다. 글이 길다 싶으면 짜르고, 짧다 싶으면 보태야 한다. 우물쭈물 주제 불분명한 글은 그 부분 때문에 글 전체를 죽인다. 옛날 사람은 글에 능한 것을 ‘좋은 글’로 여긴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을 수 없어 쓴 글을 ‘좋은 글’로 생각했다. 주제 불분명하고 우물쭈물 미사여구로 덮은 글은 문장의 독소다. 반드시 짤라내야 한다. 너무 딱딱하다 싶으면 몇대목 서정적인 표현도 넣어야 한다. 흔히 수필을 마음의 산책이라고 한다. 산책은 마음이 자유롭고 산뜻해야 좋은 산책이다. 산책 나가서 공연히 어려운 소리 한다던가, 자기 자랑 한다던가, 품격없이 시장바닥 이야기 하면 낙제다. 그런 데이트는 반드시 실패한다. 이런 수정 과정은 많이 거칠수록 좋다. 그래야 묵은 김치처럼, 오래된 포도주처럼 된다. 감칠 맛, 부드러운 향기가 생긴다.

 

 이 공정 거치면 마지막 옥을 다듬는 공정으로 가야 한다. 문장을 거친 끌로 파내어 다듬고, 부드러운 페이퍼로 갈아주고, 가죽으로 반질반질 광을 내며 다듬어야 한다. 흔히 글 만드는 작업은 뼈를 깍는 작업이라 한다. 구양수는 글을 지으면 벽에다 붙여놓고, 볼 때마다 고쳤는데, 완성되고 나면 처음의 것은 한 글자도 남지 않은 적이 많았다고 한다. 소동파는 적벽부(赤壁賦)를 지을 때, 그 글 초고가 수레 석대에 가득 했다고 한다. 두보는 시를 쓸 때, '나의 시가 감동을 주지못하면 나는 죽어서도 쉬지 않겠노라(語不驚人 死不休)'고 했다고 한다. 그에 비하면 수필을 쓸 때, 고양이처럼 잡고, 암탉처럼 품고, 고등어처럼 요리하고, 과메기처럼 말리고, 옥처럼 광을 내라는 요구는 실로 간단한 요구일 것이다.

 세상에 글 만드는 일만 어려운 것 아니다. 부인들 장 담그는 일도 어렵다. 좋은 콩 사오고, 장작불에 삶고, 메주 만들고, 곰팡이 피우고, 장독 소독하고, 빨간 고추 숯 넣은 소금물 붓고, 햇볕 잘 드는 장독대에 올리는 일도 일곱번의 과정 거치지 않던가.

 

  끝으로 사족 하나만 단다면, 수필은 음주와 비슷하다. 취한 후에 노래가 나온다. 취해야 우물쭈물 하지않고 쉽게 무대에 올라가 한 곡 때릴 수 있다. 심지어 불러서 즐겁고 들어서 괴로운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수필을  멀쩡한 생정신으로 노래 할려니 어렵고, 곡목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곡목은 사람마다 십팔번 있지 않은가. 뽕짝도, 샹숑도, 크라식도 있다. 심팔번은 남이 정해주는 것 아니다. 자기 부르고 싶은 노래 부르면 그만이다. 그걸 개성이라 한다. 수필은 온갖 경험과 사색과 정서를 믹스한 폭탄주를 자주 마셔야 잘 나온다. 흔히 이렇게 취한 사람을 작가라 한다. 

 

 

<새 시대 수필이론 다섯 마당>을 읽고

                                                                                          김창현/수필가

 

수필이 온갖 양념과 고명을 잘 얹은 맛깔난 음식이라면 오죽이나 좋을까.그러나 애석하게도 하고많은 음식에서 맛깔난 음식이 드물듯,수필가는 많지만 <인생의 수면 위에 어리는 안개와 수증기,봄 들판에 아롱거리는 아지랑이,비 개인 하늘에 걸쳐있는 무지개 같은> 여운있는 수필을 내놓는 작가는 드문 것 같다.

수필을 어떻게 쓸 것인가.원로평론가 이유식 교수의 근작 <새시대 수필이론 다섯 마당>이 그 답이 될지 모른다.

이 다섯마당은 문학평론가로서 저자가 그동안 현대문학 수필문학 등 많은 전문지에 발표했거나,각종 수필 주제 세미나 강사로 강의한 내용을 엮은 것이다.

첫째 마당은 수필의 역사,둘째 마당은 수필의 영역,셋째 마당은 수필 고품질화를 위한 전략,넷째 마당은 저자의 작품을 통한 체험적 수필 작법,다섯째 마당은 수필계 원로들의 이교수 수필에 대한 평이 소개되어 있다.한마듸로 수필 이론과 실기가 함께 아우러져 멋진 수필을 염원하는 작가나 수필 애호가를 위한 수필입문 교과서,혹은 요점 정리 텍스트북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법 하다.

원래 평론가란 면도칼처럼 예리하게 시나 수필을 조각조각 찢어발기고 해부해보는 외과의사요,작가 기량을 차급게 점수 매기는 까다로운 선생님이다.그래서 평론가의 손에서 나온 수필이론서라면 우선 딱딱하고 사변적일 것이 분명하다고 미리 예단하기 쉽다.그러나 이 경우는 매우 다르다.

이교수가 <넷째 마당>에서 인용한 본인의 체험적 수필 작법에 인용된 <다리>란 작품부터 우선 살펴보자.

 

다리는 육지와 육지를 연결해주는 관문이요,땅과 땅의 중매쟁이요,허리띠며,길과 길의 악수다.다리는 새로운 세계로 뻗어나가고자 하는 욕망의 콤마요 접속사며,잠시 경관의 아름다움에 도취케하는 탄성의 감탄부호며,종착지의 마침표를 향해 가는 욕망의 간이역이다.

다리는 늘 두 다리를 뻗고 부동자세로 서있는 견인주의자다.육로가 산문이라면 다리는 시다.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물새가 날고,물의 음악이 흐르며,달빛이 흐르고 햇살이 반짝어린다.자연의 조화가 하늘의 무지개라면 인간의 조화는 다리다.지상에 놓여진 다리를 보아왔던 몽상가들이 문득 하늘의 은하수를 보고 상상해낸 창작품이 바로 오작교다.지상의 다리가 하늘에 투영된 것이 이른바 견우직녀 이야기가 아닌가. (후략)


또다른 작품 <구름>을 살펴보자.


구름은 국적도 없이 비자도 없이 정처없이 떠다니는 방랑자요 여행객이며,자유주의자요 무정부주의자다.지상의 삶이 그 무엇에서건 구속당해야만 하는 인간들은 저 구름의 자유를 그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구름은 변용의 천재요,조화자며,물의 딸이요 비의 어머니다.영국 시인 쉘리가 <구름>이라는 시에서 노래했듯 하늘이 길러주는 유아(幼兒)다.

구름은 신의 예복이요 옷자락이며,두루마기요 도포며,허리띠요 모자다.그런가하면 무욕주의자로서 떠다니다 자기 몸이 무거워진다 싶으면 금방 비를 뿌린다. (후략)


이처럼 아깃자깃 수필의 멋진 골목길로 재미있고 친절하게 끌고가는 작가는 드물다싶다. 비록 자신은 <비평활동을 오래 하다보니,사고훈련이 분석,종합,평가가 습관화 되어있어 수필을 쓸 때에는 자연히 논리적 수필에 맞는 소재와 주제를 찾는 것이 버릇인양 되었다>고 말하지만,글은 그렇지않다.사변적 현학적 구렁텅이에 빠져서,독자가 외면하여 도망가버리고 작가들만 남은 문학이 된 오늘의 현실을 이교수는 이미 오랜 문필 생활을 통하여 잘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그의 글은 이해하기 쉽고 뜻이 명료하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나는 현재 한국 수필에서 이처럼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서 얻어진 인용과 풍부한 비유로 글맛 풍기는 글을 별로 만나지 못했다.글 속에 에스프리와 지성과 윗트가 인기 가수 무대의상에 붙은 빤짝이처럼 빤작빤작 빛난다.목적 정하지않고 마음 내키는대로 나선 자유로운 산책이 수필이라면,수필은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모범답안지인 것이다. 

<다섯째 마당>에서 수필문학가협회 회장 강석호씨가 말한 <그의 수필활동은 상대적으로 평론활동에 가리어 다소 손해를 보고있다.오로지 수필가로서 만으로도 사실은 독자적 평가를 받고도 남음이 있다>란 말에 탁 무릎이 쳐진다.사실 이교수는 89년도에 ‘스포츠서울’에 <유행가에 나타난 세태>란 테마에세이로 40여회 매주 연재하여 해당지의 지가를 올린 과거(?)를 가지고 있고,60년대 초에 부산 국제신보에 <회색의 자화상>이란 테마에세이를 연재하여 수필가로서 역량은 일찌기 검증된 바 있다.

독자가 그의 글 한두편만 읽다보면 흡사 불랙홀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어 전 작품을 단숨에 다 읽어버리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이교수는 수필평론가 한상렬씨 표현대로,<그는 이미 80년대 초부터 여덟권의 수필집 내놓은 어느 수필작가보다 왕성한 수필작가요,수필작가 이전에 수필이론을 개척한 평론가>인 것이다. 

수필이 일단 이런 문필력 친화력에 이끌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된 이상,그의 수필 이론 역시 다르겠는가.같은 뿌리에 달린 감자처럼,역시 이해하기 쉽고 뜻이 명료하다.

<셋째 마당>  '수필고품질화의 전략'에서,그는 '수필은 대형간판이 거창하게 붙은 '불고기집'이나 '불갈비집'이 아니라 골목 어귀에 있음직한 '꼬리곰탕집'이거나 '족발집'에 비유될 수 있다.'고 정의한다.유머와 위트의 필요성에서는 '수필의 오미(五味)를 들라면 새타이어,아이러니,패러독스,유머,위트가 아닐까 싶다.그것들은 수필의 독특한 맛을 내주는 양념이요,독자를 이끌어주는 고명이다.꽃으로 말한다면 향기와 같다.'는 식으로 설명해준다.그외 참신한 주제 찾기를 위한 발상법을 소개하고,경수필과 중수필의 차이,수필과 시의 관계를 논하고,수필에서의 허구 수용 문제 등 현안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지금은 시나 소설이 지나친 사변과 현학,난해성으로 독자들을 상실한 반면,그동안 서자시(庶子視) 당하던 수필이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글 읽고 싶은 독자층의 대두에 따라 더 매력적으로 부각되고 있다.수필작가들의 숫자도 괄목할만치 늘었다.늦둥이 수필이 이제 백화만발한 새로운 텃밭으로 대두될 시점이다.누가 수필에서 몽테뉴 베이컨같은 인생의 깊은 사색이나 예지를 담는가는 앞으로의 일이다.이 시점에서 이교수의 <새시대 수필이론 다섯마당>이 시의적절한 기폭제인 것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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