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배건너 육거리 풍경/2011년 남강문학 제3호

김현거사 2011. 12. 6. 18:54

 육거리의 추억

                                                                                              수필가  김창현

 

  진주시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앞에 육거리가 있었다. 길이 여섯개 있었다. 습천에서, 진주역에서, 천전학교에서, 남강 다리에서, 망경북동에서, '당미'에서 오는 길이 있었다. 육거리에는 한약방과 구멍가게와 이발소와 약방이 있었고, 커다란 추모씨 방직공장 담 건너에 <부산여관>이 있고, 철구다리 쪽으로 좀 가면 성수네 방앗간과 해인고등학교가 있었다.

 여름에는 남홍이네 탱자나무 울 밑으로 흘러온 물을 바가지로 길바닥에 시원히 뿌리곤 했다. 우리는 그늘이 좋은 수양버들 아래 대평상에 앉아 한가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보는 것이 낙이었다. 그 버드나무는 내가 중학생 때 정촌 쪽 <쎄비리모티> 벼랑에서 꺽어다 심은 것이다. 우리집 평상은 행인들이 잠시 엉뎅이 붙이고 쉬어가는 휴게소였고,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사랑방이었다.

 이 육거리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우리 뒷집 큰 단감나무다. 우리집에도 늙은 감나무가 있었지만 떡은 항상 남의 떡이 커보이는 법이다. 우리집 감도 가을에 빨갛게 홍시가 되면 달기가 꿀이지만, 표피에 하얀 서리가 덮힌 그렇게 빨갛고 아름다운 걸 어떻게 따먹는가. 애꿎은 건 뒷집 단감이라, 초가을부터 노략질 대상이었다. 그 집 주인 몰래 밤에 뒷집 감나무에 올라가 감을 따먹던 그 가을은 행복한 가을이었다. 스릴도 참 있었다. 나는 탱자나무도 주로 뒷집 탱자나무만 애용했다. 그 집 탱자나무 밑둥만 자치기 작대기 만드는 대상이었고, Y짜형으로 뻗은 가지만 새 잡는 고무총 재료였다. 우리집 탱자나무는 보호수였다. 뒷집 남홍이 아버지는 체구가 으젖한 교장선생님이고, 어머님은 우리 어머님과 늘 같이 절에 다닌 단짝 계꾼이다. 남홍이는 나보다 한 살 위 죽마고우로 어릴 때 온갖 재작을 나에게 가르쳐 준 장본인이다. 큰형님은 진중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최남덕 선생이고, 둘째는 병역기피자로 한동안 우리집 대청 밑방에 숨어 살던 남두형이다. 남두형은 모처럼 진주에 내려온 우리 외삼촌 따라 서울 가서 출세했다. 모 제지회사에 취직했다가 나중에 그 회사 회장 사위가 되고 그룹 부회장 되었다. 그 밑이 우리 형 동기 남철이형이고. 그 밑이 사범학생인 남순이 누나다.

 길 건너 구멍가게집은 인물 잘 생기고 늘씬한 몸매로 처녀들에게 인끼 좋고, 진주 주먹들이 알아주던 장수형이 살았다. 그 집 어른 박포수는 진주 산청 다니는 버스 운전수였다. 운전대 위에 사냥 총 걸어놓고 다니다가 지리산 기슭 어디던지 꿩이 나타났다하면 승객은 기다리게 버스를 세워놓고 총질하던 분이다. 그 집  사냥개는 늘씬한 포인터였는데, 이 놈이 그 집 사람들 체면을 꾸겨주곤 했다. 우리집 잡종 진돗개만 만나면 사정없이 꼬리를 내리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장수형 여동생 장미는 이름 그대로 장미처럼 이뻤지만, 나는 장수형이 무서워서 장미에게 말 한번 걸어보지 못했다. 천전초등학교 쪽으로 한 불럭 떨어진 곳에 살던 삼식이형도 주먹으로는 진주서 알아주던 형이다. 내 동기인 그의 조카 성복이는 경희대 음대를 나왔다. 여름철 당미에서 따이빙 하며 목욕하며 놀 때, 그는 카루소처럼 가슴 가득 숨을 들이키고 아름다운 미성으로 벨칸토를 그렇게 멋지게 잘 불러 나를 감동시키곤 했는데 나중에 진주 교대 교수를 하다가 마지막엔 대학원장을 했다. 삼식이형 집 건너 <하고약>집 하위수 삼촌은 우리 큰형과 하고한 날 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거나, E마이너니 F마이너니 하면서 남인수 <애수의 소야곡>을 키타로 치며 놀던 한량이다. 그 조카 하위수는 내 동기인데, 지금 진양호 옆에 호텔을 짓고는 이런 곳은 구라파나 외국에 가도 별로 없다고 자랑하곤 한다. 주먹으로는 신원균형도 알아주는 육거리 스타였다. 중년 넘어 내가 진주에 갔더니 그때도 원균형은 여전히 여럿이 어깨를 쩌억 펴고 신작로 한가운데를 휩쓸고 다니고 있었다. 선거에 관여한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와 친하던 또한분 계꾼은 역전파출소 근처 제재소 집 안주인이다. 그 집 아들 재식이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나중에 한국유리 사장을 했고, 가족끼리 삼천포 해수욕장에 같이 갔던 재식이 누나와 여동생 영희는 하도 이뻐서, 사천 공군들이  바다 물 속까지 줄줄 따라다녔다. 역전파출소 근처에 살던 우리 고모님은 울산에서 한입 베어물면 단물 뚝뚝 떨어지는 수밀도 과수원을 했었다. 어느날 트럭에 가족을 몽땅 싣고 진주로 귀향했는데, 천부적으로 뛰어난 만담가 였다. 한번 입만 떼었다하면, 주위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뒤로 나자빠졌다. 그 집 고종사촌 기주형은 진농에서 알아주던 주먹쟁이였다. 나중에 법원경매에 손을 대어 원지에 작은 집을 장만하기도 했다.

 여름날 오후에 우리집 평상에 누워 빈둥거리면서 하늘의 구름을 보거나, 밤하늘 북두칠성이니 북극성이니 별을 셀 때, 항시 창가 커텐 뒤에서 창밖의 우리 모습을 훔쳐보던 두 소녀가 있었다. 길 건너 한약방집 두 딸인데, 그들은 수줍어서 집 밖에 잘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이름을 모른다. 습천 가는 길 망경남동에 살던 박모라는 여학생도 생각난다. 그는 우리집 앞을 지나가다가 간혹 우리 평상에 앉아 몇마듸 말도 건네던 내 한 해 위 여학생이다. 나중에 그의 동생 철이는 한국은행 부총재를 했다. 철이는 내가 사는 용인시 수지에 살다가, 아쉽게도 내가 이사가기 직전에 이사 가버렸다. 지금은 메워버렸지만 배건너 청춘들 데이트 코스였던 습천 못에서 유명한 여학생은 영자였고, 애교라면 진주여고 교장으로 계셨던 망경남동 외삼촌댁 민자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배건너 육거리 가장 명물은 <청깨>다. 지금 생각해도 그의 부모님이 왜 그에게 청깨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어줬는지 모르겠다. 한쪽 눈이 애꾸눈인 청깨는 집이 가난해서, 늘상 길에서만 놀았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싸움판에는 반드시 그가 끼었는데, 인상이 꼭 카리비안의  유명한 해적 애꾸눈잭 같았다. 이 청깨가 노인이 된 지금도 아직 육거리에 살고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동기인 오태식교장 말에 의하면, 청깨가 아직도 천전학교 동창회  모임에 잘 나온다고 한다. 나는 갑자기 청깨가 보고싶어, 언젠가 진주 가서 그를 꼭 한번 만날 결심을 한 적 있다. 

 길 건너에 약방과 이발소가 있었다. 약방은 평행봉 잘하던 내 동기 조규용의 형이 주인인데, 규용이 형은 내 작은형과 진고 동기다. 약방 안주인 용환이 엄마는 우리 평상의 단골 손님이었다. 키 크고 성격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어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 우리집 아랫채에 세들어 살던 농대 교수 부인 은경이 엄마도 평상의 단골손님 이다. 서울 출신이라 표준어를 구사하던 은경이 엄마는 미인인데다  인기있는 문학소녀였다. 나는 그가 소개해준 헷세나 투르게네프를 지금도 좋아한다. 우리집 가게방에 세들어 살던 필년이 엄마는 한많은 여인이었다. 물장사 출신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신문사 지사장 첩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항상 세모시 적삼을 깔끔하게 입고 있었다. 양녀인 필년이한테는 작은 일에도 그렇게 성질을 부리면서도 나한테는 총각 총각 해싸면서 그렇게 친절했다. 밤늦어도 평상에서 일어설 줄 몰라 배뚱뚱이 중늙은이 남편이 컹컹 헛기침을 해서 불러들이곤 했다. 그렇게 구박덩이로 자란 필년이는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꼭 한번 보고싶다.

 부인들에게 인끼 많던 이 몸이 왜 그 당시는 왜 이발소 앞에만 가면 스스로 못생겼다는 열등감에 항상 얼굴이 그렇게 화끈 달아올랐던지 모르겠다. 그 당시는 머리에 쇠똥이란 것이 왜 그리 많던지, 머리 감아주는 이발사한테 왜 그리 매번 챙피한 생각이 들었던지 모르겠다. 이발소 안가겠다고 떼를 쓰다가 어머니한테 혼쭐 나곤하던 기억 새롭다. 이발소 거울 위엔 멋진 그림이 걸려있었다. 숲이 있고 폭포가 있고 물방아간이 있는, 소위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이었다. 그 이발소 그림은 나중에 나에겐 말못할 감동을 준 추억의 명화가 되었다. 그 그림은 내가 군대 제대하고, 대학 복학하여 졸업하고, 장가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강산이 다섯번이나 변한 오십년 후에도, 가보니 거기 있었다. 여전히 거울 위에 내 소싯적 기억을 담은 골동품이 유유히 걸려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어 하루종일 할일 없던 우리에게 구경꺼리 제공한 것은 사천 함티장사 아줌마들 이다. 진주역에 내린 그들은 한 줄로 우리 평상 앞을 지나가곤 했는데, 시내를 돌기 전에 짐을 가볍게 할 요량으로, 우리 평상에서 해산물을 싸게 팔았다. 그러면 물동이 이고 우리 우물에 오던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들어 흥정을 벌이곤 했다. 우리 평상에서 잠시 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함티 속에서 가장 비싼 것은 갈치와 게지만, 사천에서 유명한 것은 개발(조개)과 싱게이(파래)다. 나는 그 싱싱한 남해의 웰빙 먹거리를 싫컿 먹고 자랐다. 늦은 오후가 되면 서장대 밑을 돌아 철교를 넘어, 십리도 넘는 평거의 사범학교에서 돌아오는 남순이 누나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나는 그 얌전한 남순이 누나가 어딘가 신비해서 항상 좋았다. 약골 우리 고모부는 커다란 누렁소가 끄는 달구지를 끌고와서 볏짚으로 마개를 한 똥장군에 인분을 퍼가곤 했다. 사촌동생 정태를 소 등에 태우고 온 적도 있다. 그 어린 정태는 나중에 산청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고모부는 어머니가 막걸리를 대접하면 원없이 신세타령을 하시다 가시곤 했다. 일찍이 고모님을 여위고 혼자기 때문이다.

  남홍이네 탱자나무는 봄이면 하얗게 꽃이 피고 가을이면 노란 탱자가  열렸다. 탱자나무 울 위로 주렁주렁 감이 익어갔다. 내가 다닌 천전학교 교정은 한쪽이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곁엔 넓은 뽕밭도 있었고 대밭과 백사장과 남강이 있었다. 다리 없던 시절 배 타고 건너다녔다고  <배건너> 다. 그 아름다운 전원의 소년으로 성장한 것이 지금도 나는 자랑스럽다. 

 회상해보면 고향의 풍경처럼 정답고 그리운 것이 없다. 타향의 그 무엇이 고향에 비기랴. 나의 음악과 문학에 대한 관심은 그 시절 그 평상에서 싹이 텄다. 하고약집 삼촌과 우리 형이 밤에 평상에서 치던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같은 남인수 노래 키타 반주에서 나의 음악은 시작되었다. 부채 부쳐가며 은경이 엄마한테서 들은 헬만 헷세와 투루게네프 작품에서 나의 문학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진주극장에서 영화보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다 지나간 자정 넘어서야 촉촉한 밤이슬 맞으며 집에 들어가곤 했다. 아마 그 대나무 평상은 내 예술적 감성의 싹을 튀운 최초의 온상이었지 싶다. 

 나이 들어 타향의 노인이 된 지금도 비가 개고 산들바람 불던 고향을 기억하고 있다. 겨울 밤 배건너 육거리를 울리다가 사라진 찹쌀떡 장수의 '찹쌀떡!' 소리를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여름 그 평상 옆에 피운 모깃불 연기처럼 육거리의 추억은 지금도 모락모락 가슴 속에 피고 있건만, 육거리 근처 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 사람들은 산 첩첩 물 첩첩 아득히 먼 곳에 흘러가버렸다. 누가 그들의 소식을 아는가. 이제 고향은 노인의 가슴에 찍힌, 빛바랜 한장의 흑백사진이 되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