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중국편 최종완결 원고

한국편 2

김현거사 2016. 8. 9. 11:20

한국편 2

 

 

 

 만복사(萬福寺) 저포기(樗蒲記)

 김시습(金時習)의 금오신화(金鰲神話)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는 금오신화를 꼽는다.

 <금오신화>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나이 31세부터 37세까지 7년간 경주 남산 금오산에 은거할 때 쓴 한문체 전기(傳奇)소설이다. 소개하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는 금오신화에 실린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기(南炎浮洲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5편 중 하나이다. 

 

김시습

 

  김시습은 세종 17년(1435년) 지금 명륜동에서 김일성(金日省)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태어난지 8개월만에 글을 알고, 3세 때 글을 지었으며, 5세 때 대궐에 불려가서 시를 지었다고 한다.

 세종이 박이창(朴以昌)을 시험관에게 재능을 시험케 했는데, 박이창이 '童子之學白鶴舞靑空之末(어린이의 글이 끝없이 푸른 하늘 끝에서 백학이 춤추는 것 같네') 하자, 시습이 '聖王之德黃龍飜碧海之中(임금님의 덕은 푸른 바다에 황룡이 띄어오르는듯 하옵니다) 라고 댓구(對句)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세종이 상으로 비단 50필을 주어 가져가보라 했더니, 시습이 비단의 끝과 끝을 매어서 한 끝을 끌고 돌아가, 그 지혜에 온 나라가 떠들썩 하였다고 한다. 

 21세 때 삼각산에서 학문을 닦다가, 세조의 단종 폐위 소식을 듣고, 3일간 통곡하다가 책을 불사르고 일부러 똥통에 빠져 미친 척 하였다. 그는 수락산(水落山)에 들어가 중이 된 후, 설악산 금오산 등에 노닐며 허무한 회포를 시로 달래고 살았다.

 그후 생육신의 한사람이 된 그는 59세로 일생을 마쳤는데, 호는 매월당,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오세(五歲)가 있고, 법호는 설잠(雪岑)이며, 전해지는 저서로는 금오신화, 매월당집, 역대연기(歷代年紀)가 있다.

 

 만복사(萬福寺) 저포기(樗蒲記)

 

 남원에 양생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일찍 어버이를 여위고 장가도 들지 못한채, 만복사 절간의 구석방을 얻어 외롭게 살았다.

 구석방 앞에는 배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는데, 바야흐로 봄을 맞아 활짝 꽃을 피워 뜰안이 은세계인듯 하였다. 양생은 외로움을 억누르지 못하여 밤마다 배나무 밑을 거닐며 시를 읊어 자신을 달랬는데, 어느 날 별안간 공중에서,

'진정 그대가 좋은 배필을 얻고자 하면 무슨 어려움이 있으리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튿날이 마침 3월24일이라 마을의 청춘남녀들이 해마다 하던대로 만복사를 찾아와 저마다 소원을 빌고 갔다. 저녁예불 끝나자 양생도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께 소원을 빌었다.

 '부처님! 오늘 저녁 저는 부처님과 저포놀이(일종의 주사위놀이)를 한번 하려 합니다. 놀이에서 소생이 지면, 소생은 법연을 베풀어 부처님께 갚고져 하오며, 만약 부처님께서 지시면 저의 소원인 예쁜 아가씨를 배필로 내려주소서.'

 라고 축원한 다음 저포를 던졌더니, 양생의 승리였다. 이에 양생은 부처님 앞에 끓어앉아 다시 한번 소원을 빈 후, 불탁 아래서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자 얼마 않되어 과연 한 아가씨가 들어오는데, 나이는 열대여섯 쯤 되어보이고, 새카만 머리에 고운 얼굴이 마치 선녀 같았다. 아가씨는 백옥 같은 손으로 등잔불을 켜고, 향로에 향을 꽂은 뒤, 세 번 절 하고 끓어앉아, 축원문을 꺼내어 불탁 위에 올린 후,

'아아 사람 목슴이 어찌 이다지도 짧으오이까?' 

하며 흐느껴 울었다.

 이 광경을 엿본 양생은 더 이상 자신을 가눌 수 없어 뛰쳐나가,

'아가씨! 당신은 도대채 누구이며, 방금 불전에 바친 내용은 무슨 내용입니까?

 묻고, 축원문을 읽어보니,

'저는 00동네에 사는 00라는 소녀인데, 왜구가 쳐들어와 가족들이 흩어지고, 소녀의 몸으로 깊숙한 초야에 숨어들어 3년을 지냈은 즉, 모처럼 좋은 배필을 내려주십사'하는 내용이었다.

 글을 읽은 양생은 얼굴에 기쁨을 가득 띄고 여인더러 자기의 거처로 가자고 권하였다. 이 때 절은 퇴락하여 스님들은 한 모퉁이 방에 옮겨 살았고, 양생은 행랑채 끝 좁다란 판자방에 살았다.

여인이 사양하지 않고 따라와서 두 사람은 부부의 정을 나누게 되었다.

 밤이 깊어 달이 동산에 떠오를 때, 문득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나서 문을 열고 내다보니, 한 시녀 아이가 서 있다. 여인이

'어떻게 여기를 알고 찾아왔느냐?'

고 묻자,

 '아가씨는 평소 문밖에 나가시지 않더니, 오늘은 어이 이곳에 계시오니까?

하고 반문했다.

'오늘 높으신 하느님과 자비로운 부처님께서 님을 점지하여 주시어 백년해로의 가약을 맺게 되었다. 미처 알리지 못함은 예도에 어긋나나, 꽃다운 인연을 맺게된 것이 평생의 기쁨이니, 돌아가서 주안상을 차려오거라.'

 시녀가 얼마 후에 돌아와, 뜰어서 잔치를 벌이니, 밤은 자정에 가까웠다.

 양생이 주안상의 그릇들을 살펴보니, 무늬가 특이하고 술잔에서 기이한 향내가 진동하는 것이, 아무래도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닌듯 했다. 여인의 말씨와 몸가짐도 매우 얌전하여, 아무래도 어느 명문집 딸이 한 때의 정을 걷잡지 못하여 밤에 뛰쳐나온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아이는 옛날 곡 밖에 부를 줄 모르지만, 청컨대 당신께서 저를 위해 노래를 하나 만들어, 이 아이에게 부르게 하여 주소서.'

 여인이 양생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권주가를 청하자, 양생이 쾌히 허락하고, 곡조를 지어 시녀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여인은 그 노래를 다 듣고 슬픈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진작 만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다만 그래도 이렇게 만나 것이 어찌 천행이 아니오리까?

 그때 마침 서쪽 봉우리에 지는 달이 걸리고, 먼 마을에서 닭의 홰치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먼동이 희끄무레 트기 시작하는 때 였다.

 술상을 거두라는 여인의 말에 시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 여인이 입을 열어 양생에게 말했다.

'꽃다운 인연이 맺어졌으니, 당신을 모시고 집으로 갈까 하옵니다.'

양생이 흔쾌히 승락하고, 여인의 손을 잡고 걸어갔더니, 마을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길에 나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상하게도 양생과 함께 있는 여인은 보지 못했다.

'양총각, 새벽에 혼자서 어딜 다녀오시오?'

하고 물어본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었다. 이상하게도 울타리 밑에서 개들이 유난히 짖어댄다.

 여인은 양생을 데리고 이슬이 길을 가득 덮은 깊은 숲을 헤치고 가길래,

'여인이 사는 곳이 어찌 이리 황량하오?'

 물어보니,

'노처녀 거처란 으례 그러하옵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윽고 쑥이 가득한 속에 한 채의 집이 나타나자, 여인이 양생을 그리로 안내했다. 방에는 휘장이 쳐있고, 밥상은 엊저녁 차림처럼 훌륭한 것이었다. 이렇게 기쁨과 환락으로 사흘을 즐겼을 때, 여인이 양생에게 말했다.

'이곳의 사흘은 인간계의 삼년에 해당되옵니다. 가연을 맺은 지가 잠깐인듯 하오나 오래 되었사오니, 서운하긴 하지만, 이제 당신은 인간 세계로 돌아가시어야 합니다.'

그러고는 이별의 잔치를 베풀려고 했다.

'오늘 못다이룬 소원은 내세에 다시 이룰 수 있사옵니다. 다만 이곳의 이웃 동무들도 인간 세계와 같사오니, 한번 만나보고 떠나심이 어떠하올지요?'

하고 묻는다.

 양생이 허락하자, 정씨, 허씨, 김씨, 유씨 이웃 처녀들을 초대하였는데, 네 아가씨 모두 명문가 따님이어서, 천품이 유순하고 풍류가 놀라우며, 총명 박식하여 시부(詩賦)에 능하였다.

 술자리를 끝나고 친구들을 돌려보내자, 여인은 양생에게 은잔 한 벌을 내주면서 말했다.

 ‘내일은 제 부모님께서 저를 위해 보련사에서 재를 베풀 것입니다. 당신이 저를 저버리지 않으신다면, 보련사 가는 길목에 기다려서 저의 부모님을 뵙는게 어떠하오리까'

 양생이 허락하고, 이튿 날 은잔을 들고 보련사 길목에 서 있었다. 그랬더니 어느 명문가 행렬이 다가오는데 딸의 대상을 치르려는 행렬이었다.

 그런데 그 집 마부가 은잔을 들고있는 양생의 보습을 보고, 자기 주인에게, '아무래도 아가씨 장례식 때 묻었던 은잔이 벌써 도난당한 듯 하다'고 보고하였다.

주인이 말을 멈추고 보니 과연 그런지라, 양생에게 은잔을 갖게된 경위를 물었다. 양생이 아가씨와의 일을 빠짐없이 말하니, 주인이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내 팔자가 기구하여 슬하에 여식 하나만 두었더니, 왜란통에 아이를 잃고 여태 정식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개녕사 옆에 임시로 묻어둔채, 오늘이 마침 대상날이라 부모된 도리로 보련사에 가서 재나 올릴까 해서 가는 참인데, 자네가 정말 그 아이와의 약속을 지키려면 여식을 기다렸다 함께 오게.'

한다.

 양생이 혼자 아가씨를 기다리니 과연 여인이 시녀를 데리고 나타나 둘이 손을 잡고 보련사로 갔다. 그런데 여인이 절 문에 들어서서, 법당에 올라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휘장 안으로 들어갔으나, 친척들과 승려들 아무도 그녀를 보지못한다. 양생만 그 아가씨를 볼 수 있었고, 둘이 저녁밥을 먹었는데, 잠시 양생이 밖으로 나와 그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자, 부모들이 휘장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랬더니 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다만 수저 소리만 달그락거릴 뿐이었다.

 부모들이 경탄하여 휘장 안에 침구를 마련하고 양생에게 딸과 함께 있도록 권했다. 그 후 아가씨가 양생에게 말했다.

 '저의 신세타령을 여쭙겠습니다. 제가 예법에 어긋난 줄은 잘 알고 있사오나. 하도 들판의 다북쑥 속에 있다보니, 정회가 일어 이기지 못하였사옵니다. 뜻밖에 당신과 삼세의 인연을 맺아, 백년 절개를 바치고 지어미의 길을 닦으려 하였사오나, 애달프게도 숙명을 저버릴 수 없기에 이제 저승길로 떠나야 하겠사옵니다. 이제 한번 헤어지면 훗날을 기약할 수 없사오니, 이별에 임하여 무쓴 말씀을 드리겠나이까?'

하며 소리내어 울었다.

 이윽고 스님과 사람들이 혼백을 전송하니,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슬픈 울음소리만 공중에서 은은히 들리다가, 곧 멀어져 갔다.  

 부모는 이 일이 참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양생도 그녀가 귀신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때 부모가 말하였다.

'은잔은 자네에게 맡길 것이네. 내 딸이 지녔던 밭과 시녀 몇 사람도 줄것이니, 그걸 가지고 내 딸을 잊지 말아주게.'

 이튿날 양생이 고기와 술을 가지고 아가씨와 지낸 곳을 찾아가니, 과연 묘가 하나 있었다. 양생은 음식을 차려놓고, 지전을 불사르며 조문을 외고 돌아왔다.

 그 뒤 양생은 집과 농토를 전부 팔아 저녁마다 제를 올렸는데, 하루는 공중에서 아가씨 말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당신의 은덕으로 먼 나라의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이제 유명의 간격은 더 멀어졌으나 당신의 두터운 정은 어찌 잊겠나이까? 당신도 여생의 길을 깨끗이 닦아 속세의 티끌을 벗으소서.'

 그 후 양생은 다시는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면서 살았는데, 후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은둔하여 사는 멋

신흠(申欽)의 '야언선(野言選)'

 

 대학시절에 배운 ‘야언선(野言選)’이란 글을 여기 소개한다. 야언(野言)은 원래 1-2편이 상촌집에 한문으로 실려있는데, 고려대 고(故) 김춘동 교수님이 이 둘을 묶어 '야언선(野言選)'이란 제하로 한문강독 시간에 강의하셨다.

 신흠은 조선 인조 때 사람이다. 자는 경숙(敬叔), 호는 상촌(象村) 현헌(玄軒) 현옹(玄翁) 방옹(放翁)이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장군의 조령(鳥嶺) 싸움에 참가했고, 강화 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도 있었고, 훗날 병조판서에 영의정까지 지냈다.

 

신흠의 간찰

 

심흠은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4대 문장가로 꼽힌다.

우선 그의 ‘매화는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不賣香)’는 시를 소개한다.

오동나무는 천 년을 늙어도 항상 아름다운 가락을 지니고(桐千年老恒藏曲),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바탕은 변하지 않고(月到千虧餘本質),

버들가지는 백번 꺾여도 새가지가 돋아난다(柳經百別又新枝)

영의정이라면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이다. 요즘 총리 지낸 분 중에 이런 고결한 인품과 청아한 멋을 지녔던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신흠의 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다. 1651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춘천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와 글은 상촌집과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야언선(野言選)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으나 사람의 속된 병을 고칠 수 없다. 속된 병을 치유하는 것은 오직 책이 있을 뿐이다.  책을 읽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으며, 시내와 산을 사랑하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으며, 꽃과 대나무와 바람과 달을 완상하는 것은 이익은 있지만 해는 없고, 단정히 좌정하여 참선하며 침묵에 잠기는 것은 이익은 있지만 해는 없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루에 착한 말을 한가지라도 듣거나, 착한 행동을 한 가지라도 보거나,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행한다면, 그날이야말로 헛되게 살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꽃이 너무 화려하면 향기가 부족하고, 향기가 진한 꽃은 색깔이 화려하지 않다. 그러므로 부귀를 한껏 뽐내는 자들은 맑게 우러나오는 향기가 부족하고, 그윽한 향기를 마음껏 내뿜는 자들은 적막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군자는 차라리 백세에 향기를 전할지언정 한때의 요염함을 구하지 않는다.

 

 글을 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기를 바라면 그 글은 지극한 문장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바른 인물이 아니다.

 

 산 속에 사는 것은 멋진 일이로되 거기에 잠시 마음이 매이게 되면 그것은 저잣거리나 권모술수가 판치는 궁궐 속처럼 속된 것이요, 서화는 아취있는 일이로되 잠시 탐염에 빠지면 장사꾼과 다름없고, 술을 마시는 것은 아취(雅趣)가 있지만 남을 의식하면 지옥과 같고, 친구를 좋아하는 것은 달통한 일이지만 속물들과 놀면 고해(苦海)와 같다.

 

 현실 생활과 거리가 있어도 의기(義氣) 높은 친구를 만나면 속물근성을 떨어버릴 수가 있고, 두루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치우친 성벽(性癖)을 깨뜨릴 수가 있고,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고루함을 계몽받을 수 있고, 광달(曠達)한 친구를 만나면 타락한 속기(俗氣)를 떨쳐버릴 수 있고, 차분하게 안정된 친구를 만나면 성급하고 경망스러운 성격을 제어할 수 있고, 담담하게 유유자적한 친구를 만나면 화사한 쪽으로 치달리려는 마음을 해소시킬 수 있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공손하고 삼가는 공부를 해야하며,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은 마땅히 온후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어 깊이 생각하는 침잠하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차가 끓고 청향(淸香)이 감도는데 문 앞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도 기뻐할 일이지만, 새가 울고 꽃이 지는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도 그 자체로 유연(悠然)할 뿐이다. 진원(眞源)은 맛이 없고 진수(眞水)는 향취가 없다. 흰구름 둥실 산은 푸르고, 시냇물은 졸졸 바위는 우뚝. 새들 노랫소리 꽃이 홀로 반기고, 나뭇꾼 콧노래 골짜기가 화답하네. 온갖 경계 적요(寂寥)하니, 인심도 자연 한가하네.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말하고 제 때 그치는 것은 천하의 지언(至言)이다. 그러나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다 말하지 않고 그치는 것은 더욱 지언이라 할 것이다.

 객이 문 앞에서 흩어져 간후 문은 닫혔고 바람은 선들선들 불고 해는 떨어졌는데, 술동이 잠깐 기울임에 싯구 첫 장을 짓는 경지야말로 산인(山人)의 희열을 맛보는 경계라 하겠다. 굽이쳐 흐르는 물에 돌아드는 오솔길, 떨기 진 꽃 울창한 대숲과 산새들과 강 갈매기, 질그릇에 향 피우고 설경(雪景) 속에 선(禪)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경계인 동시에 담박한 생활이라고 하겠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 것, 이것은 세간법(世間法)이고, 할 일도 없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없는 것, 이것이 출세간법(出世間法)이다. 옳은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는 것, 이것은 세간법이고,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는 것, 이것은 출세간법이다.

 

 사슴은 정(精)을 기르고 거북이는 기(氣)를 기르고 학은 신(神)을 기른다. 그래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고요한 곳에서는 기(氣)를 단련하고 움직이는 곳에서는 신(神)을 단련한다.  봄이 장차 짙어지는 시절, 걸어서 숲속으로 들어가니, 오솔길이 어슴프레 뚫려있고, 소나무 대나무가 서로 비치는가 하면 들꽃은 향기를 내뿜는데 산새는 목소리를 자랑한다. 거문고 안고 바위 위에 올라 두서너 곡조를 탄주하니, 내 몸은 마치 동천(洞天)의 신선인 듯 그림 속의 사람인 듯하다. 뽕나무 우거진 숲과 일렁이는 보리밭은 아래 위서 나란히 수려함을 다투고, 봄 날 꿩은 서로를 부르고, 비오는 아침 뻐꾸기 소리 들리는 이것이야말로 농촌 생활의 참다운 경물(景物)이다.

 

 스님과 소나무 숲 바위 위에 앉아 인과(因果)와 공안(公案)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새 소나무 가지 끝에 달이 걸렸기에 나무 그림자 밟고 돌아온다. 마음에 맞는 친구와 산에 올라 가부좌(跏趺坐) 틀고 내키는대로 이야기하다가 지쳐 바위 끝에 반듯이 드러 누웠더니, 푸른 하늘에 흰구름 둥실 날아와 반공중(半空中)을 휘감았는데, 그 모습을 접하면서 문득 자적(自適)한 경지를 맛보게 된다.

 

 서리 내리고 나무잎 떨어지는 철에 때때로 성긴 숲 속에 들어가 나무 등걸 위에 앉으니, 바람에 나부껴 표표히 떨어지는 단풍잎은 옷소매에 내려앉는데, 새들이 사람을 엿보는듯 나무 끝에서 날아와 나의 모습을 살피니, 황량한 대지가 청명하고 초연한 경지로 바뀌어지는 느낌이 든다.

 문을 닫아 걸고 마음에 맞는 책을 읽고,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아 들이고, 문을 나서서 마음에 맞는 경계를 찾아다니는 것, 이 세 가지야말로 인간의 세 가지 낙이니라.

 

 차그운 서리 내려 바위가 드러났는데 고인 물은 잠잠히 맑기만 하다. 깎아지른 가파른 암벽, 담쟁이로 휘감긴 고목, 모두가 물 속에 거꾸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팡이 짚고 이곳에 오니 내 마음과 객관세계가 일체로 맑아지누나. 거문고 연주는 오동나무 가지 바람 일고 시냇물 소리 화답하는 곳에서 해야 마땅하니, 자연의 음향이야말로 이것과 제대로 응하기 때문이다.

 

 살구꽃에 성긴 비 내리고 버드나무 가지에 바람이 건듯 불 때 흥이 나면 혼자서 흔연히 나서 본다. 일 많은 세상 밖에서 한가로움을 맛보고 세월이 부족해도 족함을 아는 것은 은둔 생활의 정이요, 봄에 잔설을 치우고 꽃씨를 뿌리고, 밤중에 향을 피우며 도록(圖籙)을 보는 것은 은둔 생활의 흥이요, 벼루로 글씨를 쓰는데 글이 멋지게 잘 써지고, 술을 마심에 주곡(酒谷)에 언제나 봄기운 감도는 것은 은둔해서 사는 사람의 맛(味)이다.

 고요한 밤 편안히 앉아 등불 빛 은은히 하고 콩을 구워 먹는다. 만물은 적요한데 시냇물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릴 뿐, 이부자리도 펴지 않은 채 책을 잠깐씩 보기도 한다.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 문을 닫고 소제한 뒤 옛날 서적들을 앞에 펼쳐놓고 흥이 나는 대로 뽑아서 검토하는데, 왕래하는 사람의 발자욱 소리 끊어진 가운데 옛 절인(絶人)과 뜻이 왔다갔다 통하는듯 하고, 주변은 그윽하고 실내 또한 정적 속에 묻힌 상태,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빈 산에 한 해도 저물어 가는데 눈은 펑펑 쏟아지다가 어느듯  싸락눈으로 내리며, 마른 나무가지는 윙윙 바람에 소리내며 추위에 떠는 산새는 멀리서 우짖는데, 방 속에 앉아 화로를 끼고 앉았노라니, 차는 향기롭고 술도 잘 익어 있는 것,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한 척 배를 작만하여, 짧은 돛에 가벼운 노를 장치하여 그 속에 도서(圖書)며 솥이며 술과 차며 마른 포(脯) 등을 싣고, 바람 순조롭고 길이 편하면 친구를 방문하기도 하고 명찰(名刹)을 탐방하기도 하며, 노래 잘하는 아름다운 소녀와 피리 부는 동자 한 명과 거문고 타는 사내를 태우고는 안개 감도는 물결을 헤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왕래하면서, 적막하고 고요한 심회를 푸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막힌 운치라 할 것이다.

 

 초여름 원림(園林) 속에 들어가 뜻 가는 대로 아무 바위나 골라잡아 이끼를 털어내고 그 위에 앉으니, 대나무 그늘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오동나무 그림자가 구름 모양 같다. 얼마 뒤에 산속에서 구름이 건듯 일어 가는 비를 흩뿌리니 청량감(淸凉感)이 다시 없다. 탑상(榻床)에 기대어 오수(午睡)에 빠졌는데, 꿈속의 흥취 역시 이와 같았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소한(小寒)의 3신(信= 소식)은 매화, 산다(山茶), 수선(水仙)이고, 대한(大寒)의 3신은 서향(瑞香), 난화(蘭花), 산반(山礬)이고, 입춘의 3신은 영춘(迎春), 앵도, 망춘(望春)이고, 우수의 3신은 채화(菜花), 행화(杏花) 이화(李花)이고, 경칩의 3신은 도화(桃花), 체당(棣棠), 장미이고, 춘분의 3신은 해당(海棠), 이화(梨花), 목란(木蘭)이고, 청명(淸明)의 3신은 동화(桐花), 능화(菱花), 유화(柳花)이고, 곡우의 3신은 모란, 다미(茶蘼), 연화(楝花)이다.

 사람이 사는 동안 한식(寒食)과 중구(重九)만은 삼가서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사시(四時)의 변화 가운데 이들 절기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나무 안석(案席, 앉아서 몸을 뒤로 기대는 방석)을 창가로 옮긴 뒤 부들 자리를 땅에 폈다. 높은 봉우리는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시내는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맑기만 하다. 울타리 옆에 국화 심고 집 뒤에는 원추리를 가꾼다. 둑을 높여야 하겠는데 꽃이 다치겠고, 문을 옮기자니 버들이 아깝다. 구비진 오솔길 안개에 묻혔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주막이 나타나고, 맑게 갠 강에 해는 저무는데 고깃배들 어촌에 정박한다.

 

 산중 생활을 위해서는 여러 경적(經籍)과 제자(諸子)의 사책(史冊)을 갖추어 둠은 물론 약재(藥材)와 방서(方書)도 구비해야 한다. 좋은 붓과 이름있는 화선지도 여유있게 비치하고, 맑은 술과 나물 등속을 저장해두는 한편, 고서(古書)와 명화(名畵)도 비축해두면 좋다. 그리고 버들가지로 베개를 만들고 갈대꽃을 모아 이불을 만들면 노년 생활을 보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깊은 산중에서 고아하게 지내려면 화로에 향 피우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 벼슬길에서 떠나온지도 이미 오래되고 보니 품질이 괜찮은 것들이 모두 떨어지고 없다. 그래서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의 뿌리며 가지며 잎이며 열매를 한데 모아 짓찧은 뒤 단풍나무 진을 찍어 발라 혼합해서 만들어 보았는데, 한 알씩 사를 때마다 청고(淸苦)한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충분하였다.

 죽탑(竹榻, 대평상), 석침(石枕, 돌벼개), 포화욕(蒲花褥, 갈대꽃을 넣어 만든 요), 은랑(隱囊, 화문석 퇴침), 포화피(蒲花被, 갈대꽃 이불), 지장(紙帳, 방 안의 종이 휘장), 의상(欹床), 등돈(藤墩, 등나무 의자), 포석분(蒲石盆), 여의(如意, 등 긁는 막대), 죽발(竹鉢, 대나무 바리), 종(鍾), 경(磬, 옥이나 돌로 만든 경쇠), 도복(道服), 문리(文履, 무늬 신), 도선(道扇, 부채), 불진(佛塵, 먼지떨이개로서 일종의 지휘봉으로 쓰이는 拂具), 운석(雲舄, 등산용 신발), 죽장(竹杖), 영배(癭杯, 나무 혹으로 만든 술잔), 운패(韻牌), 주준(酒罇, 술동이), 시통(詩筒, 시객(詩客)이 한시의 운두(韻頭)를 얇은 대나무 조각에 써넣어 가지고 다니던 작은 통), 선등(禪燈, 절에서 쓰던 등) 등은 모두 산중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물건들이다.

 

 

사대부가 살만한 터는 어디인가

이중환의 '택리지(擇里誌)'

 

 청화산인(靑華山人) 이중환(李重煥,1690 -1756년)은 실학의 대가였던 성호 이익의 재종손으로 반계 유형원의 제자다. 24세에 급제하였으나 10여 년 후 병조정랑 때, 목호룡 사건 주범으로 몰려 벼슬길이 막힌 후, 36세 때까지 네 차례 형을 당하고, 38세 되던 해 귀양을 감으로써 정계에서 반영구적으로 축출당하였다.

 '택리지'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경기의 산줄기와 하천을 중심으로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선비가 살만한 이상적인 '가거지(可居地')를 정해 놓았는데,  팔역지(八域誌), 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팔역가거처(八域可居處)라는 별칭은 책이 저술된 뒤 이 사람 저 사람 베껴 쓸 때마다 이름도 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중환의 택리지

 

  택리지는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팔도총론(八道總論), 사민총론(四民總論), 복거총론(卜居總論), 총론(總論) 이다.

 

 '팔도총론'은 우리 나라 산세를 산해경(山海經)을 인용하여,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에서 뻗는 산줄기 하나가 고비사막과 음산산맥(陰山山脈)과 요동벌을 지나 백두산이 되었다. 백두산은 북으로 길림성을 달리는 두 강을 만들고, 남으로 조선 산맥의 우두머리가 되니, 지세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으며, 백성이 유순하고 기개가 옹졸하다.'고 기술하였다. 

 

  '사민총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이 한군데서 출발했다는 유래를 밝히고, 사대부의 행실을 수행하기 위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약술하고 있다.

 

 '복거총론'은 전체 분량의 반을 차지할 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터를 잡는 데에는, 첫째 지리(地理)가 좋아야 하고, 둘째 생리(生利)가 좋아야 하고, 셋째 인심이 좋아야 하고, 다음은 산과 물이 아름다워야 한다.

 이 네 가지 요소 중 한가지만 없어도 살기 좋은 곳이 아니다. 지리만 좋고 생리가 없으면 오래 살 곳이 못 되며, 지리 생리 모두 좋아도 인심이 좋지 못하면 사람의 기상이 화창하지 못하고, 근처에 아름다운 산수가 없으면 맑은 정서를 기를 수 없다.

 

 지리(地理)는 땅이 생긴 모양과 형편을 살피는 것이다.

 먼저 수구(水口,시냇물 혹은 강이 산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습)를 보고, 그 다음 야세(野勢, 들의 모습),  그 다음 조산(朝山, 앞으로 뻗어 들어오는 산), 조수(朝水, 앞으로 흘러드는 냇물), 수리(水理, 물의 이용과 운송), 토색(土色,흙의 색깔)을 논한다.

 

 수구(水口)는 이지러지고 성글며 텅 비고 넓은 곳은 비록 좋은 토지와 큰 집이 많다 하더라도 여러 대를 잇지 못하고 흩어지고 망한다. 집터를 잡으려면 반드시 수구가 잠기고 안에 들판이 펼쳐진 곳을 찾아야 하는데, 이런 곳은 산중에서 구하기 쉽고, 들판은 어렵다. 산이나 언덕은 한 겹이라도 좋지만 두겹 세겹이 좋고, 반드시 힘 있게 거슬러 들어오는 물이 있어야 길하다.

 

 야세(野勢)는 사람은 양명한 기운을 받고 태어난다. 그러므로 하늘이 조금 보이면 좋지 않고, 들이 넓은 곳이 좋다. 이런 곳은 해와 달, 별이 찬연히 비치고, 비, 바람, 추위, 더위가 순조로와 인재가 많이 나고, 병이 적다.

 꺼려야 할 곳은 산이 높아 해가 늦게 돋아 일찍 지고, 밤에 북두칠성이 보이지 않는 곳이다. 이런 곳은 음냉한 기운이 친입하여 잡귀가 모여들고, 안개와 독기운이 몸에 스며 병이 들기 쉽다. 

 들판 가운데 나지막한 산은 산이라 하지않고 그냥 들이라고 부른데, 햇볕이 막히지 않고 수기(水氣)가 멀리 통하기 때문이다.

 

 산형(山形)은 조종(祖宗)되는 산이 다락처럼 우뚝 솟은 형태가 좋다. 주산(主山)은 수려하고 청명해야 한다. 내려온 산은 끊어지지 않고 길게 계속되고, 지맥(支脈)이 소분지(小盆地)를 이뤄 마치 궁(宮) 안에 들어온 기분이 나며, 형세가 겹치고 크고 넉넉한 곳이 좋다. 산의 맥(脈)이 평지에 뻗어내리다가 물가에 들판 터를 만든 것이 좋다. 

 꺼리는 산의 형세는 흘러온 내맥(來脈)이 약하고 둔하여 생기가 없거나, 비뚤어진 외로운 봉우리가 있거나, 엿보고 넘겨보는 모양이 있으면 길기(吉氣)가 적고, 인재가 나지 않는다. 

 앞에서 흘러드는 물을 조수(朝水)라 하는데, 작은 시내나 개울물이 거슬러 들면 길하다. 큰 강과 시내가 부딪치는 곳은 집터 산소 둘 다 나쁘다. 처음은 흥하나 오래 가면 패망한다.  

 흘러드는 물은 산세와 같은 방향으로, 꾸불꾸불 멀리 유유히 돌아흘러야, 정기를 모아 생성의 묘(妙)를 얻을 수 있다. 활을 쏜 것처럼 일직선으로 흘러들면 좋지 않다. 물은 재록을 의미하므로, 대개 물가에 부유한 집과 마을이 있으며, 비록 산중이라도 시냇물 있는 곳이 대를 이어 살 터다.

 

 토색(土色)이 붉은 찰흙과 검은 자갈, 누른 진흙에서 나온 물은 죽은 물이니, 그런 땅에서 솟은 물은 장기(瘴氣, 독한 기운)가 있어 마실 것이 못된다. 토질이 사토(沙土)로 굳고 촘촘하면 우물물이 맑고 차서 살만한 곳이다.

 

 '생리(生利)'는 땅이 기름진 곳을 말하는데, 논에 볍씨 한 말을 종자로 하여, 60 두(斗)를 생산하면 제일, 30 두(斗) 이하는 곤란하다. 배와 수레가 모여 서로 물자를 바꿀 수 있는 편리한 곳이 좋은데, 전라도 남원과 경상도 진주, 성주가 그런 곳이다.

 

 '인심'은 평안도는 순후하고 경상도는 풍속이 진실하다. 함경도는 성질이 굳세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백성이 모질고 사납다. 강원도는 어리석고, 전라도는 간사함을 숭상하고, 경기도는 재물이 보잘 것 없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만 쫒는다.

 

  '택리지'는 1751년 이중환의 나이 62 세 때 나왔는데, 전라도와 평안도는 가보지 않고 썼다고 한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함께 조선 후기의 국토와 사회를 엿 볼 수 있는 두 걸작이다.

 

 

초의선사(草衣禪師)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

 

  커피 문화와 차 문화는 오랫동안 인류와 함께 해왔다. 혹자는 양자의 비교 우위를 논하기도 하지만 둘 다 나름의 멋이 있다. 바바리 코트 걸치고 낙엽 날리는 고궁 거닐다가 마시는 한 잔 커피도 멋이요, 누마루에서 거문고 안고 달빛 감상하다가 마시는 한 잔 차도 멋이다.

 차는 불교의 선(禪)과 함께 정신적 멋을 응축한 독특한 세계다. 초의선사(草衣禪師)는 '한국의 차경(茶經)'으로 불리는 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남겼으니, 차를 논 할 때 초의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초의스님 진영

 

 

 선사의 성은 장(張)씨고 이름은 의순(意恂)이다. 법호는 초의(艸衣)이며, 당호는 일지암(一枝庵). 다도를 정립하여 다성(茶聖)이라 부른다.

1786년(정조10)에 태어나 15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서 민성(敏聖)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고,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질 때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1866년 나이 80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

 

 동다송(東茶頌)

 

 

 초의스님이 40년간 살았던 일지암(一枝庵)이란 암자 이름은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에서 빌려왔다. '뱁새는 일생 한곳에 작은 깃을 틀고 잔다.'는 뜻이다.

초의는 정약용에게 배웠고, 신위(申緯), 김정희(金正喜) 등과 사귀었다. 시(詩) 서(書) 화(畵) 다(茶)에 뛰어나 사절(四絶)이라 불리웠고, 그림도 잘 그렸다. 대흥사에 있는 불화와 인물화는 거의 스님 그림이다.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초의의 제자로 암자에 3년 머물며 화법을 배웠다.

동다송은 1837년 정조(正祖)의 사위 해거도인(海居道人) 홍현주(洪顯周) 부탁으로 만든 송시(頌詩)이다.

  

 제 1송 : 남국의 아름다운 나무

 

后皇 嘉樹配橘德하니 受命不遷生南國이라密葉鬪霰貫冬靑하고 素花濯霜發秋榮이로다

 

후황이 아름다운 나무를 귤의 덕과 짝지으시니 받은 명 변치 않아 남녘 땅에 자란다네. 촘촘한 잎은 눈속에서 겨우내 푸르고 하얀 꽃은 서리 맞아 가을에 꽃 피우네.

 

제 2송 : 이슬을 머금은 취금의 혀

 

姑射仙子粉肌潔하고 閻浮檀金芳心結이라 沆瀣 淸碧玉條요 朝霞含潤翠禽舌이로다

 

고야산(姑射山)의 신선인가 뽀얀 살결마냥 깨끗하고, 염부(閻浮) 숲의 금모래 같은 황금 꽃술 맺혔는데, 이슬 흠뻑 젖은 푸른 가지 벽옥같고, 안개 촉촉히 젖은 작설(雀舌) 잎은 참새 혀 같네.

 

 註: 차나무 잎은 치자(梔子)와 같으며, 꽃은 흰 장미와 같고, 꽃술은 황금 빛이다. 가을에 꽃이 피면 맑은 향기가 은연하다. 이태백이 '형주 옥천사 맑은 시냇가 산에 차나무가 나 있는데, 가지와 잎이 푸른 옥(碧玉條) 같다. 옥천사 진공(眞公)스님이 항상 따다가 차로 마셨다.'고 했다.

 

 

제 3송 : 차는 하늘, 신선, 사람, 귀신이 다 사랑한다.

 

天仙人鬼俱愛重하니 知爾爲物誠奇絶이라

炎帝會嘗載食經하고 醍 甘露舊傳名이로다

 

하늘, 신선, 사람, 귀신 모두 아껴 사랑하니 됨됨이 참으로 기이하고 절묘하구나. 옛날 염제신농씨가 너를 식경에 기재했고 제호라 감로라 예로부터 그 이름 전해왔네.

 

 

4송 : 차는 술을 깨게 하고 잠을 적게 한다.

 

 

解醒少眼證周聖하고 脫粟飮菜聞齊孀이라

虞洪薦 乞丹邱하고 毛仙示叢引秦精이로다

 

 

차는 술을 깨우고 잠을 줄임은 주공(周公)께서 증험하셨고, 거친 밥 차 한잔, 제의 안영이 그랬다네. 우홍은 제물 올려 단구자의 차를 얻었고, 모선(毛仙)을 끌어 무성한 차숲을 보여주었네.

 

註 ; 안자춘추(晏子春秋)에 '안영(晏孀)이 제 경공(齊景公)때 재상을 지내는 동안 '껍질만 벗긴 좁쌀로 만든 거친 밥

 

 

(脫粟飯)에 구운 고기 세 꼬치, 계란 다섯개, 차와 채소만을 먹었다'고 하였다.

 

 

 신이기(神異記)에, '우홍(虞洪)이 산에 들어가 차를 따다가 우연히 도사를 만났는데, 세 마리 푸른 소를 이끌고 있

 

 

었다. 우홍을 데리고 폭포산(瀑布山)에 다달아 말하기를, '나는 단구자(丹丘子)라 하네. 듣자니 그대가 차를 애음

 

 

(愛飮)한다기에 항상 만나보고 싶었네. 이 산중에 굵다란 차나무가 있어 그대에게 주려고 하네. 부디 훗날 남은 차

 

 

가 있으면 나에게도 보내주기를 바라네' 라고 하였다.

 

 

진정(秦精)이 무창(武昌) 산 속에서 차를 따다가 신선을 만났는데, 머리털 길이가 한 발쯤 되어 보였다. 신선이 진

 

 

정을 이끌고 산 아래로 내려와 떨기진 차나무를 가리켜 주고 떠났다가 얼마 후 돌아와 주머니 속에서 귤을 꺼내

 

 

어 주자, 진정이 두려워하며 차를 등에 지고 돌아왔다고 한다.

 

 

 

 

 

제 5송 : 수 문제의 뇌골증을 낫게 하다

 

 

 

 

潛壤不惜謝萬錢하고 鼎食獨稱冠六情이라

 

 

開皇醫腦傳異事하고 雷笑茸香取次生이로다

 

 

 

지하에 묻힌 혼령도 만금의 보답 아니 아꼈고 벼슬아치 들도 모든 맛의 으뜸이라 하였네. 수 문제 뇌골통증 고쳤다는 신기한 일 전해오고 뇌소차 용향차 차례차례 생겨났네.

 

 

 

註; *진무(陳務)의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과부가 되었는데 차를 즐겨 마셔왔는데, 마침 집의 정원에 오래된 무덤

이 하나 있어 차를 마실 때마다 먼저 무덤에 차를 올리곤 하였다. 부인의 두 아들이 이것을 마땅찮게 여기어 '그까

짓 고총(古塚) 따위가 무엇을 안다고 헛수고를 하시는지 모르겠네' 하고 묘를 파헤쳐버리려고 하였는데 어머니가 한사코 이를 만류하였다.

그날 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내가 이 고총(古塚)에 누운 지 3백 년 넘는데, 얼마 전 그대 아드님이 내 무덤을 파 버리고자 했을 때 부인께서 보호해 주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차까지 주시니 땅 속에 묻혀있는 썩은 뼈일 망정 어찌 보은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다음날 새벽 일어나보니 정원에 엽전 10만냥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수 문제(隋 文帝)가 아직 임금이 되기 전에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는데, 신선이 나타나 그의 뇌골을 바꾸어 버렸는데 그 후로 줄곧 두통을 앓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스님을 만났는데, 스님이 이르기를, '산중의 명초(茗草)로 치유할 수 있으니, 달여 마시면 효험이 있다'고 하였다. 이를 계기로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차를 처음으로 마실 줄 알게 되었다.

 

*당나라 각림사(覺林寺)의 스님, 지숭(志崇)이 세 종류로 차를 만들었다. 경뢰소(驚雷笑)는 자기가 애용하고 훤초대(萱草帶)는 부처님께 공양하고, 자용향(柴茸香)은 손님을 접대했다. 

 

 

 

제 6송 : 모든 음식 가운데 차가 으뜸이다.

 

 

 

巨唐尙食羞百珍이나 沁園唯獨記紫英이라

法製頭綱從此盛하야 淸賢名士誇雋永이로다

 

 

 

 당나라 때는 음식에 백가지 진미가 있었으나, 심수공주(沁水公主) 심원(沁園)에는 오직 자영차(紫英茶)만 기록되었고. 차 만드는 요령이 그때부터 성행하여 명사들이 맛을 음미하고 준영차를 자랑했네.

 

註 ; 당 덕종(唐 德宗)이 동창공주(同昌公主)에게 음식을 하사할 때에 녹화차(綠花茶) 자영차(紫英茶) 이름이 끼어 있었다. 다경(茶經)에서는 '차 맛(味)은 준영(雋永)이라' 하였다.

 

 

제 7송 : 다른 것에 물들면 참됨을 잃는다.

 

綵莊龍鳳團巧麗하야 費盡萬金成百餠이라

誰知自饒眞色香고 一經點染失眞性이로다

 

 

 

 

  용봉단(龍鳳團)은 장식이 도리어 사치로우니 떡차 백 개 만드는데 만금을 허비했네. 누가 풍요로운 참 빛깔 참 향을 알랴, 한 번 물들고 나면 참 성품 잃어버리네. 

 

註; *크고 작은 용단(龍團) 봉단(鳳團)이 만들어진 것은 정위(丁謂)가 처음 시작했으나 채군모(蔡君謨)에 의해서 완성되었고, 향약(香藥)을 넣어 병차(餠茶)를 만들고 병차(餠茶) 위에 용과 봉황의 무늬를 장식하여 임금께 바칠 것은 금색으로 꾸몄다. 정교하고 아름다웠으나, 만금(萬金)을 다 쓰야 백 개 떡차를 만들 수 있었다.

 

소동파(蘇東坡)는 시(詩)에 '수많은 붉은 금색 병차(餠茶)는 수만금을 허비하였다'고 하였다.

 

*만보전서(萬寶全書)에 '차는 그 자체에 참된 향과 맛과 빛깔을 지니고 있는데, 한 번 다른 물질에 물들고 나면 곧

 참됨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

 

 

제 8송 : 정성껏 가꾸고 만들어야 아름답다.

 

道人雅欲全其嘉하야 曾向蒙頂手栽那라

養得五斤獻君王하니 吉祥與聖楊花로다

 

도인이 평소에 차맛을 온전코자 몽산의 정상 오르시어 손수 차를 심으셨네. 다섯 근을 얻어 군왕에게 올렸나니 길상예와 성양화 그것이었네.

 

註; 부대사(傅大士)는 몽산(蒙山) 꼭대기에 암자를 짓고 살면서 차를 가꾸어 3년이나 결려 가장 좋은 차를 만들어, 성양화(聖楊花), 길상예(吉祥 )라 이름지어 5근을 임금께 바쳤다.

 

 

제 9송 : 명차 운간 월감

 

 

 

 

雪花雲 爭芳烈하고 雙井日注喧江浙이라

建陽丹山碧水鄕에 品製特尊雲澗月이로다.

 

 설화차 운유차 짙은 향기 다투고, 쌍정차 일주차는 강절에서 이름 높다. 건양 단산 물 푸른 고을에서 만들어진 운간차 월감차 질도 좋아라.

 

註 ; *소동파가 한 사원(寺院)을 찾으니, 범영(梵英) 스님이 사원을 잘 단장하여 말끔히 하고 향기 어린 차를 마시고 있었다. 이에 '이 차는 햇차입니까' 하고묻자 범영이 '차의 성질은 햇차와 묵은차를 섞으면 차의 향기와 맛이 되살아난다'고 하였다.

 

*설화차(雪花茶)와 운유차(雲腴茶)는 향기를 앞다투고, 쌍정차(雙井茶)와 일주차(日注茶)는 강서와 절강 땅에 나는

것이 제일이요, 건양(建陽)과 단산(丹山)은 물의 고장이라, 특별히 만감후(晩甘候)와 운간월(雲澗月)을 꼽는다.

 

*다산 선생의 걸명소(乞茗疏)에 '아침 햇살에 일어나니 맑은 하늘에 구름이둥실거리고, 낮잠에서 깨어나니 푸른 시

냇물에 밝은 달이 어른거리네'라 하였다.

 

 

 

 

 

제 10송 : 우리 차도 중국차와 같다.

 

 

東國所産元相同하니 色香氣味論一功이라

陸安之味蒙山藥을 古人高判兼兩宗이로다

 

 우리 차는 중국차와 원래 같으니 색깔 향 느낌 맛 한가지라 말해오네.육안차는 맛이요, 몽산차는 약효라하지만, 우리 차는 둘 다 겸했다고 옛사람이 칭송했네.

 동다기(東茶記,정약용 저)에, '어떤 이는 우리나라 차의 효능이 중국 월주(越州)에서 생산된 차에 미치지 못한다고 의심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색(色), 향(香), 기(氣), 미(味)에서 모두 별다른 차이가 없다. 차서(茶書)에 육안차(陸安茶)는 맛으로 뛰어나고 몽산차(蒙山茶)는 약효가 높다 하였으나, 우리 차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겸하고 있다. 이찬황(李贊皇)이나 육우(陸羽)가 살아 있다면 반드시 나의 말을 수긍하리라 믿는다'라고 하였다.

 

제 11송 : 팔순 노인이 동안(童顔)이 되다.

 

 

童振枯神驗速하야 牲顔如夭桃紅이라

我有乳泉하야 把成秀碧百壽湯하니 以持歸大覓山前獻海翁가

 

 마른 가지 되살아나듯 동안되는 영험 있어 여든 노인 양빰이 도화처럼 붉어지네. 내가 사는 곳에 유천(乳泉)이 솟아 수벽탕 백수탕 그 물로 끓이니, 어이 목멱산 앞에 사는 해거도인에게 갖다 드릴수 없는가.

 

 

註; *이태백은 '옥천사의 진스님은 나이 80이 넘었는데, 얼굴빛이 복숭아 빛처럼 붉다. 그 까닭은 마시는 차 향기가 맑고 기이한 데 있다. 마치 마른 나무에 싹이 돋는 듯, 아이로 환동(還童)하는 듯 하였다.' 하였다.

 

 

 *당나라 소리(蘇厘)의 16탕품(湯品) 가운데 백수탕(百壽湯)이 있다. 백수탕은 물을 열 번 이상 넘칠듯 끓여야 하는데, 그걸 복용하면 흰머리가 검어지고, 노인도 활로 과녁을 맞히게 되며, 활보하며, 백세 이상 살 수 있다 한다. 

 

 

 *다산(茶山)은 '걸다소(乞茶疏)'에서 ' 차 빛깔은 아침 나절에는 맑은 하늘의 흰구름 같고, 오후에는 맑은 달이 푸른 시냇물 위에 비치는 것 같다' 하였다.

 

 

 *수벽탕(秀碧湯)이란 것이 있다. 돌은 천지(天地)의 수기(秀氣)가 엉겨 모여 형상이 이루어진 것이다. 수벽탕(秀碧

湯)은 돌을 쪼아서 그릇을 만들어 천지의 수기(秀氣)가 담겨 있으니, 어찌 그 속에서 끓인 물이 길하지 않으랴.

 

 *근자에 신자하(申紫霞) 노인께서 내가 사는 두륜산을 지나는 길에 하루 밤 자우산방(紫芋山房, 一枝庵)에 유숙하

시면서 유천(乳泉) 물을 마시고 '물맛이 우유보다도 훨씬 좋구나'하셨다.

.

 *내게 유천(乳泉)이 있으니, 그 샘물 뜨다가 수벽백수탕(秀碧百壽湯) 만들어, 어이 목멱산(木覓山, 남산) 해거도인

(海居道人) 앞에 바칠 수 없는가.

 

 

 

제 12송 : 아홉가지 어려움과 네가지 향기

 

 

 

又有九難四香玄妙用하니 以敎汝玉浮臺上坐禪衆가

九難不犯四香全하니 味可獻九重供이로다

.

 차에는 아홉가지 어려운 것이 있고, 네 가지 현묘한 향기 있으니, 무엇으로 화개 옥부대(玉浮臺) 위에서 좌선(坐禪)하는 그대들에게 가르칠꼬. 아홉가지 어려움을 범하지 않아야 네 가지 향이 온전하며, 그 지극한 맛이라야 궁궐에 받들어 올릴 수 있으리. 

 

註; *다경(茶經)에 이르기를, 차에는 아홉 가지 어려움이 있다. 차 만드는 것, 차 품질 감별하는 것, 차 만드는 그릇과 차 마시는 도구, 불 다루는 법, 사용되는 물, 차를 덖는 일, 가루 만드는 일,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이

다.

 

 음산한 날씨에 찻잎을 따서 밤에 말리는 것은, 만드는 법(造法)에 어긋나는 것이며, 차 부스러기를 이로 깨물어 혀끝으로 맛을 보거나 코에 대고 냄새를 맡는 것은 식별(識別)이 아니며, 노린내 비린내 나는 솥과 그릇은 그릇이 아니며, 풋나무나 덜 탄 숯은 연료라 할 수 없다.

 

 세차게 떨어지는 폭포수와 장마비 고인 물은 물이라 할 수 없고, 겉은 익었으나 속이 설익은 것은 올바른 자(炙)라 할 수 없다. 푸르스름한 가루가 먼지처럼 나는 것은 제대로 작말한 것(作末)이라 할 수 없고, 급히 서둘러 휘젓는 것은 물 끓이는 법이 아니며, 여름엔 실컷 마시고 겨울에 그만 두는 것은 차 마시는 법이 아니다.

 

*만보전서(萬寶全書)에 '차에는 참 향기(眞香), 난초향기(蘭香), 맑은 향기(淸香), 순박한 향기(純香)가 있다. 안팎이 똑같은 것을 순박한 향기(純香), 설지도 않고 너무 익지도 않은 것을 맑은 향기(淸香), 불이 고루 든 것을 난초향기(蘭香), 곡우 이전의 싱그러움을 갖춘 것을 참 향기(眞香)라 한다. 이를 네가지 현묘한 향기라 한다.' 했다. 

 

 *지리산 화개동(花開洞)에는 차나무가 사오십 리에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차나무 자생지로 이보다 더 넓은 곳은 없다. 거기 옥부대(玉浮臺)가 있고, 그 밑에 칠불선원(七佛禪院)이 있다.  거기 좌선하는 스님들은 항상 찻잎을 늦게 따서, 땔감 말리듯 말려, 솥에다 시래기국 끓이듯 삶으니, 색은 탁하며 붉고, 맛은 몹시 쓰고 떫다. 이런 차

를 마시니, 이것이 바로 "천하에 좋은 차가 속된 사람들 손에 의해 버려진다고 하는 것이다.

 

 

제 13송 : 총명하여 모든것에 막힘이 없다.

 

 

翠濤綠香裳入朝하니 聰明四達無滯壅이라

爾靈根托神山하니 仙風玉骨自 種이로다

.

비취빛 찻물(翠濤)과 초록빛 향기(綠香) 마음 깊이 스며들자, 총명함이 사방으로 통달하여 막히는 곳이 없네.

영험한 뿌리는 신령스런 산에 의탁하고 있으니, 선풍옥골(仙風玉骨)이 참으로 별종이네.

 

 

註; *'심군다(心君茶)' 서문에 이르기를 '차를 찻잔에 넣으면 잔 위에 취도(翠濤, 찻가루 넣었을 때 수면에 생기는 거품)가 뜨고, 맷돌에 갈면 푸른 가루가 날더라.'하였고, 차는 맑고 푸른 빛(靑翠)을 가장 좋고, 여린 쪽빛에 흰빛 도는 남백(藍白)이 쓸 만 하고, 누른 빛, 검은 빛, 우중충한 빛은 하품으로 친다.

거품빛은 구름이 뜨는 듯한 운도(雲濤)가 가장 좋고, 비취빛 취도(翠濤)가 그 다음이며, 누런 황도(黃濤)는 하품이

다.

 

*진미공(陳麋公) 시(詩)에서 '옅은 그늘 덮였는데 여린 움 깃대 같아라. 죽로(竹爐)는 그윽하고 솔가지 불티는 날

아오른다. 물과 어울려 담담하여 고기맛과 겨루네. 른 향기 길에 가득하니, 긴긴 날 돌아올 줄 모르네'라고 하였

.

 

제 14송 : 바위틈에 자라는 푸른 싹

 

綠芽紫筍穿雲根하고 胡靴 臆皺水紋이라

吸盡 淸夜露하니 三昧手中上奇芬이로다.

 

녹아(綠芽)와 자순(紫筍)은 움이 삐죽삐죽 돌 틈을 뚫고나와, 호인(胡人)의 신발, 들소의 앞가슴 같이 주름진

 모습이네. 깨끗한 밤이슬 마시고 훔뻑 젖었나니, 삼매경(三昧境)의 솜씨에서 기이한 향이 피어나도다.

 

 

 

 

 

 註 ;다경(茶經)에 이르기를 '차는 난석(爛石) 사이에서 자란 것이 으뜸이요, 자갈 섞인 흙에서 자란 것이 그 다음이라' 하였다. 또 '골짜기에서 자란 차가 상품'이라 했는데, 화개동 차밭은 모두 난석(爛石) 골짜기 이다.

 또 '차는 자색(紫色)이 으뜸이요 주름진 것이 그 다음이요, 녹색(綠色)이 그 다음이며, 삐쭉히 솟아나는 첫 순(筍)이 상품이고, 싹이 다음 이다' 하였다.

 

*'모습이 마치 호인(胡人)의 가죽신 같다는 것은 주름졌다는 것이고, 들소(牛)의 가슴 같다는 것은 반듯한 것을 말함이고, 바람이 수면(水面)을 살짝 스치는 것과 같다는 것은 함초롬함을 말함이니, 이 모두가 차의 정수(精髓) 이다.' 라고 하였다.

 

*'다서(茶書)'에 '잎은 따는 시기가 중요하니, 지나치게 일찍 잎을 따면 차가 완전하지 못하고, 제때를 놓치면 신비함이 흩어지니, 곡우 전 5일이 가장 좋은 때이고 후 5일이 다음이며, 그 뒤 5일간이 그 다음'이라 하였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우리나라 차는 곡우 전후는 너무 빠르고, 입하 전후가 적당하다.

 

*찻잎 따는 법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에 밤이슬 흠뻑 머금은 잎 딴 것이 상품이고, 한낮에 딴 차는 그 다음이며, 흐린 날씨와 비가 올 때는 따지말아야 한다. 하였다.

 

 제 15송 : 물과 차가 잘 어우러져야 한다.

 

有玄微妙難顯하니 精莫敎體神分하라

體神雖全이나 猶恐過中正이오 中正은 不過健靈倂이로다.

 

현미함이 있어 묘하여 나타내기 어려우니, 그 묘한 맛은 물과 차가 잘 어우러져야 하네. 물과 차가 비록 잘 어우러져도 중정(中正)을 잃을까 두려우니, 중정은 다신(茶神)의 건전, 수성(水性)의 신령이 함께 아우름에 있다.

 

註; *조다편(造茶篇)에 이르기를 '새로 따온 찻잎은 늙은 잎을 가려내고, 뜨거운 솥에서 덖되 솥이 잘 달아올랐을 때 찻잎을 넣어 급히 덖고 불기를 늦춰서는 안 된다. 찻잎이 잘 익으면 꺼내어 체에 털어 부어 가볍게 비벼 그것을 몇 번이고 턴 다음 다시 솥에 넣어 점점 불을 줄이면서 말리는데 온도 조절을 잘 하여야 한다. 그 중에 현미(玄微)함이 있으니 말로 나타내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천품(泉品)은 물에 관한 것이다. '차는 물의 신(神)이요, 물은 차의 체(體)이니, 진수(眞水)가 아니면 다신(茶神)을 나타낼 수 없고, 진차(眞茶)가 아니면 수체(水體)를 나타낼 수 없다.' 하였다.

 

*채다(採茶)는 그 묘(妙)를 얻어야 하고, 조다(造茶)는 그 정성을 다해야 하고, 물(水)은 그 진(眞)을 얻어야 하고, 포법(泡法)은 중정(中正)을 얻어야 한다.

 

*포법(泡法)에 말하기를,'탕(湯)이 완전히 끓었을 때 화로에서 내려 먼저 차관 안에 조금 부어 냉기를 가셔낸 다. 그 뒤에 부어 버리고 적절한 양의 차를 넣어 중정(中正)을 잃지 않아야 한다. 차의 양이 지나치면 쓴맛이 나고 향기가 묻혀 버리며, 물이 차의 양에 비해 많으면 차의 맛이 적어지고 빛깔이 맑아진다.

 

*두 번 쓴 차관은 냉수로 깨끗하게 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의 향이 떨어진다. 차관의 물이 너무 뜨거우면 다신(茶神)이 온전하지 못하고, 차관이 깨끗하면 수성(水性)이 영험해 진다. 차의 빛깔이 잘 우러나면 베에 걸러서 마시는데, 너무 일찍 거르면 다신(茶神)이 우러나지 않고, 지체하였다가 마시면 향기가 사라진다'고 하였다.

 

*이를 총평하면, 차를 딸 때에는 그 오묘함을 다하고, 차를 만들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야 한다. 물은 진수(眞水)이어야 하고, 탕(湯)은 중정(中正)을 얻어야 한다. 체(體)와 신(神)이 잘 어울리고 건(健)과 영(靈)이 함께하여야 한다.

여기에 이르면 다도는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6송 : 몸이 상청경에 오른다.

 

一傾玉花風生腋하야 身輕已涉上淸境이라

明月爲燭兼爲友하고 白雲鋪席因作屛이로다.

 

 옥화 한 잔 기울이자 겨드랑이에 바람이 일고, 어느새 몸이 가벼워 상청(上淸)을 거니는 것 같네. 밝은 달 등촉으로 삼으니 나의 벗이요, 흰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이 되어주네.

 

제 17송 : 청하여 마음이 깨이다.

 

竹籟松濤俱蕭然하니 淸寒瑩骨心肝惺이라

惟許白雲明月爲二客하니 道人座上此爲勝이로다.

 

대숲 소리 솔 물결 모두 다 서늘하니 맑고도 찬 기운 뼈에 스며 마음을 깨워주네. 오직 허락한 건 흰 구름 밝은 달 두 손님이니, 도인의 자리 이것이면 훌륭하네.

 

註; *차를 마시는 법은 한 자리에 차 마시는 손님이 많으면 주위가 소란스러우니, 소란하면 아취를 찾을 수 없다.

홀로 마시면 신(神)이요, 둘이 마시면, 승 (勝)이요, 서넛은 취미요, 대여섯은 덤덤할 뿐이요, 칠팔 인은 그저 베푸는 것일 뿐이다.

 

제 18송 :백파거사제

 

白坡居士題

莫數雲澗月.艸衣新試綠香煙 禽舌初纖穀雨前

莫數丹山雲澗月 滿鍾雷莢可廷年

 

백파거사가 제하다.

운간월을 헤지마라. 초의가 새로 녹향연을 시차(試茶)하니 새 혓바닥 처음 여린 것이 곡우 앞에 것이라. 단산의 운간월을 헤지 말라. 종지 가득 뇌협차가 수명을 늘일수있다.

 

 *백파거사;신헌구

 

 다신전(茶神傳)

 

 1828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엮은 다신전(茶神傳)은 중국의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뽑아 온 것이다.

 

1. 차 따기(採茶)

  차 따는 시기는 그 때에 맞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너무 이르면 맛이 온전치 못하고, 늦으면 신묘함(神)이 흩어진다. 곡우 전 5일이 으뜸이고, 그 뒤 5일이 다음이며, 다시 5일 뒤가 또한 그 다음이다.

 차의 싹이 자주 빛깔인 것이 으뜸이고, 차의 표면이 주름진 것이 그 다음이며, 잎이 둥글게 말린 것이 그 다음이고(찻잎이 둥글게 말린 것은 단엽(團葉)이라해서 대체로 찻잎말이 나방의 애벌래 피해를 입은 것이다), 조릿대잎 같이 광택 나는 것이 가장 하품이다.

 

*차나무는 새로 난 가지(新枝)에 8~12잎이 나는데, 마지막 꼭지 잎이 펴지면 그 전까지 펴진 잎은 조릿대 잎처럼 광택이 난다. 이때 차 움에 아미노산, 특히 다신(茶神)으로 불리는 ‘데아닌’의 함량이 급격히 감소하며, 햇빛이 강하고 온도가 높으면 쓰고 떫은 맛이 나는 ‘카테친’ 함량이 증가하므로 감칠맛이 떨어진다. 

 

 밤새 구름이 없고 이슬에 젖었을  때 딴 것이 으뜸이고, 해가 비칠 때 딴것이 그 다음이니, 흐리고 비 올 때는 따지 말아야 한다. 산골에서 나는 것이 으뜸이고,  대나무 밑에 있는 것이 그 다음이며, 자갈밭에 있는 것이 그 다음이며, 누런 모래흙에 있는 것이 그 다음이다.

 

2. 차 만들기(造茶)

 차를 새로 딸 때는 늙은 잎과 줄거리, 부스러기들을 골라 버리고, 두자 네치[72cm정도] 넓이의 노구솥에, 차 한 근 반(750g정도)을 덖는다. 솥이 잘 달궈지기를 살펴, 비로소 차를 넣고 급히 볶는데, 불을 약하게 해서는 안된다. 익기를 기다려 비로소 불을 물리고,  체 안에 펼쳐 담아  가볍게 굴려가며 수차례 펼쳐둔다. 다시 가마솥 안에 넣어 점차 불을 줄여가며 알맞게 말린다. 이러한 과정에 현미(玄微)함이 있는데,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불기운이 고루 들면, 빛깔과 향기가 온전하고 아름다우니, 현미함을 궁구하지 못하면, 신묘한 맛이 모두 시들해진다.

 

3. 차의 식별(辨茶)

 차의 오묘함은 처음 만들 때의 정미함과 저장할 때의 적법함과 우려낼 때의 마땅함(宜)에 달려있다.

 우열은 처음 가마솥에서 정해지고, 청탁은 끝 불과 관계가 있다. 불이 뜨거우면 향이 맑고, 솥이 차면 신묘함이 떨어진다. 불이 지나치게 뜨거우면 설익은 채로 타버리고, 땔감이 적으면 푸른 빛(翠)을 잃는다. 오래 지연되면 너무 익어버리고, 너무 일찍 꺼내면 도리어 설익는다. 너무 익으면 누렇게 되고, 설익으면 검게 착색된다. 순서에 맞게 하면 달고, 거스르면 떫어진다. 흰 점을 띤 것은 무방하며, 타지 않은 것이 가장 좋다.

 

4, 차의 보관(藏茶)

 차를 만들어 말릴 때는 먼저 오래 쓰던 합 그릇에 담아, 바깥은 종이로 입을 봉하고 삼일 지나 차의 성질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다시 약한 불로 덖어 바짝 말리고, 식기를 기다려 병에다 저장한다.

  가볍게 쌓아 채워서 대껍질로 속을 봉한다. 꽃, 죽순 껍질 및 종이로 몇 겹으로 병 입구를 감아 봉한다. 위에는 불로 구운 벽돌을 식혀 눌러둔다. 다육기(茶育器) 속에 두되, 절대 바람에 닿거나 불을 가까이해선 안 된다. 바람에 닿으면 냉해지기 쉽고, 불을 가까이 하면 먼저 누렇게 변한다.

 

5, 불의 세기(火候)

 차를 달이는 요령은 불의 세기 조절이 우선이다. 화로 불이 붉게(紅) 퍼지면 다관(茶罐)을 비로소 올리고, 부채질을 가볍고 빠르게 하다가 끓는 소리를 기다려 점점 세게 빨리 부치니, 이것이 문무(文武)의 살핌이다.

  문(文)이 지나치면 물의 성질이 유약해지니, 유약해지면 물이 차 기운을 가라앉히고, 무(武)가 지나치면 불의 성질이 거세지니, 거세지면 차가 물을 제압한다. 이들은 모두 중화(中和)에 부족하니, 다인(茶人)의 요지(要旨)가 아니다.

 

* 문무지후(文武之候): 불이 뭉근하게 또는 강하게 타면서 강유(强柔,文武)의 조화를 이루는지 살핀다는 뜻. 너무 빨리 끓으면 물에 녹아 있는 유기 오염물이 분해되지 않고, 너무 오래 끓이면 노수(老水)가 된다.

 

6. 끓는 물 분별법(湯辨)

  끓는 물은 3가지 큰 분별법과 15가지 작은 분별법이 있다.

  첫째 형태 분별법이고, 둘째 소리 분별법이며, 셋째 김(氣) 분별법이다. 형태는 속(內)을 분별하기 위함이고, 소리는 겉(外)을 분별하기 위함이며, 김은 빠름(捷)을 분별하기 위함이다.

  새우 눈(蝦眼), 게 눈(蟹眼), 물고기 눈(魚眼), 연이은 구슬(連珠) 같은 것은 모두 맹탕(萌湯)이다. 곧바로 솟구쳐 끓어올라 파도가 넘실대고 물결이 치는 것과 같아서 물 기운(水氣)이 완전히 사라져야 비로소 이것이 순숙(純熟) 이다.

 처음 소리(初聲), 구르는 소리(轉聲), 떨리는 소리(振聲), 달리는 소리(驟聲) 모두 맹탕이다. 곧바로 소리가 없어져야(無聲) 이것이 바로 순숙이다. 기운이 한 가닥(一縷) 두 가닥(二縷) 세 네 가닥( 三四縷)이 떠올라, 어지러히 분간 못함에 이르러 어지럽게 얽히는 것은 모두 맹탕이다. 곧바로 기운이 곧게 가운데로 꿰뚫고 나와야 비로소 이것이 순숙이다.

 

7. 끓는 물 사용법(湯用老嫩)

  송(宋)나라 사람으로 다록(茶錄)을 남긴 채군모는 탕은 부드러운 물 눈수(嫩水)를 쓰고 오래 끓인 물 노수(老水)는 쓰지 않는다고 하였다.

 

*노눈(老嫩): 너무 오래 끓인 물을 ‘노수(老水)’라 하고, 차 우리기에 알맞도록 부드럽게 끓인 물을 ‘눈수(嫩水)’라 한다.

 

  대개 옛사람들 차 제조법은, 차를 만들면 반드시 맷돌질하고, 맷돌질하면 반드시 갈고, 갈면 반드시 체질 하였으니, 곧 차는 티끌처럼 나부끼는 가루가 되었다. 재료들을 섞어서 용봉단(용과 봉황의 무늬를 앞뒤로 찍어 둥글게 만든 떡차)을 찍어 만들어, 탕을 만나면 차의 신묘함이 바로 떠올랐으니, 이것이 눈수를 쓰고 노수를 쓰지 않은 까닭이다.

  요새 차 만드는 법은 체 치거나 갈지 않고 본래의 잎 모양을 갖추고 있으니, 탕이 모름지기 순숙이라야 본래의 차의 신묘함이 비로소 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탕은 모름지기 다섯 단계(*五沸)로 끓여야 차의 세 가지 기이함(*三奇)이 갖춰진다.'고 하였다.

 

*오비(五沸): 형태․소리․ 기운, 각각의 다섯 가지 끓는 단계.

* 삼기(三奇): 세 가지 기이함, 진향(眞香), 진미(眞味), 진색(眞色)을 뜻한다.

 

8. 차 우리는 법(泡法)

  탕이 순숙이 되었음을 살폈으면 곧바로 들어올려서 찻주전자에 조금 따라 냉기를 제거하고, 그 물을 기울여 따라낸 뒤에 차를 넣는다.

  차의 양을 알맞게 가늠하여 중(中)을 지나치거나 정(正)을 잃어선 안 된다.

 차가 많으면 맛이 쓰고 향이 가라앉으며, 물이 많으면 색이 묽고 기운이 약해진다.

  찻주전자를 두 번 쓴 뒤에는 다시 냉수로 씻어서 찻주전자를 서늘하고 깨끗하게 만든다. 그렇지 않으면 차의 향기가 감소한다. 다관(茶罐)이 뜨거우면 차의 신묘함이 온전하지 못하고, 찻주전자가 깨끗하면 물의 성질이 항상 신령스럽다.

  차와 물이 잘 어우러지기를 조금 기다린 후에 베(釃)에 걸러서 나누어 마신다. 이때 거르는 것은 빨라선 안 되고, 마시는 것은 지체해선 안 된다. 빠르면 차의 신묘함이 채 피어나지 못하고, 지체하면 오묘한 향기가 먼저 사라진다.

 

9. 차 넣는 법(投茶)

  차를 넣는 데는 차례가 있으니, 그 적절함을 잃어선 안 된다. 차를 먼저 넣고 끓인 물을 나중에 붓는 것을 하투(下投)라 하고, 끓인 물을 반 붓고 차를 넣고 다시 끓인 물로 채우는 것을 중투(中投)라 하며, 끓인 물을 먼저 붓고 차를 뒤에 넣는 것을 상투(上投)라 한다. 봄가을에는 중투(中投), 여름에는 상투(上投), 겨울에는 하투(下投)로 한다.

 

10. 차 마시는 법(飮茶)

 차 마실 때는 손님이 적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손님이 많으면 시끄럽고, 시끄러우면 우아한 정취가 줄어든다. 홀로 마시는 것을 ‘신(神,신령스럽다)’이라 하고, 손님이 둘인 것을 ‘승(勝,뛰어나다)’이라 하며, 세넷인 것을 ‘취(趣,멋스럽다)’라 하고, 대여섯인 것을 ‘범(泛, 떴다)’이라 하며, 일곱 여덟인 것을 ‘시(施,베푼다)’라 한다. 

 

11. 차의 향기(香)

  차에는 진향(眞香), 난향(蘭香), 청향(淸香), 순향(純香)이 있다. 겉과 속이 한결같은 것을 ‘순향’이라 하고, 설익거나 너무 익지 않은 것을 ‘청향’이라 하며, 불기(火候)가 고루 배어 있는 것을 ‘난향’이라 하고, 곡우 전의 신묘함이 갖춰진 것을 ‘진향’이라 한다.

 다시 함향(含香), 누향(漏香), 부향(浮香) 간향(間香)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바르지 못한 향기이다.

 

12. 차의 색(色)

  차는 푸른 비취 빛(靑翠)을 으뜸으로 여기고, 찻물은 남백색(藍白)을 아름답게 여긴다. 노랑, 검정, 빨강, 어두운 색은 모두 차의 품격에 들지 못한다. 

 눈 빛(雪濤) 찻물이 최상이고, 비취 빛(翠濤) 찻물이 중간이며, 누른 빛 찻물이 최하이다.

 신선한 샘물과 활활 타는 불은 차 끓이는 오묘한 기교(玄工)이며, 옥 같은 차와 얼음 같은 찻물은 찻잔에 담긴 절묘한 기술(絶技)이다. 

 

13. 차의 맛

 맛은 달고 부드러운 것(甘潤)을 최상으로 여기고, 쓰고 떫은 것을 최하로 여긴다.

 

14. 차의 오염(點染失眞)

  차는 자연스런 참된 향기, 참된 빛깔이 있으며, 참된 맛이 있는데, 한 번 오염이 되면, 곧 그 참됨을 잃는다.

 만약 물에 소금기가 있거나, 차에 불순물이 섞였거나, 찻잔에 과즙이 묻어 있으면, 모두 차의 참됨을 잃어버린다.

 

15. 차의 변질(茶變不可用)

  차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푸른색이다. 거두어 저장할 때 법도에 맞지 않으면, 처음에는 녹색으로 변하고, 두 번째는 누런색으로 변하며, 세 번째는 검은색으로 변하고, 네 번째는 흰색으로 변한다.

 그러한 것을 마시면, 위장을 차게 하는데, 심하면 수척한 기운이 쌓이게 된다.

 

16. 물의 등급(品泉) 

  차는 물의 신묘함이고, 물은 차의 몸이다. 좋은 물(眞水)이 아니면, 그 신묘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정결한 차가 아니면, 어떻게 그 몸을 엿보겠는가.

 산 위의 샘물(山頂泉)은 맑으면서 가볍고, 산 아래 샘물은 맑으면서 무거우며, 돌 사이 샘물(石中泉)은 맑으면서 달고, 모래 속 샘물은 맑으면서 차가우며, 흙 속 샘물은 싱거우면서 깨끗하다.

 누런 돌(黃石)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좋지만, 푸른 돌(靑石)에서 새어나오는 물은 쓸모가 없다.

 흐르는 물이 고인 물보다 낫고, 음지에서 나는 물이 양지의 물보다 낫다.

 참된 근원의 물은 맛이 없고, 참된 물은 냄새가 없다.

 

17, 우물 물은 차에 부적합 하다(井水不宜茶)

  다경(茶經)에 이르기를 '산의 물이 최상이고, 강물이 다음이며, 우물 물이 최하'라 하였다.

 강이 가깝지 않거나, 산에 샘물이 없을 때 제일의 방안은 오직 장마 비를 많이 저장해 두는 것이 마땅하다.

 그 맛이 달고 조화로워, 만물을 잘 길러주는 물이다.

  눈 녹은 물은 비록 맑기는 하나, 성질이 무겁고 음습하여, 사람의 비위를 차게 하므로, 저장해 두기에는 마땅치 않다.

 

18. 물의 저장(貯水)

  물을 저장하는 항아리는 그늘진 뜰 안에 두고서 비단으로 덮어두어 별과 이슬의 기운을 받도록 하여야, 물의 빼어난 영험함이 흩어지지 않고, 신묘한 기운이 항상 보존된다.

 가령 나무나 돌로 누르고 종이나 죽순껍질로 봉하여 양지에서 햇볕을 쪼이면, 밖으로는 그 신묘함이 소모되고, 안으로는 그 기운이 막혀서, 물의 신묘함이 사라지게 된다.

  차를 마실 때에는 오직 차의 신선함과 물의 신령함을 귀하게 여기니, 차가 그 신선함을 잃고 물이 그 신령함을 잃는다면, 도랑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19. 차의 도구(茶具)

  상저옹(桑苧翁)은 ‘차를 달이는데 은그릇을 쓰다가 너무 사치스럽다고 하기에 나중에는 도자기를 썼는데, 또한 오래 쓸 수가 없어 마침내 은그릇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내 생각에, 은그릇이라는 것은 부유한 집에서 장만해두는 것이 마땅하니, 산속 오두막이나 초가집의 경우는, 주석그릇을 쓰더라도 향기, 빛깔, 맛에 손색이 없다. 다만 구리그릇과 쇠그릇은 피해야 한다.

 

20. 찻잔(茶盞) 

  잔은 눈처럼 흰색을 최상으로 여기고, 남백(藍白) 색은 차의 빛깔을 해치지 않으니, 그 다음이다.

 

21. 행주(拭盞布) 

  차를 마시기 전후에는 모두 가는 마포(麻布)로 잔을 닦는다. 그 밖의 것들은 더러워지기 쉬우므로, 쓰기에 마땅치 않다.

 

22. 차에 대한 도리(茶衛)

  차를 만들 때는 정성스럽게 하고, 차를 저장할 때는 건조하게 하며, 차를 우릴 때는 청결하게 한다. 정성과 건조와 청결함이면, 차 마시는 도리는 다 것이다.

 

 

 

 동양 3국의 초 베스트셀러

허준(許浚)의 동의보감(東醫寶鑑)

 

 '동의보감'은 1613년 발행된 후, 1724년 일본에서, 1766년 청나라에서 인쇄될만큼, 동양 3국에서 인정받고, 지금까지 4 세기에 걸쳐서 '한방의 보전(寶典)'으로 대접 받는 국제적 베스트셀러 이다.

 

 

 저자 허준(許浚)은 1546년 지금 강서구 가양동에서 서자로 출생하여, 소년기를 경남 산청에서 보내고, 70 세까지 살았다. 1574년 의과에 등과하여, 30 세에 내의원 의관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평양, 의주로 가서 왕의 말 벗이 되었다. 선조가 임란으로 인한 백성의 질병을 걱정하며 '모든 의서(醫書)를 총정리 하여 알기 쉽게 책을 만들라.'는 어명을 내려, 14 년 간 혼자 노력하여 1610년, 광해군 2 년에 25 권의 방대한 이 책을 완성했다.

 선조 때는 양평군(楊平君) 승록대부로 추천 되었으나, '서출에 당상군 벼슬은 불가요' 하는 사간원의 반대로 취소됐고, 선조가 승하하자, 치료를 소홀히 했다는 죄명으로 파직되어 귀양을 갔다.

 그러나 중국인들도 '천하의 보배'라 칭하는 이 위대한 명저는 귀양살이에서 완성되었다.

 

 한글로 된 책이 나왔으니, 가정에 두고 볼만 하다.

 목차를 보면, 처음에 단전 호흡, 안마법, 양생법(養生法)이 나온다.

 그 중 신침법(神枕法)을 소개하면, '잣나무 목침 속에 베로 주머니를 만들어, 당귀 백출 세신 부자 목란 건강 등 약초를 넣고, 1백일을 베고 자면, 얼굴에 광택이 나고, 1년이 지나면 병이 없어지고 몸에 향기가 가득하고, 4년이 지나면 흰머리가 검어지며 이빨이 새로 생기고, 눈과 귀가 밝아져 총명하게 된다.' 하였다.

 

  그 다음 인체와 장기(臟器) 증세와 처방법이 나온다. 

 '귀에 벌레가 들어간 경우, 대줄기를 귀에 넣고 힘껒 빨면 된다.' '입에서 악취가 나는 것은,기름진 음식과 술을 많이 먹고, 마음이 과로하면 열기가 가슴에 받쳐 생긴다. 이때 궁지고(芎芷膏)란 처방을 쓴다. 천궁(川芎)과 백지(白芷) 가루를 꿀에 버무려 연밥 크기로 환(丸)을 만들어 잠자리에 들기전에 녹여서 삼키면 낫는다.'

 계속하여, 손, 발, 뼈, 근육, 머리카락의 증세와 처방이 제시되고, 중풍, 황달, 구토, 곽란, 등의 증세와 처방이 나온다. 

 술에 대한 처방도 있는데. '술을 즐기는 사람이 취하지 않게 하려면, 주독(酒毒)은 치아에 있기 때문에, 대취(大醉)하면 뜨거운 물로 얼굴을 두어번 씻고, 양치한 다음, 머리를 수십번 빗질하면 된다.' 처방전으로 만배불취단(萬盃不醉丹), 신선불취단(神仙不醉丹), 용뇌탕(龍腦湯)을 소개하고 있다.

 또 옛날은 곤장을 많이 쳤다. 매 맞은 상처에 대한 처방도 있다. '두부를 손바닥처럼 저며서 소금물에 달여 따뜻하게 상처에 붙이면 찌는듯 하는데, 두부가 자색으로 변하면 바꾸어 붙이되, 두부가 담색이 되도록 하면 좋다.' '봉선화 대궁이를 근엽(根葉)이 붙은 채로 찧어서 붙이되, 마르거던 다시 붙이기를 거듭하면 하룻밥에 피가 흩어지고 낫는다.' 하였다.

 맞아도 아프지 않는 방법도 소개되고 있다. '백랍(白蠟) 한 냥을 가늘게 썰어서 사발에 넣어 술과 같이 끓여 먹으면, 곤장을 맞아도 아프지 않으니,이름을 기장산(寄杖散)이라 한다.'

 자식 얻는 법도 소개되어 있다. '부인이 자식 못 낳는 것은, 대개 피가 적어서 정(精)을 포섭하지 못하는데 있으므로, 경혈(經血)을 조양하는, 가미양영환(加味養榮丸), 승금단(勝金丹), 조경종옥탕(調經鐘玉湯)을 쓰며, 남편은 고본건양단(固本健陽丹), 속사단(續嗣丹), 온신환(溫腎丸)을 쓴다.' 

 이 밖에 잡방으로,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도 있다. '천문동 백복령 가루 두 돈을 하루에 2 회씩 술로 복용하면, 대한(大寒) 중에 홑옷으로 땀이 난다.'

 사람 몸을 향기롭게 하는 법으로는, '영릉향(零陵香) 어린 잎으로 물을 끓여 목욕하거나, 달여 먹으면, 몸이 향기롭고 악기(惡氣)가 없어진다.'

 사람을 용맹하게 하는 법도 있다. '천웅(天熊)을 먹으면 무용해진다.'

 귀신 볼 수 있는 방문(方文)도 있다. '생마자(生麻子), 석창포, 귀구(鬼臼) 가루를 꿀로 버무려 환을 지어, 매일 아침 해를 향하여 한 알씩 먹고, 일 백 일이 차면 귀신을 볼 수 있다.'

 

 '동의보감'은 병의 증세와 처방법을 설명한 후, 처방에 들어가는 약초, 약물을 채집하여 약을 만들고, 복용하는 법을 소개한다. 본초학(本草學)이다.

 약이 되는 재료는 풀, 채소, 나무, 과일, 뿌리 뿐만 아니라, 호골(호랑이 뼈), 용골(용의 뼈), 코뿔소 뿔(犀角), 금속, 돌, 흙, 물까지 언급되고 있다.

 너무나 자세히 설명되어, 과연 그럴까 의심되는 것도 많다.

 

 다도(茶道)하는 사람을 위해서 물에 대한 것을 몇 개 소개한다.

1. 정화수; 깊은 땅 속 우물물이 조용히 가라앉은 첫 새벽에 제일 먼저 기른 물로, 구취를 없애주고 안색을 곱게 하며, 술이나 초를 담그면 부패하지 않는다.

2. 국화수; 맛이 달며 무독하고  안색을 좋게 하고, 오래 먹으면 늙지 않는다. 촉나라 장수원(長壽源)이란 곳은 사철 국화가 피어 향기가 그윽했는데,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시고 2-3 백 세를 살았다.

3. 춘우수; 정월 달 빗물로, 그릇에 저장했다가 약을 달여 먹으면, 양기가 상승하고, 부부가 한 잔씩 마시고 합방하면, 신효하게 잉태한다.

4. 우박; 장(醬) 맛 나쁜데 두 되 쯤 넣어두면 맛이 좋아진다.

5. 여름 철 얼음; 여름 철 얼음을 음식에 가미하여 오래 먹으면 병이 난다.

6. 반천하수(半天河水); 대 울타리 끝이나 높은 나무의 구멍에 빗물이 고인 것으로, 맛이 달고 독이 없으며, 마음의 병과 나쁜 독을 없앤다.

7. 감란수(甘爛水); 백로수(百勞水)라고도 하며, 물 한 말을 동이에 넣고 수백 번 흔들면, 물 위에 무수한 구슬 방울이 뜨는데, 그것을 말한다. 곽란 경련으로 아랫배가 아픈 것을 다스린다.

8. 냉천(冷泉); 이 물로 목욕하면, 편두통, 등이 찬 것, 오한이 낫는다. 냉천 밑에는 백반(白礬)이 있어 물맛이 차고 시고 끌꺼러우니, 7-8 월에 목욕하되, 밤에 하면 반드시 죽는다.

 

  물에 대해서는 이쯤하고, 흙에 대한 걸 살펴보자.

  10 년 이상 지난 부엌 솥 한복판 밑 황토를 복룡간(伏龍肝)이라 한다. 토혈(吐血)과 피오줌 누는 것을 막는다.

  동벽토(東壁土), 서벽토(西壁土)란 것이 있다. 오래 된 집 아침 햇살 잘 받은 동쪽 벽 흙은 탈항(脫肛)과 설사, 곽란을 다스린다. 해질 무렵 서쪽 햇살 받은 서벽토는 구토, 해역(咳逆, 목구멍이 막혀 숨 쉬는 소리가 나는 병)을 다스린다.

  우물 밑바닥 모래 정저사(井底沙)는 뜨거운 물에 덴 데, 독충에 쏘인데 잘 듣고, 냄비 밑의 그을음 당묵(鐺墨)은 고독(蠱毒, 뱀이나 지네, 뚜꺼비의 독), 중악(中惡, 갑자기 흥분하여 까무라치는 병), 혈훈(血暈, 산후 출혈로 정신이 혼비해지는 병)을 다스리며, 칼이나 창 따위로 다친 금창(金瘡)에 바르면, 피가 멎고 새살이 돋는다.

 

 약으로 쓰는 돌은 55 종이 있다.

 진주(眞珠)는 얼굴빛을 곱게 해주고, 활석(滑石)은 소변을 통하게 해주고, 자석영(紫石英)은 심기(心氣)를 보해주며, 지남석(磁石)은 뼈를 강하게 하고 정력을 더해 준다. 그 밖에 복통을 다스리는 소금(食鹽), 학질을 다스리는 비상(砒霜), 금창을 지혈하고 살을 돋게 하는 석회(石灰)가 소개되고 있다.

 

 약으로 쓰는 금속은 33 종이 있다.

 오장을 편케 하고 어린이 경끼를 진정시켜 주는 금과 은, 나쁜 종기를 다스리는 수은, 근육과 뼈를 잇게하는 자연동(自然銅), 탈항을 다스리는 무쇠가 소개되고 있다.

 

  채소나 과일의 약효도 소개된다.

  가래침을 삭이는 귤 껍질, 오장을 보호해 주는 대추, 소변을 통하게 해 주는 포도, 노인 주름살 펴 주는 밤의 속껍질, 남자의 음위(陰萎)를 굳세게 해 주는 나무딸기, 얼굴빛을 곱게 해 주는 앵두, 갈증을 멎게 하는 매실과 모과. 술독을 풀어주는 홍시, 월경을 통하게 하는 복숭아 씨, 갈증과 복통을 다스리는 사과, 기침을 진정시키는 은행,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순무, 소변을 잘 나오게 하는 수박과 참외, 치아를 희게 하며 혈액을 맑게 하는 상추, 눈을 밝게 하고 대소변을 통하게 하는 파 뿌리, 술독을 다스리는 미나리와 시금치, 간과 정력에 좋은 들깨, 불알이 붓고 아픈 산기(疝氣)를 다스리는 다시마, 치질균을 죽이는 김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 밖에 인삼, 감초, 오미자, 당귀, 작약같은 약초의 효능이 자세히 소개된 것은 두 말 할 것 없다.

 

 약을 채취하는 방법(採藥法)도 소개된다.  

 약을 캐는 시기는 대체로 2월과 8월이다. 이때 채취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른 봄에는 뿌리에 있는 약물이 오르려고는 하나 아직 가지와 잎으로 올라가지 않고, 뿌리의 세력이 매우 순하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가지와 잎이 마르고 약물이 다 아래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봄에는 일찍 캐는 것이 좋고 가을에는 늦게 캐는 것이 좋다. 꽃, 열매, 뿌리, 잎은 각각 그것이 성숙되는 시기에 따는 것이 좋다. 계절이 일찍 오고 늦게 오는 때가 있으므로, 반드시 2월이나 8월에 국한되어 채취하지 않아도 되며, 그때의 형편대로 채취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 끝부분에는 침 놓는 법, 쑥 뜸 하는 법, 경혈(經穴)의 위치 등, 침구법(針灸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예언서들 

정역, 격암유록, 정감록,

 

  2012년에 지구 종말이 온다는 16세기 프랑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으로 한때 세상이 떠들썩 했다. 그러나 2012년이 지나가자 서양 사람들이 잠잠하게 되었다.

 우리의 미래는 어떤 것일까? 사람들은 미래를 알고싶어 한다. 그래 하다못해 그날 일진을 알기 위해, 아침에 '화투 점'이나  '윷 점'을 친다. 

 옛날 사람들은 역학, 천문, 지리, 풍수, 복서(卜筮), 상법(相法)을 배웠다. 

'역학'은 천지 운행을 의미하는 주역 팔괘를 통해 미래를 점치는 것이고, '천문'은 별을 관찰하여 천체 운행과 인간 길흉 성쇠를 알려고 한 것이다. 

 '지리'는 기후, 물산, 교통, 산과 강의 흐름을 파악한 것이며, '풍수'는 땅의 위치와 방위, 생김새로 길흉을 논한 것 이다.

 '복서' 중 복(卜)은 귀갑 수골(獸骨)을 태워서 그 균열이 생기는 모양으로 길흉을 알아보는 점법이고, 서(筮)는 산가지[算木]와 서죽(筮竹)을 이용해 그 숫자의 결합에 따라 괘(卦)를 세우는 방법이다. 

 '상법'은 생김새를 보고 사람의 운명을 판단하는 관상법 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과학적 요소도 있고, 미신적 요소도 있다. 그러나 민중이 꼭 알고싶은 것이 미래다. 그래 현재는 <미래예측학>이란 학문이 과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정역(正易)

 

 '역학'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역술인이지만, 역학은 미아리고개 점쟁이들 전유물이 아니다. 동양 최고의 철학적 종교적 원리로 인식되어온 학문이다. 주역은 동양 여러 민족이 수천 년 읽어 온 고전이다. 그것이 미아리 점쟁이 소유물 이겠는가.

 퇴계나 서경덕 같은 한국 성리학의 중심 인물들이 모두 <주역>을 공부했다. 그 <주역>에서 파생된 예언서가 '정역(正易)'이다.

 

 지금부터 백 년 전 계룡산 국사봉에서 20여 년 도를 닦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8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김재일(金在一), 후에 일부(一夫)라는 호로 알려진 인물이다. 일부는 선비 집에서 태어나 주역과 성리학을 연구하다가 인간 미래에 대한 완전한 비답(秘答)을 구하고자 계룡산에 입산했다. 그리고 20년이 경과된 어느 날, 기이한 현상을 보았다. 천지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현상이 보이면서 만유의 이치를 상징하는 역괘(易卦)가 명확히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이를 근거로 '정역(正易)'을 만들었다.

 그는 <정역>이 복희씨가 만든 팔괘나 문왕이 만든 후천팔괘도(後天八卦圖)를 능가한다고 주장했다.

 즉 수천년 사용된 팔괘도는 아버지, 어머니, 형제의 위치가 측면에 위치하여 세상살이가 혼란했는데, 정역(正易)에선 맨 위에 아버지, 맨 아래에 어머니, 좌우에 자녀들이 부모를 받들고 있는 구조로 앞으론 태평성대가 온다는 것이다. 

 정역시대엔 지금 125도로 경사져 기울어진 지구의 상태가 바르게 제자리로 돌아온다고 한다. 주역에서 말하는 이칠화(二七火)가 하늘에 있다가 땅 속으로 들어가 높은 열기를 뿜어, 빙산이 녹아내리고, 곳곳에서 화산이 터지고, 온천이 분출된다고 한다. 빙하가 녹아 바닷물이 넘치고, 일본 등 섬나라는 물에 잠기고, 땅이 갈라지고, 희말라야 산맥도 갈라져 평지가 된다고 한다.

  이런 시기는 약 2-3 백 년 지속되는데, 이것이 후천개벽(後天開闢) 시대가 열린 것이라 한다.

 복희역은 문자가 없던 시대에 만들어진 소박한 역(易)이요, 문왕역은 문자 시대에 만든 역(易)이다. 일부(一夫) 역(易)은 전자가 과거와 현재를 나타내는 역인 데 비하여, 미래 후천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쨌던 유불선에 능통했던 탄허(呑虛)스님이 '정역'에 감탄하여 일반인이 쉽게 볼 수 있도록 책자를 저술하기도 했다.

 

 6. 25를 예언한 격암유록(格菴遺錄)

 

 '남사고 비결(南師古 秘訣)'로 불리는 '격암유록'은 조선 명종 때 격암(格菴) 남사고(1509-1571)가 어린 시절 신인(神人)을 만나 전수받았다고 주장한 책이다.

 이 책 서두에는 저자에 대한 소개가 있고, 예언서(豫言書) 세론시(世論視) 계룡론(鷄龍論) 등 논 18편, 궁을가(弓乙歌) 은비가(隱祕歌) 등 가사 30편, 출장론(出將論) 승지론(勝地論) 등 논 10편, 말초가(末初歌) 말중가(末中歌) 등 가사 3편이 있다.

 내용 중 특이한 것은 미래의 시기나 사건을 은어나 파자(破字), 속어, 변칙어 등을 사용하여 보는 사람들이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도록 한 점이다.

 한반도 미래를 예언했는데, 임진왜란, 동학혁명, 한일합병, 해방, 6.25, 4.19, 5.16과 이승만 박정희 출현을 예언했고, 2012년 박씨 성을 가진 여성 지도자(박근혜?)가 나타나 분열된 동서를 화합한다고 예언했다.

 '격암유록'은 천기(天機)를 담은 책이라 비밀리에 자손들의 손에 보관되어 오다가, 1977년 이도은(李桃隱)이 필사본을 내놓아,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서점에 가면 여러 출판사에서 낸 책이 있다. 몇 대목 살펴보자.

 

  <말운론>에서 '38선으로 국토가 분단된다,' '6·25 전쟁이 일어나서 인민이 죄 없이 살생된다'고 예언했다.

 또 백호(白虎)의 해에 병화가 있을 것이라 했는데, 호랑이 해 중 흰색을 상징하는 경(庚) 자가 든 1950년 경인년(庚寅年)에 6.25가 일어났다. 더 신기한 것은, 피난처는 부산이 될 것이라 예언한 점이다. 

  비결에는 ‘목인비거후 대인산조비래(木人飛去後 待人山鳥飛來)’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풀이하면,  '木人' 두 글자를 합하면 박(朴) 이다. '飛去後'는 죽은 뒤란 뜻이다. '人山鳥'는 사람 인(人), 멧 산(山), 새 조(鳥=隹) 자는 합하면 崔가 된다. 박씨 죽고나면 최씨가 나라 다스린다는 말이다. 박정희와 최규하를 의미한다. 

 

 우리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 시기는 언제일까?

 '통합지년 하시(統合之年 何時), 용사적구 희월야(龍蛇赤狗 喜月也), 백의민족생지년(白衣民族生之年)'이라 하였다. 풀이하면, '통일의 그 해는 언제인가? 용이나 뱀의 해, 혹은 붉은 개의 해가 된다. 이는 병술년(丙戌년) 2006년, 병진년(丙辰年) 2036년, 정사년(丁蛇年) 2037년 이라는 것이다.

  남사고는 천문 지리에 박식하여 종6품 관상감을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별을 보고 자기 목슴이 다한 것을 알고,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길에서 죽었기에 사람들은 '천문 지리 능통한 남사고도 자기 수명을 몰랐구나' 하고 비난받았다고 한다.

 

 정감록(鄭鑑錄)

 

 '정감록'은 광해군 이후 역모사건 때 등장한 괴문서다. '국운이 쇠퇴했다', '한양의 지덕이 쇠했다'는 내용이 위정자에게 불온하였다. 그래 조정에서 금서령을 내리고, 위반자는 극형에 처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예언서다.

 그 정감록이 조선 후기 민중들 사이에 민간신앙으로까지 발전, 1920년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따르면, 신봉자가 수백만에 달했다고 한다. 

 저자는 정감(鄭鑑) 혹은 이심(李沁)이라고 한다. 혹은 도선국사, 무학대사, 정도전이라는 설도 있다.

'정감록'은 10여 종류의 비기(秘記)를 한데 묶은 것이다. 각종 감결(鑑訣)과,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무학비결(無學秘訣), 삼도봉시(三道峰詩), 옥룡자기(玉龍子記)를 묶어놓은 것이다.

 

 내용은 정감과 이심이라는 두 인물의 대화로 시작된다. 

 첫 장에 자신이 사마의나 제갈량 보다 낫다는 구절이 나온다.

 주로 우리나라의 풍수를 논한다. 

 

 곤륜산에서 내린 맥이 백두산에 이르고, 그 원기로 평양이 천 년 운수를 지녔으나, 개성 송악으로 옮겨졌다. 개성은 5백 년 도읍할 땅이지만, 요승이 난을 꾸며 땅 기운이 쇠하여 운이 한양으로 옮겼다. 그 맥이 내려가 태백산, 소백산에서 산천의 기운이 뭉쳐져 계룡산으로 들어간다. 계룡산은 정씨가 8백 년 도읍할 땅이다. 그 지맥이 가야산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조씨가 1천 년 도읍할 땅이다. 또 전주는 범씨가 6백 년 도읍할 땅이요, 개성은 왕씨가 다시 일어날 땅이다. 나머지는 상세치 않다.

 

 우리나라에는 십승지지(十勝之地)가 있다. 이곳은 병화(兵火)가 침범하지 않아 난을 피하기 쉽고, 흉년이 들지 않는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金鷄村)으로 소백산의 두 물골 사이에 있다.

 

 *소백산 아래 금계동, 욱금동, 삼가동이 그곳이다.1959년 한 발표에 의하면, 풍기로 전입한 주민들 이주동기 중에 8%가 정감록의 영향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부분 평안도와 황해도 출신들로 인삼과 과수를 재배하거나 소백산 기슭에서 밭농사를 하며 살았다. 근래까지 후손이 살았는데, 그 중 풍기의 십승지를 필사한 지도를 소장한 사람도 있었다.

 

 둘째는 화산(花山) 소령(召嶺) 고기(古基)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奉化)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간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증항(甑項)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 다치지 않을 곳이다.

 넷째는 운봉(雲峰) 행촌(杏村)이다.

 

 * 운봉 사람 곽재영이 말하기를 '읍에서 25리가 지리산 반야봉 괘협처(掛峽處)인데, 석벽 높이가 몇 길이나 되는데 동점(銅店)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놓았다. 글자의 획이 어지러이 소멸되어 분간하기 어려운데, 예전에 구리를 캔 흔적이 있다. 동점촌은 땅이 평탄하지만 가운데 앉아 있으면 사방이 보이지 않고, 주위가 30- 40호가 거주할 만한 땅이다' 하였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金塘室)로, 이 땅은 난이 일어나도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維鳩) 마곡(麻谷)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 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 쪽 상류인데,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만 하다. 그러나 수염 없는 자가 들어가면 그렇지 않다.

 여덟째는 무주(茂朱) 무봉산 동쪽 동방(銅傍) 상동(相洞)이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壺岩)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萬壽峰)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십승지는 대개 산 높고 계곡 깊어 수원(水源) 충분하며, 토양 비옥하고 온화한 기후 조건 갖춰진 곳 이다. 농경을 통한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적 환경조건을 지녔다. 

 

 이런 이상향 사상은 동서양에 모두 나타난다. 

 서양은 이스라엘의 선악과 열리는 에덴동산, 베르길리우스가 읊은 그리스 중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카디아, 프라톤이 말한 화산 폭발로 바다 속에 사라진 그리스 산토리니 섬 부근의 아틀란티스, 토마스무어의 소설에 나오는 유토피아가 있다.

 중국은 <사기> '봉선서(封禪書)'에 나오는 발해만에 있다는 봉래, 방장, 영주 삼신산(三神山)이 있고, 도교의 원시천존(元始天尊)이 살고있는 옥천궁(玉泉宮),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 힐튼의 소설로 알려진 샹그릴라가 있다.

 인도는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상상한 수미산(須彌山)과 쉬바(Siva) 신의 거주처 희말라야의 카알라사(Kailasa) 산이 있고, 티베트에는 내륙 아시아의 어디엔가 있다고 전해지는 가공의 왕국 샴발라(Shambhala)가 있다.

 한국은 경북 상주 근처 오복동, 대전의 식장산, 제주도 아래의 이어도, 지리산 청학동을 낙토(樂土), 복지(福地), 승지(勝地), 길지(吉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라 부르며 이상향으로 보았다. 

 

 

 

토정비결(土亭秘訣)

이지함(李之)

 

 조선 풍수대가는 무학대사(無學大師)와 토정(土亭) 이지함(李之)을 꼽는다. 3대 기인으로는 단학(丹學)의 비조(鼻祖) 북창(北窓) 정렴(鄭)과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토정(土亭) 이지함(李之)을 꼽는다.

  이지함(李之菡, 1517-1578년)은  중종(中宗) 12년에 태어났고, 선조 11년에 작고 했다. 수원(水原) 판관(判官) 이치(李穉)의 막내아들로 외가(外家)인 보령군 청라면 장산리에서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 부친이 죽고 형인 이지번에게 학문을 배웠다. 지번은 인종(仁宗)이 백의재상(白衣宰相)이라고 부르던 선비로, 그의 아들 이산해는 영의정으로 북인 영수였으며,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이 16세 때 토정 추천으로 이산해의 사위가 되었다.

 장성한 뒤에 서경덕(徐敬德) 문하생이 되었는데, 재질이 비상하여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 병서(兵書), 음양술(陰陽術) 등 통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토정 이지함

 

  벼슬은 포천(抱川), 아산(牙山) 현감을 지냈는데, 포천 현감 재직 시에는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서 많은 생명을 구제하였고, 아산 현감 때는 걸식 유민(流民)을 보살피는 걸인청(乞人廳)을 만들었다. (지금 아산군 영인면 아산리 424-3에 걸인청 목조건물이 남아있다.)

  자(字)는 형백(馨伯), 호(號)는 토정(土亭), 수선(水仙), 시호(諡號]는 문강(文康)이며,  한산 이씨(韓山 李氏)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육대손(六代孫) 이다. 보령시 청라면 화암서원(花巌書院,)에 배향 되었다.

 그가 타계하자 충청도 사람은 물론, 그가 살던 마포 백성들이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슬피 울었다고 한다.

 

  토정은 당당한 몸짓과 훤칠한 키에 둥굴넓직한 얼굴, 화경 같은 눈, 한꺼번에 두 말 서 말 밥을 먹어치우는 식욕, 며칠을 굶고도 시장해 보이지 않는 기색, 하루 수백 리 길을 다니는 등 기행이 많았다.

 '王者以民爲天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民以食爲天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며, 당시 전국에서 서울로 오는 쌀과 곡물, 해산물, 특산물 실은 배가 드나들던 마포나루에 흙으로 '토정(土亭)'을 짓고, 백성들에게 물건 만들고 장사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이곳이 지금 마포대교에서 상수동으로 이어지는 '토정로'이다.

 일설에는 이 당시 토정비결로 사람들의 운을 점춰주었는데, 하도 신통하게 맞추는 바람에 사람들이 토정비결만 신봉하여 일을 않으므로 그 내용을 조금 틀리도록 고쳤다고 한다.

 

 토정은 네 귀퉁이에 커다란 박을 단 조그마한 쪽배를 저어 세 차례나 제주도를 왕래하였으며, 길을 나설 때 행장은, 누덕누덕 기운 홑옷 단벌에  낡아빠진 패랭이, 사시장철 들고 다니던 지팽이 하나가 전부였다. 아무데나 주저앉아 지팡이를 팔에 끼고 웅크리고 잠들곤 했다고 한다.

 선조실록에, '그는 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무더운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초립(草笠)을 쓰고 나막신을 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성시(城市)에 다니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며 웃었으나 아무렇지 않게 여겼다. 어떤 때는 천 리 먼 길을 걸어서 가기도 하였고, 배를 타고 바다에 떠다니기를 좋아하여 제주도에 들어가곤 하였는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조수의 시기를 알았기 때문에 한 번도 위험한 고비를 겪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토정이 지은 '대인설(大人說)'을 보면, 그는 청빈 무욕하고 부귀영화는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대인설(大人說) 

 

貴莫貴於不爵  (귀한 것은 벼슬 하지 않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富莫富於不欲  (부자로는 욕심 않부리는 것보다 더 부자 없으며,)

强莫强於不爭  ( 강하기로는 다투지 않는 것보다 강한 것이 없고,)

靈莫靈於不知  (신령한 것은  알지않는 것보다 더 신령한 것이 없다.)

 

 훗날 선비들은 그를 평하길,

'내가 세상에 늦게 태어나 토정의 문하에서 배우지는 못했으나 선배들에게 그 풍요와 명성을 듣고서는 우러러 공경하며 사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송시열)

'토정 이지함 선생이 일찍 외국 상선 여러 척과 통상하여 전라도의 가난을 구제하려고 한 적이 있다. 그 분의 식견은 탁월하여 미칠 수가 없다' (박제가)

'토정은 직용(直用)할 인재는 아니니, 물질에 비하면 기회이초(奇花異草), 진금기수(珍禽奇獸) 같다. 놓고 구경이나 할 것이지, 포백숙율(布帛菽栗) 같이 긴요한 것은 못된다'(이율곡)

 

 토정과 가깝게 지낸 학자로는 율곡, 조식, 이항복, 성혼이 있다.

 묘소는 대천해수욕장 근처 보령시 주교면에 있다. 

 저서는, '토정유고(土亭遺稿)', '농아집(聾啞集)', '월영도(月影圖)', '현무발서(玄武發書)'가 있다.

 

*'농아집'은, 책수기례(策數起例), 팔문정례(八門定例), 월건례(月建例), 토정비결원리 등이 그 내용으로 역리(易理)를 설명하고 있다.

 

*'월영도'는 오행(五行)의 흐름을 소개한 책 이다.

 

 요즘 학계 일부에서는 '토정비결'이 토정의 이름을 가탁(假託)한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그의 저술 내역을 보아도 그렇고, 그가 주역과 상수학(象數學)에 관심이 깊었던 화담 서경덕의 제자라는 점을 보면, 아무래도 그가 비결의 저자로 생각된다.

  

 

선시(禪詩) 소개 (제1편)

원효(元曉), 원광(圓光), 혜초(慧超), 대각(大覺), 진각(眞覺), 보각(普覺), 원감(圓鑑)    

 

 선시(禪詩)란 무엇인가? 출가 고승(高僧)들이 남긴 선미(禪味) 담긴 시를 말한다. 

 이 선시를 가장 정확히 표현한 분이 동국대 이종익(李鐘益) 교수다. 그는 '초목의 정기가 결집된 것이 꽃이라면, 패합(貝蛤)의 정기가 결정된 것이 진주이며, 진세(塵世)를 초월한 도승(道僧)의 정기가 문자로 빚어진 사리(舍利)가 선시'라 하였다.   

 선시는, 고구려 백제 신라 때부터 시작해서, 만해(卍海) 한용운 스님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다. 자연을 노래한 것도 있고, 향수를 읊은 시도 있고, 오도송(悟道頌)과 임종게(臨終揭)도 있다.

 이 중 오도송은 도를 깨친 순간을 읊은 희유한 것이다. 임종게는 부귀영화 버리고 출가한 고승이 임종에 남긴 게송(揭頌)이다. 둘 다 불입문자(不入文字)에 속해 이해하기 어렵고, 속가의 글과는 다르다. 선시에서 확철대오(廓徹大悟)한 고승의 편모나마 살펴보자.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스님은 29세에 출가하여, 의상스님과 중국으로 가던 중 밤에 해골에 고인 물을 달게 마시고 아침에 그 실상을 보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을 깨닫고 혼자 귀국하였다. 요석궁 공주와 맺어지기 전에 스님이 다음 노래를 항간에 퍼트려, 무열왕이 듣고 공주와 인연을 맺아주어, 설총을 낳았다고 전한다.

 

 

일본에 있는 원효대사 영정

 

자루 빠진 도끼(沒柯斧)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바칠 기둥을 만드련다.

 

*자루 빠진 도끼는 과부인 요석공주를 의미하고 있다.

  

오도송(悟道頌)

 

첩첩한 푸른 산은 아미타불이 계신 굴(窟)이요

망망한 큰 바다는 석가모니불이 계신 궁전이다.

 

 원광법사(圓光法師, 542년 ~ 640년)

 

 스님은 25세에 중국에 들어가 구사론(俱舍論), 성실론(成實論)을 배웠고, 신라 진평왕 22년에 귀국하여,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화랑의 근본 사상을 세웠고, 걸사표(乞師表, 군사를 빌리는 표문)를 지어 수나라가 30만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치게했다.

 

 백결선생 집에서

 

멋 속에 늙은 신선, 유불선(儒佛仙)을 다 통하고

큰 선비의 예리한 인품, 만 사람이 못 당하네.

지혜보살 문수(文殊)란 이름으로 나를 놀리는데

선생의 넓은 방장실(方丈室)엔 언제나 손님이 있네.

 

*금을 타며 인생의 희노애락을 표현한 경주의 낭산(狼山) 밑에 살던, 백결(百結 : 옷을 백 번 기웠다는 뜻)선생과 친했던 모양이다.

 

 혜초(慧超, 704-787)스님

 

 스님은 20세에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서, 남해 바다로 인도까지 갔다. 부처님 유적지를 참배하면서, 동, 서, 중, 남, 북의 5천축(五天竺)을 둘러보고, 10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727년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3권을 지었다. 천축국에서 쓴 시를 소개한다.

 

왕오천축국전 두루말이

 

여수(旅愁)

 

달 밝은 밤에 고향을 바라볼 때, 뜬구름만 시원하게 돌아가네.

그 편에 편지 봉해 부치려 하니, 바쁜 바람이 듣고 돌아오지 않네.

고국은 하늘 끝 북쪽, 이곳은 땅의 끝 서쪽이네.

기러기도 날아오지 않는 더운 남방이라, 누가 경주 계림으로 날아가 주리.

 

북천축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려다 병으로 죽은 스님에게

 

고향에서는 타향에 나간 사람을 위해 매단 등불이 주인을 잃고,

이곳에서는 보배 같은 분이 꺽이었구나.

신령스런 영혼은 어디로 갔는가? 옥 같은 그 얼굴 재가 되었네.

생각하면 슬픈 마음 간절하거니, 그대 소원 못 이룸이 못내 섧구나.

고향으로 가는 길을 누가 아는가? 부질없이 흰구름만 떠돌아 간다.

 

 대각국사(大覺國師, 1066-1101)

 

  대각국사 의천(義天)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중이 되었다. 30세에 송나라에 들어가 화엄(華嚴)과 천태(天台)를 공부한 후 귀국하였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요나라, 송나라, 일본에서 경서를 수집하여 <속장경>  4740 권을 간행하였다.

 시호는 대각국사이며, 비(碑)는 통도사에 있다.

 

대각국사

 

자성(自省)

 

도망간 염소를 찾아나섰다가 갈림길에서 양을 잃듯,

말에 가지가 무성하여 도(道)를 잃었다.

정신이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어가야 비로소 깨닫게 되나니,

아득해라, 어떻게 하면 온갖 의심을 깨트리나.

 

*여기서 염소란 본래 자기 자신을 뜻한다.

 

국원공(國原公)의 시에 답함

 

온갖 생물 다 죽은 듯, 밤은 더 맑은데, 베개 높여 한가히 마음 닦기 알맞아라.

소나무 우거진 창가에는 차갑고 외로운 등불 그림자요, 바람 부는 뜰에는 쓸쓸히 나뭇잎 지는 소리.

난간을 둘러싼 수풀과 샘은 맑은 취미 비치고, 문가에 앉은 새들은 조용한 마음의 벗이다.

정처없이 떠다니다 홍련사에 들었나니, 세상의 부귀영화야 하나의 지프라기.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

 

 우리나라 최초의 선시(禪詩) 창시자로 불리는 무의자(無衣子) 혜심은, 고려 신종 4년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스님이 되었다.

 지리산에서 좌선할 적에는 눈이 내려 이마까지 묻히도록 움직이지 않고 마침내 깊은 뜻을 깨달았으며, 큰 바위에 앉아 밤낮으로 선정을 닦았는데, 5경(五更)이면 게송을 읊으니, 그 소리가 십리에 들렸다고 한다.

저서로는 선문강요(禪門綱要), 선종 초기의 공안을 모은 선문염송(禪門拈頌)이 있다.

 송광사 광원암(廣遠庵)에 진각국사 탑비가 있고, 강진 월남사지(月南寺址)에 비(碑)가 있다. 

 

사검(思儉)대선사를 위해

 

대나무 그림자가 뜰을 쓸어도 티끌은 까딱 않고

달빛이 바다를 뚫어도 물결에는 흔적이 없네.

 

보조국사(普照國師) 가신 날

 

한 봄의 절간은 청정 그대로인데, 조각조각 지는 꽃 푸른 이끼 점 찍는다.

그 누가 달마(達摩)가 수도하던 소림(少林) 소식 끊어졌다 하는가.

저녁 바람 때때로 꽃바람 보내온다.

 

백운암(白雲庵)에서

 

시자 부르는 소리 송라(松蘿) 안개 속에 울리고, 차 달이는 향기 돌 층계에 퍼져온다.

백운산 밑 길로 겨우 들어섰는데, 암자 안의 노스님을 벌써 찾아뵈었네.

 

* 이 시는 우리나라 작설차의 원조인 진각국사가 섬진강 백운산 밑에서 스승인 보조국사 지눌이 시자 부르는 소리를 듣고, 단박에 지은 게송이다.

 

부채

 

예전에는 스승님 손에 있더니, 지금은 제자의 손바닥 안에 있네.

무더위에 허덕일 때 만나게 되면, 맑은 바람 일으킨들 방해 않으리.

 

*여기서 부채는 선풍을 전하는 도구를 의미한 듯. 진각스님이 위의 백운암 게송을 바치니, 보조국사가 매우 기뻐하며 부채를 선물 했는데, 그때 올린 게송이다. 

 

선당(禪堂)에서

 

수도승의 벽안(碧眼)으로 푸른 산을 마주할 때, 한 티끌도 그 사이에 용납 않된다.

맑음이 뼈 속까지 사무치나니, 무엇하러 다시 열반(涅槃)을 찾으랴. 

 

보각국사 일연(普覺國師  一然, 1206-1289)

 

 고려가 몽고에 항쟁하던 시기에, 경북 군위군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찬술한 일연스님은 경주 출신으로 정림사, 선월사, 오어사, 운문사에서 현풍(玄風)을 드날렸다.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100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가 현재 전하며, 그 외 <어록> <게송잡저> <조파도> <대장수지록> <제승법수> <선문염송사원> 등이 있다.

 

삼국유사

 

돌아오지 못한 스님네

 

천축의 하늘은 멀고, 산들은 첩첩, 유학승들은 힘들여 떠났도다.

저 달은 몇번인가 외로운 돛배가 떠남을 보았으나,

구름 따라 돌아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못보았네.

 

이차돈(異次頓)

 

의를 위해 생을 버림은 놀라운 일이거니와, 하늘에서 꽃이 나리고 목에서 흰 젖이 솟았네.

갑자기 한 칼 아래 죽어간 이래, 뭇 사원의 종소리 서울을 진동했다.

 

임종게(臨終偈)

 

꿈에 청산을 다녀도 다리 아프지 않고, 나의 그림자 물 속에 들어도 옷은 젖지 않았다.

 

또 한 수,

 

즐겁던 한 시절 자취없이 가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에라

한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인간사 꿈결인줄 내 인제 알았으니. 

 

원감충지 (圓鑑沖止, 1226-1292)

 

 고려시대 승려로 시호는 원감국사(圓鑑國師).

 19세에 문과(文科)에 장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고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왔다. 41세에 김해(金海) 감로사(甘露寺)에 있다가 원오국사가 입적하매 뒤를 이어 조계(曹溪) 제6세가 되었다.

 원(元)나라 세조(世祖)가 북경(北京)으로 청하여 빈주(賓主)의 예로 맞고 금란가사와 백불(白拂)을 선사하기도 했다.

 시와 글이 동문선에 많이 실렸고, 고려 충렬왕(忠烈王) 18년에 입적, 세수 67세.

 

  원감국사

 

 한가함

 

성질이 깊고 고독해 푸른 산 중턱에 살고 있나니.

세월은 흘러 귀밑털은 흰데, 살아가는 방도는 한 벌 누더기 뿐.

비를 맞으며 소나무 옮기고, 구름에 쌓여 대사립문 닫네.

산꽃은 수놓은 장막보다 곱고, 뜰 앞 잣나무는 비단휘장 같네.

번뇌 다하니 기쁨 슬픔 없고, 찾는 사람 없으니 배웅 마중 적네.

배 고프면 산나물 속잎이 부드럽고, 목마르면 돌 사이 샘물이 맑네.

조용히 향로에서 피는 가는 연기 마주하고, 한가로이 가파른 돌길 살찐 이끼 바라보네.

아무도 내게 와서 묻지를 마소. 일찍이 세상과 맞지 않았으니.

 

섣달 스무날에

 

미친 바람은 집을 흔들고, 눈은  처마에 쌓이는데, 날마다 편히 문 열어놓고 잠이 한창 달았었다.

생각하면 저 성 안의 벼슬아치 무리들은, 닭이 울면 허겁지겁 조회하러 달려가리.

창 밖에는 삭풍(朔風)이 부르짖고, 화로에는 나뭇가지 붉게 타고 있다.

밥 먹고는 옷 입은 채 누워 지나니, 멍청한 한 사람의 게으른 늙은이네.

 

 우서(偶書)

 

부귀하면 다섯 솥의 음식도 가벼이 여기는데, 빈궁하매 한 도시락의 밥에도 만족하네.

모두가 한번 떴다 가라앉는 백년 동안 일이거니, 무엇을 잃었다 하고 무엇을 얻었다 하리.

 

 비 오는 날

 

선방이 고요해 마치 스님도 없는 듯, 비는 나직한 처마 밑의 사철나무를 적신다.

낮잠 자다 놀래 깨니 날은 벌써 저물고, 사미승은 불을 켜러 탑등으로 올라간다.

 

한가한 중에 우연히 적다

 

배고파 밥 먹으니 밥맛이 더욱 좋고

잠 깨어 차 마시자 차 맛이 한층 달다.

땅이 후져 찾아오는 사람 없고

텅 빈 암자에 부처님과 함께 있음이 기쁘다.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니 물 찾기를 쉬고 매일 산 위를 다니면서 산을 찾지 말지어다.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이 서로 비슷하니 전삼(前三)과 후삼(後三)은 묻지 말지어다.

 

 

 

 선시(禪詩) 소개 (제2편)

태고(太古), 나옹(懶翁,), 함허(涵虛)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백운(白雲) 나옹(懶翁)과 함께 여말3가(麗末三家)로 불린 스님의 속성은 홍씨.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이다.

  열세 살에 회암사 광지스님의 제자가 되었고, 1337년 가을에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지해(知解)를 모두 타파하였다.

 1382년 12월 23일 82세 때, 문인들을 불러 “내일 유시에는 내가 떠날 것'이라 말한 후, 목욕갱의하고 단정히 앉아 다음 게송을 읊고 입적했다. 

 

 

 태고 보우스님

 

 임종게(臨終偈)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팔십여년이 봄 날 꿈 속 같았네. 죽음에 다달아 이제 가죽 푸대 버리노니, 수레바퀴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태고암가(太古庵歌)

 

내가 기거하는 이 암자는 나도 잘 몰라. 깊고 깊고 좁고 좁고 은밀하나 옹색함이 없다.

 

*삼각산에 암자를 짓고 붙인 이름이 태고암이다.

 

하늘과 땅을 덮개 삼아 앞뒤가 없고, 동서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구슬 누각, 백옥 전각 비할 바 아니고, 소림사의 풍습과 규정도 따르지 않는다.

팔만 사천 번뇌문을 다 부수니, 저 구름 밖 청산이 푸르구나.

 산 위의 흰구름은 희고 또 희고, 산중의 샘물은 흐르고 또 흐르네

비 오고 개이는 것 번개처럼 빠른데, 누가 있어 저 흰구름을 이해할 것인가.  

천 구비 만 구비 쉬지 않고 흐르는데, 누가 있어 이 샘물 소리를 이해할 것인가.

생각은 내기 전에 이미 틀렸고, 게다가 입은 열려 할 때 난잡하기만 하다.

 

*모든 판단은 인과(因果) 분별에서 오는 것인데, 분별은 마음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볼 수 없는 것이 마치 손가락이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마음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음이 원래 실상(實相)이요, 주(主)도 객(客)도 없는 고로, 실상을 무상(無相)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이는 경(經)에서 얻을 법(法)은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공(空)의 증득이라 하고, 실상을 깨달은 것이라 한다.

 

비 오고 서리 온 봄가을이 얼마인고! 어찌 깊고 한가한 일을 금일에사 알았나.

거칠어도 밥이요 정갈해도 역시 밥이니. 추한 밥 정한 밥, 사람마다 자기 입맛 따라 취하느니,

운문(雲門)의 호떡이나 조주(趙州)의 차(茶) 한 잔도 어찌 이 암자의 무미(無味)의 식사만 하랴.

 

*맛 없는 밥이 진짜 맛 있는 밥이라는 역설로, 태고암의 초탈한 생활을 노래하였다.

 

본래부터 이러함이 옛 가풍이거늘, 누가 감히 그대에게 기특하다고 하겠는가. 

한 오라기 털 끝 위의 태고암, 넓다해도 넓지 않고, 좁다해도 좁지 않다.  겹겹 극락정토 그 속에 감춰 있고, 넘치는 진리의 길 하늘에 곧바로 닿았으니,삼세여래도 모두 모르고, 역대 조사도 얻을 수 없구나.  어리석고 어눌한 암자의 주인공은, 꺼꾸로 행하고, 무궤도 무원칙을 행하며,

청주(靑州)에서 지은 해진 삼베적삼 입고, 송라 그림자 절벽에 기대 서 있으니, 눈 앞에 법도 없고, 사람도 없고, 다만 아침 저녁 푸른 산만 마주하네. 할 일 없이 이 곡을 읊으니, 서쪽 인도에서 온 음률이 분명하도다. 세상에 누가 있어 이 노래에 화답할까, 영산(靈山) 소림사가 부질없이 박수를 치는구나어느 누가 태고 때 줄 없는 가야금 가져와서, 이 구멍 없는 피리 소리에 화답하랴.

그대 보지 못하는가. 태고암의  태고스러운 일은 항상 지금같이 밝고 뚜렷한데, 백천삼매(百千三昧)가 그 안에 있어, 인연따라 모든 사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항시 적적하다.

 

*과거 현재 시간이 지금 이 시간에 있다는 시간의 초월상을 말하고 있다.

 

이 암자는 노승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티끌처럼 많은 부처 조사(祖師)가 풍격을 같이 한다. 

결정코 말하나니, 그대는 의심치 말라. 지혜나 알음알이로 헤아리기 어렵도다. 돌이켜 뒤돌아 보고 비추어봐도 오히려 어둡고 망망하며, 당장 직하(直下)로 떨어져도 자취에 걸리네. 그 까닭 물어봐도 큰 잘못 돌아오고, 여여부동 가만이 있어도 완고한 돌이 되네.'내려 놓아라,  망상 하지 말라'가 여래의 대원각(大圓覺)이니, 오랜 겁 지나면 문호(門戶)를 벗어나는가. 잘못 떨어져 이 길에 머물고 있네.  이 암자는 본래 태고(太古)의 이름이 아닌데, 오늘이 있으므로 태고라 부르네.하나 가운데 일체가 있고, 일체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나를 못 얻어도 항상 분명하여라. 모날 수도 있고, 둥글 수도 있으니, 흐름 따라 빈 것이 채워지는 변화 모두가 깊고 현묘한 진리이다. 그대가 만약 나에게 산중 경계를 물으면, '솔바람은 소슬하고 달빛은 하늘에 가득하다' 하리.  도 닦지 않고 참선도 닦지 않아, 침수향 다 탄 향로에는 연기도 없네.

뼈에 사무치게 새겨진 청빈함이여, 살아 갈 길(活計)은 본래부터 스스로 있었네.

그런대로 그렇게 지내는 거지, 어찌 구구히 태울 향을 구하랴. 

뼈에 사무치게 맑고, 사무치게 가난해도, 살길(活計)은 본래부터 스스로 있네. 한가하면 태평가를 높이 부르며, 쇠소(鐵牛)를 거꾸로 타고 인간계 천계서 노니노라.

아이들 눈에 보이는 것 모두 광대놀이지만, 이리저리 해보지만, 눈과 피부만 피곤하네.

이 암자는 그저 치졸하고 졸망함이 이러하니, 알만한 일을 하필 다시 밝히랴. 

춤을 마치고 삼대(三臺)로 돌아간 후에도, 푸른 산은 여전히 숲과 샘물 마주하네.

 

*이 태고암가를 보고 중국의 선승 석옥화상(石屋和尙)이 “참으로 공겁(空劫) 이전의 소식을 얻은 것으로 ‘태고’라는 이름이 틀리지 않았다. 오래도록 글을 주고 받는 일을 사절해 왔는데, 붓이 저절로 춤을 추어서 말미에 쓰게 된다”며 발문을 써준 것이,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 상권에 수록되어 있다.

 

보제존자(普濟尊者) 나옹(懶翁, 1262-1342)

 

 나옹(懶翁)이란 게으른 어르신(翁)이란 뜻이다. 경북 영해(寧海) 사람으로, 1344년 양주 회암사에서 4년 좌선 후에 깨달음을 얻었고, 1348년 원나라 연경에서 인도 고승 지공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무학대사의 스승이며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였고, 법호가 '대조계 선교도총섭 근수본지 중흥조풍 복국우세 보제존자(大曹溪 禪敎都總攝 勤修本智 重興祖風 福國祐世 普濟尊者)란 긴 이름이다.

 양주 회암사에 무학, 나옹, 지공 세 분의 부도와 비석이 있고, 여주 신륵사에도 나옹스님 사리를 봉안한 부도와 비가 남아있다.

 

보제존자 나옹

 

 토굴가(土窟歌) 

 

  청산림(靑山林) 깊은 골에 일간(一間) 토굴(土窟) 지어놓고, 송문(松門)을 반개(半開)하고 석경(石徑)에 배회(俳徊)하니, 녹양춘삼월하(錄楊春三月下)에 춘풍(春風)이 건듯 불어, 정전(庭前)에 백종화(百種花)는 처처에 피었는데, 풍경(風景)도 좋거니와 물색(物色)이 더욱 좋다.

 그 중에 무슨 일이 세상에 최귀(最貴)한고. 일편무위진묘향(一片無爲眞妙香)을 옥로중(玉爐中)에 꽃아 두고, 적적(寂寂)한 명창하(明窓下)에 묵묵히 홀로 앉아, 십년(十年)을 기한정코 일대사(一大事)를 궁구하니, 종전에 모르든 일 금일에야 알았구나. 

 일단고명 심지월(一段孤明 心地月)은 만고에 밝았는데, 무명장야 업파랑(無明長夜 業波浪)에 길 못 찾아 다녔도다. 영취산 제불회상(靈鷲山 諸佛會上) 처처에 모였거든, 소림굴 조사가풍(小林窟 祖師家風) 어찌 멀리 찾을소냐.

 청산은 묵묵하고 녹수는 잔잔한데, 청풍(淸風)이 슬슬(瑟瑟)하니 이 어떠한 소식인가. 일리재평(一理齋平) 나툰중에 활계(活計)조차 구족(具足)하다.

 청봉만학(千峯萬壑) 푸른 송엽(松葉) 일발중(一鉢中)에 담아두고, 백공천창(百孔千瘡) 깁은 누비 두 어깨에 걸었으니, 의식(衣食)에 무심(無心) 커든 세욕(世慾)이 있을 소냐. 욕정이 담박(欲情談泊)하니, 인아사상(人我四相) 쓸 데 없고, 사상산(四相山)이 없는 곳에 법성산(法性山)이 높고 높아, 일물(一物)도 없는 중에 법계일상(法界一相) 나투었다.

 교교(皎皎)한 야월(夜月) 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듯 올라, 무공적(無孔笛)을 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 중에 갖췄더라.

석호(石虎)는 무영(無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제, 무착영(無着嶺)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慢開)하였더라. 나무 영산회상 불보살(南無靈山會上 佛菩薩).

 

*마이산 비룡대 아래 나옹암(懶翁庵)이 있다. 금당사에서 5백 미터 떨어진 수직 절벽에 위치한 토굴로 나옹스님이 득도한 자연 암굴이다. 

 

 청산은 나를 보고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말없이 살라하네 푸르른 저 산들은. 티 없이 살라하네 드높은 저 하늘은.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세월은 나를보고 덧 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를 보고 곳 없다 하지않네.

번뇌도 벗어놓고 욕심도 벗어 놓고  강 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죽림(竹林)

 

만 이랑의 대나무가 난간 앞에 닿아있어, 사철 맑은 바람 거문고 소리 보내준다.

대나무는 울창하되 하늘 뜻을 통하고, 그림자는 뜰을 쓸되 티끌은 그대로다.

 

산에 사노라니[山居]

 

白雲堆裡屋三間  흰 구름 쌓인 곳에 오두막 세 칸인데

坐臥經行得自閑  앉고 눕고 나댕겨도 스스로 한가하네. 

澗水冷冷談般若  시냇물 졸졸졸 반야경을 설하고

淸風和月遍身寒  맑은 바람 밝은 달빛에 온 몸이 싸늘하다.

 

문이 없다(無門)

 

眼耳原來自沒從 눈과 귀는 원래 자취가 없거늘

* 눈과 귀로 들어온 인식의 허망함.

個中誰得悟圓通 누가 그 가운데서 원통을 깨우칠 것인가. 

空非想處飜身轉 텅 비어 형상 없는 그곳에다 몸을 굴리니

犬吠驢鳴身豁通 개 짓고 나귀 우는 울음 모두가 활통하거니

 

임종게(臨終揭)

 

七十八年歸故鄕  칠십 팔 년 살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니

天地山河盡十方  천지 산하 우주가 다 고향이네.

 

 함허 기화(涵虛 己和, 1376-1433)

 

 세종 때 충주 사람으로 불교, 유교, 도교 포함한 삼교일치(三敎一致)를 주장하였으며무학대사의 수제자였다. 

<원각소(圓覺疎)>, <반야경 오가해설의(般若經 五家解說誼)> 등 저서를 남겼고, 비는 봉암사에 있고, 부도는 가평 현등사에 있다.

'현등사 사적기'에는 스님이 운악산을 지나다가 길을 잃었는데, 흰 사슴이 나타나 폐허가 된 현등사로 인도하여, 거기 오래된 전각과 탑, 쓸만한 큰 나무가 있는 이 절을 중창하라는 불보살의 감응이라 여기고 절을 중건한 후, 왕실 원당을 세웠다고 한다. 강화 전등사 옆 정수사에서, 지금 불가에서 유명한 금강경 서문을 썼다. 그 일대를 함허동천(涵虛洞天)이라 부른다. 

 

함허어록

  

산을 헤아리며(擬山)

 

달빛에 거닐다가 우르러면 산은 높고, 바람 쐬며 귀 기울이면 물소리 차그워라. 도인의 사는 방법 이러할 뿐이거니, 무엇하러 구구히 세상 인정 따르랴.

 

 산중에 사는 맛

 

산 깊고 골도 깊어 찾아오는 사람 없고 왼 종일 고요하여 세상 인연 끊어졌네. 

낮 되면 무심히 산속의 굴에 피는 구름 보고, 밤이 오면 부질없이 중천에 뜬 달을 보네.  

화로에는 피어오른 차 달이는 연기니당상에는 향기로운 전서(篆書) 글씨처럼 꼬불꼬불 피는 연기로다.

인간사 시끄러운 일 꿈에도 꾸지 않고, 단지 선정(禪定)의 기쁨 속에 앉아 세월을 보낸다.

 

세상 밖의 높은 자취

 

거친 음식 누추한 집은 선비의 취미요, 세상 사람이 버린 헌 옷 주워 빨아서 지은 가사장삼과 검은 주장자는 스님의 위엄이다.

다시 기억할만한 사연 있는가? 봄 바람 가을 달에 눈섶 들고 흥미 보일 뿐.

 

산중 취미

 

천자가 타는 옥수레와 금가마가 귀한 것이 아니요, 천자가 거느리는 삼군(三軍)과 즐기는 팔일(八佾)이 영화로운 것 아니다.

가장 좋기는 바위 곁에서 바라보는 공중의 달이요, 누워서 솔바람 소리 들으며 눈으로 경계를 깨닫는 것.

 

 

 

 

선시(禪詩) 소개 (제3편)

보우(普雨), 서산(西山)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09?-1565)

 

 지금 봉은사가 전국 수(首) 사찰로 떠오른 것은, 문정왕후와 선종판사(禪宗判事) 보우스님의 인연에서 비롯된다. 이때 조선에서 다시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봉은사에서 승과가 시행되었다.

이 승과에서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을 발탁했다.

 사명은 선사를 다음처럼 찬탄하였다. '대사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백세(百世)에 전하지 못하던 법을 얻었다. 지금의 학자들이 대사로 말미암아 나아갈 곳을 얻었고 불도가 끝내 끊기지 않았으니, 대사가 아니었더라면 영산(靈山)의 풍류와 소림(少林)의 곡조가 없어질 뻔하였다.'

 스님은 46세에 봉은사 주지를 서산대사에게 맡긴뒤, 청평사에서 7년을 머무셨다. 스님의 저서는 허응당집(虛應堂集) 2권과 나암잡저(懶庵雜著) 등이 있는데, 허응당집은 스님이 23세 때 금강산에서 수행하기 시작한 때부터 임종시까지의 시 620편을 엮은 것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이 교정하고 발문을 썼다.

 

허응당 보우스님

 

진불암(眞佛庵)

 

겹겹 구름 속에 암자가 있는데, 처음부터 사랍문은 달지 않았네.

축대 위 삼나무는 늦푸름을 머금고, 뜨락의 국화송이 저녁 노을 띄었네.

서리 맞은 나무 열매 떨어지는데, 스님은 여름 지난 옷을 꿰매고 있네.

고상하고 한가로움 나의 본뜻이기에, 돌아갈 길 잊은채 입 다물고 완상하네.

 

 산중즉사(山中卽事)

 

승방은 원래 고요한 것이지만, 여름이 되어 더욱 청허(淸虛)하다.

혼자 있기 좋아하매 벗들은 흩어지고, 시끄러움 싫어하매 벗들은 흩어진다.

산 비 그친 뒤 매미의 울음소리, 새벽바람 끝에 솔바람 이다.

긴 봄날에 동창 앞에 혼자 앉아, 아무 마음 없이 옛 글 읽는다.

 

청평(淸平)에서

 

약초 묘목 밟을까 사슴을 싫어하고, 맑은 시내 더럽힐까 뚜꺼비 쫒는다.

이끼 긴 오솔길에 찾는 이 없으니, 세상과 먼 청평(淸平)을 다시 더욱 깨닫겠다.

청평에 머문 뒤로 즐거움이 절로 많아, 일년 내내 지나도록 칭찬 비방 전혀 없다.

때로는 시냇가로 한가히 혼자 나가, 시원히 누더기 벗어 여라(女蘿) 덩굴에 건다.

 

상운암에서 자면서(宿上雲庵)

 

친구 없이 홀로 봄 산 깊숙히 찾으니, 길가의 복사꽃 지팡이에 스치네.

부슬비 내리는 밤 상운암에서 자노라니, 선심(禪心)과 시상(詩想)이 빗 속에 그윽하다. 

 

자원방래(自遠方來)한 벗에게

 

주지 방에 찾는 사람 없고, 봄바람에 혼자 사립문 닫고 있어,

손님 맞은 의자는 티끌에 덮히고, 추녀에 걸린 옷에 구름이 일어난다.

산의 과일은 남의 땀에 맡기고, 밭의 오이는 스스로 살이 쪘는데,

갑자기 천리 밖 벗이 왔나니, 담소의 기쁨이 무르녹았다.

 

후배스님에게 공부하는 법을 보임(示小師等做工勉力)

 

선방에 물뿌리고 청소하는 이는 이 도를 알고자 하는가,

구하는 것이 일찍이 다른 데에 있지 않네.

동쪽 울타리에 국화 심고 밭둑에 채소 심으며,

서쪽 개울에 적삼 빨아 푸른 등넝쿨에 걸어 말리네.

추우면 화로불에 다가가 고요한 선실에서 졸고

더우면 맑은 물 찾아가 푸른 물에 목욕하네.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자신이 천진불인줄 모르고

이 몸 밖에서 부질없이 부처님을 찾네.

 

차시(茶詩)

 

그 누가 나처럼 이 우주를 소요하리. 마음 따라 발길 마음대로 노니는데.

돌 평상에 앉고 누우니 옷깃 차갑고, 꽃 핀 언덕 돌아오는 지팡이 향기롭네.

바둑판 위 한가한 세월은 알고 있지만, 인간사 흥망성쇠 내 어찌 알리.

조촐하게 공양을 마친 뒤, 한 줄기 차 달이는 향기 석양을 물들이네. 

 

산과 나 다 잊어라(山我兩忘) 

 

내가 산이고 산이 나인 이치 사이에 빈틈이 없으니, 누가 산(山)이며 누가 나인가.

내가 산과 다르다고 집착하면 아상(我相)에 떨어지고, 산은 알고 내가 없으면 미망(未忘)에 떨어지리.

곧바로 알음알이 던져버리고, 문득 근본 우주가 하나임을 보아라.

내 눈에 가득 들어오는 모든 것, 동쪽 숲 봄에 흠뻑 취해 선(禪) 삼매에 빠져 있다. 

 

임종게(臨終揭)

 

허깨비가 허깨비 고향에 찾아와서, 오십여년 동안 미친 놀음을 하다가,

인간 영욕사 놀음 다 마치고, 중의 허물 벗고 창창한 하늘로 가노라.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5)

 

 호는 청허(淸虛)이며 오래동안 묘향산에 머물었으므로 서산대사라 칭한다. 법명은 휴정(休靜), 성은 최씨이다. 사명당의 스승이며, 선교 양종판사(禪敎 兩宗判事), 임진란 때는 임금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갔으나, 73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팔도십육종 도총섭(八道 十六宗 都摠攝) 직책으로 대흥사에서 승병을 총지휘 하였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영정을 보면서,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라는 시를 사명대사와 처영대사에게 전하게 하고, 앉은 채로 입적했다. 

 저서로는 문집인 <청허당집> 4권 2책과 경전에서 중요한 구절을 뽑아 후학을 위해 풀이한 <선가귀감>을 비롯, <삼가귀감(三家龜鑑)>, <설선의(說禪儀)> 등이 있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屠)를 세웠고, 해남의 표충사(表忠祠), 밀양 표충사, 묘향산 수충사(酬忠祠)에 제향하였다.

 

서산대사(국립중앙박물관)

 

눈 덮인 들판을 갈 때에는 (踏雪野中去) 

 

눈 덮인 들판을 갈 때에는, 모름지기 어지럽게 걸어가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가 반드시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향로봉 시(香爐峯 詩) 

 

만국의 도성은 바걸거리는 개미집이요, 천하의 호걸들은 우굴대는 초파리 떼로다.

맑고 그윽한 달빛을 베고 누우니, 끝없는 솔바람 그 묘음(妙音)이 즐겁도다.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백발이 되어도 마음은 희여지지 않는다고, 옛사람이 일찍이 말했었지.

내 지금 대낮에 닭 우는 소리 한번 듣고서, 장부의 할 일 다 끝내었네.

홀연히 나를 발견하니, 모든 것이 다 이러하도다.

이제 보니 천언만어 경전들이, 원래는 하나의 빈 종이조각 이었네.

 

두 사람 모두 꿈 속의 사람들이지(三夢詞)

 

주인은 손에게 꿈을 이야기 하고, 손은 주인에게 꿈을 말하네.

지금 꿈을 이야기 하는 두 사람, 그 모두 꿈 속의 사람들이지. 

 

 천계만사(千計萬思)

 

천 가지 만 가지 생각 모두가, 숯불 위에 내리는 한 점 눈송이네

진흙 소가 물 위로 가니, 천지와 허공이 갈라지는구나.

 

가을의 노래(賞秋)

 

원근 가을 풍광 하나같이 기이하니, 한가히 걸으며 석양에 긴 휘파람 부네.온 산에 붉고 푸른 모든 아름다운 빛깔, 흐르는 물, 새들의 울음소리가 그대로 시를 설하고 있네.

 

노수신(盧守愼)에게 행적을 밝힌 글(上完山盧府尹書)

 

갑자기 창 밖에 두견새 우는 소리 들으니, 눈 앞의 청산이 바로 고향이네.물을 길어 오다가 문득 머리를 돌리니, 청산이 무수한 흰구름 속에 있네.

 

사야정(四也亭)에서 

 

 

물은 스님의 눈처럼 푸르고, 산은 부처님의 푸른 머리일세.달은 변치 않는 한 마음이고, 구름은 만 권의 대장경일세. 

 

내은적(內隱寂)

 

두류산에 암자가 하나 있으니, 암자 이름은 내은적이라.산 깊고 물 또한 깊어, 노니는 객은 찾아오기 어렵다네.동서에 각각 누대가 있으니, 자리는 좁아도 마음은 좁지 않다네.청허라는 한 주인이 천지를 이불 삼아 누워서.여름 날에는 솔바람을 즐기고, 누워서 청백의 구름을 보나니.

 

두류산 내은적암(頭流山 內隱寂庵)

 

 

스님 도반 대여섯이 내은암 앞에 집을 지었네. 새벽 종소리와 함께 즉시 일어나고, 저녁 북소리 울리면 함께 자네. 시냇물 속의 달을 함께 퍼다가, 차를 달여 마시니 푸른 연기가 퍼지네. 날마다 무슨 일 골똘히 하는가. 염불과 참선일세.

 

차시(茶詩)

 

 

晝來一椀茶 夜來一場睡  낮이 오면 차 한잔  밤이 오면 잠 한숨

靑山與白雲 共說無生死  푸른 산 흰구름이 생사가 없음을 말하네

白雲爲故舊 朋月是生涯  흰 구름 옛 벗이요 밝은 달은 생애로세

萬壑千峰裏 逢人卽勤茶  만학천봉 산속에서 사람 만나면 차를 드리지

松榻鳴山雨 傍人詠落梅  소나무는 산에 오는 빗소리 울리고, 옆 사람은 매화 떨어짐 읊조린다

一場春夢罷 侍者點茶來  일장춘몽 끝나니, 시자는 차를 다려 오는구나.

 

임종게(臨終揭)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러하다.

 

 

 

선시(禪詩) 소개 (제4편)

경허(鏡虛), 만해(卍海)

 

 경허스님(鏡虛, 1840-1912)

 

 경허 스님은 근대 한국불교를 중흥시킨 선지식이다.

 만해(卍海) 스님은 평하기를  '그의 문(文)은 선(禪) 아님이 없고, 구(句)가 법(法) 아님이 없다' 하였다.

 전주 사람으로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이다. 9세 때 과천 청계사에서 출가하였고, 1880년 서산 연암산 천장암의 작은 방에서 1년 반동안 치열한 참선을 한 끝에 확철대오. 수제자로는 '삼월(三月)'로 불리우는 수월, 혜월, 만공이 있다. 

 개심사 부석사 간월암 등지를 오가다가, 돌연 환속하여 박난주(朴蘭州)로 개명하였고, 서당의 훈장이 되었다. 함경도 갑산(甲山) 도하동(道下洞)에서 1912년 4월 25일 새벽 임종게 남긴 뒤 입적하였다. 나이 64세, 법랍 56세이다. 저서에 <경허집>이 있다.

 

경허선사

 

공림사(公林寺)에서

 

첩첩 산 속 걸어 공림사에 다다르니, 절간은 바로 속세와 다르구나. 층층 봉우리에 푸른 이내 내리고, 향내 짙은 옛 절엔 한낮이 한가하다. 짧은 지팡이 걸고 나 또한 늙나니, 큰 일 이뤘으나 누구와 돌아갈꼬? 시냇물은 경계 밖으로 흐르나니, 아롱진 이끼돌에 추연히 앉아본다.

 

우연히 읊다(偶吟)

 

어느새 석양인가 쓸쓸한 빈 절. 두 다리 뻗고 한가히 잠들었네.

바람소리에 놀라 깨어났나니, 단풍 든 잎이 뜰 안에 가득하네.

시끄러히 떠들음이 침묵만 하겠는가? 어지러히 소란 피움이 잠자기만 못하네.

쓸쓸한 산에 밤도 길어라. 베갯머리에 달빛이 환하네.

저 흰구름은 그 무슨 일로 날마다 이 산으로 날아드는가?

저 티끌세상 나쁜 일 꺼리어 나를 따라 산으로 돌아오는듯,

옳고 그름, 명예와 이익의 길, 마음은 어지러히 미친듯 달려간다.

이른바 이 세상 영웅이란 사내들, 이리저리 헤매며 돌아갈 곳 모른다.

 

 한암스님(漢巖重遠)에게 준 전별사(餞別辭)

 

 나는 천성이 인간 세상에 섞여 살기를 좋아하고 겸하여 꼬리를 진흙 가운데 끌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다만 스스로 절룩거리며 44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우연히 해인정사에서 원개사(遠開士)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성행(性行)은 순직하고 학문이 고명하였다. 함께 추운 겨울을 서로 세상 만난 듯 지냈는데 오늘 서로 이별을 하게 되니, 아침저녁 연기구름, 멀고 가까운 산과 바다. 실로 보내는 회포를 뒤흔들지 않는 것이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서로 알고 지내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진실로 내 마음을 아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되랴’ 하지 않았던가. 슬프다! 원개사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그래서 시 한 수 지어 뒷날에 서로 잊지 말자는 부탁을 하노라.

 

 '북해에 높이 뜬 붕새 같은 포부 변변치 않은 데서 몇 해나 묻혔던가. 이별이란 예사라서 어려울 게 없지만, 뜬세상 흩어지면 훗날 기약은 묘연하구나.'

 

한암스님의 답시(答詩)

 

 

서리 속 국화와 설중매는 이미 졌지만, 어찌 더 오랫동안 모실 수 없을까요?

만고광명(萬古光明) 마음 달에다, 뜬세상  뒷날 기약만 남깁니다.

 

 참선곡

 

  홀연(忽然)히 생각하니 모든 게 꿈 이로다. 만고 영웅호걸 북망산(北邙山)이 무덤이요, 부귀 문장(文章)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소냐. 오호라 이내 몸이 풀 끝에 이슬이요, 바람 속에 등불이라. 

 

 삼계(三界)의 큰 스승 부처님이 이르시대, 마음 깨쳐 성불하여 생사윤회 영원히 끊고, 불생불멸 저 국토(國土)에 상락아정(常樂我淨) 무위도(無爲道)를 사람마다 다할 줄로 팔만대장경 전해온다. 사람 되어 못 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보세. 닦는 길을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큰 줄거리 추려 적어보세.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옷 입고 밥 먹는 것, 사람 만나 이야기 함, 일체처(一切處) 일체시(一切時)에 한없이 밝고 신령스러운 것, 지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래 공한 것이고, 천진(天眞) 면목 (面目) 나의 부처, 보고 듣고 앉고 눕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 한번 깜짝할제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神通妙用) 분명한 이내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疑心)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 이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동 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 말고 깊이 연구하되, 일념(一念)이 만년(萬年) 되게 하여, 자고 먹는 일조차 잊을 지경이 되면, 대오(大悟)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天眞面目) 절묘하다. 아미타불 이 아니며 석가여래 이 아닌가? 젊도 않고 늙도 않고, 크도 않고 작도 않고, 본래 생긴 자기의 영험스러운 빛, 하늘을 덮고 땅을 덮고, 열반(涅槃)의 진실 낙(樂)이 가이없다.

 지옥천당이 본래 공(空)하고 생사윤회 본래 없다. 선지식(善知識)을 찾아가서 분명하고 명확히 인가(印可) 맞아, 다시 의심 없앤 후에 세상만사 망각하고, 인연을 따를 뿐 꺼리낌 없이 지내가되, 빈 배 같이 떠놀면서 인연 있는 중생 제도(濟度)하면, 부처님 은혜 보답함이 아닌가? 

 

 일체 계행(戒行) 지켜 가면 천상인간(天上人間) 복(福)과 수(壽) 얻고, 큰 원력을 발(發)하여서 항시 불학(佛學) 따를 것 생각하고, 대비(大悲)의 마음먹어 가난하고 병든 걸인 괄세 말고, 오온(五蘊)으로 이루어진 색신(色身) 생각하되, 거품같이 보고, 바깥으로 역순경계(逆順境界) 몽중(夢中)으로 관찰하여, 기뻐하거나 성내는 마음 내지 말고, 텅 비고 신령한 이내 마음 허공과 같은 줄로 진실히 생각하여, 여덟 바람과 다섯 욕심, 일체 경계(境界)에 부동(不動)한 이 마음을 태산같이 써 나가세. 

 

 헛튼 소리 우시개로 이 날 저 날 다 보내고, 늙는 줄을 망각하니 무슨 공부 하여 볼까. 죽을 제 고통 중에 후회한들 무엇 하리. 사지(四肢)를 백 줄기로 오려내고, 머릿골을 쪼개는 듯, 오장육부 타는 중에 앞길이 캄캄하니, 한심하고 참혹한 내 노릇이 이럴 줄을 누가 알꼬?

저 지옥과 저 축생에 나의 신세 참혹하다. 백천만겁(百千萬劫) 미끌어지고 넘어져 뜻 이루지 못하니, 다시 사람 몸 받기가 아득하다. 

 

 참선 잘한 저 도인은, 앉아 죽고 서서 죽고, 앓도 않고 선탈(蟬脫)하며, 오래 살고 곧 죽기를 마음대로 자재(自在)하며, 항하(恒河)의 모래알처럼 많은 신통묘용 임의쾌락(任意快樂) 소요(逍遙)하니, 아무쪼록 이 세상에 눈코를 쥐어뜯고 부지런히 하여 보세.

 오늘 내일 가는 것이 죽을 날에 당도하니, 푸줏간에 가는 소가 자욱자욱 사지(死地)로세.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깐(寸陰)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放逸)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 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하루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고?

무명(無明) 업식(業識) 독한 술에 혼미하여 깨닫지 못하고 지내다니, 오호라 슬프도다. 타일러도 아니 듣고 꾸짖어도 조심 않고, 심상(尋常)히 지내가니, 혼미한 이 마음을 어이하야 인도할꼬?

 

 쓸데없는 탐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공연히 일으키고, 쓸데없는 허다분별(許多分別) 날마다 어수선하고 소란하니, 우습도다 나의 지혜 누구를 한탄 할꼬? 지각없는 저 나비가 불빛을 탐하여서 제 죽을 줄 모르도다.

내 마음을 못 닦으면 계행(戒行) 복덕(福德) 도무지 허사로세. 오호라 한심하다.

 

 이 글을 자세히 보아 하루에도 열두 때며, 밤으로도 조금 자고 부지런히 공부하소.

 이 노래를 깊이 믿어 책상 위에 펼쳐 놓고, 시시 때때 경책(警策)하소. 할 말을 다하려면 바다물을 먹물로 써도 다 말할 수 없으니 이만 적고 끝내오니, 부디부디 깊이 아소. 다시 할 말 있사오니 돌장승이 아이 나면 그때에 말 할테요.   

 

 오도송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無鼻孔) 없다는 말 듣고,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 집임을 몰록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열반송

 

마음의 달(心月)이 홀로 둥그니, 빛(光)이 만상을 삼켰구나

빛의 경계를 모두 잊으면, 다시 이 어떤 물건인고?

 

사육언(四六言)

 

누가 옳고 뉘 그른가 꿈 속의 일인 것을. 북망산 한번 가면 누가 너며 누가 나랴?

 

 

만해 한용운( 卍海,韓龍雲,1879~1944)

 

 홍성 사람으로, 용운은 법명이며 법호는 만해(卍海).

 18세 때 1905년 백담사에서 김연곡에게 득도. 1917년 12월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진리를 깨우쳤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1931년 김법린 최범술 김상호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44년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며 북향으로 지은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집에서 66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논저로는 불교의 교리와 승단의 제도와 의식, 사찰의 조직, 승려의 취처 문제까지 다룬 조선불교유신론과, 유마힐소설경강의(維摩詰所說經講義),〈조선독립이유서>가 있다.

 

한용운 스님

 

 산가(山家)의 흥취

 

개울가 두세 채 누구의 집인가. 낮에도 사립문 닫아 아지랑이 막았네.

돌에 앉아 바둑 두니, 대숲에 바둑돌 놓는 소리. 구름 속에 잔 들어 꽃 보며 마시네.

 십년에 한번 나들이 어찌 꺼릴 것인가. 만사가 표주박이요, 공(空) 역시 좋네.

봄 수풀 황혼에 앉을만 하나니, 만산 신록 속에 나무꾼의 풀피리.

 

가을 밤 비

 

선(禪)의 맛은 물인듯 담담하고, 향불 다시 피우고 밤도 깊으려는데, 오동 잎새마다 쏟는 급한 가을비 소리, 텅 빈 창가의 옅은 꿈이 추워라.

 

한가히 읊음

 

중년에서야 세월의 아득함 알고, 산을 의지해 따로 집을 지었다.

섣달을 지나서는 잔설(殘雪)의 시를 쓰고, 봄을 맞아서는 꽃들을 논한다.

빌어오려면 열개 돌도 적고, 없애버리려면 한 점 구름도 많다.

마음이 거의 반이나 학이 됐나니, 이 밖에 할 일은 좌선 하는 일이다.

 

매화

 

매화가 어디 있느냐. 눈 쌓인 강촌에 많다.

금생(今生)에 차그운 얼음의 뼈, 전생(前生)에는 백옥(白玉)의 혼.

맵시는 낮에는 기고(奇古)하고, 정신은 밤에도 맑다.

철적(鐵笛)소리 멀리멀리 흩어지는듯, 따스한 날 선방이 향기롭다.

한 봄인데도 매화의 시(詩)는 차그웁고, 긴 밤에 술잔만 따스하다.

백매(白梅)는 왜 달빛을 띄느냐. 홍매(紅梅)는 아침 햇볕에 더욱 붉고녀.

그윽한 선비가 홀로 즐기나니, 시린 세상이라고 뭉닫아 걸지 않았다.

강남의 어지러운 일일랑 부디 매화에게 말하지 마소.

인간세상에 지기(知己)가 적거니, 매화와 상대하여 술잔을 기울이네.

 

먹구름 걷히고 외로운 달 뜨니

 

먹구름 걷히고 외로운 달 뜨니, 차거운 달빛 먼 나뭇가지 뚜렷히 비추네.

학이 날아간 빈 산에 꿈 마져 없는데, 깊은 밤 누군가 잔설 밟고 가는 소리.

 

나룻배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은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님의 침묵 (沈黙)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끝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의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에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남아가 이르는 곳은 도처가 다 고향이다(男兒到處是故鄕)

 

남아가 이르는 곳은 다 고향이건만, 오랜 나그네 되어 고향 땅 생각나네.

한소리 질러 산천세계 울리고 나니, 펄펄 날리는 흰눈 속에서 복숭아꽃 편편히 날리네.

 

男兒到處是故鄕

 

 

선시(禪詩) 소개 제5편/ 영호(映湖,), 구하(九河), 만공(滿空).

 

 석전 영호(石顚 映湖, 1870-1948)

 

 정인보(鄭寅普)는 영호스님을 ‘계행(戒行)이 엄정(嚴正)하신 분’으로 회고했고, 최남선(崔南善)은 ‘통철한 식견으로 내경(內經)과 외전(外典)을 꿰뚫어 보신 분’으로 회고했다. 이광수, 이능화, 오세창, 홍명희, 안재홍, 등 그 시대를 대표했던 지성들과 교류했고, 1926년 스님이 계시던 동대문 밖 개운사 에는 서양화가 고휘동, 동양화가 김은호, 문인 이병기, 이광수, 조지훈, 신석정, 김동리, 모윤숙이 출입했다.

 서정주는 항일 학생 운동으로 중앙고보에서 퇴학 당하고 방황하던 자신을 중앙불교전문학교 제자로 받아준 스님을, ‘자비로운 은사이자 또 한 분의 아버지였다’고 술회했다.

 청담, 운허, 만암, 경보스님이 스님 제자이며, 백양사 서옹, 성륜사 청화스님이 만암스님의 제자이니, 모두 다 영호스님 법맥을 이어받은 분이다.

 전북 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세 때 위봉사(威鳳寺)의 금산(錦山)스님에게 출가하였고, 법호는 영호, 법명은 정호(鼎鎬), 시호(詩號)는 석전(石顚)이다. 세속에서는 박한영(朴漢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48년 4월8일 세속 나이 79세, 법랍 61세에 내장사에서 입정하였다.

 600여수의 한시를 모은 석전시초(石顚詩抄), 석림수필(石林隨筆), 석림초(釋林草), 정선치문집설(精選緇門集說)이 있다.

 

 

영호선사

 

백두산에 올라

 

曉日天池浴 천지에서 몸을 씻고 솟아나는 새벽 해

虹霓斷復連 무지개는 끊어 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光風吹瀨急 햇살 실은 바람이 급한 여울처럼 불어오더니

蕩破西峯煙 서쪽 봉우리의 안개를 몽땅 쓸어버리는구나.

 

*스님의 백두산행에 수행한 최남선은 여기서 스님으로부터 단군고사(檀君古史)와 동명고강(東明古疆), 한겨레 강역(疆域)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후일 <불함문화론>을 썼다.

 

해인사에서(海印寺感懷)

 

天寒木落梵鐘稀  날은 차고 낙엽 지는데 범종소리는 잦아들고

遠客蕭然向晩歸  먼 길 나그네는 호젓하게 느지막이 돌아가네.

雪後靈岑多戍削  눈 온 뒤 영봉에는 삭막한 기운이 감돌고

煙中庵樹却依微  안개 속 암자의 나무도 희미하게 보이는구나.

名泉慣我留飛屧  좋은 샘물은 나와 친하여 가는 발길 멈추게 하고

法苑無人感落暉  산사에는 사람이 없어 저녁 햇살만 느껴지네.

悵望白雲如我嬾  게을리 떠가는 흰 구름을 초창히 바라보며

澹忘石翠已霑衣  돌이끼 옷에 물든 줄 까마득히 몰랐네.

 

대흥사에서

 

문에 다다르자 그윽한 향기 이상히 여겼는데, 연못의 붉은 연꽃이 막 피려 함이었네. 맑음과 진(眞)에 접하였으며, 묘법(妙法)에 통한, 티끌을 떠난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뿐이네.

 

불국사에서

 

蕭條今佛國  이제 불국사가 쓸쓸하다만

在今最神雄  그래도 이 땅의 웅장한 가람일세.

幢影侵蹊曲  당간의 그림자는 굽이굽이 뻗었고

林暉背墖紅  숲 속 햇살 탑 너머 붉게 어렸네.

經疎僧語硬  독경 소리 다하자 법어 우렁차고

夕近鍾飯空  저녁이 가까우니 범종 소리 공중을 채운다.

霜後中庭菊  서리 내린 뒤뜰에 핀 국화꽃

獨凌衰俗風  홀로 속풍 쇠함을 능멸하노니.

 

송광사에서

 

내 벗 금봉스님이 20여 년 전에 금릉종의 매화 몇 그루를 구해, 조산의 천불전 앞과 대승암의 누대 곁에 손수 심었다.

꽃은 지금 한창 무르녹게 피고 제비들은 재잘거리지만, 그는 세상 떠난지 이미 오래다.

나는 아직도 떠도는 몸으로 여기 왔다. 매화는 웃지마는 고인은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꽃 앞에 우두커니 그 감회가 자못 깊다.

 

구하스님(九河, 1871-1960)

 

 구한말 울산에서 태어나 일제시기를 지나 대한민국 초기 어려웠던 시기에 통도사를 이끌어오신 스님이다. 주지 재임시에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 김구, 이승만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으며, 서예가들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명필이었다. 만년에 귀가 어두워 문하생들이 인사를 하면, '시시한 세상 이야기는 안 듣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고 하였다.

 

구하스님

 

선원잡지(禪院雜誌) 권두언

 

참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참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성월당(惺月堂)에게

 

시방(十方)의 *박가범(薄伽梵)이 한 길로 열반문에 들었거니와, 오늘 성월당도 또한 그런가, 그렇지 아니한가. *삼독(三毒)이 왔다가 삼독이 갔을 뿐.

 

*성월당은 범어사를 선찰로 개창한 홍진선사를 말한다.

 

*박가범이란 "자재(自在), 치성(熾盛), 단엄(端嚴), 명칭(名稱), 길상(吉祥), 존귀(尊貴) 여섯가지 덕을 성취하여 생사(生死)의 흐름을 뛰어넘은 분.

 

*삼독이란 탐(貪) 진(瞋, 분노) 치(痴, 어리석음)를 말한다.

 

부채

 

종이에 종이 없고, 대에 대가 없는데, 맑은 바람은 어디서 나오는가? 종이가 공(空)한, 대도 공(空)한, 그곳에 맑은 바람이 스스로 오고가네.

 

오도송

 

心塵未合同歸宿 五體投空空歸依 (마음에 티끌이 따로 없어 같이 존재하고, 오체를 공중에 던지고 함께 귀의한다네)

 

*오체란 사람의 머리와 두 팔 두 다리.

 

만공스님(滿空, 1872-1946)

 

 만공은 법호이다. 법명은 월면(月面). 전북 태인에서 고종 8년(1871) 3월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 성원(泰虛 性圓)스님을 은사로, 경허 성우(鏡虛 惺牛)스님을 계사로 득도했다. 경허 스님을 좇아 서산 부석사와 부산 범어사 계명암 선원에서 정진했는데, 통도사 백운암에서 정진하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만공스님

 

 비로봉에서

 

이천구백삼십사년 가을에 월면(月面)이 하늘에 올랐다.

비로봉 곡대기에 빛을 내쏘고, 동해에 빛의 도장을 찍는다.

 

자화상

 

나는 너(汝)를 여위지 않았고, 너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너와 내가 나기 전에는, 알지 못해라 이 뭣고(是甚磨)?

 

오도송

 

空山理氣古今外 (빈 산의 이치가 다 옛과 지금 밖이니)

白雲淸風自去來 (흰구름 맑은 바람 예부터 스스로 왔도다)

何事達摩越西天 (달마대사는 무슨 일로 서천을 넘어왔는가)

鷄鳴丑時寅日出 (닭은 축시에 울고 해는 인시에 뜨는구나)

 

전법게(傳法偈, 후계자에게 법을 전함) 

 

雲山無同別 (구름과 산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고)

亦無大家風 (역시 대가의 기풍도 없는 것)

如是無文印 (이와같이 글자 없는 인을)

分付惠菴汝 (혜암 너에게 주노라)

 

 

 

선시(禪詩) 소개 (제6편)

한암(漢岩), 효봉(曉峰), 경봉(鏡峰).

 

 한암스님(漢岩, 1876-1951)

 

 한암은 경허스님의 제자다. 강원도 화천 출신으로 1897년 금강산 장안사에서 출가하였다. 24세 때에 성주 청암사에서 경허스님 <금강경> 설법을 듣다가, ‘모든 상 있는 것이 허망하니,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즉 여래를 본 것이니라. (凡所有相 皆是虛忘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는 구절에서 개안(開眼)했다. 

 37세 때 맹산 우두암에서 확철대오, 1921년(46세) 건봉사 조실로 추대되었고, 1923년(48세) 봉은사 조실로 추대되었다.

 50세 가을, '내 차라리 천고(千古)에 자취를 감춘 학(鶴)이 될지언정 춘삼월에 말 잘하는 앵무새는 배우지 않겠노라'는 말을 남기고 오대산 상원사로 이거, 1951년 3월 22일  세수 75세, 법랍 54세로 좌탈입망(坐脫立亡) 할 때까지 산문을 나오지 않았다.

 제자로 탄허, 보문, 난암이 있다.

 

* 일화

 

 

 경성제대(京城帝大) 교수로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명승이던 사또오가 월정사로 한암 스님을 찾아 뵈웠을 때다. 급히 한암 스님이 계시는 상원사(上院寺)로 사람을 보내어 월정사로 내려와 사또오를 만나라고 전하니, 김장 준비 울력을 하던 스님이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할 수 없이 사또오 교수가 상원사로 올라갔다.

 사또오 교수가 인사를 올리고,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대의(大義)입니까?' 하고 물으니, 스님은 묵묵히 놓여있던 안경집을 들어 보였다.

 사또오가 또 물었다. '스님은 대장경과 모든 조사어록을 보아오는 동안 어느 경전과 어느 어록에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까?' 그러자 사또오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 보면서 한말씀 하셨다. '적멸보궁에 참배나 다녀오게.' 

 이에 사또오가 또 물었다. '스님께서는 젊어서 입산하여 지금까지 수도해 오셨으니, 만년의 경계와 초년의 경계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그러자 스님은 '모르겠노라.'고  잘라 답했다.  

 이에 사또오가 일어나 절을 올리며, '활구법문(活句法門)을 보여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고 말하자, 사또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마디 하셨다. '활구라고 말하여 버렸으니 이미 사구(死句)가 되어버렸군.'

 사또오는 이때 상원사에서 3일을 머물다 돌아갔다. '한암이야말로 일본에서 찾을 수 없는 큰스님'이라고 극구 칭송했다.

 

오도송(悟道頌)

 

*35세 때 평안도 맹산군 도리산에 있는 우두암에서 홀로 참선수행하던 중,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가 홀연 큰 깨달음을 얻고, 다음 오도송을 읊었다. 

 

부엌에서 불 지피다 연히 눈 밝으니, 이로부터 옛길이 인연따라 분명하네.

만일 누가 달마스님이 서쪽에서 오신 뜻을 나에게 묻는다면, 바위 밑 샘물소리 젖는 일 없다 하리. 

 

 

두번째 오도송

 

 

脚下靑天頭上巒 다리 아랜 푸른 하늘이고 머리 위는 땅

本無內外亦中間 본래 안과 밖은 없고 중간도 역시 없도다

跛者能行盲者見 절름발이가 걸을 수 있고 장님이 앞을 보니

北山無語對南山 북쪽 산은 말없이 남산을 대하고 있도다.

 

 

효봉스님(曉峰, 1888-1966)

 

 

 

  스님은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나와 조선인으로는 최초로 판사가 되었다.

 평양 법원에서 근무하다가 자신이 ‘사형선고’ 내린 것에 회의를 품고 가출, 엿장수로 변신하여 3년여를 떠돌다가, 38세에 금강산 신계사 보문암에서 석두화상을 은사로 삭발하였다. 

 ‘엿장수 중’, ‘판사 중’, ‘절구통 수좌’, 등 별명이 있다.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은, 수행을 했다 하면 절구통처럼 꼼짝하지 않고 철저히 했으므로 붙혀진 별명이다.

 6.25 때까지 해인사 방장으로 계시다가, 1966년 10월 15일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에서 입적(入寂)하니, 세수(世壽) 79세, 법납(法臘) 42세다. 제자로 구산, 탄허, 경산, 성수, 법정스님이 있다.

 

 

 

효봉스님

 

 

 

법어(法語)

 

 

사람의 머리는 날마다 희어지고, 산빛은 언제나 푸르러 있다.

사람과 산을 모두 잊어버리면, 흰 것도 푸른 것도 없네.

천만번 이리저리 다듬고 화장한들, 어찌 그 천진의 본래 모습만 하랴.

뿔 난 사자는 발톱이 필요없고, 여의주 가진 용은 그물에 안 걸리네.

만사를 모두 연분에 맡겨두고, 옳고 그름에 아예 상관하지 말아라.

먕녕된 생각이 갑자기 일어나거던, 곧 일도양단(一刀兩斷) 하라.

 

 

게송(揭頌)

 

 

一步二步三四步 不落左右前後去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네 걸음 좌우에도 전후에도 떨어지지 말고

若逢山畵水窮時 更加一步是好處   산이 그림 같고 물이 막다른 곳에 이르러,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 곳이 좋은 곳이네

 

오도송(悟道頌)

 

 

海底燕菓鹿抱卵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낳고

火中蛛室漁前茶  타는 불 속 거미집엔 고기가 차 달이네

此家消息誰能識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능히 알리오

白雲西飛月東走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 달리네. 

 

임종게(臨終偈)

 

吾說一切法 都是早抭悊  내가 말한 모든 법은 다 군더더기

苦問今日事 月印於千江  궂이 오늘의 일을 묻는다면, 달은 천강에 비치네

 

 *입적 전에 시봉들이 '스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남기시렵니까?" 하니 "나는 군더더기 소리 안할란다. 이제껏 한 말들도 다 그렇고 그런 소린데……' 하며 어린애처럼 웃었다고 한다.

 

 

 경봉스님(鏡峰, 1892-1982)

 

 

 속명은 김용국(金鏞國). 호는 경봉(鏡峰), 시호(諡號)는 원광(圓光). 밀양 출신이다.

 15세 되던 해 모친상을 겪고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16세때 양산 통도사의 성해(聖海)를 찾아가 출가했다. 해인사 퇴설당(堆雪堂),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석왕사(釋王寺) 등 선원을 찾아다니며 공부한 후, 통도사 극락암으로 자리를 옮겨 3개월 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정진하다가, 1927년 11월 20일 새벽에 방안의 촛불이 출렁이는 것을 보고 깨달아 다음 게송을 지었다. 

 

我是訪吾物物頭  내가 나를 바깥 온갖 것에서 찾았는데

目前卽見主人樓  눈앞에 바로 주인공이 나타났도다

呵呵逢着無疑惑  하하 이제 무얼 만나도 의혹 없으니

優鉢花光法界流 우담바라 꽃빛 광명법계에 흐르는구나

 

저서로는 법어집 법해(法海), 속법해(續法海)와 한시집 원광한화(圓光閒話), 유묵집 선문묵일점(禪門墨一點)이 있다.

1982년 입적할 때 명정스님이 '스님 떠나신 후 뵙고싶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묻자, '야반삼경에 문빗장을 만져보거라'라는 화두(話頭)를 남겼다.

 

 

경봉스님

 

매화

 

逈脫根塵事非常 뿌리부터 티끌까지 모두 철저히 멀리 벗어나려면

緊把繩頭做一場 고삐를 바짝 잡고 한바탕 일을 치러야 하네

不是一番寒徹骨 매서운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던들

爭得梅花撲鼻香 매화가 어찌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통도사 하면 매화가 유명하고, 매화하면 ‘매서운 추위가 한번 뼈에 사무치지 않았던들 매화가 어찌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라고 읊은 경봉스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허수아비

 

 

창문 밖에 한 뙈기 콩밭이 있는데, 산새와 산짐승이 침해하기 때문에 마른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밭 가운데 세웠더니, 많은 산짐승들이 사람이라 의심하여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날 밤에 소가 밭에 들어가 콩과 허수아비를 의심없이 다 먹어버렸다.

그래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시를 지었다.

 

참소식

 

달빛은 구름과 어울려 희고, 솔바람 소리는 이슬에 젖어 향기롭다.

좋구나, 이 참소식이여! 머리를 돌려 자세히 보라.

 

 

눈으로 직접 보는 거기에 도가 있다

 

 

밥과 떡은 물과 함께 희고, 감과 대추는 붉다.

상에 채린 음식 빛은 노랗고 검고 또 푸르기도 하다.

형형색색의 물건은 각기 육미(六味)를 갖췄고, 모두 입 안에 들고나면 돌아간 흔적 없다.

바람은 차고, 얼음은 옥과 같고, 눈은 내리는데, 매화는 향기를 뱉네.

티끌세상의 수행하는 자들이여, 이 좋은 풍경과 빛을 잘 보라.

 

오도송(悟道頌 1927년)

 

천지를 삼키니 큰 기틀이로다. 돌 토끼 학을 타고 진흙 거북 쫓아가네.

꽃 숲엔 새가 자고 강산은 고요한데, 칡덩굴 달과 솔바람 뉘라서 완상하리.

 

열반게(涅槃偈)

 

 

身在海中休覓水         몸이 바다 가운데 있으니 물을 찾지 말고  

日行嶺上莫尋山         하루 하루 고개 위 산을 찾지 말지어라   

鶯吟燕語皆相似         꾀꼬리 울음과 제비 지저귐 모두 비슷하니  

莫問前三與後三         지나간 삼 일과 돌아올 삼 일 묻지 말게나

 

 

*일화

 

 

스님이 기거하던 극락암 앞 약수터에 이런 글이 있다.

'이 약수는 영축산의 산 정기(精氣)로 된 약수이다. 나쁜 마음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으로 먹어야 병이 낫는다. 물에서 배울 일이 있으니, 사람과 만물을 살려주는 것은 물이다. 갈 길을 찾아 쉬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물이다. 맑고 깨끗하며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는 것은 물이다. 넓고 짙은 바다를 이루어 많은 고기와 식물을 살리고 되돌아 이슬비가 되나니, 사람도 이 물과 같이 우주 만물에 이익(利益)을 주어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자살하려던 많은 중생들이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 검소

 

 스님이 어느 날 법상에 올라 다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사찰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한 수좌가 보자니까, 살림을 맡고 있는 원주스님이 매일 밤 자정쯤 되면, 아무도 모르게 무엇을 끓여서 혼자만 먹는다. 그래 수좌가 조실스님께 이 사실을 일러바쳤다.

조실스님이 그날 밤 숨어서 지켜보고 있노라니, 원주스님이 한밤중에 혼자 무엇을 끓여 먹는다. 그래 ‘너 혼자만 먹지 말고 나도 좀 먹어보자’ 했더니, 먹던 것을 조금 나누어 주는데, 먹어보니 냄새가 고약해서 먹을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음식이냐?’ 고 물었더니, ‘공양주들이 누룽지와 밥풀 아까운줄 모르고 하수도에 버리니, 그걸 주워다가 끓여먹는 것입니다’하는 것이었어.

 그래 선문의 규범에 이르기를 '쌀 한 톨이 땅에 떨어져 있으면 나의 살점이 떨어져 있는 것 같이 여기고, 한 방울의 간장이 땅에 떨어지면, 나의 핏방울이 떨어진 듯이 생각하라'고 이른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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