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1

촉석루의 봄

김현거사 2018. 4. 9. 09:31

 

  촉석루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세월이 갈수록 봄이 아쉽게 느껴진다. 작년에는 친구 부부와 섬진강 매화와 지심도 동백꽃 보고왔지만, 올해는 아내와 진주성의 봄을 구경했다. 먼저 천객만래(千客萬來)라 써붙인 제일식당에서 해장국으로 배 채우고, 시장에서 돈나물, 고사리, 두릅, 당귀 구경했다. 그 중 일곱 마리 5천 원하는 삼천포 갈치가 놀라웠다. 갈치는 50년 전 내 고등학생일 때 자주 먹던 생선이다. 반갑기도 했지만 서울은 갈치구이 정식이 만원인데, 일곱 마리 5천원이면 그냥 공짜다. 쭈구렁 할머니는 대바구니 가득 진달래 꽃잎을 담아놓고 팔고있다. 술 담는 것이라는데, 사실 진달래꽃으로 담은 진달래주는 독하다. '이거 묵으모 무루팍이 튼튼해짐니다'. 우슬(牛膝) 파는 아줌마도 있다. 우슬은 생김새가 쇠무릎처럼 생겼고 관절염 치료 약재다. 그 옆 삶은 감자가 사람 감동시킨다. 어쩌면 내고향 감자는 분이 그렇게 하얗고 푸실푸실하고 탐스러운가. 옥수수도 마찬가지. 어찌 그리 알갱이가 크고 먹음직하게 생겼는가. 내고향의 갈치, 감자, 옥수수 모두 탐난다. 말씨도 정이 간다. 표준말만 듣던 귀에 사투리가 그리 정겹게 들린다. 타향살이 하느라 이런 아침장 매일 볼 수 없는 처지가 안타깝다. 

 걸어서 촉석루 가니 신록이 무한한 감회 안겨준다. 공기가 좋아서 그럴까. 노란 개나리 붉은 진달래가 그리도 영롱하다.  촉석루 난간 밑에 새잎 돋은 잘 생긴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다. 혹시 그 양반이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 속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수주 변영노의 시 '논개'를 생각하고 심도록 지시한 것인지 모르겠다.  진주성 복원은 전 문화재 관리국장 정재훈씨 작품이다. 그는 진주사범 출신으로 경주 신라 유적 정비를 총괄한 후, 박대통령과 독대한 자리에서 진주성 복원을 요청하여 허락 받았다. 시인이라 출향 작가 모임인 남강문학회 모임에 자주 나왔었다.

 누각 아래 시 한 편이 보인다.

  

'작년에는 자네가 진주 목사로 떠나는 나를 전송해주더니만, 금년에는 당신도 태수가 되었구려. 상주의 시내와 산도 신선 고을이지만, 진양의 풍월도 선향이라 이를 만하네. 비록 두 고을의 거리가 멀어서 추석에 만나자는 약속은 어겼으나, 이번 중양절에는 만나 국화주를 마시도록 약속하세.' 

 

고려 때 김지대 진주 목사가 상주 목사 최자에게 보낸 시다. 평양에 부벽루(浮碧樓)가 있다면, 진주에 촉석루(矗石樓)가 있다. 진주 목사 쯤 한 분이라 풍류가 이 정도 였구나 싶다.

 

 

 신발 벗고 누각에 오르니, 천지는 봄이다. 강 건너 망진산은 울긋불긋 꽃동산이고, 대밭은 푸르고 모래밭은 희다. 두보가 '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 빛이 불타는 듯 하다'(江碧鳥逾白. 山靑花欲然)고 읊은  시 생각난다. 촉석루 옆  의기사(義妓祠) 매화와 오죽(烏竹) 향기롭고, 의암(義岩) 내려가는 절벽 야생 복숭아꽃 분홍빛 곱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동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동요 절로 나온다.

 서장대 올라가는 길에서 보이는 포구나무 느티나무는 타향에서 문득문득 눈앞에 떠오르던 그리운 나무다. 노거수들이 초봄의 하늘에 물감 풀어내듯 부드러운 신록 펼치고 있다. 강이 내려다보이는 성곽 옆에 진주성 전투에 사용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이 놓여있다. 이들 총통의 사정거리가 대략 일천 미터였다. 따닥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이런 총통에게 바다에선 거북선에게 당하고, 육지에선 진주성에서  호된 맛 보았다. 그래 '요시 너희 진주 놈들 나중에 한번 보자.'고 절치부심하여, 퇴각하면서 병력을 집중해서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그 때 진주는 관민 칠만이 전원 순국했고, 개는 왜장을 안고 꽃다운 몸을 남강에 던졌다. 

 

 

그 길에 심어놓은 무궁화 가로수 분재처럼 잘 전지된 수형이 좋다. 꽃 피면 장관이겠다. 그 모습이 임란 3대 대첩지인 진주성에 잘 어울린다. 지붕 골기와 보수 공사 중인 박물관에 가보니 뜰에는 대절버스로 온 초등학생들이 웃으며 분주하게 뛰어다닌다. 나도 한때 저들처럼 웃으며 뛰놀던 시절 있었다. 아이들 모습 구경하며 걷는 오솔길에 동백꽃 몇송이 떨어져 있다. 한 송이 집어 40년 함께 살아온 아내 손에 쥐어주었다. 낙화가 인생 무상 느끼게 한다 

 차나무와 맥문동 심어진 언덕길 따라가니 아름들이 느티나무 아래 호국사가 보인다. 임란 때 승병들 훈련하던 곳이다. 밤마다 남강변에 울리던 호국사 종소리 그립다. 서장대(西將臺) 올라서자 신안동 들판이 보인다. 지금도 남강은 동쪽 촉석루 밑으로 흘러오지만, 신안동 들판은 이제 현대, 한보 아파트촌이다. 보리밭 덮혔던 그 들판 우측 언덕에 아버님 태어나신 집이 있었다. 강 건너 좌측은 내가 여름에 늘상 가서 다이빙 하던 '메기통'이다. 우연히 서장대 현판 글씨 보니 글씨가 낮 익다. 다시 자세히 보니 은초(隱樵) 정명수 선생님 글씨다. 은초선생은 아버님 친구분이다. 안양서 아버님이 임종하셨을 때 진주서 반야심경 써가지고 와서 빈소에 올리고 가신 분이다. 정이란 무엇인가. 그 분도 이제 고인이다. 언덕 아래를 굽어보니 서장대 절벽에는 연분홍 진달래꽃 곱다. 사람은 가고 꽃만 곱게 피어있다. 봄은 왔건만 언제 다시 만나리. 친구 소식 아득하고, 옛성의 꽃만 곱다. 돌아보니 고향 떠난지 50년. 칠순 머리칼엔 백발만 성성하다. 가슴 뭉클해진다. 머리 숙여 천수교 바라보니, 푸른 물 위에 뜬 돚단배 하나 나처럼 외롭다.

(수필문학 201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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