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초등학교 시절 친구

김현거사 2021. 9. 5. 09:36

초등학교 시절 친구

내 블로그에는 흘러간 노래가 많다. 마릴린 몬로의 <The River of No Return>, 앤디 윌리암스의  <Moon river>  같은 노래다. 그런데 최근에 그 노래들이 몽땅 날아가버렸다. 음반 보호법 때문에 곡은 사라지고 '관리자에 의해 중단된 동영상입니다'는 멘트만 남았다.

떠난 것은 항상 우리를 허전하게 한다. 노래가 사라져 허전하고, 함께 노래 부르던 친구가 떠나 허전하다. 그런데 지금도 내가 노래방에 가면 꼭 불러보는 노래는 '해운대 엘레지' 다.  그 노래는 나에게 해운대 백사장에 수없이 오고 또 가는 파도같이 추억을 밀려오게 한다. 그는 나에게 이제는 정말  두 번 또다시 만날 길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종대가 이승을 떠난 건 '아버님이 오늘 돌아가셨다'는 따님 전화로 알았다. 우리가 스무 살이던 시절 종대 집은 두구동에 있었다. 부친이 부산 원예고등학교 교장이시라, 집엔 천여평 정원이 있었다. 장미 묘목이 뜰에 가득했고, 큰 바위 옆에 냇물이 흘렀다. 우리는 커다란 셰퍼드가 곁에 누워있는 달빛 아래에서 기타를 치며  <Moon river>와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불렀다. 그 종대가 달빛 같은 추억만 남겨놓고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 불리는 강'( There is a river, called the river of no return)을 건너간 것이다.

전화 받자마자 부산 갈려고 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니 옛날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종대는 내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인데, 부산고에 진학했지만, 방학 때면 늘 나하고 어울렸다. 종대는 역기를 좋아했고,  나는 평행봉을 좋아했다. 둘 다 체격이 보통을 넘었으니, 그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이고, 나는 버드나무를 뿌리까지 통째로 뽑은 노지심이었다.

대학 1학년이던 63년 나는 친하던 철수라는 친구가 자살하자 자학하는 기분으로 군에 입대했다. 항만사 229 자동차 대대 운전병이던 나는 어느 토요일 기름때 씻으려고 온천장에 갔다가 종대를 만났다. 종대는 도를 닦는 사람처럼 금정산 중턱에 토굴을 파고 운동만 하다가, 간혹 하산해 건달들과 어울려 다녔다. 길에서 나를 만난 종대는 이등병 계급장을 단 내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금방 해병대에 입대해서 몇 달 뒤 부산진 해병대 역파에 나타났다. 그때처럼 종대가 근사해 보인 적 없다. 빨갛고 하얀 줄이 쳐진 해병대 헬멧도 근사했지만, 해병대 헌병 완장도 근사했다. 더 인상적인 건 엄청난 거구다. 종대가 올라앉은 해병대 지프차는 그 엄청난 무게로 차체 한쪽이 비스듬이 기울어져 있었다. 두 달 전에 입대하여 그는 이등병이지만 해병 파이버엔 마이 가리 하사 계급장이 붙어있었다. 종대는 당시 부산진역전의 구경거리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휴가병은 열차마다 가득 타고와 내렸고, 거구의 헌병은 '어이!' 솥뚜껑만 한 손으로 손짓만 하면 휴가병이  알아서 돈을 내놓는다. 열차는 시간마다 들어오고, 종대는 시간마다 열차에 올라가 수금했다. 항만 사령부 운전병이던 나는 외출 나가면 종대 찾아갔고, 만나면 자갈치로 갔다. 우리가 가면 둘 다 회를 5인분 이상 먹으니 그날 그 집 자갈치 아줌마는 돈 번다.  일요일 부대로 귀대할 때 종대는 돈을 한주먹씩 내 호주머니에 쑤셔 넣어주곤 했다.이때가 종대 제1 전성기다.

제2 전성기는 그가 제대 후 공무원 할 때다. 그때 종대가 박통 만나 서면 위생계로 옮겨간 일화는 지금도 사람을 배꼽 잡게 한다. 일의 단초는 서울대 국문과 출신 수광이가 만들었다. 수광이는 브니엘 여고 국어선생이었다. 그가 어느 날 박통 앞으로 편지 한 장을 썼다. '독일의 청년 나치스 당원,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를 보라. 그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런데 지금 한국의 젊은이들은 왜 이 모양인가?  데모 만능 시대로 왜 반정부 데모만 하는가. 나라가 썩어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과거 독일이나 일본처럼 애국 청년단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그걸 청와대 보낼 때 동사무소 근무하던 종대 이름으로 보냈는데, 편지는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박통이 부산 와서 해운대 조선비치호텔로 종대를 불렀다. 박통은 덩치는 작지만 야무진 대통령이다. 편지를 보낸 거구의 종대를 만나자 호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자네 지금 무슨 일 하나?' 물었고, 종대가 '동사무소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하자, 박통이 '그럼 앞으로 무슨 일 하고 싶은가?' 물었고, 그때 종대 대답이 걸작이었다. '부산 시민 건강을 위해서 서면 위생계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아주 몫 좋은 장소를 콕 찍어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박통은 한때 항만 사령관을 지낸 사람이고, 서면이 어떤 곳인지 잘 안다. 싱그레 웃으며 옆에 배석한 시장더러, '어이 임자! 이 친구 이야기 들었지?' 하고 떠난 것이다.

종대는 즉각 서면 위생계로 발령났다. 거긴 시도 때도 없이 책상 서랍에 돈봉투가 쌓이는 곳이다. 그래 방학만 되면 나를 부산으로 불렀다. 내가 광복동, 해운대, 송정 유명한 집 안 가본 데 없는 건 종대 덕이다. 브니엘 여고 선생이던 종대 친구 수광이는 공주사대 체육과 나온 여선생을 송정 해수욕장에 데려왔다. 수광이는 교장과 트러불이 생겨 학교 그만두고는 광복동 최고 학원 강사가 되었다. 시인이랍시고 문학하는 사람들 몰고 남포동 바닥이 좁다고 돌아다녔고, 극본도 썼다. 덩치 때문에 문인과 어울리지 않는 종대는 자기도 문인인 척 함께 어울려 다녔다.

오는게 있으면 가는 게 있다. 나는 종대한테 평생 대접만 받았지만 딱 한번 이런 일은 있다. 언젠가 안암동에 왔다가 종대가 교정의 벽보를 읽었다. '저기 장학생 명단에 있는 게 니 이름 아니가?' 종대가 물었다. 그래 나는  이 참에 한번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성대 다니던 호전이에게 연락하니 마침 전방에 근무하던 규용이도 휴가 나와 있다. 넷이 하월곡동 색주가로 갔는데, 네 사람 다 운동 한 사람이다. 주량이 보통을 넘어 홀딱홀딱 먹고 마시고 주문하다 보니 돈이 모자란다. 그래 우선 아가씨 팁 계산하고 마담한테 갔다. 'K대생인데 장학금으로 마시다 돈이 바닥났는데 어떻게 할까요?' 묻자 진흙 바닥에도 꽃은 핀다. 마담이 아가씨 팁은 어쨌냐고 먼저 묻더니, 계산했다고 하니, 'K대는 우리와 이웃사촌 아닙니까? 계산은 됐어요' 한다. 장학금이라 화통하게 나갔다. 마담은 네 명 아가씨 대동하고 우리 네 취한을 버스 정류장까지 부축해주고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그 바람에 나는 다음 달 하숙비 조달에 많은 어려움 겪었다.

세월이 지나 어느 날, 종대가 하루는 내가 근무하던 명동 근처 내외경제신문사로 찾아왔다. 같이 내무부로 가자고 해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가보면 안단다. 내무부 감사관실에 우리 중학교 동기가 있다. 그가 행시 막 합격하여 어려울 때 서면에서 잘 나가던 종대가 용돈 좀 준 모양이다.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 가니, 그는 종대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다. 동아일보 기자 폭행하여 지방판에 대문짝만 한 기사가 난 것이다. K는 말없이 있다가 종대가 잠깐 화장실에 간 사이 나에게 말했다. '종대 일은 내가 나서야 하지만, 이번은 내 목이 달아나게 생겼다'. 하긴 종대가 동아일보 기자를 손찌검 했으니 일은 크다. 나도 기자라 사정은 알만했다. 그래 종대가 자리로 돌아오자, '야! 가자' 종대를 무조건 데리고 나왔다. '뭐라더노?' 종대가 묻길래, '네가 사표내라. 잘 나가는 친구 하나 신세 망쳐놓을 일 없다' 하고 대답했다. 이렇게 종대는 공무원 생활을 마감했다. 그 후 종대는 페일 로드 장비 몇 대 구입하여 잘 나갔지만, 후에 전기 저항기 제품 만들어 관청에 납품하면서 사업이 시들기 시작했다. 용감은 했지만 남에게 부탁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세월이 흐른 후 감사관 친구가 행자부 장관 되었을 때다. 그때 종대가 장관실로 가자고 했다. 그 날이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날이다. 행사 주무 장관인 행자부 장관이 자리에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자 종대는 비서 앞에서 친구 약속을 무시했다고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 한다. '이 화상아, 이건 너를 무시한 게 아니다. 주무 장관이 행사장에 있지 널 기다리겠나? 차 마시며 기다려보자' 하고 내가 달랬다. 장관은 행사 끝나자 바로 나타났는데,  '어이! 니 출세했다고 사람 무시하나?' 종대 첫 말은 이렇게 나왔다. '아니다. 강 사장이 오늘 만나자는 용건은 뭐고?' 그는 종대를 안다. 부드러운 말로 물었고, 종대는 고개를 돌린 채 말이 없다. 그래 내가 '김 장관 오늘 바쁘다. 무슨 말을 해라' 하고 재촉하니, 한참 뜸 들이더니 하는 말이 '좀 잘봐도라' 다. 어이없어 웃음 터지는 걸 간신히 참았다. 종대 딴엔 '전에 동아일보 사건 땐 자기를 안 봐줘 옷 벗었으니, 이번엔 뭔가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부탁하러 간 사람이 오히려 뱃장이다. K는 날 보고 웃었다. 

그 K와 나도 이런 일 있다. 그가 부산시장하다가 국회의원 출마했을 때다. 박모라는 친구가 후원금 걷으러 오자 나는 거절했다. '자네 하고 K가 그럴 사이가 아니잖아?' 하고 물어, '나는 정치하는 사람보다 친구로선 종대가 더 중요해. 왜냐하면 종대는 내 대소사에 일만 생기면 득달같이 부산서 서울로 올라오지만, K야 그러겠냐? 이 말 K한테 전해도 돼!' 하고 잘라버렸다. 그 후 K가 선거에서 낙방하자, 후원금 낸 친구들이 불평했다. '시장 때도 우릴 만나주지 않았다. 밥 한번 산 적 없다' 등의 소리였다. 그래 내가 그들에게, '니들은 무슨 심보로 후원금 냈나? 일종의 투자 아니냐? 당선되면 뭔가 부탁했겠지. 투자 실패하고 이제 와서 누굴 원망하냐? 지금은 그를 위로해줘야지! 이건 친구 도리가 아니야' 하고 쏘아주었다. 

돈키호테 같은 종대의 기행 또 하나 있다. 한번은 부산서 오도리 한 상자를 가지고 올라왔다. 그걸 가지고 신당동 박 대통령 누님 댁으로 갔다. 충남 지사 지낸 종대 삼촌이 박 대통령 누님의 사위다. 댁에 오도리 상자 들고 가자, 박 대통령 누님은 눈치가 백 단이다. '사돈! 대통령은 친인척한테 더 냉정합니다. 오도리는 나 혼자 사는 집에 먹을 사람도 없어요, 가져가서 사돈이 드세요' 하고 거절했다. 종대는 신당동서 거절 당하자, 그걸 들고 강남 모 장군 댁으로 갔다. '제가 해병대 **기 출신입니다. 가장 존경하던 사령관님이 퇴역하셨다는 신문을 보고, 부산에서 비행기에 오도리 싣고 올라왔습니다'. 이렇게 오도리 내미는데 싫어할 사람 없다. 장군은 전날 밤 제대 회식으로  전작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양주 내 오라 해서 종대와 오도리 안주로 병을 비웠다고 한다. 뒤에 장군이 수협 회장에 취임하자 종대는 거기 들락거렸다.  

종대가 사귀던 친구로 부산엔 수광이가 있고, 서울엔 그 수광이 친구 길웅이가 있다. 종대는 길웅이를 나에게 소개했다. 길웅이는 내가 신문사 퇴직하자 자기 회사 '제2산업' 부사장 자리를 맡겼다. 길웅이 친구로 장천이가 있다. 장천이도 서울대 출신으로 대치동 한샘학원에서 이름 떨친 강사다. 당시 고3 학생들은 장천이 국어 과목 수강신청이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때 그는 경기여고 다니던 내 딸은 전화 부탁하자 바로 받아주었다. 뒤에 장천이는 내가 모 그룹 비서실장 퇴직하자 케이블 TV 사장직을 제의했다. '만나서 한 잔 하고 제의에 동의하면 술값 자네가 내고, 아니면 자기들이 낸다'라고 했다. 내가 나가서 회사 사정 알아본 후, '술 값은 니네가 내라'라고 하고 왔다. 어려운 회사 사장되었다가 은행에 대표이사 개인입보 잘못 서면 집안 망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때 한샘그룹으로 불리던 이들은 인천 국회의원 서한샘이 중심이고, 유시민이 한 기 후배다. 다 양산박 호걸처럼 의리 있고, 선 굵은 사람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김해 장례식장에 닿은 시간은 밤 11시다. 조문객 돌아간 식장에 하얀 상복 입은 부인만 남아있었다. 젊은 시절 꽃처럼 아름답던 부인이다. 불시에 옛 일이 떠올랐다. 부인은 가덕도 출신이다. 종대와 맺어질 때 집에서 말이 많았다. 규수가 미모이고 경남여고 출신으로 머리 좋은 건 인정하지만, 양부모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종대 집은 곤양성 안에 집이 있던 알아주던 가문이고, 삼촌은 대통령 누님 사위다. 그런 집안의 종손 며느리로 섬처녀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견이 속출하자, '우 짜모 좋겠노?' 종대가 전화했다. '가만있거라. 부산 내려가서 보자!' 이렇게 서대신동에서 만났는데,  첫눈에 처녀는 한송이 애련한 동백꽃 같다. 그렇게 고울 수 없다. 종대 옆에 선 모습은 노트르담의 꼽추와 짚씨 여인이다. '이놈이 복도 많구나' 속으로 그리 생각했고, 셋은 그날 송정해수욕장 가서 백사장에서 밤을 새웠다. 수많은 이야기 별빛에 뿌렸고, 수없는 노래 파도에 묻었다. ‘우짜꼬?’ 이튿날 종대가 물었다. '우자긴 뭘 어째? 뜯어 치아뿌라 자석아. 옥이 씨 내가 데리고 살란다. 우하하하! ’

이리 말하는 걸 그녀도 옆에서 들었다. 결혼 후 부인은 전화 걸면  애교스러운 부산 사투리로 '창현 씨 창현 씨' 하며 그리 반가워 할 수 없고, 가면 내가 좋아하는 갈치를 일부러 시장에서 사 오곤 했다. 언제 셋이 노래방 갔을 때다. 나는, '이 노래를 옥이 씨에게 바치렵니다' 하고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그랬는데 밤 깊은 상가에서 친구 부인 눈에 맺힌 이슬을 보니, 세월이 무정타 싶었다. 이제 그는 출가한 딸 둘 있는 남편 잃은 미망인이다. 수척한 눈빛이 마음 아팠다. 그날 밤 나는 잠 한숨 붙이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웠다. 쏴아아! 어디선가 쓸쓸한 썰물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송정 해수욕장에서 우리 셋이 합창하던 노래가 귓전에 울렸다. 이제 나는 물 빠진 갯가에  홀로 선 것이다.

이렇게 종대와 이별하고 돌아온 얼마 후 케이블 TV에서 수호지를 방영하고 있다. 거기 무송과 노지심을 보자, 형언할 수 없는 그리움이 왈칵 솟았다. 갑자기 종대가 너무 그리워 종대 번호로 전화 걸어보니,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하는 멘트가 나온다. 동창 명부를 꺼내 보니 주소는 옛날 주소다. 연락했넌 따님에게 전화해도 '없는 번호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십시오' 한다. 부산 친구 아무도 연락처를 모른다. 인생의 끝자락이란 이런 것인가. 갑자기 발을 헛디딘 것처럼 휘청했다. 전화는 결번이고, 그와 불렀던 내 불로그 노래도 관리자에 의해 중단되었다. 멜랑꼴리가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제는 정말 '해운대 엘레지'  노랫말처럼, '또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저 바다 멀리멀리 던져버려야 하는가. 아니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을 못잊어 울어야만 하는가'.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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