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향 나는 작가/ 김지연
한 10년 전 쯤 전에 남강문학회 초대 회장 정재필 시인이 해운대 모임에서 즉흥시 한 수 읊은 적 있다.
<봄날은 간다>
꽃샘추위 잦아든 해운대 동백섬동백꽃 흐드러져봄날은 간다.
눈매 고왔던 갈래머리 문학소녀가어느 자리에선가 성주풀이 멋들어지게꺽어재끼던 당찬 소녀가
어느새 반백 머리 할머니 되어소설집 원 없이 펴낸 곱게 늙은 여류작가가 되어반세기 만에 나타나 주름진 손 덥석 잡는데속절없이 봄날은 흐르고
낮과 밤의 키 똑 같아지는춘분 절기가 감격스러운지해운대 바닷물도 뒤척이며꺼이꺼이 목이 메는 봄밤
8부 능선을 넘는 숨찬 나이에도아직은 설렘과 떨림이 남아서일까술잔은 넘치고아아 봄날은 간다.
(2012년 3월)
그 시에 나온 성주풀이 멋들어지게 꺽어제치던 문학소녀 만나러 가는 날 하필이면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한국여성문인회 회장을 역임한 그 분은 젊어 한 때 강신재, 정연희와 함께 문단의 미녀 3총사로 불리던 분이다. 그 당시 여류문인 줏가 높았다.모윤숙 시인, 박화성 소설가, 최정희 소설가가 중심이던 시절, 그 희소성 때문에 청와대에서 초대하고, 각 일간지들은 여류문인 전국주부백일장 행사 소개하고, 기업체에서 지원을 할 정도로 인기 높았다.
그래 우선 김치국부터 마셔보았다. 만나기로 한 대한극장 옆골목을 미리 정찰하여 막걸리 잔 나누기 좋은 집부터 탐색해놓았다. 운 좋으면 콧대 높은 이 분과 단독 데이트 하며 텁텁한 막걸리 잔 나눌 기회가 올지 누가 아는가. 그러고 대한극장 1층 로비에서 10년 전 문인협회 일본 문학기행에서 만나 구면인 김지연 선배를 만났다.
문단에서는 피천덕 선생 수제자가 진주고 출신 정목일이고, 월탄 박종화 선생이 딸처럼 아낀 제자는 진주여고 출신 김여정 시인이고, 김동리 선생 수제자는 진주여고 출신 김지연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김지연이라는 필명도 동리 선생이 직접 지어주신 것이라 한다. 본명은 김명자다. 김선배는 원래 스승이 작명해주신 그 이름이 탐탁치 않았는데, ‘지연’이라는 이름을 쓰기로 결심한 계기는, 스승이 댁에 새배를 갈 때마다 부인 손소희 소설가 앞에서 ’지연아 네가 아들만 둘이지?' 일부러 묻기도 하고, 선생께서 ‘자연과 인생’ 수필집을 내시고 사인을 해주실 때, 거기 김지연이라는 필명을 쓴 다음 낙관을 찍어주신 이후부터라고 한다. 김선배는 월탄문학상, 류주현 문학상, 손소희 문학상을 수상했는데, 그 중 손소희 문학상은 김동리 손소희 부부의 장남으로 지난 번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변호인으로 대한문에서 영웅 대접 받은 김평우 변호사가 물주일 것이다.
관록있는 여류답게 그 분은 악수 나누자마자 곧장 극장 옆골목으로 나가자고 했고, 거사가 미리 봐둔 집을 선택하자, '막걸리도 한 잔?' 고향 누님처럼 따뜻하게 물어준다. 이렇게 첫단추 잘 꿔면 그 다음은 일사천리다. 김선배도 그렇지만 거사도 달변으로 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다. 먼저 이쪽에서 포문을 열어 장황한 이야기 끝에 선배님 사진부터 몇 장 찍었다. '제가 10년 남강문학회 부회장 하면서 한가지 잘한 일은, 진주가 자랑으로 삼아야 할 원로 시인 김정희, 정혜옥, 김여정 세 분을 편모나마 글로 남긴 것 입니다. 이건 누군가 후배가 해야할 일인데, 사회활동 끝내고 뒤늦게 내가 수필가란 것이 되어보니, 문인들이 전부 선배는 뒷전이고 자기 중심적 입디다. 그런데 2013년에 이 사람이 남강문학회 진주 모임 숙소인 시조문학관에서 별빛 총총한 새벽 6시에 김정희 선배님을 뵌 적 있었어요. 문학관 주인인 김선배가 누가 이 새벽에 불을 켜고 둘러보고 있나 싶어 올라오신 거지요. 그래 두 사람이 문학관을 둘러보다가 마침 이영도의 <탑>이란 시 앞에 오자, '너는 저 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하고,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나지막히 시를 읊어주시는데, 그걸 남 다 자는 이른 새벽에 미인이 조용히 읊어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 마침 옆에 이영도 시인 사진이 있길래 그걸 보면서 선배님께 하나제안을 했지요. 이영도 시인은 시도 감동이지만, 모습도 아름다워 얼마나 감동입니까?가령 제가 크리스티나 로젯티의 시를 좋아하는데, 막상 그 분 문학관에 가니 사진이 없다면 어떻게 됩니까? 김선배님도 미인이신데, 남긴 사진이 없군요. 훗날을 위해 멋진 사진을 문학관에 비치하셔야 합니다. 이런 대화 한 적 있는데, 오늘 김지연 선배 만났으니, 사진부터 찍고 시작합시다.' 이렇게 말하고 사진도 찍고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이야기 나눈 적 있다.
김지연의 작품세계는 크게 두가지로 요약된다. 진주 초전동 과수원집 따님 감성으로 쓴 '산'에 관한 것, 의학신문 취재부장 경험을 토대로 쓴 '의학 소설'이 그것이다. 전자는 18세 때 심장병과 폐결핵으로 지리산 산사에서 정양생활 할 때 체험이 보태진 <산울음>, <산배암>, 중국 흑룡강성에서 번역되어 팔렸던 <산가시내>가있고, 우리 문단에서 유일한 의학소설이라는 평가를 받는 후자는 <흑색병동>, <히포크라테스 연가> 등이 있다. 주로 산에 대한 수필을 쓰고 지리산에 자주 다닌 거사가 선배님의 산에 대한 소설에 흥미를 보이자, 거사의 지리산 방문기도 몇 편 읽었고, 현재 지리산에 농막 하나 지어놓고 자주 가신다고 한다. 이날 김선배님 작품 <소설 논개> 이야기가 나왔다. 전에 부산의 모 일간지에 연재하다가 상,중,하 세 권책으로 출간하여 근자에 필자에게도 기증한 책이다. 논개 이야기 나온 바람에 촉석루 밑 의암 옆 비각 안에 있는 논개를 읊은 한시를 번역하신 시인 정태수 전 문교부 차관님과 전화 연결해드려 훗날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한분은 논개의 사적을 추적해 세 권의 소설로 집약한 분이고, 한 분은 논개 시를 쓴 해주 정씨 정식(鄭栻)의 후손으로 시를 알기 쉬운 한글로 옮긴 분이기 때문이다.
홀로 가파른 그 바위 우뚝 선 그 여인(獨峭其巖 特立其女)
저 여인, 이 바위 아니면 어디서 죽을 곳을 얻으며(女非斯巖 焉得死所)
저 바위, 이 여인 아니면 어찌 의롭단 말 들으리(巖非斯女 烏得義聲)
한 줄기 강물 높은 바위, 만고에 꽃다우리라(一江高巖 萬古芳貞)
정태수 역
일찌기 내가 '진주 여인은 대채로 인근 산야에서 자라는 야채나 과일 비슷하니, 부드럽기는 신안동 토란처럼 부드럽고, 시원하기는 도동 수박처럼 시원하고, 달콤하기는 비봉산 산딸기 같고, 연하기는 습천못 무화과 같다'고 한 적 있다. 나는 전원도시에서 자란 진주 여인 몸에선 과일 향내가 난다고 생각한다. 그날 나는 과일 향내 나는 그 분과 고향 이야기 문학 이야기 한참 나누다 왔다.
김지연 소설가 약력
진주여고.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1967년 「매일신문」신춘문예 당선. 1968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작품집 『산가시내』 『산울음』 『산 배암』 『야생의 숲 』『촌남자』『고리』『아버지의 장기』
『산막의 영물』 『배추뿌리』 『산죽』등 30여권이 있고 역사소설 『논개』가 있다.
한국소설문학상 , 월탄문학상, 류주현 문학상 수상하였다.
방송심의위원회,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경원대 겸임교수. 한국문예학술 저작권 협회 부이사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역임. 은평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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