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나무 향기 가득하던 계림 여행
진작부터 계림(桂林)은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여행사는 중국에서 볼만한 경치는 장가계와 계림인데, 장가계는 남성적이요, 계림은 여성적이라 말해왔다. 장가계는 이미 가 본 곳이고, 뽀죽한 산봉오리들이 강변에 우뚝우뚝 솟은 계림은 언제 가보리라 생각해왔다.
그런데 칠순을 맞아 고교동창들이 단체로 계림에 간 것이다. 여행의 묘미는 누구와 가느냐에 있다. 일행이 고교동창들이라 최고 파트너라 할만하다. 환갑 때 백두산, 그후 대만 다녀 온 후, 세번째 단체 여행이다.
23일 밤, 인천공항서 비행기에 올라 계림 가면서 이태백의 장진주(將進酒)란 시를 생각했다.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천상에서 내려와, 세차게 흘러 바다에 이르러 다시는 돌아오지 못함을. 또 보지 못하는가. 높은 집 사람이 거울 속 백발을 슬퍼함을.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카락이 저녁에는 눈 같이 희어졌네. 인생은 모름지기 뜻을 얻었을 때 기쁨을 함께 누려야 할지니, 친구인 잠부자 단구생이여! 술잔을 올리니 그대는 부디 거절하지 마시라.'
이제 우리 머리카락이 백설처럼 흰 지금 그 시가 더욱 공감갔다.
새벽 1시에 호텔에 도착하였는데도 아침 모닝콜 이전에 1층 로비에 벌써 다들 내려와 있다. 영감들이 대개 잠이 없다.
나는 계림에서 무엇을 보고가나 미리 생각해둔 것이 있다. 첫째가 산수(山水)요, 둘째는 골동품 이요, 세번째는 인심이다. 중국은 하나의 거대한 골동품 시장이다. 가는 곳 마다 도자기와 산수화다. 이건 모르면 비지떡이요, 알면 보물이다. 고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또 계림은 우리나라 무주구천동 같은 곳이라 소수민족의 순박한 인심도 볼만한 것이다.
멀리 갈 것 뭐 있는가. 우선 로비의 대형 도자기부터 찬찬히 살펴보았다.
산은 구름에 덮혀있고, 암봉에는 폭포가 걸려있다. 냇물에는 다리가 놓여있고, 다리 위에는 산에 숨은 은자가 걸어가고 있다. 그 옆에 파초가 자라는 작은 초옥이 있다. 유심히 보느라면, 호텔 문 밖 나서기 전에 벌써 산수화 속에 든다.
창 밖의 정원도 볼만하다. 장방형 연못엔 비단잉어가 헤엄치고, 물에 잠긴 돌 위에는 나무로 만든 회랑이 있다. 소철과 종려나무 심어져 있고, 로비에서 정원 건너가는 징검돌도 운치 있다. 돌로 조각한 연꽃이 징검다리 발판이다. 내가 무슨 신선인가, 연꽃 밟으며 올라가라는 뜻이다. 배려 한번 고맙다. 집사람과 거기서 잠시 놀았다.
호텔 밖은 온통 계수나무 가로수다. 계수나무 많다고 계림(桂林) 이다. 계수나무 꽃향기 가득한 철을 잘 골라왔다. 밭에도 계수나무를 심었는데, 꽃으로 향수 만들고, 술을 담는다고 한다. 우리나라 만리향과 사촌뻘 나무라 한다. 지금 막 보라빛과 흰빛 꽃이 피어 있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 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마리' 윤극영 선생이 여길 다녀갔는지 모르겠다. 계림이 계수나무 아래서 토깽이가 떡방아 찧는 고장인줄 아시는지 모르겠다.
첫 날 배 타고 리강(漓江) 유람한 것이 인상 깊었다. 베니스가 물의 도시라면, 계림은 강과 호수의 도시다. 시내 곳곳에 지류가 많아, '이강(漓江)이 저강이고, 저강이 이강(漓江) 이다'란 말도 있다.
계림에서 양삭(陽朔)까지 83km 뱃길이 선경이다. '백리리강(百里漓江) 백리화랑(百里畵廊)'이란 말이 있다. 산은 화랑 속 그림에서 걸어나와 강변에 우뚝우뚝 서 있다. 기묘한 천하 절경 만들어 놓았다.
봉오리는 백운대 인수봉 같고, 마이산 같다. 이런 삐쭉 봉우리들이 강 양안(兩岸)에서 비단 스카프 마냥 구름을 둘렀다. 신비롭다. 봉오리 숫자가 자그만치 3만5천개라 한다.
밤에 달빛 비치면 여긴 또 어떤 선경일까. 달빛 아래 고유 의상 입은 까무잡잡하고 몸매 가날픈 장족(壮族) 아가씨와 향기로운 계수나무 꽃으로 담근 삼화주(三花酒) 마셔야 제격일 것이다. 동굴에서 3년 숙성시킨 투명하고 부드러운 그 술에 취해봐야 여행 제대로 한 것일 것이다.
여기가 하롱베이와 가깝다고 한다. 산맥이 하롱베이로 이어져있다고 한다. 이곳 날씨는 여름은 40도라 한다. 시멘트 바닥에 놓으면 계란이 익는다고 한다. 다행히 1년 365일 중 300일은 흐리지만, 날씨는 관광에 지장 없다고 한다. 맑은 날은 산봉오리가 수면에 그림자 비치는 모습이 멋 있고, 흐린 날은 산 허리에 걸친 구름이 운치있고, 비오는 날은 리강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볼만하다고 한다.
벼는 년 3모작이라는데, 대나무 계수나무가 많고, 비파 유자 과수원이 더러 보인다. 이날 우리는 어부가 강물 위에 배를 띄우고 가마우지로 고기를 잡는 풍경은 볼 수 없었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가마우지는 야행성이라 주로 밤에 고기 잡는다고 한다. 삿갓 쓴 어부가 배 젖는 수묵화처럼 멋진 풍경은 볼 수 없었다. 저녁 식사는 잉어찜 요리였는데, 그게 아마 가마우지 선생이 입으로 잡은 것이지 싶었다.
다음날 비단을 첩첩히 쌓아놓은 것처럼 보인다는 첩채산(疊綵山)을 올라갔다. 거기선 계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바위에 '願作桂林人 不願作神仙'이라 새겨 놓았다. '계림 사람 되기가 원이지, 신선 되기는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위에 불상들이 여기저기 새겨진 산을 올라가니 시내가 내려다보인다. 첨봉들이 곳곳에 솟아있고, 집들은 숲에 자리잡았고, 7층 단청 탑은 물가에 고요히 서있다.
저멀리 다리도 보인다. 인구 50만 이라는데, 계림이 아마 중국 전체서 가장 웰빙도시 아닐까 싶다. 이런 데서 과일의 여왕이라는 망고와, 듀리안과 비파, 무공해 채소와 물고기 먹고 사니, 신선 부럽지 않다는 그 말이 옳커니 싶다.
계림 시민의 휴식처 우산공원, 호수와 산이 어울린 천산공원, 서양인들이 모여드는 양삭(陽朔)의 재래시장, 관암동굴 구경했지만, 내게 가장 인상 깊은 곳은, 세외도원(世外桃園)이었다. 대학시절 그의 시에 반했던 저 유명한 중국의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온 장소가 거기라고 주장하는 말은 믿을 수 없지만, 시인의 마음 속 이상향으로 봐줄만하긴 했다.
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세외도원은 작은 동굴 속을 배가 지나가야 나온다. 거긴 복숭아나무 숲이 있어, 매년 3월이면 도화가 만발하는 도원경이라 한다. 황금색 유차화(油茶花)와 눈처럼 흰 여채화(茹菜花)가 가득 피며, 자홍색 홍화초가 알록달록 피어, 현란한 비단 자수를 보는듯 하다고 한다.
배를 타고 호수로 들어가니 과연 경치 그럴듯 하다. 물은 한없이 맑고 투명하다. 바닥이 환히 보인다. 산은 높고 고요하다. 속세의 근심이 싹 가신다. 도원 입구 동굴도 근사하다. 무릉도원 들어가는 기분 난다.
도화원기 앞부분은 이렇다.
'진나라 태원년간에 무릉 사람으로 고기잡이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물길을 따라 멀리 갔다가 홀연히 복숭아꽃 만발한 곳에 이르렀다. 어부는 이상하게 여기고 계속 앞으로 나가 복숭아 숲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했다. 숲은 강 상류에서 끝났고 그곳에 산이 있었으며,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고 그 속으로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으로 따라 들어갔다. 동굴은 처음에는 몹시 좁아 간신히 사람이 통과할 수 있었으나 수십 보를 더 나가자 갑자기 탁 트이고 넓어졌다.'
배가 굴을 통과하자 꽃이 활짝 핀 복숭아밭이 나왔고, 봄 지난 지금 핀 것은 관광객을 위한 조화였다. 그러나 여기 도화꽃 물 위에 하나씩 흘러내리면 그야말로 장관이리라 싶었다.
.거기 하얀 회칠을 한 민박집 두어채가 보였다. 제비가 들어와 살라고 집마다 벽에 구멍을 두어개 뚫어 놓았다. 호수 이름이 제비 연(燕)자 들어간 연자호라 한다. 여기가 강남 제비의 고향인가. 언제 여기 며칠 묵으며, 수필이나 서너 점 만들어 올 수 없을까. 그러나 꿈과 현실은 항상 조우가 어려운 법이다. 소수민족 음악처럼 가날픈 미련만 세외도원 하늘가에 뿌리고 왔다.
3박 5일 마지막 날 밤에 본 계림의 야경도 인상 깊었다. 유람선은 불 밝힌 정자와 누각과 7층탑과 화려한 호텔 옆으로 지나가는데, 조명은 푸른 나무잎을 싱그럽게 비치고, 물위에 낭만을 뿌려준다. 여기서 두 강이 만나고 네개 호수가 있다고 한다. 밤인데 호반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여기서 계림 청춘들이 주로 연애질 한다고 한다. 우리는 화냥은 화냥질이라고 하지만, 이북은 연애도 연애질이라 하는 모양이다. 가이드 이북 사투리가 재미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여기서 어부가 가마우지 고기 잡는 시범 보이고 있었다. 고기는 미리 뿌려준다고 한다. 가마우지가 고기를 입에 물고 배에 올라 날개 퍼득일 때마다 박수가 터졌고, 카메라 후랏쉬가 터졌다.
그리고 이 유람선에서 마지막 결정타 날린 것은 은은한 해금 소리였다. 한참 무드에 취해 있는데, 뱃머리에서 누가 해금을 켠다. 아리랑, 심심산천 백도라지, 푸른 하늘 은하수를 거쳐 우리가 익히 아는 서양곡 뷰티풀드림머 올드랭사인으로 끝을 맺는다. 우리는 같이 험잉을 하였다. 그 부드럽고 은은한 음률이 끝날 때마다 부라보! 만장의 박수를 보냈다. 대표가 금일봉 선사했고, 각자 얼마씩 돈을 건네주었다.
나는 이곳을 물의 도시 베니스와 비교해보았다. 그곳이 여기처럼 다리마다 밑바닥에 유려한 필치로 한시가 새겨져있고, 바위마다 그윽한 산수화가 새겨져 있던가. 조명 속에 불상이 서있고, 7층탑이 서있던가. 서울 가기 전에 확실한 결론 내렸다. 계림이 베니스 보다 훨씬 깊은 매력을 가진 도시였다.
출발 비행기 시간은 밤 12시 40분 이었다. 시간에 맞취 대절버스 오르니, 아쉬움은 마음을 적신다.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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