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예정 글

봄비 내리면

김현거사 2012. 1. 28. 08:33

 

 봄비 내리면

 

 봄비 오는 것을 보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없다. 얼어붙은 땅을 봄비가 촉촉히 적시어 땅 속의 새촉들이 단비 머금고 올라온다는 생각만 해도 행복하다.비가 개이고 산들바람이 불면,흰구름 나르는 하늘 아래 푸른 풀이 돋으면,마음은 어릴적 고향의 봄으로 날라간다. 남강변에서 쑥 캐던 아가씨들 곁으로 날라간다. 우리의 봄은 기다림과 설레임 속에 오는가 보다.'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오고,또 봄은 가고....'  솔베이지의 노래처럼 가슴 저미는 애절한 봄도 있다. 그러나 평범한 범인에 불과한 우리의 봄은 그런 애절한 시가 아니어서 다행이기도 하고 불행이기도 하다.평생 그리운 사람이 없다는 것이 결코 행복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봄은 기대와 환희와 추억의 삼박자로 닥아온다. 올해도 꽃은 화려한 빛깔과 향기를 품고 나타나겠지 하는 기대,그 혹독한 겨울의 동토를 견디고 꽃나무 새 촉이 새로 돋아남을 보는 환희, 꽃과 더불어 생각나는 사람의 추억이 그것이다.그래서 이른 봄 화단에서 이리저리 새촉을 찾는 이 기쁨을 이 세상 어느 기쁨과 견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눈 녹은 뜰에 매년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수선화다. 삭막한 뜰에서 꽃망울 맺힌 꽃대와 함께 올라온 수선화 새촉을 처음 보면 그리 반가울 수 없다.어둡고 춥던 겨울은 간 것이다. 수선화가 봄을 데리고 온 것이다. 'I Wandered Lonely as a Cloud That floats on high o"er vales and hills, When all at once I saw a crowd A host, of golden daffodils; 위즈워스 시를  생각하게 된다. 올 봄도 또 위즈워스의 고향 호숫가 지방에 가서 바람에 춤추는 황금빛 수선화를 볼 기회가 오지않을 것인가.봄마다  풀지못한 이 숙제는 매번 나를 끙끙대게 한다. 해마다 수선화만 사와서 꽃을 감상한 후 구근을 뜰에 심었더니, 이제 화단의 수선화들이 무더기가 되었다.

  수선화 비슷하게 몇 촉 올라온 것이 그 사촌인 꽃무릇 이다. 꽃무릇은 봄에는 잎만 피고 가을은 꽃만 피어, 잎과 꽃이 서로 못본다고 상사화란 이름으로도 불린다. 보통 집에서는 심기를 꺼리는 꽃이다.그러나 절에서는 개의치않아,사진작가들 소재로 유명한 것이 서정주 시인의 시비가 선 선운사 개울가에 무수하게 피는 石蒜이다.나는 어릴 적 청곡사에서 본 난초잎같이 푸른 석산의 잎을 좋아해서 몇 촉 심었던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곳 추억을 담은 꽃의 새촉을 발견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속초에서 옮겨온 산작약과 구절초와 매발톱꽃이 그것이다. 산작약 뿌리 한조각은 당시 설악산 관리소장이던 후배가 선물한 것인데, 토평에서 수지로 이사오면서 가져와 7년째 키우지만 아직 꽃은 못보았다. 해마다 붉은 새싹만 힘차게 올라온다.설악의 신비한 능선에  피었을 그 꽃이 붉은 것일지 순백의 흰 것일지는 못내 궁금하다. 지금 은톼한 그 후배가 어디 사는지도 궁금하다.설악산 미시령 바위길에 핀 청초한 흰빛이 구절초다. 강의 갈 때마다 험한 미시령 고갯길에 차를 세우고 구절초 감상하느라 쉬던 기억 새롭다.그 맑고 청초한 흰꽃으로 담았던 술도 이젠 추억의 술이 되었다. 필레약수 근처서 채집한 매발톱꽃은 야생초라 생명력이 강하다.초봄부터 잡초를 제치고 힘차게 올라온다. 자주빛 초롱 속에 노란 심이 화려한 그 꽃을 채집할 때,같이 갔던 여교수도 정년퇴직했단 소식만 들었다.셋 다 속초 시절과 그곳 사람들 생각나게 하는 꽃이다.

 매물도에서 가져온 독일 붓꽃은 칼날처럼 굳센 새촉이 벌써 10센치나 올랐다.통영에서 가장 먼 섬 매물도의 등대는 한 폭의 그림같은 곳이다.그 등대 오르는 돌담길 게딱지 집 텃밭에서 구해온 것이다.어떤 가인이 그 화려한 보라빛 독일 붓꽃을 그 머나먼 남쪽 섬 매물도에 심었을까.아직도 그 궁금증이 나게하는 꽃이다.오대산 월정사 근처 화원에서 염가로 구해온 노랑색 독일아이리스는 잎새의 푸른 빛이 겨울에도 변하지 않더니,봄 되니 새촉이 거침없이 나온다. 너무 고와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던 놈이다.

 집 근처 광교산 약수터에서 채집한 현호색도 올라오고 있다.종처럼 생긴 연보라빛 현호색꽃처럼 신비한 색감의 꽃은 정말 드물다. 장삼 입은 가녀린 여승의 뺨이 그리 보일까.그렇게 연약해 보이고 신비한 꽃이 생명력은 강한지 씨가 바람에 날려 금년엔 여기저기 새싹이 돋아 더욱 맘을 기쁘게 해준다.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난초가 눈덮힌 화단에서 월동이 가능한가 하는 생각을 항상 들게하는 꽃이 금새우란이다. 금새우란도 누런 시든 잎새 사이에서 반갑게 새촉이 돋고 있다. 귀한 난초라 번식력은 약하여 몇년  지났어도 촉은 겨우 세 촉 밖에 불어나지 않았다.

 중학부터 대학까지 10년 동문수학한 사람으로 바둑판에서 만날 때마다 말싸움하는 정모라는 친구가 있다.그가 준 옥잠화 옥순처럼 푸른 새촉도 힘차게 솟고 있다. 청빈한 언론인 아들에게 그의 모친이 진주서 가져온 것이니,나이 칠십 앞두고 동무 덕에 자기집 화단에서 고향꽃의 진한 향기를 맡게해준 그가 고맙다.

 '아주가'도 생명력 강한 꽃이다. 아내 친구가 선물한 이 서양꽃은 그늘에서 신비한  푸른꽃을 피워 정말  혼자 보기 아깝다. 옆으로 새싹이 힘차게 번지고 있는 모습이 미상불 대견치 않을 수 없다.

 작년에 그를 소재로 수필을 썼던 목단은 올해도 떨기를 이룬 가지마다 몽싱몽실 살 오른 붉은 새촉을 수없이 달았다.아직 땅 속에서 나오지않은 것은 카사불랑카와 글라디오라스다. 이리노이 딸아이 방문차 다녀온 아내가 가져온 그라디오라스 스무 촉은 작년 한 해 우리 정원의 공주였었다. 구근을 15센치 이상 깊이 묻었지만,월동이 되어 올해도 잘 필까, 은근히 걱정된다.카사불랑카는 두어송이만 피어도 정원을 그윽한 향기로 덮는 대형 백합 이름이다.네 그루에 꽃이 다 피면 우리집은 솔로몬의 영화같은 건 부러울 것 없다.

 꽃도 피기 전에 움 돋는 새촉만 보고도 반가운 것이 봄이고,새촉도 보기 전에 땅 속의 구근까지 궁금한 것이 봄이다.시원한 봄바람 머리에 씌며 꽃밭 오가며 꽃 가꾸는 기쁨 때문에 타향살이 50년 거의 전부를 나는 1층에서 살았다.공로가 있다면 내가 살던 서울 집들을 전부 화초로 채워놓고 이사온 점이다.이 봄도 나는 남이 모르는 천하 절색들을 모두 내 뜰에 모아놓고 가슴 후련하다.사랑스런  미인들은 모두 모였다.꽃과 더불어 추억 속 사람들까지 다 모였다.봄비가 한번만 고맙게 더 내려줬음 좋겠다..돈은 넉넉치 못하지만,가장 아름다운 꽃을 사랑해볼만큼 해보며 살아왔다. 이런 생각하며 열평 남짓 뜰을 이리저리 오가는데,'할아버지 저 좀 보세요.'옆에서 누가 나를 부른다.텃밭 한 쪽 장미나무 밑에 두어송이 제비꽃이 벌써 꽃을 달았다.놀라서 자세히 보니 화단 여기저기 앙징스런 작은 소녀같은 제비꽃들이 비밀의 꽃 축제를 열고 있다. 자줏빛 제비꽃 피었으니 이제 3월은 완연 봄이다.  

 

 

  • 달빛차
  • 2011.03.22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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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현거사님의 <봄비 내리는면>을 읽고 있노라니
    마치 헤르만 헷세의 <정원 일의 즐거움>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어쩜 그토록 놀라운,
    꽃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짙은 애정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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