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천리길(3)
평소 남녀는 별처럼 머나먼 존재이다. 수천수만 광년 거리에 떨어진 별처럼 말을 건넬 수도 만날 수도 없다. 그러나 한번 입술이 닿은 후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존재가 된다.
정수는 그 뒤 진주에 내려가기만 하면 소희의 집에 머물렀다. 거기 강돌로 낮은 꽃담을 두른 별채가 있고, 별채 앞 작은 연못가에 늙은 매화나무가 있다. 창을 열면 대숲 너머로 반송(盤松) 키우는 넓은 묘판과 배 과수원이 보였다. 정수는 소희 아버지 서재였던 그곳에 머물곤 했다. 소희 아버지는 진주의 마지막 선비 성환혁 선생의 친구다. 부친은 해인대 효당(曉堂) 최범술 스님과 다도를 논하고, 비봉루 은초(隱樵) 정명수 선생과 추사체를 논하던 선비이다.
소희는 아버님 곁에서 다도와 서예를 배우다가 부친이 돌아가시자 빈 집에 혼자 살았다. 새벽에 일어나면 머리와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대밭을 바라보곤 했다. 그 모습은 그대로 그림 속의 선녀였다. 이슬 젖은 댓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은 그처럼 청초할 수 없다.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풍죽도(風竹圖) 같은 속에서 새들은 지저귀고, 그림 속의 여인은 밝아오는 남강의 여명을 바라본다. 정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 선녀를 만난 기쁨을 느꼈다. ‘소희 때문에 대나무가 얼마나 아름다운 나무인지 알았소.’ 정수가 이렇게 말하면, 소희는 '저는 아직 대나무의 멋에는 반도 못돼요'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곤 했다.
소희는 부친한테서 물려받은 세련된 청화 백자 잔을 가지고 있었지만, 투박한 백자도 사랑했다. 촉석 공원 밑 인사동 골동 가게에서 커다란 수반을 구해와 거기다 연꽃을 키웠다. 7월이면 넓은 연잎 속에서 붉은 연꽃이 피어오른다. 그때 집 전체는 연꽃의 청정한 분위기에 쌓인다. ‘화분에 거름 대신 오징어 조각을 넣으면 연꽃이 더 소담하게 핀다'는 걸 소희는 알고 있었다. '밤에 연꽃 봉오리 속에 차봉지를 넣어두었다가 아침에 그 차를 마시면 향기가 좋다'는 걸 정수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연꽃을 사랑했다.
소희는 작은 텃밭을 가꾸고 있어서 거기서 소출된 걸 상에 올렸다. 붉은 딸기나 노란 비파 같은 과일을 백자 접시에 담아내면 예술품 같은 격조가 있었다. 소희는 음식을 품위있게 만들줄 알았다. 여름 비 그치면 둘은 대밭으로 죽순을 따러 다니기도 했다. ‘죽순회는 은어가 제격인데 요즘 남강에 은어가 귀해요!' 소희는 남강에 은어가 귀하다고 푸념 하기도 했다.
소희는 아침에는 검은깨 뿌린 잣죽을 내놓았고, 저녁에는 곰취나 산마늘 같은 산채를 내놓았다. 간혹 다진 조갯살 넣은 부추전도 나오고, 오가피잎 튀김도 나왔다. 소희는 계절에 민감한 여인이다. 소쿠리에 딸기나 자두, 무화과나 복숭아가 담기면 여름이 왔고, 감이나 배가 담기면 가을이 오고, 생강과 통계피 넣은 수정과 나오면 겨울이다. 진주는 남해와 지리산을 옆에 끼고 있다. 항상 싱싱한 갈치와 조개, 참외와 수박 천지다. 소희는 그런 소재를 소중히 다룰 줄 알았다. 진주 여인은 오래된 도시답게 대개 음식을 잘 만든다. 요리엔 관심 없고 외식 즐기는 도시 여인과 다르다. 남편이 출장을 가도 식은 밥이나 먹고 가는지 마는지 모르는 여인들과 다르다. 소희는 정수가 부엌에 들어가면 ‘남자는 절대로 부엌에 들어오면 안 돼요’ 하면서 몰아낸다. 음식은 인간 생명의 원천이다. 부엌은 신성한 곳이다. 소희는 그걸 알았다. 정수는 소희를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의 미인도 속에서 걸어나온 여인이라 생각했다.
간혹 두 사람은 배를 타고 강 건너 약수암으로 건너가곤 했다. 정수는 불경 외우는게 취미고 목탁소리를 좋아했다. 부드러운 물살을 가르며 안개 낀 강을 건너가면 피안으로 가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사랑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게 해주세요’ 둘은 부처님 전에 기도했고, 자라를 진양호에 방생하면서 용왕님 전에 빌었다.
매화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산청에는 ‘산청 삼매(三梅)’라 불리는 세 그루 매화가 있다. 단속사(斷俗寺) 정당매(政堂梅), 남사 예담촌의 원정매(元正梅), 산천재의 남명매(南冥梅)가 그것이다.
정당매는 폐허인 단속사지(趾)에 있는데, 단속사에서 공부한 강희백이 나중에 정당문학(政堂文學) 대사헌이 되었기에 정당매라 부른다. 소희는 강희백의 손자 강희안이 그린 고사 관수도(高士觀水圖)란 그림이 자기 집 앞 약수암 절벽을 닮았다고 했다. 아마 부친에게서 그런 이야길 들은 듯 한데, 강변에 가보니 과연 그 말이 옳았다. 원정매는 고려말 하즙(河楫)이 한옥촌인 남사마을에 살면서 심은 매화다. 집은 지리산에서 흘러온 강이 뒤에 흐르고, 앞에는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7백 년 된 고매(古梅)는 용틀임한 채 고사한 상태였다. 소희는 산청 3매 중 남명매를 제일 좋아했다. 아마 소희 아버지가 산천재(山天齋) 선비들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소희는 산천재의 남명매(南冥梅) 앞에 가면 매화나무를 껴안곤 했다. 꽃잎을 따와서 매화차를 즐겼고, 씨에서 생긴 손자뻘 묘목을 가져와 뜰에 심기도 했다.
만추가 되면 진주에 예술제가 열린다. 그때 진주는 삼바 축제 열리는 리오처럼 들뜬다. 거리는 국화로 덮이고, 성은 단풍으로 물든다. 불 밝힌 수백 대 포장마차는 길에 가득하고, 유등은 남강을 수놓는다. ‘유등을 띄울 때, 학생들이 유등에다 사랑하는 여학생 이름을 적어 강물에 흘려보냈지.’ 정수가 과거를 회상하자,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소희는 이형기의 <낙화>를 읊었다. 정수는 그 시에 답으로 ‘그것은 먼 벌판에 눈이 오는 소리다. 차라리 그것은 먼 벌판에 비가 오는 소리다. 강물처럼 나직이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다’ 최계락의 <낙엽>을 읊었다. 이형기 최계락 두 사람 다 진주가 낳은 천재 시인이다. 촉석루 다녀온 그날 밤, 달빛이 대나무숲에서 보배로운 경전 소리를 실어보내던 그 밤, 두 사람은 허공에 하연 연기 올리는 찻주전자 옆에서 밤 깊도록 시를 논했다. 전원의 맛을 알고 시를 아는 여인을 만난 건 정수의 행운이었다. 소희는 아무도 모르는 남강변에 핀 희귀한 춘란이었다. 정수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고귀한 춘난을 만났으니 더이상 쓸쓸할 틈이 없었다.
(3회 끝)
진주는 천리길(4)
사람들은 흔히 사랑은 아름답다고 혹은 슬프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랑은 끝이 있다. 그래서 더 아름답고 슬픈 것인지 모른다. 정수와 소희는 대개 야심한 밤에 차를 마시곤 했다. 그때는 죽림에 비치는 달빛이 더 아름답고, 풍로에서 꼬불꼬불 전서(篆書)처럼 허공으로 올라가는 하얀 연기는 더 신비롭다. 그때 두 사람은 효당(曉堂) 최범술의 반야로(般若露) 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했다. 효당은 일찍이 해인사 최고 학승이었다. 동경 유학을 다녀왔고, 젊은 시절 일본 황태자를 암살할려고 상해에서 폭탄을 운반해 일본의 박열 의사한테 전달한 분이다. 효당은 차와 선(禪)을 동일시하는 한국 불교의 전통 차 사상과 일본 현지에서 체득한 차도를 정리한 분이다. 근세 한국의 차인이라면 전라도 광주 무등산에 의재(毅齊) 허백련(許百鍊)이 있고, 경상도 봉명산(鳳鳴山) 다솔사(多率寺)에 효당(曉堂) 최범술이 있다. 효당은 차도를 일상에서 찾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복잡한 이론 내세우지 않고, 화로에 불 피우고, 물 끓이고, 물 끓는 소리에서 솔바람 소리 듣고, 찻잔을 씻고, 다실을 청소하며, 다기(茶器)나 서화나 정원의 멋을 감상하면서, 달과 흰구름 벗 삼는 생활이 바로 선(禪)이라고 했다. 진주 사람들은 효당(曉堂)의 차 사상을 따르는 편이다. 그런데 흔히 초의 스님을 우리나라 차의 원조로 알고 있지만, 그건 잘못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차 이론서는 효당의 <한국의 차도>란 저서이다. 초의가 저술했다는 <동다송>은 중국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친지에게 간략히 소개한 서신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저술이 아니다. 정수와 소희가 차를 마실 때는 소희 아버님이 쓰던 참나무 매목(埋木)으로 만든 차반(茶盤)을 사용했다. 그 차반은 오래 동안 땅 속에 묻혀서 지열로 석탄처럼 광택이 나는 보물급 차반이다. 찻잔은 진교 백련리(白蓮里) 백자 잔을 썼다. 백련리는 일본 국보 찻잔 '이또다완'(井戶茶碗)이 출토된 곳이다. 거기서 16세기 전통 막사발을 굽던 가마터도 발견되었고, 백련리 동네 이름은 우리말로 새미골 이다. 이또의 우물 정(井)자는 우리말로 새미(샘)를 의미한다. 둘이 주로 마신 차는 최범술 스님의 죽로차다. 죽로차는 효당이 만해 한용운 스님과 소설가 김동리의 형 김범부(金凡父) 선생과 담론할 때 마시던 차다. 사람들은 흔히 진주를 천년 고도라 부른다. 원래 진주는 가야와 백제와 신라 세 나라 국경을 접했던 요충지다. 오래된 성이 있고 골동품이 흔하다. 고령에서 하동까지 무진장한 고령토 광맥이 뻗어있고, 근처에 가마터가 많다. 진주와 합천에는 박물관이 있고, 안의에는 강 굽이마다 고가와 정자가 있다. 합천에서는 식당에서 개 밥 주던 그릇이 가야 때 토기였고, 사랑방 문짝 한지를 뜯어내자 배접한 두 겹 한지 속에서 대원군 난초 그림이 나왔다고 한다. 소희는 시를 아는 여인이다. 어쩌면 천년 고도 진주가 피운 마지막 꽃인지 몰랐다. 정수는 여성 상위 시대인 서울에 살다가 소희를 만나자 50년 전 어릴 때 고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가을이 깊어지자 정수는 감나무에 올라가 빨간 홍시 서너 개만 까치밥으로 남겨두고 따서 곶감 만들려고 처마에 매달았다. 소희는 술을 담았다. 약수암 근처에서 따온 머루로 머루주 담았고, 집 근처 뽕나무 오디로 오디주 담았다. 시장에서 굵다란 지리산 더덕을 사와 더덕주 담았다. 두 사람은 배추와 무를 김장해서 독에 담아 땅속의 움에다 묻었다. 소희는 선비의 딸이라 그런지 검소하면서 몸가짐이 월궁 항아처럼 청초했다. 정수는 그런 소희를 희귀한 난초처럼 아끼었다. 그런데 물처럼 빠른게 세월이다. 배꽃 핀 봄에 소희를 만났는데, 어느덧 가을이다. 땅에 하얀 서리가 내린 어느 날 정수는 우연히 촉석공원 아래 골동 상가에 갔다가, 오래된 청옥 쌍가락지를 발견했다. 옥 중에 푸른 옥을 비취라 부른다. 정수는 비취옥 푸른빛이 너무나 맘에 들어 큰마음 먹고 거금을 주고 그 가락지를 샀다. 하나는 소희 손가락에 끼워주고, 하나는 본인이 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정수가 비취 반지를 사 온 것이 잘못이었던지 모른다. 소희는 반지를 보자 가만히 한숨을 쉬며 이태백의 시를 하나 외웠다. 월하독작(月下獨酌)이란 시인데, 그 마지막 구절은 이러하다. '醒時同交歡(깨어서는 함께 즐기고) 醉後各分散(취한 뒤에는 각자 흩어지는 것) 永結無情遊(무정한 인연을 길이 맺었으니) 相期邈雲漢(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기를). 시를 읊은 후 소희는 슬픈 눈빛으로 정수를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달려들어 정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이태백은 달을 사랑하여 채석강 물 속의 달을 붙잡으려다가 빠져 죽은 사람이다. 정수를 적선(謫仙)처럼 착각했던지 모른다. '풀잎에 맺힌 이슬같은 인생인데 먼 은하에서 만나자는 약속은 너무나 슬퍼요.' 소희의 몸은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난초처럼 깨끗한 머리칼은 정수의 뺨을 간지럽혔다. '꽃 피는 봄, 잎 지는 가을 서럽고 야속한 시간에 저는 산목련처럼 혼자 살았어요. 그러다가 늦게사 선생님을 만났는데... ' 소희는 말을 더듬으며 흐느꼈다. 밤이 깊어 은쟁반 같은 달이 하늘에 비칠 때다. 정수는 꽃을 다루듯 옥같은 소희의 얼굴을 만지며 눈가에 맺힌 이슬을 닦아주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안도의 말도 해주었다. ‘교수님을 영원히 사랑해도 되지요?’ 소희는 목 멘 음성으로 몇 번이고 정수에게 다짐했다. '오늘은 왜 이럴까?' 정수가 물었더니 소희가 말했다. '감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제가 잠시 부얶에 나갔다가 방으로 들어오려는데 문이 열리지 않더라고요. 교수님이 유리창 너머 방안에 있는 게 환히 보이는데,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소리쳐도 모르시고요. 잠이 깨어 교수님이 주신 옥가락지를 만지며 초생달이 저무는 새벽까지 울었어요.' 그런데 사건은 정작 다음 주 정수가 진주 갔을 때 일어났다. 차를 몰고 약수암 앞에 갔을 때다. 대밭 오솔길 입구에 전에 본 적이 없는 통행을 금지하는 장치가 되어있고, 옆에 팻말이 있었다. '여기 도로 개설 중에 나온 분묘의 연고자는 시청 도로과에 문의 하시기 바랍니다. 또 무덤에서 나온 청화백자, 참나무 매목(埋木)으로 만든 차반(茶盤), 그리고 한쌍의 청옥 가락지는 진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니 그쪽으로 연락 바랍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자 곁의 한 친구가 코멘트를 했다. '이 이야기는 아마 김교수가 현재 도시의 가정 모습을 복고풍의 시선으로 비판한 것 같아보이는데?' 그러자 정수가 대답했다. '아마 그런 점도 있을 거야. 나는 현대 여성보다 100년 전 여인을 사랑한 사람 아닌가?' 그러자 또 한 친구가 토를 달았다. '하기사 우리가 후대로 이어가야 할 가치있는 전통이 시골에 많이 남아있지.' 그러고 그날 모임은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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