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2

옌따이(煙臺)를 다녀와서(2)

김현거사 2017. 11. 20. 06:24

  옌따이(煙臺)를 다녀와서(2)

 

  첫 밤은 향기로운 술에 취하고, 다음 날은 신선이 살던 곳을 찾아갔다. 봉래산(萊山)이다. 봉래산은 영주산(), 방장산() 더불어 전설의 삼신산() 중 하나다. 그 산엔 신선 살고, 불사 영약 있고, 이곳 사는 짐승 모두 빛깔 희며, 금과 은으로 지은 궁전 있다고 전해진다.

 중국에서 신선이 언급된 첫 고서는 산해경(山海經) 이다. 시황제 이전에 출현한 이 책은, 신선, 산과 바다, 약초와 특산물, 머리는 동물이고 몸통은 사람인 괴수들을 소개한 일종의 백과전서이다. 나중에 이 책을 재편집한 사람은 유흠(劉歆)이고, 최초로 주석을 단 사람은 곽박(郭璞)이니, 두 사람 다 신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신선방약(神仙方藥)과 불로장수를 논한 또하나 책은, 동진(東晉) 때 갈홍(葛洪)이 저술한 <포박자>란 책이다. 여기에는 하늘에 사는 천선(天仙)과 땅에 사는 지선(地仙) 이야기, 선인의 호홉법, 단식법, 방중술, 불로장생의 금단(金丹) 만드는 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이 신선사상의 원류가 고조선이라는 설도 있다. 고조선 때는 하늘에 의식을 행하고 신단(神壇)을 주관하는 제사장을 선인(仙人)이나 신선(神仙)이라고 불렀다. 현존하는 기서(奇書)도 있다. 화훤파수록(華軒罷睡錄)과 청학집(靑鶴集)이란 책이다. 그 책엔 금선자(金蟬子) 채하자(彩霞子) 계엽자(桂葉子) 등 신선 이름이 보인다.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은 각각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으로 불린다. 봉래() 양사언은 금강산 만폭동()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이란 8자를 새겨놓았다. 부산에 영주동 있고, 우리나라 곳곳에 봉래동이라 불리는 곳 많다.

 

 그 봉래산을 찾아간 것이다. 안내는 하회장 여비서가 맡았는데, 그는 한국에 유학할 때 한국어를 배워 우리와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었다. 갈홍(葛洪)의 신선전(神仙傳)에는 마고(麻姑)선녀 기록이 있다. 동한(東漢)의 선인(仙人) 왕방평(王方平)이 채경(蔡經)의 집에서 마고선녀를 만났는데, 마고는 일찍이 고여산(姑余山)에서 수행하여 득도(得道)했고, 천년이 지났으나 모습은 여전히 열아홉 살의 처녀 같았다고 한다. 간밤엔 두강주에 취하고, 이튿날은 마고선녀 같은 처자와 논 것이다.

 

 우측은 일공(一空)

 

 봉래산은 산동반도 끝이고, '위해'에서 승용차로 1시간 반 거리다. 노변에 무궁화 심어놓은 곳 많고, 넓은 평야에 사과 과수원 끝없이 펼쳐져 있다. 봉래산 높이는 동대문의 낙산 정도 높이다. 정상까지 30분만에 올라갈 수 있다. 바다를 향한 가파른 절벽엔 보라빛 해국이 향기로웠다. 절벽 길에 잔도(栈道) 매달아놓은 솜씨 중국인 답다. 유방이 항우에게 쫒겨서 촉나라 들어갈 때 길도 이랬을 것이다.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합해정(合海亭)이란 정자가 있다. 북쪽은 발해요 동쪽은 황해다. 바다에 잠든 신선 깨우려는지, 어디서 은은한 종소리 들려온다. 동행 정사장이 발동이 걸려서 종각에 올라가 10위옌 내고 종을 열번 치고 내려왔다. 한번 타종에 1위안씩 낸 셈이다.

 저멀리 산 중턱에 멀리 보이는 동네는, 높은 누각과 회랑 모습이 그대로 신선도 그림이다. 케이불카 타고 그곳으로 가니, 양쪽 겨드랑이 밑에 시원하게 바람이 닿는 감촉이, 영판 봉래산 선인이 학을 타고 날라가는 기분이다.

 

 

 거기서 일공(一空)이 산 부채에는 팔선과해(八仙過海)란 글씨가 쓰여있다. 여덟 신선이 바다를 건너간 그림이다. 옥피리 부는 여인, 파초선 든 선인, 거문고 타는 선인. 학을 탄 선인 모습이 신비롭게 그려져 있다. 그들은 바다 건너 해 뜨는 동쪽으로 갔다. 산해경에는 바다 속에 부상(扶桑)이라는 신목(神木)이 있어, 그 가지에 열 개 태양이 달려있고, 태양은 함지(咸池)에서 목욕하고 탕곡(暘谷)에서 돋아 부상(扶桑)의 꼭대기 위로 솟아오른다고 한다. 부상(扶桑)의 한자(漢字) 중 뽕나무 상(桑)자가 의미있다. 뽕나무 원산지는 중국 북부와 한반도 일대다. 동이(東夷)의 강역이니, 결국 중국 신선은 집단으로 우리나라에 온 것이다.

 나는 방장산으로 불리는 지리산 아래서 자란 사람이다. 팔선을 생각하며 소라로 만든 뿔피리 하나 샀다. 가만히  불어보니, 부드럽고 은은한 소리가 난다. 두 사람은 또 100위안 주고 옥돌에다 낙관도 하나씩 새겼다. 낙관 새기는 김에 중국 초청한 친구 것도 새겨, 이름 앞에 봉래선인(仙人)이란 작호 붙혀주었으니, 고마움 표시다. 

 

 봉래산 전체가 신선이 놀던 터다. 불로문(不老門)과 전각은 정교한 석주와 무지개 다리와 돌난간과 돌계단으로 연결되었고, 연꽃 심었던 연지 괴석 암반과 조산(造山)이 운치있다. 수백년 된 소나무 원림(園林)은 세월이 묻어있고, 곳곳 돌과 현판에 새겨진 글씨는 고풍스럽다. 

 꽃담에 해와 산, 구름, 바위, 소나무, 거북, 사슴, 학, 불로초가 그려져 있다. 희미하게 수(壽), 복(福) 글자도 보인다. 여기 홍교(虹橋) 위에서 달밤에 머리에 옥비녀 꽂은 선녀가 옷자락 바람에 날리면서 옥피리 불지 않았을까. 기화요초 가득한 봄에 신선이 정자 난간에 기대어 거문고 타고, 현학이 날라와 춤추지 않았을까. 누대와 오솔길 구경하며 그런 생각 해보기도 했다.

 모처럼 정자, 원림, 지당(池塘), 괴석, 담장, 돌다리 싫컿 구경하며 눈을 호강시키고, 오후에는 발맛사지 하는 곳에서 발을 싫컿 호강시켰다. 둘은 중국담배를 삐딱하게 입에 물고, 침대에 나란히 앉아서, 약초를 다린 따끈한 물에 발 씻고, 발바닥 경락 하나하나까지 미인의 부드러운 손으로 안마 받으며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풀었다. 

 

 이번 여행은 쌍으로 즐거웠으니, 하나는 이태백과 두보가 즐기던 두강주 맛본 것이요, 하나는 신선이 놀던 봉래산 답사한 것이다. 그런데 원래 좋은 일은 항상 떼지어 온다. 마지막 날 골동품 시장에 찾아가 옥팔찌, 마노 목걸이, 연꽃 새겨진 벼루, 고서화, 티이크로 만든 의자 등을 싫컷 보았다. 하나 애석했던 점은 나에게 그런 복은 없었던지, 거기에 영국 여류작가 에밀리부론테 자매가 수집했던 청화백자나 옥 중 최고라 일컳는 비취가 없던 점이다. 

 

 

 그런데 서울 가는 비행기 타러 공항 가기 직전, 도자기 전시관에서 또다른 행운을 만났다. 그 청화백자 화병은 키가 나보다 고개 하나는 더 높다. 에밀리부론테는 그런 초대형 청화백자는 상상도 못해봤을  것이다. 이런 걸 청복(淸福)이라 한다. 마침 그림도 속되지 않아서, 나는 대형 화병의 산수화 속으로 슬며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흰구름 덮힌 절벽 폭포 밑을 한참 천천히 거닐다 나왔다. 더이상 무슨 욕심을 더 부릴 수 있겠는가.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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