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일의 노래(1)
사람은 이 세상에 와서 누군가와 싸우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한다. 누군가와헤어지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평생 잊지못할 사람도 있다. 최근에 나는 가락동성당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장례식 문상객 명단에서 최옥녀란 이름을 발견한 것이다. 옥녀란 이름을 본 순간 주마등처럼 50년 전 일이 머리를 스쳐갔다. 옥녀는 어릴 때부터 이쁘다고 별명이 '새첩이' 다. 그 당시 나는 철수와 실존주의 문학을 동경했고, 쇼펜하우엘의ㅐ 한다고
'철수 사망. 급히 하진하기 바람.' 대학시절에 경택이가 캠퍼스로 보낸 그 한 통의 전보가 내 인생을 완전히 바뀌버렸다. 세상이 팽그르르 돈다는 말, 하늘이 노랗다는 말이 있다. 철수와 경택이와 나는 친구들이 '[배건너 삼총사'로 불러주던 등하교 때는 물론 운동한다고 매일 평행봉 위에 앉아있던 단짝 친구다. 우리는 남들이 보통 열 개 하면 끝나는 평행봉 팔굽혀 펴기를 사십 개를 넘게 했다. 철수와 나는 아마 학교 전체에서 평행봉 제일 잘 했을 것이다. 차오르기, 흔들어오르기는 물론 거꾸로 서는 도립(倒立)이란 어려운 기술도 척척 해내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그들은 우릴 ‘배 건너 삼총사’로 불렀는데, 졸업 후 나만 K대 철학과엘 들어가고 둘은 재수생으로 진주에 남게되자, 셋 중 가장 인물 잘 생기고 인끼 많던 철수가 어느 여름 날 혼자 주약동 철길을 쓸쓸히 걸어가서는 터널 속에서 달려오는 열차에 투신하여 자살한 것이다.
그걸 사춘기의 낭만이라고 표현함은 어떨지 모르겠다. 그러나 철수는 가정도 학교도 심각할 일 하나 없었다. 집엔 미인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고, 자신도 미남에다 운동 공부 둘 다 잘하여 친구들이 부러워한 편이다. 문제가 있었다면 문학을 좋아한 것 밖에 없다. 그와 나는 문학한다고 옷자락 너펄거리며 너펄춤 추는 경향이 있었다. 주변에게 심각하게 보이고 싶었고, 남이 우리를 염세주의자로 봐주길 내심 바랬다. 문학책을 옆구리에 끼고다녔고, 간혹 원고지에 습작도 했다. 그러다가 대학 시험을 쳤는데, 나만 K대 철학과에 붙고 둘은 진주에 남아 재수를 했다.
나는 대학 강의실에서 당시 사상계란 잡지에서 이름 날리던 신일철 교수를 만났다. 직접 그분한테서 철학개론 강의를 듣게 되자 신이 났다. 나는 이미 실존주의 다 배운 양 떠벌이기 시작했다. 키엘케골의 '생의 무의미한 의지', 쇼펜하우엘의 '자살예찬론', 니체의 '신은 이미 죽었다'는 내용도 편지에 인용하곤 했는데, 사실 철학개론에서 그런 내용은 맨 뒤에 있어, 2학년 가서 배우는 것이고 신입생은 모르는 것이다. 그걸 주일학교 여학생 성경 구절 외듯 나풀거리자 철수는 그런 내가 부러웠을 것이다. 자기도 서점에서 어려운 책을 골라 읽고 나보다 더 깊은 사상도 아는 척 편지 쓰다가 선수 치듯 먼저 자살해버린 것이다.
이리 철 없는 불작난은 저질러졌고, 그 불은 옆으로 번졌다. 나도 철수처럼 자살하겠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가정도 학교도 심각할 일 없다. 교육감 막내아들이고, 운동도 공부도 그런대로 잘했다. 그런데 철수처럼 자살 해야한다는 의무감을 새긴 것이다.
경택이 편지가 받은 날은 마침 중간 시험 때다. 나는 인생의 허무와 실존주의를 아는 청년은 학교 시험 같은 시시한 일에 관심 가져서는 않된다 생각했다. 그런 건 속물들이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현실을 싹둑 잘라버리고 서울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진주로 내려갔다. 삼랑진에서 경전남부선으로 갈아타고 진주로 가서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했다. 진주역 근처는 마침 보리가 익는 철이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게 타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세상 전체와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친구를 잃어, 하늘이 캄캄하고 세상 전체가 뒤집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 살고있었다. 너무나 평화로웟다. 그것은 마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이 부왕이 암살된 정원에서 고민할 때의 덴마크 왕실 같았다. 세상은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냉정한 질서로 움직이고 있었다.
역전에서 이런 경험을 하고 상가에 가서 또 새로운 경험을 했다. 사람들은 날 보자 철수와 하루가 멀다고 생이 무의미하다느니 하는 그런 편지를 주고받은 너를 상주가 보면 않된다는 것이다. 눈에 띄지않도록 거기서 나가라고 했다. 거기는 죽음을 같이 논한 친구끼리 이승을 하직하는 자리가 아니라, 불작난에 아들을 잃은 부모의 원망과 애통함을 다스리는 자리였다. 그 바람에 나는 상가에서 쫒겨나고 말았다. 쫒겨나면서 나는 먼 발치에서 하얀 상복을 입은 철수 어머님과 하얀 십자 모양의 리본을 머릿결에 단 옥녀 모습을 보았다. 상복이 아름다웠다. 나중에 옥녀 오빠 노릇 해줘야겠단 생각을 했다.
자살한 총각은 무덤을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한 재는 우리가 여름에 따이빙하고 놀던 '메기통'에 뿌려졌는데, 마침 경택이가 철수 뼛조각 몇 개를 ‘메기통’이 내려다보이는 당미언덕 소나무 관솔 옹이 속에 끼워놓았다. ‘메기통’에서 철수와 경택이와 나, 셋은 여름이면 따이빙 하고 놀았고, 가을이면 거기 고목나무 홍시 따먹었고, ‘신라의 북소리’ ‘Love me tender’를 신나게 부르곤 했다. 우리는 거기서 훗날 언젠가 우리가 여길 다시 찾아오면, 한 청춘의 끝이 풀밭의 노란 원추리꽃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 것이란 이야길 하고 헤어졌다.
그 후 나는 자학(自虐)의 심정으로 학교는 중퇴하고 자원입대하여 항만사 229 자동차대대 운전병이 되어 GMC 운전석에서 화랑담밸 피우며 3부두의 푸른 파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겐 학업이고 뭐고 중요한 게 없었다. '햇볕이 눈 부셔 살인을 했다'는 까뮈의 소설 '이방인' 주인공처럼 되고 싶었다. 사하라 주둔 프랑스 외인부대 같은 냉혹한 곳에 가서 절망하고 싶었다. 그래 훈련소에서 의무병과를 받자 기관병을 찾아가 돈 주고 부탁하여 수송병과로 '기루까이' 하였다. 그리고 수영 운전교육대에서 9주간 교육 받고 부산서 '지옥 대대'란 이름으로 알려진 항만사 229 자동차대대를 지원했다. 229 대대는 미국 군함이 3부두에 싣고온 육해공군 군수물자를 부산 진해 등지로 날랐고, 운전병은 도둑질이 심했다. 밤마다 내무반은 빳다가 난무했고, 운전병은 그날 ‘도꾸따이’ 해서 번 돈 선임자들에게 상납했다.
운전병은 탱크 베어링, 자동차 엔진 부품. 식료품과 목재 등 모든 군수품을 빼돌렸다. 탱크 베어링이 가장 값나가는 물건인데, 그건 철사로 묶어 연료통 안에 숨겨두었다가 필요시 철사줄을 당기면 연료통 밑에 가라앉혀놓았던 베어링이 줄줄이 달려나온다. 인젝션펌프는 디젤 GMC의 중요 부품이고 부피도 크다. 적당히 숨길만한 곳이 없으니, 아예 오래된 시꺼먼 구리스를 칠해 중고품처럼 엔진에 달고 나온다. 이건 양풍길 병장 수법이다. 한번은 차가 정문을 통과하는데, 초소 헌병이 본넷트 열고 검문하다가 이게 뭐냐고 물었다. 양병장이 세상 무식한 놈 첨 본다는 식으로 ‘아! 이 놈아 노후 차량은 인젝션펌프 두개 달아야 차가 가는 상식도 모르느냐?’ 되려 호통을 친 적 있다. 각 기지창 부대 밖에는 전문 '도꾸따이'가 진을 치고 있었다. 척하면 삼척. 물건을 담 넘어로 던지면 고무줄로 묶은 돈뭉치가 운전석으로 날라온다. 이래서 고참 운전병 중에 고향에 논을 산 경우도 있다는 루머가 돌았다.
나는 대학 물 먹었다고 통역을 맡았다. 하역품 쌓인 창고에서 운전병이 '도꾸따이' 할 물건을 고룰 때 그 물품이 뭔가를 해석해주고 내 몫을 챙겼다.
내무반 고참들은 밤마다 작전 다녀온 운전병 죽어라고 빳다를 쳤고, 빳다는 치면 칠수록 돈이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경험 많은 고참은 침대마후라 대신에 고무호스를 애용하기도 했다. 물 적신 고무호스는 아무리 소신껒 후려쳐도 낭창낭창 살을 파고들고, 침대마후라처럼 부러지거나 뼈를 상하게 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무반에는 별별 인종 다 있어, 남한산성 감방에서 별을 달았던 전과자, 영도에서 밀수하던 밀수업자도 있고, 인천에서 부두 깡패로 놀던 자도 있었다. 서열이 있어 간혹 서부영화 같은 장면도 벌어졌다. 그들이 실탄 장진한 칼빈으로 내무반 안팎에서 이리저리 상대방에게 총질을 벌리면 불쌍한 우리 졸병들은 관물함에 얼굴을 박고 기어들곤 했다.
나는 이 229대대가 자살하기 가장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나는 거기서 생을 마감하므로서 친구에 대한 의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그래 내가 몰던 GMC 호르 속에 칼빈 실탄 수십발이 숨겨있었다. 수영 탄약 부두 하역작업 때 빼돌린 것이다. 당시 미국 군함은 실탄과 탄약을 수영부두에 풀었고, 우리는 대한민국 전군에 지급될 군수품을 지금 해운대 신시가지가 된 장산 밑 탄약 창고에 날랐다.
어느 날 내가 몰던 GMC 실탄이 장교에게 발각되어 전 중대에 비상이 걸렸다. 토요일 오후 ROTC 홍소위가 주번으로 부대에 남아 사병들과 차량점검 하던 중 내 차에서 실탄 수십발을 발견한 것이다. 실탄 유출은 군에서 대사건이다. 즉각 전 중대에 비상이 걸렸고, 일요일 밤 귀대하자말자 나는 밀실에 불려갔다.
'실탄을 왜 빼돌렸느냐?'
질문은 당연한 것이지만 대답은 비정상적인 것이다.
'저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율 모릅니다. 필요할 때 쓸려고 그랬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르나?'
대답도 유치한 것이었다.
'저의 친한 친구가 자살했습니다. 의리 지키려고 실탄을 준비했습니다.'
'실탄을 어디서 구했나?'
'수영 부두에서 구했심니더.'
이쯤 되면 당장 영창에 넣거나 '불명예 제대' 시켜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소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내 K대 선배였다. 그는 우선 실제 그들이 내무반 분위길 결정하는 사고자들부터 모아놓고 설득했다.
'김일병은 내 대학 후배다. 우리 대대 유일무이한 대학생 운전병이다. 나는 철학은 모르지만 철학하는 애들이 더러 사고친다는 말은 들었다. 소대장인 내 얼굴을 봐서 협조해주면 좋겠다.'
내무반의 고자들은 남한산성 출신, 영도 밀수꾼, 인천 부두 깡패 출신이다. 선이 굵다. 홍소위가 학벌 좋고 인물 좋고 인끼 있는 바람에 일언지하로 그들이 찬성하여 나는 살았다. 그냥 살아난게 아니라 내무반의 모든 단체기압에서 열외로 살아났다. 나 역시 내무반 사고자들 한테서 밉상은 아니었다. 중대 막걸리 마시는 대회에서 한 말 마시어 2등 한 적 있다. 1등은 한 말 반을 마신 인천 부두 깡패 정봉율 상병이다. 작전 다녀오면 ROTC 장교들이 대대 유일의 대학생 운전병이라고 나를 주보에서 부르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나는 제대할 때까지 한번도 완전군장하고 영점 5초 내로 연병장에 집합한 적 없고, 내무반 침상에 두다리 걸치고 철모에 맨대가리 박는 원산폭격 해본 적 없다.
여기다 적시 동남풍도 불었다. 중대 사고자 중 오야붕 김대지다. 그런데 그와 친해진 것이다. 어느 토요일 오후다. 사병들은 관물함에 모셔둔 A급 피복 갈아입고 외출준비에 분주했고, 쌓아놓은 매트리스 위에 들어누운 김대지 병장은 그 모습을 쓸쓸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고자들은 외출해도 갈 곳이 없다. 내무반에선 왕초지만, 사회에선 개망나니로 본다.
그 김병장에게 내가 말을 걸었다. 마침 그날 나는 외출증이 없었다.
'김병장님! 제가 PX에서 막걸리 한 잔 대접해도 됩니까?'
'뭐? 네가 막걸리 산다고?'
그는 벌떡 일어나더니 내 손목을 잡았다.
'부대 내에선 빌빌해도 너는 사회 나가면 대학생으로 대접 받는다. 그런 네가 술을 산다니 정말 고맙다.'
김병장은 처음부터 흥분하더니, 술 몇 잔 들어가자 완전 신파쪼 였다. 김대지는 해방 후 일본서 여동생과 홀홀단신 귀국해서 사회 밑바닥에 살다가 여동생을 수녀원에 맡기고 입대했다. 군에선 사고치는 바람에 몇 년 남한산성 감방에 있었고, 거기서 총감방장까지 했지만 자기 있는 곳을 밝히지 못했고, 그 세월에 여동생은 어느 수녀원 흘러갔는지 소식 끊어진 상태인 것이다. 김병장은 이 밖에도 이북 출신대대장 운전수 하다가 봉급을 집에 전달치 않고 탈영한 이야기. 대대장이 어찌어찌해서 3병원 병원장 운전수로 보내자, 3병원 병원장이 김병장과 일주일 지난 후 도로 데려가라고 우리 대대장에게 하소연한 이야기. 친정 복귀하자 대대장이 아예 자기를 사람으로 치지않고 외면한다는 이야길 했다. 중대원 모두 알고있는 그의 신세타령이었다. 내가 그 지루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자, 김병장은 그것에 감격했는지, 처음에는 눈에 눈물만 그렁그렁 하더니, 술 몇 잔 더 들어가자 끝내 내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김대지가 PX에서 누구 손을 잡고 울었다는 이야기는 부대 내에 금방 퍼졌다. 나는 실탄 사건으로 그러지 않아도 중대 열외인데, 이 쇼킹 사건 상대역임이 밝혀지자 그야말로 800 중대 초 VIP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 나는 사실 이럴려고 군에 입대한 것이 아니었다. 자살할려고 입대했다. 나는 사하라 주둔 프랑스 외인부대 같은 곳으로 갈려고, 훈련소에서 기관병에게 돈을 주고 부탁해서 의무병과를 수송으로 기리까이하지 않았던가. 제부지구에서 가장 기압이 혹독하여 지옥대대로 잘 알려진 229 자동차 대대로 전출 받아서는 외출 나가면 서면 '하이에리어' 미군 부대 주변 사창가를 드나들지 않았던가. 나는 거기서 몇번인가 사고를 쳤다. 그러나 감방에 들어가는 일도 칼에 찔리는 불상사도 없었다. 아무리 사고를 치고 싶었으나 사고가 나를 피해 다녔다. 나는 대학 시절 미식축구 선수 였다. 전포동서 레슬링 배우다 입대한 친구와 같이 외출하면 어느 날렵한 헌병도 일대일로 힘으로 우리를 제압할 수 없었다. 우리는 15P 헌병 백바가지와 완장, 하얀 장갑을 빼앗아 착용했다. 그리고 술집 찾아 돌아다니는 후 휴가병 외출증 검사한다는 명목으로 공갈 치고 돈을 뜯었다. 부전동 철도골목에서 고래고기 안주로 술 잔 기울이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15P 헌병대 운전 파견 나갔던 양풍길 병장한테 이런 정보를 듣고 헌병 화이바와 완장을 난로에 쳐넣고 태워버린 후 하이에리아 부대 근처 출입을 끝냈다.
'지금 제부지구 헌병대에 헌병 연속 폭행 사건 범인 잡으라는 비상이 걸렸다.‘
운명의 신이 나에게 장난을 치고있었던지 모른다. 나는 자살용 실탄 유출건으로 내무반 '열외' 대접을 받았고, 하이에리어 부대 사창가 폭행 건으로 오히려 내무반 영웅 대접 받았다. 그때 나는 나를 실존주의행 자라 믿었지만, 실은 완전히 '싸이코패스'(psychopath) 였다.
원일의 노래(2)
이렇게 229 자동차 대대에서 자살을 실패하자, 나는 혼자 아무도 모르는 섬에 가서 살고싶었다. 그래 제대하자 6월 어느 날 영문으로 된 성경 한 권과 원고지 몇 장을 들고 노량에서 배를 타고 남해로 건너갔다. 그 당시 남해는 여관이 없던 시절이다. 장터 옆에 해장국 집이 있었다. 해장국 사먹으면 잠은 방에서 공짜로 잘 수 있었다. 그 집 바로 옆이 버스터미널이었다. 고린내 나는 장사꾼들 발냄새 맡으며 새우잠 자고 이튿날 무작정 버스 타고 가다가 섬마을 끝동네에 내렸다. 거기가 미조란 동네다. 파란 바다와 하얀 등대가 보였다.
지금 미조는 3층 빌딍도 있고 식당과 다방, 넓직한 수협 공판장 앞에 멸치 도미 우럭을 잡아온 배가 가득하고, 관광버스 타고와서 생선 사가는 관광객 밀려다니는 곳이다. 그러나 1966년 당시 미조는 낮으막한 돌담에 둘러쌓인 집만 몇 채 있던 작은 포구다. 저녁에 삼천포서 들어오는 '망운산'호가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를 스피커로 틀곤했다.
내가 하숙한 집은 초등학교 다니는 딸과 젊은 과부가 살고있었다. 외로운 곳에 피는 꽃이라 그랬을까. 젊은 과부는 신비로웠다. 아버지가 없어서 그랬을까? 외동딸 금순이는 수줍어 하면서도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말동무 귀한 어촌이라 그랬을까. 학교 파하면 동무들 달고와서 내가 하숙하는 걸 자랑했다. 젊은 과수댁은 내외하느라 밥상과 물그릇 심부럼을 금순이에게 시켰다. 금순이는 내가 산책길 나서면 강아지처럼 촐랑대며 나서곤 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그 금순이 모습은 너무나 천진스러웠다. 금순이가 안내한 곳은 등대 우측의 인적 드문 반월형 아담한 만(灣)이다. 거기엔 해풍에 잘 자란 푸른 풀밭과 그럴싸한 바위들과 흰구름 아래 호수처럼 잔잔히 백사장에 밀려오는 비취빛 파도가 있었다.
나와 금순이는 그곳에서 바위 사이로 도망가는 게를 잡기도 하고, 모래 속에서 껍질이 보석처럼 신비로운 조개를 잡기도 했다. 금순이는 허연 광목 저고리에 까만 홑치마 차림이었다. 그러나 햇볕에 들어난 구리빛으로 탄 통통한 팔은 이 세상 어느 소녀보다 사랑스러웠다. 하느님이 금순이에게 가난과 은총을 동시에 부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은 다 수영복이 없고 빤스가 수영복이었다. 금순이는 시원하게 나가는크롤 헤엄이고 나는 엉성한 개구리 헤엄이다. 수영은 금순이가 내 스승이었다. 섬아이는 걷기 전부터 수영을 할 줄 안다. 두 사람은 입술이 파래지도록 파도 속에서 놀면서 물속의 가리비조개도 잡았다. 밖에 나오면 발을 통통 굴러귀에 들어간 물을 털고, 각자 바위 뒤로 가서 빤스를 벗고 물을 짜 입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40년 뒤에 금순이 생각나서 한번 미조로 찾아간 적 있다. 미조서 가장 오래된 음식점을 찾아가 갈치회를 시켜놓고 안주인에게 푸른 파도 속에서 인어처럼 같이 놀던 금순이 이름을 말하고 혹시 알겠느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그런 이름은 기억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이로서 금순이는 에드가 알란 포우의 '아나벨 리'처럼, 추억 속 바닷가 왕국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미조서 사귄 또다른 친구가 있었다. 70 넘은 노인이다. 한번은 해변을 걷다가 보니 한 노인이 후줄근히 낡아빠진 뗀마를 저어가고 있었다. 그물로 뭔가를 잡는 모양인데 배가 작아 넓은 바다는 나가지 못하고 동네 근처 물 얕은 해안가만 다니고 있었다. 배를 땅에 대길래 가보니, 볼만한 것이 많았다. 노인이 끝에 납뭉치가 주렁주렁 달린 그물을 땅에 내려놓고 그물코를 하나씩 옆으로 제치자, 살아 펄떡거리는 전어와 숭어, 집게발을 허우적거리는 게, 그 밖에 성게와 소라 해삼 아나고 같은 것이 튀어나온다. 너무나 신기하고 부럽기도 해서 내가 ‘파고다’를 권하면서 고향이 거기냐고 묻자, 그는 내 ‘파고다’ 고급 담배는 자기 상의 윗포켇에 넣고 허리춤에 매단 잎담배 주머니에서 풍년초를 꺼내어 신문지로 담배를 돌돌 말아 입에 물더니, 고향이 문산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 내 고향이 진주라고 밝히자, 그는
'진주와 문산은 넘어지면 코 닿을 데지.‘
진주 문산 삼십리 길을 이리 표현하는 그 말에 혼자 사는 타관의 외로움이 비쳐보였다. 그가 어쩌다 가족도 친구도 없이 미조에 쓸쓸히 홀로 살았는지 모르겠다. 그의 얼굴과 손마디는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반백의 머리칼 덮힌 그을은 목덜미는 주름이 골처럼 깊었다.
나는 군에서 자살 실패하고 무작정 섬으로 들어간 사람이다. 하는 일이라곤 성경 읽거나 원고지 몇 장 채우는 일 밖에 없다. 따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날 노인이 내게 전어 몇마리와 해삼을 나눠주자, 그후 노인과 자주 만났다. 만나면 내가 막걸리를 사고, 노인은 잡아온 것들을 요리했다. 둘만의 오붓한 해변 파티가 열리는 것이다.
노인의 손맛을 하얀 모자를 쓴 도시의 일식집 주방장이 따라올 수 있었을까? 노인은 장어를 예리한 칼로 능숙하게 뜨고, 물엿과 생강을 넣은 양념장 바른 후 숯불에 굽는다. 노인의 양념장을 바른 장어구이는 느끼하지 않았다. 얼마던지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노인은 문어를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살짝 익혀 뜨거운 김이 오를 때 도마 위에 듬성듬성 썰어 올린다. 그때 그 달콤하던 초장맛과 뜨껀뜨껀한 문어 맛을 잊을 수 없다. '게는 원래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수서생물로, 게살은 수륙(水陸)의 진미(珍味)를 한몸에 지녔다'고 임어당이 말했다. 노인은 게 중에서 제일 맛있는 부분을 알고 있다. 그것은 게껍질 안에 붙어있는 누렇고 흰 황고백방(黃膏白肪)이다. 그걸 나에게 권하고, 고동도 구울 때 껍질 속에 파란 국물이 고인다. 그걸 보약이라며 나에게 권했다.
노인은 장어, 문어, 게, 소라, 미역, 톳나물에서 바다의 천연 미각을 살릴 줄 알았다. 그가 만든 음식은 해풍 냄새와 뻘맛이 살아있었다. 그는 고기도 몇월 무슨 고기가 알배기고 기름진지 잘 알았다. 노인의 손은 바닷가에서 수십년 자란 고목처럼 쭈굴쭈굴했지만, 그 고목처럼 바다의 일부였다. 노인의 손은 배워서 맛을 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연의 오묘한 맛을 터득한 신비로운 손이었다. 해변 파티 유일한 손님으로 그 손이 만든 바다의 진미를 혼자 맛보곤 한 나는 어느 재벌도 누리지 못한 호사를 누렸다.
노인은 바다에 관해 정통해, 장어나 게나 고동이 어디 많은지, 또 어떻게 잡으면 되는지 포인트와 물 때를 환히 알고있었다. 장어는 해그름에 잡는다. 등대 밑 석축에 가서, 덕지덕지 붙은 굴을 몽돌로 까서 낚시에 낀다. 그리고 몽당 낚싯대를 바다물에 던지고, 봉돌 무게를 감지하며 땅바닥에 놓았다 당겼다 하노라면 툭하고 손에 어신이 온다. 장어는 삼십센티 짜리 쯤 되면 당길 때 몸통으로 물 속을 휘젓고 버티는 힘이 강해 손맛 여간 짜릿한게 아니다. 건져올린 올린 장어는 몸체의 미끌미끌한 점액질이 많다. 그 미끌미끌한 장어를 손바닥에 호박잎을 깔고 꽉 쥐고 바늘을 뺀다.
문어나 게 잡는 재미는 독특하다. 문어는 허허벌판 물 빠진 갯뻘을 꼭 사람처럼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돌아다닌다. 그러다가 인기척이 나면 재빨리 굴로 숨는데, 이때 굴 옆에 가서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 이놈이 성질이 급해 금방 머리를 밖으로 내밀어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 거린다. 이 때 낫으로 머리를 획 낚아챈다. 게는 좌우로 내뺄 때 걸음이 번개처럼 빠른 데다가 집개가 무섭다. 가만히 옆으로 닥아가 낫으로 등짝을 콱 찍어 잡는다.
값 나가는 소라 전복이 어디 많은지 노인에게 배웠다.소라나 전복은 미역같은 해초를 먹고 살아서 우선 해초 많은 곳을 찾아야하고,해초는 뿌리를 바위에 내리니 물 속에 바위 많은 곳을 찾아야 한다.조개는 백사장에 살고,가리비고동은 파도 아래 떼로 몰려 산다.
노인은 자기만 알고 비밀로 해두었음직한 가리비고동 있는 비밀 장소를 파격적으로 나에게 알려주었다.송남초등학교란 곳 앞바다다.거기서 나는 가슴까지 차오르는 파도 속을 발로 더듬어 모래 속의 가리비고동 잡아,바께스 채 삶은 가리비고동을 밤새도록 먹은 적 있다.가리비는 보통 한 곳에 몇가마 넘게 무리 지어 살아 노다지 같았다.그러나 노인은 뭐던지 한번에 다 잡는 법 없이 필요한 만큼만 잡았다.
바다는 노인에게 커다란 창고였다.냉장고였다.바다는 싱싱한 물고기와 조개와 해초를 키워서 노인에게 주었다.바다는 노인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는 주님이었다.식사 때 일용의 양식을 주옵신 주님께 감사기도하는 기독교인보다 노인은 더 진실되게 식사 때마다 바다에 감사하는 눈치였다.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하여 지식이나 양심 종교까지 팔고,절개를 버리고 의리를 배반하고 남을 속이고,심지어 마약과 술을 팔고 매춘까지 불사한다.그러나 노인은 바다에 순응하고 감사하면서 겸허히 단순히 살 뿐이다.노인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얻는 가장 신성한 직업은 농부나 어부임을 깨달았다.
헤밍웨이는 '바다와 노인'에서 불굴의 의지를 지닌 한 노인을 보여주었지만,나는 미조의 한 노인에게서 단순하면서도 겸허히 감사하며 사는 수도승같은 평화를 발견했다.노인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내가 젊을 때부터 가졌고 지금도 풀지못한,질문의 원초적 해답일 수 있었다.
그러다 몇 달 뒤 욕지도로 건너갔다. 삼천포 떠난 배가 망망대해 몇 시간 건너가도 여전히 닿지 않는 먼 섬이었다.
부모님 애간장 어지간히 태워드렸다.그 당시 최무룡이 부른 '원일의 노래'라는 유행가가 있었다.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순정을
옥녀야 잊을소냐 헤어질 운명 차거운 밤하늘에 웃음을 팔더라도
이제는 모두 잊고 내 품에 잠들어라.'
철수 동생 옥녀는 얼굴이 갸름하고 이쁜 편이다. 나는 옥녀 오빠가 되고 싶었다. 옥녀하고 내 고향 뒷동산 잔디밭에서 손가락을 걸면서 약속한 적 없고, 옥녀가 차거운 밤하늘에 웃음을 파는 그런 상황도 아니지만, 나는 '원일의 노래'를 부르며 옥녀를 생각했다. 옥녀 생각할 때마다 상가에서 본 머리에 하얀 십자형 상장을 달았던 옥녀가 청초하고 이쁘다는 생각을 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사창가 드나들며 자살을 생각하던 그런 어느 날 어떤 경로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옥녀가 서면 로타리 뒷골목에 산다는 이야길 들었다. 그래 찾아가서 철수 어머님에게 철수 대신 아들이 되겠다고 말하고, 옥녀에겐 오빠가 되겠다고 막 고등학교 졸업한 다음 해다. 가서 군복 입은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머님에게 철수 대신 아들이 되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자 서면 로타리 그 집은 초상집이 되고 말았다. 50년 전 일이라 기억이 희미하지만, 철수 어머님은 그때도 날 원망하는 것 같았고, 옥녀는 대문 밖에 나와서 날 배웅해준 것 같긴 하다.
당시 미조는 낮으막한 돌담집 몇 개 있던 작은 포구다. 저녁이면 삼천포서 들어오는 '망운산'호가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를 스피커로 틀곤했다.
그러다 몇 달 뒤 욕지도로 건너갔다. 삼천포 떠난 배가 망망대해 몇 시간 건너가도 여전히 닿지 않는 먼 섬이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는 섬에 혼자 살고 싶었다. 외딴 수도원 신부님처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여 살고싶었다. 움베르토 에코가 쓴 '장미의 이름'이란 소설이 있다. 거기 베네딕트 계열 수도원처럼 나도 청빈과 노동 의지하며 장미 키우며 살고 싶었다. 한번은 반나절 산길 걸어 어느 외진 바닷가 동네에 가서 한 여선생 만난 적 있다. 학교에 선생은 여선생 혼자였다. 아이들에게 철봉과 씨름 가르켜주자, 여선생은 날더러 거기서 같이 아이들 가르키자고 한 적 있다. 당시 낙도 외진 학교는 고졸이라도 교편이 가능하던 시절이다.
나는 이 당시 비로소 인생의 생살을 체험했다. 그 전에는 생살을 보호하는 위에 다른 피부가 있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잊혀진 사람이란 걸 알았다.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처럼 비참한 건 없다. 친구가 자살하여 군에 자원입대한 처음에는 주변에 걱정하는 사람 많았다. 형은 편지를 보냈고, 나는 파도 밀려오는 제3부두 데크에 주차한 GMC 운전대에서 답장을 쓰곤 했다. 남해에 있을 때도 편지가 왔다. 친구들은 철수 자살과 나의 입대, 그리고 섬으로 떠난 일련의 행적을 낭만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나를 잊어버렸고 소식을 끊어버렸다. 이때 비로소 나는 진짜 외롭게 된 것이다. 학교는 제적되어 있었다. 퇴로가 없었다. 고독이 뼈에 사무쳤다. 그 전 나의 절망은 전부 가짜였다. 낭만적 염세주의 였다.
깊은 밤 혼자 펄럭이는 촛불 앞에서 눈물 흘리며 성경을 읽곤했다. 해무가 짙게 끼면 두 손을 앞으로 벌려도 손 끝이 보이지 않았다. 천지를 구분할 수 없는 그 해변을 무작정 걸어다녔다. 들려오는 것은 끼룩끼룩 우는 갈매기 울음소리와 파도소리 뿐. 잠 자다가 꿈속에서 '종암동 서울역 가요!' 하고 외치던 18번 버스 차장의 목소리를 들은 밤은 혼자 일어나 서러워 울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서울이 그리워 한없이 울었다. 나는 비로소 키엘케골, 쑈펜하우엘, 니체 같은 사상가들의 철학이 엉터리란걸 깨달았다. 지식인의 말잔치에 불과했다. 현학적이지만 실제 상황에선 아무런 약효가 없다.
어느 날 모종의 결심을 하고 나는 동항리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주머니엔 소주 한 병과 유언장이 들어있었다. 밑엔 출렁이는 바다가 있었다. 중간에 소나무가 있다. 나는 그 소나무에 기대어 소주를 마시고 취해 잠들었다가 떨어질 심산이었다. '운명아 데려가고 싶으면 네 맘대로 데려가라'는 심보였다. 내 시신은 파도 따라 떠다닐 것이다. 유언장은 비닐로 싸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사람들은 유서를 읽어본 후 진주로 연락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운명의 여신이 작난을 쳤다. 내가 눈을 뜨자 거기가 저승이 아니었다. 바다는 진홍의 포도주 빛이었다. 해지기 전 구름은 찬란한 황금빛 이었다.
'천지창조 했나?'
씨니컬한 생각이 들었다. 자살이 실패한 것이다. 잠버릇 심한 내가 바다에 떨어질 것이라 믿었는데, 소나무를 붙들고 얌전히 깬 것이다.
'그렇다면야 운명한테 더 이상 굽실거릴 필요 없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가보다. 운명이 날더러 더 살아라면 살아보자.'
그런 생각을 했다. 나는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나는 마치 백년 인생 다 산 사람 같았다. 마음은 식은 재처럼 싸늘했다. 절벽 위로 올라오니 빤짝이는 별이 보였다. 별을 본 순간 나는 니체의 '초인'을 생각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온 나는 냉정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수도승처럼 밥 먹는 시간 잠 자는 시간 빼고 공부만 했다. 더 이상 키엘케골이나 쇼펜하우엘에 관심 두지 않았다. 그런 건 사춘기 아이들 작난이다. 나는 서양철학을 버리고 미친듯이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그 후 불교신문 기자가 되었다.
최옥녀란 이름 앞에서 이렇게 깊이 생각에 잠겨있는데 한 여인이 닥아왔다.
'오빠! 옥녀가 철수 오빠 동생인건 알지요?'
정애여사다. 그는 옥녀하고 동기다. 정애는 집이 사천인데, 여고 시절 동생 명애가 우리집에 하숙하여 자주 온 적 있다.
'알지. 서울 사는 모양이네?'
'아까 잠깐 보였는데, 집에 간 모양이네요. 남편하고 사별하고 송파에 혼자 살고있습니다.'
'옥녀 밑에 또하나 여동생이 있고, 철웅이라는 남동생도 있었는데?'
'네! 철수 오빠 밑에 철웅이가 있고, 지금 철웅이가 부산서 어머님 모시고 살아요.'
정애가 소식을 잘 안다.
'정애씨도 이젠 칠십 넘었으니 정애여사라고 부릅시다. 정애여사! 옥녀는 내가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은 사람입니다.'
'오빠가 옥녀한테 그런 맘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고...철수 자살하고 나도 자살한다고 대학 중퇴하고 입대하고, 제대 후도 2년을 섬에서 살았어요. 그동안 옥녀 오빠 노릇 해줘야한단 생각도 많이 했고...해줄 이야기 많고.'
'그럼 오빠가 옥녀를 한번 보고싶긴 하겠다.'
'그래서 정애여사한테 부탁인데, 한번 자릴 만들어 주면 어떨까?'
'내가 죽전역 근처에 자리 만들어 볼께요.'
정애여사는 만사 똑똑한 여자다. 그런데 소식이 없다. 혹시 옥녀가 아직도 날 원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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