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시냇물
누구나 고향을 생각하면 화가나 음악가가 된다. 고향은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요, 물소리는 한 소절의 아름다운 음악이다. 멀수록 그립고 못갈수록 그리운 고향이다.
최근에 유화를 시작하면서 고향을 그려보기로 했다. 서투른 솜씨라 캔버스에 옮기는 일이 쉽지 않겠지만, 나름대로 뜻있는 일이라 싶었다. 우선 내가 잘 아는 시냇물부터 그려보고자 했다. 그 시내는 그냥 작고 평범한 시내다. 그러나 그것은 어릴 때 함께 소꿉놀이 하고 놀던 여자애 같다. 세월이 갈수록 잊혀지지 않고 , 안개 속의 산처럼 신비로운 존재다. 차라리 그것은 그리운 한 편의 시다.
첫번째 그림 대상은 신안동의 작은 개여울이다. 우리 할아버지 사시던 집은 신안동 언덕 위에 있었다. 큰 정자나무 있던 타작마당 옆에 몇 그루 감나무와 대밭이 집을 감싸고 있었다. 능선은 흔들리는 싱그러운 청보리밭에 덮혀 있었다. 앞은 남강이 보이는 넓은 들판이고, 뒤는 뻐꾸기 소리 나던 보리밭 속으로 꼬불꼬불 내려간 길이 닿는 동네가 있다. 그 동네 앞에 작은 우물과 우리 논이 있었다. 논가에는 어릴 때 내가 입술 까매지도록 오디 따먹던 늙은 뽕나무가 있다. 뽕나무는 코발트빛 하늘과 목화송이 흰구름 몇 점 머리에 이고 있었다. 야산 밑을 요리조리 구부러져 흐르던 시냇물은 빨간 산딸기와 하얀 찔레꽃과 망개나무 빨간 열매를 물에 비치고 있었다. 그냥 마셔도 달콤한 물속에 조약돌과 바람에 씻겨진 부드러운 모래가 있고, 다슬기와 고동이 있었다. 그 개울에서 나는 물속의 조약돌 만지며 놀기도 했고, 어느 황홀한 여름날 피라미가 물 위로 점프하는 것을 보기도 했고, 물가에 찍어놓은 깜찍한 물새 발자국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 작은 개여울이 고향에서 가장 그리운 풍경이다. 나는 내 유년의 추억 가득한 이 시냇물을 아를의 교외 풍광을 그린 고흐처럼 강렬한 텃치로 한번 그려볼 작정이다.
그 다음 대상은 약수암 근처 과수원 밑 시냇물이다. 남강 건너 약수암이란 절이 있었다. 절 아래 복숭아꽃 살구꽃 흐드러지게 핀 골짝이 있었다. 골짝의 시내물에 연분홍 꽃잎이 떠내려오곤 했다. 징검다리는 맨발의 과수원집 어린 소녀가 놀던 곳이다. 소녀가 띄운 고무신 배는 넘실넘실 물결에 흘러갔다. 소녀의 뺨은 꽃보다 부드러웠다. 베잠방이 소년인 나는 종아리 반쯤 물에 담고 소녀 곁에서 놀았다. 복숭아꽃에 묻힌 과수원 한 켠 공터에 낮으막한 원두막이 있다. 하늘엔 빨간 잠자리가 떼지어 날고 있었다. 나는 이 풍경을 한번 르노와르 그림처럼 인상 깊게 그려보고 싶다. 그가 그린 '모자를 쓴 소녀'처럼 부드러운 소녀의 얼굴을 잘 표현해보고 싶다. 복숭아꽃 고운 과수원과 시냇물을 꼭 한번 잘 그려보고 싶다.
세번째 대상은 지리산 풍경이다. 나는 지리산 밑에서 자란 친구들이 많다. 자주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냇물 위에 걸쳐진 섶다리를 그려보고 싶다. 병풍같은 산이 거울같은 맑은 물에 비친 모습과 다리 위로 건너가는 스님을 그려보고 싶다. 단풍 든 산을 배경으로 풍경 달린 절을 그려보고 싶다. 백도라지 핀 밭과 함양 산청 안의 거창, 물방아간 그리고 싶다. 주렁주렁 열리던 늙은 감나무 홍시도 그리고 싶고, 집집마다 처마에 매단 서리맞은 곶감 발도 그리고 싶다.
시냇물은 강이 되기 전의 작은 흐름이다. 그러나 밤하늘 반딧불, 함초롬히 이슬 맞은 박꽃, 별빛 어린 물, 울어대는 개구리 울음소릴 담고있다. 시냇가는 소나기 피하려고 우리가 토란 잎을 우산처럼 받치고 뛰어다닌 곳이고, 덤벙덤벙 옷 적시며 송사리 잡고 물방개 잡던 곳이다. 시냇물은 우리에게 물소리 빗소리 바람소리를 들려준다. 논두렁 밭두렁 종달새 소리를 들려준다. 우리가 불던 풀피리 소리를 들려준다. 시냇물은 강처럼 깊지 않지만, 강의 원천이다. 우리 그리움의 출발점이며 추억의 발원지다. 고향은 하늘빛마저 얼마나 그리운 곳인가. 그 하늘 아래 다정한 시냇물이 흘렀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래도 내가 이번에 시냇물을 그리려고 작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다.
(수필문학 2010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