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편 2
무엇이 진정한 다도(茶道)일까
육우(陸羽)의 다경(茶經)
'다경(茶經)'은 세계 최초 차에 관한 책이다. 당나라 때 육우(陸羽, 733-804) 저술로, 우리나라 초의(草衣, 1786~1866) 스님이 홍현주로부터 차를 알고 싶다는 부탁을 받고 편지로 답한 '동다송(東茶頌)' 보다 천 년 전 책이다.
*두 편의 체제와 내용이 거의 비슷하다.
육우는 733년 용개사(龍蓋寺)의 지적선사(智積禪師)가 복주(復州) 경릉군(竟陵郡) 호수 제방을 걷다가 풀숲에서 아기를 발견하여 절로 데리고와서 키웠다. 성은 스님 성을 따 '육(陸)'으로, 이름은 점괘에 '큰기러기가 서서히 땅에서 날아오른다' 뜻이 나와 '우(羽)'로 지었다. 자는 큰기러기를 뜻하는 홍점(鴻漸) 이다.
육우는 얼굴이 못생기고 말마저 심하게 더듬었지만 재주가 많았다. 20세 때 경릉 사마(司馬, 병권 통솔자) 최국보 눈에 들어 그가 추부자(鄒夫子)에게 보내 공부를 시켰는데, 거기서 찻잎 따고 차 끓이는 법을 배웠다. 화문산 남쪽 샘물로 차를 끓여, 이 샘을 육우천(陸羽泉)이라 부른다. 22세 때 최국보와 헤어질 때 육우에게 흰 나귀 한 마리와 괴목으로 만든 서함을 선물하였으니, 최국보가 그를 얼마나 아꼈던가 알 수 있다.
756년 '안록산(安綠山)의 난'이 일어나자 피신하여, 24세 때 절강성(浙江省) 호주(湖州)의 한 암자에 은거하면서 차를 연구하였다. 27세 때 여류 시인 이야(李冶)의 차 스승이 되기도 했다. 이야는 도관(道觀, 도교 사원)의 여도사였고 나중에 덕종의 총애를 받았다.
또 시인이던 교연(皎然)스님과 교분을 가져, 육우는 교연의 묘희사(妙喜寺) 근처에 초가집을 짓고 내왕하면서 차와 시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교연은 어느 해, 국화를 감상하며 ‘9일 육처사 우와 함께 차를 마시다(九日與陸處士羽飮茶)’란 시를 읊었다.
9일 산승의 암자엔(九日山僧院)
국화가 동쪽 울타리에 노랗게 피었는데(東籬菊也黃)
속인들은 흔히 술에 국화를 띄우지만(俗人多泛酒)
누가 국화 향을 빌려와서 차향을 돕게 하는가(誰借助茶香)
육우는 교연스님 권유로 옛사람의 차의 내력을 집대성하기로 결심하고, 오흥(吳興)의 암자에 은거하면서, 호를 '상저옹(桑苧翁)'으로 하고, 저서를 집필하여 28세 때 '다경(茶經)' 초고(草稿)를 완성했다.
다경
774년 육우는 명필 안진경(顔眞卿)이 호주자사(湖州刺使)로 부임해 '운해경원(韻海鏡源)'을 저술할 때 참여했고, 안진경은 왕희지와의 교류를 주선해주었다. 그때 들은 차의 고사를 제7장에 보충하여 '다경(茶經)'을 탈고했다.
804년 72세의 나이로 호주(湖州)에서 생을 마쳤고, 육우의 묘는 항주에 있다. 다성(茶聖) 다신(茶神)으로 숭앙 받아, 1995년 10월, 항주시 인민위원회가 묘역에 ‘당옹육우지묘’라는 비석을 세웠다.
다경(茶經)
다경(茶經)은 3권 10장으로 되어있다.
제1장은 차의 근원을 기술하였다.
차는 남방에서 자라는 상서로운 나무로 한두 자에서 수십 자까지 자란다. 나무는 과로목(瓜蘆木) 같고, 잎은 치자(梔子) 같으며, 꽃은 흰장미 같고, 열매는 종려(棕櫚) 같으며, 줄기는 정향(丁香) 같고, 뿌리는 호도(胡挑)를 닮았다.
차를 뜻하는 글자는 차(茶), 가(檟), 설 (蔎), 명 (茗), 천 (荈)이 있다. 곽홍농(郭弘農)은 말하기를 '일찍 딴 것을 차라 하고, 늦게 딴 것을 명(茗), 혹은 천(荈)이라 한다' 하였다.
상품(上品)은 자갈밭에서 나며, 중품(中品)은 사질(砂質)에서 나며, 하품(下品)은 황토땅에서 자란다.
심는 법은 참외 심듯이 하는데, 삼 년이면 딸만 하다. 차나무는 산야의 야
생차가 상이며. 밭에서 재배된 차는 차등품이다.
색깔은 자색(紫色)이 으뜸이요 녹색(綠色)이 그 다음이다.
첫 순이 상품이고, 싹이 그 다음이며, 잎이 말린 것이 상이며, 펴진 것이 다음이다.
제2장은 다구(茶具)를 설명하였다.
바구니, 광주리, 시루(甑), 절구통(杵臼), 송곳칼(棨), 두드리개 채찍(撲), 선반(棚), 꿰미(穿), 차를 보관하는 장육기(藏育器) 등을 기술하였다.
제3장은 채엽(採葉)과 제다(製茶) 과정을 기술하였다.
차를 따는 시기는 음력 2-4월 사이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 밤이슬 흠뻑 머금은 잎을 딴 것이 상품이고, 한낮에 딴 차는 그 다음이며, 흐린 날씨나 비가 올 때는 따지 말아야 한다.
차 싹 중에서도 송곳의 끝처럼 쑥 빼어난 자순(紫筍)과 녹아(綠芽)를 골라 딴다.
차를 만드는 방법은 수증기로 찌고(蒸), 절구통에 찧고(搗), 떡차의 경우는 두드리고(拍), 불에 쪼이고(焙), 틀에 넣고 압착하여 동그라미, 네모나 꽃 모양으로 박아내고, 대발에 펼쳐 말리고, 말린 차의 한가운데 창으로 구멍을 뚫은 후, 막대기로 꿰어 배로(焙爐)위에서 다시 불에 쬐어 말리고, 대나무나 닥나무 껍질을 꼬인 꿰미에 차를 꿰어서, 습기가 스미지 않는 종이나 나무통에 보관한다.
떡차를 달여 마시고자 할 때는 장육기(藏育器)에서 차를 꺼내어 집게에 끼워서 불에 바싹대고, 여러 번 뒤쳐 가며 바르게 구워지도록 맞춘다. 떡차의 표면이 마치 두꺼비의 잔등처럼 우굴 쭈굴할 정도로 부풀어 오르게 굽는다.
제4장은 차 끓이고, 병차(餠茶) 건조하는데 필요한 29가지 다기(茶器)를 소개하였다.
*차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기구를 다구(茶具)라고 하고, 차를 달이고 마시는데 필요한 것을 다기(茶器)라 한다.
풍로(風爐), 타고 남은 재를 회수하는 회승(灰承), 떡차를 불에 쪼일 때 쓰는 청죽(靑竹)으로 만든 죽협(竹莢), 불에 쪼인 차를 담아 향기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한 지낭(紙囊). 차가루 모울 때 쓰는 불말(拂末), 탕 젓는데 쓰는 젓가락 목협(木莢), 소금 뜨는 숟가락 게(揭), 찻잔 완(碗), 생수 담는 수방(水方), 뜨거운 열탕 담는 숙우(熟盂), 다기 씻는 척방(滌方), 차 찌꺼기 담는 재방(滓方), 다기 집어넣는 대(竹)로 만든 도람(都籃) 등이다.
제5장은 차 끓이는 법을 기술하였다.
차 달이는 불은 숯을 쓰며, 그 다음으로는 섶나무를 쓴다.
숯의 선택은 고기를 구웠던 적 없는 깨끗한 것을 사용한다. 뽕나무, 홰나무, 오동나무가 적당하다. 측백나무 계수나무 같이 기름성분이나 특이한 향을 지닌 것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썩은 나무나 오래된 폐가구나 수레바퀴처럼 다른 곳에 사용되었던 나무는 사용할 수 없다.
차에 사용하는 물은 산수(山水)가 상이요, 강물이 중이고, 우물물이 하등이다.
산수는 젖처럼 돌 사이 못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좋으며(乳泉 石池漫流), 폭포같이 용솟음 치는 물과 여울물은 오래 먹으면 사람 목 부분에 병이 생길 수 있다. 강물은 가급적 사람과 멀리 떨어진 것을 취함이 좋고, 우물물은 사람이 많이 긷는 곳의 물이 좋다.
찻물 끓이는데 있어서는, 첫번째 어슴푸레하게 물 끓는 소리에서 솥바닥에 물고기의 눈(魚目)과 같은 기포가 생겨나며 약간의 소리가 난다. 이때가 일비(一沸)이다. 이때 숯불에 의해 물위에 검은 수막(黑雲母)이 뜨면 이를 제거한다. 흑운모는 차의 순정한 맛을 손상시키기 때문에 마시지 않는다.
두 번째는 솥의 가장자리까지 열이 전도되어 물이 뒤집히며 기포가 구슬같이 올라온다. 이때가 이비(二沸)이다. 세 번째 단계는 물결이 넘실거리고 북치는 소리가 난다. 이때가 삼비(三沸)이다. 그 이상 올라가면 물이 쇠어서 먹지못한다.
표주박으로 미리 떠내어 물바리에 식힌 물을 찻솥에 붓고 찻물의 온도를 급히 식힌다. 이것을 구비(救沸) 혹은 육화(育華)라고 하는데, 이는 찻물의 정기(精氣)를 기르기 위함이다.
찻물 위에 뜨는 차가루의 거품을 말발(沫餑)이라고 한다. 큰 꽃모양 거품을 발(餑)이라 하고, 작은 거품은 말(沫)이라 하며, 가늘고 가벼운 거품을 화(花)라 한다. 말(沫)의 모습은 녹색 이끼가 물가에 떠 있는 것과 같고, 국화꽃이 쟁반에 떨어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 모양이 마치 대추꽃이 둥근 연못가로 두둥실 떠 있는 것 같고, 연못이나 구부러져 흐르는 물가에 푸른 부평초가 자라는 모양 같으며, 맑게 개인 날 하늘에 비늘구름이 떠 있는 것 같다. 발(餑)과 말(沫)이 포개어져 있는 모습은 희끗희끗하게 눈이 쌓인 것 같다.
차를 나눌 때 특히 주의할 것은 말(沫) 발(餑) 화(花)를 고르게 나누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세가지 거품을 총칭하여 '화(華)'라고 한다. 거품은 차탕의 꽃으로서, 한사발 춘설차는 제호(醍醐)보다 낫다.
물 한되를 끓이면 차가 다섯 사발정도 나온다. 끓여낸 차 가운데 가장 향기로운 것은 첫번째와 두번째 사발이다. 세번째는 그 다음이고, 그 다음이 네 번째 다섯번째 사발, 그 다음은 갈증이 심하지 않으면 마시지 말도록 한다.
차탕은 뜨거울 때 잇대어 마셔야 한다. 무겁고 탁한 것은 아래에 엉키고, 정화는 위에 뜨기 때문이다. 만약 차가 식으면 정화의 향기도 열기를 따라서 사라진다.
차의 성품은 검소하므로 진하게 마셔서는 안된다. 차가 진하면 참된 맛이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차탕의 빛깔은 담황색이다. 그 향기는 매우 아름답다. 차 맛은 단 것은 가(檟)이며, 달지 않고 쓴 것은 천(荈)이고, 마시면 쓰지만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단 것이 차(茶) 이다.
목이 마르면 장(醬)을 마시고, 근심과 번뇌를 벗어버리려면 술을 마시고, 정신을 맑게 하고 잠을 깨려면 차를 마신다.
제6장은 차의 음용편이다.
육우는 이 장에서 '물을 마시는 것은 생명을 위해서이며, 차를 마시는 것은 정신을 위한 것'이라 선언해서, 물 마시는 것과 차 마시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 '음차의 요체는 정미함을 맛보고 마음의 참모습과 자연의 도를 깨달으려면 마땅히 맑게 마시는 것을 아름다움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차를 음료를 삼은 것은 신농씨(神農氏)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 후 춘추, 진한(秦漢), 삼국시대 사람들이 모두 차 마시기를 좋아했고, 당(唐)에 이르러 극성에 달했다. 당시 차는 조차(粗茶), 산차(散茶), 말차(末茶), 병차(餠茶) 등이 있고, 일부 사람들은 파, 새양, 대추, 귤껍질, 수유(茱萸), 박하 등을 넣고 끓이기도 했다.
차에는 아홉가지 어려운 점이 있다.
첫째는 제조인데, 흐린 날에 채집하고 야간에 말리면 제조가 부당하다. 둘째는 감별하는 법인데, 입으로 씹어 냄새를 분별하고, 코로 향기를 쿵쿵 맡는 감별법은 부당하다. 셋째 다기 다루는 법인데, 노린내 나는 가마와 비린내 나는 대야를 사용하면 용기가 부당하다. 넷째 불 다루는 법인데, 연기 나는 장작과 고기 구운 숯을 사용하면 연료가 부당하다. 다섯째 물 선별하는 법인데, 급히 흐르는 물과 막혀서 정체된 물을 사용하면 용수가 부당하다. 여섯째 떡차 굽는 법인데, 밖은 익고 안은 생것으로 구우면 굽는 방법이 부당하다. 일곱째 떡차 가루 내는 방법인데, 너무 가늘게 찧어 티끌같이 부순 가루를 만들면 찧는 법이 부당하다. 여덟째 차를 다리는 방법인데, 조작이 숙련되지 못해 너무 휘저어 급하게 다리는 것은 부당하다. 아홉째 음다방법인데, 여름에 마시고 겨울에 마시지 않으면 음용이 부당하다.(사시사철 마시어 심장과 폐장을 청량하게 해야 한다).
상술한 '9가지 어려운 점'을 해결하면, 한 공기의 좋은 차를 마실 수 있다.
제7장은 차의 고사를 설명하였다.
삼황(三黃) 때에 염제(炎帝)인 신농씨(神農氏)로 부터, 노(魯)나라 주공(周公), 제(齊)나라 안영, 한(漢)나라 때 선인(仙人)인 단구자(丹丘子), 황산군(黃山君), 사마상여(司馬相如), 양웅(楊雄) 등 선인(仙人)들이 차 마신 일화를 기술하였다.
제8장은 차 산지를 기술하였다.
당시 전국 40여 차 생산지의 차를 등급을 매겨 소개하였다. 그가 매긴 차의 등급은 상(上), 차(次), 하(下), 우하(又下)의 4등급이다. 산남지방의 협주(峽州), 양주(襄州), 형주(荊州), 형주(衡州), 금주(金州), 양주(梁州) 차를 품평하고. 회남(淮南)지방의 광주(光州), 의양군(義陽郡), 서주(舒州), 수주(壽州), 황주(黃州) 차를 소개했다. 또 절서(浙西)지방의 호주(湖州), 상주(常州), 선주(宣州), 항주(杭州), 윤주(潤州), 소주(蘇州) 차를 품평하고, 검남(劒南)지방의 팽주(彭州), 면주(綿州), 촉주(蜀州), 미주(眉州), 한주(漢州) 차를 소개하고, 절동(浙東)지방의 월주(越州), 명주(明州), 태주(台州) 차를 소개했다.
제9장에서는 다구의 간소화를 설명하고 있다.
간소함(簡)은 검약함(儉)에서 나오고 검약해야 고상하다.
벌판의 절간이나 동산에서 제다를 할 때에는 송곳칼인 계(棨), 두드리게 채찍인 박(樸), 꿰뚫개 관(貫), 선반 붕(棚), 꿰미 천(穿), 차 보관하는 장육기(藏育器) 등 7가지는 모두 쓰지 않는다.
다기들을 돌 위에 앉힐 수 있다면 다기를 거두어 진열하는 구열(具列)은 필요 없고, 마른 섶나무와 다리 굽은 솥을 쓸 수 있다면 풍로(風爐), 재받이 회승(灰承), 부젓가락 화협(火夾) 따위는 들고가지 않아도 된다.
만약 샘물이나 산골물 근처에서 차를 달이면 물통 수방(水方), 개숫물통 척방(滌方) 등은 필요치 않다.
또 가루차가 정제된 것이라면 체로 쓰는 라(羅)는 휴대할 필요가 없고, 가루털개 불말(拂末)도 필요치 않다. 대젓가락 죽협(竹夾), 주발 완(碗), 물바리 숙우(熟盂), 소금단지 차궤(茶櫃)를 대광주리에 담았다면, 모듬바구니 도람(都籃)은 필요치 않다.
그러나 정식 다법을 행할 때는 24개의 다구나 다기 중에서 하나만 빠져도 좋은 차를 우릴 수 없다.
제10장에서는 흰 명주천에 앞의 9장까지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었다.
*'다경(茶經)'을 보면, 인류 최초 차 마신 사람은 염제신농씨(炎帝神農氏)다. 신농씨는 호북성(湖北省) 기산(岐山) 아래 강수(姜水)에서 양을 몰던 부락민과 살았으므로 성을 강(姜)씨라 했다.
머리가 소 모양인 신농씨를 염제(炎帝, 불 임금)라고 부르는데, 그가 처음 음식을 불로 끓여 먹는 방법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는 농사짓는 법을 백성들에게 알려 주었고 온갖 초목을 헤치고 다니며 수백종의 식물을 맛보아 약초를 찾아내었다. 산야를 거닐면서 하루 칠십여 가지씩 풀잎, 나뭇잎을 씹어 그 효용을 알아보다가 독에 중독되었는데 찻잎을 씹었더니 그 독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찻잎에 해독의 효능이 있음을 알고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다.
지금 그의 능(陵)을 차능(茶陵)이라 부른다. 중국인은 지금도 햇차가 나오면 먼저 다신(茶神)인 신농씨에게 차례를 지낸다. 차(茶)라면 먼저 동이족 신농씨를 생각해야 한다.
사람의 본래 성품이 곧 부처다
혜능(惠能)의 육조단경(六祖壇經)
인도 천축국(天竺國)의 왕자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입적할 때 불법을 혜가대사(慧可大師)에게 넘겼다. 혜가대사는 법을 승찬대사(僧璨大師)에게 넘겼다. 이렇게 여섯번째 법을 이은 분이 육조(六祖) 혜능(惠能)이다.
혜능대사
혜능 대사가 보림사에 있을 때, 절 앞에 못이 있었다. 거기에 용이 늘 출몰하면서 안개와 바람을 일으키는 등 장난이 심했다. 이를 보고 하루는 대사께서 용에게 '네가 만일 신통이 장하여 몸집을 크게도 작게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면 어디 작은 몸을 나타내 보아라.' 하였다. 이에 용이 곧 작은 몸으로 변하니, 대사가 발우(鉢盂)를 보이며, '네가 이 발우 속에도 들어갈 수 있느냐' 하여, 용이 발우 속에 들어갔다.
대사가 이를 거우어 당(堂)으로 올라와 앞에 놓고 법을 설하니,용이 그 공덕으로 몸을 벗고 갔다. 그 뼈가 지금도 전해오는데, 길이가 7촌 쯤 되고 두미(頭尾)와 각족(角足)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고 한다.
대사는 713년 국은사(國恩寺)에서 재를 마치고 '내 이제 너희들과 작별하리라' 제자들에게 고하고 게송을 설하고 단정히 앉아서 삼경이 되자 천화 하셨다.
이때 향기가 절에 가득하고 무지개가 땅에서 뻗쳤다고 한다. 제자들이 대사의 진신(眞身)을 조계산(曹溪山)의 탑 속에 모셨다.
혜능은 세살 때 부친 노씨를 여의고 나무장사를 하면서 자란 무식쟁이였다. 하루는 나무를 팔고 나오다가 어떤 사람이 읽고있는 <금강경>을 듣고 마음이 후련히 열림을 깨달아 그에게 그 경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물어보니. 황매현(黃梅縣) 동선사(東禪寺)에서 얻었다고 한다.
이에 혜능은 은 열 량을 구해 어머님 양식을 구해드린 후, 동선사로 찾아가 장작 쪼개고 방아 찧는 막일을 시작했다.
동선사는 달마대사의 다섯번째 법을 이은 홍인대사(弘忍大師)가 주석하고 있었다.
혜능이 동선사에 온지 8개월 되던 어느 날 이다. 홍인대사는 문인들에게 '제각기 돌아가서 제 성품을 살펴보고 하나씩 게송(揭頌)을 지어 오너라. 그것을 보고 큰 뜻을 깨친 자에게 법을 전하여 6조(六祖)로 삼으리라' 하였다.
여러 스님이 물러나 공론을 벌인 결과, 자기들 중에 제일 재주가 좋은 신수(神秀) 상좌 한 사람만 게송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신수는 야반삼경에 복도에다 게송을 써놓았다.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若塵埃
(몸이 보리수라면 마음은 밝은 거울 같구나.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 앉고 때 끼지 않도록 하세.)
홍인대사가 이를 보고, ‘겨우 문 밖에 이르고 문 안에는 들오지 못한 경계’라고 평하였다.
혜능이 이소식을 듣고 자신은 글을 모르는지라, '나도 게송을 하나 지어볼 터이니, 누가 좀 써주기 바라오' 하며 게송을 불렀다.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若塵埃
(보리에 본디 나무가 없고, 명경 또한 틀(臺)이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인데, 어디에 때가 끼고 먼지가 있을 것인가.)
홍인대사가 이를 보고 혜능이 큰 그릇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자리서 인정하면 사람들이 혜능을 해칠까 두려워, 그날 밤 삼경에 아무도 모르게 불러, 법을 전한다는 표시로 의발(衣鉢, 가사와 바리때)을 전해주었다.
혜능은 의발을 가지고 멀리 남쪽 지방에 가서 사냥꾼 틈에 숨어 15년을 지냈다.
하루는 생각해보니 이제는 불법을 펼 때가 되었다. 그래 광주 법성사로 갔는데, 마침 바람이 불어 깃폭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걸 보고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고, 한 스님은 '깃폭이 움직인다' 하며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이에 혜능은 '그것은 바람의 움직임도 아니고, 깃폭의 움직임도 아니며, 당신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세.' 하고 알으켜 주었다. 여기서 스님들은 깜짝 놀라, 혜능이 범상치 않은 분인걸 알았다. 혜능은 여기서 비로소 신분을 숨기려고 기르고 있던 머리를 깍고, 자신이 6조 대사임을 밝히고 법문을 했다.
'세상 사람들이 종일 입으로는 반야(般若= 진리)를 염하지만, 자신의 성품이 바로 반야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마치 먹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봐도 배가 부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사람의 본래 성품이 곧 부처라, 이 성품을 떠나서 부처가 없다. 깨닫지 못하면 부처가 중생이요, 한 생각 깨달으면 중생도 부처니라. 스스로 마음을 관(觀)하여 자기 본성을 보도록 하라.'
'어떻게 함이 제 성품을 건지는 것인고? 마음 속의 사견(邪見)과 번뇌와 중생의 우치(憂痴)를 정견(正見)으로 건지는 것이니, 그릇된 생각은 올바름으로 건지고, 미혹은 깨달음으로 건지고, 어리석음은 지혜로 건지고, 악은 선으로 건져야 한다.'
'사람들은 아미타불을 외며 서방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이것은 어리석어서 자성(自性)을 모르므로 그런 것이다. 제 몸 속의 정토를 알지 못하고, 동방이니 서방이니 찾고 있지만, 깨달은 사람은 어디에 있어도 한가지임을 아느니라.'
'어떠한 것을 좌선(坐禪)이라 하느냐? 법문 중에 걸리고 막힘이 없어서, 밖으로는 일체 선악 경계에 마음과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이 좌(坐)이며, 안으로는 자성(自性)을 보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선(禪)이니라.
'무엇을 선정(禪定)이라 하는가? 밖으로 상(相, 모양)을 떠남이 선(禪)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음이 정(定)이니, 만약 밖으로 상에 걸리면 안으로 마음이 곧 어지럽고, 만약 밖으로 상을 떠나면 마음도 어지럽지 않느니라.
본 성품은 저절로 조촐하며 스스로 안정된 것이언마는, 다만 경계를 보고서 경계를 생각하므로 곧 어지럽게 되나니, 만약 모든 경계를 보되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면, 이것이 곧 참된 정(定)이니라.'
'밖으로 상을 떠나면 곧 선(禪)이며, 안으로 어지럽지 않으면 곧 정(定)이니, 외선(外禪)과 내정(內定), 이것이 곧 선정(禪定)이니라.'
무경칠서(武經七書) 제1편
손자병법(孫子兵法). 오자병법 (吳子兵法). 손빈병법(孫臏兵法)
'무경칠서(武經七書)'는 중국 북송 때부터 무인들의 과거 시험 과목일 정도의 병가 필독서다. 육도(六韜), 삼략(黃石公三略), 사마법(司馬法), 울료자(尉繚子), 손자병법(孫子兵法), 오자병법(吳子兵法), 당리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 등이 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은 제갈량, 당태종, 이순신 장군이 탐독했고, 나폴레옹, 모택동, 독일 황제 빌헬름 2세,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찌로가 애독했다. 1772년 프랑스 신부 아미오(P. Amiot)가 불어로 번역했고, 1906년 영문판이 나왔다
현재 전해지는 손자병법은 조조가 해석을 붙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13편이다. 조조는 손자병법에 주석을 달고 후에 '맹덕신서'라는 병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손무(孫武)는 기원 전 559년에 태어나 공자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의 선조 진완(陳完)은 진(陳)나라 공자로 제(齊)나라에 피신해 성을 전(田)씨로 바꾸었다. 할아버지 전서(田書)는 전쟁에서 공을 세워 제 경공(景公)으로부터 손(孫)이란 성을 하사받았다. 내란이 일어나자 손무는 오나라로 망명하여, 합려(闔慮)를 도와 3 만 군사로 30 만 초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병가에서 불후의 명저로 꼽히는 '손자병법'을 완성했다.
말년에 산속에 들어가 은둔의 삶을 살다가 기원전 470년에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고 한다.
손자
합려(闔閭)가 손무를 기용할 때 에피소드가 재미있다.
합려는 오자서를 통해 손무의 명성을 익히 들었지만, 지휘 능력을 보고 싶었다.
'실제로 군대를 훈련시켜 보일 수 있겠소?
'좋습니다.'
'여자라도 상관 없을지?'
'상관 없습니다.'
합려는 궁녀 180 명을 불러 내었다. 손자는 궁녀를 두 편으로 나누고, 갑옷과 투구를 착용시키고 검과 방패를 들게 한 뒤, 총희 두 사람을 각각 대장으로 삼았다. 그리고 북소리에 따라 진퇴, 좌우, 회선(回旋)하는 군율(軍律)을 일러주었다.'북을 1번 치면 모두 일어나고, 2번 치면 큰소리를 외치며 전진하고, 3번 치면 전투대형으로 전개한다. 내가 ‘좌로’ 하면 왼손을 보고, ‘우’로 하면 오른손을, ‘앞으로’ 하면 앞을, ‘뒤’로 하면 등 쪽을 보아라.'
그리고 북을 치면서 ‘우로’라고 호령하자, 궁녀들은 까르르 웃기만 했다. 이에 손무는,
'명령이 분명치 않고 호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은 장수의 잘못이다.'
라고 말한 후, 친히 북채를 잡고 북을 울리며 재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설명한 후 ‘좌로’하고 호령했다. 그러나 궁녀들은 여전히 입을 가리고 웃기만 했다. 그러자 손무가 집법에게 지시했다.
'부질(鈇鑕)을 대령하라!' 부질은 사람의 목과 허리를 짜르는 도끼와 그 밑받침 이다. 집법에게 물었다.'금령(禁令)이 명확치 않고 하명(下命)이 지켜지지 않는 것은 장수의 죄다. 그러나 이미 금령을 내리고, 되풀이하여 분명히 명했는데도 병사가 군령을 좇아 진퇴를 않았으니, 이는 부대장의 죄다. 군법에 따르면 어찌 해야 하는가?'
'마땅히 참수(斬首)해야 합니다.'
그러자 손무는,
'모든 사졸을 참할 수 없다. 그 죄는 두 대장에게 있다. 군령에 따라 즉시 두 대장을 참하라!'
좌우에 늘어선 아장들이 즉시 합려의 두 총희(寵姬)를 끌어내어 결박했다.
합려는 대 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대경실색했다.
'과인은 이미 장군의 용병술을 보았소. 과인은 그들이 없으면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니 참수하는 일은 하지 마시오.'
그러나 손무는, '장수는 군대에서 법을 집행할 때 군주가 설령 하명할지라도 이를 접수하지 않는 법입니다!'
하고 총희 둘의 목을 베어버렸다.
이에 궁녀들은 새파랗게 질려 감히 손무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손무가 다시 북채를 잡고 지휘하자, 대오는 좌우 진퇴가 명하는 대로 정확히 이루어졌다. 웃기는커녕 기침소리 한번 없었다.
이때 오자서가 합려에게 간했다.'신이 듣건대 용병은 흉사(凶事)니 헛되이 시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용병하는 사람은 함부로 시험하지 않는 법 입니다. 지금 대왕은 초나라를 치고 천하의 맹주가 되어 제후들을 호령하고자 합니다. 만일 손무를 장수로 삼지 않으면 누가 회하(淮河)와 사수(泗水)를 넘고 천리를 달려가 작전을 펼 것입니까?' 이 말을 듣고 합려는 손무를 상장(上將)으로 삼은 뒤 군사(軍師)의 예로 대우했다.
손자병법(孫子兵法)
총 13편으로 되어있다.
제1편 시계(始計)
싸움은 속임수이다.(兵者 詭道也). 그러므로 능하면서도 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준다. 쓰면서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여준다(用而示之不用). 가까이 있으면서도 멀게 보이게 하고, 멀리 있으면서도 가깝게 보이게한다. 이롭게 하여 유인한다(利而誘之). 어지럽게 하여 취한다(亂而取之). 실하면 대비한다(實而備之). 강하면 피한다. 성내게하여 동요시킨다(怒而撓之). 비굴하게 굴어서 교만하게 한다. 편안하면 수고롭게 한다(佚而勞之). 적들이 친밀하면 이간질한다(親而離之). 대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고, 뜻하지 않는 곳을 친다.
제2편 작전(作戰) 싸움은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질질 끌면 패망한다. 날카로움이 꺾이고 힘이 꺽하고 재정이 고갈되면, 다른 제후들이 그 틈을 타서 일어날 것이다. 싸움은 신속해야 한다고 들었으나 교묘하게 오래 끌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지혜로운 장수는 적의 물자를 얻도록 힘쓴다. 현지 조달이 전략이다. 적의 말 먹이 한 석은 본국의 이십 석과 맞먹는다.
제3편 모공(謀攻) 최고의 전술은 적의 계략을 깨뜨리는 것이고, 다음은 적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고, 그 다음은 적을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싸울 수 있을 경우와 싸울 수 없는 경우를 아는 자는 승리하고, 많은 병력일 경우 전술과 적은 병력일 경우 전술을 두루 아는 자는 승리하고, 상하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승리하고, 조심하여 경계하면서 적이 경계하지 않기를 기다리는 자는 승리하고, 장수가 유능하고 군주가 간섭하지 않으면 승리한다. 이 다섯가지는 승리하는 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모르고 나를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적을 모르고 나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위태롭다.(不知彼不之己 每戰必殆)
제4편 군형(軍形)
옛날에 전쟁을 잘한다고 일컬어졌던 자들은 모두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어 놓고 적과 싸워 쉽게 승리하였다. 잘 싸우는 자는 패배하지 않을 위치에 서서 적의 패배를 놓치지 않는다. 승리하는 군대는 전투하기 전에 먼저 유리한 위치를 얻은 다음에 싸우며, 패배하는 군대는 먼저 싸우면서 승리를 구한다.
제5편 병세(兵勢)
적에게 패하지 않으려면 정상적인 공격과 변칙적인 공격을 모두 할 줄 알아야 한다. 변칙 공격을 잘 쓰는 자는 천지와 같이 끝이 없으며 강하와 같이 마르지 않는다.
세차게 흐르는 물길이 돌(石)을 뜨게 하는 것은 기세다. 매가 다른 새의 목을 꺾는 것은 절도다. 그러므로 잘 싸우는 자는 기세가 험하고 절도가 빠르다. 기세는 쇠뇌를 당겨놓은 것과 같고, 절도는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같다.
제6편 허실(虛實)
싸움터에 먼저 나아가 기다리는 자는 편하고, 뒤늦게 싸움터에 달려가는 자는 수고롭다. 적이 편안하면 수고롭게 만들고, 배부른 것을 배곯게 하고, 안정된 것은 흔들리게 한다. 공격을 잘하는 자는 적이 지켜야 할 곳을 모르게 하고, 수비를 잘하는 자는 적이 공격할 곳을 모르게 한다.
제7편 군쟁(軍爭)
사기가 날카로운 적은 공격하지 말고, 유인하는 적은 쫒지 말고, 돌아가려는 적은 끊지 말고, 포위된 적은 한 쪽을 터놓고, 궁지에 몰린 적은 끝까지 압박하지 말라. 싸움은 속임수로서 성립되고, 유리하도록 움직이고, 분산과 집합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그 빠르기가 바람과 같고, 고요하기가 숲과 같고, 쳐들어 갈 때는 불길과 같고, 묵직하기가 산과 같고, 알 수 없기가 어둠과 같고, 움직임은 벼락과 같다.
제8편 9변(九變)
진퇴가 용이한 곳은 빼앗아 봐야 뺏기기도 쉬우므로 싸움보다는 교섭하여 얻는다.
보급이 어려운 곳에서는 머물지 말고, 사방이 막힌 포위된 곳은 벗어난다.
싸움은 적이 오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내가 대비해야 하며, 적이 공격하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그들이 나를 공격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아야 한다.
제9편 행군(行軍)
산에서는 시야가 트인 높은 곳으로 행군하며, 높은 곳의 적은 올라가서 치지 않는다. 이것이 산에서의 행군이다.
물에서는 적의 병력 절반이 건널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격하는 것이 유리하다. 상류의 적을 거슬러 치지 않는다. 이것이 물가에서의 행군이다.
제10편 지형(地形)
나도 갈 수 있고 적도 올 수 있는 곳을 통(通)이라 한다. 통형(通形)에서는 높고 양지 바른 곳을 먼저 차지하고 보급선을 튼튼히 해두고 싸우면 이롭다. 갈 수는 있으나 돌아오기가 어려운 곳을 괘(掛)라 한다. 괘형(掛形)에서는 적이 준비가 없으면 나가서 이길 수 있으나, 만일 적이 준비가 되어있으면 이겨 돌아오기 어려우므로 불리하다.
내가 나가기에 불리하고 적이 나가기도 불리한 곳을 지(支)라 한다. 지형(支形)에서는 적이 비록 나를 이롭게 하더라도 나가지 말아야 하며, 그 적을 반쯤 나오게 하여 치면 이롭다.
제11편 9지(九地)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적으로 하여금 앞뒤가 상응치 못하게 하며, 대부대와 소부대가 서로 믿지 못하게 하며, 장교와 사병이 서로 구원하지 못하게 하며, 상하가 서로 돕지 못하게 하고, 병사가 흩어져 모이지 못하게 하며, 모인다 하더라도 질서가 잡히지 못하게 한다 잘 싸우는 자는 솔연(率然)과 같다. 솔연은 상산(常山)에 사는 뱀으로 그 머리를 치면 꼬리가 덤비고, 꼬리를 치면 머리가 덤비고, 그 중간을 치면 머리와 꼬리가 함께 덤빈다.
처음에는 얌전한 처녀처럼 시작하지만, 문을 열면 뛰쳐나온 토끼처럼 적이 미처 항거하지 못하게 한다.
제12편 화공(火攻)
화공은 불이 안에서 일어나면 밖에서도 호응하여 공격하고, 불이 났는데도 적진이 고요하면 때를 기다려서 공격하고, 불이 바람부는 위 쪽에서 일어났으면 바람부는 아래 쪽에서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
제13편 용간(用間)
장군이 뛰어난 성공을 거두는 까닭은 적정을 먼저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향간(鄕間)은 지역 사람을 쓰는 것이고, 내간(內間)은 상대 국가의 벼슬아치를 쓰는 것이고, 반간(反間)은 적국의 간첩을 역이용하는 것이고, 사간(死間)은 일부러 정보를 노출하여 간첩이 속아서 적에게 알리도록 하는 것이며, 생간(生間)은 적지에서 생환하여 돌아와 보고하게 하는 것이다. 치고자하는 성(城)이나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먼저 장수와 좌우의 측근, 당번, 문지기, 심부름꾼 이름을 아군 간첩으로 하여금 찾아서 알아내야 한다.
오자병법 (吳子兵法)
'오자병법(吳子兵法)'은 '손자병법'과 함께 중국의 양대 병법서로 꼽힌다.
이순신 장군이 전투에서 한 말, '살기 바라는 자는 죽고, 죽기 각오한 자는 산다(必生卽死 必死則生)'는 말은 '오자병법'에 나온다.
오기(吳起)는 어떤 사람인가. '사기(史記)'의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을 소개한다.
오기는 위(衛)나라 사람인데 증자(曾子)한테 배웠다. 젊었을 적에 집안에 천금이 있었으나, 벼슬 얻지 못하고 파산하자 마을 사람들이 비웃었다. 이에 오기는 자기를 비방한 30여 명을 죽이고 위(衛)나라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때 어머니와 헤어지면서 자기 팔을 깨물며 '저는 재상이 되기 전에는 위(衛)나라로 돌아오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고, 그후 얼마 뒤 어머니가 죽었지만, 오기는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오기가 노나라로 갔을 때, 노나라는 제나라의 침공을 받고 있었지만, 노나라 군주는 오기의 아내가 제나라 사람이라 장군으로 임명하기를 주저하였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오기는 집으로 와 아내 전씨에게 물었다.
'남편이 적군과 싸워 대공을 세우고, 만석의 국록을 받고 이름을 천추만세에 남긴다면 이는 집안을 크게 일으키게 되는 것이오. 부인은 내가 그리되기를 바라오?'
'남편이 그리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오기는,
'지금 제나라가 노나라를 치고 있소. 군주는 나를 대장으로 시킬 생각이지만 내가 제나라 전씨 집안에 장가 들었다는 이유로 머뭇거리고 있소.'
하고는 칼을 뽑아 아내의 목을 치고 비단으로 아내의 머리를 싼 뒤 노목공을 찾아갔다.
이에 노목공이 오기를 대장으로 삼자, 오기는 제나라를 물리쳐 상경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오기는 '모친이 죽었는데도 분상(奔喪)하지 않고, 자신의 처를 죽이면서 장수가 되고자 한 각박한 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으므로 노나라 군주도 끝내 오기를 해임했다.
그후 오기는 위(魏)나라 문후(文侯)를 섬기면서, 진(秦)나라 성 다섯 개를 빼앗았다. 그때 오기는 장군이면서 병사들과 똑같이 옷을 입고 밥을 먹었다. 잠을 잘 때 자리를 깔지 않고, 행군할 때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자기가 먹을 식량은 직접 들고 다니며 병사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한번은 종기가 난 병사가 있었는데, 오기가 그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빨아주었다. 병사의 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 했다. 옆에서 그 이유를 물었다.
'당신 아들은 졸병에 지나지 않는데 장군께서 직접 고름을 빨아주셨소. 그런데 어찌 그토록 슬피 우시오?'
그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전에 장군께서 애 아버지 종기를 빨아준 적이 있었는데, 남편은 장군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들 종기를 빨아 주셨다니, 그 애 또한 곧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는 것입니다.'
문후는 오기를 서하(西河)의 태수로 임명했는데, 재상에 전문(田文)을 임명했다. 오기는 전문을 찾아갔다.
'당신과 공로를 비교해보고 싶은데 어떻소? 삼군(三軍)을 다스리는 장수가 되어 병사들에게 기꺼이 목숨을 바쳐 싸우게 하고, 적국으로 하여금 우리를 넘보지 못하게 한 점에 있어서 당신과 비교하면 누가 더 낫소?'
'내가 당신만 못하지요.'
'관리를 다스리고 국민과 화합하며 나라의 창고를 가득 채운 점에서는 누가 더 뛰어나오?'
'내가 당신만 못하지요.'
'서하를 지켜 진나라 군사들이 동쪽으로 쳐들어 오지 못하게 하고, 한나라와 조나라를 복종시킨 점에서는 누가 낫소?'
'내가 당신만 못하지요'
오기가 다시 물었다.
'이 세 가지 점에서 당신은 모두 나보다 못한데, 윗자리에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그러자 전문이 대답했다.
'왕의 나이가 어려 나라가 안정되지 못하고, 신하들은 왕의 말을 듣지 않으며, 백성들은 왕을 믿지 못하고 있소. 이런 시기에 재상 자리를 당신이 맡는게 좋겠소, 내가 맡는게 좋겠소?'
이에 오기는 한참 동안 조용히 있다가,
'당신이 맡는게 낫소.'
하고 말했다.
문후(文侯)가 죽자 오기는 그 아들 무후(武侯)에게 신임 받았으나, 간신들 농간으로 초나라로 망명하였다.
초나라 도왕(悼王)이 오기를 재상에 임명하자, 오기는 법령을 자세히 밝히고, 필요하지 않은 벼슬을 없애고, 부강병책을 실시했다. 주변국을 제압하고 국세를 떨쳤지만, 도왕이 죽자, 평소 오기를 미워하던 대신들과 왕족들이 일제히 오기를 공격했다. 오기는 쫒기다가 가망이 없자, 도왕의 시신 뒤에 엎드렸다. 오기를 공격하던 무리들은 여기다 화살을 쏘아댔다. 화살은 오기를 죽였지만, 도왕의 시신까지 꿰뚫었다.
도왕의 장례식이 끝나자, 새 임금이 된 태자는 왕의 시신에 화살을 쏜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멸족의 화를 입은 집이 70여 세대나 되었다. 죽음까지도 전략을 택한 오기였다.
오기(吳起)는 기원전 440년 위(衛)나라에서 태어났으며, 노(魯)나라에서 첫 벼슬을 하다가 위(魏)나라를 거처 초(楚)나라 재상으로 있다가 기원전 381년에 살해되었다.
춘추시대 주인공이 손자라면 전국시대는 오자가 주인공이다.
'오자병법'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에 48편이라 했으나, 현재 6편이 남아있다.
오자병법(吳子兵法)
제1편 도국(圖國)
군주가 각별히 유념해야 할 4가지
나라가 하나로 결속되어 있지 아니하면, 군대를 출진시켜서는 아니된다.
군(軍)이 하나로 뭉쳐있지 아니하면, 부대를 움직여서는 아니된다.
진영(陣營)이 단합되어 있지 아니하면, 나아가 싸우게 해서는 아니된다.
전투에 임하여 일사불란하지 아니하면, 결전을 해서는 아니된다.
전쟁을 해서는 안될 시기
통치자와 국민이 화합하지 못할때, 군대의 상하가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이루지 못하여 불화할때, 투입된 부대가 상호협조하지 못하고 불화할때, 공격중 부대가 일치단결하지 못하여 불화할때.
제2편 요적(料敵)
군의 핵심전력으로서 선별하여 아끼고 우대해야 할 병사.
호랑이처럼 용맹한 자. 힘(力)이 남다른 자. 매우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자. 적의 군기를 빼앗고 적장을 사로잡을 수 있는 자.
교전을 피해야 하는 경우.
국토가 넓고 인구가 많으며, 경제력이 풍부할 때.
군주가 어질고 현명하여 정치가 잘 이루어질 때.
신상필벌이 공정하고 엄격할 때.
전공을 세운 자가 높은 지위에 오르고, 인재가 적재적소에 배치될 때.
병력이 많고 군비가 충실할 때.
외교에 능하여 유사시에 인접국이나 강대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때.
지체없이 공격해도 무방한 경우.
겨울날 이른 아침에 적이 얼어붙은 강을 도강하려 하는 경우.
여름날 오랜 강행군으로 적의 말과 군사들이 갈증과 허기를 느낄 때.
적이 출병한지 오래되어 식량이 떨어졌으며, 백성들이 원망하고 불길한 조짐들이 나타남에도 군주가 이를 무마 못할 때.
적의 군수품이 고갈되고 땔감이 부족한데, 날씨마저 악천후가 거듭되어 현지조달이 어려울 때.
적의 병력이 부족하고 수질과 지형이 나빠 군사와 말들이 질병에 시달리는 데도 증원군이 오지 않을 때.
오랜 행군 중에 병사들은 지치고 사기가 떨어졌으며, 귀찮은 나머지 식사도 하지 않고 갑옷을 벗고 쉬려고만 할 때.
지휘관은 무능하고 간부들은 경솔하며, 병사들은 단결되지 않아 상호간에 협조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진지 배치가 불안정하고 숙영상태도 어수선하며, 지형을 높은 곳에 선정해 절반 이상이 노출되어 있을 때.
제3편 치병(治兵)
무후(武侯)가 물었다.
'용병에서 우선시해야 할 것은 무엇이 있소?'
오기(吳起)가 대답했다.
'먼저 사경(四輕), 이중(二重), 일신(一信)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오?'
'땅이 말을 가벼이 여기고, 말이 수레를 가벼이 여기며, 수레가 사람을 가벼이 여기고, 사람이 싸움을 가벼이 여기도록 해야 합니다. 지휘관이 지형을 잘 선택할 수 있다면 말이 경쾌하게 달릴 수 있을 터이니 땅이 말을 가벼이 여길 것이요, 제때에 먹이를 주면 힘이 넘치므로 말은 수레를 가벼이 여길 것이며, 바퀴 축에 기름칠을 충분히 하면 수레는 사람을 가볍게 여길 것이고, 병기와 갑옷이 예리하고 튼튼하면 병사들은 싸움을 가벼이 여길 것이니 이를 사경(四輕)이라 합니다.
나아가 싸운 자에게는 큰 상을 주고, 뒤로 물러난 자는 무거운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이를 이중(二重)이라 하는 것입니다.
상벌의 시행이 공정하고 분명하여 신뢰를 주어야 합니다. 이를 일신(一信)이라 합니다.
이러한 이치를 헤아려 시행하는 것이 바로 승리의 원동력입니다."
잘 육성된 군대
잘 육성된 군대란 평상시에는 예절이 깎듯하고, 일단 움직였다 하면 위풍 당당하여 공격에 당할 상대가 없고, 후퇴하면 쫓아오지 못합니다. 전진과 후퇴에 절도가 있고, 좌우 이동이 명령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면, 설령 부대가 단절되더라도 진을 유지하고, 분산되어 있더라도 대오를 갖추게 됩니다. 또한 상하가 동거동락하고, 생사를 함께 합니다.
이러한 군대는 흩어지는 일이 없으며, 전투가 벌어지면 지칠 줄 모르므로 어디에 투입해도 천하에 당할 자가 없습니다. 이를 일컬어 '부자지병(父子之兵, 부자간처럼 끈끈한 정으로 이뤄진 군대) 이라 합니다.
전쟁터란 항상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죽기를 각오한 자는 살고, 요행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자는 죽습니다(必死卽生, 幸生卽死). 훌륭한 장수는 그 임전 태도가 마치 물이 세어 침몰하는 배나 불에 타 무너지는 집에 있는 사람처럼 결연합니다.
제4편 논장(論將)
오자(吳子)가 말하였다.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는 것은 지휘관의 요건이요, 강(剛)과 유(柔)를 겸용하는 것은 용병의 요건입니다.
사람들이 장수를 논할 때 흔히 용(勇)만을 보는 경우가 많지만, 용은 지휘관의 덕목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용장(勇將)은 무턱대고 적과 싸우려고만 하는 법입니다. 경솔하게 싸울 줄만 알고 득실을 살필 줄 모른다면, 훌륭한 장수라 할 수 없습니다.
장수는 일단 출전명령을 받으면, 집에 알리지 않고 나아가 적을 무찌른 후에 돌아오는 것이 지휘관의 자세입니다.
전투의 승패를 가늠하는 요소 네 가지.
첫째가 기세(氣勢)이고, 둘째가 지세(地勢)이며, 셋째가 용병술(用兵術)이고, 넷째가 전투력(戰鬪力)이다.
백만 대군이라 하더라도 그 위용과 사기는 지휘관의 역량에 좌우된다. 이를 '기세'라 한다.
길이 좁고 험하며 큰 산이 가로막고 있는 지형은 열 명이 지켜도 천 명의 적이 지나가지 못한다. 이를 '지세'라 한다.
첩자를 잘 이용하고 기동부대를 적절히 운용하면 적의 병력을 분산시킬 수도 있고, 군신 상하간을 반목시킬 수 있다. 이를 '용병술'이라 한다.
전차나 배를 튼튼하게 만들도 잘 손질하며, 병사들에게 전투기술과 진법을 숙달시키고, 말이 잘 달릴 수 있도록 조련하는 것을 '전투력'이라 한다. 이 네 가지를 잘 아는 자라야 지휘관으로 삼을 수 있다.
적진의 파악
전투의 요결은 반드시 먼저 적장(敵將)이 어떤 인물인지 판단하고 그 능력을 관찰해 보는 것입니다.
적장이 만약 어리석고 남을 잘 믿는다면 속임수를 써서 유인합니다.
탐욕스럽고 명예를 가볍게 여기면 재물로 매수합니다.
변덕이 심하고 책략이 없으면 피로하게 만들어 곤경에 빠뜨립니다.
상관은 넉넉하고 교만한데, 부하들은 궁핍하고 불평하면 그 사이를 이간시킵니다.
진퇴에 결단력이 부족하여 부하들이 믿고 따르지 못하면 놀라게 하여 도망치게 합니다.
병사들이 지휘관을 경시하고 향수에 젖어 있으면 평지를 차단하고 험지를 열어놓아 요격합니다.
제5편 응변(應變)
무후(武侯)가 물었다.
'만약 적이 아군보다 수가 많을 때는 어찌하오?'
오기(吳起)가 대답했다.
'평탄한 지형을 피하고, 험한 지형에서 적을 맞아야 합니다. 옛말에 하나로 열을 치는데는 좁은 곳이 가장 좋고, 열로 백을 치는 데는 험한 곳이 가장 좋으며, 천으로 만을 치는 데는 막힌 곳이 가장 좋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소수의 병력이 좁은 길에 있는 적에게 갑자기 징과 북을 울려댄다면 적은 아무리 병력이 많다 해도 혼비백산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대부대를 거느리면 평지를 차지해야 하며, 소부대를 거느리면 험지를 차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좌우에 높은 산이 있고, 지형이 아주 협소한 곳에서 갑자기 적과 마주쳐 공격도 후퇴도 여의치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오?'
오기(吳起)가 대답하였다.
'이러한 경우를 곡지전(谷地戰)이라 합니다. 이때는 병력이 많아도 쓸모가 없으므로, 유능한 병사들만을 가려 적과 상대해야 합니다.
몸이 날랜 병사들에게 예리한 무기를 주어 앞에서 싸우도록 하여, 적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입니다. 그동안 전차와 기병은 분산시켜 사방에 숨겨두고, 멀찍이 간격을 띄워서 적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합니다.
적은 필시 진지를 강화하느라 전진도 후퇴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틈을 이용하여 본대는 대열을 갖추고 유유히 빠져 나와 산 밖에 진을 칩니다. 이렇게 되면 적은 틀림없이 깜짝 놀라고 두려워할 것입니다. 그때 전차와 기병을 움직여 계속 공격을 가함으로써 적에게 숨돌릴 여유조차 없게 만듭니다. 이것이 곡지전의 요령입니다.'
제6편 여사(勵士)
여사(勵士)란 ‘병사들을 격려한다’는 뜻이다
무후가 물었다.
'상벌을 엄정하게 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소?'
'제가 생각하기에는 주군께서 평소에 전공자를 우대하여 잔치를 베푸시되, 전공이 탁월한 자들은 앞줄에 앉혀서 고급 기물과 최고의 음식을 올리고, 약간의 공이 있는 자들은 가운데 줄에 앉혀서 조금 못한 기물과 음식을 꾸며주며, 공이 없는 자들은 뒷줄에 앉히고 평범한 식탁을 차리며, 연회가 끝나고 나가려 할 때, 상금을 하사하고, 해마다 그 부모를 위로하면 될 것 입니다.
무후는 오기의 이 말을 3년간 시행하였는데, 후에 진(秦)나라가 침범했다. 위나라 장정들은 이 소식을 듣자 동원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스스로 갑옷을 입고 달려가 용감히 싸워 진나라 군대를 격퇴하였다.
진나라를 격퇴한 후 무후가 오기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가르침대로 해서 일이 잘 이루어졌소.'
오기가 대답했다.
'죽음을 각오한 도적 한 명이 벌판에 숨어 있다고 한다면, 천 명 인원도 그를 겁먹을 것 입니다. 죽기로 작정한 도적처럼 싸움에 임하였으니 아무도 상대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손빈병법(孫臏兵法)
*손빈병법은 무경칠서에 들어있지는 않지만 소개한다.
손무가 죽고 백 오십 년 쯤 지나, 손빈(孫臏)이라는 후손이 나타났다. 사마천의 <사기>에 등장하는 또 다른 손자(孫子)는 전국시대(戰國時代) 중기 제(齊)나라 손빈이다. 젊어서 손빈과 방연 두 사람은 은자인 귀곡자 밑에서 병법을 배웠다고 한다.
*귀곡자는 전국시대 중기 천하를 풍미한 종횡가의 시조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통지(一統志)'에 귀곡자의 이름을 왕훈(王訓), 왕선(王禪), 왕후(王栩), 왕후(王詡) 등으로 기록해놓았다. 지금 하남성 일대인 초나라의 운몽산(雲夢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면서 수도했고, 영천(潁川)과 양성(陽城) 근처에 소재한 귀곡(鬼谷)에 은거한 까닭에 ‘귀곡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손빈은 방연(龐涓)과 병법을 배웠는데, 방연은 공부를 마친 다음 위나라 혜왕(惠王)의 장군으로 등용되었다. 방연은 자신이 손빈만 못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혜왕이 손빈을 초청하자 중용할 것이 두려워서 죄를 뒤집어 씌웠다. 방연은 손빈의 선조 손무가 남긴 병서를 손에 넣기 위해 손빈을 죽이지 않고 무릎 아래를 잘라내는 형벌인 빈형(臏刑)을 가해 앉은뱅이로 만들고, 손빈의 얼굴에다 경형(黥刑)을 남겼다.
그러나 손빈은 제나라 사자의 수레에 숨어 탈출하여 제나라 전기(田忌)라는 장수를 섬겼다.
때마침 전기는 공자들과 경마 내기를 즐기고 있었다. 손빈은 내기를 구경하다가 이기는 법을 간파하여 전기에게 일러주었다.
즉, 먼저 제일 못한 하등 말을 상대의 상등 말과 붙여서 한 판 져주고, 다음 상등 말을 상대의 중등 말과 붙여 한 판 만회한 다음, 상대의 하등 말과 내 중등 말을 붙이라는 것이다. 전기는 2승 1패로 내기에 이겨 천금을 얻자, 손빈을 신임하게 되었다. 손빈이 제기한 이 방법을 '삼사법(三駟法)'이라 부른다.
훗날 위나라와 싸움을 하게 되어 손빈은 방연의 10만 군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손빈은 위나라 군사가 사납고 용맹스러워 제나라 군사를 깔봄을 알았다. 그래서 약한듯 보이고자 일부러 후퇴하면서 숙영지를 옮길 때마다 아궁이 수를 오늘은 5천 개 내일은 3천 개 하는 식으로 줄였다.
이를 본 방연은 도망병이 속출한 것으로 판단하여, 보병을 떼어놓고 정예부대만 끌고 급히 추격했다.
손빈은 방연의 진군 속도를 계산해보고, 그들이 저녁에 마릉(馬陵)이라는 곳에 도착할 것임을 알았다.
마릉은 길이 좁고 험한 산속이라 복병을 두기에 알맞았다.
손빈은 길가 큰 나무에다 '방연은 이 나무 밑에서 죽으리라(龐涓死于此樹之下)'고 써두었다. 그리고 사람을 뽑아 활과 쇠뇌를 가지고 길 양편에 숨도록 한 후, '날이 저물어 이곳에 불이 밝혀지면, 즉시 일제히 쏘도록 하라.'고 명해 두었다.
과연 날이 저문 후 방연이 그 나무 밑에 이르게 되었고, 거기 쓰여진 글씨를 보기 위해 불을 밝히게 했다. 그러자 미쳐 그것을 다 읽기도 전에 수많은 화살이 쏟아졌다. 방연은 더 이상 지혜를 써볼 수 없음을 알고, '내가 오늘 기어히 그 녀석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 하고 스스로 칼로 목을 쳐 죽었다.
손빈은 이 승리로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병법이 전해지게 되었다.
'손빈병법'은 30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그 가운데 편명이 밝혀진 것은 금방연(擒龐涓), 위왕문(威王問), 진기간루(陳忌間壘), 찬졸(纂卒), 월성(月城), 팔진(八陳), 지보(地葆), 세비(勢備), 행찬(行纂), 살사(殺士), 연기(延氣), 관일(官一), 십진(十陳), 사간(士間), 약갑(略甲), 객주인분(客主人分), 선자(善者), 오명오공(五名五恭), 장의(將義), 장패(將敗), 기정(奇正), 모두 21편이다.
금방연(擒龐涓, 방연을 잡다)은 '사기'에도 기록되어 있고 마오쩌둥의 논문에도 인용되고 있다.
진기문루(陳忌問壘, 진지를 굳건히 다져라), 위위구조(圍魏救趙, 위나라를 포위하여 조나라를 구하라. 일종의 聲東擊西 전법이다), 감조유적(減灶誘敵, 솥을 줄여 적을 유인하라), 연기(延氣, 병사들 사기를 진작시켜라)와 같은 전법은 현재도 유용하다.
무경칠서(武經七書) 제2편
육도(六韜). 삼략(黃石公三略). 사마법(司馬法)
육도(六韜)
'육도'는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 지은 것이다. 역대 병서 중 가장 오래된 3,000년 전 병법이다.
강태공은 염제신농황제(炎帝神農皇帝)의 51세손이요, 백이(伯夷)의 36세손이다.
*晉州 姜씨의 선조이다.
태공망 여상
태공은 젊은 시절 곤륜산에서 수도 하였고, 은나라 주왕(紂王)의 폭정을 피해서 동해(東海)에 숨어살면서 10년 동안 위수(渭水) 반계(磻溪)에서 곧은 낚시를 물에 드리우고 있다가, 주(周) 문왕(文王)을 만났는데, 문왕은 사냥을 나가기 전 점괘에 하늘이 내려주신 스승을 만난다고 해서 사흘 목욕재계 하고 나갔다고 한다.
문왕이 낚시에 대해 묻자 태공망이 대답했다. '낚시에는 세 가지 권도가 있습니다. 미끼로 물고기를 취하는 것은 녹봉을 주어 인재를 취하는 것과 같고, 좋은 미끼를 쓰면 큰 고기가 잡히는 것은 후한 녹봉을 내리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충신이 나오는 것과 같으며, 물고기의 크기에 따라 쓰임이 다른 것은 인품에 따라 벼슬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낚시줄이 가늘고 미끼가 뚜렷하면 작은 물고기가 물고, 낚시줄이 굵고 미끼가 향기로우면 중치의 물고기가 물고, 낚시줄이 굵고 미끼가 크면 큰 물고기가 물게 마련입니다.'
천하에 대해서 묻자.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만백성의 천하입니다. 천하의 이익을 백성과 더불어 나누는 군주는 천하를 얻고, 천하의 이익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는 군주는 반듯이 천하를 잃게 됩니다.
하늘에는 춘하추동 네 계절이 있어 음과 양이 순환하고 그로 말미암아 대지에는 생산이 이루어져 재물과 보화가 있게 됩니다.
이 하늘의 시와 땅의 재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조금도 사심이 없는 것을 인(仁)이라고 합니다. 인이 있는 곳에 천하의 인심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게 된 것을 건져주고, 재난을 당한 사람을 도와 주며, 사람의 환란을 구제해 주고, 위급한 사람을 구원해 주는 것은 덕(德)입니다. 덕이 있는 곳에 천하 인심은 돌아가는 것입니다.
뭇 사람들과 시름을 같이 하고, 뭇 백성들과 즐거움을 같이 하며,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그들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면 이것은 의(義)입니다. 의가 있는 곳에 천하의 인심이 쏠리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죽는 것을 싫어하고 사는 것을 즐거워하며, 덕을 좋아하고 이득을 따릅니다. 애써 사람을 살리며 사람을 부유하게 하려고 꾀하는 것을 도(道)라고 합니다. 도가 있는 곳에 천하의 인심은 귀의하는 것입니다.' 하고 답했다.
이때가 기원전 1140년으로 태공망 나이 72세 때다. 문왕은 태공을 국사(國師)로 모셨고, 주나라는 견융(犬戎), 밀수(密須) 등을 공격하고, 려(黎), 한(邗), 숭(崇)을 멸망시키어, 문왕(文王) 만년에 천하의 3분의 2를 얻었다.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이 주왕을 토벌했다.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유명한 주왕은 달기와 녹대(鹿台)에서 한창 술을 마시고 있다가, 병사 70만을 편성하여 목야(牧野) 전선에 나갔지만 무왕의 4만6천 소수 군대에 패전하여 스스로 마른 풀을 쌓아 불을 지르고 타죽었다.
무왕은 개국공신 강태공을 산동성(山東省) 군주에 봉했으니, 나라 이름을 제(濟 )라 한다. 제나라는 강태공으로부터 20 대 강공(康公)까지 왕위를 계승했다.
육도(六韜)
'육도(六韜)'의 죽간(竹簡)이 1972년 임기현 은작산에 있는 한무제(BC 140년경)의 고분에서 발견되었는데, 그동안 전해 내려온 전본(傳本)과 일치했다.
'육도'의 '도(韜)’는 원래 활집이나 칼 전대를 말한다.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군사적 비밀 책략, 혹은 병법의 비결을 뜻한다. 국력 양성과 전쟁 준비, 전략 전술, 지휘 계통, 보병, 전차,·기병의 배치와 전투, 무기와 군사 조련등 전반적인 군사문제를 다루고 있다.
'육도'는 문도(文韜) 무도(武韜) 용도(龍韜) 등 총 6권 60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왕(文王), 무왕(武王)의 물음에 대해 강태공의 답변 형식이다.
1)문도(文韜)
문왕이 물었다.
'민심을 어떻게 끌어들여야 천하를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늘에는 사계절이 있어 만물을 키우고, 땅에는 갖가지 재물이 있어 사람을 살아가게 합니다. 이 하늘의 시(時)와 땅의 재화(財貨)를 함께 나누는 것이 인(仁)입니다. 인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고 어려움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덕(德) 입니다. 또 남들과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 하며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남들이 미워하는 것을 함께 미워하는 것이 의(義)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삶을 즐기려고 하고, 덕을 좋아하며 이익을 쫓는 법입니다. 이익을 만들 수 있는 것이 도(道)입니다. 도가 행해지는 곳에 천하 사람들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왕이 주의해야 할 육적(六賊)과 칠해(七害)
왕이 항상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육적과 칠해가 있습니다. 먼저 육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신하가 있으면 왕의 덕을 해칩니다.
둘째, 생업에 힘쓰지 않고 법을 어기고, 관리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백성이 있으면 왕의 교화에 흠이 가게 됩니다.
셋째, 작당하여 현인을 음해하고 왕의 총명을 가리는 신하가 있으면 왕의 권위를 손상시킵니다.
넷째, 외국의 제후와 사귀면서 군주를 가볍게 보는 자가 있다면 왕의 위엄을 실추시킵니다.
다섯째, 직위를 경시하고 직무를 우습게보며 윗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창피해하는 신하가 있으면 공신의 노고에 허물이 가게 합니다.
여섯째, 백성의 재물을 빼앗고 능욕하는 세도가가 있으면 서민의 생업을 망치게 됩니다.
칠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지략도 없고 재간도 없는 자에게 큰 상을 주면 허세를 부려 요행수를 바라는 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런 자를 장수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둘째, 평판은 좋아 보이지만 실력이 없고, 안과 밖에서의 의견이 다르며 남의 장점을 무시하고 결점만을 들추어내어 교묘하게 처세하려는 자와는 큰일을 의논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검소해보이려고 허술한 옷을 입고 욕심이 없는 것처럼 꾸미지만, 사실은 명예와 이익에 눈이 어두운 자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중상모략과 아첨을 일삼으며 지위나 봉록에만 관심이 있는 자, 원대한 계획도 없이 목전의 이익만 보는 자를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여섯째, 화려한 것이나 잡기에 빠져 농사를 게을리 하는 것을 금해야 합니다.
일곱째, 요술이나 주술, 불길한 예언으로 양민을 현혹하는 일을 금해야 합니다.
성현들의 다스림
태공이 말씀하셨다.
'요임금이 천하의 임금노릇을 하실 적에는 금이나 은 또는 주옥으로 장식하지 않았고, 수놓은 비단이나 무늬 있는 비단 옷을 입지 않고, 이상야릇하고 유별난 것을 보지 않고, 가지고 놀 기물을 보배롭게 여기지 않고, 음탕한 음악을 듣지 않고, 궁의 담이며 방을 백토로 칠하지 않고, 수키와며 서까래며 기둥은 조각하지 않고, 띠풀이 뜰에 우거져도 깎지 않고, 사슴 가죽으로 만든 옷으로 추위를 막고, 소박한 옷으로 몸을 가리고, 거친 쌀과 기장밥에 명아주나 콩잎국을 먹었습니다.
부역을 시킴으로써 백성의 밭 갈고 베 짜는 시간을 빼앗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다듬으며 뜻을 제약하여 백성의 일에 일절 간섭하지 않고,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지는 무위로 정치하셨습니다.
관리로서 충성되고 정직하며 법률을 잘 받드는 자는 그 직위를 높이고,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자는 그 녹을 두터이 하고, 백성으로서 효도하며 자애로운 자는 이를 공경하며 사랑하고, 농사하며 누에치기에 힘을 다하는 자는 이를 위로하여 힘쓰게 하였습니다. 선과 악을 분명히 구별하여 마을 입구의 문에 그것을 나타냈습니다.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예절을 바르게 하며, 법도로써 간사함과 거짓됨을 금하고, 미운 사람도 공이 있으면 반드시 상주며, 사랑하는 사람도 죄가 있으면 반드시 벌하였습니다. 세상의 홀아비나 홀어미, 고아나 홀로 된 노인을 보호하고 양육했습니다. 재난이나 초상난 집을 물건을 주어 도와주었습니다.'
2)무도(武韜)
무력을 쓰지않고 적을 이기는 법
그 방법에는 열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군주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을 알아내어 그를 교만하게 하는 것이 첩경(捷徑)입니다.
둘째는 적국의 중신에게 접근하여 재물로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공작을 벌이는 것입니다.
셋째는 왕의 측근에게 뇌물을 보내 몸과 마음이 따로 있게 하는 방법입니다.
넷째는 적국에 많은 뇌물과 미인을 보내 즐기게 하면 적국은 자연히 망하는 길로 갈 것입니다.
다섯째는 적국의 충신에게는 융숭하게, 군주에게는 약소하게 대해 충신이 가로챈 것처럼 보여 군신 사이를 이간질시킵니다.
여섯째는 적국의 신하를 매수하고 그 신하로 하여금 적국의 내부를 붕괴시키도록 부추깁니다.
일곱째는 적국 군주에게 뇌물을 계속해서 보내 백성들을 아끼지 않도록 부추깁니다. 그 결과 생산량이 감소하여 창고가 비우게 될 것입니다.
여덟째는 적의 중신에게 뇌물을 주어 모의를 하게 합니다.
아홉째는 적국의 군주를 천자처럼 받들어 오만하게 하여 정사를 등한시하게 합니다.
열번째는 적국의 군주를 받들어 믿게 하여 신임을 얻은 뒤에 은밀하게 공격합니다.
열 한번째는 적국의 신하들에게 뇌물을 주어 군주의 이목을 막게 합니다.
열 두번째는 적국의 난신(어지럽히는 신하)을 길러 군주를 어둡게 하고 좋은 개와 말을 보내 사냥에 빠지게 하고 신하들까지 따라다니게 하여 피곤하게 합니다.'
3)용도(龍韜)
장수가 갖추어야 할 5가지 자질
(1)용기를 갖추면 용감하게 행하여 침략당하는 일이 없다.
(2)지혜를 갖추면 올바른 판단을 내려 혼란을 초래하지 않는다.
(3)인을 갖추면 부하들을 굳게 단결시킬 수 있다.
(4)신의를 갖추면 다른 사람도 속이려 하지 않는다.
(5)충성을 갖춘 장수는 성의를 다하며 배반하는 일이 없다.
장수가 경계해야 할 10가지 허물
(1)너무 용감하여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
(2)성급하게 속단하는 것
(3)탐욕스럽고 이익만 추구하는 것.
(4)너무 신중하여 결단력이 없는 것.
(5)미리 내다보고 겁이 많은 것
(6)누구나 쉽게 믿는 것.
(7)너무 청렴결백하여 남을 용서할 줄 모르는 것.
(8)지능을 믿고 긴장을 푸는 것
(9)지기 능력이 최고라고 과신하는 것
(10)의지가 약하여 어려우면 남에게 쉽게 맡기는 것.
인물 감정법
(1)질문하여 응답하는 모양이나 내용을 관찰한다.
(2)잇따른 질문으로 상대의 변화를 관찰한다.
(3)은밀히 일상생활을 추적하여 성실성을 관찰한다.
(4)솔직한 대답을 유도하여 인품을 관찰한다.
(5)금전의 관한 일을 맡겨 보아 청렴성을 관찰한다.
(6)여자로 하여금 유혹하게 하여 정결성을 관찰한다.
(7)위험이 닥쳤다고 알려 그 용기를 관찰한다.
(8)술을 먹인 다음, 그 취한 모양을 관찰한다.
장수가 승리하는 세 가지 길
예의 바른 장수는 추운 겨울철에도 혼자 따뜻한 털가죽 옷을 입지 않고, 무더운 여름철에도 혼자 부채를 잡지 않으며, 비가 내리더라도 혼자 우산을 펼치지 않아야 한다.
노력하는 장수는 좁고 험한 길을 행군하거나 진흙탕을 거쳐가야 할 때, 반드시 수레나 말에서 내려 함께 걸으며 병사들과 더불어 괴로움을 나누어야 한다.
욕심을 절제하는 장수는 군사들이 앉기 전에 먼저 앉지 말고, 군사들이 먹기 전에는 먹지 말 것이며, 추위와 더위를 군사들과 반드시 한가지로 한다.
병농일치(兵農一致)
무왕이 물었다
'천하가 안정되고 분쟁이 없을 때는 전쟁 도구를 만들 필요도 없고, 수비도 하지 않아도 됩니까?'
'공격과 방어하는 도구는 모두 농민에게 갖추어져 있습니다. 농부가 사용하는 쟁기는 적의 침공을 막기 위해 흩어놓는 무쇠덩어리를 대신하고, 농사에 쓰는 마소나 수레는 군대의 진영을 가리는 방패가 될 수 있습니다. 김매는 도구는 방패와 창이고 도롱이나 삿갓은 갑주와 방패이며 호미, 가래, 도끼, 톱, 공이 등은 성을 공격할 수 있고, 마소는 양식을 수송할 수 있으며, 닭과 개는 척후임무를 할 수 있습니다.
부인들의 길쌈은 깃발에 해당하고, 남자가 흙을 고르는 것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며, 잡초를 제거하는 것은 전차와 기마를 싸우게 하는 것 이고, 김매는 것은 보병을 싸우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추수를 하는 것은 군량을 비축하는 것이고, 부락에 몇 집씩 조를 짜는 것은 군중의 약속과 같고, 마을에 관리나 장이 있는 것은 장수와 같습니다. 성곽을 수리하고 도랑을 치우는 것은 참호와 보수를 수리하는 것과 같습니다.'
4)호도(虎韜)
국경에서의 대치
무왕이 물었다
'아군과 적군이 국경에서 대치하는데 어느 쪽도 먼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좋습니까?'
'먼저 군사를 세 곳에 나눕니다. 그리고 전군(前軍)은 참호를 깊이파고 보루를 높이고 수비를 완전하게 합니다. 이때 우리는 후군(後軍)에게 양식을 저축하게 합니다. 그리고 중군을 습격하게 하고 준비가 소홀한 곳을 공략합니다. 또 전방에 있는 아군 병사를 매일 투입해서 먼지로 대부대로 위장하며 적진으로 백보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면 적진은 지치고 불안해 할 것입니다. 그때 전군이 신속하게 공세를 취하면 이길 것입니다.'
'그 밖의 방법으로 작전에는 신속하고 과감한 작전이 있어야 승리를 할 수 있습니다. 또 적의 동정을 미리 알아내는 것이 싸움에 관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의 안전은 엄중한 경계로 하여금 유지하게 하고 항복한 자는 죽이지 말 것이며 화공에는 화공으로 맞서는 것이 바람직 합니다.'
5)표도(豹韜)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치는 법
무왕이 물었다.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다수의 강한 적군을 치며, 약소국이 강대국을 치려면 어떻게 합니까?'
태공이 대답했다.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치려면 해가 저물었을 때 매복해 있다가 불의의 습격을 가해야 합니다. 또 약소국이 강대국을 칠때는 이웃 나라와 큰나라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많은 예물과 예의를 갖추고 제후와 임금을 외교술로 설득해야 합니다.'
'그 밖의 방법으로는 숲속에서의 싸움에서는 수비를 단단히 한 후에 아군의 병사를 서로 번갈아 싸우고 휴식을 취하게 합니다. 또 기습은 달이 없는 어두운 밤에 해야 합니다. 높은 산이나 바위산에 이르렀을 때 포위가 되어 아군이 혼란해졌을 때는 오른쪽에 처하면 왼쪽을 방비하고 왼쪽에 처하면 오른쪽을 방비하고 법령이 엄격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물가에서 싸울 때 혼란에 빠져있다면 적의 사자에게 뇌물을 주고 퇴로를 찾아내 철수해야 합니다.'
6)견도(犬韜)
열 네가지 공격하기 좋은 시기
첫째, 대열이 정비되지 않았을 때.
둘째, 식사하지 않아 배가 고플 때.
셋째, 천시가 적에 불리할 때.
넷째, 지리를 치지하지 않고 있을 때.
다섯째, 분주하게 돌아다닐 때.
여섯째, 지쳐있을 때.
일곱째, 방심하고 있을 때.
여덟째, 지위관이 대열에서 떨어져 있을 때.
아홉째, 강을 건널 때.
열번째, 장거리를 행군해 왔을 때.
열한번째, 쉬지도 않고 일하고 있을 때.
열두번째, 험하고 좁은 길을 지나고 있을 때.
열세번째, 대열이 흩어져 있을 때.
열네번째, 불안 동요하고 있을 때.
기병전에서 승리를 얻는 법
(1)적이 막 도착하여 진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 전방의 기병을 격파하고 좌우를 공격한다.
(2)적의 진열이 정비되어 있으면 좌우에서 협공하여 종횡무진으로 뛰어다니며 공격한다.
(3)적의 진영도 견고하지 않고 전의도 없으면, 앞뒤좌우에서 조여서 몰아낸다.
(4)추격을 적이 두려워하면 양쪽과 후방을 신속하게 공격한다.
(5)견고한 방비도 없이 깊숙히 침입해 왔을 때는 보급로를 끊는다.
(6)적이 돌아다니다 지쳐 뿔뿔이 흩어지며 혼란을 일으키고 있을때 양쪽과 앞뒤를 습격한다.
(7)해가 저물어 돌아갈 때는 기병대와 전차대로 화살공격을 퍼붓는다.
삼략(黃石公三略)
'삼략'의 '략(略)'은 꾀, 모략을 뜻하며, 상략 중략 하략의 3편으로 이루어졌다.
'삼략(三略)'은 태공망의 병법서지만, 신비의 노인 황석공(黃石公)이 한고조 유방의 참모였던 장자방(張子房)에게 전해준 것이라 하여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이라 불린다.
진시황을 박랑사((博浪沙)에서 척살하려다 실패한 장량이 하비에 숨어 있을 때다. 하루는 다리 위를 산책하다가 거친 삼베옷을 입은 노인을 만났는데, 노인은 신발을 다리 밑으로 떨어뜨리고 장량에게 그것을 가져오도록 부탁했다.
장량이 다리 아래로 내려가 신발을 주워왔더니, 노인은 신발을 신겨달라고 했다. 신발을 신겨주자 노인이 '내가 보니 너는 가히 가르칠 만하다. 닷새 뒤 새벽에 여기서 다시 만나자.'고 하였다.
닷새 뒤 노인은 책 한 권을 내주며, '이 책을 읽으면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수 있다. 아마 10년 뒤 그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13년 뒤에는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곡성산(穀城山) 아래에 있는 황석(黃石)이 바로 나일 것이다.' 라고 말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곡성산은 지금 산동성 동아현 동북쪽에 있는 황산(黃山)이다.
그 책이 '태공병법(太公兵法)'인데. 장량은 그 병법으로 유방의 천하통일을 도왔다.
상략(上略)
장수가 갖추어야 할 12가지 조건
(1)청렴할 것.
(2)사리판단에 밝을 것.
(3)균형감각을 지닐 것.
(4)빈틈이 없을 것.
(5)아량이 있을 것.
(6)불평불만에 귀를 기울일 것.
(7)도량이 있을 것.
(8)안목이 있을 것.
(9)풍속과 습관을 무시하지 말 것.
(10)지리에 밝을 것.
(11)객관적인 사회 정세를 알 것.
(12)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을 것.
장수가 범할 수 있는 과실
(1)충고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능한 인물이 떠나가버린다.
(2)좋은 계책을 채택하지 않으면 지략 있는 선비들이 배반하게 된다.
(3)선과 악의 구별이 없으면 신하들이 일을 게을리 한다.
(4)자기주장대로 일을 처리하면 사람들이 책임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
(5)재물을 탐하면 부하들이 간사한 행동을 해도 단속할 수 없다.
(6)참소하는 말을 믿으면 사람들의 마음이 떠나가버린다.
중략(中略)
삼황(三皇)과 오제(五帝), 삼왕(三王)과 오패(五覇)의 차이점
황제(黃帝), 복희(福羲), 신농(神農) 삼황 시대에는 임금이 말을 하지 않아도 덕이 사해에 퍼졌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그것이 누구의 공로로 이루어진 줄 몰랐다.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穀), 요(堯), 순(舜)의 오제 시대에도 덕이 사해에 미쳤으나 백성들은 천하가 다스려지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우(禹), 탕(湯), 문(文), 무(武) 삼대에는 도덕으로 사람을 통제하던 시대였다.
그 다음 오패의 패자 시대에는 권력으로 사람을 통제하여 서로의 신뢰가 떨어지면 떠나고, 상이 부족하면 군주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하략(下略)
몸을 복종시키는 것은 예로 하고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은 낙으로 한다. 또 거창한 것보다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꾀해야 한다.
선량한 백성에게는 선의로 흉악한 백성에게는 악의로 보답해야만 모든 명령이 잘 지켜진다.
싸움은 포악한 군주를 토벌하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를 치기 위해서 이다. 그러므로 횡포와 불의를 일삼아서 세상을 혼란으로 몰아넣는 자가 있을 경우에 한해서 할 수 없이 병기를 써야 한다.
경영육법(經營六法)
1) 획고수지(獲固守之) : 견고한 땅을 얻거든 이를 지켜 다시 빼앗기지 마라. 2) 획애색지(獲隘塞之) : 좁은 목을 얻거든 적의 통행을 막고 또 적을 기다리기도 좋다.
3) 획난둔지(獲難屯之) : 험난한 곳을 얻거든 아군이 진을 쳐 머물도록 한다. 4) 획성할지(獲城割之) : 적의 성을 빼앗아 얻거든 이를 나누어 장수에게 주도록 한다.
5) 획지열지(獲地裂之) : 적의 땅을 빼앗아 얻으면 이것을 나누어 장수에게 주어야 한다. 6) 획재산지(獲財散之) : 적의 재물을 얻으면 이것을 흩어서 병사에게 주어야 한다.
경계팔법(警計八法)
1) 적동사지(敵動伺之) : 적이 움직이거든 살펴보아야 하며 2) 적근비지(敵近備之) : 적이 가까운 곳에 있거든 엄중히 군비를 갖추며 3) 적강하지(敵强下之) : 적의 세력이 강맹하거든 나를 낮추어 상대로 방심케 하며 4) 적일거지(敵佚去之) : 적이 편안하고 고달프지 않거든 싸우지 말고 피하며
5) 적능대지(敵陵待之): 적이 왕성하여 강할 때에는 그 세력이 약화되기를 기다리며 6) 적포수지(敵暴綏之): 적이 난폭하거든 꾀로서 이를 편안히 하여 누그러지게 하며 7) 적패의지(敵悖義之): 적의 행패가 심할 때는 대의로 이를 밝혀 바른길로 이끌며 8) 적목휴지(敵睦携之): 적의 상하가 화목하거든 간첩을 보내어 이간질 하라.
사마법 (司馬法)
'사마법' 저자는 분명하지 않다. 대개 춘추시대 제(齊)나라 사마양저(司馬穰苴) 저술로 본다.
하, 은, 주 삼대의 군사 제도와 전쟁 경험을 총괄하여 고대의 전쟁 준비, 전투 지휘, 전장 상황, 각종 병기와 군사상 행정 업무, 천시(天時)와 지리(地利), 인화(人和)의 중요성, 간첩의 활용, 병사의 심리 파악 등을 다루고 있다.
양저(穰苴)는 제나라 사람으로 본래 성이 전(田)씨로, 환공 때 대부를 지낸 전완(田完)의 후손이다. 본명은 전양저(田穰苴)다.
경공(景公) 때 진(晉)나라가 공격해오고 연(燕)나라가 침범했는데, 제나라가 크게 패하자, 경공은 안영(晏嬰, 晏子)의 추천으로 전양저를 출정시켰다.
출정식 날 양저는 해시계와 물시계를 설치해놓고 출발 시간을 기다리는데, 군을 감독하는 감군(監軍) 장가(莊賈)가 전날 송별연으로 늦게 나타나자, '장수는 명을 받으면 그날로 집을 잊어버려야 하고, 군령이 정해지면 그 육친을 잊어버려야 하고, 북을 치며 진격할 때에는 자기 몸을 잊어버려야 한다. 지금 적군이 침입해 나라가 혼란하다. 병사들은 변경에서 낮에는 땡볕을 쬐고 밤에는 노숙하고 있으며, 왕께서는 잠자리에 들어도 편하지 않고 음식을 드셔도 맛을 모른다. 백성들의 목숨이 모두 그대들에게 달려 있거늘, 이 위급한 때에 무슨 송별연이란 말인가?' 하면서 목을 베어버렸다.
왕이 장가를 사면시키라는 왕명을 내려, 사자가 말을 달려 군영으로 들이닥치자, 양저는 단호히 말했다. '장수는 진중에 있는 한, 왕의 명이라도 받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군정에게 '군영에서 말을 타고 달린 자는 군법으로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고 물었다. '참형에 처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왕의 사자는 죽일 수 없다. 하지만 군법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면서, 말을 몬 마부의 목을 베고, 영내를 침입한 수레의 왼쪽 부목(駙木)을 잘라내고, 두 말 중 왼쪽 말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사자를 왕에게 보내 상황을 보고한 후 전쟁터로 출전했다.
군대의 편성이 완료되자, 양저는 병사들의 막사, 우물, 아궁이, 식수, 취사, 문병, 의약 등을 친히 살폈다. 장군에게 주어지는 재물과 양식을 모두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병사들과 똑같이 의식주를 나누었다. 특히 병약한 병사들을 잘 보살폈다.
3일 후, 적과 싸우기 위해 병사들을 통솔하니 모든 병사들이 앞 다투어 나섰다. 심지어 아픈 병사들도 용감하게 출전했다.
진(晉)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공격해오다가 군사를 철수해버렸고, 연나라도 이 소식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황하를 건너 귀국했다. 전양저는 이를 무자비하게 추격하여 실지를 완전 수복했다.
경공은 이 공로로 그를 대사마(大司馬=국방장관)에 임명했고, 이때부터 그를 사마양저(司馬穰苴)라 불렀다.
그후 전양저는 기존 세력의 모함으로 병권을 박탈당하고 울분 속에 죽었으나, 양저의 후손 전화(田和)가 혼란기를 틈타 제후(齊侯) 반열에 들고, 전화의 손자 인제(因齊)는 스스로 위왕(威王)이 되었다.
위왕은 태공망 병법과 양저의 병법을 정리하여 '사마양저병법(司馬穰苴兵法)' 155편을 편찬하였는데, 현재 5편만 남아있다.
제1편 인본(人本)
평상시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국가와 백성을 다스려 전쟁을 준비하되, 불가피한 경우만 전쟁을 치러야 한다. 무인과 문인, 통치자와 수명자의 역할수행을 구분하고, 민심(民心)과 군심(軍心) 관리에 역점을 두되, 농번기가 아닐 때는 군사훈련을 통해 전략 전술을 연마하고, 유사시는 적의 동태와 민심을 살펴 허점을 포착하여 일사불란한 공격으로 최소한의 피해로 전승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인의를 근본으로 하되 전쟁을 좋아하면 나라가 망한다. 나라가 비록 크다해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하고, 천하가 비록 편안해도 전쟁을 망각하면 반드시 위태롭다.
전투능력 상실자, 부상자,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인이다.
제2편 천자지의(天子之義)
현명한 군주가 있다 하더라도 백성을 사전에 교육해 두지 않으면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없다. 백성을 먼저 가르쳐라.
조정에서의 법을 군대에 적용하지 않는다. 국가를 경영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지휘하지 말고, 군대를 통솔하는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하지 말라.
문무는 서로 보완되어야 한다. 조정의 관리들은 무관의 일에 관여치 않고, 무관의 관리들은 문관의 일에 관여치 않는다.
제3편 정작(定爵)
장군이란 몸통 같은 것. 사병은 사지(四肢), 대오는 손가락(五指) 같은 것이다. 전투 대형 전투 지휘는 내손바닥의 손가락 같아야 한다.
전쟁은 권모술수다, 전투는 용맹해야 하고, 포진은 교묘해야 한다.
국정에 있을 땐 신뢰로 은혜를 베풀고, 군에 있을 땐 전략 전술에 널리 힘쓰고, 교전이 됐을 땐 민첩하고 과감해야 한다.
제4편 엄위(嚴位)
병력의 과다보다는 전술을 우선해야 한다. 만약 부하들이 극심할 정도의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땐 죽이지 말라. 부드러운 얼굴빛으로 안심을 시키고 '살려주니 공을 세우라'고 하라.
군법은 엄격하라. 부하들은 교육훈련으로 결속되면 사람들은 죽음조차 가벼이 여기고, 도의로 결속되어 있으면 사람들은 정의를 위해 죽어간다. 한 명이 죽어 여럿 살리면 그것이 정의고, 번영의 길이다.
승패는 장군 한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 대장이 부화뇌동하면 부하의 신뢰를 잃고, 대장이 외골수면 많은 부하를 죽이고, 대장만 살려고 한다면 많은 의혹이 부풀리고, 대장이 죽으면 전투에서 이기지 못한다.
장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않된다. 싸움에서 패하면 책임은 자신이 져라. 전투에서 승리하면 부하들과 공적을 나누어라.
제5편 용중(用衆)
병력이 적으면 빈번하게 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병력이 많으면 정면공격 가능한 이점이 있다.
병력수로 적의 변화를 관찰하라. 진퇴(進退)로 적의 방어상태를 관찰하라. 위협을 가해 적의 심리상태를 관찰하라. 전투 중지를 통해 적의 마음을 관찰하라. 기습으로 적의 질서와 규율을 관찰하라.
적의 수도를 공격할 때는 반드시 진입로와 퇴출로를 생각하라.
싸움에 이겼을 경우 적의 달아날 구멍을 열어 주어라.
무경칠서(武經七書) 제3편
울료자(尉繚子), 당태종이위공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
'울료자(尉繚子)'
전국시대 울요(尉繚)라는 사람이 쓴 '울료자(尉繚子)'는, 1972년 산동성 임기현 은작산 한무제 고분에서 죽간본 일부가 발굴되어, 송대에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가 되었다.
저자로 알려진 울료(尉繚)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기(史記) '진시황본기'에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하기 16년 전에 울료라는 사람이 당시 정(政)이라 부르던 진시황을 만났고, 나중에 진나라 군사의 최고 장관인 태위직을 맡고 6국을 병탄할 모략을 획책하여 그 대업을 성취했다'고 나와 있다.
전국 시대 말기 인물로 짐작된다. 일설에 그는 맹자와 동시대를 살았고, 귀곡자(鬼谷子)의 수제자 였으며, 상앙(商鞅)을 숭상했다고 한다.
울료자 원본(原文)은 29편 혹은 31편이라는 설이 있지만 현재 24편만 남아 있다.
1. 천관(天官)
'천관’은 천체의 방위와 운행 및 바람, 구름, 비, 눈 등의 기상 현상을 뜻하는데, 울료자는 전쟁은 이 '천관'보다 사람의 일, '인사(人事)'에 있다고 주장했다.
양혜왕이 울료자에게 물었다.
'황제(黃帝)는 덕과 형벌을 사용해 백전백승을 거두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소?'
울료자가 대답했다.
'지금 성곽이 하나 있다고 합시다. 만일 동쪽과 서쪽에서 남쪽과 북쪽에서 협공을 가해도 함락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천관<天官= 時日, 陰陽, 向背>을 알아보고 공격한 것이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공격이 성공하지 못한 중요한 원인은 성벽이 높거나, 성을 둘러싼 해자가 깊거나, 무기가 잘 정비되어 있거나, 군량을 포함한 물자가 풍부했거나, 뛰어난 인재가 있는 등의 원인에 있습니다. 이로써 보면 천관(天官)을 따지는 일은 인사(人事)만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병담(兵談)
군사 다스리는 일은 마치 땅이 모든 것을 깊이 감추고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하늘이 드높아 높이를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병력을 분산시킬 때 넓게 포진시킬지라도 통제를 잃는 일이 없고, 밀집대형으로 포진시킬지라도 좁은 공간으로 인해 전투력을 발휘 못하는 일이 없다.
장수는 마음이 넓어 쉽게 자극을 받아 화를 내는 일이 없고, 청렴하여 재물을 탐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만일 마음이 광포하거나, 남의 말을 듣지 않거나,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우, 장수 자격으로 실격이다.
전쟁은 무력(武力)을 줄기, 문략(文略)을 뿌리로 삼는다. 무력이 겉이라면, 문략은 속에 해당한다. 문무의 관계를 꿰면 승부의 큰 줄기를 장악할 수 있다.
3. 제담(制談)
군대는 모름지기 제도부터 완비해야 한다. 제도가 완비되면 병사들이 문란하지 않고, 병사들이 문란하지 않으면 부대의 기강이 바로잡힌다.
군령이 지엄하고 군법이 세밀하면 능히 군을 돌진하게 만들 수 있다. 싸움에 임하기 전에 포상을 분명히 약속하고, 싸움이 끝난 후 잘잘못을 가려 반드시 처결해야 한다. 그래야 용병을 하여 공을 세울 수 있다.
10만 병력을 이끌고 싸우면 천하에 당할 자 없으니 그런 자가 누구인가? 바로 제환공(齊桓公)이다.
7만 병력을 이끌고 싸우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으니 그런 자가 누구인가? 바로 오기(吳起)다.
3만 명 병력을 이끌고 싸우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으니 그런 자가 누구인가? 바로 손무(孫武)다.
4. 전위(戰威)
명령은 장병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수단이다. 지휘관이 명령을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 모르면 명령이 자주 변경되고, 그러면 설령 하달될지라도 장병들은 이를 믿지 못하게 된다.
명령을 내릴 때 사소한 착오는 굳이 고칠 필요가 없고, 작은 의문점은 구태여 해명할 필요가 없다. 지휘관이 명령을 내리면서 주저함이 없어야 장병들이 이를 좇고, 행동하면서 주저함이 없어야 장병들이 두 마음을 품지 않는다.
분대나 소대 단위로 함께 생활하는 병사들이 서로 친척처럼 가깝고, 중대와 대대 단위로 함께 움직이는 병사들이 서로 다정하게 지내야 한다. 이같이 하면 방어할 때는 마치 철벽을 세운 듯하고, 공격할 때는 마치 질풍뇌우가 몰아치는 듯하고, 전차는 거침없이 돌진하고, 병사는 물러설 줄 모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용병작전의 기본 이치다.
왕도를 행하는 나라는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고, 패도를 행하는 패국은 병사와 선비를 부유하게 만들고, 현상유지에 애쓰는 존국은 관원과 대부를 부유하게 만들고, 패망의 길로 치닫는 망국은 군주와 주변 사람의 창고만 부유하게 만든다. 백성의 곳간이 비어 있어, 내란과 외침의 병란이 빚어질 경우 구제할 길이 없다.
'천시는 지리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만 못하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5. 공권(攻權)
장수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면 부하는 사지의 관절에 해당한다. 마음이 진정을 갖고 움직이면 사지의 관절도 반드시 힘을 얻게 된다. 반대로 의심을 품게 되면 사지의 관절은 반드시 따로 놀게 된다. 장수가 회의하며 결단하지 못하면 병사 역시 사지의 관절이 따로 노는 것처럼 절도 있게 움직일 수 없다.
병사가 자신의 지휘관을 두려워하면 적을 업신여기고, 적을 두려워하면 자신의 지휘관을 업신여긴다. 업신여김을 당한 쪽은 패하고, 위엄을 세운 쪽은 승리하게 마련이다.
장수가 이런 이치에 정통하면 군관은 장수를 두려워하고, 군관이 장수를 두려워하면 병사는 군관을 두려워하고, 병사가 군관을 두려워하면 적은 아군 병사를 두려워한다.
병사를 잘 다독여 마음으로 복종하도록 만들지 못하면 병사들은 지휘관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위엄으로 병사를 두렵게 만들어 복종하도록 만들지 못하면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을 좇지 않는다.
잘 다독이는 것은 병사들을 순종하도록 만드는 길이고, 위엄을 세우는 것은 지휘관이 병사로부터 존경을 받는 길이다. 지휘에 뛰어나다는 것은 곧 부하를 잘 다독이고 위엄을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6. 수권(守權)
방어작전의 요체는 지형의 이점을 상실하지 않는 데 있다.
성을 방어하는 방법은 1장(丈)의 간격마다 10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공병과 취사병은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출격부대는 수비에 가담하지 않고, 수비대는 출격하지 않도록 한다. 이같이 하면 1명이 10명, 10명이 100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성이 견고하고 구원병이 온다는 확신이 있으면 성안의 우부우부(愚夫愚婦)까지 모두 나서서 물자를 총동원하고 피로 성을 물들이는 혈전을 치를지언정 성을 사수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다. 구원병까지 수비에 가세하는 까닭에 성을 지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반면 성이 견고할지라도 구원병을 기대할 수 없다면 성안의 우부우부 가운데 절망에 빠져 눈물을 흘리며 비통해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다. 이때는 반드시 정예하고 용맹한 장병을 동원하고, 뛰어난 무기로 무장하고, 쇠뇌와 활 등으로 무장한 부대를 최전선에 배치하고, 노약자와 병자를 뒤에 배치해 이들을 지원해야 한다. 구원군은 반드시 포위망을 열어 성안의 일부 수비 병력이 출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을 수비하는 수권(守權)의 전술이다.
7. 십이릉(十二陵)
후회는 우유부단한 데서 나온다. 죄를 짓는 빌미는 함부로 살육하는 데서 나온다. 편파적인 일처리는 사사로운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불상사는 자신에 대한 비판을 듣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방만한 경비는 백성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리에 어두운 것은 이간책에 놀아난 탓이다. 힘만 들고 성과가 없는 것은 경거망동하기 때문이다. 고루한 것은 현명한 자를 멀리한 후과다. 화난은 늘 재물과 이익을 탐하는 데서 비롯된다. 해를 입는 것은 소인을 가까이한 탓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방비를 소홀히 한 결과다. 위험이 닥치는 것은 명령이 엄정하기 못하기 때문이다.
8. 무의(武議)
태공망 여상은 나이 70에 은나라 수도 조가(朝歌)에서 백정 노릇 하고, 맹진(盟津)에서 음식을 팔았다. 7년이 지나도록 알아주는 군주가 없었고,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미치광이라며 놀렸다. 그러나 주 문왕을 만나자 그는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서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천하를 평정했다.
군주의 단호한 결단이 없었다면 그가 어떻게 이런 대공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말하기를, ‘좋은 말이 임자를 만나면 능히 먼 길도 갈 수 있고, 현명한 선비가 때를 만나면 능히 대업도 이룰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치기 위해 맹진을 건널 때 오른손에 백모(白旄), 왼손에 황월(黃鉞)을 들었다. 결사대는 300명, 병사는 3만 명이었다. 이에 대해 은나라 주왕의 군사는 7십만 명에 달했다. 비렴(飛廉)과 악래(惡來)는 앞장서 군사를 이끌며 창과 도끼를 피하지 않았고, 대열이 수백 리에 달했다.
그러나 주 무왕이 은나라를 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병과 백성이 피로에 지치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슨 상서로운 징조나 기이한 조짐은 없었다. 오직 인사에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장수는 위로 하늘에 좌우되지 않고, 아래로 땅에 얽매이지 않고, 옆으로 사람에게 구애되지 않는다.
장수는 생살을 관장하는 관원이다. 일단 용병하면 위로 하늘, 아래로 땅, 뒤로 군주, 앞으로 적의 제지를 받지 않아야 한다. 장수 한 사람이 전군에 대한 지휘권을 장악한 까닭에 그 성위(聲威)가 마치 호랑이나 이리처럼 흉맹하고, 폭풍우처럼 신속하고, 천둥번개처럼 돌발적이다. 위세가 이처럼 혁혁한 까닭에 천하가 모두 떨 수 밖에 없다.
오기는 진(秦)나라와 싸울 때 고르지 못한 밭고랑에 군막을 치고, 잡목의 나뭇가지로 그 위를 덮어 이슬과 서리를 막았다. 이는 스스로를 장병들보다 높이지 않으려고 그리했던 것이다.
부하에게 헌신을 요구하면서 자신에게 공경할 것을 바라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에게 전력투구를 요구하면서 번다한 예절을 주문해서는 안 된다.
옛날에는 갑옷과 투구를 갖춰 입은 장수와 장병에게는 무릎을 꿇는 궤배(跪拜)를 요구하지 않았다. 번다한 예절로 군사를 번거롭게 만들지 않으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오기가 진나라 군사와 대치해 아직 교전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 한 병사가 넘치는 용맹을 참지 못해 적진으로 뛰어들어 적군의 목을 베어가지고 돌아왔다. 오기가 즉시 참수하려 하자 군관들이 '이 사람은 용사이니 죽여서는 안 됩니다'라고 했다. 이때 오기가 말하기를, '용사는 용사다. 그러나 내 명에 따른 게 아니다'라며 기어코 그의 목을 베었다.
11. 치본(治本)
남자가 사치품에 조각을 새겨넣거나, 여자가 비단에 자수를 놓도록 해서는 않된다. 조각을 하면 보기에는 좋으나 목기는 물기가 쉽게 스며들고, 철기는 비린내가 난다. 옛 성인들은 마시고 먹는 것에 모두 토기를 사용했다. 이는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천하에 낭비가 없도록 한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쇠와 나무가 추위와 무관한데도 수를 놓은 장식을 입히고, 소와 말은 풀과 물을 먹는데도 콩과 좁쌀을 먹인다. 나라를 이처럼 다스리면 입국(立國)의 근본을 잃은 것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길은 백성이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데 있다. 개개인이 이기적인 인간이 되지 않으면 천하가 한 가족과 같이 되어 자신만 배부르고 따뜻이 지내려 하지 않고, 추위와 굶주림을 함께 나눌 줄 알게 된다.
12. 전권(戰權)
병사들이 진공의 결심을 다지고 전혀 의혹이 없을 때 진공하고, 적의 사기가 떨어지고 아군이 유리한 지형을 점거했을 때 적과 교전하고, 여러 측면에서 실정을 정확히 파악해 우위를 점했을 때 위세로써 적을 굴복시킨다. 이같이 하면 가히 병법의 지극한 이치를 깨우쳤다고 할 수 있다.
'적이 결전을 치르고자 할 때 즉각 응전하거나, 수비하는 쪽의 미약한 모습을 보고 이에 넘어가 상대방을 업신여기면 반드시 작전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고 했다. 전투에서 주도권을 빼앗기면 사기가 떨어지고, 적을 두려워하면 진지를 방어할 길이 없다.
13. 중형령(重刑令)
천 명 이상의 병사를 거느리는 지휘관으로 전투에서 패해 도주하거나, 방어하다 투항하거나, 부하를 버리고 달아난 자를 일컬어 국적(國賊)이라 한다. 이런 자는 참수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명부에서 삭제하고, 조상의 묘를 파헤쳐 그 유골을 저잣거리에 늘어놓고, 식솔을 관청의 노비로 보낸다.
백 명 이상의 병사를 거느린 지휘관으로 전투에서 패해 도주하거나, 방어하다 투항하거나, 부하를 버리고 달아난 자를 일컬어 군적(軍賊)이라 한다. 이런 자는 참수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식솔을 관청의 노비로 보낸다.
14. 오제령(伍制令)
군대의 편제는 5명으로 구성된 단위를 오(伍)라고 한다. 이들은 서로 모든 일에 연대책임을 진다.
10명으로 구성된 단위를 십(什)이라 한다. 이들 역시 서로에 대해 연대책임을 진다.
50명으로 구성된 단위를 속(屬)이라 한다. 이들 또한 서로에 대해 연대책임을 진다.
100명으로 구성된 단위를 여(閭)라고 한다. 이들도 서로에 대해 연대책임을 진다.
법령을 위반한 자가 오에서 나왔을 때 이를 고발한 자는 면죄되지만 알고도 고발하지 않은 나머지 오의 대원은 모두 참수한다. 이런 원칙은 십과 속, 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밖에 관할구역 통행 제한에 대한 분새령(分塞令), 오(伍)를 다스리는 규정인 속오령(束伍令), 편제와 지휘요령을 다룬 경졸령(經卒令), 전투의 방법 늑졸령(勒卒令), 장군의 명령을 정의한 장령(將令), 선두부대의 임무를 규정한 종군령(踵軍令), 상벌과 훈련에 대한 병교(兵敎) 상하, 도망병과 병사들에 관한 규정인 병령(兵令) 상하가 있다.
당태종이위공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
'당태종이위공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는 이정(李靖)이 당 태종(太宗)의 물음에 답한 것을 기록한 책이다.
당태종 이세민
명칭은 간단히 줄여서 '당이문대(唐李問對)','이정문대(李靖問對)',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라고도 부른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치기 전에 이정(李靖)을 불러서 병법을 묻는 데서 첫 장이 시작된다.
'고구려가 자주 신라를 침략하기에 짐이 사자(使者)를 보내 설유(說諭)해도 조서(詔書)를 받들지 않아 치려하는데, 그대 의향은 어떠한가?'
이정(李靖)이 답하되,
'탐지해보니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자신이 병법을 안다고 믿고, 중국은 멀다면서 임금님의 명령을 어겼으니, 신에게 3 만 병력을 주시면 연개소문을 사로잡아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3 만의 작은 병력으로 머나먼 고구려를 무슨 전법으로 정벌할 계획인가?'
'신은 정공법(正攻法)을 쓰겠습니다.'
이것이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첫머리 이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당을 건국한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이다. 수나라를 치고 각처에 할거한 군벌을 타도한 용장으로, 아버지 이연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 즉 하늘이 내린 장수라는 별호를 얻었다.
628년 천하를 통일하자. 23년간 재위하였으며, 수나라가 망한 것을 거울삼아 황제 재위기간 통치술을 기록한 내용이 '정관정요(貞觀政要)'이다. 그의 통치철학은 '정관정요'요, 군사철학은 '이위공문대' 다.
당태종은 645년 신라의 요청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가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여 철군했다.
이정(李靖)은 당나라 건국에 참여했고, 이세민이 중앙권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경쟁관계에 있던 군웅들을 평정할 때 활약했다. 돌궐을 공격하여 길리가한(頡利可汗)을 포로로 잡았고, 토욕혼(吐谷渾)의 침입을 막는 큰 공을 세워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다. 사후 당 태종 소릉(昭陵)에 배장(陪葬)되었다.
'당태종이위공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는 상, 중, 하 3권으로 나뉘어 있다.
내용은 강태공의 육도(六韜), 손오병법, 황제(黄帝), 사마양저, 장량, 한신, 조조, 제갈량, 마륭(馬隆)의 병법을 소개하고, 보병, 기병, 전차 사용법, 8진, 육화, 오행 진법 등 출전(出戰) 사례를 고증하고 의미를 재해석한 것 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1. 권(卷) 상
1) 고구려가 신라를 괴롭히니
2) 정병(正兵)과 기병(奇兵)
3) 병법 실행은 사람에게 달렸다
4) 기정(奇正)의 무궁한 응용
5) 무형(無形)의 오묘한 이치
6) 변화와 순환
7) 뛰어난 자와 못 미치는 자
8) 악기문(握奇文)의 뜻
9) 악기진(握奇陳)
10) 구정지법(丘井之法)
11) 사마법(司馬法)과 사마양저
12) 장량과 한신의 병법서
13) 수수(蒐狩)의 뜻
14) 초 장왕의 이광지법(二廣之法)
15) 순오(荀吳)가 적(狄)을 칠 때
16) 이민족 통치하는 방법
17) 제갈량의 군사 훈련
18) 형세를 조성하라
19) 만이(蠻夷)로 하여금 만이를 제압하도록 하라
2. 권(卷) 중
1) 허실(虛實)의 의미
2) 민족을 차별하지 말라
3) 내용을 모른 채 병법 문장만 외워서야
4) 군사 훈련의 방법
5) 육화진법(六花陳法)
6) '파진악무(破陳樂舞)'
7) 오방색(五方色)과 신호 방법
8) 전기(戰騎)와 함기(陷騎), 그리고 유기(遊騎)
9) 어려진(魚麗陳)의 선편후오(先偏後伍)
10) 오행진(五行陳)
11) 음양과 기정상변(奇正相變)
12) 사수(四獸)의 진법
13) 사랑을 베풀고 나서 형법을 엄히 해야
14) 항복한 자를 사랑으로 용서하라
15) 사간(死間)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경우
16) 주도권을 잡는 방법
17) 철질려(鐵蒺藜, 마름쇠)와 행마(行馬)
3. 권(卷) 하
1) 유리한 지형인데 물러나다
2) 분산과 집취(集聚)
3) 단 한 번의 실수가 패배를 불러온다
4) 수비와 공격은 똑같이 중요하다
5) 지피지기(知彼知己)
6) 사기(四機)와 기기(氣機)
7) 내쫓았다가 다시 등용하라
8) 장수를 잘 다스리는 군주
9) 장수에게 부월(斧鉞, 지휘권을 상징하는 도끼)을 내리는 의미
10) 음양과 술수(術數)
11) 승패를 조절할 줄 아는 장수
12) 공수를 결정하는 주도권
13) 병법의 세 가지 경지
동양화의 육법전서
이립옹(李笠翁)의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은 동양화 공부에 필요한 화법 이론과 청나라 이전 대가들의 그림 모사본(模寫本)을 소개한 책 이다. 개자원화전을 모르고 동양화의 근본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이 책은 17세기 청나라 초기 남경(南京)에 살던 부호 이어(李漁)의 별장 개자원(芥子園)에서 만들어졌다. 별장 이름을 따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이라고도 하고, 이어(李漁,)의 호를 따서 '입옹화전(笠翁畵傳)'이라고도 부른다.
강희(康熙) 18년에 1집이 출간되고, 22년만인 1701년에 3집이 완성되었다. 이어(李漁)가 타계하자 사위 심심우(沈心友)가 책을 마무리 지었다.
'개자원화전' 1집은 산수 수석보(山水 水石譜)다. 산, 구름, 바위, 물, 봉우리, 나무 그리는 법이 실려있다. 2집은 난죽매국보(蘭竹梅菊譜)로 매, 난, 국, 죽 치는 법이 실려있다. 3집은 초충영모화훼보(草蟲翎毛花卉譜)로 벌레, 새, 짐승, 나비, 꽃 그리는 법이 실려있다. 각 집 첫머리에 화론을 싣고, 그 다음에 그리는 기법, 마지막에 역대 명인들 작품 모사본(模寫本)이 실려있다.
화본(畵本)은 명나라 이유방(李流芳)의 모사본(模寫本), 청나라 왕개(王槪) 왕시(王蓍) 왕얼(王臬) 삼형제가 편찬한 '산수화보(山水畵譜)'가 토대이다.
산수화 그리는 법
산수화
산수화를 그리는 데는, 포국법(布局法), 용필법(用筆法), 용묵법(用墨法), 구륵법(鉤勒法), 찰법(擦法), 준법(皴法), 염법(染法), 점법(點法), 설색법(設色法), 임모법(臨摹法), 수목법(樹木法), 수천화법(水泉畵法), 시경화법(時景畵法)이 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준법(皴法)이다. '준'은 산, 바위, 토파(土坡)의 입체감, 양감(量感), 질감(質感), 명암(明暗) 등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뽀죽붓에 엷은 먹을 묻혀 가로뉘어 문질러 만든 주름이 '준'이다.
여기에 다시 엺은 먹을 칠하는 것을 '선(渲)'이라 한다. 그 위에 붓끝을 가지고 하나하나 직필로 가필하여 긴장미 낸 것을 '탁(擢)'이라 한다.
'점(點)'은 멀리 있는 인물을 그릴 때 쓰고, 점태(點苔)라고 해서 돌을 그릴 때 이것으로 이끼를 나타내거나, 먼 산의 나무를 그릴 때 사용한다.
아무 것도 안 그린 비단에 맹물을 칠해 그 젖은 곳에 햇무리나 달무리 고리를 내어 안개인 것처럼 필묵의 자취 보이지 않는 것을 '염(染)'이라 한다. 폭포를 그릴 때 양쪽 벼랑과 물을 나누는 것을 '분(分)'이라 한다.
산(山)
뽀족하게 생긴 산을 봉(峰)이라 한다. 평평한 산을 정(頂)이라 한다. 둥근 산을 만(巒)이라 한다. 산이 마주 이어진 것을 영(嶺)이라 한다. 산에 구멍이 있는 것을 수(岫)라 한다. 험준한 벼랑을 애(崖)라 한다. 그 사이나 밑을 암(巖)이라 한다.
길이 있어서 산으로 통하게 된 곳을 곡(谷)이라 한다. 통하는 길이 없는 것을 욕(浴)이라 한다. 가운데 흐르는 물을 계(溪)라 한다. 산 사이에 낀 물은 간(澗)이라 한다. 산 밑에 있는 못을 뢰(瀨, 여울)라 한다.
산 사이 평탄한 곳을 파(坡, 고개)라 한다. 물속에 돌출한 바위를 기(磯, 물 가)라 한다. 바다 속에 있는 산을 도(島)라 한다.
산을 그리는 법
산을 그릴 때는 먼저 대체적인 윤곽을 그린 다음에 준(皴)을 베풀어야 한다. 사람들은 세부부터 그리어 높은 산을 만들어 가는데, 이것은 큰 병폐다. 옛 사람들은 큰 화면을 앞에 놓고 산이 나뉘고 만나는 대체적인 형세를 먼저 그렸다. 그러므로 걸작이 되었다.
빈(賓)은 나그네요, 주(主)는 주인이다. '빈주조읍(賓主朝揖)'이란 나그네와 주인이 손을 모아 인사하는 것이다. 주인 격인 산과 나그네 격인 산이 서로 기맥 상통해서 떨어지는 일 없이 적절히 안배해야 한다.
산에는 삼원(三遠)이 있다. 밑에서 산마루를 우러러보는 것을 고원(高遠)이라 한다. 산 앞에서 산 밑을 굽어보는 것을 심원(深遠)이라 한다. 가까운 산에서 먼산을 바라보는 것을 평원(平遠)이라 한다.
고원의 형세는 돌올(突兀)하여 치솟고, 심원의 의취(意趣)는 끝없이 중첩하며, 평원의 멋은 표묘한 데 있다.
파(坡)는 석파가 있고 토파가 있으며, 어느 것이나 위가 평평하게 생겼다. 파의 상면(上面)은 깍아서 평평히 다져진 것 같아야 하고, 측면의 준(皴)은 흙이나 돌이 긴 세월 풍설에 시달린 나머지 깨어지고 벗겨져서 저절로 생긴 듯해야 한다.
나무 그리는 법
산수화는 먼저 나무를 그리고, 나무를 그릴 때는 먼저 줄기를 그린다. 줄기를 그린 다음에 거기에 점을 가하면 무성한 숲이 되고, 가지를 많이 그리면 고목이 된다. 고목은 반드시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겨울에 잎이 시들어 떨어진 나무를 의미한다.
노근(露根)은 겉으로 들어난 뿌리이다. 산이 기름지고 땅이 두터운 데서 자란 나무는 대개 뿌리가 땅 속에 숨겨져 있다. 천인절벽 바위 틈에서 돌에 끼이고 물에 씻기고 있는 나무가 높이 치솟은 고목이 되면, 매양 뿌리를 노출시키게 마련이다. 마치 세속을 벗어난 신선이 바짝 야위고 나이가 늙어서 힘줄과 뼈가 들어난 것처럼 보여 한층 특이한 느낌을 준다.
한 떨기 잡목을 그릴 때, 그 중 한두 그루 뿌리가 드러나게 하여 변화를 주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반드시 나무에 혹이 있고 마디가 있는 것을 가려서 뿌리가 드러나게 해야 한다. 모든 나무 뿌리가 드러나게 하면 아취가 없어진다.
산수화 속 인물 그리는 법
산수화의 인물은 너무 정교하게 그려서도 않되며, 너무 기세가 없어도 않된다. 산과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있어, 사람은 산을 보고 있는듯 하고, 산은 사람을 굽어보고 있는 듯 해야 한다. 거문고는 달에게 들려주는 듯하고, 달은 고요히 거문고를 듣고 있는 듯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림 속에 뛰어들어 그림 속 인물과 자리를 같이 하지 못함을 한탄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산은 산이요, 사람은 사람이라는 식이 되어 전혀 관계없는 것이 된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예운림(倪雲林)의 그림처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공산인 쪽이 낫다.
산수화 속의 인물은 학처럼 맑게 여위어서 멀리서 보기에 신선 같은 느낌이 들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세속적인 냄새가 나서는 않된다. 세속적인 냄새가 나면 산수화의 흠이 된다.
집과 오솔길 그리는 법
산수화 속의 모옥
산수화에서 집은 정다운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인가를 난잡스레 막 그려넣으면 시정의 속된 기분이 되고 만다. 요즘 그림 속에 집을 적당한 곳에 그려 넣을 줄 아는 사람은 겨우 몇 명 있을 뿐이다. 이 몇 명을 제외하면 산수는 곧잘 그리면서도 거기 그린 인가는 치졸하다.
전에 요간숙(姚簡叔)이 그린 그림을 보았는데, 수수알 정도의 작은 집이라도 반드시 전후가 상통하고 곡절(曲折)하여 아취가 넘쳐 있었고, 산은 집을 돌아보고 집은 산을 돌아보는 묘미가 있었다.
집은 물론 신선을 살게 하는 곳이다. 그러나 콩이나 오이 시렁같은 청절(淸絶)한 것도 신선 못지않는 경치다. 그러므로 시골 경치를 그리는데 몇가지 담박한 것들도 착안해야 한다. 싸리문에는 등나무 덩굴이 감기고, 돌계단은 잡초에 묻혔으며, 기와는 찢긴 비늘처럼 여기저기 빠져있고, 벽은 거북이 잔등처럼 금이 가 있다. 아주 황폐한듯 하면서 자연스런 기운이 넘친다.
산중의 은자는 반드시 서재에 있어야 유한(幽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문으로 통하는 소로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덕이 높은 사람의 초막임을 알 수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흠모의 정을 억누르지 못하게 한다. 이런 느낌이 드는 문(門)과 소로(逕)를 그릴 때 비로소 능수(能手)라 할 만하다.
구름 그리는 법
구름은 천지의 큰 장식이다. 산천에 금수(錦繡), 즉 비단옷을 입히며, 속력이 빠른 것은 달리는 말과 같아서 돌에 부딪치면 소리가 날 것 같다. 옛사람들이 구름을 그린 것은 보면 두 가지 비결이 있다.
하나는 천암만학(千巖萬壑)이 겹쳐 있는 곳을 구름으로 한가롭게 만드는 법이다. 푸른 봉우리가 하늘에 치솟았는데 갑자기 흰 구름이 가로 휘날리며 층층으로 산을 뒤덮는다. 왼쪽에서 구름이 개이면 푸른 산마루가 다시 모습을 나타낸다. 이는 문인들의 이른바 '망리투한(忙裏偸閑)', 바쁜 중에 한가로움을 훔쳐내는 법과 같다. 또 하나 방법은 봉우리가 하나 밖에 없어 구도가 너무 한가한 경우, 구름을 가지고 화면을 바쁘게 하는 법이다. 산과 물이 다한 곳에서 구름이 일어나고, 갑자기 바다에 물결이 나타나는 것이 그런 식이다. 그래서 산을 운산(雲山)이라 하고, 물을 운수(雲水)라 한다.
내가 산수 그리는 법에서 구름을 마지막으로 돌린 것은, 옛사람들이 '구름은 산수의 마감'이라고 말한 것과 같은 까닭이다.
물에 대해서 더 이야기 하면, '돌은 산의 뼈요 물은 돌의 골수다. 골수(骨髓)는 뼈에 영양을 공급한다. 만약 뼈에 골수가 없다면 바위는 흙덩이와 같으니 이미 뼈가 아닌 것이다. 물의 성질은 지극히 부드럽지만, 산을 밀어젖히고 돌을 뚫는다. 개울이 되고 대하(大河)와 바다가 되어, 만물을 기른다.'
매화 그리는 법
매화나무가 맑고 깨끗한 것은 꽃이 야위기 마련이며, 나무 끝이 연한 곳에서 살찐 꽃이 핀다. 가지가 겹친 나무에는 많은 꽃이 피고, 홀로 나온 가지 끝에서는 성기게 핀다.
줄기를 그리는 데는 용처럼 꾸불꾸불하고 쇠처럼 굳건하게 하며, 나무 끝을 그리는 데는 긴 것은 화살처럼, 짧은 것은 창처럼 그려야 한다.
화폭에 공백이 있을 때는 나무를 끝까지 그리며, 아래가 좁을 때는 뿌리까지 다 그리지 않는다.
만약 벼랑에 있어 가지가 기괴하고 꽃이 성긴 매화를 그릴 때는, 꽃망울이나 반쯤 핀 매화를 그려야 한다. 만약 바람에 날리고 눈이 쌓여서 가지가 얕게 드리운 모습을 그리는 데는, 줄기는 늙고 꽃은 적을 필요가 있다. 만약 안개 낀 가운데 서있는 가지가 어리고 꽃은 예쁜 매화를 그리는 데는, 꽃이 반쯤 벌어져 있어야 어울린다. 만약 서리를 맞고 아침 햇빛에 비쳐서 굳세고 곧게 서 있는 모습을 그린다면, 꽃은 작고 향기가 풍기도록 해야 한다.
꽃잎 그리는 법은 뾰족하지도 않고 둥글지도 않게 붓 따라 적절히 가감한다. 꽃 핀 모양을 그릴 경우, 만약 꽃이 칠푼(七分) 쯤 피어있을 때는 꽃잎을 전부 표현하고, 반개(半開)일 때는 그 반만 나타내고, 정면을 향해 피어있을 때는 전체를 나타낸다. 이것을 무분별하게 구분하지 못함은 불가하다.
매화 그림은 여러 화풍이 있다. 성기면서 교태를 머금은 것이 있고, 번성하면서 굳센 것이 있고, 늙었으면서 고고한 것이 있고, 맑으면서 꿋꿋한 것이 있으나, 그 모두를 다 말할 수 없다.
난초 그리는 법
난은 먼저 잎을 그려야 하는데, 자유로이 팔을 휘두르기 위해서는 가벼운 붓이 좋다.
잎은 두 잎 중 하나는 길고 하나는 짧게 하며, 떨기로 뻗은 잎은 종횡으로 엇갈려야 한다. 꺽인 잎이나 아래로 드리운 잎을 그려넣어 형세를 돋우고, 굽어보는 잎이나 위로 향한 잎을 그려서 저절로 정취가 생기도록 하는 것이 좋다.
잎에서 앞 뒤 것을 구별하도록 하려면 진한 먹과 엷은 먹을 써서 차이가 나도록 한다.
먼저 엷은 먹으로 꽃을 그리고, 그 다음 부드러운 줄기를 그려 그것을 받는다.
활짝 핀 꽃은 위로 향해 있고, 피기 시작한 꽃은 반드시 비스듬이 기울어져 있다. 개인 날 꽃은 다투어 해를 향하고, 바람 속의 꽃은 웃으면서 객을 맞이하는 듯하다. 드리운 꽃의 가지는 이슬에 젖은 듯하고, 꽃술은 향기를 머금은 듯하다.
다섯장 꽃잎을 손바닥처럼 그려서는 안된다. 손가락이 굽던가 펴지던가 하는 것처럼 그려야 한다.
꽃 핀 줄기는 가늘고 작은 잎으로 좌우에서 포위되고, 꽃술은 진한 먹으로 그린다. 꽃을 그린 다음에는 화면의 조화를 위해 다시 잎을 그려넣는다. 짧은 잎을 몇 개 그려서 뿌리를 싸듯이 한다.
꽃이 여러 개 피는 혜초(蕙)의 줄기는 빼어나게 서 있는 자세가 좋고, 잎은 굳세게 그릴 필요가 없다.
*일경일화(一莖一花)를 난(蘭)이라 하고, 일경다화(一莖多花)를 혜(蕙)라 한다.
국화 그리는 법
국화는 성질이 고고하고 그 빛깔이 아름답고 그 향기가 늦다.
이를 그리려면 먼저 가슴에 국화의 이런 모습을 품어야 비로소 그 그윽한 운치를 그릴 수 있게 된다.
국화는 초본이지만 서리에도 오연한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소나무와 아울러 일컬어진다. 따라서 그 가지는 외롭고 억세게 그려야 하니, 봄꽃의 가지가 부드러운 것과 처음부터 같을 수 없다. 잎은 윤끼가 있는 것이 좋으니, 늦가을 다른 초목이 시들어 있는 것과 같을 수 없다.
꽃은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되 번잡하지 않아야 하며, 잎은 상하전후 서로 덮고 가리면서 난잡하지 않아야 한다. 가지는 서로 뒤얽혀 있으면서 무잡(蕪雜)하지 않아야 하며, 뿌리는 겹쳐 있으면서 늘어서지 않아야 한다.
꽃과 꽃술은 미개(未開)한 것과 반개한 것을 고루 갖추어서, 가지 끝이 눕든가 일어나 있든가 하여야 한다. 만개한 것은 무거우므로 누워 있는 것이 어울리고, 미개한 것은 가벼울 수 밖에 없으므로 끝이 올라가는 것이 제격이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만약 더 깊은 정취를 찾는다면, 일지일엽(一枝一葉)과 일화일예(一花一蘂)가 각기 그 멋을 나타내고 있어야 한다.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다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菜根譚)
필자는 십대에 톨스토이의 <인생 독본>이란 책을 좋아했다. 톨스토이의 인생관과 세네카, 아우렐리우스, 파스칼, 루소의 글들을 감명깊게 읽었다. 신문기자로 일하던 삼십대에 동양에도 채근담(菜根譚)이란 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생독본>이 라일락 향기 같다면, <채근담>은 매화 향기 같았다.
채근담은 명나라 홍자성(洪自誠) 저술이다. 그는 '사람이 미미(美味)를 탐하지 않고 순무 혹은 풀잎과 뿌리 같은 거친 음식(粗食)도 달게 먹을 수 있을 때, 세상에 임함에 지조를 세울 수 있다'고 했다.
채근담(菜根譚)
도덕을 지키는 자는 한때 적막하나 권세에 아부하는 자는 만고에 처량하다. 달관한 사람은 물욕 밖의 진리를 보고 죽은 후의 명예를 생각하니, 차라리 한 때 적막할지언정 만고에 처량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
맛있는 술과 기름진 고기, 매운 것 달콤한 것 등의 조미(調味)가 진미는 아니다. 진미는 단지 담박한 맛이다. 신기하거나 탁이(卓異)한 사람은 도의 극치에 이른 사람이 아니다. 지극한 사람은 다만 평범해 보인다.
명아주 잎으로 국을 끓이고, 비름 같은 나물로 배를 채운 사람은 마음이 얼음처럼 맑고 구슬처럼 고귀하다. 반면 미의미식(美衣美食) 하는 사람은 권세와 명예 앞에서 노비가 무릎을 꿇고 얼굴빛을 다듬는 것 같이 비굴한 경우가 많다. 대개 지조는 담박한 생활 속에서 길러지고, 기름진 고기와 맛있는 음식을 취하는 데서 기개는 상실되고 만다.
하늘의 뜻은 헤아리기 어렵다. 어떤 때는 역경에 사람을 몰아넣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순경(順境)으로 사람의 숨을 터 준다. 영웅호걸들도 별도리 없이 이 속에 부침한다. 그러나 군자는 천운이 역으로 올 때도 이것을 순하게 받아들이고, 평온할 때도 위험한 경우를 잊지않고 조심하며 조금도 당황하지 않으므로, 하늘도 그들에게만은 영향력을 구사할 수 없다.
복더러 와달라고 아양 떨 필요없다. 복이 와서 상주할 환경을 만들면 되는데, 기쁜 마음과 명랑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화더러 떠나달라고 빌 필요는 없다. 화가 와서 기댈 환경이 아니면 되는데, 즉 남을 해칠 마음을 없애고 평온한 것이 화를 면하는 첩경이다.
천지의 기운이 따뜻하면 곧 만물이 살아나고, 차가우면 죽는다. 성품이 냉혹한 사람은 복이 적고, 화기와 온정이 넘치는 사람은 하늘이 복을 내린다. 땅은 약간 더러워야 만물을 생산하나니, 물이 너무 맑으면 오히려 고기가 살지 못한다. 군자는 마땅히 더러움도 용납하는 도량이 있어야 하며, 깨끗하기만 하고 자기만 지조를 지키려 하지는 않는다.
바람이 대밭에 불면 소리가 요란하다. 하지만 바람이 지난 뒤에는 다시 고요하다. 기러기가 못 위를 날 때, 못 속에 기러기 떼가 어지럽다. 그러나 기러기가 날아간 뒤에는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군자의 마음도 이 대나무밭이나 연못과 같다. 어떤 일이 생기면 마음에 반영하지만, 그 일이 다 끝나면 마음은 다시 고요함으로 돌아간다.
귀는 마치 회오리바람이 골짜기에 소리를 울림과 같은지라 지나게 하고 남겨 두지 않으면 시비도 함께 사라진다. 마음은 마치 연못에 달빛이 비치는 것과 같아 텅 비게 하고 잡아 두지 않으면 외물(外物)과 나를 모두 잊게 된다.
보잘것 없는 초가라도 잘 보살피면 아담한 맛이 생기고, 시골 촌부라도 잘 다듬으면 멋이 풍기는 법이다.
학문과 덕을 수양한 군자는 어쩌다 불우한 처지에 빠져도 자포자기 하지않고 학문과 덕을 굳건히 지킬 것이다. 이 때는 비록 군색할지라도 범인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다.
평민이라도 기꺼이 덕을 심고 은혜를 베풀면, 이것이 곧 재상이나 임금보다 백 배나 높은 것이다. 사대부라도 한갓 권세나 탐내고 이익을 위해 아첨이나 하면, 작(爵)이 있는 걸인과 다름 없다.
권력을 쫓고 세력에 붙는 재앙은 참혹하고 아주 빠르며, 고요함에 살고 편함을 지키는 맛은 가장 맑고 가장 오래 간다.
권세 있고 부귀한 사람들은 용처럼 다투고 영웅과 호걸들은 호랑이처럼 싸우는데,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면 마치 개미떼가 비린내 나는 고깃덩어리에 모여드는 것과 같고, 파리떼가 다투어 피를 빠는 것과 같다.
관원에는 두 마디의 말이 있으니 오직 공평하면 밝은 지혜가 생기고, 오직 청렴하면 위엄이 생긴다. 가정에는 두 마디의 말이 있으니 오직 용서하면 불평이 없고, 오직 검소하면 살림이 넉넉하다.
춥고 배고프면 돈푼이나 있는 자에게 달라붙고, 배부르면 떠나가고, 따뜻하면 따라오고, 추우면 언제 보았더냐 싶게 길에서 만나도 인사조차 않는 것이 동서고금의 인정이다.
한 집의 가장이 집안을 통솔함에 너무 엄격해도 안되고 너무 너그러워도 못쓴다. 너무 노골적이어도 반발을 사기쉽고, 너무 서둘러도 역효과가 나기 쉽다. 대체적으로 화락한 분위기 속에서 만사를 원만하게 처리함이 좋다.
허물을 꾸짖을 때 너무 엄격하게 나무라지 말고,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남에게 선을 베풀 때 지나치게 고상하게 행동하지 말고, 그 사람이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높은 관직에 있더라도 자연에 묻혀 사는 풍취를 지녀야하고, 자연에 묻혀 있어도 국가에 대한 경륜을 품어야 한다.
매는 새 중의 왕이지만 평소에 조는듯 느릿느릿하고, 호랑이는 백수의 왕이지만 걷는 모습이 느려 보인다. 군자는 마땅이 매와 호랑이처럼 평소에는 자신의 총명이나 재주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 마치 무능한 사람처럼 보이다가, 일단 큰일을 당하면 책임을 두 어깨에 메고 천하국가를 위한 위대한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역경은 영웅호걸은 단련하는 하나의 용광로요 쇠망치다. 그 용광로에 불 피우고 그 쇠망치에 얻어맞는 동안 무쇠 속의 모든 불순물이 증발되고 단단한 강철이 되는 것이다.
역경을 돌파한 인물은 마치 강철처럼 몸이 건강하고 의지가 굳다. 그런데 몸이 단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마치 달구지 않은 무쇠 같아서 심신이 유약하여 아무 쓸모없는 인물이 될 것이다.
낮은 곳에 살아 본 후에야 높은 곳에 오르는 일이 위태로움을 알게 된다. 어두운 곳에 처해 본 후에야 밝은 곳의 눈부심을 알게 된다. 고요함을 지켜 본 후에야 분주한 움직임이 헛수고임을 알게 된다. 침묵해 본 후에야 말 많은 것이 시끄러움을 알게 된다. 글을 읽어도 성현의 뜻을 보지 못하면 종이와 붓의 노예에 불과하고, 공직에 있으면서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의관 입은 도둑에 불과하다.
가르치면서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입으로만 참선하는 것과 같고, 큰일을 하면서 덕을 베푸는 데에 인색하면 한순간 피고 지는 꽃일 뿐이다.
세상은 재주있는 사람은 칭찬해도 덕을 기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덕이 주인이고 근본이며, 재주는 종이요 지엽(枝葉)이다. 만일 재주만 있고 덕이 없으면, 마치 주인 없이 종이 위세부리는 식이요, 백주에 도깨비가 난장판 부림과 같다. 눈앞의 일에 만족하면 선경이지만 만족할 줄 모르면 속세이다.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인연은 잘 쓰는 사람에겐 생기가 되고 잘못 쓰는 사람에겐 살기가 된다.
갠 날 푸른 하늘이 갑자기 변하여 천둥 번개가 치기도 하며, 거센 바람, 억수 같은 비도 홀연히 밝은 달 맑은 하늘이 되나니 하늘의 움직임이 어찌 일정하겠는가. 털끝만한 응체(凝滯)로도 변화가 생기는 것이니 하늘의 모습도 어찌 변함이 없겠는가. 털끝만한 막힘으로도 변화가 생기는지라 사람의 마음바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꽃은 반쯤 피었을 때 보고, 술은 적당히 취하도록 마시면 그런 가운데 아름다운 취미가 있나니, 만약 꽃이 활짝 피고 술에 흠뻑 취하면 문득 재앙의 경지에 이른다.
글자 한 자 모를지라도 시의(詩意)를 가진 자는 시가의 참맛을 얻을 것이요, 게(偈) 한 구절 연구하지 않더라도 선미(禪味)를 가진 자는 선의 현기(玄機)를 깨닫는다.
꽃은 화분 속에 있으면 마침내 생기가 없어지고 새는 새장 안에 있으면 문득 자연의 맛이 줄어든다. 이 어찌 산 속의 꽃이나 새가 한데 어울리어 색색의 무늬를 이루며 마음껏 날아서 스스로 한가히 즐거워함만 같을 수 있겠는가.
나무는 무성한 잎이 져서 뿌리만 남게 될 때에야 꽃과 잎사귀가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되고, 사람은 죽어서 관 뚜껑을 덮은 뒤에야 자손과 재물이 쓸데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산중의 오막살이에서 갈대 솜을 넣은 이불을 덮고, 백설을 완상하며 뜬구름을 바라보면, 이욕(利欲)에 물들지 않은 고요하고 맑은 야기(夜氣)를 훔뻑 보전할 수 있으며, 죽엽(竹葉) 술잔으로 마신 술에 도연히 취하여 청풍명월 노래하면, 속세의 모든 번뇌에서 깨끗이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대 울타리 엉성한 초가삼간에 한가로히 누웠다가 문득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더 없이 흐믓하여 마치 구름 속을 헤매는 것 같으며, 서재에 깊숙이 앉아 만권시서(萬券詩書)를 독파하는 중 은은히 들려오는 매미소리, 까치소리 들으면 뜻이 더없이 고고하여 태고적의 별천지에 사는 기분이다.
차는 극상품만 바라지 않으면 찻단지가 마르지 않고, 술도 향기롭고 강렬한 것만 바라지 않으면 술통이 비는 일이 없으며, 변변찮은 거문고에 줄이 없어도 타면서 즐기고, 단소에 구멍이 없어도 유유자적 한다면, 비록 복희황제의 운치에는 미치지 못해도 죽림칠현 중 혜강(嵇康)이나 원적(阮籍)의 멋에는 미치지 못하랴.
옛날 고승이 말하기를 '대나무 그림자가 층계를 쓸어도 티끌이 움직이지 않고, 달 그림자가 늪에 드리워도 물에 흔적이 없다'고 했다. 어떤 유학자는 '물이 아무리 급히 흘러도 주위는 고요하며, 꽃이 분분히 떨어져도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한가롭다'고 했다.
어부사(漁夫辭)
굴원(屈原)
동양에서 절개를 말하려면 반드시 알아야할 문장이 있다. 굴원의 어부사(漁夫辭)다. 우리나라는 연산군 때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어 무오사화 피해를 입은 김일손 선생 호가 탁영(濯纓)이며, 1950년대 국무총리를 지낸 장택상씨의 호가 창랑(滄浪)이다.
창랑이나 탁영이란 말은 기원 전 3세기 초(楚)나라의 대시인이었던 굴원의 어부사에서 유래된다.
‘창랑지수(滄浪之水)가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겠다'는 구절은, 도가 행해지는 밝은 세상이 되면 머리를 감고 갓끈을 씻고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서 벼슬하고, 도가 행해지지 않는 혼탁한 세상이라면 창랑의 물에다 발이나 씻고 벼슬자리 버리고 초야에 묻혀, 청탁(淸濁)에 맞는 처신을 하겠다는 것이다.
굴원
굴원은 주나라 말기 전국시대 초나라 왕족이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다. 역대 치란(治亂)에 밝아 회왕(懷王)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삼려대부가 되어 초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헌령(憲令)을 기초하였다. 그런데 상관대부 늑상이 그걸 가로채려 하자 거절하여, 늑상이 '굴원은 학식이 빙자하여 믿고 대왕을 업신여기며 무엇인가 딴마음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회왕에게 참소하였다.
회왕이 그 말을 믿고 굴원을 멀리하자, 굴원은 비통해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로하니 그 시가 '이소(離騷)'이다.
그후 초나라는 진나라의 장의가 6백리의 땅을 베어 주겠다는 말에 속아 제나라와의 친교를 끊어 끊임없는 진나라의 침략을 받아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굴원을 불러들여 수도인 영으로 돌아왔으나 재차 녹상의 참소를 입어 강남지방에 추방되었다. 이때 굴원은 상수(湘水)가를 방황하면서 '천문(天問)'을 써냈다. 172가지 문제를 제기하며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하늘에 의문을 호소하였다.
그후 경양왕 27년(B.C. 278)에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드디어 초나라를 함락시키고 선왕의 무덤인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리니, 이 소식을 들은 굴원은 '어부사'를 남기고, 음력 5월 5일 돌을 품고 멱라수(호남성 상수의 지류)에 몸을 던져 순국(殉國)하였다. 나이 62세 때 였다.
현재 호남성 도강현 굴원이 투신한 멱라수 옆에는 그의 무덤과 사당이 있다. 굴원이 죽은 음력 5월 5일은 단오절(端五節)이라 하는데, 매년 이 날이 오면 사람들은 뱃머리에 용을 장식한 용선(龍船) 경주를 성대히 벌이고, 갈대잎으로 싼 송편을 멱라수 물고기에게 던져준다.
어부사(漁父辭)
굴원이 이미 쫓겨나 강담(江潭)에서 노닐고 못가를 거닐면서 시(詩)를 읊조릴 적에 안색이 초췌하고 몸이 수척해 있었다. 어부(漁父)가 그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닌가? 어인 까닭으로 여기까지 이르렇소?'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홀로 깨끗하고,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 그래서 추방을 당했소이다.'
어부(漁父)가 이에 말했다.
'성인(聖人)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막히지 않고 능히 세상을 따라 옮기어 나가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하면 왜 그 진흙을 휘젖고 흙탕물을 일으키지 않으며, 뭇사람들이 모두 취해있으면 왜 그 술 지게미를 먹고 박주(薄酒)를 마시지 않고, 무슨 까닭으로 깊은 생각과 고상한 행동으로 스스로 추방을 당하셨소?'
굴원이 이에 대답하였다.
'내 듣기로, 막 머리를 감은 자는 반드시 관(冠)을 털어서 쓰고, 막 목욕을 한 자는 반드시 옷을 털어 입는다 하였소이다. 어찌 몸의 반질반질 깨끗한 곳에 외물(外物)의 얼룩덜룩한 더러운 것을 받겠소? 차라리 상강(湘江)에 뛰어들어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葬事)를 지낼지언정, 어찌 희디흰 순백(純白)으로 세속의 먼지를 뒤집어 쓴단 말이요?'
이에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배의 노를 두드려 떠나가며 노래를 불렀다.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을 것이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을 것이요(滄浪之水淸兮 可以濁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그리고 떠나가고 굴원은 다시 그와 더불어 말하지 못하였다.
돌아가리로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전에 광화문에 '귀거래(歸去來)'란 다방이 있었다. 그 다방 이름은, '돌아가리라. 전원이 장차 거칠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랴(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란 명구절로 시작되는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도연명은 365년, 동진(東晉) 때 시인으로, 20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자 관리가 되어 팽택(彭澤, 심양 부근) 현령을 지내다가 현실에 아부하기 싫어, '나는 쌀 다섯 말 때문에 허리 굽혀가며 살지 않겠다'며 41세 때 이를 사임하고 인수(引綏)를 풀어준 후, '귀거래사'를 읊고 전원으로 돌아가 63세 때 세상을 떠났다.
도연명
함께 소개하는 '독산해경'은 고향에 돌아와 사는 그의 모습을 그렸고, '도화원기'는 그의 이상향을 나타내고 있다.
'귀거래사'는 한.중.일 3국 전원시의 시초로 볼 수 있다.
'도화원기'는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처럼 파라다이스를 노래한 글이다. 어빙 워싱튼(Irving Washington)의 소설 <Rip Van Winkle)과도 비슷하다. 선경(仙境)에 들어갔다 돌아온 이야기다.
귀거래사(歸去來辭)
돌아가리라. 전원(田園)이 장차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어찌 초창히 홀로 슬퍼만 하였던가.
지난 일은 탓해야 소용 없고, 앞으로 바른 길 좇는 것이 옳다는 걸 알았노라. 길을 잘못 들어 헤맨 것은 사실이나, 아직 정도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이제 깨달아 바른 길 찾았고, 지난 날이 그릇되었음을 알았노라.
(고향으로 가는) 배는 흔들흔들 가볍게 나아가고, 바람은 펄럭펄럭 옷깃을 스쳐가네, 나그네에게 노정을 물어보나니, 새벽빛 희미한 것이 애석하구나. 마침내 저 멀리 내 집 대문과 처마가 보이자 기쁜 마음에 급히 뛰어갔노라.
아이 머슴 길에 나와서 반기고, 어린 자식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는구나. 뜰 안 세 갈래 오솔길은 잡초가 무성하지만,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그대로 있다. 어린 놈 데리고 방에 들어가니, 항아리엔 술이 가득하다. 술단지 끌어당겨 자작(自酌)하며, 마당의 나뭇가지 바라보며 기쁜 얼굴 지어본다. 남쪽 창가에 척 기대어 거만을 떨어보니, 무릎 탁 펴고 사는 편안함을 이제야 알겠구나.
전원의 날들은 나날이 아취가 무르익어간다. 문이야 달아 놓았지만 찾아오는 이 없어 항상 닫아두네. 지팡이에 늙은 몸 의지하며 걷다가 발길 멎는 대로 쉬고, 때때로 머리 들어 먼 곳을 바라본다.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나오고, 새들은 권태롭게 날아 집으로 돌아올 줄 아는구나. 서산에 저녘해 지려 할 때, 나는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서성이노라.
돌아가리라! 사귐도 그만 두고 어울림도 끊으리라.
세상도 나도 서로 어긋나기만 하니, 이제 다시 수레에 말을 매고 무엇을 구하러 다니겠는가. 친척들과 정담 즐기고, 거문고 타고, 책 읽는 걸 낙 삼아 시름을 달래보련다. 농부가 나에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니, 장차 서쪽 밭이랑에 할 일이 있겠구나.
간혹 장식한 수레를 부르고, 간혹 외로운 배를 저어, 깊고깊은 골짜기 찾고, 구불구불한 언덕 지나가리라. 나무들은 즐거운 듯 생기있게 자라나고, 샘물 연연히 흘러내린다.
만물이 때를 얻음을 부러워하면서 나의 인생 끝나감을 느껴보노라. 끝이로구나! 이 몸이 세상에 남아 있을 날 그 얼마이리. 어찌 마음을 가고 옴의 섭리에 맡기지 않고, 황황히 무엇을 욕심낼 것인가.
부귀는 내 바라는 바 아니고, 신선의 나라는 기약할 수 없는 일. 다만 좋은 날 홀로 거닐고, 가끔 지팡이 세워 놓고 밭이나 갈리라.동녘 언덕에 올라 휘파람 불고, 푸른 시냇가에서 시를 읊으리라. 오로지 조화의 수레를 탔다가 돌아가는 것이니, 주어진 천명을 즐길 뿐, 더 무엇을 의심하리.
산해경 읽으며(讀山海經)
초여름에 초목이 자라 집 주변 숲이 울창하도다.
새들은 의탁할 곳 있음을 즐거워하고, 나 역시 내 초가집을 사랑하네.
이미 밭도 갈고 씨도 뿌렸나니, 때때로 돌아와 내 책을 읽노라.
외진 마을이라 번화가와 먼데, 간혹 찾아온 친구 수레도 돌려보내노라.
흔연히 봄 술 마시고, 안주 삼아 내 채원의 채소를 뜯네.
보슬비는 동쪽에서 오고, 좋은 바람은 함께 오는구나.
주왕전(周王傳)도 읽어보고, 산해경(山海經) 그림들도 두루 들춰본다오.
우주를 굽어보고 올려다 보니, 즐거워 않고 또 어쩌겠는가.
음주(飮酒)
結廬在人境, 而無車馬喧
오두막을 사람 사는 근처에 지었으나,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이 없다.
問君何能爾, 心遠地自偏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능히 그러한가? 마음이 멀어지니 땅이 절로 구석지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꺽어들고,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산 기운은 아침 저녁이 더욱 아름답고, 나르던 새들이 서로 함께 돌아온다.
此間有眞意, 欲辯已忘言
이 가운데 참뚯이 있거니, 말을 하려해도 이미 말을 잊었노라.
도화원기(桃花源記)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 무릉(武陵)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물길 따라 가다가 길의 멀고 가까운 것을 잊어버렸다.
홀연히 복숭아 꽃밭을 만났는데, 강 양쪽 수백보 중간에 잡목은 없고, 향기나는 풀들은 싱싱하고 아름다웠고, 떨어진 꽃잎 가득하였다.
어부는 이러한 광경을 무척 기이하게 여겨 더 나아가 그 숲의 끝까지 가보고자 하였다.
숲이 끝나는 물의 발원지에 이르러, 문득 산 하나를 발견했다.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마치 그 속에서 희미한 빛이 비치는 듯 했다.
어부는 곧 배에서 내려 동굴 입구로부터 들어갔다. 처음은 극히 좁아서 겨우 사람이 통과할 수 있었다. 다시 수십보 걸어가자 탁 트이고 밝아졌다.
토지는 평탄하고 넓었으며 가옥은 잘 정돈되어 있고, 기름진 전답, 아름다운 연못에는 뽕나무 대나무들이 있었다. 밭 사이 길들은 서로 교차해 통해 있고, 닭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 곳에서 사람들이 오가며 농사일을 하고 있는데, 남녀의 옷차림새는 모두 딴 고장 사람 같았다. 노인과 아이들은 유쾌한 모습으로 제각기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부를 보고 깜짝 놀라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상세하게 대답해주자 집으로 데려가, 술을 내고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이런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와서 소식을 물었다. 스스로 말하길 '우리 선조가 진(秦)나라 때 난을 피해 처자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이 절경(絶境)으로 와서 다시 나가지 않았으므로 바깥세상 사람들과 격리되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이 어느 시대냐고 묻는 것을 보니, 그들은 한(漢)이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위진(魏晉)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부가 일일히 상세히 말해주자, 그들은 듣고 나서 모두 탄식했다.
나머지 사람들도 각기 제 집으로 초청해서, 모두 술과 음식을 냈다.
어부가 며칠 머물다 작별하고 떠나려 할 때, 사람들이 말하길. '바깥사람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어부는 나오면서 배를 얻어 타고 왔던 길을 곳곳에 표시를 해두었다.
군에 도착하자 태수를 배알하고 이러이러한 일을 보고하였다.
태수는 즉시 사람을 파견하여 그를 따라가 표시해 놓은 곳을 찾게 했으나 결국 길을 잃어 다시 찾아내지 못했다.
남양(南陽)의 류자기(劉子驥)는 고상한 선비로,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찾아가려 했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얼마 후에 병으로 죽었다. 그 후로는 뱃길을 묻는 자가 없었다.
술잔 들고 달빛을 마주하니
이태백(李太白)
동서고금 술을 마신 사람은 많지만, 이태백처럼 좋은 시를 남긴 사람은 없다. 사람들이 달을 소재로 빈번히 시를 썼지만, 청련거사(靑蓮居士) 이태백 이 사람처럼 천의무봉 달과 관련된 주옥같은 시 남긴 사람 없다.
이태백은 62세 때 채석강에서 뱃놀이 하면서 술에 취한 채, 물 속의 달을 붙들려고 하다가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태백
흔히 이태백을 시선(詩仙), 두보를 시성(詩聖)이라 부른다.
이태백은 701년에 태어나 762년에 세상을 떠났다. 티베트 근처 이민족 출신이다.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태백성(금성)을 품었다고 태백이라고 이름 지었다.
42세 때 당 현종의 부름을 받고 궁정에 불려가서 시를 지을 때, 궁정의 세력가이던 고역사(高力士)가 그의 신발을 벗겨주고, 양귀비가 벼루의 먹을 갈아주었다는 호방한 일화를 남겼다.
우인회숙(友人會宿)
천고의 시름을 씻어 버리고자, 연이어 백병의 술을 마시리로다.
아름다운 밤은 이야기로 지새기 알맞고, 밝은 달빛엔 잠들지 못하리라.
취하여 빈 산에 누웠으니, 천지가 곧 이불과 베개로다.
滌蕩千古愁 留連百壺飮
良宵宜且談 晧月未能寢
醉來卧空山 天地即衾枕
산중대작(山中對酌)
두 사람이 마주앉아 술을 마시니 산꽃이 피네.
한 잔 들게 한 잔 들게 또 한 잔 들게.
나는 취해 잠을 자려 하니, 그대는 잠깐 갔다가,
내일 아침 생각 있으면 거문고 안고 오시게.
兩人對酌山花開 一盃一盃復一盃
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
월하독작(月下獨酌) 1
꽃 사이에 놓인 한 동이 술을 대작할 사람 없어 홀로 마시노라.
잔 들고 밝은 달 맞이하니 그림자와 더불어 셋이 되었도다.
花間一壺酒 獨酌無相親 擧盃邀明月 對影成三人
달이야 본래 술 마실 줄 모르거니와 그림자는 부질없이 내 몸짓 따를 뿐.
암커나 잠시 달과 그림자 벗하여 행락은 모름지기 봄에 미치리라.
月旣不解飮 影徒隨我身 暫伴月將影 行樂須及春
내가 노래하면 달은 머뭇거리고 내가 춤 추면 그림자는 어지러이 흔들리네.
깨어서는 함께 즐거움 나누고 취한 후엔 각기 흩어져 분산되지만
무정한 놀이 인연 영원히 맺어, 아득한 은하 저편에서 만나고저.
我歌月排徊 我舞影凌亂 醒時同交歡 醉後各分散 永結無情遊 相期邈雲漢
월하독작(月下獨酌) 2
하늘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하늘에 주성(酒星)이 있지 않았을 것이고,
땅이 만약 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땅에 응당 주천(酒泉)이 없었으리.
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 地若不愛酒 地應無酒泉
*주천(酒泉); 공융(孔融)이 조조에게 보낸 '논주금서(論酒禁書, 술 마시지 말라는 글에 대한 변론)'에서 '하늘에는 주성의 빛이 드리워 있고, 땅에는 주천이라는 고을이 있다'고 했다. 주천의 물맛이 술과 같았다고 한다.
천지가 이미 술을 사랑했거니, 술을 사랑해도 하늘에 부끄러울게 없노라.
내 듣기로 청주는 성인에 비할만하고, 거듭 말하거니와 탁주는 현인에 비겼도다.
성과 현을 이미 마셨거늘 하필 신선을 구하리오.
天地旣愛酒 愛酒不愧天 已聞淸比聖 復道濁如賢
聖賢旣已飮 何必求神仙
석 잔은 대도로 통하고, 한 말 술은 자연과 합치돠는도다.
오직 술 가운데 멋을 얻었나니, 술 안 마시는 자에겐 이를 전하지 말라.
三盃通大道 一斗合自然 但得醉中趣 勿謂醒者傳
將進酒(장진주)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고 내달은 물이 바다에 이르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 하였는가, 권문세가의 늙은이가 아침에 푸르던 털이 저녂에 백설같은 백발이 되었음을 슬퍼함을.
인생은 득의했을 때 모름지기 기쁨을 즐길지니, 달밤에 술동이만 쓸쓸히 놓아두는 일 없도록 하라.
君不見 黃河之水天上來 奔流到海不復廻
又不見 高明鏡悲白髮 朝如靑絲暮如雪
人生得意須盡歡 莫使金樽空對月
하늘은 나의 재주를 쓸모가 있어 만들었고, 돈이란 쓰고나면 다시 또 오느니라.
양을 삶고 소를 잡아 마음껒 즐길지니, 모름지기 한번 마심에 삼백 잔을 넘길 것이라.
天生我材必有用 千金散盡還復來
烹羊宰牛且爲樂 會須一飮三百杯
친구인 잠부자와 단구생아! 술을 권하노니 잔을 멈추지 말게나.
그대에게 노래 한 곡 보내나니, 청컨대 나를 위해 귀 기우려 주게.
岑夫子 丹丘生. 將進酒 君莫停
與君歌一曲 請君爲我側耳聽
멋진 음악과 맛있는 음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만 오래 취하고 깨어나기를 바라지 않노라.
옛부터 성현은 다 적막하였고, 오직 마시는 사람은 그 이름을 남겼네.
조조의 아들 진왕 식(植)은 낙양 평락관에서 잔치할 때, 한 말 술에 만금을 뿌리며 즐겼다지 않던가.
鍾鼎玉帛不足貴 但願長醉不願醒
古來賢達皆寂莫 惟有飮者留其名
陳王昔日宴平樂 斗酒十千恣歡謔
주인인 내가 어찌 돈 없다고 하겠는가? 술을 사가지고와 그대와 대작하리라.
오색 말과 천금의 모피 처분해도 좋다. 아이야! 좋은 술과 바꾸어오너라.
그대와 함께 마시면서 만고의 시름을 녹여보려 하노라.
主人何爲言少錢 且須沽酒對君酌
五花馬 千金裘. 呼兒將出換美酒
與爾同銷萬古愁
정야사(靜夜思)
침상 앞의 달빛을 보나니, 마치 땅에 내린 서리여라.
고개 들어 달빛 보다가, 고개 숙여 고향을 생각한다.
床前明月光 疑是地上霜
擧頭望明月 低頭思故鄕
푸른 물 한굽이 마을을 안고 흐르나니
두보(杜甫)
중국에서 두보(杜甫)는 시성(詩聖), 이백은 시선(詩仙), 왕유는 시불(詩佛)이라 부른다. 그 중 이태백은 타고난 천재로 남성적인 시를 남겼다면, 두보는 후천적 노력가로 여성적인 시를 남겼다.
두보가 태어난 해는 당 현종이 즉위한 선천(先天) 원년이니 712년이다. 낮는 관리 집안에 태어나 관직을 얻고자 했으나 여러번 실패했고, 출세를 위해 고관과 황제에게 열심히 시를 지어 보냈지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가 안록산의 난을 만나 당현종이 촉나라로 몽진하자, 임시 수도인 봉상을 찾아간 공로로 좌습유 벼슬을 얻었다. 그러나 눈치 없는 두보는 패전한 재상을 변호하다가 좌천되어 벼슬을 버렸다. 이후 가족을 끌고 고달픈 유랑생활 하다가 죽으니, 나이 59세 때다.
그는 시에서는 만고의 천재였으나, 생활에서는 만고의 바보였다.
두보
두보는 '나의 시가 사람을 놀래게 하지 않으면 죽어도 그만 둘 수 없다(語不驚人 死不休)'고 하였다.
이로 보아, 그가 한 편의 시를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고치고 다듬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江村(강촌)
淸江一曲抱村流 푸른 강 한 구비 마을을 안아 흐르나니
長夏江村事事幽 긴 여름 강촌은 일마다 그윽하도다
自去自來堂上燕 절로 가고 절로 오는 것은 당 위의 제비요
相親相近水中鷗 서로 친하고 서로 가까운 것은 물 가운데 갈매기로다
老妻畵紙爲棋局 늙은 아내는 종이를 그려 바둑판을 만들거늘
稚子敲針作釣鉤 어린 아들은 바늘을 두드려 낚시를 만든다
多病所須唯藥物 다병하여 얻고자 하는 바는 오직 약물이니,
微軀此外更何求 미미한 이 몸이 이 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리.
春日江村(봄날 강촌)
扶病垂朱紱 병든 몸 관직을 맡았다가
歸休步紫苔 은퇴하여 보라빛 이끼 위를 거닌다.
郊扉存晩計 교외의 작은 집에 노후 계획이 있으니
幕府愧群材 관청은 부끄럽구나 그 많은 인재들.
燕外晴絲捲 제비 나르는 밖에 아지랭이 감돌고
鷗邊水葉開 물풀 핀 곳에 갈매기 나네
隣家送魚鼈 이웃은 고기 자라 보내오고
問我數能來 자주 찾아올 수 있는지 나에게 묻네.
季秋江村(늦가을 강촌)
喬木村墟古 큰 나무 있는 마을의 오래된 터
疎籬野蔓懸 성긴 울타리에 들 넝쿨이 엉켜 있구나.
素琴將暇日 한가한 날 줄 없는 거문고 가지고
白首望霜天 흰머리는 서리 내린 하늘을 바라본다.
登俎黃柑重 도마에 올린 노란 감귤 무겁고
支牀錦石圓 평상을 괸 비단 돌 둥글다.
遠遊雖寂寞 멀리 와 노님은 비록 적막하나
難見此山川 다시 보기 어려우리 이 같은 산천.
春日憶李白(봄날 이백을 회상하며)
白也詩無敵 이백의 시는 겨룰 자가 없고
飄然思不群 표연한 그의 생각 따를 자 없네.
淸新庾開府 청신함은 북주(北周)의 유신(庾信)과 같고
俊逸鮑參軍 준일함은 참군 벼슬 포조(鮑照)와 같네
渭北春天樹 위수의 북쪽 봄 날 나무 밑에서
江東日暮雲 양자강 동쪽 저무는 구름 보며
何時一樽酒 언제쯤 한 동이 술 놓고
重與細論文 다시 한 번 문장을 논하여 보리.
* 두보(杜甫) 35세 때 작품
絶句(절구)
江碧鳥逾白 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山靑花欲燃 산이 푸르니 꽃이 타는듯 하다
今春看又過 금년 봄도 또 보고 지나가니
何日時歸年 언제가 고향 돌아갈 해 일가.
絶句漫興(흥이 넘친 절구)
糝徑楊花鋪白氈 오솔길 버들 꽃 흰 융단 펼친 것 같고
點溪荷葉疊靑錢 점점 연잎 수놓은 개울 푸른 동전 쌓인듯
筍根雉子無人見 죽순 아래 새끼 꿩은 보는 사람 없고
沙上鳧雛傍母眠 모래 위 오리 새끼 어미 곁에 잠들었다
춘망(春望)
國破山河在 나라는 망했으나 산하는 그대로라
城春草木深 옛 성에 봄이 오니 초목은 우거졌네.
感時花濺淚 시절이 느껴워서 꽃을 보아도 눈물 나고
恨別鳥驚心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도 가슴 아파
烽火連三月 전쟁의 봉화불 석 달째 이어지니
家書抵萬金 집에서 오는 편지 만금같이 귀하구나
白頭慅更短 흰 머리 긁으니 더더욱 짧아져서
渾欲不勝簪 이제는 비녀도 꽂지 못할 지경이구나
月夜(달밤)
今夜鄜州月 오늘 밤 부주에 뜨는 달
閨中只獨看 규중의 아내가 홀로 보고 있으리.
遙燐小兒女 멀리 있는 가엾은 어린 딸
未解憶長安 장안의 나를 그리는 어미 마음 모르리라.
香霧雲鬟濕 향기로운 안개 구름같은 머리 결 적시고,
淸輝玉臂寒 맑은 달빛 옥 같은 팔에 차가우리.
何時依虛幌 어느 때 얇은 휘장 창가에 의지하여,
雙照淚痕乾 두 사람 나란히 마른 눈물 흔적 비치나.
그윽한 대숲에 나홀로 앉아
왕유(王維)
왕유(王維)는 장원 급제했으나 당 현종(玄宗)의 눈에 벗어나 제주(濟州)에 귀양살이를 한데다, 그를 후원해준 장구령이 간신 이임보에게 밀려 파면 당하는 것을 보고, 실의에 빠져 종남산 기슭 남곡천(藍谷川)이 흐르는 곳에 망천장(輞川莊)이란 별장에 은거하여 불교의 참선 수행에 심취하였다.
자는 마힐(摩詰)인데 고승 유마힐(維摩詰)을 닮고자 그리 정했다고 한다.
왕유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왕유는 망천 계곡 어구에 있는 송지문(宋之問)의 남전별장을 샀는데, 망천의 물이 집 둘레를 감싸며 흘렀다. 따로 물을 끌어 대나무와 꽃 언덕을 축조하고, 함께 수도하던 친구 배적(裵迪)과 더불어 배를 띄워 왕래하고, 거문고를 타고 시를 지으며 종일토록 노래하였다. 망천계곡 경치가 뛰어난 20경(景)을 택하여 5언절구로 각각 20수를 읊어 총 40 수의 시를 모아서 <망천집>이라 이름하였다. 항상 돌아오면 향을 피우고 홀로 앉아 참선독경을 일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소동파(蘇東坡)는 왕유의 시를 평하기를,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詩中有畵)'고 하였다. 시론(詩論)에서 최고 품격으로 삼는 시화일치론(詩畵一致論)이 여기서 비롯된다. 왕유는 망천장 벽에 망천계곡 20경을 그려 놓았는데, 그림에도 뛰어나 왕유의〈망천도>는 남종화의 시조가 된 그림이다.
청나라 황배방(黃培芳)은 왕유의 시를 평하기를, '한가로운 정경은 속세의 먼지와 소음에 찌들어 있는 자들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오직 평정한 마음에서만 경물 묘사가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 하였다.
신운설(神韻說) 시론으로 청나라와 우리나라 북학파(北學派)에 큰 영향을 준 왕사정(王士禎)은 왕유의 시에 대하여, '송(宋)의 엄우(嚴羽)는 시선일치(詩禪一致)를 주장하였으나 왕유와 배적의 망천(輞川) 절구(絶句)는 글자마다 선(禪)에 들어가 있다'고 평하였다.
鹿柴(사슴 울타리)
空山不見人 텅 빈 산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但聞人語響 어디서 사람 말소리만 들린다
返景入深林 지는 햇볕 깊은 숲에 스며들어
復照靑苔上 다시 파란 이끼를 비추고 있다
*이 녹채(鹿柴)란 시는 왕유의 시 가운데 가장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된 시다. 언외(言外) 선미(禪味)가 가득하여, 그를 시불(詩佛)이라 칭하게 한 시다.
田園樂(전원의 즐거움)
桃紅復含宿雨 붉은 복숭아꽃 간밤 빗물 머금었고
柳綠更帶春烟 푸른 버들잎 봄안개 감고 있다.
花落家僮未掃 꽃은 떨어져도 동자는 아직 쓸지 않았고
鶯啼山客猶眠 꾀꼬리는 울건만 산사람은 아직 자고 있다.
終南別業(종남산 별거)
中歲頗好道 중년 되어 불도를 좋아하다가
晩家南山陲 만년에 종남산에 집을 지었다.
興來每獨住 흥이 일면 매번 혼자 나서는데
勝事空自知 즐거운 일 그저 혼자 알 뿐이네
行到水窮處 다니다가 샘 솟는 곳에 이르면
坐看雲起時 앉아서 구름 일어나는 걸 보고
偶然値林叟 우연히 숲 속 늙은이 만나면
談笑無還期 담소하다가 돌아갈 걸 잊노라.
答張五弟(장오제에게 답하여)
終南有茅屋 종남에 초가집 있어
前對終南山 앞으로 종남산 마주보고 있다
終年無客長閉關 노년에 찾는 손님 없어 문은 오래 닫혀있고
終日無心長自閒 종일 무심하여 마음 항상 한가하다
不妨飮酒復垂釣 음주나 낚시에 방해 받지 않으니
君但能來相往還 다만 그대만 와서 서로 오고 갈 수 있었으면.
臨湖亭(호수가 정자에서)
輕舸迎上客 가벼운 쪽배에 객을 태우고
悠悠湖上來 한가로이 호수 위로 건너와서.
當軒對樽酒 난간에 기대어 술 통을 대하니
四面芙蓉開 사방에 연꽃이 피어 있구나.
* 쪽배와 술, 그리고 연꽃의 조화는 미술의 구도를 시에 도입한 기법으로, 호수를 바탕으로 한 폭 그림을 그린 것이다.
竹里館(대숲 속 집)
獨坐幽篁裏 그윽한 대숲에 나홀로 앉아
彈琴復長嘯 거문고도 타고 긴 휘파람도 불어본다
深林人不知 깊은 숲이라 사람들은 알지못하는데
明月來相照. 밝은 달이 찾아와 서로 비춰준다
春日上方卽事(봄날 상방에서)
好讀高僧傳 고승전 읽기 좋아하고
時看辟穀方 때때로 솔잎 대추 먹는 벽곡 처방 본다.
鳩形將刻杖 비둘기 모양을 지팡이에 새기고
龜殼用支牀 거북껍질을 써서 침상을 괴었다.
柳色春山映 버드나무 빛 봄산에 비치고
梨花夕鳥藏 배꽃 사이에 밤 새 숨어든다.
北牕桃李下 북쪽 창가 복숭아 자두나무 아래
閒坐但焚香 한가히 앉아 다만 향불 피운다.
酬張少府(장소부에게 드리며)
晩年惟好靜 만년에 오로지 고요함이 좋아
萬事不關心 세상만사에 관심 두지 않았노라
自顧無長策 스스로 돌아봄에 생계 대책 없고
空知返舊林 헛되이 아노매라 옛 숲으로 돌아가는 것.
松風吹解帶 솔바람 시원해 허리띠 풀어놓고
山月照彈琴 산 달은 비치노라 거문고 타는 이
君問窮通理 그대는 묻는가 궁통의 이치
漁歌入浦深 어부의 노래소리 포구에 들리네.
過香積寺(향적사를 지나며)
不知香積寺 향적사가 어디인지 알지 못한채
數里入雲峰 구름 덮힌 봉우리 몇 리 들어가니
古木無人逕 고목은 울창한데 사람 다닌 길 없고
深山何處鐘 깊은 산 속 어디서 종소리 울려오네
泉聲咽危石 샘물 소리 가파른 바위에 흐느끼고
日色冷靑松 햇살은 푸른 솔숲에 차갑도다.
薄暮空潭曲 황혼의 텅 빈 연못가에서
安禪制靑龍 좌선하며 망념을 씻어내노라.
早秋山中作(초가을 산에서)
無才不敢累明時 재주 없어 관직에 머물러 있을 수 없으니
思向東溪守故籬 동쪽 냇가 돌아가 옛 울타리 지키고 싶어라.
不厭尙平婚嫁早 상평이 자식 혼사 일찍 마치고 유람 떠난 일 멋지고
卻嫌陶令去官遲 도연명이 관직 버림을 미적거린 것 밉도다.
草堂蛩響臨秋急 초당의 귀뚜라미 울음 가을이 급하고
山裏蟬聲薄暮悲 산 속 매미소리 저녁이 슬퍼진다.
寂寞柴門人不到 적막한 사립문에 오는 사람 없는데
空牀獨與白雲期 텅 빈 침상에서 홀로 흰구름과 약속한다.
秋夜獨坐(가을밤 혼자 앉아)
獨坐悲雙鬢 홀로 앉아 희끗희끗한 양 귀밑머리 슬퍼할제
空堂欲二更 빈 집은 이경(밤 9-11시)이 되어가네
雨中山果落 빗속에 산 과일은 떨어지고
燈下草虫鳴 등불 아래 풀벌레 울고 있네.
白髮終難變 흰머리는 끝내 검어지기 어렵고
黃金不可成 금단의 선약은 만들 수 없네
欲知除老病 늙음과 병듬 없애는 법 알려면
唯有學無生 오직 無生을 배움에 있네.
山居秋暝(산속의 가을 저녂)
空山新雨后 빈 산에 새로 비 내린 후
天氣晩來秋 날씨는 어느새 가을이구나
明月松間照 밝은 달 소나무 사이로 비치고
淸泉石上流 푸른 샘 돌 위로 흘러간다
竹喧歸浣女 대숲 소란터니 빨래하던 여인들 돌아가고
蓮動下漁舟 연잎 흔들리더니 고깃배 지나간다
隨意春芳歇 봄향기 제맘대로 시들어가도
王孫自可留 왕손은 스스로 머물만 하네
送別(송별)
山中相送罷 산에서 그대와 서로 이별한 후
日暮掩柴扉 날 저물어 집에 와 사립문 닫네
春草明年綠 봄풀은 내년에도 푸르련마는
王孫歸不歸 귀한 그대 한번 가면 다시 오려나.
비파 타는 여인의 노래(琵琶行)
백낙천(白樂天)
백낙천(白樂天)의 '비파행(琵琶行)'을 읽으면,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는듯 하다. 한 아름다운 여인의 슬픈 인생이 가슴에 느껴져온다.
이 시는 백낙천이 가을에 친구를 배웅하러 양쯔강 분포강(湓浦江)이라는 곳에 갔다가, 비파 타는 여인을 만나서 쓴 것이다.
백낙천 혹은 백거이(白居易)의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이다. 벼슬은 형부상서에 올랐고 75세에 사거했는데, 44세 때 지은 서사시 '비파행' 때문에 당나라의 가장 뛰어난 시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강주(江州) 사람들은 비파행의 배경인 심양 강가에 비파정(琵琶亭)을 지어 백거이의 시를 기념했다.
백낙천
비파행(琵琶行)
원화 10 년에 나는 구강사마로 좌천되었다. 다음 해 가을 손님을 배웅하러 분포강(湓浦江) 포구에 나갔다가, 배 속에서 비파 타는 소리를 들었다. 쟁쟁(錚錚)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으니 전에 서울(京都)서 듣던 소리였다.
그래 사람을 찾아보니 그는 원래 장안에서 노래하던 여자였는데, 유명한 선생에게서 비파를 배운 고수였다.
술상을 차리게 하고 몇 곡 청해 들었는데, 연주를 끝내자 마음이 착잡해 졌다. 그는 한때 젊고 예뻤던 시절 보내고 늙어서 이제 시골구석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나(백거이) 역시 그러하다. 시골로 쫓겨 귀양살이 한지 2년 되었다. 그리하여 노래를 지어 이 여인에게 바친다.
그날 밤 양자강 강나루는 빨갛게 단풍이 불타고 하얀 갈대는 흔들리고, 강물에 명월(明月)은 잠겼고, 소쩍새는 피를 토하고 원숭이는 슬프게 울었다. 자리를 함께 했던 사람들은 비파 소리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본문
심양강(潯陽江) 어귀에 객을 전송하려고 밤에 가니, 단풍잎과 갈대꽃은 가을 바람이 불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말에서 내리고 손님은 배에 타려할 즈음에 이별의 술잔 나누려 했으나 피리나 거문고가 없어 취해도 허전하였다. 이별 때문에 마음만 아픈데, 강 위를 보니 강은 아득하고 물엔 달빛이 젖어 있다.
그때 홀연히 어디서 비파소리가 들려와 둘은 갈 길을 잊었다. 나는 집에 가길 잊었고, 객은 떠나길 잊었다.
'비파 타는 사람 누구요?' 어둠을 향해 물어보니, 잠시 비파 소리가 멎고 대답이 없었다.
배를 움직여 가까이 닥아가 청하여 인사하고 술을 내놓고 등을 밝혀 자리를 마련했는데, 여인은 천번만번 청하자 겨우 나오기는 하였으나, 비파를 안고 다소곳이 얼굴을 가리더라.
이윽고 비파의 굴대(軸)를 돌려 두어번 가락을 조절하는데, 곡조를 채 이루기도 전에 소리에 먼저 정이 담겨 있었다.
한 줄 한 줄 손가락을 퉁겨 일어나는 한 소리 한 소리에 생각이 담긴듯, 평생 불우하던 정을 하소연 하는듯, 아미를 숙이고 가락을 퉁기는데, 심중의 이야기를 하는듯, 가볍게 눌렀다가 천천히 매만지다가, 줄 아래 위로 손가락을 퉁겨 올리다가 한다.
처음에는 예상(霓裳, 무지개 치마. 당 현종이 지은 서역풍의 무곡)을 치고, 나중에는 육요(六幺, 아래 줄 한가락이 우뢰소리를 내는 가락)를 치는데, 큰 줄은 우렁차 소나기가 내리는듯 하고, 작은 줄은 가늘게 이어지면서 절절이 속삭이는데, 급한 가락 낮은 가락이 어지럽게 뒤섞여, 탄주할 때 큰 구슬 작은 구슬이 옥쟁반에 구르는듯 했다.
사이사이 앵무새 소리 꽃 가지 아래로 미끄러지고, 흐느끼는 냇물 소리 얼음 밑을 흐르는듯, 시냇물 얼어붙듯 차급게 끊겼다가, 이윽고 소리가 점점 멀어지면서 깊은 시름과 한(恨)이 일어난다.
이때 소리 없음은 소리 있음 보다 더 나았다.
그러다가 잠시 은항아리(銀甁)가 깨어져 그 속에 담긴 술(酒)과 장(漿)이 비산하듯, 쇠갑옷의 기마병 돌진하여 칼과 창 부딪치듯, 곡조가 용장하게 급전한다.
이윽고 곡을 끝내고 술대로 줄을 한번 그으니, 네 줄이 일성(一聲)인데, 비단 찢는 소리 같았다. 동쪽 서쪽 배 두 척 모두 황홀히 소리에 취한듯 조용한데, 오직 강에 보이는 것은 가을 달 흰빛 이다.
*이 비파 타는 모습을 읊은 부분은 음율을 시각화 하여 눈에 보일듯 잡힐듯 묘사하여 백낙천으로 하여금 동서고금 가장 뛰어난 명문장가로 불리게 한 명문장이다.
(연주가 끝나자) 여인은 깊은 한숨을 뱉어내고 술대를 비파 줄에 꽂은 다음, 의상을 정돈하고 낮빛을 가다듬고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본래 서울(京城) 살던 계집인데, 하묘(蝦蟇, 장안에 있던 동중서의 무덤) 아래에 집이 있었습니다.
13세에 비파를 배워 이름이 교방(敎坊, 기생학교) 제일에 올랐고, 곡을 타고나면 선생님도 선재로다 감복하였습니다.
화장을 하면 당대 제일 명기 추랑(秋娘)도 투기할 정도였고, 곡 하나 끝나면 장안 오릉 근처 부잣집 도령들이 다투어 붉은 무늬 비단을 수 없이 선물했습니다.
시절이 좋아 귀한 청패(靑貝)로 장식한 은빗을 노래 장단 맞추노라고 깨트려도 아까운 줄 몰랐고, 얇고 붉은 비단 바지가 술을 엎질러 더러워져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금년이 유쾌하니 내년도 그렇겠지 하며 세월을 걱정 없이 흘러보냈습니다. 그동안 남동생은 군인이 되어 달아나고, 양어미는 돌아가시고, 어느새 내 얼굴이 추해지니, 문전이 쓸쓸해지고 찾아오는 안장 얹은 말과 수레도 뜸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늙은 장사꾼 아내가 되었으나, 원래 상인은 이득을 중히 여기고, 이별을 대수롭게 생각치 않습니다. 지난 달 부량(浮梁)에 차를 사러 떠나가고, 나는 강 어귀를 서성거리며 빈 배를 지키노라니, 밝은 달은 배를 비추고 강물은 차겁기만 합니다.
밤 깊어 문득 어린 시절을 꿈 꾼 날에는, 꿈 속에서 슬픈 정을 억제치 못하여, 연지 단장한 얼굴의 눈물이 주루룩 난간에 흘러내립니다.'
나는 이미 비파 소리를 듣고 탄식하였지만, 이 이야기를 듣자 거듭 마음이 착잡하여 말하였다.
'그대와 나, 다같이 영락하여 먼 하늘가를 헤매는 신세. 우리가 만남에 어찌 일찌기 서로 아는 사람만 택하겠는가?
나는 작년에 황제가 계신 장안을 떠나 심양성에 귀양와서 병들어 누워있다오. 심양 땅은 궁벽한 곳이라 일년이 가도 제대로된 피리와 거문고 연주 듣질 못했다오.
내가 살고있는 곳은 분강(湓江) 근처 저습지인데, 누런 갈대와 고죽(苦竹)만 집을 에워싸고 있다오. 두견이 피를 토하는 울음과 원숭이 애달픈 소리 뿐, 그 사이에서 아침 저녂 무엇을 들었으리오? 봄 강변, 꽃 피는 아침, 가을 달밤, 왕왕 혼자 술을 마시며 외로움을 달래보았을 뿐.
간혹 나무꾼의 노래, 촌 사람 피리소리야 없지않지만, 서투르고 조잡하여 듣기 거북했는데, 오늘 밤 그대가 타는 비파 소리를 들으니, 마치 신선의 음악을 듣는듯 금방 귀가 번쩍 뜨이는구려.
부디 사양말고 좌정하여 다시 한 곡조 타 주시면, 내 그대를 위해 '비파행(琵琶行)'이란 시 한 수를 짓고자 한다오.'
여인은 이 소리를 듣고 감동하여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다시 좌정하여 비파 줄을 바짝 조이고 빠른 가락으로 비파를 타는데, 그 슬프고 처절함은 앞의 소리와 또 달랐다.
만좌(滿座)가 눈물을 못가누게 하니, 좌중(座中)에서 누가 가장 눈물을 많이 흘렸던고? 강주사마(江州司馬)의 푸른 옷소매가 눈물로 촉촉히 젖었도다.
적벽강의 노래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
천하의 명문장 적벽부(赤壁賦)는 지금부터 약 9백년 전 1082년, 소동파가 호베이성(湖北省) 황저우(黃州)의 한천문(漢天門) 밖 장강(長江,양쯔 강) 암벽 아래 배를 띄워 적벽 아래를 선유하면서 지은 것이다.
음력 7월에 지은 전적벽부와 음력 10월에 읊은 후적벽부가 있다.
전편은 적벽에서 벌어졌던 삼국시대의 고사를 생각하고 덧없는 인생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합일을 노래한 것이고, 후편은 적벽야유의 즐거움을 구가한 것이다.
소동파(蘇東坡)의 이름은 식(軾)이고, 호가 동파(東坡) 이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鐵)과 함께 '삼소(三蘇)'라 불리며, 당송8대가 중 한 사람이다.
소동파
전적벽부(前赤壁賦)
임술년 7월 보름 다음 날, 나 소동파는 손님과 함께 배를 띄워 적벽 아래에서 노는데. 맑은 바람은 고요히 불어오고, 물결은 잔잔하였다. 잔 들어 손님에게 권하며, '시경'의 시를 읊조리고 있노라니, 잠시 후 달이 동산 위에 솟아 북두칠성 사이를 배회하는데, 하얀 물안개는 강을 가로 지르고, 물빛은 하늘에 닿아있다.
그 가운데를 갈대잎 같은 한 척 작은 배로 만이랑 창파를 넘어 아득히 가노라니, 호호하기 허공에 의지해 바람 타고 멈출 바 모르는 듯 하고, 표표하기 속세를 떠나 홀로 서있는 듯 마치 날개가 돋아 신선이 된 듯 싶다.
술을 마시고 흥이 올라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하였다.
'계수나무 노여, 목란 삿대여! 물에 비친 달을 치며 흐르는 빛 거슬러 오르네. 아득하구나 나의 회포여, 하늘 저편의 임을 기다리네'.
마침 손님 중에 퉁소 부는 이가 있어 노래에 화답하는데, 그 퉁소소리가 구슬퍼 누구를 원망하듯, 그리워하듯, 우는 듯 하소연 하는 듯, 남은 음이 가냘프게 이어져 실처럼 끊어지지 않으니. 그 슬픈 가락이 깊은 골짜기에 잠긴 교룡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의 과부를 눈물짓게 할만했다. 그래 내가 옷깃을 바로하고 정색하여 객에게 묻되, '퉁소를 어찌 그리 부시오?' 하니, 그가 말하길,
'달이 밝아 별빛은 드물고, 까막까치는 남으로 날아가는 것은 옛날 조조의 시 아닙니까? 서쪽 하구를 바라보고, 동쪽 무창을 바라보니, 산천은 서로 엉겨 울창하고 푸르디 푸른 곳, 이곳은 조조가 주유한테 곤욕을 치른 곳 아닌가요? 조조가 바야흐로 형주를 격파하고 강릉으로 내려와, 순풍을 타고 동으로 진군할 때, 배의 선미와 선수를 이은 대선단(大船團)은 천리에 뻗치었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지요. 그때 창을 옆에 끼고 강을 바라보며 술잔 들고 시를 읊었으니, 참으로 일세의 영웅이었지요. 그런데 지금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대와 나는 강변에서 나무하고 고기 잡으며, 물고기와 새우,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며. 일엽편주를 타고 조롱박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고 있으니, 이는 천지간의 하루살이, 바다 속 한알 좁쌀같은 존재지요.
그래서 우리네 인생의 수유처럼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長江)의 영원한 흐름을 한없이 부러워하면서, 우리가 신선을 끼고 즐겁게 노닐며, 명월(明月)을 안고 길이 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그 슬픈 노래를 가을바람에 날려보낸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내가 말했다.
'그대는 저 강과 달을 아시지오? 강물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으나 일찌기 돌아온 바 없고, 달은 차고 비움이 저와 같지만, 결국 본체는 소멸(消滅) 증장(增長) 하는 것 아니겠소? 모든 것은 변한다는 현상에서 보면, 천지 역시 한 순간도 변하지 않음이 없으며. 변하지 않음에서 보면, 만물과 내가 무한하여 다함이 없는 것인데, 하필 무엇을 부러워 하겠소?
대채로 하늘과 땅 사이의 만물에 각기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내 소유가 아니면 비록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않되지만, 오직 강 위 맑은 바람과 산 속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음악이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룹니다. 이를 취하여도 누구 하나 금하지 않고, 또 아무리 사용해도 없어지는 법이 없으니,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무궁무진한 세계가 아니겠소? 그래 그대와 내가 이 세계를 함께 즐겨야 하지 않겠소?'
객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며 잔 씻고 다시 대작하니. 안주와 과일은 이미 다 떨어지고, 잔과 쟁반은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두 사람이 배안에서 함께 팔베개 하고 누웠다가, 동쪽 하늘이 하얗게 밝아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후적벽부(後赤壁賦)
임술년 10월 보름에 설당(雪堂)에서 걸어서 임고정(臨皐亭)으로 갈 때 두 객(客)이 나를 따라왔다.
황토언덕을 지나니 서리와 이슬은 이미 내리고, 나뭇잎은 다 떨어졌고, 사람 그림자는 땅에 비쳐 있다. 우럴러 밝은 달을 보며 길을 걸으며 노래부르니 객도 화답한다.
잠시 후 내가 '객(客)은 있는데 술이 없고, 술은 있는데 안주거리가 없구나. 달 밝고 바람 시원한 이처럼 좋은 밤을 어이 보낼꺼나?' 탄식하자, 객이 말하기를 '오늘 어스럼 저녁에 그물로 고기를 얻었는데, 주둥아리가 크고 비늘이 가는 걸 보니 영락없이 송강(松江)의 명물 송어 같습디다. 그런데 어디서 술을 구하지요?' 한다.
내가 돌아와서 부인에게 상의하니, 아내가 '영감께서 불시에 찾을 때가 있지싶어 내가 술 한 말을 감춰둔지 오래되었지요.' 한다.
그래 술과 농어를 가지고 적벽강(赤壁江) 아래로 가니, 강은 소리 내어 흐르고, 깍아지른 절벽은 천 길 높이로 솟아있다. 까마득히 높은 산에 자그마한 달이 걸렸고, 물 빠지자 바위가 들어났다. 도대채 세월이 얼마나 갔기에 이렇게 강산이 알아볼 수 없게 변한걸까.
내가 옷자락 걷어잡고 높은 바위를 밟고 우거진 풀 속을 헤치고 올라가, 호랑이와 표범 모양의 바위에 걸터앉아보고, 꿈틀대는 이무기 모양의 괴목(怪木)에 걸터앉아보기도 하였다. 그리고 아찔한 송골매가 살고 있는 위험한 둥지에 기어올라가, 풍이(馮夷)의 그윽한 용궁을 굽어보니, 두 객(客)은 나를 따라오지 못한다.
길게 휘파람 불어보니 초목은 진동하고, 산이 울리자 골짜기가 대답한다. 바람이 일자 물결은 춤 추는데, 시릴 정도로 맑고 차거운 느낌에 나 역시 슬며시 숙연하고 두려운 맘이 들어, 거기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몸을 돌려 배에 올라 강 한복판에 배를 띄우고, 물결 치는대로 배를 내버려 두고 물소리를 듣는데, 야반 넘어 사방을 돌아보니 적료하고 고요함 뿐이다.
그때 동쪽에서 마침 외로운 학 한 마리가 강을 가로질러 오니, 날개는 수레바퀴 같고, 검은 치마 흰 옷 입은듯, 길게 한울음 울면서 내 배를 스쳐 서쪽으로 사라져 버린다.
잠시 후 객은 떠나고 나는 잠들었는데, 꿈에 우의(羽衣)를 입은 도사를 만났다.
그가 임고정(臨皐亭) 아래에 와서 나에게 읍하고 말하기를, '적벽강(赤壁江)의 뱃놀이 즐거웠소이까?' 하고 물어, 내가 그 이름을 물었으나 고개를 숙이고 대답은 않는다.
'오호라 알겠구나! 그대는 지난 밤 길게 울며 내 옆을 스쳐간 학이 아니신가?' 물으니, 도사가 돌아보며 빙그레 웃는다. 나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 창을 열고 밖을 보았으나, 그가 간 곳을 모르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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