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1

고향의 달

김현거사 2018. 4. 5. 21:31

 고향의 달 
                
 언제부턴가 타관의 달은 고향의 달과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밤에 아파트 정원의 달을 보면서 왠지 그런 생각을 한다. 도시에도 소나무 매화나무 있고, 은행나무 단풍나무도 있고 그 위를 지나가는 달이 있다. 그러나 살풍경한  건너편 아파트 때문에 그런가. 젊은 시절 뼈 아픈 고독을 느끼게 한 서울의 달이 생각나서 그런가. 고향의 달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신문기자 시절 버스에 흔들리며 명동에서 창동까지 두시간 가서, 지하 전세방이 있던 창동 버스 종점에 내리면 칼바람은 윙윙 귓전을 때리는데, 그 겨울 얼어붙은 땅에 떨어진 달빛 아래 시커먼 전붓대 그림자는 꼭 내모습 같았다. 나는 왜 이런가. 울고싶은 심정으로 포장마차에 들어가 뜨껀한 오뎅국물을 안주로 혼자 소주 마시던 그 차가운 달빛 생각나서 그런가.  
 오십년 전에 풋청년으로 떠난 진주 배건너 육거리 우리집 앞의 달은 밝고 따뜻했다. 길 건너 편 염소처럼 꼬장꼬장하던 한약방 영감님 집 양철지붕 위로 달이 떴고, 우리집 평상에서 빤히 보이던 그 창문 커텐 뒤에는  나보다 아래던 얌전한 두 딸이 밖을 내다보곤 했다. 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농대 전임강사 부인 은경이 엄마가 이쁜 딸을 안고 나와 수박과 참외를 깍으며 그 듣기좋은 표준어로 나에게 밤늦도록 문학 강론 펴던 그때 달빛도 그리 밝고 고왔었다. 바다 건너 영국을 습격한 바이킹처럼 남강을 건너가 도동 백사장 수박 서리 하고 헤엄쳐 강을 건너오던 그때 달빛도 그리 밝았었다. 달빛은 산을 고고히 비쳤고, 넓은 들을 혼건히 적셨고, 강물 위에 영롱했다. 수박 서리하던 그 와중에도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이호우의 '달밤'이란 시를 외기도 했다. 말띠고개 넘어 상평서동 자두밭 습격하여 자두를 런닝에 가득 따오다가 동네 청년들에게 잡혀서 혼나던 그 날 밤 달빛도 거울처럼 환히 밝았었다. 보름달은 밝아서 좋았고, 초생달은 어두워서 좋았다. 초생달 뜬 밤은 어두워서 뒷집 감나무에 올라가 무성한 잎새에 몸을 숨기고 단감을 따먹기 그리 좋았다.

 모깃불 피워놓고 부채 흔들다 평상에서 잠들던 우리 할아버지 댁 대밭 달빛도 그리 밝았었다. 그런 달빛을 보았기에 후에 나는 왕유(王維)의 죽리관(竹里館)이란 시를 읽자말자 크게 공감 할 수 있었다. 그윽한 대숲 속에 홀로 앉아 거문고 타다 길게 휘파람을 부는 경지. 깊은 숲 속이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밝은 달빛만 살며시 닥아와 비추어준다는 그런 경지는 그런 달빛을 어릴 때 체험을 해본 성인이라야  가장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진주는 겨울철 달도 얼마나 좋았던가. 학교 선생님 눈 피하려고 어른들 옷을 줏어입고 진주극장에서 외국 여배우가 출연한 도둑 영화 보고 돌아오던 스릴있던 그 밤 진주교 다리 위를 서성이던 달빛은 얼마나 밝던가. 아무도 다니지 않는 차그운 겨울 밤 홀로 칠암동 그 소녀네 집 담장 밖에서 '다시 한번 그 얼굴을 보고싶어라' 추워서 외투 깃 세우며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떨면서 부르던 그때 길바닥 자갈까지 환히 비추던 달빛도 그런 달빛이었다. 그때 나는 세레나데 부르는 이태리 청년이었다. 그 시절 달빛은 그리 낭만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서울의 달은 뭔가 허전하다. 희뿌연 달은 매일 스모그 속을 헤매다가 보는 사람 없이 서해로 실종되곤 한다. 서울의 달 역시 만월도 초생달도 되건만 사람들은 달을 쳐다보지도 찾지도 않는다. 달은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건만, 이제 더 이상 다정한 친구가 아니다. 생과 사로 이별한 것도 아닌 잊혀진 여인이다. 사람들은 고향의 옛 친구를 잊어버린 것처럼 고향 달도 잊어버렸다. 달은  매일 밤 뜨지만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나혼자 그 달을 찾아보며 허전해 한다.

(문학저널 2009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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