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동창

눈이 내립니다.

김현거사 2011. 1. 19. 09:47

 

 눈이 내립니다. 하얀 깃털같은 눈이 사뿐사뿐 내립니다. 눈은 노랗게 시들은 국화 대궁이 위에도, 사철나무 푸른 울에도, 단풍나무 분재 위에도 내립니다.

 새들은 눈을 맞으며 부산히 날개짓하며 떼지어 다닙니다. 그 새는 머리통이 검고 가슴이 부드러운 밤색입니다. 동박새일가요 곤줄박이새 일까요. 눈에 덮히면 며칠간 먹이가 없겠다 싶은지, 새들은 눈이 덮히기 전에 먹이를 찾으려고 분주히 시든 풀잎을 뒤지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의 풍성하던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윽히 내려 쌓이는 눈을 바라보느라면 마음은 먼 과거로 달려갑니다. 소년은 겨울이 오면 남강 다리 위를 걸어 학교에 다녔습니다. 거기서는 지리산 천왕봉 토끼 귀처럼 생긴 두 봉우리에 쌓인 하얀 눈이 보였습니다. 등교하던 그 다리에서 보고싶던 소녀가 있었습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하얗던 소녀입니다. 그 소녀 모습이 눈 속의 수선화처럼 청초하게 떠오릅니다. 아다모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소녀는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요.

  일찍 타계한 친구 생각도 납니다. 그는 희랍에서 철학박사를 받고 모교 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통일로 희랍정교회 묘지 속에 누워 있습니다. 그의 무덤 잔듸 위에도 눈이 쌓이고 있겠지요. 임종 때 그 친구의 마지막 숨결이 생각납니다. 희랍 정교회 신부님이 집행하신 장례미사의 장엄하던 성가가 귀에 들려 옵니다.

 속초에 살았던 시절이 생각 납니다. 속초는 눈이 내렸다 하면 밖에 세워둔 승용차가 완전히 눈 속에 묻히곤 했습니다. 며칠씩 미시령 고개가 막히곤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눈 덮힌 영랑호와  한계령 설경을 볼려고 차를 몰고 나서곤 했던 일들이 생각납니다. 눈 쌓인 백담사에서 함께 차를 마셨던 대학 선배가 생각납니다. 지금 그 분은 가고 백담사 뜰에는 그 분의 시비만 남아 있습니다. 아마 눈은 그 위에도 소복히 쌓이고 있겠지요.

  잠시 내린 눈이 장미 덤불에 소복히 쌓였습니다. 장미는 겨울에도 검푸른 잎을 달고 있습니다. 한 때 그렇게 붉고 향기롭던 꽃송이는 검게 변한채 눈꽃이 되었습니다. 시든 꽃송이는 검붉은 모습입니다. 아름답던 붉은 빛이 눈 속에 아른아른 배여나고 있습니다.  

 백설은 붉은 꽃송이를 흰빛으로 만들고, 과거에 만난 사람들을 하얀 추억 속 인물로 만듭니다. 천지를 그리움의 세계에 묻히게 합니다. 마음까지 순백의 세계에 묻히게 합니다. 눈은 축복이면서 안타까움 일까요. 사람을 장미꽃송이처럼 검붉은 추억 덩어리로 만들어 주는군요.

 눈은 겨울이 쓰는 서정시 일까요. 아니면 동화 일까요. 눈 속에 성냥팔이 소녀가 서 있습니다. 그가 누구라도 좋겠지요. 눈이 그치기 전에 거리로 나가서 그 손에 몇푼의 작은 성의를 쥐어주고 싶습니다. 눈은 동화처럼 아름답게 쌓이고 있습니다. 은백의 시가 되어 가슴 속에 쌓이고 있습니다. 산속처럼 고요한 가슴 속에 소복소복 쌓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하얀 눈길을 걸어가고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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