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심매도

고사심매도(高士尋梅圖)

김현거사 2017. 10. 13. 20:01

고사심매도(高士尋梅圖)

 

  이른 봄에 학처럼 여윈 노선비가 지팡이 짚고 매화가 피었는가해서 설산을 헤매는 그림이 그처럼 인상 깊었을까. 겨울이 얼마나 삭막했으면 천지는 아직 잔설(殘雪) 계절인데 노새 타고 매화 찾아 나섰을까?

 

 

 올해 심춘(尋春) 여행은 서도생활하는 잠실 이정수 장군과 떠났다. 3월3일 승용차로 대전 가서, 작년에 개통한 고속도로 단숨에 달려 천리 길 진주 도착하니, 서울은 겨울인데 여기는 훈풍이 얼굴을 간질인다. 고성반도 들어서니 가로변 붉은 동백꽃 너머가 바로 한려수도다. 보리싹 푸른 들 끝의 시원한 바다와 봄나물 캐는 아낙의 모습 한 폭 그림이다. 길가에 보라빛 야생화가 여기저기 피었다. 꿀풀 아종(亞種)인듯 한데, 한 치도 않되는 풀이 종처럼 생긴 꽃 줄줄이 매달았다.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가 이런 시를 남겼다.

       

봄 물에 배를 띄워 가는대로 놓았으니
물 아래 하늘이요 하늘 위가 물이로다 
이 중에 늙은 눈에 뵈는 꽃은 안개 속인가 하노라

  

단원의 주상관매도(舟上觀梅圖)

 

 서울 공해 속에 천금을 쌓아 무엇하리. 노안(老眼) 와서 돋보기로 서류 보는 나이 되어도 탈속(脫俗)을 모르면 이야기는 끝났다. 봄빛 볼려고 차 몰고 여기 온 것을 어떻게 설명하리.


 거제대교 건너 이정표 보니, 북쪽 길은 성포로 해서 YS 생가 있는 장목으로 가고, 남쪽 길은 청마(靑馬) 유치환 생가와 해금강 거쳐 지세포 간다. 우리가 누군데 YS 생가 쪽 택하겠는가? IMF 불러 나라를 거지꼴로 만든 그 죄 이완용 형님이거늘. 
 

 청마는 경주 출신 이군 부인의 학생 시절 교장선생님이다. 사십여년이 지나 우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청마의 ‘깃발'이란 시를 기억에서 재구성하는데, 넷의 두뇌를 다 동원해야 함을 알았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해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청마 생가 들어가는 도로변 동백 눈여겨 볼만한 것이다. 남도(南道) 동백은 잎이 기름 바른 듯 윤끼로 반질거리고, 꽃은 여인의 입술처럼 붉다. 

 복원한 생가는 기역자 구성으로, 본채는 들녘 내려다 보고있고, 사랑채 손바닥만한 툇마루는 그 밑에 달랑 놓인 요강 하나로 육십년 전 풍물 연출하고 있다. 흙이 부드러운 채마밭엔 마늘과 유채를 심어놓았고, 돌담 밑 모란 몇 그루는 봄볕에 졸고 있다.  

 두 여인이 안내문 읽고 있는 새에 밖에 나오니, 선풍수 눈에 문장(文章) 나온다는 직립(直立) 문필봉(文筆峰)은 보이지 않으나, 대시인 길러낸 곳답게 일월(日月) 화창히 빛나고, 삼태기 모양 둘러싼 산세 연꽃처럼 부드럽다. 

 동네 초입의 정자나무도 일품이다.

 


‘김교수! 저거 완전 분재다.’  이군은 외치고 ‘이 동네 백만불 짜리 분재 심어놓고 사는군.’ 나는 맞장구쳤다.

 환담하며 달리노라니 점심 시간이다. 바다에 하얀 스티로폴 덮은 굴 양식장 옆에 한글 갓 배운듯한 글씨로 ‘굴 구이’라고 써붙인 식당 있다.

 많은 차 파킹한 것으로 보아 음식 맛 좋은 모양이다. 홀 안에 몸매 관리라곤 해본적 없는듯, 팔뚝이 우리 허벅지만한 촌부(村婦)들이 얼굴 시커먼 남자들과 시끌벅적 떠들고 있다.

 우리는 만 천원 하는 굴구이 하나와 하나에 2천원 하는 굴 죽 네 개만 시켰다. 식당아줌마가 손바닥만한 굴 가득 담은 스테인레스 철판을 숯불화덕에 올리더니 뚜껑 덮어놓고 간다. 한참 뒤 마늘과 채소 든 쟁반과 면장갑 네 개, 그리고 나무 자루 달린 칼 네 개 갖다주고는, ‘소주는 필요 없어예?’ 묻고 간다. ‘아줌마 이제 먹어도 됩니까?’ 고함쳐 물어보니 와보지도 않고, ‘좀 더 계시이소. 익어야 굴 껍데기가 벌어짐니더. 빨리 열모 껍데기가 잘 안벌어집니더’ 대답만 한다.

 서비스는 이랬으나 맛은 장난이 아니었다. 면장갑 낀 손으로 칼로 굴을 벌려서 먹어보니, 짭조롬한 바다냄새와 탱글탱글 씹히는 촉감 완전 엑셀런트. 텃밭에서 키운 배추 겉조리도 고소하기 그지없다. 굴 국물 죽에 넣어 비비니, 그 비싼 낙산사 전복죽 무색케 한다. 
‘이렇게 무식하게 많이 퍼담아 주는게 경상도식인 갑다’. ‘굴 하나로만 배 채워보긴 난생 처음이다’. ‘서비스는 드세요가 아니라 쳐묵어라다’. ‘일식집에서 이 정도 먹으려면 10만원은 나온다.’
희희낙락 소감 말해가며 맛 음미하고, 먹다 남은 굴은 비닐봉지에 싸가지고 나왔다. 이런 엉뚱한 횡재 만나는게 여행의 즐거움이다. 
 

 이군은 장군답게 독도법(讀圖法)에 밝다. 지도 보며 거리와 시간 대충 예측하니 운전하는 내가 편하다. 저구에서 비포장 길로 홍포로 가니, 바다는 푸른 비단 펼친 것 같고, 깍아지른 절벽 아래 하얀 포말 시원하다. 동백과 천년 노송 너머로 멀리 욕지도 매물도 보인다. 눈 아래 병대도 크고 작은 섬은 수반 위의 수석같다.
‘카메라 어딨노?’ 
맘에 든단 표시다. 
‘나폴리나 산타루치아와 비교해 어떠냐?’
‘차로 미국 40여개 주 다녀봤고, 나폴리 모나코 지중해 절경(絶景) 봤지만,
여긴 그 이상이다’
‘나폴리는 절벽 위 동네가 멋있고, 창가의 꽃화분이 인상적이더라.’
홍포는 서너 가구 사는 곳이다. 여차는 노래방과 콘도식 대형 민박집이 두 개 있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에서 미단공주의 정인(情人)이 처형된 곳이 여기다.

‘여보 단지에 묻어둔 돈 있지? 여기 호텔 하나 세우자’
경치 좋다는 표현을 이군은 이렇게 한다.
‘여보 우리도 여기서 이장군하고 바둑이나 두며 살자.’
여행은 죽이 맞아야 흥이 난다.

 장승포에 닿아 부산서 날라온 강종대를 만났다. 거제도 있다니 즉각 온 것이다. 7척 거한이 부두가를 어슬렁거리며 우릴 기다리고 있다. 섬에서 섬으로 배를 탔다. 고려호는 인원 삼십명을 양쪽 뱃전 때리는 파고(波高) 3미터 물결과 뒤흔드는 바람 뚫고 무사히 지심도(只心島)에 내려주었다.

 

 하얀 삽살개가 뱃머리에 나와 손님 반기더니, 사람들을 안내라도 하듯 한낮에도 그늘진 숲 터널로 꼬리 흔들며 앞서간다. 땅에 떨어진 동백꽃 보며 올라가 김선장 집에 짐 맡기고 어둡기 전에 서둘러 섬 구경 나갔다.  여기는 가을에 밀감꽃 하얗게 피어 겨우내 노란 밀감 향기롭게 익고, 11월 부터 4월까지 동백꽃 핀다.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바다를? 오랜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괴테가 읊은 시칠리아섬 같다. 나는 이 섬에 세 번 왔는데, 늘상 이웃인 외도(外島)는 사람이 가꾼 낙원이요, 지심도는 자연이 가꾼 파라다이스라 생각했다.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 한번 읊어보자. 

 이보소 이웃들아 산수(山水) 구경 가자스랴.
 답청(踏靑)일란 오늘 하고, 욕기(浴沂)는 내일 하세.
 아침에 채산(採山)하고 나조에 조수(釣水) 하세. 
 갓 괴어 익은 술 갈건(葛巾)으로 받아놓고,
 꽃나무 가지 꺽어 수 놓고 먹으리라.
 화풍(和風)이 건 듯 불어 녹수(綠水)를 건너오니,
 청향(淸香)은 잔에 지고, 낙홍(落紅)은 옷에 진다.
 봉두(峰頭)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보니,
 천촌만락(千村萬落)이 곳곳이 버려있네.
 연하(煙霞) 일휘(日輝)는 금수(錦繡)를 재폈는듯,
 엇그제 검은 들이 봄빛도 유여할 사.
 공명(功名)도 날 괴우고 부귀도 날 괴우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외에 어떤 벗이 있사올꼬?
 


 지심도는 하늘에서 내려보면 마음 심(心)자 같다고 한다. 면적은 약 10만 평, 14 가구가 산다. 일제 때 해군기지였다고 한다. 희귀종인 거제 풍란을 비롯, 비파나무 후박나무 소나무 대나무가 많다. 섬 북쪽 원시림에는 어른 둘이 팔을 벌려야 겨우 껴안을 수 있는 거대한 동백나무도 있다고 한다. 
 민박집 뒤 매화나무 수형 감탄할 줄 아는 이군과 잘 왔다. 수형 볼 줄 알아야  상춘(賞春) 친구로 제격이다. 우리는 수확 끝난 밀감 밭 사이로 난 길 따라 섬 서쪽 벼랑으로 갔다.
 거기 벼랑 위에 아열대나무와 잔디가 자라는 평지가 있다. 여름에 야생화 만발하는 곳이다. 풍란이 피는 절벽엔 황금빛 원추리꽃 핀다. 그 절벽 밑에 그렇게 바람이 부는 데도 감성돔 꾼 몇이 바위에 붙어있다. 거기다 텐트 쳐놓고 딱 열흘만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

 

 동쪽 방향도 둘러보았으나 날씨가 춥고 바람이 심해서, 일본군이 바다의 선박을 감시하기 위해 만든 나바론 요새같은 포 진지 옆의 밭에 새파랗게 자라난 방풍(防風)만 캐고 곧 돌아왔다. 지심도 방풍은 향이 좋아 부산의 횟집에 납품한다고 한다. 저녁 먹으며, 남자들은 풍(風) 예방하고 약독(藥毒)을 푼다는 방풍 안주로 소주 먹고, 여인들은 군불 뜨껀뜨껀한 윗채 황토방에서 노독을 풀었다.

 인생은 여행과 같다. 강사장은 중학교 친구 이장군은 중고 친구인데, 이순(耳順) 앞두었으니, 우리 인생 남가일몽(南柯一夢)도 끝이 얼마남지 않았다.   

 아침엔 바람 개고 햇볕 화창하다. 몇년 전 모 방송사에서 ‘팔색조’란 드라마를 촬영했고, 조류학자가 10여 차례 다녀간 지심도다. 지심도에는 동백 후박 비파 대나무가 많다. 그 열매를 즐기는 새가 찾아온다. 맛이 새콤달콤한 비파는 신선의 과일이요, 죽실(竹實)은 봉황이 먹는 열매다. 동백과 후박 열매는 팔색조와 흑비둘기가 좋아하는 열매다. 새소리가  정말 청아하다. 속기(俗氣) 벗어나 울음 소리 신선의 음악같다. 


 여차가 좋더라는 말 듣고, 강사장은 새벽에 여차 구경할란다고 첫 배로 나갔다. 부산서 일부러 와서 하루밤 같이 자고 떠났다. 그가 굴원(屈原)이나 한고조(漢高祖) 아닌들 어떠랴? 필부(匹夫)의 사귐도 이만하면 된 것이다. 


 산책길 땅을 점점히 수놓은 것이 동백꽃 낙화(洛花)다. 표토는 낙엽층 두꺼워 카폐트 같다. 발에 푹신푹신한 촉감 준다. 맹종죽 대밭 길 맘에 든다. 세 가구가 사는 섬 북쪽 맹종죽은 죽순 굵기가 사람 종아리만 하다고 한다. 여기 바다에서 잡히는 생선회에 그 죽순무침 조화 기막힐 것이다.

 

아내와 이장군 부인(우측)

 

 대밭 아래 차나무 심으면 죽로차(竹露茶) 밭 만들 수 있다. 거기 옹달샘 수질은 최상일 것이다. 당장 주민등록 옮기고 싶었다. 다산(茶山)처럼 다도(茶道) 즐겨야지. 사슴도 몇마리 키워야지. 청학 백학도 키워야지. 기와가 아직도 깔끔한 일제 때 지은 목조건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심도 최고 비경(秘境)인 북동쪽 해안은 하늘 가리는 낙락장송(落落長松) 숲에 저절로 떨어진 동백나무 씨앗이 움이 나 몇가닥 들어온 희미한 빛에 의존해 싹을 틔우고 있다. 해안 절벽 위 좁은 길 바위는 푸른 파도 훔뻑 뒤집어썼다가 물이 빠지면 수많은 폭포 연출한다. 웅장한 파도소리 연이어 들린다. 도대채 말못하는 바위와 파도 둘이서 어떻게 그렇게 완벽한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더란 말인가? 인간의 어떤 천재가 이처럼 기막힌 조경(造景)을 만들 수 있더란 말인가?

 돌아오는 길에 인가(人家) 뒤에 숨은 수줍은 미인같은 매화를 만났다. 무심코 지나갈뻔 하다가 밭에 들어가보니, 매실 딸려고 낮게 키운 눈 높이 매화꽃이 그리 청초하다.

 

 

 

 꽃바침 녹색인 청매(靑梅)는 소녀같다. 홍색인 홍매(紅梅)는 요염한 여인같다. 매향(梅香)이 하도 진동하길래 꽃가지를 하나씩 오십대 두 선녀 옷깃에 꽂아주니, 봄바람은 두 선녀 뒤로 매화 향기를 날리므로, 우리는 흥겨운 마음으로 그 향기를 따라 걸어갔다. 

 

 배 타는 뱃머리로 내려가니, 거기는 학꽁치 천국이다. 댓가지로 네 귀퉁이 묶은 모기장같은 것이 고기 잡는 도구다. 그 위에 먹이 놓고 물에 잠시 담갔다가 올리면, 학꽁치가 여나믄 마리 이상 담겨 올라온다. 이건 잡는 게 아니라 퍼담아 올리는 것이다. 그러니 인심 좋을 수 밖에 없다. 낚시꾼들은 낚시 때려치우고, 다투어 초장과 소주 내놓고 학꽁치 회 즐긴다. 낮 선 사람끼리 서로 네 것 내 것 없는 권하며 술판 벌리는 모습이 태초의 에덴동산 이후 처음인 것 같다. 그바람에 나와 이군도 슬며시 끼여 학꽁치 세점 씩 얻어먹었다.

 

 이런 생각 들었다. 지심도를 통채로 사서 필리핀의 수상(水上) 호텔처럼 만들면 어떨까. 민박집은 초옥(草屋)이나 방갈로면 충분하다. 관광객은 죽순 녹차 매실 비파 방풍 밀감 수확하는 일에 참여시키면 좋아할 것이다. 그게 소위 참여관광, 체험관광이란 거다. 대나무숯으로 훈제 생선 만들면 그게 또 별미일 것이다. 양식 진주(眞珠)도 팔면 된다. 진주조개 현장에서 직접 까서 진주목걸이 가져가게 하면 관광객 입이 함박만 해져서 닫히지 않을 것이다.

 
 이때 강사장한테서 핸드폰 전화가 왔다.

‘어이 김교수,내가 여차 가다가 장끼 잡았다.’
‘장끼를?’
‘응! 도로에서 잡았다’
‘그 꿩이 혹시 눈이 봉사더냐?’
‘봉사 아니다. 자동차 헷트라이트에 눈이 부셔서 꼼짝 못하는 걸 형님이 잡아서 부두에 맡겨놓았다, 동생아 나올 때 선물로 가져가거라.’
장승포 부두에 닿으니 정말 멸치박스 속에 장끼가 들어있다. 검붉은 털빛이 황홀하도록 곱다. 움직이는 몸짓 민첩하다.

‘어쩌면 이렇게 잘생긴 꿩을 잡았을까요?’ 
숨쉬라고 뚫어놓은 구멍 안을 들여다보며 두 여인  감탄사를 연발한다. 


 통영 나가다가 잠시 들른 카폐가 또 맘에 든다. 카폐는 하얀 선박 모양이다. 곁의 푸른 바다 보며 여인들은 커피, 남자들은 쟈스민 차 시켰다.
‘카폐가 너무 아름다워요’
‘마치 배 타고 바다 위에 뜬 기분이예요.’
두 여인 감탄사가 겹친다.
‘김교수는 차만 대면 멋진 곳에 대는구나!’
‘굴구이부터 시작해서리?’
‘여차도 얼마나 좋았시요?’
‘지심도 동백하고 해안 풍경은요?’
‘지심도 뱃머리 학꽁치는?’
‘거기다 강사장 꿩 선물.’
‘이번 여행은 완전히 이벤트 여행이다.’  

 남해고속도로로 하동에 닿아보니, 섬진강 강물은 하얀 백사 푸른 대숲에 비쳐 더 맑다.

 

 

  양안(兩岸)은 매화꽃에 덮혀있고, 몽오리 맺힌 배밭 강변에 꿈결처럼 뻗었고, 외로운 물새 나르고 있다.

 처음은 지리산 온천에서 목욕하고 상경할 예정이었지만, 화개장터서 산채비빔밥 먹다가 계획 바꾸었다.

 전에 나는 지리산 밑 형제봉이라고 위치 밝힌 사람이 인터넷에 올린 ‘녹차를 만드는 사람’이란 홈페이지 본 적 있다. 붉고 큰 대포감 사진 칼라로 올리고, 집 주변 돌밭에 비료도 물도 주지않고 자연 그대로 키운다는 야생차, 국화 중에 향이 제일 좋은 감국 소개한 것이 무척 호감 갔던 곳이다.

  평사리는 평사낙안(平沙落雁), 백사장에 기러기 날아내리는 형국이라 한번 가볼만한 곳이다. 그런데 일이 묘하다. 혹시나해서 식당 아줌마에게 형제봉 아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집이 바로 형제봉 밑인데, 차로 15분이면 걸리고, 소설가 박경리씨 ‘토지’의 무대가 된 최참판댁이 있단다.

 


 ‘그렇다면 숙녀분들 의견 물어봅시다. 온천욕으로 모실까요? 최참판댁으로 모실까요?’
‘길상이와 최서희가 살던 집을 보고싶어요’ 

 그래 간 최참판댁은 실망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건 까만 인조기와다. 옛 양반집 푸른 이끼 덮힌 골기와 빛 바랜 현판 있는 그런 곳 아니다. 고풍을 찾을 수 없다. 지방 업자가 망쳐놓은 것이다.

'박경리씨가 이 집 보면 퍽 실망하겄다.’ 
 그런데 집 둘러보고 나오다가 참으로 희한한 해후를 했다. 그랜져 두 대 겨우 비켜갈 좁은 논길에서 내 네살 때 여자친구 그랜져를 만난 것이다. 그는 이화여대 나와 서울대 출신 선배와 결혼했다.  어릴 때 나와 대작대기 말(竹馬) 같이 타던 그 죽마고우가 수십년이 흘렀는데도 찰라에 스쳐가는 나를 알아보고 반색하며 몸 돌려 손 흔들었던 것이다. 나 역시 그 젊잖은 노부인에게 반색을 하며 손 흔들었다. 그때 양쪽 차가 스쳐간 것은 몇 초였을까? 번개불에 콩 구워먹듯 50년 전 여자친구와 만난 것이다. 


 바다 본 김에 산도 보자고 화엄사 쪽에서 노고단 넘을 때였다. 
웅장한 지리산은 노을이 어둠으로 바뀌는 시간이었다.
‘교수님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읍니까?’ 
‘말씀 하시지요’
‘아까 그 꿩 혹시 제게 주실 수 있습니까? 여기다 방생하고 싶은데요’
‘좋습니다. 그처럼 아름다운 제안을 어찌 반대합니까.’
우리는 산세 안온한 곳 골라서 차 세우고 꿩을 날려보냈다. 그때부터 기분 상쾌해지기 시작했다. 
 ‘지리산 마고할매님이 거제 용왕님이 보낸 꿩 보면 퍽 좋아하실꺼야.’
‘그 장끼 너무 잘 생겨서 지리산 과부까투리들이 환장할꺼다.’
이런 농담하면서 밤 11시 서울 닿았으나, 그날 우리 네사람은 구름 위 학을 타고 온듯,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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