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심매도

바다와 노인

김현거사 2017. 10. 13. 20:38

바다와 노인


미조에서 한 노인과 친했다.

노인의 얼굴과 손마디는 볕에 그을고 가뭄의 논바닥처럼 갈라졌고,반백 머리 아래 목덜미에 깊게 패인 주름이 보였다.가족 없이 혼자 살아,내고향이 진주인걸 알자,자기 고향이 문산이라며,

'진주와 문산은 넘어지면 코 닿을 데지.'

진주 문산 삼십리 길을 이리 말하는 속에 타관살이 외로움이 배여있었다.


노인은 뗀마를 가지고있어 저인망식 그물로 바다 밑을 흩었는데,배를  대고 끝에 납뭉치 달린 그물코를 하나씩 옆으로 제치면,펄떡이는 전어나 숭어가 튀고,집게발 벌려 사람을 물려는 게가 나오고,성게나 소라 해삼이 나온다.

부럽기도 하고 보는 재미도 쏠쏠하여 노인 뗀마만 나타나면 가서 구경했는데,내가 노인에게 '파고다' 담배를 권하면,노인은 필터 달린 고급담배는 아까워 윗포켇에 넣고,대신 풍년초 잎담배를 신문지에 말아서 입에 문다.


노인은 바다에 관한한 도사였다.

장어나 게나 문어는 어떻게 잡는지,조개와 고동이 어디 많은지,포인트와 물 때를 자기 손바닥 내려보듯 훤히 알고있었다.


해그름에 등대 밑 석축에 나가서 돌에 덕지덕지 붙은 석화를 바늘에 끼어 몽당 낚싯대로 봉돌 무게를 감지하며 바다밑 진흙 바닥에 놓았다 당겼다 할 때,툭하고 손에 어신을 주는 것은 장어다.

크기 삼십센티 짜리 장어는 당기면 몸통으로 물 속을 휘젓고 버티는 힘이 강해서 손맛 여간 짜릿한게 아니다.간혹 장어가 바위 틈에 들어가 버티면 낚시줄이 툭!하고 터져서 빈 낚싯대만 휘청 허공을 때린다.올린 장어의 바늘을 뺄 때는 미끌미끌한 장어 몸체의 점액질 때문에 호박잎 서너장을 손바닥에 깔고 빼내야한다.


썰물 때 망태 등에 지고 낫 들고 갯벌에서 잡는 것은  문어와 게다.


문어는 사람 머리통같은 대가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조개 잡아먹으려고 뻘밭을 돌아다니다가,인기척만 나면 재빨리 굴로 숨는다.굴에 들어간 놈은 흡판 때문에 손으로 꺼내기란 쉽지 않다.

곁에 가 조용히 기다리면 문어란 놈이 아이큐가 높아 먼저 머리를 내밀고 꼭 사람처럼 두리번두리번 사주경계 하는데.이때 낫으로 획 머리를 낚아채는 것이다.


게도 마찬가지다.가만히 닥아가 불시에 낫으로 등짝을 찍어서 잡는다.게걸음이란 말이 있지만,게가 느릴 것 같아도 천만의 말씀.좌우 옆으로만 내뺄 때는 번개처럼 빠르고,손으로 잡으면 집게에 물리기 때문이다.


노인은 소라 전복이 어디 많은지 안다.

고동이나 소라 전복은 미역같은 해초를 뜯어먹고 살므로,해초가 뿌리 내리는 바위 근처에 많다.반면 조개나 고동은 질퍽한 백사장에 살고,가리비고동은 깊은 물 속에 산다.

가리비고동은 차오르는 파도 속에 들어가 발로 모래밭을 더듬어 찾는데,한번 찾았다하면 몇가마가 나와 입 딱 벌어지게한다.

노인은 이런 것들이 어디 얼마큼 있는지 알지만,한번에 다 잡는 법이 없다.필요한 양만 건져낸다.


해변 파티


노인과 간혹 두사람만의 해변의 파티를 열었다.


내가 막걸리를 사오면,노인은 신나서 요리한다.

장어를 예리한 칼로 가죽과 등뼈만 남기고 능숙하게 살을 뜨고,물엿과 생강 넣어 만든 자신만의 독특한 비법 양념장을 내와서 숯불에 굽는다.이렇게 구운 노인의 장어는 기름지면서도 느끼하지않아 얼마던지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문어요리는 문어를 단번에 펄펄 끓는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야하고,푹 삶으면 반드시 맛이 없다.뜨거운 김이 오르는 뜸성듬성 썬 문어를 노인이 도마 위에 올리며 달콤한 초간장도 내놓는다.이때 먹는 문어맛을 어디와 비교할까?노인이 몸에 좋다고 권하던 문어국물은 당뇨와 고혈압에 좋은 바다의 보약이었다.


임어당은 '게는 원래 육지와 바다를 오가는 수서생물로 게살이 수륙(水陸)의 진미(珍味)를 한몸에 지녔다'고 말했다.그런데 노인은 임어당보다 한발 더 나갔다.노인이 게 중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안에 붙은 누렇고 흰 장이라면서 내 먹으라고 준 것은,알고보니 게에서 가장 맛있는 부분으로 황고백방(黃膏白肪)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노인이 고동을 구울 때 껍질 속에 고이는 파란 국물을 먹으면 아무리 술을 먹어도 숙취(宿醉)가 없는 좋은 것이라고 준 것은,알고보니 강에서 잡히는 다슬기와 함께 간에 좋은 보약이었다.


도시의 으리으리한 일식집 하얀 모자 쓴 주방장에 비교하랴!

노인은 장어 문어 게 소라 미역 톳나물 등 무엇이던 바다에서 나는 것이라면 무엇이던 천연의 미각을 살려서 완벽한 맛을 낼 줄 알았다.그가 만든 음식에서는 해풍냄새와 감칠맛 짙은 뻘맛이 남아있다.몇월 무슨 고기가 알배기고 기름지고 맛이 있는지 노인은 다 알고 잡았다.


시커멓고 쭈국쭈굴한 노인의 손은 바닷가에 수십년 서있던 고목의 낡은 가지 같았다.바닷가 나무가 그런 것처럼 노인의 손도 바다의 일부였다.그의 손맛은 배워서 내는 것이 아니라 신비롭게 숨겨진 자연의 오묘한 맛을 스스로 간직하고 있었다.


해변 파티에 초청된 유일한 손님이던 나는 아!그 시절 노인이 만든 바다의 진미를 혼자 다 먹었으니,이 세상 어느 재벌이 나같은 호사를 했겠는가?


'일용할 양식'


노인을 만나 나는 비로서 성경의 한구절을 완벽히 체득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는 주님!'이란 구절을.


보통 식탁에 앉는 사람들은 우리 앞에 놓인 그 음식이 누군가가 우리에게 준 은총임을 모른다.형식적인 기도만 한다.일용할 양식을 바다에서 건지는 노인은 그러나 고마움을 안다.바다야말로 노인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는 신성한 존재였다.


바다는 커다란 창고였다.냉장고였다.

바다는 싱싱한 물고기와 조개와 해초를 키워서 노인에게 주었다.


일용할 양식을 얻는 방법을 생각해보자.

권력을 통해서,지식이나 종교를 팔아서,술을 팔아서,공갈과 폭력으로,간혹은 매춘과 마약을 팔아서 얻는다.


그 중에서 일용 양식을 얻는 가장 신성한 방식은 농부나 어부의 것이다.그들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얻는다.그래서 신(神)과 자연에 가장 근접된 성스러운 직업은 어부나 초부다.


헤밍웨이는 '바다와 노인'에서 죽을 고비 넘기면서 잡은 청새치를 상어에게 다 떧기고도 좌절치 않는 불굴의 노인을 그렸다.그는 2차대전 이후의 절망과 폐허에서 꺽이지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희망과 의욕이란 무엇이던가?


나는 미조리에서 또다른 '바다와 노인'을 발견했다.

자연에 순응한 미조의 노인이 새로운 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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