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 봄
김창현
해마다 오는 봄이지만 세월이 갈수록 봄이 짧고 아쉽게 느껴진다. 개나리 진달래가 봄을 열자마자 목련꽃 지듯 봄날은 간다. 낙화에서 인생 무상을 느낀다. 매년 친구 부부와 매화 보러 섬진강이나 지심도 여행을 했었다. 올해는 집안 친척 일도 있고해서 아내와 진주성 봄을 구경하고 왔다.
千客萬來 써붙인 중앙시장 제일식당 해장국으로 배를 채우고 나와, 고향의 새벽 시장을 구경했다. 산에서 뜯어온 돈나물 고사리 두릅 당귀는 싱싱하고, 일곱마리에 5천원하는 남해 갈치와 오십년 전에 먹던 개발과 해삼 보니 우선 눈이 반갑다. 순박하면서도 활기찬 고향 사람들도 반갑다. 빨간 진달래 꽃잎을 함티에 담아놓고 파는 할매 모습도 그렇고, '이거 묵우모 무루팍이 튼튼해진다'는 낯선 쇠무릅팍 뿌리를 파는 고향 아줌마 투박한 사투리도 그랬다. 어쩌면 감자를 그렇게 분이 하얗고 푸실푸실 먹음직하게 삶았을까. 옥수수는 또 어떻게 그렇게 크고 먹음직하게 삶았을까. 다시 고향에 돌아와 매일 아침 이렇게 싸고 푸짐한 시장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걸어서 촉석루에 가니,평양 浮碧樓와 경치로 쌍벽을 이루는 촉석루 아래에 진주를 배경으로 쓰여진 최초의 시가 적혀있다. 고려 때 진주 목사 김지대가 상주 목사 최자에게 보낸 시다.
'작년에 자네가 진주 목사로 떠나는 나를 전송해주더니만,
금년에 당신도 태수가 되었구려.
상주의 시내와 산도 신선의 고을 같지만,
진양의 풍월도 선향이라 이를만 하네.
비록 두 고을의 거리가 멀어서 추석에 만나자는 약속은 어겼으나,
이번 중양절에는 만나서 국화주를 마시도록 약속하세.'
'하모! 그렇지.진주가 풍월의 고장에다 신선의 땅이고 말고!'
나는 속으로 요즘 진주 시장 쯤 될 그분의 운치에 한없는 공감을 느꼈다.
신발 벗고 누각에 오르니, 강 건너 망진산은 울긋불긋 벚꽃동산이고, 義岩으로 내려가는 절벽에 피어난 야생 복숭아꽃은 선명한 분홍빛이 너무나 아름답다. 두보 식으로 표현하면, 강이 푸르니 꽃 더욱 붉다. 옥같은 푸른 강물을 배경으로 발길 닿기 어려운 그 절벽에 누가 일부러 복숭아나무를 심었을리는 없고, 절로 피어난 것이 또한 의미심장하다. 꽃에서 논개의 꽃다운 모습이 재연되어 온다.
잠간 근처 나무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촉석루 아래 모과나무는 조경수로는 둘도없이 잘 생기고 가지의 곡선이 멋졌지만 좀 그렀다. 하필이면 못생긴 과일의 대명사가 모과 아니던가. 잘못하면 指水門 너머 義妓祠에 안치된 논개의 꽃다운 영정에 못생긴 모과 이미지 덧씌워질까 두렵다. 논개의 절개는 烏竹과 매화처럼 차겁고 의연하고,꽃다운 모습은 홍도화나 목백일홍처럼 붉다며, 그런 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었어야 하지않았을가 하고 생각해보았다. 고태미 가득한 석류나무 한그루 있어 '아리땁던 그 아미 높게 흔들리우며,그 석류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수주 변영노의 시를 잠시 외워보았다.
서장대 가는 길 성벽 옆 포구나무 느티나무 느름나무 거대한 나목은 새잎이 돋고 있었다. 그 잎은 초봄의 푸른 하늘에 파릇파릇 한방울씩 물감을 풀고 있었다. 바쁘던 시절 타향에서 고향의 이 거대한 노거수 생각하기 그 몇번이던가. 깔끔히 정돈된 길에 심어진 무궁화나무들도 눈여겨 볼만했다. 수형을 분재처럼 정성들여 가꿔놓아 예사 정성이 아니다. 화와이의 상징 하이비스커스꽃과 사촌인 무궁화다. 알다시피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무궁화다.이꽃을 행주대첩 한산대첩과 함께 임란의 삼대 대첩지인 진주성에서 여름 석달 내내 볼 수 있게한 배려가 참 좋다. 그 곁에 임란 때 거북선과 진주성 전투에서 사용했다는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이 놓여있다. 포의 사정거리가 대략 천미터란다. 따닥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바다에선 거북선의 이 총에 당하고 육지에선 진주성에서 또한번 맛을 보았다. '요시 너희 진주 놈들 나중에 꼭 한번 보자.'왜는 절치부심하엿을 것이다. 나중에 후퇴하면서 전 병력을 집결해 진주성을 공략했다. 이때 진주 7만 관민은 죽음으로 항전하여 사내의 기개를 과시했고, 여성인 논개는 왜장을 끌어앉고 남강에 투신하여 천추에 꽃다운 행적을 남기며 임란의 끝을 장식했다.
마침 깔끔하게 잘 정리된 길로 떨어지는 붉은 동백꽃 한송이가 있었다. 나는 그 꽃을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진주성은 동백꽃 한송이도 충혼의 전설을 안고있다. 능선에 연분홍 진달래꽃 흐드러지게 핀 서장대에 오르니, 간결하고 단아한 隱樵 정명수님의 西將臺 현판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아버님 임종시 반야심경을 써가지고 그 노구에 안양까지 찾아오셨던 분이다. 푸른 보리밭으로 덮혔던 신안동 들판은 이제 현대 한보 등의 아파트로 덮혔고, 어린 시절 내가 다이빙 하고 놀던 당미 언덕은 그 아래 초록 봄물만 넘실거린다. 소년은 가고 이제 칠순 바라보는 백발 나그네 홀로 서장대에 선 것이다.
담장 골기와 보수 공사 중인 호국사 옆으로, 차나무와 맥문동 심은 언덕길 따라, 진주 박물관 뜰에 들어서니, 버스 대절하여 온 인근 초등학교 아이들이 웃고 뛰어다닌다. 나도 저들처럼 웃으며 뛰놀던 때가 있었다. 눈 들어 다시 한번 대숲 푸르던 남강변을 한참이나 둘러보았다. 충절의 고장, 대숲이 아름답던 진주다. 봄은 돌아오고 꽃은 다시 피건만 대숲은 초라해졌고, 옛친구들 소식은 가물가물하다. 문득 가슴이 몽클하였다. 물결에 몸 맡긴 푸른 남강 위 돚단배 하나가 나처럼 외로워 보여서 였다.(2010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