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일의 노래(욕지도에서)

내가 만난 절세미인/5

김현거사 2019. 3. 27. 11:13

 

 

내가 만난 절세미인/5


  내가 하숙했던 집 아주머니는 욕지도 사람들이 초도(草島) 혹은 풀이섬이라 부르던 섬이 고향이다. 허구헌날 풀이섬 경치 좋다고 가보자고 노래를 불렀다. 그래 어느 날 같이 갔는데, 거기서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처녀를 만났다. 그런데 남자는 미인 만나려면 항상 모험이 필요한 법이다. 풀이섬 가는 길이 보통 길이 아니었다. 뗀마가 포구 벗어나 한바다로 나오자, 줄줄이 밀려오는 파도가 산맥 같다. 배는 가랑잎이 되어 산으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아예 등산을 한다. 올라가면 산이고, 내려가면 깊은 골짝이다. 그런 높은 파도 타본 적 없어, 배가 언제 뒤집힐지 아슬아슬하다. 나는 대학 시절 미식축구 선수였다. 동대문운동장에서 서울농대, 성대, 한양대팀 연파하고 돌아오면 담당 교수가 금일봉 주었다. 그 돈으로 신상사파니 하는 깡패 유명한 명동에서 마시고, 스크람 짜고 막걸리 찬가 부르고 다녔다. 종3 음악실에 떼로 몰려가 어깨 힘 주고 덩치 뽑냈고, 군에서는 기압으로 외부에 지옥대대로 알려진 항만사 229자동차 대대 800 중대 열외 였다. 나는 감방 출신 사고자들 보호 아래 단체기압 한번 받은 적 없다.

 그러나 그 관록 바다에선 무용지물이다. 나는 두 손으로 뱃전을 바짝 움켜쥔채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육지 남자는 이랬지만 바다 여인은 다르다. 욕지도에서 보기 드문 미인이던 삼십대 초반 우리 아주머니, 그 가날픈 손목으로 커다란 노를 용케도 저어 파도 넘어간다. '여기는 섬과 섬 사이라 조류가 급하다'고 설명도 해준다. 이렇게 여인 치마폭에 쌓여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곳이 풀이섬이다. 

 나는 전에 '수정같은 맑은 물(Christal water)'이란 말이 그냥 문학적 수식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 그런 곳이 있었다. '그리운 카프리에 섬나라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고, 수정처럼 맑은 바닷가에 처녀들 미소가 풍기네.'라는 가사가 바로 풀이섬 풍경 말하는듯 하다. 둥그런 만(灣) 속의 바다는 물이 유리알처럼 투명하다. 물 속에 헤엄치고 다니는 팔뚝만한 고기 생생하게 보이고, 바닥의 멍게와 소라 보인다. 바람은 부드럽고 공기는 신선한데, 파도에 몸 맡긴채 흔들리는 빈 배 하나 있다. 물끼 머금어 보석처럼 영롱한 자갈은 자르르 자르르 소리 내면서 씻긴다. 언덕에 커다란 동백나무가 많아, 떨어진 꽃이 나무 아래 붉은 카펫을 깐 것 같다. 고갱이 만난 타이티 풍경이 이랬을 것이다. 화가가 거친 텃치로 땅에 붉은 물감 마구 칠한듯 싶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동네랄 것은 없었다. 담 없는 집이 몇 채 동백나무 팽나무 밑에 있다. 붉은 앵두가 주렁주렁 달린 집이 아줌마네 집이었다. 사람 기척에 그 집 장독대 옆 소가 고개 들자, 딸랑! 방울소리가 정적을 깬다. 싱싱한 호박줄기는 소리없이 지붕 위로 뻗어가고 있다.

'있나?'

언니가 묻자,

'언니야!'

처녀가 대답하고 진흙 벽에 달린 방문 젖히고 나온다. 산에서 나무하고, 갯가에서 조개 캐어 그런가. 뗀마 저어 고기 잡고, 자맥질로 미역 뜯어 그런가. 늘씬한 몸매가 완전 사슴이다. 사람 시선 피하는 것도 꼭 야생 사슴 같다. 바람에 날리는 삼단같은 머리결과 까무잡잡한 피부가 천부적인 남국의 미녀다. '듀마휴이스'의 소설 여주인공이 저랬을 것이다. 주변에 동백꽃 지천이겠다, 귓가에 동백꽃 꽂으면, 그대로 동백나무 춘(椿), 계집 희(姬), '춘희' 아닌가. '태양이 쓰다듬어주는 향기로운 나라에서 나 알았었나니, 남모를 매력 지닌 식민지 태생의 한 부인을.’ 보들레르의 '식민지 태생의 한 부인에게'란 제목의 시 생각났다. 

 처녀는 미리 언니와 연통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부지는?' 언니가 묻고, '밀감나무 심으러 산에 갔다.' 동생이 대답하자, '아부지 보고 오께.' 이 말 남기고 산에 간 언니는 종일 돌아오지 않았다. 흘레 부치려고 종마 데려온 것 같았다. 언니가 노랠 부르며 풀이섬 가자고 한 이유 알만했다.

 빈집에 남은 처녀 총각은 할 일이 없었다. 총각은 마당가 날라다니는 빨간 고추잠자리만 보고, 옆 얼굴 복숭아꽃처럼 붉힌 처녀는 말못하는 애꿎은 누룽이 황소만 쳐다보고 있다. 처녀가 바가지로 볏짚 한옹큼 퍼주자, 소가 코뚜레 위로 혀를 낼름 내밀어 손을 햟는다. '그 소 몇 살 짜리요?' 묻자마자, 처녀는 늦가을 감나무 가지끝에 매달린 서리 맞은 홍시가 된다. 수줍음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계산된 교태와 수줍음의 차이는 이처럼 크다. 나는 동백꽃같은 그 처녀에게 동박새처럼 힘차게 날아가고 싶었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던지 모르겠다. 쪽마루 저편에 어색하게 앉아있던 처녀가 부얶에 들어가더니 불을 붙인 모양이다. 낮으막한 마당 굴뚝으로 나온 연기가 땅에 깔리고, 청솔가지 태운 알싸한 냄새가 코에 닿는다. 잠시 달거락거리는 소리 나더니 개다리소반에 뭘 얹어 내온다. 이것이 어떤 처녀가 오직 나만을 위해서 차려준, 내 인생 첫번째 받아본 밥상이다. 고구마가 주식이던 욕지도다. 상에 달랑 소쿠리에 담은 고구마와 돌나물 한 접시, 간장 한 종지 놓여있다. 

 식사 후 날개 달린 사자 그려진 비사표(飛獅標) 통성냥 열어 담배불 부치니, 처녀가 물 대접 가져온다. 내외 한다고 조심스레 저만치 떨어진 쪽마루에 앉는다. 멀찍이서 '저 꽃 이름이 뭡니까?' 물었더니, 얼굴만 붉힌다. 사실 그 꽃 이름은 유도화(柳桃花)다. 잎은 버들같고 꽃은 복숭아꽃 같아서 유도화다. '같이 식사 하지 그랬어요?' 또 말을 부치니, 이번에는 후따닥 뒤뜰로 달아난다. 쳐다보면 시선을 피하고, 말 걸면 달아나는 영판 사슴이다. 사슴 쫒아 뒤뜰로 가니 이번에는 앞뜰로 달아난다. 인적 없는 마당엔 숲매미만 울고, 지붕을 덮은 감나무는 시퍼런 감만 주렁주렁 달았다.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고 살아라한다. 밭이나 갈고 살아라한다. 어느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흙담 안팍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슴, 구름처럼 살아라한다. 바람처럼 살아라한다.'  박목월의 시처럼, 아주 이 처녀와 여기서 들찔레처럼 살아볼까 하는 생각 든다. 도시의 그 어느 여인이 이처럼 천하절색인가.

 아버지와 언니는 일부러 점심을 굶었을 것이다. 해거름에사 산에서 내려왔다. 

'면에서 밀감나무 심으라고 보내서...' 

노인이 변명 비슷한 말을 했고, 

'제주도는 밀감나무 키우모, 자식 대학공부 시킨다 않캅디꺼?' 

누구 들으라는지 언니는 해설을 한다.

 이렇게 풀이섬 다녀왔다. 뗀마 타고 바다로 나오니, 산 위엔 금빛 구름 몇 가닥 남았고, 진홍빛 물결 위로 먼 등불 하나 별처럼 깜빡이기 시작한다. 처녀네 집 아주까리 장명등일 것이다.

 ‘순이 벌레 우는 고풍한 뜰에 달빛이 조수처럼 밀려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았다. 달은 과일보다 향기롭다. 동해 바다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곱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아래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젖어 호젓하구나.' 

 장만영의 순이가 그 처녀처럼 이뻤을까. 먼 등불이 떠나는 날 손짓하듯 깜빡인다. 배는 피아노 은반 같은 바다 위 노저어가고, 은파는 왈츠를 추며 끝없이 따라온다.

그때 그 처녀와 맺어졌다면 시가 필요없을 것이다. 풀이섬 자체가 시이기 때문이다. 노인이 심었던 밀감나무는 누구 것이랴.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동백꽃은 해마다 붉은 카펫을 해변에 깔 것이다. 두 사람은 낙원의 연인 되어 손 잡고 그 속을 거닐 것이다. 노인과 언니는 스물 세 살 도시 청년 때문에 애간장이 탔을 것이다. 작심하고 내 눈치 살폈는데, 마음만 먹었다면 그 바다 소라와 전복 모두 누구 것이랴. 

 솔로몬의 영화보다 황야의 백합이 더 귀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엉뚱한 길로 빠진다. 나는 Tabula rasa 같이 마음에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순결한 처녀를 외면하고, 50년 전에 서울로 올라와서는, 평생 생활고에 시달리는 이름없는 봉급생활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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