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이사를 하고나서

김현거사 2011. 11. 5. 08:27

  수양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인생이 여행같다는데, 짐은 가벼울수록 좋다는데,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신혼 땐 이문동 달동네에서 리어카 빌려 내손으로 직접 이사 했었다. 그 때 리어카에 실은 것은 책과 캐비넷과 선풍기가 전부였다. 딸아이는 아내가 업고, 네살배기 아들놈은 걸렸었다. 서울서 가장 싼 전셋방이었다. 참 단출했지만 행복했었다.

 노후엔 맘 비우고 버릴건 버리며 살아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지만 현실은 다르다. 수지서 서울로 날라온 짐이 적지않다. 이사비용이 170만원 견적에 수고비 30만원 보탠 2백만원이었다. <통인>의 대형차 두대에 싣고왔다. 빌라는 좋게 말하면 아파트와 단독주택 양쪽의 장점을 딴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양쪽 단점 다 지닌 것이다. 대형차는 마당에 들어오질 못했고, 애꿎은 짐 나르는 사람들은 혼이 났다. 짐을 골목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다시 이층 높이의 계단으로 올려야 했다. 혼자서 침대도 냉장고도 번쩍번쩍 메는 전문가 여섯명이 모두 파김치 되고 말았다.

 제일 골치 아픈 놈이 대형 냉장고 였다. 현관 문 따고 냉장고 문 떼놓고서야 집안에 들어왔다. 외제 샀던 벌이다. 20년된 이놈은 값 하느라고 옮긴 후 고장이 났다. 수리비 16만원 먹었다. 그 다음이 서재 물건이다. 

 

 

천정까지 가득찬 책은 돈 없던 대학생 때부터 모은 것이다. 부피 큰 경전, 동서양고전, 사전, 내 수필 실린 책, 아는 선배님들 글 실린 책, 발표 못한 원고더미, 읽지않은 시집 수필집 이다. 경전 사전류는 이젠 전부 컴퓨터가 대역을 할 수 있을 터, 시원하게 대충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밑줄까지 쳐가며 든 정이 얼만가. 어디다 펴놓지도 벽에 달지도 못할 병풍과 액자와 족자, 철제 부처님. 향로. 탑. 범종. 달마상. 반야심경. 공자님 초상. 벼루 화선지도 따라왔다. 이건 버릴려면 아깝고 가지고 다닐려면 짐 되는 존재다. 내무반장이 갖다버리라고 군기 잡는 제1호 대상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그동안 내가 오욕칠정의 세상을 잊고 피안으로 도망갈 때 밟던 징검돌들 아닌가. 

  막상 버릴 것은 부얶에 수두룩하다. 두개만 있으면 되는 커피잔이 손님이 얼마나 자주 온다고 그리 많은지. 생전 끓여 내지도 않는 차는, 녹차 홍차 커피 해서 그 종류가 왜 그리 많은지. 그나마 장식장 큰 놈 두 개를 딸아이집에 주고온 것이 후련하다.

 일하는 분들이 정원에다 분재와 돌탑까지 옮기면서, 속으로 뭐랬는지 나는 안다. '어르신 인생은 도로아미타불 같습니다요. 재물도 않되는 이런 것만 잔뜩 있으니....' 그랬을 것이다. 소나무 분재는 나혼자 들기도 버거운 것이다. 그 무거운걸 계단 위로 옮겨준 것이다. 미안하기도 하고, 젊을 때 고생한 동병상린의 감정도 있어 수고비로 30만원을 더 드린 것이다. 

 신혼시절엔 냉장고 TV도 없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이젠 끄터머리에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갈 때다. 가을 나무는 잎을 떨어뜨리고 선다. 가을나무가 되어야 한다. 순리를 익혀야 한다. 이번에 이사를 하고나서 그런 걸 느꼈다. 아직 정리안된 서재에 들어온 내무반장이 또한번 침을 놓았다. '책 좀 정리해서 버릴 건 버려라'고. 나는 다시 申欽의 <野言選>을 읽어보았다.

 '모든 병은 가히 고칠 수 있되, 속된 것은 고칠 수 없으니, 속된 것을 고칠 수 있는 것은 오직 책이다. 독서는 이가 있으되 해가 없고, 산과 계곡을 사랑함은 이가 있으되 해가 없고, 꽃과 대와 바람과 달을 완상함은 이가 있으되 해가 없고, 단정히 앉아 靜默에 잠기는 것은 이가 있으되 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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