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1

망경산

김현거사 2018. 4. 10. 10:30

    

  

 

 망경산 

 

 누구나 마음 속에 그리운 산 하나 있을 것이다. 나에겐 진주 망경산이 그런 산이다. 그 산은 뻐꾹새 울고 송아지 울던 낮으막한 동네 뒷동산은 아니지만, 오르면 멀리 토끼 귀처럼 생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고, 깍아지른 절벽 아래 남강이 비단띠처럼 휘돌아 흘러, 봄엔 눈 녹은 물 흐르는 강에 은어가 올라오고, 가을엔 밟아도 밟아도 흙이 부드러운 신안동 들판에 기러기 떼 나르는 모습이 보인다.

망경산은 북쪽에 험한 절벽이 있고 남쪽에 부드러운 능선이 있는 외유내강의 산이다.

나는 절벽에 크리스티나 로젯티의 시를 새겨놓은 적 있고, 굴을 파놓고 '폭풍의 언덕‘에서 히스크리프가 그랬던 것처럼 캐더린을 기다리기도 했다. 사람 아무도 갈 수 없는 절벽에 핀 산나리꽃 꺽어와 소녀가 살던 집 대문 앞에 놓아둔 적도 있다.

남쪽에는 계단식 밭과 감나무 과수원과 산그늘에 숨은 거울같이 빤짝이는 호수가 있었다. 나는 단석산에서 무예를 딱은 김유신 장군처럼 거기서 몸을 단련했다. 축지법 쓴다고 한번도 쉬지않고 산을 뛰면서 종주했고, 계단식 밭을 새처럼 연속 활공하여 뛰어내렸고, 허리께 쯤 오는 소나무는 그 위로 넘어갔다. 무협지를 보면 수련하는 사람이 매일 한 나무를 뛰어넘기 시작하면, 몇 년 뒤에 그 나무가 자기 키보다 훨씬 높아져도 넘을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그런 말을 믿었다. 나에게 키 작은 소나무 듬성듬성 난 솔밭은 높이뛰기 연습장이요, 계단식 밭 연이은 능선은 넓이뛰기 연습장 이었다. 나는 보통 사람 왕복 한시간 걸리는 그 산을 30분만에 주파했다. 산은 내 체육 선생님 이었다. 그 덕에 나는 고등학교 시절 백미터와 높이뛰기 넓이뛰기, 투창과 투원판 선수였다.

  산은 내 미술선생님 음악선생님이기도 했다. 망경산은 봄이면 오리나무 가지 끝에 움트는 새잎이 신비롭고, 여름이면 흰구름 뜬 언덕이 시원했다. 가을이면 과수원 홍시가 탐스럽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골짝의 고드름이 신비로웠다.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에 다녔다. 나는 비오는 산 속, 눈 오는 산 속의 고요한 정취를 안다. 새벽 산과 달 밝은 산의 침묵을 안다. 산에서 들려오던 소리를 기억한다. 고요한 산 풀밭에서 울던 여치 소리, 인적 없는 골짜기에서 울던 뻐꾸기 소리, 꾹꾸르르 대밭에서 울던 산비둘기 소리, 폭풍이 산을 할퀴고 지나가는 소리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아지랑이 덮힌 산록의 신비한 종달새 소리, 늦가을 낙엽 지는 쓸쓸한 소리를 나는 기억하고 있다. 산은 나에게 전원교향곡을 가르켜준 음악선생님 이었다.

산은 나에게 색의 향연을 일깨워준 미술선생님이기도 했다. 나는 산에 피는 꽃을 사랑했다. 산나리꽃과 원추리꽃, 바위 틈에 핀 패랭이꽃, 무덤 옆 할미꽃, 보리밭 가에 핀 하얀 찔레꽃이 먼저 기억난다. 대밭의 보라색 칡꽃, 언덕의 하얀 벚꽃, 과수원집 담장에 핀 선홍색 석류꽃도 기억난다. 그 밖에 진주알처럼 풀밭을 수놓던 아침 이슬, 흰구름 떠가던 언덕, 화폭인양 하늘을 피빛 물들이던 노을을 나는 산에서 보았다.

산은 나의 체력을 단련시켜준 체육선생님, 자연의 소리를 가르켜준 음악선생님, 색에 대한 감각을 키워준 미술선생님이었다.

바람조차도 나와 특이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도시의 페이브먼트 위를 걷다가 지금도 나는 비 갠 하늘 아래 산들바람이 불면, 50년 전 문정숙의 ‘나는 가야지’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겨울이 가고 따뜻한 해가 웃으며 떠오면, 꽃은 또 피고 아양 떠는데 노래를 잊은 이 마음. 비가 개이고 산들바람이 정답게 또 불면, 새는 즐거이 짝을 찾는데 노래를 잊은 이 마음.’

지금도 나는 비온 후 산들바람이 불면 문정숙의 노래 부르던 50년 전 소년이 된다. 고향 하늘에 걸렸던 무지개, 면사포처럼 하얀 안개 둘러쓴 남강, 대숲에서 후두둑 떨어지던 물방울 소리, 또랑에서 바지 걷어부치고 붕어 잡던 일이 사무치게 그립다.

망진산에는 어머님이 자주 가시던 절이 있었다. 산길에 있던 복숭아나무에 핀 꽃은 갓 시집 온 새댁처럼 고왔다. 절에 '해탈이'라는 고양이가 있었다. 해탈하여 피안으로 가라는 이름이다. 그 후 우리 집 고양이 이름도 '해탈이'로 바꾸었다.

망경산은 나의 사춘기 감성을 달래준 숨겨놓은 애인이었고, 향불 아래 어머님이 두 손 모우고 기도한 경건한 산이다. 

그러나 이제 진주에 가면 부모님은 타계하셨고, 습천못은 메워졌다. 이젠 산이나마 나를 알아볼까 하는 쓸쓸한 생각이 든다. 작년에 진주 갔을 때 망경산을 천천히 한바퀴 돌아보고 왔다.

 (수필문학 2012년 년간대표수필선집)

 

     망경산 


 누구나 마음 속에 그리운 산이 하나 있을 것이다. 진주 망경산이 나에게 그런 산이다. 

 망경산은 외유내강의 산이라 할 수 있다. 밖은 절벽이고, 안은 호수와 부드러운 능선을 품고 있다. 깍아지른 절벽에 서면 그 아래 남강 물줄기와 신안리 들판이 손금 보듯 보인다. 멀리 토끼 귀처럼 생긴 지리산 두 봉우리도 보인다. 천왕봉과 중봉이다. 강 건너 절벽을 이룬 언덕은 서장대다. 두 절벽 사이에 비단띠마냥 휘돌아 흐르는 강이 남강이다. 그 사이에 펼쳐진 신안동 들판은 밟아도 밟아도 부드러운 모래흙이다. 지리산 눈 녹은 물 흐르는 봄이면 버들강에 은어 올라오고, 가을이면 들판 나락 안고 메뚜기가 톡톡 튀었다.

 

 

 나는 망경산 절벽을 좋아했다. 그때는 혈기가 넘쳤다. 사람 갈 수 없는 절벽을 진도개를 데리고 오르내리곤 했다. 절벽 가운데서 흙에 반쯤 묻혔던 도자기를 발견한 적 있다. 소녀를 위해 암벽에 시를 새긴 적 있다. 산나리꽃을 꺽어오곤 했다. '폭풍의 언덕'인양 절벽에는 바람이 분다. 거기 굴을 파놓고 히스크리프처럼 캐서린과 놀고 싶었다.    

 반면 우리 집 망경남동서 바라보는 망경산은 여성처럼 부드러운 산이다. 산그늘에 숨은 거울같이 빤짝이는 호수가 있고, 감 과수원이 있다. 나지막하게 층을 이룬 계단식 밭이 있다. 절이 있었는데, 절 올라가는 길 복숭아꽃은 새댁처럼 순결하고 고왔다. 어머님이 절에 가시곤 했다. 절에는 '해탈이'라는 고양이가 있었다. 그래 우리집 고양이 이름도 해탈하라고 '해탈이'라고 부쳐주었다. 습천못은 고추잠자리와 붕어를 잡던 곳이다. 봄 벚꽃이 화사했다.

 망경산은 4계절이 다 좋았다. 봄이면 오리나무 가지끝에 움트는 새잎이 신비로웠다. 여름이면 흰구름 뜬 언덕이 좋았다. 가을이면 과수원 홍시가 탐스러웠다. 겨울이면 골짝마다 얼어붙은 고드름이 신비로웠다. 나는 아지랑이 덮힌 산에서 지지배배 우는 종달새 소리, 꾹꾸르르 대밭의 산비둘기 소리, 비온 뒤 졸졸 흐르던 또랑 물소리, 인적 없는 골짜기 뻐꾸기 소리를 들었다. 전원교향곡 이다. 나는 절벽의 노란 원추리, 바위 틈의 붉은 석죽화, 무덤 옆 할미꽃을 보았다. 그 모두 색의 향연을 일깨워준 미술선생님이다. 나는 보리밭 가의 하얀 찔레꽃, 대밭의 보라색 칡꽃, 언덕을 수놓던 벚꽃을 기억하고 있다. 과수원집 담장에 얼굴 붉히고 서있던 석류나무도 기억하고 있다. 그 밖에 하얀 도라지꽃, 노란 민들레, 보라빛 고구마꽃, 연분홍 진달래, 노란 개나리도 기억한다. 이 모두 나의 미술선생님이다.

 산은 체육 담당 선생님이기도 했다. 나는 매일 산을 뛰어올랐다. 나는 단석산에서 무예 딱은 김유신 장군 같았다. 망경산을 한번도 쉬지않고, 뛰어서 오르내렸다. 나는 축지법을 흉내내었다. 왕복 한시간 걸리던 산을 30분만에 왕복했다. 능선의 잔솔밭은 높이뛰기 기구다. 일미터 남짓한 잔솔을 매일 뛰어넘으면, 다음 해는 나무 키가 더 커도 넘을 수 있었다. 계단식 밭은 넓이뛰기 기구다. 새처럼 활공하여 밭둑을 뛰어내리곤 했다. 그 후에 산을 내려와 강에서 몸 씻고, 아침 먹고 학교엘 갔다. 망진산 덕택에 나는 고등학교 대표 육상 선수였다. 백미터, 높이뛰기, 넓이뛰기, 3단조, 투창, 투원판 선수도 했다.  

  망경산은 나의 신체를 단련시키고 담력을 키우고 정서 함양해준 스승이다. 음악 가르켜준 스승이고, 열 다섯 사춘기 감성 달래준 애인이다. 산이 내게 비밀로 보여준 것도 있다. 비 갠 산에 걸리던 무지개. 새벽 남강이 면사포처럼 둘러쓴 하얀 안개다. 이런 건 산이 아무에게나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고향 떠난지 50년 되자 이제 진주에는 아는 사람 드물다. 부모님 타계하셨고 친구들도 흩어졌다. 망경산도 변했다. 습천못은 메워졌고, 산 정상엔 돌로 축조된 웬 낮선 봉수대가 서있다. 거기 '내 죽거든 임이여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마세요. 내 머리맡에 장미도 심지 말고, 그늘진 삼나무도 심지 마세요.' 내가 바위에 새겼던 크리스티나 로젯티의 'When I am dead, my dearest'란 시도 바위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고향에 찾아와도 그립던 고향은 아니러뇨'란 노래 생각난다. 이젠 고향에 가도 나그네다. 그러나 나에겐 망경산이 있다. 산은 나에게 종달새와 뻐꾸기 노래 가르쳐준 음악선생님, 노란 원추리꽃 붉은 패랭이꽃 색의 향연 일깨워준 미술선생님, 열 다섯 사춘기 소년의 감성을 달래준 애인이다. 나는 나의 선생님과 애인이 거기 있어 안도한다. 산이 나를 알아보았는지 모르겠다. 작년에 진주 갔을 때 망경산을 한바퀴 천천히 돌아보고 왔다. (수필문학 2012년 년간대표수필선집)

'진주라 천리 길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육거리의 추억/경남진주신문 2018년 4월3일  (0) 2018.04.12
배건너의 추억/경남진주신문. 2018. 3월  (0) 2018.04.11
촉석루의 봄  (0) 2018.04.09
고향의 작은 둠벙  (0) 2018.04.08
고향의 시냇물  (0) 2018.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