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 (The Good Earth 1931)
매주 한 편씩 영화수필을 써본 건 잘한 일 같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헤밍웨이), 노틀담의 곱추(빅톨 유고), 전쟁과 평화(톨스토이) 같은 대가들 작품을 언제 무슨 시간에 다 읽는가. 극장 가서 천재들의 작품 구성, 묘사력, 사상 공부하는 일 알량한 문학강좌보다 실속있다.
이번에 펄벅의 '대지'(The Good Earth 1931)를 보고 혼자 포장마차에 가서 한 잔 했다. 젊을 때도 이 영화 보았지만, 그땐 펄벅이 노벨상 수상 작가라는 바람에 보았고, 기억에 남는 건 새카맣게 하늘을 덮은 메뚜기떼 뿐이다. 이번엔 영화 첫머리 자막부터 의미 깊었다. '나라의 혼은 소박한 사람들의 생활에 나타난다. 중국 농부의 삶을 다룬 이 이야기는 중국인의 전통과 중국의 혼을 느낄 수 있다.' 영화 한 편이 중국에 관한 수천가지 통계보다 낫다.
영화 시작은 농부의 아들 ‘왕룽’의 결혼식에서 시작된다. 왕룽은 홀아버지와 사는데, 어느 날 부잣집 하녀 오란과 결혼한다. 왕룽은 얼굴도 보지못한 신부가 병신일까 걱정한다. 그러나 슬쩍 보니 그렇지 않아 웃는다. 보따리 들고 종종종 왕룽 뒤에 따라나선 오란은 못생긴 편이다. 펄벅의 딸 하나가 지체부자유자였다. 여주인공 모습에 투영되어 있다. 오란의 몸짓은 어딘가 부자유스럽고 눈은 허공을 쳐다본다. 왕룽이 복숭아를 사서 건네주자 오란의 얼굴이 밝아진다. 왕룽이 복숭아를 먹고 길가에 던지자, 오란은 그걸 씨를 심어서 복숭아 나무 키운다며 줏어온다.
오란은 부자집 부얶데기 출신이라 음식 솜씨가 좋다, 시아버지와 친척 모두 좋아한다. 부부는 부지런히 일하여 땅을 사고, 나중에는 오란이 시집온 황부자집 땅도 산다. 어느 태풍 부는 날이다. 오란은 움막에서 혼자 아기를 낳고, 왕룽더러 비 맞은 밀이 썩지 않도록 밭에 가서 수확하라고 한다. 인간은 대지에 붙어사는 벌레처럼 작은 존재다. 아이 셋 되었을 때 가뭄이 온다. 대지는 갈라지고 캐어 먹을 풀뿌리도 없다. 메마른 진흙밭 헤매던 물소는 말라죽는다. 굶주린 동네 사람들은 왕룽의 부억에서 뭘 끓이는 걸 보고 몰려온다. 솥을 열어보니 배가 고파 진흙을 끓이고 있다. 배고품은 죽음보다 고통스럽다. 오란이 애를 임신하자. 밥 먹을 입이 하나 더 생긴 왕룽은 땅을 팔려고 내놓는다. 그러나 상인은 구입할 때 가격보다 스므배나 낮은 은자 세 냥 밖에 못준다고 한다.
죽으면 죽었지 땅은 팔수 없다. 왕룽 가족은 고향에 땅을 남겨둔채 기차를 타고 무작정 남쪽으로 간다. 거적데기 줏어와 움막을 짓고, 왕룽은 인력거꾼, 오란은 동냥으로 연명한다. 아이를 하나 팔아 그 돈으로 집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 와중에 민중 혁명이 일어난다. 오랜 왕정이 끝나고 공화정이 세워진다. 그 틈에 사회 혼란이 온다. 폭도들은 곡식가게를 털고 부자집을 턴다. 오란은 부자집 터는 폭도들 따라갔다가 거기서 보석 든 자루를 줍는다.
이 부분에서 펄벅의 비범한 솜씨 엿보인다. 평범한 사건을 극적으로 바꿔놓는다. 오란은 몸이 약해서 폭도들 발길에 밟혀 실신해서 쓰러진다. 정신을 차려보니 사람들이 밀물처럼 빠져나간 뒤다. 거기 땅바닥에 뭔가 빤짝이는 것이 담긴 자루가 보인다. 집어들고 열어보니 빤짝이는 구슬들이 나온다. 휘둥그레 눈이 뒤집힌 오란은 그걸 품에 품고 나온다. 대문께에 오니 군인들이 폭도들 몸수색을 하는데, 오란 바로 앞 여자 몸에서 훔친 물건이 나오자 그대로 벽에 세워놓고 총살한다. 오란 차례가 왔을 때다. 한 지휘관이 오더니 '대위! 행진 준비시켜' 명령하자, 군대는 즉시 작전 중지하고 철수한다.
'이것 봐요, 이젠 우리도 집에 돌아갈 수 있어요.'
움막에 돌아온 오란은 왕룽에게 보석을 보여준다.
'집이다' 주렁주렁 짐을 단 마차에 가족을 태운 왕룽 일가는 고향에 돌아온다. 쌀 자루를 동네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전쟁 중에 자기 쟁기를 보관해준 친구 칭이 찾아오자 농장 관리인에 임명한다. 보석을 팔아 땅을 사려하자, 오란은 그 중 하얀 구슬 두 알(진주)은 자기가 간직하고 있다가 시간 날 때마다 꺼내보면 않되냐고 왕룽의 눈치 살피며 묻는다. 왕룽이 승락하자, '고마워요' 오란이 인사하고, 왕룽은 '보석은 원래 당신이 가져온 거잖아' 한다.
이 대목이 충격적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남편 재산 아내 재산 따로 있다. 가부장 시대는 거하고, 암탁 우는 시대가 래한 것이다. 암탁 울면 집안 망한다는 속담 있다. 그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걱정하는 사람 없고 헛소리 하는 사람은 많다. 서양도 19세기 말까지 여성 참정권 없었다. 불과 백 년만에 세상 이리 변했다. 인류의 수천년간 지켜온 가부장제 시대가 종막 고하고 사라졌다.
왕룽은 오란이 하녀로 있던 황부자 집을 사서 이사하고, 밑에 아들 시켜 농작물 판매를 계약한다. 차차 사치에 눈 뜨고, 요정 여인을 첩으로 들인다. 찻잔 네개 달린 주전자는 있어도, 주전자가 넷 달린 찻잔 없는 게 이치라고 말한다. 오란에게 맡긴 하얀 구슬 두 알을 필요하다며 회수한다. 오란은 슬픈 눈으로 진주를 한참 보다가 건네준다. 첩은 왕룽의 아들을 유혹한다. 신발 버클 은도금이 벗겨졌으니 고쳐달라고 부탁한다. 왕룽 아들이 신발을 받자, 첩은 '여자는 마음이 있는 남자에게 신발을 맡기는 것'이라며, '그 신발은 순은이라 도금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왕룽은 밭에서 칭을 만난다. 칭은 동네 사람 모두가 아는 비밀을 말해준다. 아들과 첩의 불륜이다. 그 말을 듣자 왕룽은 화가나서 칭을 해고한다. 집에서 아들과 첩의 불륜 현장을 보고 아들을 구타한다. 이튿날 아들은 군에 입대하겠다고 왕룽 앞에 와서 인사한다. 이때 숙부가 이제 조카는 망했다고 소리친다. 까닭은 물어보니 메뚜기떼가 몰려왔다고 한다. 메뚜기떼가 나타나면 땅은 곡식 한 알 건질 수 없다.
이때사 왕룽은 정신을 차린다. '모두 밭으로 가요' 왕룽은 밭에서 노인과 젊은이 모두를 격려하여 메뚜기떼가 바람의 방향이 바꾸어 딴 데로 날라갈 때까지 대치한다. 기름을 부어 불과 연기로 공중을 차단하고, 땅에 물골을 만들어 떨어진 메뚜기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한참 후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하늘을 까맣게 덮고 날라오던 메뚜기떼는 딴 데로 날라간다. 현장은 감격과 환희로 뒤덮힌다. '우리들이 해냈어.' 이때 왕룽은 함께 메뚜기떼를 막은 아들과 칭을 용서한다.
아들 장가 보낼 때다. 며느리 인사를 받는 오란에게 왕룽이 찾아가 손에 진주 두 알을 쥐어준다. 힘없이 누워있는 오란에게 '당신 병을 치료 할 수 있다면 이 땅을 다 팔겠소' 한다. 오란은 '그렇겐 못하죠. 나는 언젠가 죽어야 하죠. 그러나 땅은 영원히 남아야 하니 팔아서는 않되죠' 한다. '제발 날 떠나지 마' 왕룽이 소리치자, '그럴 수 없어요. 용서하세요' 이렇게 말하고 오란은 눈을 감는다. 그때 오란의 손에서 진주 두 알이 힘 없이 침대 위로 떨어진다. 왕룽은 망연자실하여 혼자 마당에 나간다. 거기 나무 옆에서 말한다.'여보! 나의 진정한 대지는 당신이었소.'
*펄벅은 1892년에 태어나 1973년 사망했다. 1931년 [대지]를 출판, 30개국 이상으로 번역되고, 노벨문학상과 퓰리쳐상을 받았다. 1963년 발표한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는 1883년 이후 한국 사회의 변천을 그렸는데, 주인공은 유한양행 창업주 고 유일한 박사가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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