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편
최치원(崔致遠)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진감선사 비명(眞鑑禪師 碑銘)
최치원은 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이다. 868년 12세 때 당나라 장안 체류 7년 만에 18세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 하여,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879년 고병(高騈)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만든 시문들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 이다. 당시 고변의 지시로 쓴 글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다.
최치원은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이 되었으며,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또 882년에 자금어대(紫金魚袋)도 하사받았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광명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아모(我某)는 황소(黃巢)에게 고한다.
*여기서 아모(我某)는 고병(高騈)이다.
*황소(黃巢)는 당(唐) 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켜서 도성(都城)을 점령한 도적이다.
대개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여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리는 데서 패한다. 비록 백년(百年)의 생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나, 만사(萬事)는 마음이 주장된 것이매, 옳고 그른 것은 가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임금의 군사를 거느려 정벌(征伐)에 나섯으나, 군정(軍政)은 은덕을 앞세우고 베어죽이는 것을 뒤로 한다. 앞으로 상경(上京)을 회복하고 큰 신의(信義)를 펴려 하매, 임금의 명을 받들어 간사한 꾀를 부수려 한다.
너는 본시 먼 시골의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시세를 타고 감히 강상(綱常)을 어지럽게 하였다. 불칙한 마음을 가지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침노하고 궁궐을 더럽혔다. 죄가 하늘에 닿을 만큼 되었으니, 반드시 패하여 망할 것이다.
아, 요순(堯舜) 때로부터 내려오면서 묘(苗)나 호(扈)가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양심 없는 무리와 불의불충(不義不忠)한 무리들이 너희 하는 짓처럼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나. 먼 옛적에 유요(劉曜)와 왕돈(王敦)이 진(晉) 나라를 엿보았고, 가까운 시대에는 녹산(祿山)과 주자(朱泚)가 황가(皇家, 당나라)를 향하여 개짖듯하였다. 그들은 모두 손에 강성한 병권도 잡았고, 또는 몸이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필경에 더러운 무리들은 섬멸되었다.
너는 평민의 천한 것으로 태어났고, 농민으로 일어나서 불지르고 겁탈하고 살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고, 속죄될 조그마한 착함은 없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도 땅 가운데 귀신까지 너를 베어 죽이려고 의론하리라.(兼恐地中之鬼 已議陰誅).
*황소가 격문을 보다가 이 귀절에 이르러 심혼이 놀래서 앉았던 상(床)에서 떨어졌다 한다.
우리나라는 덕이 깊어, 더러운 것도 참아주고 은혜가 중하여 결점을 따지지 아니하여, 너를 장령(將領)으로 임명하고 너에게 지방 병권(兵權)을 주었거늘, 너는 오히려 짐새[鴆]와 같은 독심을 품고 올빼미의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하는 짓은 개가 주인 보고 짖듯하여, 필경에는 몸이 임금의 덕화를 등지고, 군사가 궁궐에까지 몰려들어 임금의 행차는 먼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께서 너의 죄를 용서하는 은혜가 있는데, 너는 국가에 은혜를 저버리니, 반드시 얼마 아니면 죽고 망하게 될 것이니,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는가.
주(周) 나라 솥(鼎)은 물어볼 것이 아니요. 한(漢) 나라 궁궐이 어찌 너 같은 자가 머물 곳이랴. (넘보지 말라)
*우(禹) 임금이 구정(九鼎)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여 제왕들이 그것을 수도에 두어 왔다. 주(周) 나라 말기에 강성한 초왕(楚王)이 사람을 보내어 구정이 가벼운가를 물었다. 그것은 곧 제가 천자가 되어 구정을 옮겨가겠다는 뜻이다.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도덕경(道德經)에 이르기를, '회오리바람은 하루아침을 가지 못하는 것이요. 소낙비는 하루 동안을 채우지 못한다. 천지도 오히려 오래 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하였다.
또 듣지 못하였느냐.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하늘이 잠깐 나쁜 자를 도와주는 것은 복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흉악함을 쌓게 하여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제 너는 악이 쌓이고 화(禍)가 가득한데도 스스로 미혹하여 뉘우칠 줄 모르니, 옛말에 제비가 막(幕) 위에다 집을 지어 놓고 불이 막을 태우는데도 방자히 날아드는 거나, 물고기가 솥 속에서 너울거리다 바로 삶아 데인 꼴을 보는 격이다.
나는 웅장한 군략(軍略)을 가지고 여러 군대를 모았으니, 날랜 장수는 구름 같이 날아들고, 용맹스런 군사들은 비 쏟아지듯 모여 들어, 높고 큰 깃발은 초새(楚塞)의 바람을 에워싸고, 군함은 오강(吳江)의 물결을 막았다.
맹렬한 불이 기러기 털을 태우는 것과 같고, 태산(泰山)을 높이 들어 참새알을 눌러 깨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서늘한 가을 강의 신이 우리 군사를 맞이한다. 서풍이 불어 숙살(肅殺)의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이슬은 답답한 기운을 상쾌하게 하여 준다.
경도(京都)를 수복하는 것이 열흘이나 한 달 동안이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살리기 좋아하고 죽임을 싫어하는 것이 상제(上帝)의 깊으신 인자함이요, 법을 굴하여 은혜를 펴려는 것은 조정의 어진 제도이다.
나라의 도적을 정복하는 이는 사사로운 분(忿)을 생각지 않는 것이요, 어둔 길에 헤매는 자를 일깨우는 데는 진실로 바른 말을 하여 주어야 한다. 그래 나의 한 장 편지로써 너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다급한 것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고집 하지 말고 일의 기회를 잘 알아서 스스로 허물을 짓다가도 고치라.
만일 땅을 떼어 봉해 줌을 원한다면, 몸과 머리가 두 동강으로 되는 것을 면하며, 공명의 높음을 얻을 것이다.
일찍이 회보(回報)하니 의심둘 것 없나니라. 나의 명령은 천자를 머리에 이고 있고, 믿음은 강물에 맹세하여 반드시 말이 떨어지면 그대로 하는 것이요, 원망만 깊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 덤비는 도당에 견제되어 취한 잠이 깨지 못하고, 여전히 당랑(螳螂)처럼 수레바퀴에 항거하기를 고집한다면, 그때는 곰을 잡고 표범을 잡는 군사로 한 번 휘둘러 없애버릴 것이니, 까마귀처럼 모여 소리개 같이 덤비던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갈 것이다.
그때 너희들 몸은 도끼에 피를 바르게 될 것이요, 뼈는 융거(戎車, 군용차) 밑에 가루가 되며, 처자도 잡혀 죽으려니와 종족들도 베임을 당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동탁(董卓)같은 너를 잡아 불에 태울 때 후회하여도 때는 늦으리라. 너는 진퇴를 참작하고 잘된 일인가 못된 일인가 분별하라. 배반하여 멸망되는 것이 어찌 귀순하여 영화롭게 됨과 같으랴.
장사(壯士)답게 모범을 택하여 결정할 것이요, 어리석은 생각으로 여우처럼 의심만 하지 말라.
내가 고하노라.
*이 격문은 계원필경집에 실려있다.
최치원은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한림학사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저술을 정리하여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왕에게 헌상했으며, 31세 때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과 진감국사비명(眞鑑國師碑銘)을 지었다.
최치원은 재주가 많아 질시도 많이 받았다. 그를 끌어 주던 각간(角干) 위홍(魏弘)이 죽은 뒤, 국왕의 총애를 받던 미장부(美丈夫)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천권(擅權)하자, 외직으로 나갔다. 890년(진성여왕 4년) 이후에 태인(泰人)과 천령군(天嶺郡, 함양)과 서산 등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가 동해안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는 견훤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난세를 만나 산림이나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을 베개 삼아 읽고 풍월을 읊조렸다. 경주 남산, 강주(剛州, 의성),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凉寺),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창원), 부산 해운대가 그가 노닐던 곳이다.
마지막에 가야산(伽耶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면서, 형 현준(賢俊)과 승려 정현(定玄)대사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고려 현종 때 공자묘에 종사(從祀)되었으며, 조선 때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에 제향되었다.
진감선사 비명(眞鑑禪師 碑銘)
지금 쌍계사에 진감선사 비석이 있다. 사람들은 사진만 찍고 한문으로 된 글뜻을 모르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탑두에 새긴 전서(篆書)는 최치원 친필이요, 새겨진 글은 천하 대문장가의 글이다. 그 내용을 소개한다.
유당 신라국 고 강주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비명병서(有唐新羅國故康州知異山雙谿寺敎諡眞鑑禪師碑銘幷序)
*진주 옛이름이 강주(康州)이다. 진주는 가야시대 고령가야의 고도였고, 삼국시대는 백제 거열성, 통일신라시대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23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2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전(前) 서국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자금어대 하사받은 신 최치원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아울러 전자(篆字)의 제액(題額, 비석 머리글)을 씀.
비석 머리글
무릇 도(道)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람에게는 나라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 동방인들이 불교를 배우고 유교를 배우는 것은 필연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여 학문을 좇아 목숨은 통나무 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향하였다. 비어서 갔다가 올차서 돌아오며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로 하였으니, 또한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이 사는 못의 깊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으니, 빛이 오승<五乘- 진리로 인도하는 교법을 다섯 가지 탈 것. 인승(人乘), 천승(天乘),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을 두루 비추었고 유익한 말을 얻으니 미각은 육경<六經,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악기(樂記), 예기(禮記)>에 배불렀으며, 다투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에 들게 하고 능히 한 나라로 하여금 인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인도의 석가와 궐리(闕里, 공자 유적이 있는 중국 지명)의 공자가 교를 설함에 있어 흐름과 체제가 달라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아서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 하였다.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詩)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로써 말을 해쳐서 안되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도 안된다. 예기(禮記)에 이른바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타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論)을 지어 이르기를 '여래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극치를 체득함에 아울러 응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함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沈約)은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요를 안다고 이를 만한 사람이라야 더불어 지선(至善)의 도(道)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심법(心法)을 말씀하신 것은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해도 이름할 수 없고 설명하려해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기란 끝내 바람을 잡아매는 것 같아 붙잡기 어렵다.
공자는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하였다.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문수보살을 대한 것이나,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혀를 움직이지도 않고 능히 마음을 전한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였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얻을 것인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서 우리나라에 널리 빛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禪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사의 법휘는 혜소(慧昭)이며 속성은 최씨이다. 그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우리나라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지금 전주 금마(현재 익산)사람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창원(昌原)인데 재가자임에도 출가승의 수행이 있었다. 어머니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서역 승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항아리를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사를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도 울지 아니하여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어 빼어난 인물이 될 싹을 보였다. 이를 갈 나이에 아이들과 놀 때는 반드시 나뭇잎을 사르어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 하였으며, 때로는 서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듯 착한 근본이 진실로 백 천겁 전에 심어진 것임을 알지니 발돋움하여도 따라갈 일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데 뜻이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한 말의 여유 곡식도 없고 또 한 자의 땅도 없었으니,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오직 힘 닿는 대로 노력하였다. 이에 소규모의 생선 장사를 벌여 봉양하는 업으로 삼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는 '길러주신 은혜는 애오라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나 심오한 도(道)에 둔 뜻은 어찌 마음으로써 구하지 않으랴. 내 어찌 덩굴에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 나이에 지나온 자취에만 머무를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정원 20년(804) 세공사(歲貢使)에게 나아가 뱃사공 되기를 청하여 배를 얻어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기고는 배를 노저어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달하자 사신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여기서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하고,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꺼워하면서 '슬프게 이별한 지가 오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하여 갑자기 인계(印契)를 받게 하니,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대는 듯 물이 낮은 들판으로 흐르는 듯 하였다. 문도들이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얼굴 빛이 검어서 모두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흑두타(黑頭陀)라고 했다.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고 말 없이 처함이 칠도인(漆道人)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저 읍중의 얼굴 검은 자한(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할 뿐이랴. 붉은 수염의 불타야사(佛陀耶舍) 및 푸른 눈의 달마(達磨)와 함께 색상(色相)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원화 5년(810년) 숭산 소림사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가 유리항아리를 받은 옛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이미 계율에 밝았음에도 다시 학림(學林)으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더 푸른 것과 같았다. 비록 마음은 고요한 물처럼 맑았지만, 자취는 조각구름 같이 매임 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 때 마침 우리나라 스님 도의(道義)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였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 바라는 바가 일치하였으니 중국 서남쪽에서 벗을 만난 것이다.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자 선사는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는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따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삼년이요, 뒤에 자각(紫閣)에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짚신을 삼아가며 널리 보시하며 바쁘게 다닌 것이 또 삼년이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았고 타국도 다 유람하였으나, 비록 공(空)을 관(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태화 4년(830년) 귀국하여 대각(大覺)의 상승(上乘) 도리로 우리나라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칙서를 보내고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道義)선사가 지난번에 돌아오더니 상인(上人)이 잇달아 이르러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까지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방 계림의 땅을 길상(吉祥)의 집으로 만들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尙州)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 석장을 멈추었다. 의원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같아 방장(方丈)은 비록 넓으나 물정이 자연 군색하였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니 몇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하니 산을 오르는 신과 다르지 않았고, 따라가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선무외(善無畏) 삼장이 영산에서 여름 결제를 할 때 맹수가 길을 인도하여 깊은 산속의 굴에 들어가 모니(牟尼)의 입상을 본 것과 완연히 같은 사적이며, 저 축담유(竺曇猷)가 조는 범의 머리를 두드려 경(經)을 듣게 한 그것만이 승사(僧史)의 미담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화개곡의 고(故)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터에 당우(堂宇)를 꾸려내니 엄연히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쌍계사는 신라 진성왕 21년(722)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이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에 절을 지었다.
삼법화상이 처음 혜능의 정상을 가지러 간 이유와 상황은 이렇다. ‘육조의 정상(頂相)을 흰눈이 덮힌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중국 홍주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돈 2만냥을 주고 장정만(張淨滿)으로 하여금 탑묘에 모셔있는 육조 혜능의 정상을 취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고을의 현령 양간(楊侃)과 자사 유무첨(柳無忝)의 수색으로 곧 잡혀서 육조의 제자인 영도스님에게 처분을 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해동에 육조 정상을 모시고 공양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용서를 받아 육조 정상을 모시고 귀국했다.
쌍계사는 처음에는 옥천사라 불렀는데, 뒤에 정강왕(定康王)이 절 주변의 지형을 보고 2개의 계곡이 만난다 하여 쌍계사로 고쳐 불렀다.
*선무외(善無畏) 삼장; 중국의 밀교인 진언종에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이라는 삼장(三藏, 고승)이 있다.
*축담유스님은 법유(法猷)라고도 부르는데, 원래는 천축 사람으로 진(晉)나라 때 돈황(燉煌)에 상인으로 왔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후에 강남을 떠돌다가 적성산(赤城山) 석실로 자리를 옮겨 앉아 좌선을 하였다. 전하는 말은 이렇다. 사나운 호랑이 수십 마리가 담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는데 담유가 경을 외는 소리는 전과 같았다. 한 호랑이가 졸자, 담유는 짐짓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왜 너는 경을 듣지 않느냐?'고 야단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개성 3년(838)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고자 국서를 내리고 재비(齋費)를 보내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사가 말하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닦는 데 있을 뿐, 어찌 만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사자(使者)가 왕에게 복명하니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선사가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호를 내려 혜소(慧昭)라 하였는데, 소(昭)자는 성조(聖祖)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그리고 대황룡사에 적을 올리고 서울로 나오도록 부르시어, 사자가 왕래하는 것이 말고삐가 길에서 엉길 정도였으나, 큰 산처럼 꿋꿋하게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조(僧稠)가 후위(後魏)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여 크게 통하는데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곳에 살면서 고매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다르나 뜻은 같다고 하겠다. 몇 해를 머물자 법익(法益)을 청하는 사람이 벼와 삼대처럼 줄지어 송곳을 꽂을 데도 없었다.
드디어 빼어난 경계를 두루 가리어 남령의 기슭을 얻으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선려(禪廬, 절)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더욱이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이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어울려 울리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혜원공(慧遠公)의 동림사(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 한 것은 정말이구나' 하였다.
*진(晉)나라 승려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적에 손님을 전송하더라도 호계(虎溪)를 건너는 법이 없었는데, 도연명과 육수정(陸修靜)이 방문했을 적에는 이야기에 팔려 저도 몰래 호계를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가 있다.
대나무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손꼽아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玄孫)이었다. 이에 육조영당(六祖靈堂, 육조 혜능의 영당)을 세우고 채색 단청하여 널리 중생을 이끌고 가르치는데 이바지하였으니, 경(經)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빛깔을 섞어 여러 상(像)을 그린 것'이었다.
대중 4년(850) 정월 9일 새벽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다 공(空)이니 나도 장차 갈 것이다.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앉아서 입적하니 금생의 나이 77세요, 법랍이 41년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더니 바람과 우뢰가 홀연히 일어나고, 호랑이와 이리가 울부짖으며 삼나무 향나무가 시들어졌다. 얼마 뒤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가리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례에 모인 사람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양사(梁史)에 '시중 저상(褚翔)이 일찌기 사문을 청하여 앓고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실려 있으니 성스러운 감응이 나타난 것이 어찌 꾸밈이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은 기별을 듣고 서로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우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하게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었다. 널과 무덤길을 미리 갖추어 준비하게 하였으니 제자 법량(法諒)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시고는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언덕에 장사지내어 유명을 따랐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리지 않았고 말에 꾸밈이 없었으며,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겨나 싸라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다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귀인들이 가끔 찾아와도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이라 하여 올리기를 어려워하면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였으며,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대접함이 한결같았다.
매양 왕의 사자가 역마를 타고 와서 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法力)을 구하면 이르기를, '무릇 왕토(王土)에 살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인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마음 기울이고 생각을 다하여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필 멀리 마른 나무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윤언(綸言)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왕명을 전하러 온 사람과 말이 허기져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였다.
어쩌다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 하였고, 한다(漢茶)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모두 이러한 것이었다.
평소 범패(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 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신불(神佛)을 환희케 하였다. 길이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당(堂)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었던 일처럼, 지금 우리나라에서 옥천(玉泉, 쌍계사의 옛이름)의 여향(餘響)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진감선사가 한국 불교음악의 시조이다.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 때인데 임금이 슬퍼하여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선사가 남긴 훈계를 듣고서는 부끄러워하여 그만두었다. 3기(紀)를 지난 뒤 문인들이 세상 일의 변천이 심한 것을 염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에게 영원토록 썪지 않고 전할 방법을 구하였더니, 내공봉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 정순일(鄭詢一)이 굳게 마음을 합쳐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불교를 흠앙하시어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거룩하도다! 해가 양곡(暘谷, 해가 돋는 골짜기)에서 솟아 어두운 데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어 오래될수록 향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선사께서 명(銘)도 짓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후대로 내려와 문도들에 이르러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바로 흰 구슬의 티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난 것은 선정을 닦은 법력의 나머지 보응이니,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같이 끊어지기 보다는 할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부에 비석을 얹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시니 질나발(진흙을 구워 만든 나발)과 피리가 서로 화답하듯 뜻이 부촉에 잘 맞아 좋은 것은 그대로 따르시었다.
이웃 산의 절도 옥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데 있었으므로 이에 제호를 하사하여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신에게 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선사는 수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명(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시어 치원(致遠)이 두 손을 마주대고 절하면서 '예! 예!'하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지난번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장구(章句) 속에서 살지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으나, 아직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하지 못하여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에 사람들이 깊이 감복했던 것이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법(法)은 문자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데가 없으니, 굳이 그를 말한다면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의 영(郢)땅에 가려는 것이 되리라.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문인(門人)들의 바램으로 문자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기에 드디어 감히 몸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맡고, 힘은 오능(五能, 옛 악보에서 말하는 거문고를 탈 수 있는 다섯 가지 조건. 자리가 편안할 때, 똑바로 볼 수 있을 때, 뜻이 한가할 때, 정신이 상쾌할 때, 손가락이 견고할 때)을 본받으려 하니, 비록 돌에 의탁한다 해도 부끄럽고 두렵다.
그러나 ‘도(道)란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재주가 없다 하여 필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것인가. 거듭 앞의 뜻을 말하고 삼가 명(銘)을 지어 이른다.광계(光啓) 3년 7월 어느 날 세우고 중 환영(奐榮)이 글자를 새김.
최치원의 시
추야우중(秋夜雨中)
秋風唯苦吟(가을바람은 오직 괴로운 소리 뿐이고)
世路少知音(세상길엔 알아주는 이 적네)
窓外三更雨(창 밖엔 삼경우 내리고)
燈前萬里心(등불 앞의 마음은 아득하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狂奔疊石吼重巒(미친 물 바위를 치며 산봉우리 울리어)
人語難分咫尺間(사람 소리 지척에서도 분간하기 어렵네)
常恐是非聲到耳(세상의 시비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워하여)
故敎流水盡籠産(일부러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막았네)
동쪽 나라 화개동(東國花開洞)
*이 시는 지리산 석굴에서 어느 노승이 여러 권의 책을 발견했는데 그중 한 권이 최치원 것이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구례 군수 민대륜이 그 시첩을 확인해보니 정말 치원의 글씨였고 시 또한 기이하고 옛스러워, 치원의 시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였다.
東國花開洞 (동쪽 나라 화개동은)
壺中別有天 (병 속의 별천지라네)
仙人推玉枕 (선인이 옥 베개 권하니)
身世欻千年 (몸과 세상이 어느새 천년일세)
萬壑雷聲起 (만 골짜기 우뇌소리 일어나고)
千峯雨色新 (천 봉우리에 비 맞은 색 새로워라)
山僧忘歲月 (산속 중은 세월을 잊고)
唯記葉間春 (오직 나뭇잎 사이의 봄을 기억하네)
雨餘多竹色 (비 끝에 대나무 빛 곱고)
移坐白雲開 (자리 옮기니 흰구름이 열리네)
寂寂因忘我 (적적 속에 나를 잊나니)
松風枕上來 (솔바람 침상 위로 불어오네)
春來花滿地 (봄이 오자 꽃이 땅에 가득하고)
秋去葉飛天 (가을 가자 잎은 하늘에 휘날리네)
至道離文字 (지극한 도는 문자를 떠나)
元來在目前 (원래 눈 앞에 있는 것이니라)
潤月初生處 (시냇가 달이 처음 뜨는 곳)
松風不動時 (솔바람도 움직이지 않을 때)
子規聲入耳 (자규소리 귀에 들어오니)
幽興自應知 (그윽한 흥취 절로 알겠노라)
擬說林泉興 (숲과 샘물 흥취 말하려 해도)
何人識此機 (누가 이 기미를 알랴)
無心見月色 (무심히 달빛 보며)
黙黙坐忘歸 (묵묵히 앉아 돌아갈 길 잊었네)
密旨何勞舌 (밀지를 어찌 노고롭게 할 거 있나)
江澄月影通 (강은 맑고 달그림자는 통하네)
長風生萬壑 (긴 바람 온 골짜기에서 나고)
赤葉秋山空 (붉은 잎 가을 산은 비었어라)
松上靑羅結 (소나무 위 송라넝굴 얽히고)
澗中有白月 (시냇물 속에 흰 달이 있네)
石泉吼一聲 (바위샘 물소리 한번에)
萬壑多飛雪 (온 골짜기 눈발 가득하네)
바다에 배를 띄우고(泛海)
돛달아 창해에 배 띄우니, 긴 바람 만리에 통하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뗏목 탔던 한의 사신 장건(張騫) 생각나고, 불사약 찾던 진나라 동남동녀 생각나네(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 중에 있네(日月無何外 乾坤太極中)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 또한 신선을 찾겠네(蓬萊看咫尺 吾且訪仙翁)
* 이 '바다에 배를 띄우고'란 시는 박근혜 대통령 방중시 시진핑 주석이 인용한 시다. 시진평이 '한국과 중국은 역사가 유구합니다. 당나라 시대 최치원선생이 중국에서 공부하시고 한국에 돌아가셨을 때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란 시를 쓰셨지요.' 하고 인사하였다.
번뇌는 한량 없고 깨달음의 길은 멀어
원효(元曉)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원효대사(617-686)는 신라 진평왕 때 고승이니, 지금부터 1400년 전 사람이다. 성은 설(薛)씨이며, 경산군 출신이다.
34세 때 의상(義湘)스님과 불법을 배우려고 당나라 가던 길에, 요동의 무덤 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물 한 그릇을 마셨다. 그런데 그렇게 맛있던 물이 아침에 깨어보니, 바로 해골 속에 고인 물이었다. 여기서 스님은 크게 깨쳤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다'(一切唯心造)는 진리다. 그래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혼자 신라로 돌아왔다.
후에 요석궁(遙石宮)의 홀로 된 공주와 연을 맺아 설총(薛聰)을 낳았으니, 설총은 신라 10현 중 제일인자로 꼽힌다. 파계한 후로는 이곳저곳 떠돌다가 70세에 암굴(穴寺)에서 입적했다.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蔬),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을 저술했는데, 여기서는 출가 스님들에게 당부하는 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을 소개한다. 이 발심수행장은 조계종 전문강원의 사미과(沙彌科) 교과목의 하나이고, 수행인의 필독서로 꼽힌다.
원효대사 진영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
모든 부처님이 열반의 궁전에 장엄하게 자리하신 것은 억겁의 바다에서 욕심을 버리고 고행하신 때문이며, 중생들이 고해(苦海)의 불 속에 사는 것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입산수도한 사람들이 큰 도(道)를 성취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애욕에 구속되어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로막는 자 없는 천당이건만 가서 이르는 자가 적은 까닭은, 삼독과 번뇌로써 자기 집의 재물을 삼은 때문이며, 유혹하는 자 없는 지옥(惡道)이건만 가서 들어서는 자가 많은 까닭은, 네 마리 뱀과 다섯 가지 욕심으로 망녕스레 마음의 보물을 삼은 때문이다. 사람마다 어느 누가 산으로 돌아가 도 닦고자 아니 하겠는가마는, 그렇게 나아가지 못한 까닭은 애욕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은 산으로 돌아가 마음을 닦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힘에 따라 착한 것을 행하는 일은 버리지 말라. 스스로 쾌락을 버릴 수 있으면 성인과도 같이 믿음과 공경을 받을 것이며, 행하기 어려운 일을 행할 수 있으면 부처님처럼 존중 받을 것이다. 재물을 아끼고 탐하는 자는 마귀의 권속이며, 자비를 베푸는 자는 부처님의 제자이다.
높은 산, 험준한 바위는 지혜로운 사람이 거처할 곳이요, 푸른 소나무 들어선 깊은 계곡은 수행하는 자가 머물 곳이다. 배고프면 나무 열매 먹어 주린 창자 달래고, 목마르면 흐르는 물 마셔 갈증을 풀어라.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언젠가는 이 몸은 반드시 죽을 것이고, 비단 옷으로 감싸 보아도 목숨은 마침내 끊어지고 만다.
메아리 울리는 바윗 굴을 염불당으로 삼고, 애처로이 우는 기러기 소리를 마음의 벗으로 삼으라. 절하는 무릎이 어름같이 시리더라도 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어야 하며, 주린 창자가 끊어지듯 하더라도 음식 구하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평생이 얼마길래 수행하지 않고 놀기만 할 것인가.
마음 속의 애욕을 떨쳐 버린 이를 사문(沙門)이라 하고, 세상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을 출가라 한다.
수행자가 비단을 걸친 것은 개가 코끼리 가죽을 쓴 격이며, 도 닦는 사람이 애욕을 품는 것은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격이다
재주와 학문이 있더라도 계행(戒行)이 없는 자는 마치 보물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면서 길을 떠나지 않는 것과 같고, 부지런히 수행하더라도 지혜가 없는 자는 동쪽으로 가고자 하면서 서쪽으로 가는 것 같다.
지혜 있는 이의 수행은 쌀로 밥을 짓는 것이고, 어리석은 이가 하는 짓은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이다. 사람들은 밥을 먹어 주린 창자를 달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은 마음은 고칠 줄을 모르는구나.
죽을 얻고 축원을 하면서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시주에게 수치스런 일이요, 밥을 얻고 심경(心經)을 외울 때에 그 이치를 모른다면 부처님께 부끄럽지 아니하랴.
세간의 시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천상으로 오르는 데는 계행(戒行)이 훌륭한 사다리이다.
계행을 깨트린 이가 남을 위하는 복밭(福田)이 되려는 것은, 마치 날개죽지 부러진 새가 거북을 업고 하늘로 오르려는 것과 같다. 제 허물도 벗지 못한 사람이 어찌 남의 죄를 풀어줄 수 있는가. 계행이 없는 이가 어찌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을 수 있겠는가.
덕이 높은 큰스님 되기를 바라면, 먼저 끝없는 긴 고통을 참아야 하며, 세상의 향략을 버려야 하며, 여색을 잊어야 한다.
사대(四大)는 곧 흩어지는 것이어서 오랫 살기 보증할 수 없으며, 오늘이라 하면 벌써 저녁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세상의 쾌락이란 고통이 뒤따르는 것인데 무엇을 그리 탐내어 붙들 것이며, 한 번 참으면 길이 즐거울텐데 어찌 수행하지 않는가.
도인으로서 탐욕을 내는 것은 수행인의 수치요, 출가한 사람이 부귀를 원하는 것은 세상의 웃음거리이다.
일이 끝이 없는데 핑계만 많고 탐욕과 집착 버리지 못하고, 오늘이 끝이 없는데 나쁜 일은 날마다 늘어가고, 내일은 끝이 없는데, 착한 일 할 날은 많지 못하다. 금년 금년 하면서 번뇌는 한량 없고, 내년 내년 하면서 깨달음(菩提)은 얻지 못한다. 시간은 어느새 지나가 하루가 흐르고, 하루는 어느새 한 달이 되고, 한 달은 흘러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는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우면 게으름과 나태만이 생기며, 앉으면 생각만 난잡해진다. 몇 생(生)을 닦지 않고서 헛되이 세월만 보내었으며, 이 몸은 얼마를 살 것인데, 닦고 수행하지 않는가? 이 몸은 반드시 죽고야 말것인데, 내생(來生)은 어떻게 할 것인가?이 어찌 급하고도 급한 일이 아니겠는가!
간밤에 꿈 꾼 사랑
일연(一然)스님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삼국유사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와 다르고 해동고승전과도 다르다. 삼국유사는 전체 5권 2책으로 되어 있는데, 왕력(王歷) 기이(紀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 등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왕력은 삼국, 가락국, 후고구려, 후백제 등의 간략한 연표이다. 기이편은 고조선으로부터 후삼국까지의 단편적인 역사를 서술했다. 흥법편은 삼국의 불교수용과 그 융성에 관한 것, 탑상편은 탑과 불상에 관한 것, 의해편에는 원광서학조(圓光西學條)를 비롯한 신라의 고승들에 대한 전기, 신주편에는 신라의 밀교적 신이승(神異僧)들에 대한 것, 감통편에는 신앙의 영이감응(靈異感應)에 관한 것, 피은편에는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 효선편에는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선행에 대한 미담을 수록하였다.
일연(一然)스님은 속성이 김씨이며 경산시 출신이다.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현풍 비슬산 보당암(寶幢庵), 무주암(無住庵), 묘문암(妙門庵), 남해(南海) 정림사(定林社)에 머물렀으며,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1277년 충렬왕 왕명에 따라 운문사(雲門寺)에 머물면서 삼국유사의 집필에 착수했다.
1283년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284년 인각사(麟角寺)에서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열었고, 1289년 7월 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입적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調信)스님 이야기는 인생은 한바탕 꿈이라는 줄거리다. 이 이야기는 이광수가 쓴 <꿈>이란 소설과 닮았고, 당나라 이공좌(李公佐)가 쓴 <남가일몽> 고사와 닮았다. 헤르만 헤세가 쓴 <인도의 이력서>란 단편과도 비슷하다.
옛날 신라의 서울이 서라벌에 있을 때, 지금 경기도에 세달사(世達寺)란 큰 절이 있고, 이 절의 장원(莊園)이 강원도 영월 근처에 있었다.
본사인 세달사 장원관리인으로 조신스님이 있었는데, 스님은 그 곳에 사는 김흔공(金昕公)의 딸에게 깊이 반하였다. 그래서 여러번 낙산사 관음보살상 앞에 나아가서 그 여자와 인연이 맺어지기를 몰래 빌었는데, 얼마 후 그 여자에게 이미 배필이 생긴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조신스님은 불당에 가서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 지쳐서, 옷을 입은 채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꿈에 문득 김씨 낭자가 기쁜 얼굴로 찾아와 반가이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일찍이 스님을 잠깐 보고 속으로 사랑하여 잠시도 잊지 못했는데, 부모의 명령에 못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스님과 부부의 연을 맺고싶어 찾아왔습니다.'
조신은 매우 기뻐, 함께 향리로 돌아가 그로부터 40년을 살았다.
그동안 자녀 다섯을 두었으나, 집이 가난해서 조식조차 대지 못하자 초야를 돌아다니면 걸식을 하기 시작했는데, 갈가리 찢어진 옷은 몸뚱이를 가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나다가 열다섯 살 된 큰아이가 굶어죽자, 부부는 통곡을 하면서 길가에 묻어주었다. 부부가 우곡현(羽曲縣)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는, 늙고 병들고 굶주려서 일어나지도 못할 처지였다.
그들은 길가 모옥에 살았는데, 열 살 된 딸아이가 부모 대신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마을 개에 물려 아품을 호소하며 돌아와 눕자, 부부는 흐느끼며 목이 메어 말도 못했다.
이리되니 부인은 눈물을 훔치면서 창졸히 말했다.
'제가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의복도 깨끗했습니다. 그 때는 한가지 음식도 당신과 나눠먹으며 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병은 해마다 깊어지고, 굶주림과 추위는 더욱 닥쳐오니, 곁방살이와 보잘 것 없는 음식도 얻기가 어렵습니다. 천문만호(千門萬戶)에 걸식하는 그 부끄러움은 산더미를 진 것보다 더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미쳐 돌보지 못하는데, 어느 틈에 부부의 정을 즐길 수 있겠습니까? 혈색 좋던 얼굴과 어여쁜 웃음도 풀 위의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고, 지란같은 백년가약도 버들강아지가 바람에 날아가듯 없어졌습니다.
이제 당신은 저 때문에 괴로움을 받고, 저는 당신 때문에 근심만 느니, 곰곰히 생각해보면, 옛날의 기쁨이 바로 지금 우환의 터전이었습니다.
당신과 제가 어찌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요? 역경을 당하면 버리고, 순경(順境)을 만나면 친하는 것은 차마 인정상 못 할 일이지만, 모두가 인력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명이니, 제발 이제는 헤어집시다.'
조신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각각 아이를 둘 씩 맡아 막 떠나려 하는데, 여인이 말했다.
'저는 고향으로 가겠습니다.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부부가 헤어져 길을 떠나려 할 때 조신은 그만 꿈을 깨었다. 이때 등잔불은 법당에 깜박거리고, 어느 틈에 날이 밝으려 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니 조신의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희어지고 전혀 세상사에 뜻이 없어져, 한평생 신고(辛苦)를 겪은 것처럼 탐염의 마음도 얼음 녹듯 깨끗이 없어져 버렸다.
조신이 큰아이를 묻었던 해현령에 가서 그 자리를 파 보니, 거기에서 돌부처가 나왔다.
이에 크게 깨우친 조신은 돌부처를 물에 씻어 부근의 절에 모시고 본사에 돌아가, 장원의 소임을 그만두고 사재를 털어 정토사(淨土寺)란 절을 세우고, 착한 일을 근실히 닦았다.
구름 낀 숲에 사는 한 선비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지금으로부터 4백 년 전 일이다. 용모와 춤솜씨 두루 갖춘 개성의 황진이가 어느 날 밤, 가야금을 들고 한 선비를 유혹하러 갔다. 그런데 선비가 그를 거절하자, 황진이는 꽃 피는 봄에 다시 찾아갔으나, 선비는 그를 제자로 거두었을 뿐,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에 황진이는 '내가 삼십 년 면벽적공(面壁積功)한 지족선사도 농락하였지만, 이 분은 끄떡도 하지 않으니, 이 분이야말로 참된 성인이시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과 박연폭포와 서화담을 '송도 삼절'이라고 선언했다.
황진이
서경덕은 1489년 성종 20년에 개성 화정리(禾井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가구(可久), 호(號)는 화담(花譚), 시호는 문강공(文康公)이다. 31세 때 과거에 붙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43세 때 어머니 명령으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그냥 돌아왔다. 56세 때 후릉참봉(厚陵參奉)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했고, 평생 포의(布衣)로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키며 살다가 58세에 세상을 떠났다. 임종 전 화담에서 목욕을 하였는데, 이 때 제자가 '지금 심경이 어떠하십니까? 묻자,'삶과 죽음의 이치를 안지 이미 오래라 심경이 편안하기만 하다.'고 대답했다.
제자로는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 경상도 관찰사 허엽(許曄), '토정비결' 저자 이지함 등 쟁쟁한 인물이 있다.
강세황이 그린 화담의 모습
술회(述懷)
讀書當日 志經論 책 읽던 그 옛날엔 세상 다스리는 일에 뜻을 두었건만,
歲暮還甘 顔氏貧 늙자 안회(顔回)와 같이 가난함을 달갑게 여기며 사네.
富貴有爭 難下手 부귀는 다툼이 있게 마련이니 손 대기 어렵고,
林泉無禁 可安身 숲과 샘물은 금하는 이 없으니 몸 편히 있네.
採山有水 堪充腹 산에서 약 캐고 물에서 낚시질하여 배를 채우고,
詠月吟風 足暢神 달을 노래하고 바람을 읊으니 정신이 맑아지네.
學至不疑 眞快活 공부는 의심 없는 데 이르러 참으로 쾌활하니,
免敎虛作 百年人 헛되이 백년 사는 사람 면하였네.
산거(山居)
화담의 한 바위 아래 내가 사는 것은, 성품이 느슨하고 좁은 때문이네.
숲에 앉아 새들을 벗 삼고, 냇가 거닐며 물고기 벗 하네.
한가하면 꽃잎 지는 언덕길에 비질 하고, 때로 호미 메고 약초 캐러 가네.
이 밖에 일이 없으니, 차 한 잔 들고는 옛 책을 열람하네.
화담에 있는 한 칸 초옥은 깨끗하기 신선이 사는 집 같네.
창문 열면 산빛 닥아오고, 샘물 소리는 베갯머리에 들리네.
골짜기는 깊고, 바람은 살랑이며, 경계가 외로워 나무만 우거졌네.
그 속을 거니는 자 있으니, 날 맑은 아침 책 읽기 또한 좋네.
읊어 봄(偶吟)
조각달이 서쪽으로 진 뒤 낡은 거문고 뜯다 문득 쉬나니,
밝음과 소란스러움 어두움과 고요함으로 바뀌일 때,
이런 때의 묘한 맛은 어떠한가?
비 갠 뒤 산을 보며(雨後看山)
텅 빈 누각에서 자다가 문득 발을 걷어보니, 비 지난 산빛은 더욱 짙어졌네.
보며는 화공도 그려내지 못할 저 경치, 높은 봉우리 구름 걷히니, 푸른 꼭대기 들어나네.
영통사(靈通寺)에서
시냇가 길은 푸른 숲으로 들어가고, 숲속 선방(禪房)은 낮에도 그늘졌네.
돌에 부딪치는 물소리 수천 곡 거문고소리, 하늘 의지하고 솟은 산 만 겹.
아침 나절부터 밤까지 맑은 경관 변치않으나, 지금 흥취 후인에게 잇기 어려우리. 몇 판 한가히 바둑 두며 웃고 이야기 하는 사이에, 구름 속 해가 서산에 지는 줄 몰랐네.
바람결 따라 서서히 숲 헤치고 들어가니, 탑 그림자는 마당에 누워있고 저녁 어둠 내리네. 절은 낡아 건물이 더욱 축축하고, 산은 예부터 풍우에 씻겨 계곡만 더욱 깊어있네. 천 년도 못되어 옛 모습 찾기 어려우니, 억 년 후에 뉘라서 알아보리? 어떤 손이 만물 밖에서 노니는데, 스스로 천지의 부침(浮沈)과 함께 하네.
유수(留守) 이찬(李澯)을 술자리에 모시고
술통 기울이어 옛 친구 위해 따르니, 한가을 달빛 아래 함께 잔 기울이네.
시냇가 국화와 바위 틈의 단풍 지금 한창이니, 좋은 날 또 만나길 기약하네.
의인당(醫人堂)에서
우연히 자그마한 크기의 언덕을 구하여 손수 꽃과 나무를 심고 보니, 집이 그윽한 운치가 있네.
먼지 같은 세상일에 분주하여 사람들은 모두 취해있는데, 의인당 주인만은 신선처럼 만상(萬象) 밖에서 취하지 않았구려.
때때로 술잔을 들면 산에 걸린 달빛이 찾아주고, 거문고 들고 한가히 바라보면 들판에 구름이 떠 있네.
스스로 자유로운 삶의 즐거움 알고 있으니, 세속의 흥망과 비애 같은 건 알 바 아니네.
황진이와 오고 간 시조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오.
(황진이)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이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귄가 하노라.
(서경덕)
화담선생 임종 글
만물은 어디에서 왔다가 또 어디로 가는지, 음양이 모였다 헤어졌다 하는 이치는 알듯 모를듯 오묘하다.구름이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깨우쳤는지 못 깨우쳤는지, 만물의 이치를 보면 달이 차고 기우는 것 같다.시작에서 끝으로 돌아가는 것이니, 항아리 치며 노래한 뜻(*莊子는 아내가 죽었을 때 항아리를 치고 노래하였다)을 알겠으니, 인생이 약상(弱喪不歸, 莊子 齊物篇에 나오는 말. 집을 나가 돌아갈 줄 모르는 마음) 같다는 것을 아는 이 얼마나 되는가? 제 집으로 돌아가듯 본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일지니.
눈 속에 소를 타고 친구 찾아가며
율곡(栗谷) 이이(李珥)
율곡 이이는 어떤 분인가.?
'퇴율(退栗)'이라 하여 이퇴계와 함께 조선 최고 성리학자요, 임진왜란 전에 양병십만론(養兵十萬論)을 미리 주창하신 선각자요, <격몽요결>, <성학집요>, <성리설> 같은 저술을 남긴 분이요, 요즘 국방장관 내무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 호조판서를 지낸 분이고, 모친은 사임당 신씨요, 부친은 사헌부 감찰, 조부는 좌참찬을 지낸 본가 외가 두루 양반 집안이라고 소개하고, 향년 49세라 하면 대충 설명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수박 겉핧기라는 것 이다. 수박 맛은 한 입이라도 먹어봐야 안다. 그의 시(詩)를 소개한다.
율곡 이이
눈 속에 소를 타고 친구를 찾아가며
올해도 다 저물고 눈이 산에 가득한데 / 歲云暮矣雪滿山
들길은 가늘게 교목 사이로 갈렸구나 / 野逕細分喬林閒
소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 가느냐 / 騎牛聳肩向何之
내 우계에 있는 미인이 그립다네 / 我懷美人牛溪灣
사립짝 가만히 두드려 맑은 얼굴에 인사하니 / 柴扉晩扣揖淸臞
작은 방은 갈포 걸치고 짚방석 깔고 있네 / 小室擁褐依蒲團
고요한 긴 밤을 잠 안 자고 앉았으니 / 寥寥永夜坐無寐
벽에 걸린 등불만 깜박거리네 / 半壁靑熒燈影殘
반평생에 이별의 슬픔 많았으니 / 因悲半生別離足
다시금 천산 험한 길 생각케 되네 / 更念千山行路難
이야기 끝에 뒤척이다 새벽닭 울어 / 談餘輾轉曉鷄鳴
눈 들어 보니 창문엔 서리 달 차갑구나 / 擧目滿窓霜月寒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 이 곡은 은거했던 해주 석담(石潭)의 구곡(九曲)을 노래한 것이다.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 / 高山九曲潭
세상사람들 모르더니 / 世人未曾知
내가 와 터를 닦고 집을 짓고 사니 / 誅茅來卜居
벗들이 모두 모여드네 / 朋友皆會之
무이산을 여기서 상상하고 / 武夷仍想像
소원은 주자를 배우는 것일세 / 所願學朱子
일곡은 어디인가 / 一曲何處是
관암에 해가 비쳤도다 / 冠巖日色照
펀펀한 들판에 안개 걷힌 뒤에 / 平蕪煙斂後
먼 산이 참으로 그림 같구나 / 遠山眞如畫
소나무 사이에 술 항아리 놓고 / 松閒置綠樽
벗 오기를 우두커니 기다리네 / 延佇友人來
이곡은 어디인가 / 二曲何處是
화암에 봄 경치 늦었구나 / 花巖春景晩
푸른 물결에 산꽃을 띄워 / 碧波泛山花
들판 밖으로 흘려 보내노라 / 野外流出去
이 경치 좋은 곳을 사람들이 모르니 / 勝地人不知
알게 하여 찾아오게 한들 어떠리 / 使人知如何
삼곡은 어디인가 / 三曲何處是
취병에 잎이 벌써 퍼졌도다 / 翠屛葉已敷
푸른 나무에 산새가 있어 / 綠樹有山鳥
그 울음소리 높고 낮구나 / 上下其音時
반송에 맑은 바람 불어오니 / 盤松受淸風
여름 더운 줄 조금도 모를레라 / 頓無夏炎熱
사곡은 어디인가 / 四曲何處是
솔 벼랑에 해가 넘어가는구나 / 松崖日西沈
못 가운데 바위 그림자가 거꾸로 서니 / 潭心巖影倒
온갖 빛이 모두 잠겼구나 / 色色皆蘸之
숲속의 샘물 깊을수록 더욱 좋으니 / 林泉深更好
그윽한 흥을 스스로 이기기 어려워라 / 幽興自難勝
오곡은 어디인가 / 五曲何處是
은병이 가장 보기 좋구나 / 隱屛最好看
물가에는 정사가 있어 / 水邊精舍在
맑고 깨끗하기 한량없네 / 瀟灑意無極
그 가운데서 늘 학문을 강론하며 / 箇中常講學
달도 읊어보고 또 바람도 읊조리네 / 詠月且吟風
육곡은 어디인가 / 六曲何處是
조계의 물가가 넓구나 / 釣溪水邊闊
모르겠다 사람과 물고기 중에 / 不知人與魚
그 즐거움 어느 쪽이 더 많을지 / 其樂孰爲多
황혼에 낚싯대 메고 / 黃昏荷竹竿
무심히 달빛 받으면서 돌아오네 / 聊且帶月歸
칠곡은 어디인가 / 七曲何處是
단풍 바위에 가을빛 선명하구나 / 楓巖秋色鮮
맑은 서리가 살짝 내리니 / 淸霜薄言打
절벽이 참 비단 수를 놓았구나 / 絶壁眞錦繡
홀로 찬 바위에 앉았을 때에 / 寒巖獨坐時
무심히 집 생각까지 잊는구나 / 聊亦且忘家
팔곡은 어디인가 / 八曲何處是
금탄에 달이 밝구나 / 琴灘月正明
옥 거문고 금 거문고로 / 玉軫與金徽
무심히 두서너 곡조 타는데 / 聊奏數三曲
옛 곡조 알아들을 사람 없으니 / 古調無知者
혼자서 즐긴들 어떠하리 / 何妨獨自樂
구곡은 어디인가 / 九曲何處是
문산에 한 해가 저무는구나 / 文山歲暮時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이 / 奇巖與怪石
눈 속에 묻혀 버렸구나 / 雪裏埋其形
구경꾼이 스스로 오지않고 / 遊人自不來
공연히 좋은 경치 없다 하네 / 漫謂無佳景
山中(산중에서)
採藥忽迷路 (약초 캐다 그만 길을 잃었네.)
千峯秋葉裏 (천 봉우리가 가을 낙엽인데)
山僧汲水歸 (산승이 물 길어 돌아가더니)
林末茶烟起 (나무 끝에 차 다리는 연기 피어오른다.)
이율곡(李栗谷, 1536~1584년)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이끈 대표 인물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와 함께 파주 율곡촌으로 이사갔을 때 '화석정(花石亭)'이란 시를 썼다.
花石亭
林 亭 秋 已 晚 (숲속 정자에 가을은 이미 깊은데)
騷 客 意 無 窮 (소란한 시인의 마음 끝이 없다)
遠 水 連 天 碧 (저멀리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 楓 向 日 紅 (서리 맞은 단풍 해를 향해 붉구나)
山 吐 孤 輪 月 (산은 외로운 바퀴 달을 토해내고)
江 含 萬 里 風 (강은 만리에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 鴻 何 處 去 (변방의 기러기 어디로 날아가는가)
聲 斷 暮 雲 中 (소리가 끊긴 곳 저녁구름 속이네)
열살 때 강릉 경포대의 경치를 묘사한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다. 워낙 이 문장이 조숙하여 열살 아이 글이란 사실을 믿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나 율곡이 13세 때 장원급제한 것을 보면 수긍이 간다. 당시는 서른에 과거 급제 못한 사람 있었으니, 아마 신사임당은 율곡에게 조기 천재교육을 시킨 것 같다.
경포대부(鏡浦臺賦)
한 기운의 조화가 뭉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니, 그 신비함을 우리나라에 벌여놓아, 맑은 기운이 강원도에 모였다, 물결은 바다에 나뉘고 차가운 거울처럼 투명한데, 왼편 다리를 신선이 산다는 봉래섬에 두고, 두어 점 푸른 봉우리 나열한 여기에 한 누각 경포대가 호수에 임하여 마치 발돋움하여 날아갈 듯하다.
다리를 건너면 무지개는 물 속에 박힌 것처럼 보이고, 궁궐이 구름결에 솟으니, 흡사 신기루가 허공에 뜬 것 같다. 봄철에는 동군(東君, 봄을 맡은 神)이 조화를 부리어, 꽃과 풀이 빼어남을 경쟁하고, 버들 언덕은 연기가 노래하는 꾀꼬리 집을 덮고, 도원(桃源)의 꽃 이슬이 날아가는 나비 날개를 적시네. 아지랑이 피고 먼 봉우리가 아득한데, 향기로운 비가 어부(漁父)의 집에 뿌리고, 비단 물결이 모래톱에 일렁인다.
이에 거문고를 뜯으며 옷을 벗으면, 기수(沂水)에서 목욕한 증점(曾點, 공자의 제자)의 즐거움 방불케 하고, 바람에 임하여 술잔을 들면, 세상을 근심한 범희문(范希文, 송나라의 재상)의 심정을 상상하게 하네.
가을철에는 금신(金神, 가을을 맡은 신)이 위세를 떨쳐 온 땅이 처량해지면, 기러기가 전자(篆字)처럼 줄지어 날고, 맑은 서리가 나뭇잎을 붉게 물들였네. 여뀌 붉은 언덕 백로는 출몰하는 물고기 노리고, 마름 하얀 섬 백구는 오가는 낚싯배 놀래인다.
창문엔 어부의 피리소리 들려오고, 드높은 하늘 아득하고 흰 달은 휘영청 밝네. 이에 장한(張翰, 동진 때 시인)의 고향 오나라 옥생선과 은미나리의 맛에 배부르고, 소선(蘇仙, 소동파)의 적벽(赤壁)을 상상하며 명월(明月)의 노래와 요조(窈窕)의 시를 외우네.
금계(金鷄, 천상의 닭)가 울어 새벽 알리면, 부상(扶桑, 산해경에 나오는 동쪽 바다 속의 나무) 만 이랑의 붉은 물결을 잡을 듯하고, 옥토(玉兎, 달의 별칭)가 어둠 속에 솟아오르면 용궁(龍宮) 천 층의 흰 탑을 엿보는듯, 사방을 두루 바라보니, 신선이 된 것 같구나. 뿌연 모래를 밟으며 산보하기도 하고, 백조를 벗 삼아 졸기도 하네.
'아! 명예의 굴레가 사람을 얽어매고, 이욕(利欲)의 그물이 세상을 덮어씌우는데, 그 누가 속세를 초월하여 한가로움을 즐길건가?'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만약 몸에 덕을 쌓아 남들이 그 혜택을 입게 되어, 군민(君民)이 충혜(忠惠)를 바치고 덕업(德業)을 죽백(竹帛, 역사)에 남기었다면, 용을 부여잡고 봉에 붙어서 사후의 명예를 이룩했을 거네. 뜻을 게을리 하고 자신을 잊어가며 눈앞의 즐거움일랑 따르지 마시기를!'
그러자 한 나그네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죽고 사는 것도 분별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오래고 빠른 것을 논하겠는가? 장주(莊周)는 내가 아니고 나비는 실물이 아니니, 생각컨대 꿈도 없고 진실도 없네. 이는 보통 사람이라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성인(聖人)이라 해서 있는 것도 아니거늘, 마침내 누가 득이고 누가 실이겠는가?
마음을 텅 비워 사물에 응하고 일에 부딪치는 대로 합당하게 하면, 정신이 이지러지지 않아 안(內)이 지켜질 터인데, 뜻이 어찌 흔들어 밖으로 달리겠는가?
달(達)하여도 기뻐하지 않고, 궁(窮)하여도 슬퍼하지 않아야 출세와 은거의 도를 완전히 할 수 있으며, 위로도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도 부끄럽지 않아야 하늘과 사람의 꾸지람을 면할 수 있다네.
융중(隆中)의 와룡(臥龍, 제갈공명)은 문달(聞達)을 구한 선비가 아니었으며, 위천(渭川)의 어부(漁父, 태공망)는 어찌 세상을 잊어버린 사람이었겠는가?
아! 인생은 바람 앞 등불처럼 짧은 백년이고, 신체는 넓은 바다의 한 알 좁쌀이라네. 여름 벌레가 겨울에 얼음이 있음을 의심하는 것 가소롭고, 달인(達人)도 때로는 고독한 환경에 놓일 때가 있음을 생각하네. 풍경을 찾아서 천지를 집으로 삼을 것이지, 하필이면 중선(仲宣, 삼국시대 魏나라 시인)이 부질없이 형주(刑州)에서 고국을 그리워함만 본받으랴?'
율곡은 13세 때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인 소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 했다. 16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1년간 불학(佛學)을 연구하였고, 20세 때 보응(普應) 스님으로부터 의암이라는 불명을 받았다.
그 당시 스스로 경종을 울린다는 뜻의 '자경문(自警文)'을 썼다.
자경문(自警文)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정력(定力)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잡념이 분잡하게 일어날 때에 의식적으로 그것을 싫어해서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분잡해지는 것이 마치 나로 말미암치 않는 것 같다.
가사 잡념을 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 ´끊어야겠다는 마음´은 내 가슴에 가로질러 있으니, 이것 또한 망녕된 잡념이다. 분잡한 생각들이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정신을 수렴하여 집착없이 그것을 살필 일이지, 그 생각에 집착해서는 않된다. 그렇게 오래도록 공부해나가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안정되는 때가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심(定心) 공부이다.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유념하여 게을리함이 없다면, 일체의 나쁜 생각들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논어의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 있다.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서도 안 된다.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십분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던 일어나 걸어다녀서 마음을 깨어있게 해야한다.'
율곡은 22세(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23세 때 예안(禮安)에 낙향해 있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둘은 35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성리학에 대한 열정과 공감대 때문에 만나자마자 상통했다. 당시 율곡이 불교에 입문했던 것을 사람들이 두고두고 입에 담고 비난하던 때였고, 퇴계는 58세로 사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퇴계를 찾아가 도를 묻고 문답을 주고받은 후, 퇴계가 율곡을 동학(同學)으로 인정하자, 사림에서 율곡에 대한 이단 시비가 수그러졌다.
율곡이 돌아간 뒤 퇴계는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평했다.
'일전에 서울에 사는 선비 이이가 성산으로부터 나를 찾아왔었네. 비 때문에 사흘을 머물고 떠났는데, 그 사람이 밝고 쾌활하며 지식과 견문도 많고, 또 우리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생이 가히 두렵다(後生可畏)'는 옛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 장원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ㆍ복시(覆試)ㆍ전시(殿試)에 모두 장원 합격했다.
그 뒤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 등 아홉 차례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34세 때 정철(鄭澈)과 함께 임금의 도리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에 대해서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1575년 40세 때 선조의 왕명으로 제왕학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임금의 도를 상술함)>를 저술했다.
1576년(선조 9) 동인과 서인의 대립·갈등이 심화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1577년 해주에서 어린이 교육을 위해, '무지몽매함을 깨뜨리는 중요한 비결’이란 뜻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편찬했다. 독서궁리(讀書窮理,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일), 입신칙궁(立身飭躬, 스스로 조심하여 행실을 바르게 가짐), 봉친접물(奉親接物,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고 사물에 접하는 일) 등이 그 내용이다.
1578년 해주 석담 청계당 동쪽 수양산(首陽山) 밑 고산(高山)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창건하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1580년에는 기자(箕子)의 사적을 정리한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저술했다.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그해 음력 2월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時務)에 관한 6조계(六條啓)를 진술(陳述)했다.
그 내용은,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고,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고.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고,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고,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하고, 마지막 여섯째 교화(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당시 도승지(都承旨) 유성룡(柳成龍)에게 '내금위(內禁衛)의 이순신(李舜臣)이 장차 삼한(三韓)을 구제할 인물이니 후일 기회가 있으면 조정에 천거하여 등용하라'고 소개하였다
3월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을 주장하였으나 좌절되었다.
당시 일본에 사찰단 2명을 파견했는데, 한명은 동인이고 한명은 서인이다.둘은 돌아오자 의견이 달랐다. 김성일은 일본은 걱정할것이 안된다. 서인은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이에 이율곡은 도성에 2만, 8도에 각각의 1만의 병력을 주둔하자는 십만 병사를 양성하자는 안을 선조께 건의했으나, 유성룡이 '변방방위책 5개조’를 내놓고, '10만양병설'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10만양병의 주목적은 남으로는 왜를 막고 북으로는 여진을 비롯한 오랑캐를 막아야 하는데, 남쪽 수군에 대한 언급이 없고, 이동에 따른 교통이 열악하며, 또한 당시 조선의 열악한 재정상항과 농사일을 들며, 무사한 때에 군사를 양성함은 화를 기르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선조는 유성룡의 의견을 채택했다.
1583년 6월에 사임하고 율곡으로 돌아갔다.
1584년 49세 정월(正月) 한양 대사동(大寺洞)에서 서거하였다. 이때 집안에는 부싯돌 한 개가 유산으로 남아 있었으며, 소식을 들은 임금은 사흘 동안이나 슬피 울었다 한다.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퇴계(退溪) 이황(李滉)
퇴계 이황
동방 유학의 성사(聖師)라고 불리는 이황(李滉, 1502-1571)의 호는 퇴계(退溪), 퇴도(退陶), 도수(陶叟), 청량산인(淸凉山人)다. 제자는 동인 당수였던 김효원과 유성룡, 김성일이 있다. <주자서절요>, <사단칠정분리기서>, <성학십도>, <자성록>, <퇴계집>이 남아있고 <도산십이곡> 시도 남겼다.
그가 기대승(奇大升)이라는 학자와 전개한 사단칠정(四端七情)의 학설,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發)한 것이요, 칠정(七情)을 기(氣)가 발(發)한 것이다(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라는 이 12자의 결론은, 조선 성리학의 하이라이트다.
그의 시서(詩書)와 행적을 살펴본다.
행적을 보면, 김성일(金誠一)은,
'선생님의 거처 주위는 항상 정숙하게 정돈되어 있었으며, 책상은 반드시 밝고 깨끗했다. 도서가 가득 차 있었으나 언제나 흐트러진 책이 없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면 반드시 향을 피우고 정좌하셨고, 종일 책을 보아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는 일이 없으셨다.'
하였고, 이덕홍(李德弘)은,
'선생께서 전에 월란사(月瀾寺)에 계실 때 어떤 사람이 낙지를 보내오자, 이웃 노인들에게 나누어 보내고는 비로소 맛을 보셨다. 선생께서는 제사나 시향(時享)에는 아무리 춥고 더운 때라도 병 들어 눕지 않은 한 반드시 친히 가서 제물을 바쳤으며, 남에게 시키지 않으셨다. 또 선생은 새로운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종가(宗家)에 보내어 사당에 올리게 하셨다.'
고 말했다. 또 이안도(李安道)는,
'선생께서 풍기 군수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갈 때의 행장은 홀가분했으며, 책 몇 짐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집에 가자, 그 책을 담았던 나무 상자들을 관졸들에게 부쳐 도로 돌려주었다.'
하였다.
*이런 퇴계의 청렴한 군자의 기상은 그가 36세 때 쓴 <연말에 고향 편지를 받고>와 <봄철에> 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연말에 고향 편지를 받고
고향에서 보내 온 편지 열 장 남짓, 글자마다 넘치는 친구의 사연. 새벽에 일어나 펼쳐보며, 읽고 또 읽고 되풀이해 읽어본다.
고향 어른 평안타 함이 어찌 기쁘지 않으리요만, 이 곳 나의 심정은 더욱 우울해지네. 돌이켜보니, 내 어머님 곁을 떠나 객지에서 찬바람 부는 중양절(重陽節)을 몇번이나 보냈는가.
서울 와서 한 일 없이, 관리가 되어 공무에 쫒기는 몸, 어머님 병환 걱정할 틈도 없었네. 세월은 빨라 벌써 연말 그믐은 닥쳐오는데, 객지 베갯머리에 근심만 많고, 마음은 먼 고향으로 달리네.
돌이켜보면, 재주 없고 부끄럽기만 한 이내 몸, 나라에 보답도 못하거늘, 어찌 일찍이 맘 편하게 거두어 가난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고. 내 힘으로 농사 지어 어른께 올리고, 어머님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바로 내 분수에 맞거늘, 오래 망설이며 결단을 못하고는 뻔뻔하게 명리(名利) 덤불 속에서 헛되게 넋을 잃고 있는가.
술미치광이라도 되고싶으나 그 비결을 배울 수 없구나. 살림 군색하여 떨어진 옷도 전당 잡혀야 하고, 쌀독에는 약식이 떨어질 지경이니, 벼슬살이 열번이고 사직하고서, 고향에 가고픈 맘 끝이 없어라.
관록(官祿)엔 뜻이 멀고, 물질을 바라지 않지만, 아이들은 내 뜻을 어찌 알리요. 까닭없이 과일 달라고 졸라만 대네.
책상 앞에 벼루와 붓이 있어, 이렇게 읊조리며 써 보네.
*이 시는 선생의 부친 찬성공(贊成公)이 선생이 출생한지 일곱 달 만에 별세하여, 32세로 과수가 된 모친 박씨가 넉넉치 못한 살림 속에서 막내인 퇴계를 비롯하여 8남매를 어렵게 키운 점을 생각하면, 제대로 이해될 것이다.
봄철에
맑은 봄날 아침, 하릴없이 아무렇게나 옷을 걸치고 서헌(西軒)에 앉으니, 머슴은 뜰을 쓸고 적요하게 문을 도로 닫더라.
세초(細草)는 섬돌에 돋아나고, 아름다운 나무들 뜰에 찼어라. 살구꽃은 비에 떨어진듯, 복숭아꽃은 밤새 더욱 피어난듯. 붉은 벚꽃잎은 눈처럼 휘날리고, 흰 오얏꽃은 은빛 바다인양 출렁이며. 새들은 저마다 자랑하듯 새벽에 요란하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고 흐르니, 말 못할 가슴 속 회포여.3년 여 서울생활, 멍에 맨 망아지 신세, 덧없이 아침 저녁으로 나라에 부끄럽구나.
나의 고향 물 맑은 낙동강 기슭,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 이웃에서 봄 농사하면 닭과 개가 울타리를 지켜주네. 책이 놓인 청정한 책상머리 내다보이는 강과 들은 봄안개에 아롱거리며, 시냇가에는 물고기와 새들이 날고, 소나무 그늘에 학이 노닌다.
시골의 즐거움이여, 나도 귀거래사(歸去來辭) 읊으며 돌아가 조용히 술잔이나 들고져.
*퇴계는 27세에 향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28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했지만, 정작 과거에 급제한 것은 34세 였다. 그렇게 늦게 벼슬살이 들어가 16년간 몸 담았다가 50세에 퇴계라는 곳에 은퇴하였다. 그곳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독서와 사색에 잠기며 후진 양성을 하였는데, 명종은 그가 출사를 계속 거절하자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풍경을 그려오게 하여 완상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송인(宋寅)이란 사람을 시켜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은 병풍을 만들게 하여, 그걸 보며선생을 흠모했다고 한다.
한서암(寒棲庵)
맑은 시내 서쪽에 초막을 지었으니, 속객이 어찌 사립문 두드리고 찾아오리.
산 남쪽에 은퇴해 계신 노선백(老仙伯, 李賢輔를 말함)께서 만발한 꽃을 누비며 견여(肩輿) 타고 오시었네.
한서(寒棲)
띠풀 엮어 숲속에 초막 세우나니, 집 아래로는 차가운 샘물 넘치누나.
늦게 들어 살지만 족히 즐겁고, 사람 없이도 한 되지 않더라.
어부(漁夫)
산협(山峽)의 강에는 풍파가 일어 끝없이 차거운데, 일엽편주를 푸른 물굽이에 묶어, 생생한 고기를 잡아 서행객(西行客, 서울 가는 손님)에게 팔아넘기고, 웃으며 구름안개 자욱한 속으로 사라지더라.
소나무를 읊다(詠松)
돌 위에 자란 천년 묵은 불로송, 검푸른 비늘같이 쭈굴쭈굴한 껍질, 마치 날아 뛰는 용의 기세로다.
밑이 안 보이는 끝없는 절벽 위에 우뚝 자라난 소나무, 높은 하늘 쓸어낼 듯, 험준한 산봉을 찍어 누를 듯.
본성이 원래 울긋불긋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니, 도리(桃李) 제멋대로 아양떨게 내버려 두며, 뿌리 깊이 현무신(玄武神, 북쪽을 지키는 신)의 기골을 키웠으니, 한겨울 눈서리에도 아랑곳없이 지내노라.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도산십이곡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럿타 엇더하리.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肓)을 억지로 고쳐 무엇하리.
연하(烟霞)로 집을 삼고, 풍월(風月)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病)으로 늙어가니,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져.
순박한 풍조는 죽었다 하는 말은 진실로 거짓말이고, 인간 품성이 어질다 하는 말이 진실로 옳은 말이다. 천하에 허다한 영재(英才)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그윽한 난초는 골짜기에 있어(在谷) 자연히 냄새가 좋고, 백운(白雲)이 산에 있어(在山) 자연히 보기 좋구나. 이런 속에 저 한 분 임금님(彼 一美人)을 더욱 잊을 수 없구나.
산전(山前)에 낚시터 있고, 대하(臺下)에 물 이로다. 떼 많은 갈매기는 오명가명 하는데, 어찌하여 저 흰망아지(皎皎白駒)는 멀리 뛰어갈 생각하는가.
춘풍에 꽃이 산에 가득하고, 추야에 달빛이 누대에 가득하니, 사철의 아름다운 감흥 사람과 한가지구나. 하물며 고기 뛰고 솔개 날고(魚躍鳶飛) 구름 그림자 하늘 빛(雲影天光)이야 어디에 끝이 있을고.
천운대(天雲臺) 돌아들어 완락재(玩樂齋) 깨끗한데, 만 권 책 벗 삼은 생애 즐거운 일 무궁하여라. 이 중에 바깥 오가는 풍류 일러 무엇 하겠는가. 천둥소리 산을 무너뜨리어도 귀머거리는 듣지 못하며, 밝은 해가 하늘 높이 솟아도 장님은 못 보는 것이니, 우리는 귀와 눈 밝은(耳目聰明)자로 되어서 귀머거리 장님은 되지 말아야 한다.
고인(古人)도 날 못 보고, 나도 옛 성현을 뵙지 못하네. 그러나 옛 성현을 뵙지 못해도, 바른 길 우리 앞에 남아있다. 바른 길 앞에 있으니 행하지 않고 어이 할 것인가. 당시에 행하던 길 몇 해 씩 버려두고, 어디 가 다니다가 이제사 돌아왔는고. 이제라도 돌아왔으니, 딴 마음 두지 않으리.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하리라.
어리석은 사내(愚夫)도 알아서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聖人)도 다하지 못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간에 늙은 줄을 모르겠네.
*끝으로 퇴계 선생 하면, 홀로 단양군수로 부임하여 만났던 18세의 관기(官妓) 두향(杜香)이와의 사랑을 빼놓을 수 없다. 두향은 선생이 풍기군수로 떠나자 매화를 선물했고, 선생은 공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거쳐 69세에 고향 안동에 돌아와 임종할 때까지 그 매화를 곁에 두고 끔찍이 아꼈다. 임종시에는 '매화에 물을 주라'란 말을 남겼다. 두향은 남한강 가에 움막을 치고 평생 선생을 그리며 살다가, 부음을 접하자, 4일간 걸어서 안동을 방문하고 돌아와, 곡기를 끊고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선생은 91수의 매화시를 담은 매화시첩(梅花詩帖)을 남겼다. 그 중 두 편 소개한다.
其一
一樹庭梅雪滿枝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히 눈꽃 피니
風塵湖海夢差池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玉堂坐對春宵月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마주하니
鴻雁聲中有所思 기러기 슬피 울어 생각이 산란하네
其二
黃卷中間對聖賢 누렇게 바랜 옛 책 속에서 성현을 대하며
虛明一室坐超然 비어 있는 방안에 초연히 앉았노라
梅窓又見春消息 매화 핀 창가에서 봄소식 다시 보나니
莫向瑤琴嘆絶絃 거문고 보고 앉아 줄 끊겼다 한탄마라
단성현감 사직소(丹城縣監 辭職疏)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년, 소백산 아래 안동에서는 퇴계 이황이 태어났고, 지리산 아래 삼가(三嘉)에서는 남명(南冥) 조식(曺
植 1501∼1572년)이 태어났다. 두 분은 동갑내기다.
퇴계는 소백산의 정기를 받아 따뜻한 자모(慈母)와 같고, 남명은 지리산 정기를 받아 대쪽같은 엄부(嚴父)의
기풍을 지녔다. 실학자 이익은, ‘경상좌도의 퇴계는 성리학의 뿌리인 인(仁)을 세상에 펼쳤고, 경상우도의 남
명은 일상생활에서 의(義)를 실천했다’고 평했다. 사람들은 퇴계학파는 낙동강 좌편 강좌학파(江左學派), 남
명학파는 낙동강 우편 강우학파(江右學派)라 부른다.
남명은 '경(敬)으로써 내면을 밝혀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서 행동을 결단하여 모든 사물을 처리해 나간
다‘는 생활철학 이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 실천궁행(實踐躬行), 즉 '몸소 갈고 닦은 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
긴다,'는 실천을 강조했으며, 음양(陰陽), 지리(地理), 의학(醫學), 관방(關防) 등 현실에 활용되는 것을 추구
한 실용주의(pragmatism)였다.
퇴계는 예순 넘도록 벼슬 나아감과 물러남을 반복하며 사직서를 79번 썼지만, 남명은 수차례 조정의 벼슬 제
의를 모두 거절했다. 퇴계가 임종 시, 영정에 벼슬 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쓰라는 말을 듣자, 남명은 '할
벼슬 모두 다하고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處士)야 말로 나 뿐이야' 라고 말하였다.
조식의 자(字)는 건중(楗仲)이요, 호(號)는 남명(南冥), 산해(山海),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 불렀다.
연산군 7년(1501) 합천군 삼가면 토동(三嘉面 兎洞)에서, 삼남 오녀 중 이남(二男)으로 태어났다. 본가는 삼
가 판현(三嘉 板峴)에 있었고, 토동(兎洞)은 선생의 외가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선생은 아버지가 장원급제 하자 서울로 이사했다. 아버지 조언형(曺彦亨)은 문
과에 올라 벼슬은 승문원(承文院) 최고 우두머리인 정3품 판교(判校)를 지냈다.
1519년(19세, 己卯) 기묘사화가 일어나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었다.
남명은 20세에 생원, 진사 양과(生員 進士 兩科)에 일, 이등으로 급제했고, 고문(古文)에 능하여 시관(試官)
을 놀라게 하였다.
2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고향인 삼가(三嘉)에 장사지내고, 3년 려묘생활(廬墓生活)을 하면서 가난
과 민생의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체험했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에 이사하여 거기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갔다.
38세에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고사하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고, 집 근처의 계복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44년 벼슬길에 나가라는 퇴계의 권고를 거절하였다.
1545년 인종 즉위 후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고, 명종 즉위 후 여러 번 불렀으나 사직상소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48세 때 18 년간 살던 김해를 떠나 고향인 토동에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후진을 가르치면서, 처사(處士) 언론(言論)으로 국정을 비판하였다.
뇌룡(雷龍)이란, 장자의 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뢰처럼 소리치고, 죽은 듯이 가만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계부당(鷄伏堂)의 뜻은 닭이 알을 품는다는 뜻이다.
호(號) 남명(南冥) 역시, 장자의 소요유편(逍遙遊篇)에 나오는 남쪽의 큰 바다를 의미한다.
사림(士林)은 그를 영수(領首)로 추앙하기 시작했고, 조정은 그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벼슬길로 나오도록 했으나, 항시 사퇴했다.
55세 때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유명한 단성현감 사직소(丹城縣監 辭職疏)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요즘은 장관 자리 하나 얻어도 너나 없이 대통령 눈치만 보다가 쫒겨나는 세태인데, 여기 남명이 단성(丹城) 현감
을 사직하면서 당시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은 너무나 담대하다. 조선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파천황(破天荒)
의 상소문은 왕과 대비를 진노케하고, 조정 중신들을 놀라게 하고, 사림(士林)이 겁에 질려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이 상소문을 받자, 왕은 남명이 초야에 묻힌 선비라는 구차한 말로 변명하면서 감히 남명을 처벌하지 못했다고 한
다.
남명선생
단성현감 사직소(丹城縣監 辭職疏)
선무랑(宣務郞)으로 새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 조아려 주상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데, 돌아가신 임금님(중종)께서 신이 보잘것 없는 줄 알지 못하시고, 처음에 신을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명종)께서 왕위를 계승하셔서 신을 주부(主簿)에 제수한 것이 두번이고, 이번에 또 현감에 제수하시니, 신은 떨리고 두려워 미쳐 큰 산을 짊어진 것 같아, 감히 인재등용에 정성을 쏟고 계시는 임금님 앞에 나아가 하늘의 해와 같은 그 은혜에 감사드릴 수 없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데,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대목이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 큰 골
짜기에 버려지는 재목이 없도록 좋은 재목을 다 구해다가 훌륭한 집을 이루는 것은 대목에게 달렸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일은 아닙니다.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두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신은 나이가 예순에 가깝고 또 학문이 엉성하면서도 어둡습니다. 신은 문장은 전날에 과거의 끝자
리에도 끼지 못했고, 신의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조그마한 절개나 지키는 선량한 사람에 불과할 뿐, 크게 나라를 위해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인재가 아닙니
다.
신이 과거를 통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신을 대단하게 보실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신이 보잘
것 없는 명예를 도둑질해서 관리의 눈을 속였고, 관리는 저의 이름을 잘못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꼭 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또한 도가 있는 사람은 신처럼 이렇치 않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승도 또한 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됨도 모르면서 저를 등용한
다면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될 것이니, 그 죄가 어찌 이 보잘것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이 한 몸을 저버릴 수는 있어도 전하를 져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
려워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두번째 이유를 말씀 드립니다.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
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비유컨대, 큰 고목나무가 100년 동안 벌레에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가 닥쳐와 쓰러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 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들 치고 충성스런 뜻을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는 이도
있지만, 나라의 형세가 아주 위태로워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
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있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윗자리에서 빈둥빈둥 거리며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뭉크러져 온 나라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
다. 내직의 벼슬아치들은 자기들의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려 들기를, 마치 온 연못 속을 용이 독차지하
고 있듯이 합니다.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 벗겨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뛰는것 같이 하고 있
습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없어지고 나면 털이 붙어있을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백성을 가죽에 비유한다
면 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이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이 탄식하고
밤이면 천장을 바라보고 답답해하며 흐느끼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실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
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하늘의 재앙은 이미 그 징조를 보였습니다. 백성들의 울음소리는 구슬퍼 상복을 입은 듯하니,
민심이 흩어진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절에는 비록 주공같은 분의 재주를 겸하여 가진 사람이 대
신의 자리에 있다 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풀잎이나 지푸라기처럼 보잘것 없는 신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위로는 만에 하나라도 나라의 위태로운 사태를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으니 전하의 신하되기는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그마한 헛된 이름을 팔아서 전하께 벼슬을 얻
는다 해도, 그 녹을 먹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 점이 신이 벼슬하
러 나가기 어려워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또 신이 요사이 보니, 변경에 일이 있어(*전라도 일대 왜구의 침략) 여러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 때 밥도 못먹
을 정도로 바쁜 모양입니다만, 신은 놀라지 않습니다. 이 일이 벌써 20년전에 일어날 일인데도 전하의 신성한
힘 때문에 지금 비로소 발발한 것이지, 하루아침에 갑자기 발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조정에서는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장수 가
운데 자격을 갖춘 자가 없고, 성에는 수성할 군졸이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찌 이
상한 일이겠습니까?
이번 사변도 대마도 놈들이 몰래 결탁하여 앞잡이가 되었으니, 만고에 씻지 못할 큰 치욕입니다. 전하께서 영
묘함을 떨치시지 못하고서 머리를 재빨리 숙였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대해서 신하로 복종하던 대마도
왜놈들을 대접하는 의례가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대접하는 의례보다 더 융숭하였습니다. 윈수인 오랑캐를
사랑하는 은혜는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한술 더 뜨십니다.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대왕 때 북쪽
오랑캐 정벌하던 일과 비교하여 오늘날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겉으로 드러난 병에 불과하지, 가슴속이나 뱃속의 병은 아닙니다. 가슴 속이나 뱃속 병은
덩어리지고 막혀서 아래 위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랏일을 맡은 공경대부들이 이 문제점을 해결해보려
고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백성들 가운데 수레가
있는 이들은 수레를 타고 피난 가고, 수레가 없는 이들은 달려서 피난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군사를 불러 모아 전하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나랏일을 정리하는 것은 자질구
레한 형벌제도 따위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을 극진히 하면 그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있는바, 그 틀은 전하에게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에 종사하시는지요?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
까? 활쏘기나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 있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습니다. 만약 하루라도 능히 새로운 정신으
로 께달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으신다면,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에 얻으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만드는 일 안에 모든 착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모든 교화
도 거기로부터 나옵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거행한다면, 나라는 고루 잘 다스려질
것이고 백성을 화합하게 될 것이며, 나라의 위기도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일을 판단함에 거울처럼
맑고 거울처럼 공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질 것 입니다.
불교에서 이른바 '眞定(참된 경지의 선)'이라 하는 것도 단지 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위
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함에 있어서는 유교나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만, 일에 적용할 때 불교는 그 발 디딜 곳이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유가에서는 불교를 배우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고 계신데, 그 불교를 좋아하시는 마음을 학문에 옮기신다면, 공부하는 것이
우리 유가의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마치 어려서 집을 잃은 아이가 그 집을 다시 찾아 부모 친척 형제나 옛
친구 등을 만나보게 되는 것과 같을 것 입니다.
더욱이 정치는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전하 자신의 경험으로 인재를 선발해 쓰시고 도로써 몸을 닦으십시
오. 전하께서 사람을 취해 쓰실 때 솔선수범 하신다면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사직을 지킬만
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 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을 취해 쓰실 때 눈으로 본것만 가지고 하신다면, 곁에서 모시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하를 속이거나 져버릴 무리로 가득 찰 것 입니다. 그런 때가 되면 굳게 자기 지조라도 지키는 고견 좁은 신
하인들 어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정치를 잘하셔서 왕도정치의 경지에까지 이르신다면, 신은 그런 때에 가서 미천한 말
단직에 종사하며 심력을 다해서 직분에 충실하면 될 것이니, 어찌 임금님 섬길 날이 없기야 하겠습니
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 잡는것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탕을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서 인재를 취해 쓰는 근본을 삼으셔서,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게 못하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건데, 전하께 신의 상소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신은 두려워 어쩔 줄 몰라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나이다.
* 이 무렵 조정은 12세 어린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 섭정(攝政)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하
는 가운데, 왕후의 친정 동생인 윤형원(尹元衡)이 함부로 세도를 부려 세상이 그럴 수 없이 어지러웠다. 남명은 단
성소에서 문정왕후를 세상 물정 모르는 과부 또는 아녀자라 하고, 민암부(民巖賦)에서는 22세의 명종을 물 위의 배
에 비유하며 어린애(고아)에 불과하다고 했다.
민암부(民巖賦)
물이 배를 띄울 수도 뒤엎을 수도 있듯이, 백성도 임금을 추대할 수도 쫓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물을 떠나서는 배가 움직일 수 없듯이, 백성과의 관계를 떠난 임금은 존재할 수가 없다.
같은 물이라도 고요할 때가 있고 성낼 때가 있듯이, 백성들도 온순할 때가 있고 무서울 때가 있다. 그러므로 한 나라도 백성들에 의해서 세워지기도 하고 멸망되기도 한다.
국가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백성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게 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쪽으로 정치를 해나가는 것이 지배계급이 지켜야 할 대원칙이다.
배를 저어가는 사람은 물이 위험하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 조심하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백성의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소홀히 하여 업신여기게 된다.
임금이 이런 지경에 이러르면, 백성들은 그들의 손에 있는 대권(大權)을 발동하게 된다. 하(夏) 나라의 걸(桀), 은(殷) 나라의 주(紂), 진(秦)나라의 호해(胡亥) 등이 백성들을 업신여기다가 백성들의 대권에 의하여 밀려난 예이다.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임금에 대해서는 백성들이 잘 협조한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면, 백성들도 그 임금을 떠받들어 그 임금은 성군이 되고 그 나라는 융성한다.
남명의 시
*조식은 1558년 4월 삼가를 출발, 화개동천 유람길에 나서, 불일폭포(不一瀑布)를 전설의 청학동(靑鶴洞)으로 생각하며 다음 시를 지었다.
獨鶴芽雲歸上界 외로운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나라 돌아가고
一溪玉流落人間 한줄기 옥같은 물 인간 세계로 떨어지도다.
從知無累繁爲累 성가신 일 없는 게 오히려 괴로운 걸 알았으나
心地山河語不看 심지는 산하의 말을 볼 수가 없구나.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의 사윤동(絲綸洞)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60년 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후세에게 가르쳤다.
덕산에 터를 잡고서(德山卜居)
春山底處無芳草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白手歸來向物食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건가
銀河十里喫有餘 10리에 걸친 은하수처럼 맑은 물 마시고도 남겠네.
덕산 냇가 정자 기둥에 쓴 시(題德山溪亭柱)
請看千石鍾 청컨대 천석의 거대한 큰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爭似頭流山 어떻게 해야만 마치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까.
욕천(浴川) 세심정에서 목욕하고 나서 쓴 시
全身四十年 前累 온몸 40년 동안 쌓인 티끌
千斛淸淵 洗盡休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싹 씻어 버렸다,
塵土倘能 生五內 만약 티끌이 하나라도 내 속에 생긴다면,
直金刳腹 付歸流 지금 당장 배를 쪼개 흐르는 물에 부쳐보내리라.
설매(雪梅)
*산천재 앞에 남명선생이 심었다고 하는 수령(樹齡) 450여년을 자랑하는 남명매(南冥梅)가 있다. 그를 읊은 시다.
한 해 저물어 홀로 서있기 어려운데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밤새 눈이 내렸구나
선비의 집 오래도록 매우 외롭고 가난했는데
네가 돌아와서 다시 조촐하게 되었구나.
시조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담겨세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남명은 66세에 (명종 21년) 왕과 독대(獨對)하여 치국지방(治國之方)과 학문지요(學問之要)를 말하고 귀향
하였다.
71세 때 선조(宣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가지 않고, 헌책(獻策)을 진언했으나, 조정에 반영되지 않아 속히 실
행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국정에 대한 마지막 발언이다.
72세 되던 해 2월, 천수를 다하고 산청군 시천면 사윤동(絲綸洞)에서 운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제물과 제관(祭
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사림(士林)은 모두 곡(哭)하여 만장(輓章)과 제문(祭文)을 올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남명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가장 많았다. 곽재우는 조식에 손녀사위이며, 정
인홍. 김천일 등은 모두 제자이다.
후세 사람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선생의 처세는 불구종(不苟從) 불구묵(不苟默)이니, 불의를 보고 구차하게 따르지도 않았고, 구차하게 침묵
하지도 않았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
'선생의 공덕은 입유렴완(立濡廉頑)으로, 나약한 선비를 강하게 만들었고, 탐악한 관료들을 청렴하게 만들
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지킨 이는 이 세상 오직 남명 뿐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선생이 남긴 저술은, 시문집인 남명집(南冥集)과 학기류편(學記類編)이 있는데, 시문집은 직접 지은 시와 문
(文)을 모아 편찬한 것이고, 학기류편은 선생이 독서하는 과정에서 학문하는데 절실한 문구를 뽑아 기록해
둔 것으로, 문인(門人) 정인홍(鄭仁弘)이 유별로 모아 편찬한 일종의 독서기(讀書記)다.
남명 유적은, 합천에 생가와 용암서원, 뇌룡정이 있고, 김해 대동면에 산해정(山海亭) 숭도사(崇道祠), 유위
재, 환성재, 남명선생 본처 정경부인 묘소가 있고, 산청에 덕천서원, 세심정, 숭덕사, 산천재가 있다.
귀양살이 19년에 509권의 책을 지어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망우리 고개 넘어 한강 따라 가다가 팔당 지나면 능내(陵內)가 나온다. 넓은 팔당호가 보이는 이 강마을이 다산 정약용이 태어난 곳이다.
다산 정약용
다산의 모친은 고산 윤선도의 증손 공재 윤두수의 손녀이다. 부친은 진주(晉州) 목사를 지낸 관료이며, 다산은 27세에 장원급제하여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순조 때 약전, 약종, 약용 삼형제는 천주교도라 하여 체포되었다. 약종은 참형에 처해지고, 큰형 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귀양 갔다.
정약용 나이 39세 때다. 그 후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강진에서 보내며, 유명한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같은 불후의 저술을 남겼다. 1818년 고향 능내로 돌아와 56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평생 총 509권의 방대한 저술과 2466 수의 시를 남겼다.
생각해보면 상천(上天)의 뜻은 심오하다. 27세에 장원급제한 이 분이 19년 귀양살이 하지않고 벼슬살이 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그처럼 많은 저술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목민심서(牧民心書)
<목민심서>는 모두 12편으로 되어 있다.
1편은 부임(赴任), 2편은 율기(律己), 3편은 봉공(奉公), 4편은 애민(愛民), 12편은 해관(解官)이다.
1. 부임
목민관으로 발령을 받고 고을로 부임할 때 유의해야 할 여섯 가지 내용이 담겨있다.
목민관은 여러 벼슬 중에서 가장 어렵고 책임이 무거운 직책이다. 임금의 뜻에 백성들을 보살펴야 하는 직책이라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어야 하는 자리이다.
목민관은 부임할 때부터 검소한 복장을 해야 하며,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나라에서 주는 비용 외에는 한 푼도 백성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되며, 일을 처리할 때는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애휼(愛恤) 정신을 가지고, 사법권 가진 아랫사람들이 백성을 괴롭히는 일이 없도록 단속해야 한다.
2. 율기
율기(律己)는 '몸을 다스리는 원칙'이란 뜻이다. 여기에 목민관이 지켜야 할 생활 원칙이 담겨 있다.
목민관은 몸가짐을 절도 있게 해서 위엄을 갖추어야 한다. 위엄이란 아랫 사람이나 백성들을 너그럽게 대하는 동시에 원칙을 지키는 것을 통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가짐은 언제나 이도(吏道)정신에 입각하여 청렴 결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청탁을 받아서는 안 되며, 생활은 언제나 검소하게 해야 한다.
집안 잘 다스리는 것도 목민관의 중요한 덕목이다. 지방에 부임할 때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며, 형제나 친척이 방문했을 때는 오래 머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이는 쓸데없는 청탁이 오가고 물자가 낭비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
3. 봉공
봉공(奉公은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섬기는 방법이 적혀 있다.
목민관의 중요한 임무는 임금의 뜻을 백성에게 잘 알리는 일이다. 당시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교문(敎文)이나 사문(赦文)과 같은 공문서를 각 고을로 내려 보냈다. 하지만 글이 너무 어려워 일반 백성들이 그 뜻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목민관은 이것을 쉽게 풀어써서 백성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외국 선박이 표류해 들어온 경우에는 예의를 갖춰 잘 보살펴 주어야 하며, 그들에 관한 모든 것(배의 모양, 크기, 문자 등)을 빠짐없이 기록해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
4. 애민
애민(愛民)은 백성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민관은 노인을 공경하고 불쌍한 백성을 보살펴야 할 의무가 있다.
특히 4궁(窮)을 구제하는 데 힘써야 한다. 4궁이란 환(鰥, 홀아비),과(寡, 과부), 고(孤,아비 없는 아이), 독(獨, 늙어서 자식 없는 사람) 이다. 천하에 의지할 곳 없으니 수령이 잘 돌봐주어야 한다.
또 합독(合獨)이라 하여 홀아비와 과부를 재혼시키는 일에 목민관이 힘써야 한다.
5. 이전(吏典)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 조직은 수령 아래 이(吏) 호(戶) 예(禮)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육방의 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므로, 마땅히 모든 업무를 빈틈없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전편은 관기숙정(官紀肅正)을 전제로 아전·군교(軍校)·문졸(門卒)의 단속을 엄격히 하고, 별감의 임용을 신중히 하되, 현인의 천거는 수령의 중요한 직무이므로 각별히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6. 호전(戶典)
호전편은 농업진흥과 민생안정을 위해 호적정비와 전정 세법 등 부세제도의 개선을 통해 권농 흥산의 부국책을 도모할 것을 내세우고 있다.
세금을 거두는 일에 대해서는 소출량을 기준으로 한 세금 징수는 정확한 실태 파악이 어렵기 때문에 목민관은 원활한 조세 업무를 위해서 직접 조사를 하여 호적을 정비하고 부정 방지에 힘써야 한다.
또 농업을 장려하는 정책을 펴야 한다. 권농 정책에는 벼농사 장려뿐만 아니라 목축과 양잠의 장려, 소의 도축을 막는 일등이 모두 포함된다.
7. 예전(禮典)
예전에서는 제사와 손님 접대, 교육, 신분 제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목민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정성을 다해 제(祭)를 지내는 일이다. 미풍 양속을 해치는 미신적인 제사가 있다면, 사람들을 계몽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 교육을 장려하고 과거 공부를 권장하여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 문란해진 신분 제도를 바로잡는 일도 목민관이 해야 할 일이다.
8. 병전
병전(兵典)에서는 군대를 키우고 잘 훈련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당시 병역 의무자가 군대에 가는 대신 옷감을 내고 면제를 받는 제도가 있었는데, 여기에 민폐가 가장 많고 부정이 많았다. 목민관은 이러한 부정을 가려 내어 가난한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병기들을 수리하고 보충하여 늘 비상 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지방을 지켜야 한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외국의 발전된 무기도 수입해야 한다.
9. 형전
형전에서는 재판과 죄인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백성을 계몽시키지 않고 형벌을 가하는 것은 실상에 있어서는 백성을 잡기 위해 그물질하는 것과 같다'. '선교도후 형벌'(先敎導後刑罰)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재판을 할 때는 사건의 전말을 모두 파악한 뒤 신중하게 판결해야 하며, 특히 옥에 가두거나 형벌을 내릴 때 잘못이 없도록 해야 한다. 거짓으로 남을 고발한 사람은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10. 공전
공전에서는 산림과 수리 시설의 합리적 운영방안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목민관은 산림을 울창하게 가꾸고, 성곽을 보수하고, 농사의 기본이 되는 수리 시설을 관리할 책임이 있다. 수리 시설의 경우, 지방 토호들이 제멋대로 저수지를 파서 자기 논에만 물을 대는 행동을 막아야 한다.
11. 진황(賑荒)
진황은 빈민구제, 구황정책 이다.
흉년이 들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 곡식을 저축하고, 창고안에 있는 식량의 양을 늘 파악하고 있어야 하며, 철저한 대책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또 흉년이 들어 위급한 때는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12. 해관
해관육조(解官六條)라 해서 수령이 임기가 차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날 때의 태도를 적고 있다.
벼슬을 떠날 때 많은 재물을 가지고 가는 것은 선비의 도리가 아니다. 해진 수레와 야윈 말을 타고 집에 돌아갔을 때 재물이 없어 예전처럼 검소함을 상등으로 친다. 백성들이 목민관이 떠나가는 것을 슬퍼하고 길을 막아 선다면 훌륭한 목민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은 뒤에라도 백성들이 내는 돈을 받지 않도록 미리 유언으로 명령해 두어야 한다. 송덕비나 선정비는 죽은 이후에 세워야 한다. 살아있을 때 세우는 것은 예가 아니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사회경제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196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 간행했다
흠흠신서(欽欽新書)
이 책은 형법서(刑法書)다.
그는 살인 사건의 조사·심리·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건을 다루는 관료와 사대부들이 율문(律文)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이를 바로잡고 계몽할 필요성을 느껴 집필에 착수한 것이고, 1819년(순조 19)에 완성 1822년에 간행되었다.
내용은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詳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詳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사요의>는 당시 범죄인에게 적용하던 <대명률>과 <경국대전>의 형벌 규정 기본 원리와 지도 이념이 되는 유교 경전 가운데 중요 부분을 요약, 논술하였다. 그리고 중국과 조선의 사서 중에서 참고될만한 선례를 뽑아서 요약하였는데, 중국 79건, 조선 36건 등 도합 115건의 판례가 분류, 소개되어 있다.
<비상전초>는 살인 사건의 문서를 작성하는 수령과 관찰사에게 모범을 제시하기 위해 청나라에서 발생한 비슷한 사건에 대한 표본을 선별해 해설과 함께 비평했다.
<의율차례>는 당시 살인 사건의 유형과 그에 적용되는 법규 및 형량이 세분되지 않아 죄의 경중이 무시되고 있는 사실에 착안하여 중국의 모범적인 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 제시하여 참고하도록 하였다.
<상형추의>는 정조가 심리하였던 살인사건 중 142건을 골라 살인의 원인·동기 등에 따라 22종으로 분류한 것이다. 각 판례마다 사건 내용, 수령의 검안(檢案), 관찰사의 제사(題辭), 형조의 회계(回啓), 국왕의 판부(判付)를 요약하였으며, 필요에 따라 자신의 의견과 비평을 덧붙였다.
<전발무사>는 정약용이 곡산부사와·형조참의로 재직 중 다루었던 사건과 직접·간접으로 관여하였던 사건, 유배지에서 문견(聞見)한 16건의 사례에 대한 소개와 비평·해석 및 매장한 시체의 굴검법(掘檢法)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한국법제사상 최초의 율학 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사건을 심리하는데 필요한 실무 지침서 이다.
경세유표(經世遺表)
경세유표는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이라고 하여, 우리 조선이라는 오래된 나라를 통째로 개혁해 보겠다는 뜻을 기록했다.
'경세(經世)'란 국가 제도의 뼈대를 세워 운영함으로써 나라를 새롭게 하겠다는 뜻이며, '유표(遺表)'는 신하가 죽으면서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이다.
모두 48권인데, 제1책(권1∼3)과 제2책(권4∼6)은 천관이조(天官吏曺), 지관호조(地官戶曺), 춘관예조(春官禮曺), 하관병조(夏官兵曺), 추관형조(秋官刑曺), 동관공조(冬官工曺) 등 6조와 각 조에서 관장해야 할 사회 및 경제 개혁의 기본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제3책(권7-9)은 주로 이조의 업무에 대한 부분이다. 관직체계, 관품체계의 조직과 운영 방법, 국토의 재구획안, 지방제도의 재조정과 지방 행정 체계의 운영 방법 및 개선, 관료의 인사 고과 제도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제5책부터 제14책까지는 호조 업무에 관한 부분으로서,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에 대한 개혁방안을 설명하였다.
제5책(권12-14)과 제6책(권15-17)은 정전제에 대해 서술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정전법을 실질적으로 실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제7책(권18-20)과 제8책(권21-23)도 정전제에 대해 서술했고, 특히 군사 제도의 정비에 대해 언급하였다.
제9책(권24-26)은 정전제 실시를 위한 약전의 필요성과 방법을 설명하였다.
제10책(권27-29)과 제 11책(권30-33)에서는 부세제도의 개혁방안이 제시되었다. 국가의 조세가 오직 농민과 토지에만 집중되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광업 . 공업 . 어업 . 상업 . 임업 등 모든 산업에 골고루 과세함으로서 국민 부담을 줄이고 아울러 재정수입 증대도 꾀하였다.
제12책(권34-36)에서는 환곡제도의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사창제와 상평법을 시행하여 구휼사업이 실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게 하였다.
제13책(권37-38)에도 부세제도의 개선방안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서는 어업과 염전 등에 부과되는 세금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그 개선책을 제시하였다.
제14책(권39-41)은 호적법과 교민지법에 관한 것으로, 여기에서는 호적을 정비하여 국민을 정확하게 파악하며 인재를 뽑아 교육시키는 정책 등이 제시되었다.
제15책(권42-44)에는 주로 문과와 무과의 과거제도 개혁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체계화된 국가 개혁론이다. 저술될 당시(1817)의 이름은 <방례초본>이었는데, 1820년 다산이 문집을 정리하면서 <경세유표>로 고쳤다
다산의 시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不亦快哉行)
달포 넘는 장마 끝 곰팡내 속에, 아침 저녘 사지(四肢)가 맥없이 노곤터니, 초가을 푸른 하늘 맑게 확 트이니, 지붕 위 하늘 어디 구름 한 점 없도다.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돌무더기 가로막은 푸른 시내 물굽이, 가득 고인 물들이 막히고 돌기만해, 긴 삽으로 푹 떠서 일시에 터트리니, 우뢰처럼 소리치며 쏜살같이 흘러간다.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돛배에 손을 태워 청강에 띄워보니, 넘실넘실 물결 위에 물새 쌍쌍 날아간다. 급한 물살 내달아 여울목 지나가니, 시원한 강바람이 봉창을 스치구나.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층층절벽 봉우리를 쉬며 예며 올랐더니, 구름 안개 겹겹이 눈 아래 덮고있네. 저물녘 부는 서풍 구름을 쓸어내니, 천산만학 산봉우리 한꺼번에 다 트이네.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나무잎은 우수수 강 언덕에 떨어지고, 붉고 검은 하늘빛 흰 파도를 걷어찰 제, 옷자락 휘날리며 바람 속에 서 있으니, 선학(仙鶴)이 깃을 씻나 의심이 일어나니.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이웃집 지붕 끝이 앞마당을 가로막아, 바람도 오지않고 맑은 날도 어둡더니, 백금(百金)으로 집을 사서 모두를 헐어내니, 눈 앞에 훤히 트여 먼 봉우리 다 보인다.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지루한 여름날에 불 같이 타는 더위, 등골에 땀 흐르고 베적삼 축축한데, 시원한 바람 불고 소나기 쏟아져서, 단번에 골짜기에 빙폭이 드리웠네.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대수풀 외로운 달 흔적 없는 밤 되어, 초당에 홀로 앉아 술독을 마주하여, 백 잔 쯤 마시어서 질탕하게 취한 뒤에, 큰 소리로 노래 불러 근심을 씻었도다.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흩날리는 눈보라 하늘 가득 차그운데, 껑충껑충 여우 토끼 숲속으로 뛰어든다. 긴 창에다 큰 화살 홍전립(紅氈笠) 눌러 쓰고, 산 채로 손에 잡아 말안장에 달았노라.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고깃배에 손을 태워 앉아 녹파간(綠波間)에 노닐다가, 바람 이슬 야삼경에 취해 돌아 아니 갔네. 돌아가는 기러기 한 소리에 잠이 깨니, 갈대꽃 싸늘하고 초생달은 걸려있다.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귀양살이 타향에서 고향 생각 끝이 없고, 객창의 등불마져 외로이 비치는데, 첫닭이 홰를 치며 새벽을 알릴 무렵, 집에서 보낸 편지 내 손으로 뜯어보네. 이 어찌 상쾌치 않으리오.
달은 천강(千江)에 비치고
세종대왕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1446년에 세종의 비(妃)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명을 받은 수양대군이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주요 설법을 한글로 편찬한 책이 석보상절(釋譜詳節)이다. 이듬해 세종이 이를 다시 시의 형식으로 읊은 것이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란 원래 달은 하나지만 천강에 비친다는 뜻이다. 부처의 본체는 하나지만, 백억 세계에 화신으로 나타나서 만백성을 교화한다는 뜻이다.
월인천강지곡
높고 높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그지없고 가이없는 공덕을 어찌 다 말씀할 수 있으리까? 세존이 평생 하신 일을 사륄 것이니, 만리 밖의 일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 같이 여기시옵소서. 몇 천년 전 일이나 세존의 말씀 여쭙겠으니, 직접 귀에 듣는 것 같이 여기시옵소서.
탄생
수십만 겁 이전에 한 임금이 나라를 아우에게 맡기고 정사(精舍)를 짓고 도를 닦고 있었다. 그런데 오백 세 전의 원수가 나라 물건을 훔쳐 이 정사 곁을 지나갔는데, 포졸들이 도둑의 자취를 따라갔다가 오인하여 그 형인 임금을 죽였다. 그때 대구담(大瞿曇)이 그 피로 남녀를 만들어내니, 구담씨(瞿曇氏), 감서씨(甘庶氏)다. 이가 석가모니의 조상이다.
보광불(普光佛)은 미래에 선혜(善慧)선인이 석가불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선혜가 공양할 꽃을 구하러 다녔는데, 그 때 나라 임금 역시 꽃을 구하고 있어 꽃 구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때 구이(俱夷)라는 꽃 파는 여자가 선혜에게 나중에 아내로 삼아줄 것을 약속 받고 꽃을 올렸다. 구이는 그 인연으로 선혜의 아내가 되었다.
부처님의 어머니 마야부인이 동산을 구경하러 가다가 무우수(無憂樹) 밑에 갔을 때, 나무 가지가 절로 굽어왔다. 가지를 잡을 때 오른 쪽 옆구리에서 석가모니가 탄생하였으니, 이 날이 4월8일 이다.
태자는 태어나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씩 걷고, 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에서 오직 나만이 높다(天上天下 唯我獨尊)'고 외쳤다.
용이 그를 씻기고 채녀(綵女, 비단 옷 입은 여인)들이 깁에 싸서 안고 어머님께 오니, 대신들이 모셨다.
그때 이루 셀 수 없을 많은 상서들이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주(周) 소왕(昭王) 때 그 상서가 나타난 일이 있었으므로, 사자를 인도에 보낸 일이 있다.
출가(出家)
석가모니가 탄생하자 그 아버지 정반왕은 매우 기뻐하여 관상쟁이에게 상을 보였더니, 모두 출가(出家) 성불(成佛)할 것이라 하였다.
난지 이레 된 4월 보름에 어머니가 하늘로 오르셨다.
정반왕이 아들 이름을 지으려고 바라문에게 물었더니, 모두 살파실달(薩婆悉達)이라 하는 것이 좋다하였으니, 이는 일체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또 천중천(天中天)이라고도 불렀으니, 하늘 가운데 하늘이라는 뜻이다.
밀다라(密多羅)를 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는데, 나중에 태자는 스승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알았다.
태자가 출가하면 자손이 끊어질 것을 염려한 임금은 며느리를 구하기로 하였다. 그 때 태자가 아내 될 사람의 금상을 만들었는데, 야수타라(耶輸陀羅)가 이와 같았으므로 약혼의 표시로 수정을 보냈다.
태자의 재주를 모르는 야수타라의 아버지가 거절하여, 태자는 여러 사람과 힘 겨루기를 하여 번번히 이겼다. 코끼리를 넘어뜨리고, 한 화살로 스물여덟 북을 꿰뚫는 등 그 재주가 신기했다. 이리하여 혼례가 성립되었다.
태자는 인간세상에 낙을 붙이지 않았다. 정거천(淨居天, 가장 높은 신)도 이를 알고 도왔다. 태자가 사문(四門)을 나갔을 때,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보고, 출가를 결심케 한 것도 정거천이다.
태자가 출가하려고 아버님께 청하니, 왕이 태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태자가 나가지 못하게 성문을 잘 지키게 하고, 고운 여자 아름다운 음악으로 마음을 끌고자 하였다.
태자는 왕을 안심시키려고 부인의 배를 가리키며 임신을 알렸고, 부인도 태자 곁을 지키며 시중들고 태자의 뜻을 꺽으려고 노력하였다.
왕과 태자의 뜻은 달랐으니, 왕은 천하를 다스리라는 것이요, 태자는 정각을 이루어서 대천세계를 밝히려는 것이었다.
태자비 야수타라는 전생에 어머니에게 잘못한 죄의 응보로 6년 동안 아기를 뱃속에 가졌다가 나운(羅雲)을 낳으니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여, 의심을 풀려고 아기를 안고 물에 들어갔는데, 아기는 물에 뜨고, 연꽃이 피어 사람들이 의심을 풀었다.
수도 고행
태자가 6년 고행하는 모습을 보면, 한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있어 머리에 까치가 새끼를 칠 정도였다.
그를 따라다닌 교진여(憍陣如)가 그 소식을 왕궁에 알렸더니, 왕과 왕후가 슬퍼하며 많은 물건을 보냈으나 받지 않았다. 워낙 기운이 없어서 목욕을 하고나니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였다. 아이들이 나무로 얼굴을 건더리고, 하루 한 낱 쌀을 자셨으나, 마음은 변할 줄 몰랐다.
그 후 태자는 고행 위주로 성도를 할려고 함이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한 장자의 딸이 죽을 바치니, 그것을 자시고 힘을 얻어 보리수 밑으로 가시었다.
이때 성도할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마왕이 태자가 정각을 이룰 것을 방해하려고 여러 꾀를 부렸으니, 고운 딸을 보내어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약을 먹이려고 했고, 독룡, 맹수 병사들을 보내기도 했다. 태자는 이 모든 유혹과 협박을 물리쳤으니, 계집들을 더러운 꼴로 바꾸었고, 그를 해치려고 온 병사들의 무기를 연꽃으로 변화시켰다.
드디어 2월8일에 정각을 이루어냈으니, 태자는 삼명<三明; 숙명명(宿命明), 천안명(天眼明), 누진명(漏盡明)>, 육통<六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신족통(神足通) 누진통(漏盡通)>을 얻으셨다. 지혜를 얻어 세상 모든 일을 알아보셨고, 지혜가 밝으시어 두려움이 없었다.
태자는 성도하신 뒤, 부처가 되어 제일 먼저 녹야원(鹿野苑)에 가서 교진여 등 다섯 사람에게 설법했다. 녹야원은 석가모니가 무량겁 때부터 인연 깊은 곳이다. 녹왕이 되어 뭇 사슴을 거느리기도 했고, 인욕선인(忍辱仙人)이 되어 설법하던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절을 세웠다.
일화
마갈타국(摩竭陀國)에 배화교도 가섭(迦葉) 삼형제가 있었다. 그들은 제자가 많았으며 용으로 사람을 위협하고 있었다. 석가모니가 가섭에게 가서 방을 달라고 하니, 가섭은 일부러 독한 용이 있는 용당을 빌려주었다. 석가모니가 돌집에 들어가서 삼매경에 드니, 용이 불을 뿜었으나 그것이 꽃이 되어 떨어지고 찬바람이 불었다.
그 밖에 여러 신통력을 보였으니, 먼데 과일을 순식간에 따오고, 없던 바위와 연못을 만들어 내고, 물 속에 들어가니 물이 갈라지고 티끌이 난 적도 있다.
가섭 형제가 항복하고 제자가 되니, 그 제자들도 감복하여 나한이 되었다.
죽원(竹園)이란 땅을 바쳐 전법케 하였으니, 세존이 죽원정사에 계실 때, 사리불과 목건련이 제자가 되었다.
출가한지 열두 해에 세존은 정반왕을 뵙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옛날 태자는 집을 칠보로 꾸미고 금으로 수놓은 요를 깔았는데 지금은?'
'나무 아래 앉았으나 여러 하늘 신을 오시고, 천룡이 보상(寶床)과 가사를 바칩니다.'
'옷을 칠보로 꾸미고 모습이 미끈하더니, 지금은 머리를 깍고 누비옷을 입었으니 어찌 부끄러움이 없으신가?'
'마음을 닦지않고 옷만 꾸민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진리의 옷이야말로 정말 옷입니다.'
'더위와 추위를 모르도록 삼시전을 꾸미고 채녀들이 쫓더니, 지금은 깊은 산골짜기에서 얼마나 두려우신가?'
'생사를 깨달아 시름이 없는데 두려운 뜻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정반왕은 세간의 티끌같은 일을 말하였고, 세존은 그것이 전혀 안중에 없었던 것이다.
태자가 성을 넘어 출가한지 6년만에 태자비가 아들 나운을 낳았다. 사람들이 모두 의심하였으나, 세존이 연화좌에 앉아있을 때, 처음 보는 데도 나운이 태자 무릎에 앉으니, 모두 의심을 풀었다.
세존이 목건련을 보내어 나운을 출가시키려 하였을 때, 태자비는 이렇게 말했다.
'아내가 되어 남편을 하늘같이 섬겼더니, 3년도 채 못 되어 출가하여 산골에서 고행하다가, 6년 만에 돌아오시기는 했으나 꼭 남 대하듯 하셨어요. 이제 우리 모자는 손수 목슴을 끊지못해 살아가니, 사람이지만 짐승만도 못합니다. 그런데 서러움 중에 이별이 가장 고통스러운데, 어찌 아들마져 이별하란 말 입니까? 자기는 도를 닦아 자비를 펴신다 하시더니, 이것이 자비인가요?'
그러나 정반왕이 달래고, 세존이 신통력으로 화인(化人, 영혼)을 보내 타이르니, 눈물을 흘리고 나운을 보내었다. 정반왕은 야수타라의 마음을 위로하려고, 석가씨 문중에서 영리한 아이 쉰 명을 가리어 나운과 함께 출가시켰는데, 나운은 설법은 잘 듣지않아 세존이 거듭 설명을 하곤 했다.
우리나라 무예는 무엇인가
정조.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우리나라가 문(文)을 숭상한 것은 좋지만, 무(武)를 천시한 것은 폐단이다. 고구려는 만주에서 수와 당을 물리쳤지만, 고려 왕건은 영토를 반도로 축소시켰다. 반도에 정착한 이후 문무의 두다리 중 하나가 성하지 못했다. 고려는 무인을 멸시하여 정중부의 난이 일어났고,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피난했고, 1910년 일본에 합당 당했다.
우리나라에 처음부터 병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신라 원성왕 때 대사(大舍) 벼슬이던 무오(武烏)가 무오병법(武烏兵法) 15권과 화령도(花鈴圖) 2권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 문무왕 때 육진병법(六陳兵法), 혜공왕 때 안국병법(安國兵法)이 있었다. 활로 당태종의 눈을 맞힌 연개소문은 자가 김해(金海)이다. 김해병서(金海兵書)가 있었다. 모두 책 이름만 전해 올 뿐이다.
전해진 병법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정도전(鄭道傳)의 '진법(陣法)'이다.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은 '동명왕의 옛 땅을 회복할 때가 됐다', '이민족으로 중원에 들어가 황제가 된 사람이 많다'고 주장했다.
진법(陣法)은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만든 병법이다. 내용은 군 지휘관이 사냥 나가 군을 훈련하던 수수법(蒐狩法)과 사마양저 제갈무후 등 역대 명장들의 병법을 참고해서 진치는 방법, 지휘관의 통솔 방법, 군법, 공격, 방어법 등을 설명하였다. 정도전은 팔진삼십육변도보(八陣三十六變圖譜), 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寄圖), 강무도(講武圖)를 지었으나, 현재 삼봉집(三峯集)에 <진법>만 전해진다.
조선의 군사 조련 제도는 미미했다. 삼군(三軍)은 근교에서, 위사(衛士, 대궐과 관아를 지키는 무관)는 금원(禁苑)에서 실시했다.
그러다가 선조 때 임진왜란을 당하자 20일만에 서울을 내어주고, 60일만에 평양을 점령당했다. 당시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에서 왜병을 물리치자, 선조가 제독영(提督營)에 행차하여 그 병법을 보고자 하였으나, 이여송은 '병법은 척계광(戚繼光) 장군이 저술한 기효신서(紀效新書)에 의한 것으로 군사 기밀입니다.' 하고 내놓지 않았다.
그래 선조가 역관에 몰래 명을 내려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구하여 유성룡에게 강해(講解)를 명한 일이 있다. 또 한교(韓嶠)를 시켜 임진왜란에 참여한 명나라 장수 10인을 교사로 삼아 군사 70여인에게 창과 칼, 낭선(狼据), 곤봉(棍棒), 장창(長槍), 등패(藤牌), 쌍수도(雙手刀) 등을 체득케 하여 도보(圖譜)로 만들었다.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윤두수(尹斗壽)에게 그 일을 관장토록 했다. 당시 훈련도감 병사 선발 시험은 큰 돌 하나를 들고 한 발의 담을 넘는 것으로 하였다.
영조 때 왕세자였던 사도세자는 죽장창(竹長槍), 기창(旗槍),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 월도(月刀), 협도(挾刀), 쌍검(雙劍),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편곤(鞭棍), 권법(拳法) 등 12기를 보태어 도보를 만들었으니, 이를 '십팔기(十八技)'라 한다.
그후 정조 14년에 왕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다.
이 책은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가 백동수(白東脩) 주관하에 간행했다.
'무예도보통지' 서문에서 정조는 책 간행의 뜻을 밝히고 있다.
'우리 나라는 해외에 치우쳐 있는 곳이라 창이나 검의 병기는 쓰는 법이 없고, 궁술만 있었다. 비록 시험장에서는 말 위에서 창 쓰는 기예를 시험을 봤지만, 그 용법이 자세히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왜적과 대진할 때, 적이 돌진해오면 우리 군사들은 창과 칼을 가지고 있어도, 칼을 칼집에서 뽑을 시간이 없고, 창을 겨루어 보기도 전에 왜적의 칼날에 꺽이었다.
임진왜란 뒤 선조 임금 때 곤봉 장창 등 여섯 가지 기예를 다룬 <무예제보>가 편찬되었으며, 영조 임금 때 여기에 죽장창(竹長槍) 예도(銳刀) 등 12기를 더하여 <무예신보>를 간행하였고, 다시 마상재(馬上才) 격구(擊球) 등 6기를 더하여 도합 '24기(二四技)'를 도보로 만들었다. 그 후 이 책을 증보 간행한다.'
무예도보통지는 4권 4책의 한문과 1책의 언해본이 있다. 각종 무기와 공격 자세를 그린 492개의 목판 그림이 실려 있는데, 자세는 백동수의 시연을 직접 그려서 제작한 것이다.
머리권(首卷)에는 범례, 병기 총서, 척계광 소개, 기예 질의(質疑)가 실려있다. 卷一: 장창(長槍) 죽장창 기창(旗槍) 당파(鐺鈀) 기창(騎槍) 낭선(狼据) 卷二: 쌍수도(雙手刀) 예도(銳刀) 왜검(倭劍) 교전(交戰)卷三: 제독검(提督劍) 본국검(本國劍) 쌍검 마상쌍검(馬上雙劍) 월도(月刀) 마상월도 협도(挾刀) 등패(藤牌) 요도(腰刀) 표창(標槍), 卷四: 권법(拳法) 곤봉 편곤(鞭棍) 마상편곤 격구(擊球) 마상재(馬上才)
실기해제
본국검(本國劍)
본국검법은 모두 33세(勢)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중 격법(擊法)이 12수(首), 자법(刺法)이 9수로, 치고 찌르는 법이 모두 21수다.
진전살적세(進前殺賊勢) 3수, 향전살적세(向前殺賊勢) 2수, 후일격세(後一擊勢) 3수, 후일자세(後一刺勢) 2수, 일자세(一刺勢) 1수, 안자세(雁刺勢) 1수, 직부송서세(直符送書勢) 1수, 발초심사세(撥艸尋蛇勢) 1수, 표두압정세(豹頭壓頂勢) 1수, 좌우요격세(左右腰擊勢) 2수, 장교분수세(長蛟噴水勢) 1수, 우찬격세(右鑽擊勢) 1수, 용약일자세(勇躍一刺勢) 1수, 시우상전세(?牛相戰勢) 1수.
이상이 격자지법(擊刺之法) 21수이고, 내략(內掠), 외략(外掠), 방적(防賊) 등의 방어법이 있으며, 지검대적세(持劍對賊勢),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 맹호은림세(猛虎隱林勢), 조천세(朝天勢), 전기세(展期勢), 백원출동세(白猿出洞勢)등의 자세가 있다.
도(刀)와 검(劍)
칼의 양편에 날이 있는 것을 검(劍)이라 하고, 한쪽만 날이 있는 것을 도(刀)라 한다. 도(刀)는 단도(短刀), 예도(銳刀), 환도(環刀)가 있고, 크기는 4자 3치이며. 무게는 1근 8량이다.
사용하는 법은 격법(擊法, 치는 법), 자법(刺法, 짜르는 법), 세법(勢法, 모양)이 있다.
격법에는 표두격(豹頭擊), 과좌격(跨左擊), 과우격(跨友擊), 익좌격(翼左擊), 익우격(翼右擊)의 다섯가지가 있다. 자법에는 역린자(逆鱗刺), 단복자(袒腹刺), 쌍명자(雙明刺), 좌협자(左夾刺), 우협자(右夾刺) 다섯가지가 있다. 세법에는 봉두세(鳳頭勢), 호혈세(虎穴勢), 등문세(謄蚊勢) 세가지가 있다.
검을 운용하는 데는, 자(刺), 참(斬), 격(擊), 세(洗), 할(割), 벽(碧), 붕(崩), 제(提), 말(抹), 약(掠), 구(鉤), 운(雲), 찰(札), 찬(鑽)의 법식이 있다.
장창(長槍) - 길이는 1장 5척이며 재질은 주목과 합목이다.
*장창은 창두(槍頭)가 4냥을 넘지 않았다. 창날에는 긴 혈조(血漕, 새겨진 홈 또는 구멍)가 있고, 창 자루는 치밀한 나무를 쓰는데, 대나 가문비 나무는 약해서 쓰지 않는다.
장창보(長槍譜)에는 태산압란세(太山壓卵勢), 미인인침세(美人認針勢), 철번간세(鐵翻竿勢), 십면매복세(十面埋伏勢), 백원타도세(白猿拖刀勢), 태공조어세(太公釣魚勢), 창룡파미세(蒼龍擺尾勢), 야차탐해세(夜叉探海勢) 등이 있다.
죽장창(竹長槍)- 길이는 20척 4촌이며 대나무를 쪼개 아교로 붙여서 사용한다.
기창(旗槍)- 깃발이 있는 창이며, 길이는 9척 9촌, 혈조(血漕)가 있다.
당파(鐺鈀)- 삼지창으로 알려져 있으며, 길이는 7척 6촌, 무게는 5근이다.
마상기창(騎槍)- 일명 마상창이라고 불리우며 창은 나무 자루 길이는 10척이고 창날 길이는 1척 5촌이다.
낭선(狼筅)- 가지를 살려 창처럼 사용하는 무기로 1장 5척에 7근이다.
무예도보통지 제2권
쌍수도(雙手刀)- 두 손으로 사용하는 큰 칼로 6척 5촌에 2근 8냥이다.
예도(銳刀)- 환도의 다른 이름으로 4척 3촌에 1근 8량이다.
왜검 토유류(倭劍 土由流)- 삼진으로 구성되며 신도-축도-신도일타의 빠른 공격법을 보인다.
왜검 천유류(倭劍 千柳流)- 대검 전일타의 막고 바로 받아 치는 법이 발달한 검법이다.
왜검 운광류(倭劍 運光流)- 왜검 중 반복성이 가장 짙은 검법으로 단순하며 직선적인 검법이다.
왜검 류피류(倭劍 柳彼流)- 검을 뒤짚어 칼등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기법 등 다양한 기법이 있다.
교전(交戰)- 교전은 왜검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확립된 검법이다.
무예도보통지 제3권
제독검(提督劍)- 길이는 3척 13촌이며, 회전이 특이한 검법이다
본국검(本國劍)- 현재 가장 잘 알려진 검법으로 검법의 구성이 가장 안정적이다.
쌍검(雙劍)- 길이는 2척10촌 5푼으로 두개의 검으로 가장 화려한 검법을 구사한다.
마상쌍검(馬上雙劍)- 말 위에서 쌍검을 운용하는 법으로 중국장수 이름의 자세가 많다.
*마상쌍검에는 항우도강세(項羽渡江勢), 손책정강동세(孫策定江東勢), 운장도패수세(雲長渡覇水勢), 한고조환패상세(漢高祖環覇上勢) 등의 자세가 있다.
월도(月刀)- 길이는 8척 12촌이며 4근 13량으로 크고 호쾌한 자세가 주를 이룬다.
마상월도(馬上月刀)- 말 위에서 월도를 사용하는 기법이다.
협도(挾刀)- 길이는 10척이며 무게는 4근으로 적의 진법을 부수는데 효과적이다.
등패(藤牌)- 등나무로 만든 방패에 요도와 표창을 들고 공격하는 기법이다.
무예도보통지 제4권
권법(拳法)- 무예24기 중 유일한 맨손 무예로 무기법을 익히기 전에 수련하였다.
*귄법보(拳法譜)에는 나찰의출문가자변하세(懶札衣出門架子變下勢), 금계독립세(金鷄獨立勢), 현각허이세(顯脚虛餌勢), 칠성권(七星拳), 복호세(伏虎勢), 매복세(埋伏勢), 신권세(神拳勢), 귀축세(鬼蹴勢) 등이 있다.
곤봉(棍棒)- 길이는 7자 무게는 3근 8냥이며 끝에 '압취(鴨嘴)'라는 오리부리 모양의 칼날을 장착한다.
편곤(鞭棍)- 일종의 쇠도리깨로 기병들에게 효과적인 무기이다.
마상편곤(馬上鞭棍)- 말 위에서 편곤을 사용하는 기예이다.
격구(擊球)- 서양의 폴로 경기와 유사하며 말위에서 하는 공놀이다.
마상재(馬上才)- 말 위에서 펼치는 화려한 말타기 기술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꽃가꾸기 지침서
강희안(姜希顔). 양화소록(養花小錄)
돈과 권세가 인생의 목적인양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아닌 사람도 있다.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 1418~1465)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세종대왕의 부인 소헌(昭憲)왕후가 이모이고,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정인지와 훈민정음 제작에 참여했고, 용비어천가 주석을 붙였으며, 동국정운 편찬에도 관여했다. 시와 글씨 그림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는 칭을 받았다. 서거정 성현 김안로 등의 저서에 그의 신묘함을 언급한 글이 있다. 현재 전하는 유품은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 ‘소동개문도(小童開門圖)’가 있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강희안의 본관은 진주이며, 이조판서 석덕(碩德)의 아들이고 좌찬성 희맹(希孟)의 형이다. 세종 1년에 태어나 세조 9년까지 향년 44세를 살았는데, 인물이 담박 고아하고 명예나 이익을 꺼리었고, 재주를 자랑하지 않았다. 그가 노송, 만년송, 오반죽, 국화, 매화, 난혜, 연화, 석류화, 치자, 사계화, 산다화, 자미화, 귤나무 등 16종의 꽃과 나무를 물 주고, 옮기고, 감상하는 법을 수록한 '양화소록(養花小錄)'은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다.
그러나 양화소록이 어찌 한갖 나무나 풀 가꾸는 데만 해당되랴? 사람의 천성을 키우고 가꾸는 양민(養民)의 뜻을 은연중 가탁한 것이다.
양화소록 자서에 이런 글이 있다.
'화초 하나하나가 성질이 달라서 습한곳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건조한 곳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찬 것을 좋아하는 것도 있고, 따스한 것을 좋아하는 것도 있어, 가꾸고 물 주고 햇볕을 쬘 때 한결같이 엣법을 따랐고, 옛법에 없는 것은 견문을 살려서 하였다.
하찮은 식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랴! 내가 양화소록을 쓰는 까닭은 산중에 묻혀 소일거리를 삼음이요, 한편으로는 즐기는 사람과 취미를 함께 하고자 함이다.
노송(老松)
소나무는 사시에 늘 푸르며, 2-3월에 솔순이 돋아나고 송화가 피고 솔방울이 열린다. 송진은 맛이 떫고, 땅속에 들어가 천 년이 지나면 복령(茯苓)이 되고, 또 천 년이 지나면 호박(琥珀)이 된다.
노송을 감상하는 법은, 가지와 줄기가 구부러지고, 묽은 등걸이 많고 잎이 가늘고 짧으며, 솔방울 매달린 가지에 만년화(萬年花)가 붙고, 바위 틈에서 자란 놈이 상품(上品)이다.
소나무는 옮겨 심으면 잘 자라지 않으니, 굵은 뿌리를 끊고 흙으로 잘 덮어두었다가 다음 해에 옮겨 심으면 잘 산다.
오반죽(烏班竹)
오반죽은 굳세지도 유하지도 않으며 풀도 나무도 아니다. 다른 대에 비하여 열매가 없는게 다르지만, 마디나 눈은 대개 같다. 혹 모래밭에 무성히 자라고, 바위 땅에도 자란다. 가지가 잘 뻗고 향기를 풍기며, 짙푸른 빛깔이 장엄하다.
대는 품종이 여러가지다. 반죽(班竹)이 여러 해가 되면 오죽(烏竹)으로 변하고, 오반죽은 한냉한 곳에서도 잘 살아 남는다.
오뉴월에 비가 내리면 신죽(新竹) 가운데서 줄기가 곧고 잎이 짧고 가지가 빽빽한 것을 골라서 분에다 심되, 곁뿌리는 끊고 좌우 가지를 묶어 줄기가 움직이지 않도록 한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잎이 말라죽고 만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대를 매우 좋아하여 항상 서너개의 화분에 직접 심어 옆에 두고 감상하였다. 하얀 도화지가 생기면 대나무 한두 가지를 그려 그것에 깃든 뜻을 드러내곤 했다.
국화
송나라 범석호(范石湖)는 그의 국보(菊譜)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림에 묻혀 사는 사람들이 국화를 군자에다 비유하여 말하기를, 가을이 되면 모든 초목이 시들고 죽는데, 국화만은 홀로 싱싱히 꽃을 피워 풍상 앞에 거만하게 버티고 서 있는 품격이 산인(山人) 일사(逸士)가 고결한 지조를 품고, 비록 적막하고 황량한 처지에 있더라도, 오직 도를 즐기어 그 즐거움을 고치지 않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신농본초경(神農本草經)에는 이렇게 써 있다. '국화는 성품을 도와주는 약으로 사람의 몸을 가볍게 하고 장수하게 한다. 남양(南陽) 사람들은 국화꽃 핀 우물 물을 마시고 백세를 살았다고 한다.'
당나라 왕민(王旻)은 '산거록(山巨錄)'에서 이렇게 말했다. '검붉은 줄기와 노란 꽃이 넝쿨져 뻗은 것이 참된 감국(甘菊)이고, 다른 것은 다북쑥 종류이니, 쑥은 맛이 쓰고 국화는 맛이 달다.'
'화목의기(花木宜忌)'에는 '국화 뿌리는 물을 가장 싫어하니 물을 주지말고, 뿌리 곁에 물 한 그릇을 떠놓고, 종이를 잘라서 한쪽 끝은 국화 뿌리를 싸감고, 한쪽 끝은 물그릇에 담아두면, 자연히 물이 스며들어 뿌리가 촉촉하게 젖는다'고 적혀있다.
매화
매화는 운치와 품격이 있으므로 고상하게 여긴다. 특히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가지가 성글고 야윈 것과, 늙은 가지가 괴기하게 생긴 것은 더욱 진귀하다.
매화의 품격 네가지를 꼽으면, 1. 가지가 무성한 것 보다는 성근 것이 귀하고, 2. 활짝 핀 꽃 보다는 반쯤 핀듯한 꽃이 귀하고, 3. 어린 나무보다는 고목의 매화가 귀하고, 4. 나무가 살찐 것보다는 마른 나무가 귀하다.
매화를 접붙이는 법은 복숭아나무를 화분에 심고 매화나무에 매단다. 매화가지와 복숭아 가지를 거죽을 벗기고, 두 나무를 합쳐서 생칡으로 단단히 동여맨다. 두 나무의 물기가 통하여 거죽이 완전히 서로 얼러붙은 후에는 본 매화나무를 잘라 버리니, 이것을 의접(倚接)이라 한다.
우리 할아버지 통정공이 어려서 지리산 단속사에서 책을 읽었다. 그 때 절 마당 앞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심어 놓고 시 한 수를 지었다. 공이 과거에 합격한 뒤에 여러 관직을 거쳐 정당문학 벼슬에 올라 지금까지도 그 매화를 `정당매(政堂梅)'라 부른다.
난초
'설문(說文)'에 이런 말이 있다. '난이 골짜기에 수부룩하게 나서 검붉은 줄기와 마디에 푸른 잎이 윤택하고, 한 줄기에 한 송이 꽃이 피고, 간혹 두 송이에 두세 꽃잎이 피어 그윽하고 맑은 향기가 멀리 풍기어 부여잡을 정도이다. 꽃빛은 흰빛, 자주빛, 연한 푸른빛이다. 꽃은 이른 봄에 피지만, 추운 겨울에도 고결하게 핀다.
난을 분에 옮긴 후에는 잎이 점점 짧아지고 향기도 좋지않아 국향(國香)의 뜻을 잃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심히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호남 바닷가의 산에서 난 것은 품종이 좋다.
초봄에 꽃이 피거던 등불을 켜놓고 책상 위에 난분을 올려 놓으면, 잎의 그림자가 벽에 박혀 야들야들한 게 구경할 만하며, 글을 읽을 때 졸음을 쫒기도 한다.
난잎은 한 해에 다 자라나지 못하고 다음 해 늦여름에 가서야 완전히 자라난다. 잎이 자라날 때는 늘 물을 주고 음지에 두어 건조하지 않게한다. 거둬 둘 때 너무 따뜻하게 하지 말고, 사람의 훈김에 뜨지 않게한다.'
연꽃
주렴계는 '애련설(愛蓮說)'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연꽃을 사랑함은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고, 맑은 물결에 씻어도 요염하지 않고, 속은 툭 터지고 밖은 곧으며, 덩굴지지 않고 가지가 없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으며, 우뚝 깨끗이 서 있는 모습이 멀리서 바라볼 만하기 때문이다.'
연을 심는 법은, 우분(牛糞)을 친 진땅에 입하(立夏) 전 3-4일에 연뿌리를 캐어 마디를 따서 머리를 진흙에 꽂아 심으면, 그 해에 바로 꽃이 핀다.
벼슬을 그만두고 속진에 젖은 옷을 활활 벗어 버리고, 저 한가로운 강호(江湖)에 나아가 소요하지는 못할지라도, 공사(公事)를 마치고 물러 나오면, 시원한 바람과 맑은 달빛 아래 연꽃 향기 드높고, 창포 그림자 너울거리며, 개구리밥 사이로 어족(魚族)들이 활발하게 뛰노는 것을 본다.
이때 앞가슴을 활짝 헤치고 휘파람도 불고, 시도 읊으며 이리저리 거니노라면, 몸은 비록 명리의 굴레에 얶매였다 할지라도, 정신은 세속 밖에 우유(優遊)하여 정서와 회포를 마음껏 펼 수 있다.
치자화(梔子花)
치자는 네 가지 아름다움이 있으니, 꽃 빛깔이 희고 기름진 것이 그 하나요, 꽃향기가 맑고 풍부한 것이 그 둘이요, 겨울에 잎이 변하지 않는 것이 그 셋이요, 열매가 노란 빛으로 물드는 것이 그 넷이다.
산다화(山茶花)
우리나라에 네 종류가 있는데, 단엽홍화(單葉紅花)로 눈 속에 피는 것은 동백이라 하고, 단엽분화(單葉粉花)로 봄에 피는 것을 춘동백, 서울에서 심어 기르는 것을 천엽동백(千葉冬栢), 꽃술에 금빛 조알이 붙는 것은 이른바 보주다(寶珠茶)란 것이다.
꽃을 취하는 법
화훼를 취하는 것은 마음과 뜻을 닦고 덕성을 함양하고자 함이니, 운치와 격조, 절조가 없는 꽃은 완상할 만한 것이 못되니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다. 가까이 하면 열사(烈士)와 비부(鄙夫)가 한 방에 같이 사는 것과 같아서 풍격이 전혀 없다.
꽃을 기르는 뜻
화목이 지닌 물성(物性)을 법도로 하여 덕(德)으로 삼기 위함이다. 은일을 자랑하는 국화, 품격이 높은 매화와 난초, 고고하고 절개 있는 창포, 굳건한 덕을 지닌 괴석. 이들은 마땅히 군자가 벗삼아야 할 것이다.
농촌생활의 백과사전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
요즘은 우리 선조들이 살아온 농촌 모습이 사라졌다. 그런데 다행히 이 아쉬움을 풀어줄 책이 있으니, 조선 후기 실학자 홍만선(洪萬選)이 저술한 '산림경제(山林經濟)'가 그 책 이다.
산림경제
홍만선(1643-1715)은 풍산 홍씨 후손으로 예조판서 홍주국(洪柱國)의 아들이다. 상주 목사 등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이 책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문에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의향에 따라 꽃과 대를 심고 적성에 맞추어 새와 물고기를 기르는 것, 이것이 곧 산림경제(山林經濟)다.'라고 했는데, 내가 그 말을 음미하고 뜻을 취해서 책 이름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산림경제는 터를 골라 집을 짓는 법, 농사 짓고 종자 선택하는 법, 수박, 오이, 마늘 재배법, 밤 대추, 과수 재배법, 양봉, 양어, 양록(養鹿) 하는 법, 술과 음식 만드는 법, 약재 심고 가꾸는 법, 병 치료 법 등 농가생활에 필요한 것을 전4권 4책에 총 16 항목(志)으로 백과사전식으로 기술하였다.
복거(卜居)
명산(名山)에 복거할 수 없으면 산등성이가 겹으로 감싸고 수목이 우거진 곳에다 몇 묘(畝=30 평)의 땅을 개
간하여 삼간집을 짓고, 무궁화를 심고 띠를 엮어 정자를 지어서, 1묘에는 대와 나무를 심고, 1묘에는 오이와
채소를 심으면 노년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왕면(王冕)은 구리산(九里山)에 은거하며 초가삼간을 지어놓고 스스로 매화당(梅花堂)이라 이름하고, 매화
1천 그루를 심었다. 토란 한 뙈기와 파 부추 각각 1백 포기를 심었으며, 물을 끌어다 못을 만들어 물고기 1천
마리를 길렀다.
집터는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데가 제일 좋고 그 반대면 부자가 못 된다. 앞이 높고 뒤가 낮으면 북향집이
되어 집안이 망하고, 뒤가 높고 앞이 낮으면 우마(牛馬)가 번식한다. 또 사면이 높고 가운데가 낮으면 비록
부자일지라도 점점 가난해지므로 차라리 평탄한 곳이 좋다.
땅은 윤기가 있어야 하고 기름지며 햇볕이 잘 드는 양명(陽明)한 곳이라야 한다. 집의 동쪽에 흘러가는 물이
있으면 길하고, 남쪽에 큰 길이 있으면 부귀하게 되고, 큰 길이 동쪽이나 북쪽에 있으면 흉하다.
대문 문짝과 단장은 모름지기 크기를 똑같이 해야 한다. 왼쪽이 크면 아내를 바꾸고, 오른쪽이 크면 고아나
과부가 생긴다. 문 입구에 물구덩이가 있으면 집이 파산하고, 물길이 대문 앞에 부딪치면 패역한 자손이 나
고, 문 가운데로 물이 나가면 재물이 흩어진다.
섭생(攝生)
섭생은 몇가지를 유의해야 한다. 첫째 명예나 이권에 담박하고, 둘째 음악과 여색을 금하며, 셋째 재물에 청렴하고, 넷째 맛있는 음식을 줄이며, 다섯째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여섯째 질투하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이 여섯 가지 독을 버리지 못하면 양생법을 실시해도 헛것이다. 유익함을 얻을 수 없다.
얼굴은 항상 두 손으로 비벼서 뜨겁게 하면 기가 흐른다. 먼저 손바닥을 비벼서 열이 나게 한 다음, 그 손바닥으로 얼굴과 눈을 비비는데, 목 뒤와 양쪽 살쩍(관자놀이와 귀 사이에 난 털) 있는 곳을 번갈아가며 마치 머리를 빗는 것처럼 수십 번 빗으면, 얼굴에 광택이 나고, 주름살이 생기기 않으며, 오랫동안 계속하여 5년이 되면 얼굴이 소녀와 같이 된다.
귀는 자주 문질러야 한다. 양쪽 귀를 자주 치켜올리면 청력이 좋아진다.
치농(治農)
보리와 밀은 일찍 심으면 뿌리가 깊어 추위를 잘 견디고, 늦게 심으면 이삭이 짙다. 그 해 살구가 많이 열리면 밀이 벌레 먹지 않고, 복숭아가 많이 열리면 보리가 벌레 먹지 않는다.
물이 괸 참외나 꼭지가 둘인 것, 배꼽이 둘인 참외를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 참외가 대서(大暑)까지 익지 않으면 말린 조기 뼈를 참외 이마에 꽂아놓으면 꼬투리가 떨어지면서 익는다.
박이 크게 열리게 하려면 2월에 종자 10여 개씩 심어놓고, 싹이 나면 포동포동한 줄기를 가려 대나무칼로 반쪽 껍질을 벗겨 서로 묶고 나무 접붙이듯 소똥과 황토 진흙으로 봉하여 싸둔다. 줄기가 살아나거던 살아난 줄기끼리 앞서와 같은 방법으로 접붙인다. 이렇게 하면 네 줄기가 한 줄기가 된다. 박이 맺힐 때 두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따버리면, 한 개가 한 지게의 쌀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박이 된다. 이 박을 허리에 메고 물을 건너면 익사를 면할 수 있다.
상추는 줄기가 흰 것이 좋고, 붉은 것은 좋지 않다. 잣나무 잎을 송진과 함께 오래 먹으면 곡식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다. 하수오는 자주꽃에 황백색의 잎이다. 잎은 반드시 상대하여 나는데 뿌리는 주먹만 하다. 적색과 백색 두 종류가 있는데, 적색은 수컷이고 백색은 암컷이다. 뿌리 형상이 짐승이나 산약처럼 생긴 것이 진품이다. 버섯은 느름나무, 버드나무, 뽕나무, 희나무, 닥나무에 나는 것이 먹는 버섯이며, 소나무, 팽나무, 참나무 버섯은 독이 없다.
종수(種樹)
10년 계획으로 알맞은 나무를 심으면 봄에는 꽃을 볼 수 있고, 여름에는 그늘을 즐길 수 있으며, 가을에는 열매를 먹을 수 있다. 자산 늘리는 방법이다.
뿌리는 편안하게 뻗기를 원하고, 흙은 원래 서 있던 곳과 같기를 원하며, 구덩이는 단단히 메워지기를 바란다.
과일나무는 보름 전에 심으면 열매가 많이 달리고, 후에 심으면 적게 달린다. 접붙이기는 싹이 틀 때가 좋다. 접붙일 때 남쪽으로 뻗은 가지를 쓰면 열매가 많이 달린다. 정월 초하루 해가 뜨기 전, 납작하고 길쭉한 돌을 과일나무 가지에 끼워두면 열매가 많이 달리고 튼실해진다. 이를 '과일나무 시집 보낸다'고 한다. 정월 초하룻날 닭이 울 때 횃불로 과수나무를 그을리면 잠복중인 벌레를 살충할 수 있다. 정월 초하루 5경(五更, 새벽 3-5시)에 도끼로 나무 둥치를 찍으면 열매가 떨어지지 않고 잘 열린다. 정월에 곁가지들을 전정하면 힘이 갈리지 않아 열매가 탐스러우며 굵어진다.
소나무는 비스듬히 누워 줄기가 비틀어진 것이 좋고, 잎은 가늘고 짧은 것이 좋고, 가지 끝에 솔방울이 달린 것이 좋고, 둥치에 만년화(萬年花, 이끼의 일종)가 낀채 바위 사이에 붙어 사는 것을 가장 상품으로 친다.
5월 13일은 옛사람들이 죽취일(竹醉日), 또는 죽미일(竹迷日)이라고 하는 날로, 이날 대나무를 심으면 무성하게 자란다. 대나무 줄기를 한두 자 쯤 찍어낸 뒤 삽으로 뿌리를 자르고 흙으로 덮고 마르지 않게 물을 주며 돌보다가 예정된 때가 되어 옮기면 그 즉시 살아나며 잎갈이도 하지 않는다. 이미 곁뿌리를 잘라 대나무 줄기가 성장을 멈추었기 때문에 옮겨 심어도 탈이 없다
매화는 둥치가 비스듬히 옆으로 눕고, 늙은 가지가 기괴하게 생긴 것을 귀하게 여긴다. 화분은 꽃봉오리가 맺히면 따뜻한 방안에 들여놓고, 가지와 뿌리에 미지근한 물을 뿜어주고, 옆에 화로를 두어 찬 공기가 닿지않게 해 주면 동지 전에 꽃봉오리가 터진다. 꽃이 진 뒤에 찬 공기를 피해 움 속에 두면 열매를 맺는다.
국화는 붉은 줄기에 노란 꽃이 피는 감국(甘菊)이 도연명이 사랑했던 국화 이다. 붉은 국화는 청초한 맛이 없고 사치스러워 사람을 역겹게 한다. 뿌리는 물을 싫어하니, 창호지를 길게 오려서 한쪽은 밑둥에 감고 한쪽은 물그릇에 담아놓으면 물이 종이에 스며 저절로 줄기를 적셔준다. 누런 잎이 생기면 부추 뿌리를 즙 내어 뿌리에 부어주면 파랗게 회복된다.
난초는 한줄기에 꽃이 하나 피는 것을 난(蘭)이라 하고, 6-7 송이 피는 것을 혜(蕙)라 한다. 혜는 향기가 약하다. 모래 자갈에 심고 반음반양인 곳에 두어야 하며, 차를 식힌 후 부어주면 향이 좋아진다. 우리나라 남쪽 해안에 자생하는 춘난은 초봄에 꽃이 피는데, 광택 있는 녹색 잎은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언 뒤에도 싱싱하다.
우리나라 괴석은 개성 경천사 근처에는 나는 돌이 유명하다. 돌 빛깔이 푸른데, 봉우리가 높고, 계곡은 깊고, 낭떠러지가 깍아지른듯 구름과 우뢰를 은은히 간직하고 있는 형상이다. 수반 위에 놓으면 물을 빨아올려 꼭대기까지 촉촉히 이끼가 끼고 뙤약볕에도 마르지 않아 침향석(沈香石)이라 부른다. 참으로 천하에 다시 없는 보배이다.
수락산에서 나오는 괴석은 돌의 질이 굳으면서도 물을 잘 빨아올리는데 빛깔이 검푸르다.
괴석에 이끼를 돋게 하려면 마른 말똥과 진흙을 섞어서 돌에 바르고 습기찬 곳에 두면 된다.
양화(養花)
황량한 들판이나 적막한 물가에서 벗이 없어 정 붙일 곳이 없다면, 꽃을 가꾸고 대나무를 재배하는 것도 세월을 보내는 한 가지 방법이다.
분재는 정월이나 2월에 거름흙을 주고 옮겨 심거나 씨를 뿌리는데, 꽃망울이 맺히면 거름 물을 주어 3~4월에 분을 올리는 것이 좋다.
말똥을 물에 섞어 꽃나무에 주면 일찍 꽃이 피고, 붉은 꽃을 희게 하려면 유황 연기를 이용하며, 석류, 치자, 동백, 사계화 등은 꽃이 진 뒤에는 흙에 묻어주는 것이 좋다.
거름은 닭이나 거위나 누에 똥 혹은 인분을 물에 우려 쓰면 좋다. 싹이 올라올 때는 연한 뿌리가 자라나는 시기이므로 거름물을 주지 말아야 한다. 거름물을 주면 곧 죽는다. 연한 줄기가 웬만큼 자랐거나 꽃망울이 맺히기 시작하면 다시 거름물을 주기 시작한다. 그러나 꽃이 필 때 주면 안된다. 아침 저녁으로 물만 주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잉어 기르기
못을 파는데, 못 가운데 산을 쌓는다. 알 밴 잉어 20 마리와 수잉어 3척짜리 네마리를 2월에 못 속에 넣고, 4개월 지나면 신수(神守, 자라)를 넣고, 6개월 후 두번째 자라를, 8개월에 세번째 자라를 넣는다. 잉어는 숫자가 많으면 달아나버리는데, 자라가 있으면 달아나지 않는다.
이듬해 2월이 되면 길이 1척짜리 잉어 1만 마리, 2척짜리 4천 마리, 3척짜리 4만 마리를 얻게되고, 다음 해는 1척짜리 10만 마리, 2척짜리 5만 마리, 3척짜리 4만 마리를 얻게 된다.
이때 2척짜리 2천 마리만 종자로 남겨두고 모두 팔아버려도, 잉어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게 된다.
치선(治膳)
치선은 식품저장과 반찬의 조리와 가공법 이다.
채소로 가장 맛있는 것은 이른 봄 갓 돋은 부추와 늦여름 늦갈이 배추다. 시골에 반찬이 쉽지 않지만, 그런대로 개운한 음식이 있다. 연밥과 연뿌리는 단맛을 취하고, 아욱은 담담함을, 토란은 매끄러움을 취한다. 병풍나물은 그 싹을 이슬 마르기 전 새벽에 따서, 멥쌀 죽이 반쯤 익었을 때 넣고 끓여서, 사기그릇에 담아 식혀 먹으면, 입 안이 온통 달고 향기로우며 사흘이 되어도 기운이 줄지 않는다.
게를 기르는 법은, 가을에 게를 잡아 암수 구별없이 대바구니에 담아 폭포 밑이나 급한 여울에 매달아 두고 벼이삭을 먹인다. 이듬해 보면 살이 많이 찌고, 껍질 속의 누렇고 흰 황고백방(黃膏白肪)이 비길 데 없이 맛이 좋다.
참기름은 하지 때 도자기병에 밀봉하여 기와지붕 위에 두었다가 입추 때 내리면 아주 맑은 기름이 된다. 누에 치는 방 등불로 쓰면 벌레가 꾀지 않고, 아낙네 머리에 바르면 검고 윤이 나며 이도 없어진다.
음식의 금기 사항과 구급법
음식에 금기사항이 있으니, 복숭아나 살구가 씨가 둘 있는 것은 독이 있다. 홍시와 술을 같이 먹으면 안된다. 메밀과 돼지고기를 같이 먹으면 열풍이 나서 머리털이 빠진다. 감과 배를 게와 같이 먹으면 안된다. 붕어를 맥문동과 같이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 물에 뜨는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된다. 발이 흰 오골계를 먹으면 안된다. 소고기 돼지고기를 같이 먹으면 촌백충이 생기고, 소고기와 막걸리를 같이 먹어도 촌백충이 생긴다. 기름진 고기와 뜨거운 국을 먹은 후 냉수를 마시면 안된다.
버섯을 먹고 중독되었을 때 참기름을 마시면 된다. 식중독으로 고생할 때는 감초와 냉이를 진하게 다려 먹이면 입에 들어가자마자 살아난다. 가축 고기를 먹고 중독되었을 때는, 귤 껍질 혹은 검은 콩이나 산초 달인 즙을 먹이면 좋다. 또 갈대 뿌리, 봉선화의 잎, 줄기, 뿌리를 즙 내어 먹이거나, 생 산약(山藥)을 물에 갈아서 먹이면 신효하다.
물고기 먹고 중독되면, 동과(冬瓜) 즙이 가장 효험 있고, 귤 껍질 혹은 대두즙도 효험이 있다. 복어 독은 갈대 뿌리를 즙을 내어 마시거나, 인분 즙, 백반이나 편두콩 가루를 물에 타 먹인다. 뱀에 물렸을 때는 웅황 혹은 백반을 붙여주면 즉시 낫는다. 벌에 쏘였을 때는 박하 혹은 생강 줄기를 비벼서 문질러 준다.
약재 법제(法製)와 복용법
약재를 불에 굽고, 잿속에 묻고, 볶는 것은 독을 없애려는 것이다. 생강즙 혹은 꿀이나 우유에 담그는 것은 경락(經絡) 따라 순행케 하려는 것이다. 약기운이 폐로 들어가게 하려면 꿀을 섞어야 하고, 비장으로 들어가게 하려면 생강즙을 섞어야 하며, 신장에 들어가게 하려면 소금을 사용해야 한다. 간에 들어가게 하려면 초를 사용해야 하며, 심장에 들어가게 하려면 동변(童便, 열두 살 이하 사내아이의 오줌)을 사용해야 한다.
약 달이는 그릇은 은이나 돌그릇을 사용하되, 병이 몸 상체에 있을 때는 센 불에 달여야 하고, 하체에 있을 때는 약한 불에 달여야 한다. 병이 가슴 위에 있을 때는 식사 후에 복용하고, 아래에 있을 때는 약을 먹고나서 식사를 한다. 병이 사지의 혈맥에 있을 때는 공복에 먹어야 하는데 아침이 좋고, 골수에 있을 때는 배불리 먹은 뒤에 먹는데 밤이 좋다.
잡방(雜方)
잡방은 문방사우 관리법과 먹을 만드는 법, 서화를 씻고 보관하고 배접하는 법, 베게와 요를 만드는 법, 거문고 사용법, 칼을 갈아 광을 내는 법 등이 소개되어 있다.
붓을 만들 때는 재료인 토끼털이나 쥐수염을 열탕 그릇에 담가 밥 한끼 먹을 동안 놓아두었다가 냉수에 살살 흔들어 빤다. 그래도 기름기가 많으면 조각자탕에 빨아내면 좋다. 붓이 좀먹지 않게 하려면 조피나무와 황경나무 끓인 물에 소나무 태운 그을음을 갈아서 붓에 물들이면 된다.
먹을 만드는 방법은, 소나무 태운 그을음을 푹 쪄서 말린 다음 아교나 계란 노른자를 섞어, 쇠절구에 넣고 3만 번 이상 찧은 뒤, 적당한 크기의 틀에 넣어 만든다.
벼루는 쓰고나면 씻어야 한다. 씻지않고 며칠 지나면 먹 색깔이 나빠진다. 벼루 씻는 데는 뜨거운 물을 써도 않되고, 털로 짠 거친 천으로 문질러도 안된다.
연적은 자기(瓷器)가 좋고, 대나무 연적은 품위가 청아해서 더 좋다. 구리 연적은 독기가 있어 붓털을 약하게 한다.
지팡이는 반죽(斑竹, 얼룩무늬가 있는 대)을 상품으로 여긴다.
옥을 조각하기 쉽도록 부드럽게 하려면 두꺼비 기름을 바르면 된다.
산속에서 사람 모양으로 변신한 여우나 도깨비가 달려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크기가 9촌 되는 거울을 등 뒤에 달아 그들 형상이 거울에 비치게 하면, 본색이 들어나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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