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심매도

작은 섬에 살고싶다

김현거사 2017. 10. 13. 20:33

 

   작은 섬에 살고싶다 

 

 나는 남해에 자그마한 섬을 하나 갖고 싶다.

 집 앞에 남향으로 조용히 파도가 밀리는 백사장이 있고, 서북에 높은 바위산이 있으면 좋겠다. 서북쪽 산이 높으면 풍수로는 해좌사향(亥坐蛇向)으로 귀격길지(貴格吉地)로 친다.

 이런 곳은 지세가 서북풍 막아 아늑하다. 흐르는 물은 동류수(東流水)니, 동류수란 좋은 아침 자외선을 받아 물이 위장병과 피부병을 다스린다고 한다. 반면 동남쪽에서 흐르는 물은 태양의 일조각도가 나쁜 저녁 자외선을 받아 무익하다.   

 산정(山頂)은 가능하면 바위산이어야 한다. 암봉(巖峯)이라야 물이 맑고 수량이 많기 때문이다. 금강산과 설악산이 그렇다.

  

 

 섬의 크기는 3만평 정도이고 더 큰 것은 욕심이다. 

 냇물이 없는 섬은 무미건조하다. 물이 발원하는 상류에는 약초를 심으리라. 당귀(當歸), 인삼(人蔘), 구기자(枸杞子), 감국(甘菊),  맥문동(麥門冬), 오미자(五味子)가 좋다. 당귀는 피를 만들고, 인삼은 음기와 양기를 쌍보(雙補)하며, 구기자는 정력에 좋고, 감국은 눈을 밝게하고, 맥문동과 오미자는 폐를 맑게한다.

 약초 뿌리는 상류에서 물을 머금어 약수(藥水)로 만든다. 조석으로 약수 마시고, 약수에 목욕 하리라.

 냇가에는 바위가 있어야하고, 바위에는 푸른 이끼가 덮혀야 한다. 바위 위는 노송이 허리 구부리고 반쯤 누워있어야 하고, 그 아래는 솔잎이 수북히 쌓여 영지버섯과 송이가 자라야 한다.

 집은 냇물에 의지하되, 깊은 밤 등잔불 아래서 책 읽을 때 물흐르는 소리가 나직히 들릴만한 거리가 적당하다. 물소리는 자연의 독경(讀經) 소리다. 들으면 정신이 맑아져 소리 중에서 첫째로 친다. 그 다음은 새벽 산새 울음과 장닭이 회치는 소리, 그 다음은 한여름 파초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芭蕉雨)다.

 귀를 즐겁게 하는 것에는 달 밝은 밤 거문고 소리도 있으나, 귀가 제대로 열리면 그것은 인공의 소리다. 물소리 바람소리 같은 천지자연의 소리가 더 좋은 법이다.

 작은 만(灣)을 앞에 둔 초당은 한 폭의 산수화다. 창문을 열면 매화나무 밑에 수석(水石)이 보인다. 매화나무 아래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다. 차나무 아래는 춘난이 피어있다. 춘난은 보춘화(報春花)라 부른다. 입춘 청명 곡우 봄기운이 화심(花心)에 어린다. 난 중에 희귀한 것은 소심(素心)이다. 그러나 객은 모르고 주인만 아낀다.

 앞마당은 백화(百花) 난만한 별천지다. 초당 주인은 한가하다. 안개 낀 날은 꽃 속을 거닐고, 비오는 날은 꽃모종을 옮긴다. 작은 채마밭 있어, 봄이면 고돌빼기 돌미나리 무침에다 부추 전 부친다. 여름이면 찬 밥에 보리밥 말고 풋고추 즐긴다. 하찮은 푸성귀 하나도 자연의 선물이요, 우로(雨露)의 은택이다.

 집 뒤편은 과수원이다. 언덕바지에 감나무 배나무 대추나무 포도나무가 높낮이 따라 심어져있다. 가을이면 감도 배도 대추도 딴다. 곶감도 만들고 광주리나 독에 가득 채워놓는다.

 땅은 철 따라 채소와 과일을 주고, 바다는 철 따라 해산물을 제공한다. 봄은 도다리쑥국이요, 가을은 농어회가 일품이다. 모래톱에는 대합이 자라고, 바위 밑에는 소라가 자란다. 파래와 미역은 아침 저녁 먹거리다.   

 꽃피고 새우는 별천지 흥취 돋우는 것은 한 잔 술이다. 두견화로 두견주 만들고, 국화꽃으로 국화주 만들고, 인삼주, 포도주, 솔잎주, 갈근주 담는 것은 자연인의 취미다. 술은 땅 속에 묻어놓고 지인이 오면  개봉한다.

 아침이면 향 피우고 반야심경 음미하고, 저녁이면 도덕경 읽으리라. 해우(解憂)에는 반야심경이 제일이요, 현현(玄玄)에는 노장이 제일이다. 절개는 굴원이 제일이요, 서화는 이립옹이 제일이다.

 간혹 오동나무 밑 풍로에 차 끓인다. 평상에서 혼자 먹을 갈아 5천자 도덕경도 써본다. 고인의 기보(棋譜)로 바둑도 놓아본다. 바둑의 승패는 의미없는 것이다. 때와 인연 따라 조변석개(朝變夕改) 하는 것이다. 희노애락 미망(迷妄) 헤매는 자는 과욕자(過慾者)요, 지족자(知足者)는 순리를 따를 뿐이다. 빈 배 물결 따라 흔들리듯 조용히 흔들리리라. 폭풍우 지난 아침 모래톱이 더 맑고 깨끗하다.

 

 

 섬은 유정하다. 물가에 해당화 붉고 월하(月下)에 은파 푸르다. 작은 배 만경창파에 띄우면, 섬은 하나의 산수화요, 갈매기는 친구다. 황혼 물에 비친 선경(仙景)은 미불(米芾)의 차그운 강에서 노옹이 홀로 고기 잡는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가 된다.

 작은 섬에 살고싶다. 춘난 향기 그윽한 그 속에서 선악미추(善惡美醜) 넘어선 화장세계(花臧世界)를 추구하고 싶다. 삶과 죽음을 초월한 막고야산(邈姑耶山)의 신인(神人)처럼 살고싶다.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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