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1

고향의 꽃

김현거사 2018. 4. 5. 21:47

 

 

  

고향의 꽃

 

 진주시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마당은 꽃동산 이었다. 봉선화는 우물에 물 뜨러 온 동네 아낙 손톱을 모두 빨갛게 물들였고, 달리아는 크기가 달덩이만 했다. 빨강 노랑 채송화는 아침마다 새로웠고, 문 밖에는 하얀 탱자꽃이 피어있었다. 

 서울 올라와서 딴 꽃을 만났다. 첫번째가 라일락이다. 향기 좋은 보라빛 라일락은 서울 여학생들처럼 세련된 꽃이었다. 캠퍼스 라일락 벤치 옆에는 늘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던 허리 구부정한 늙은 사진사가 있었다. 동문인 아내와 결혼한 후 갔더니, 노인은 더 늙고 초라해졌고, 딸은 처녀가 되어있었다. 그때 촬영한 사진이 40년 내내 내 서재에 걸려있다.

 불교신문 시절 또다른 꽃을 만났다. 백운(白雲)스님께 난을 배웠고, 원고청탁차 찾아간 사당동 미당선생 뜰에서 파초와 국화를 배웠고, 동승동 이희승 선생댁에서 오동꽃 향기를 배웠다. 향기 고결한 오동꽃은 그걸 와이샤스 주머니에 넣어가서 선물한 총각을 국학대학 이기영 학장 여비서와 데이트 하게 만들어주었다. 문필가들의 꽃도 배웠다. 도연명은 국화, 주렴계는 연꽃, 소동파는 대나무로 유명하고, 신흠과 퇴계선생은 매화로 유명하다.

 아내 모교 이화여고는 장미가 유명하다. 우리는 서울의 유명한 장미원 안가본데 없다. 종로5가 노점, 상일동, 파주를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다녔다. 백장미, 노랑장미, 피스장미 등 우리집 장미는 모두 명품이었다. 서울 생활 40년 동안 주택 아파트 빌라 할 것 없이 1층에만 살았다. 모네처럼 연못 만들어 수련 키웠고, 미국의 타샤튜더 할머니처럼 차 마시며 디기달리스꽃 감상했다. 베란다에 분재 키우고, 관음죽 천리향 키웠다. 양재동 꽃시장에는 40년간 알고지낸  여인이 있다. 새댁 때 종로 5가 노점에서 매화 분재 산 인연으로 지금도 찾아가면 커피 내놓는다. 

  이렇게 타향의 꽃에 묻혀 살던 어느 날 이다. 문득 비온 뒤 들판에 떠오르던 무지개처럼 고향꽃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건 촌스러워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동안 외면하던 꽃이다. 봉선화 채송화가 그렇게 가슴 저미게 하는 꽃인 줄 예전엔 미쳐 몰랐다. 여시도 죽을 때 고향 하늘 바라보며 운다고 한다. 고향꽃과 그때 사람들이 가슴 저미도록 그립다.  

 망경동엔  넓은 정원이 있었고, 우물이 있었고, 꽃을 키우던 어머님이 계셨다. 봉선화꽃 따가던 동네 아낙이 있었고, '울 밑에선 봉선화야' 쑥국새 울음처럼 슬픈 타계한 여동생 노래가 있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신안동  할아버님 집가엔 소복한 여인같은 찔레꽃이 서럽게 피었다. 거기 노란 저고리 입고 시집 와서 일찍 타계한 사촌형수가 살았고, 손자들 가면 말 없이 수박 참외 담긴 지게 옆에 놓고 가시던 할바시가 살았다. 대밭에 보라빛 칡꽃 피던 배건너에는 한 소녀가 살았다. 나는 아직도 그 집 탱자나무 울타리에 핀 꽃을 별처럼 하얗고 청초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T.S.엘리오트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고 읊었다. 나는 이제 타향의 꽃보다 고향꽃을 더 사랑한다. 그 꽃에서 소년 시절 사랑하던 사람을 본다. 4월은 잔인한 달이다. 봄마다 시나브로 꽃은 지고, 그리운 사람들도 진다. 그들은 달빛 속 실루엩,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음악처럼 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슬프고도 감사한 일인가. 해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그 사람이 다시 눈 앞에 보인다는 사실이. (문학시대 2010년 여름호)

 

 

고향의 꽃 

  

 타향살이 50년에 이젠 꽃도 고향꽃이 그립다.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봉선화는 우물에 물 뜨러 온 동네 아낙 손톱을 모두 물들이고도 남아 세들어 살던 서울서 내려온 진주 농대 교수 부인 은경이엄마 손톱도 빨갛게 물들이곤 했다. 봉선화는 사람 키만했고, 닭똥으로 키운 달리아는 사람 머리통만 했다. 채송화 백일홍 결명자꽃이 빨강 주황 노랑으로 도배를 하고, 내가 만든 연못엔 습천못에서 잡아온 붕어하고 메기가 살았다. 대문 밖 나가면 집들이 탱자나무 울타리라 봄철이면 향기로운 하얀 탱자꽃이 피곤했다.

 그러다가 63년에 서울 올라와서 딴 꽃에 눈이 팔렸다. 우선 대학 캠퍼스 캠버스에 핀 라일락꽃을 만났다. 그 보라빛 라일락은 서울 여학생들처럼 세련되고 깔끔했다. 그에 비하면 그동안 정들었던 고향 봉선화나 탱자꽃은 촌스러웠다. 짙은 라이락 향기 퍼지던 벤치에 앉아있던 여학생 이미지에 울타리에 탱자꽃 하얗게 피던 소녀 이미지는 가려졌다. 그후 나는 철학과 동문인 아내와 결혼했다. 모교에 갔다가 옛날 캠퍼스에서 낡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던 허리 구부정하던 늙수구레 사진사를 만났다. 그는 늙고 형색이 더 초라해졌고, 당시 데리고 다니던 어린 딸은 이젠 처녀티가 박혀있었다. 마침 라일락 꽃도 피었겠다 그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내 서재에 걸려있다. 40년 전이지만 거기선 지금도 아내와 나는 청춘이다. 

 

 

 타향서 본 두번째 인상적인 꽃은 칸나다. 그 꽃이 부산 유엔묘지 옆에 있던 우리 부대 철조망 옆에 피곤 했다. 나는 대학 1학년 때 자원입대하여 항만사 소속 229 자동차 대대 운전병 되어 일찌감치 기압이란 기압은 모두 받았다. 물 적신 고무호스에 초죽음 되어 차량보초 나가서 초겨울 차그운 날씨에 철조망 밑에 피어있던 이슬 젖은 칸나 보면 고향 생각 간절했다. 그 요염하던 붉은 빛 주홍빛 노란 빛 지금도 생각난다.

그 초겨울 차그운 날씨에 철조망 가에 피던 이슬 젖은 칸나가 그렇게 요염했다.   

 세번째 타향에서 본 꽃은 제비꽃이다. 나는 제대 후 글 쓴다고 섬으로 돌아다녔다. 남해 미조리 낮으막한 돌담에 작은 보라빛 제비꽃이 피어있었다. 민박집엔 새댁과 금순이가 살고 있었다. 제비꽃처럼 앙징맞은 금순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다. 원양어선 선원인 아빠가 집에 없어선지 학교 다녀오면 늘 내 곁에 붙어다녔다. 금순이가 등대 넘어 파도 잔잔한 바다로 나를 안내했다. 둘은 거기서 조개도 잡고 헤엄도 쳤다. 내외한다고 얼굴 보이지 않는 새댁 대신 금순이가 밥상도 들고왔다. 세월이 지난 후 찾아가 수소문 해보니, 책갈피에 끼운 작은 제비꽃같은 금순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불교신문 다닐 때 원고 수주하면서 문인들 만났다. 쌍계사 백운(白雲)스님은 내게 지리산 춘난 갖다주었고, 중앙포교사 김어수(金魚水) 시인은 향기 풍기던 풍난 석부작을 책상 위에 길렀다. 사당동 미당(未堂) 선생은 뜰에 파초를 키웠고, 동승동 이희승 선생 댁 골목엔 오동나무가 있었다. 오동꽃은 보라빛 꽃빛도 곱지만 향기도 신비롭다. 그 꽃을 불교학자 이기영 교수 여비서에게 바치고 데이트 한 적 있다.

 결혼한 후는 장미를 키웠다. 아내가 다니던 이화 교정에 장미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는 종로5가, 상일동, 파주 등 서울 이름난 장미원 안가본데 없다. 불원천리(不遠千里) 꽃을 골라왔기에 우리 백장미, 노랑장미, 피스장미는 모두 명품이다. 그 재미에 서울 생활 내내 아파트 빌라 막론하고 1층에 살았고, 미국의 타샤튜더 할머니 책을 애독했다. 양재동에는 40년 내 단골 분재집 있고, 해외여행은 캬툴레아 심비디움 앞에서 많은 시간 보냈다.

 

 

 이렇게 내가 평생 꽃을 좋아한 발단은 어머님 때문이다. 우리 집은 마당이 넓어 닭을 키웠다. 닭똥 거름먹은 봉선화는 싱싱해서 키가 어린애 가슴팍에 닿았다. 모광화(母光華)란  불명(佛名)을 가지셨던 어머님은 인심이 좋았다. 물 뜨러 온 동네 아낙들은 봉선화로 손톱에 꽃물 들이고 우리 꽃을 칭찬했다. 나는 화단에 돌로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보라빛 꽃 피는 싸리나무 심어놓고 붕어를 키웠다. 채송화 달리아 맨드라미 모두 싱싱했고 달리아는 꽃 하나가 달덩이만 했다.꽃들이 서울와서 50년 살면서 그동안 정붙인 서울 꽃 제치고 이젠 더 보고싶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신안동에는 찔레꽃 곱게 피었다. 찔레꽃은 소복한 여인처럼 서럽다. 작은 하얀 꽃과  노란 꽃술 향기롭다. 뻐꾹새 울 때 허기진 우리는 찔레순을 꺽어먹곤 했다. 그때  삶은 감자 소쿠리에 담아오던 사촌 여동생 지금 진주의 병원장 부인이 되어있다.

  나는 하얀 탱자꽃을 별처럼 청초한 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좋아한 소녀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쌓인 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비온 뒤 잠시 떴다 사라지는 무지개 같지만, 그 바람에 나는 탱자꽃을 세상 가장 순결한 꽃으로 생각한다.

고향에는 이밖에도 보라빛 칡꽃, 분홍빛 복숭아꽃 살구꽃, 노란 원추리꽃이 피는데, 청춘에 고향을 떠나서 그런지 낙화유수 이제 나는 타향살이 50년에 이젠 꽃도 고향꽃이 그립다. 시도 죽을 때 되면 고향하늘 쪽 보고 운다고 한다. 타향살이 할만큼 해서 그럴 것이다.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봉선화는 우물에 물 뜨러 온 동네 아낙 손톱을 모두 물들이고도 남았다. 봉선화 하나가 사람 키만했다. 그 봉선화 몇그루가 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서울서 내려온 진주 농대 교수 부인 은경이네 손톱도 빨갛게 물들이곤 했다. 드리와 삵바느질로 생계 은필년이네 은경이네 와 그 그 다음 그리운 꽃은 우리 할아버지 사시던 신안동 야산 찔레꽃이다. 하얀 꽃잎  노란 꽃술 찔레꽃은 소복의 여인 같았다. 어딘가 슬펐다. 그 다음 고향꽃은 소녀네 울타리에 피던 하얀 탱자꽃이다. 그 소녀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탱자꽃을 별처럼 청초한 꽃으로 생각하고 있다. 

  

 4월은 잔인한 달인지 모른다. T.S. 엘리오트의 '황무지'란 시를 보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로 시작된다. 낙화로 분분히 떨어지는 꽃잎 보면 나 역시 추억과 욕망이 사정없이 뒤섞인다. 그때 나는 유년 시절 봉숭아꽃 찔레꽃 탱자꽃이 핀 추억의 꽃길로 들어선다. 그 오솔길에는 세월 속에 흘러간 사람, 그리운 사람이 꽃이 되어 나타난다. 꽃은 말이 없지만, 멀리서 들리는 음악처럼 어머님의 목소리 희미하게 들린다. 달빛 속 실루엩처럼 소녀의 모습 희미하게 보인다. 이 얼마나 슬프고 감사한 일인가. 사람은 만날 수 없지만, 해마다 마음 속에 비단처럼 고운 꽃길은 다시 열린다는 사실이. 

                                                                                           (문학시대 2010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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