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지구문학 김시원 주간님 전

김현거사 2014. 4. 7. 16:57

      김시원 주간님 전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이유식 선배님 권유로, 김주간님 앞으로 신작 수필 1편 보내어 조심스럽습니다.

 저는 청다 이유식 문협 고문님 진주고 후배로, 청다문학회 회장과 진주 문인들 모임인 남강문학회 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처음이라 간단히 본인 경력 소개드리면,  내외경제신문 기자, 아남그룹 중역, 동우대 겸임교수를 거쳐, 2007년부터 수필을 시작하여, <수필문학> <한국수필> 등에 몇 편 글을 실은 바 있습니다. 보잘 것 없는 글이라 부끄럽습니다만, 올립니다.

                                                                                   4월 7일  김창현 배상

 

주소;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수지로 113번길 15 LG2차아파트 207동 302호(우편번호 448-747)

전화;010-2323-3523

 

 

 

   <바위. 그 여러 모습에 대한 명상>

 

 산이 아름다운 것은 산에 바위와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물과 구름과 안개도 있지만, 물은 하산하기 급급한 나그네요, 구름은 허공을 떠도는 방랑자요, 안개는 아침 저녂에만 나타나는 요정이다. 반면 바위와 나무는 항상 산에 머무는, 산 그 자체 이다. 둘을 비교하면, 바위는 남성 이고, 나무는 여성 이다. 바위는 철학자고, 나무는 시인 이다. 바위는 명상을 하게하고, 나무는 시심을 키워준다. 그 중 바위는 산의 뼈대이며, 땅의 기가 모인 곳이다. 그래서 기암절경은 바위에서 나오고, 바위가 없는 산은 평범한 산이 되고만다. 

 

    바위가 많은 산을 악산(岳山)이라 하고, 흙이 많은 산을 육산(肉山)이라 부른다. 설악산과 북악산은 악산에 속한다. 만장같이 거대한 바위가 산정에 버티고 앉아서 천하를 굽어보는 모습처럼 웅혼한 것은 없다. 인간에게 외경심을 가져다준다. 안개에 쌓여서 모습을 반쯤 보였다가 숨겼다가 숨바꼭질을 하는 암봉보다 신비한 것은 없다. 우리에게 구름을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환상을 안겨준다. 바위가 있어야 나무는 그 진면목을 발휘한다. 진달래가 곱게  핀 절벽은 우리에게 봄의 환희를 알려준다. 담쟁이 잎 처절한 붉은 빛에 덮힌 암벽은 우리에게 만추의 애상을 보여준다. 천지 가득한 백설의 암봉에 솟은 구불구불 휘어진 늙은 나무가 화려한 눈꽃을 달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 겨울의 고요를 알려준다. 그 위에 삼존불이 새겨진 바위도 있다. 그 위에 돌탑이 쌓여진 바위도 있다. 그 아래 약수가 솟아나는 바위도 있다. 깊이를 알 수없는 동굴을 가진 바위도 있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도 있다. 강이나 산, 구름과 폭포 무늬를 지닌 바위도 있다. 사람이나 새나 거북이 형상의 바위도 있다. 평원처럼 평평한 바위, 산이나 절벽을 닮은 바위, 그냥 추상적으로 생긴 바위도 있다. 이 모든 바위가 다 신비하다.

 

 나는 이 모든 바위를 볼 때 먼저 이끼부터 살펴본다. 바위가 가장 바위다운 품격을 지니려면 우선 이끼가 아름다워야 한다. 이끼는 태고 때부터 착용한 바위의 유일한 옷 이다. 가장 고운 이끼는 '비단이끼'다. '비단이끼'는 최고급 초록빛 카페트 같다. 산신이 와서 쉬어갈 요량으로 펼쳐 놓은 비단이불 같다. 너무나 부드럽고 미끈하여 무심히 발을 딪기에는 뭔가 미안하다. 그 곳에 씨앗은 바람에 날라와서 보일듯말듯 가날픈 꽃을 피운다. 참으로 신비스럽다. '서리이끼'란 것이 있다. 주로 고산의 큰 바위에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데, 색깔이 서리가 내린듯 하얗다. 고산의 준엄함과 깔끔함이 내비쳐, 이끼 중에서 가장 품격이 높다. 해발 1천미터 이상의 바위에는 석이(石耳) 버섯이 자란다. 흑지(黑芝), 석지(石芝)라고도 불리는데, 항암작용이 있으며, 오래 먹으면 얼굴색이 좋아지며, 눈을 밝게 한다. 이런 이끼와 석이가 온통 표면을 뒤덮은 바위야말로 제대로 격을 갖춘 바위이다. 이런 바위 앞에 정좌하면 가장 고요한 명상에 빠질 수 있다.

  

 바위의 또다른 매력은 폭포 옆에서 볼 수 있다. 천인절벽 밑으로 은하수처럼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있는 위태로운 바위는 장엄미와 비장미를 지녔다. 경탄과 외경을 느끼게 한다. 천둥같은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하얀 물줄기는 바위를 만나면 산산히 부서진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물의 위력을 받아내는 바위의 모습은 장엄하고 호쾌하다. 작은 외부 충격에 흔들리는 인간의 나약함을 뒤돌아보게 한다. 절벽에 용처럼 뿌리를 서린 노송은 바위의 다정한 친구다. 둘이 만난 모습은 한 폭 그림이다. 물보라 속에 나무와 암석이 서로 굳건히 껴안은 모습은, 우리에게 삶의 자세가 어때야 하는지를 가르켜준다. 간혹 물 위로 평평한 대를 이루고 뻗어나간 넓은 반석을 볼 수 있다. 그  아래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물결에 낙화가 떨어져 흘러가는 모습, 안개 속에 목덜미에 푸른 띠를 두른 어여쁜 새가 날아와 목을 축이는 광경은, 참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청량제다.

 

 

 선인들은 바위 옆에 난초나 국화를 키웠다. 매화나 대나무를 심기도 했다. 바위는 말이 없지만, 이들의 조화는 오히려 고결하다. 바위는 천년을 침묵하지만, 사람들은 바위에게 가련한 백년의 꿈을 의탁했다. 불상을 새기고, 경전을 보관했다. 돈황 석굴에 불경을 보관했고, 사해 근처의 한 동굴에 희브리어로 씌여진 성경을 보관했다. 나는 선천후천 세계를 관통한 바위를 신성하게 생각한다. 바위를 미륵이나 부처로 생각한다. 명상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기도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종교와 철학의 산실로 생각하고, 현자의 거처로 생각한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바위 앞에서, 나는 난초나 국화처럼, 매화나 대나무처럼 살고 싶다. 총총한 별빛을 벗 삼아, 고고한 침묵을 배우고 싶다. 인위적 흔적이 없는 자연 그대로의 암석 앞에서, 나는 1천7백 개의 공안을 풀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