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주신 경남진주신문 감사합니다. 신문 발행처가 망경동 이군요. 제가 살던 곳입니다.
남강문학회 부회장 수필가 김창현 입니다. 문학회 회원 수는 3백 여명이고, 매년 <남강문학>을 내고,
진주서 출판기념회를 가져왔습니다. 뭔가 보답하는 차원에서 건의 하나 드립니다.
1)만약 귀지에 지면을 주실 수 있다면, 격주로 진주 출향 문인들의 시 소설 수필을
연재가 가능하도록 연결해드릴수 있을 것 같습니다.
2)현 촉석공원 앞 새 공원 시비 건립 건
3) 촉석공원 꼬마열차 시설 건
4) 스페인 소와 진주 소 소싸움
참고로 수필 한 편 보냅니다.
배건너의 추억
사람들은 거길 배건너라 불렀다. 나룻배가 다녔던 모양이다. 강 건너 바위가 층을 이룬 절벽에 촉석루가 있었다. 이쪽엔 대숲과 백사장이 있었다. 동네는 비단띠처럼 구부러지며 흘러가는 아름다운 강을 끼고 있었다. 그 위로 백로가 날라다녔다. 물결 따라 흘러온 흙이 쌓인 과수원에 복숭아꽃 살구꽃 만발하였다. 나는 그곳으로 문산중고 교장에서 진양군 교육감 당선되신 아버님 따라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를 갔다. 집집마다 다투듯 빨갛게 감이 익어가던 모습 기억난다. 우리 집도 뒷집도 감나무가 서너 그루씩 있었다. 과수원이던 학교 운동장에도 수십그루 감나무가 있었다. 태풍 지나가면 교정에 홍시가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걸 줏으러 새벽 일찍 학교 가던 기억난다. 길과 운동장 하늘에 떠다니던 빨간 꼬추잠자리 떼 생각난다. 학교 가던 길 탱자 울타리에 피던 하얀 탱자꽃, 가을의 노란 탱자 볼만했다. 부산서 목포가는 경전남부선이 진주를 통과했다. 기차는 주약동 턴넬에서부터 칙칙폭폭 까만 석탁연기 품으며 배건너를 통과하여 망진산 밑을 지나 하동으로 갔다. 배건너는 초등학교 하나, 역전파출소 하나가 전부인 작은 동네였다. 대충 15분 돌아다니면 동네를 다 볼 수 있었다. 시내로 나가려면 통나무를 뗏목처럼 엮어 만든 배다리로 건너갔다. 누군가 가설다리를 만들어 놓고 통과할 때 마다 얼마씩 돈을 받았다.
6.25전쟁 끝난지 얼마 않되던 때다. 우리는 임시 천막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지금 스리랑카나 아프리카 난민촌 아이들 같았다. 머리에는 쇠똥 가득했고, 팔다리는 여위었다. 항시 배가 고팠다. 당시는 배 나오고 기름 번들번들한 사람을 사장티 난다고 했다. 학교 이름은 천전(川前)학교 였다. 이름 그대로 강 앞에 있는 학교였다. 학교 운동장은 전에 과수원 하던 자리다. 우리는 교정 안 감나무에 올라가 익지 않은 풋감을 따먹었다. 탱자나무 울타리 밑을 기어서 교정 옆 뽕밭에 들어가 입술 까매지도록 오돌개 따먹었다. 탱자는 밀감이나 유자와 비교가 안될만치 시고 쓰다. 하교길에 노란 탱자를 혹시나싶어 따먹다가 얼굴 찡그리기도 하였다. 근처 방직공장에 가면 금방 삶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번데기가 있다. 그걸 얻어먹었다. 산에 가서 칡 캐고, 송쿠 꺽고, 삐삐 뽑고, 찔레 새순 따먹었다. 우리는 집 밖에서 자력갱생 하였다. 집안은 아무리 뒤져봐야 먹을 것 없을 게 뻔한 터였다. 들판에서 고구마 감자 캐먹었다. 논에서 메뚜기 잡고, 고동 잡고, 미꾸라지 잡았다. 고무신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이 모두를 요즘은 웰빙식품이라니 다행이다. 고등학생이 되자, 우리는 카리비안의 해적이 되었다. 밤에 남강을 헤엄쳐 건너가, 도동의 수박과 참외를 서리해 왔다.
당시 우리는 미국을 천국보다 잘 사는 나라로 알았다. 그들이 보내준 연필과 연필깍기는 천국발 선물이었다. 조잡한 국산하고 비교가 않되었다. 원조물자 중에 우유와 쬬크렛이 있었다. 가루우유는 집에 가져와서 밥에 쪄서 먹었다. 찌면 과자처럼 딱딱해져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쬬크렛을 처음 먹어본 그 황홀하던 촉감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미제껌도 그렇다. 너무나 달콤하고 쬰득쬰득하고 탄력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밭에서 꺽은 풋밀 씹어 만든 껌과 비교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미제 껌 책상 밑에 붙혀놓고 며칠씩 씹고 또씹었다. 어른들은 그때 처음 맥주와 C레이션과 캔커피 맛보았다.
그 당시 미국공보원에서 제공하던 활동영화 기억 못하면 말이 않된다. 별빛 아래 운동장에서 영사기가 돌아갔다. 이때 운동장에 모여든 인파는 인산인해였다. 아이들, 청년과 처녀, 부인들과 노인네들 모두 집을 비워놓고 나왔다. 어른은 아이를 찾고 아이는 어른을 찾고, 울고불고 난리 피웠다. 영화 상영 중 간혹 필림이 끊기곤 하였다. 그럼 깜깜한 어둠 속은 난장판이 된다. 휙휙 다들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 불었다. 누가 큰소리로 맹랑한 무슨 야유 한방 터트리면 장내가 웃음바다 되기도 했다. 끊긴 영화 다시 시작할 때도 거치는 과정이 있다. 화면에 1234 숫자가 하나씩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한목소리로 일제히 그걸 읽었다. 영화는 무성영화였다. 그땐 변사가 있었다. 사람들은 변사를 좋아했다. 변사 흉내를 내곤 하였다. 대동강 부벽루와 이수일과 심순애를 기억할 것이다. 다분히 신파쪼였다.'김중배의 다이어몬드가 그렇게 탐나더냐' '순애야! 이 손을 놓아라. 놓지않으면 발길로 차 버릴 것이다.' 그 당시 배건너 총각들은 다 신파 배우였다. 집에 돌아가며 <장한몽>의 대사를 외곤했다. 이태리 쏘렌토 총각 비슷하기도 했다. 맘에 드는 처녀집 근처에 가서 세레나데 불렀다. 곡목은 대개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이었다. 일이 성사되어 어느날 둘이 가만히 가만히 버드나무 아래서 만나기도 하였다. 나는 아직도 배건너 밤거리에서 들리던 총각들의 유행가 가락을 기억한다. 밤에 진주극장에서 영화 관람하고, 혹은 유랑극단 천막 악극단 구경하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던 총각들 발자국 소리 기억한다. 만약 베니스에 곤돌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낭만도 멋도 없는 도시일 것이다. 진주 배건너 총각들 유행가 소리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진주 역시 낭만도 멋도 없는 도시였을 것이다.
진주는 옛날부터 평양과 쌍벽을 이룰만치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 중 백미가 촉석루와 서장대다. 그걸 사시사철 구경한 사람이 누구인가. 항상 다리를 건너 시내로 가던 배건너 사람이다. 남강의 절경 뒤벼리 절벽도 마찬가지다. 배건너에서 건너다 보아야 가장 아름답다. 평거들판도 마찬가지다. 배건너 망경산에 올라가서 보아야 부벽루에서 능라도 보는 풍경이 나온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배건너 소년들은 강변에 움 트는 버들처럼 싱싱했다. 대밭 속 죽순처럼 부드럽고 거침없이 자랐다. 소년들은 배건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바람을 사랑하고, 비를 사랑하고, 강을 사랑하고, 구름을 사랑하였다. 매미를 사랑하고, 남강의 버들피리를 사랑하고, 하늘의 종달새를 사랑하였다. 몸놀림은 남강의 은어처럼 민첩했다. 소녀에게 바치려고 봄에 망진산 절벽의 꽃을 꺽어왔고, 가을밤 밤늦도록 편지를 쓴 것이 그들이다. 배건너 총각의 감성 점수를 후하게 매기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남강에 흔하던 갈가마귀떼처럼 사라졌다. 둑에서 남인수 노래 부르던 총각들 떠났고, 맘보바지 나팔바지 입고 멋부리던 사람들 떠났다. 앵도나무 우물가에 빨래하던 동네 처녀 없다. 모든 것은 한여름밤의 꿈이었던가. 지금 배건너에 가면, 꽃 피면 꽃 핀다고, 달 뜨면 달 뜬다고, 밤거리를 노래하고 다니던 낭만 가득하던 사람은 뵈질 않는다. 그 흔하디 흔하던 탱자나무 울타리도 없다. 이제 배건너에 가면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다리 위에 무심한 구름만 흘러간다.
약력
진주고. 고려대 졸업. 불교신문 내외경제 신문 기자. 아남그룹 회장 비서실장.
<문학시대> 수필로 등단. 청다문학회 회장. 남강문학회 부회장
저서 <재미있는 고전여행(김영사)> <한잎 조각배에 실은 것은(소소리)>
<작은 열쇄가 큰 문을 연다(아남그룹 창업주 자서전)>
<내가 만난 대통령(전자책)>
e-mail 12kim28@hanmail.net
전화 010-2323-3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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