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1

고향의 작은 둠벙

김현거사 2018. 4. 8. 11:17

 고향의 작은 둠벙  


 여름이면 간혹 고향의 작은 둠벙이 생각난다. 내 유년의 추억이 담긴 그 둠벙은 지금 신안동 아파트촌 어느 지점인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당시 신안동은 진주시 외곽의 동네다. 서장대 지나면 둑 넘어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이 있고, 그 가운데 신작로는 하동 가는 뻐스가 다녔다. 나는 망경동에 살았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살던 집은 낮으막한 야산에 올망졸망 이십여 가구 모여살던 신안동 제일 윗 집이다. 앞에 들판과 남강과 망경산 절벽이 보였다. 옆에 우리 5대조 할아버지가 심은 어른 둘이 안아야 손이 잡히는 큰 정자나무가 있고, 어른들이 대나무 장죽 물고 멍석 깔고 쑥불 피워놓고 모이던 잿마당이 있었다. 삼촌 집은 동네 어귀에 있었다. 삼촌은 일제시대에 만주와 전라도를 돌아댕긴 한량이다. 마음 잡으라고 탱자나무 울 안에 새 기와집 지어주고, 벽에 크다란 불알 늘어뜨리고 뎅뎅 시간 알려주는 신식 벽시계 달아주었다. 그 집에 과수원과 여나믄 마지기 논에 물 대려고 골짝 물 모아두는 작은 둠벙이 있었다.  

  나는 신안동 갈 때마다 우선 이 둠벙 가에서 놀았다. 둠벙 주변은 늘 빨간 고추잠자리가 하늘을 덮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물가에는 날개가 모시처럼 빳빳한 검푸른 물잠자리가 까딱까딱 꼬리를 수면에 적시곤 했다. 그 중 아이들이 탐내던 것은 왕잠자리다. 왕잠자리는 둘이 교미를 한 채 공중을 날아다니기도 했다. 암컷 '또니'는 몸이 호박색이고, 수컷 '수벵이'는 하늘색이다. 아이들은 '수벵이' 잡으려고 '또니'를 작대기 끝에 실로 매달아 공중에 빙빙 돌리다가, 교미할려고 달라붙으면 그걸 풀밭에 살살 끌어내려 잡았다. 암컷 '또니'가 없으면 호박꽃을 따서 '수벵이' 날개와 엉덩이를 노랗게 물들여, 가짜 '호박 또니'로 '수벵이'를 낚았다.

 하늘에 공군이 있다면 물에는 해군이 있다. 거북선처럼 동그랗게 생기고 좌우 노 같은 발로 헤엄치던 방개가 있고, 몸이 가늘어서 물 표면을 기름처럼 슬슬 미끄럼 쳐가는 소금쟁이가 있다. 방개는 잡아서 땅에 뒤집어 놓으면 딱정벌레처럼 반질반질한 등으로 뱅그르르 돌다가 날개 밑에 달린 또하나 부드러운 날개를 펴서 갑자기 공중으로 횡하고 날아갔다. 

 사촌동생 창선이와 나는 바지 걷어부치고, 개구리밥 뜨있는 풀섶 헤치면서 검정고무신으로 붕어를 잡았다. 몸이 납작하고 전신에 금빛 비늘 덮힌 참붕어는 귀했고, 손가락 사이로 미끈미끈 빠지는 미꾸라지와 초록과 검정색 얼룩무뉘 해병대 옷 같은 걸 입고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는 개구리는 많았다. 간혹 스르르 나타난 물뱀에게 놀라기도 했지만, 메기나 장어를 잡으면 그날은 신이 났다.  

  둠벙의 봄은 못물 가득한 새카만 올챙이 떼로 시작되고, 여름은 개구리 울음 속에 지나간다. 개구리는 비 올 때나 해거름때 특히 잘 운다. 둠벙 근처가 개구리 합창으로 귀 따갑다. 아이들은 청개고리를 좋아했다. 비 온 뒤 풀잎에 나타나는 등이 녹색이고 뱃바닥이 하얀 작은 청개구리는 잡아서 손바닥에 올려놓으면 피부가 너무나 보드러웠다. 

  요즘 도시 아이들은 비 오면 우산 찾고 난리법석 떤다. 그러나 둠벙가 아이들은 다르다. 갑자기 하늘 찢어지듯 벼락 치고, 번개불 뻔쩍 쳐도 태연하다. 머리칼과 웃이 젖어도 태연하다. 한나절 놀고나면 옷이 다 마르기 때문이다. 비 지난 산들바람 더 시원하고, 뭉게구름 더 찬란하고, 황혼은 더 붉다. 그 비를 아이들은 '호랑이 장가간다'고 불렀다.

 간혹 삼촌댁 두 누이가 밖에 나온다. 그들은 메뚜기를 잡아 풀줄기에 뀌거나 사이다병에 넣어가서, 소금에 튀겨서 짭조름한 반찬 만들었다. 간혹 우릴 불러 삶은 감자도 내놓고, 과수원 단감을 따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세상에 그 처럼 좋은 어린이 놀이터 없다. 미끄럼틀과 그네는 없지만, 거긴 헬리콥터처럼 공중 날아다니는 '또니'와 '수벵이' 있고, 잠수함처럼 물 속 헤엄치는 자라와 붕어가 있었다. 거북선처럼 생긴 방개 있고, 뒷다리 잡고 덜렁방아 찧던 여치가 있었다. 그 모두 조물주가 만든 살아움직이는 귀한 장난감이다. 요즘 상인이 백화점에 납품하는 밧데리로 움직이는 허접한 작난감 자동차와 비교할 수 없다. 

  나는 진주에 가면 서장대에 올라가 한참 신안동 쪽을 바라본다. 거기 아파트촌 어딘가에 가을에 물 뺀 둠벙 바닥 속에 숨어있던 미꾸라지처럼 내 추억이 숨어있다. 내 눈엔 옛날 둠벙가 하얀 찔레꽃도 보이고, 미인은 아니었지만 다정하던 사촌 누이 얼굴도 보인다. 어딘가서 논둑에 베어 말리던  그 당시 풀냄새도 나는 것 같다.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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