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망우리 산보기/문학시대 2011년 여름호 게재

김현거사 2011. 7. 27. 08:43


    망우리 산보기(上)

 

                                                                                                                                   김창현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낮은 저 무덤은'으로 시작되는 '성주풀이' 가사를 자세히 들으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인생이 와서 영웅호걸 절세가인 되어본들 결국 낙양성 십리허 높고낮은 저 무덤으로 가는 거 아닌가?  

언제 한번 망우리 공동묘지를 가보리라. 삶의 희비애락이 일장춘몽이요 허구임을 거기서 보리라. 만산홍엽 소소히 떨어지는 가을밤 청명한 달빛 아래 혼자 가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정작 청량리 거쳐 구리시 다니는 55-3 버스를 탄 건 6월 어느날이다.  

 고개 정상 키높은 아카씨아 그늘의 아스팔트 길 따라 묘역에 들어가니, 묘원관리소 안내판에 태조 이성계가 동구릉에 자신의 산소를 정하고 돌아오다 여기서 '이것으로 오랫동안 근심을 잊게 되었노라'고 한, 망우리(忘憂里) 지명의 유래가 적혀있다. 이태조가 근심을 잊을만한 곳이라고 한 말을 믿고 그랬을 것이다. 그후 가난한 서민들이 묘지터로 보기 어려운 여기 가파른 북향 땅에 망자(亡者)를 모시기 시작하여, 지금은 망우리에 2만9천600 여 묘가 있다. 

 묘역에 들어가니. 수십년 된 벚나무 고목의 가지 사이로 북으로 면목동 이문동 시가지 집들이 멀리 내려다 보인다. 뻐꾸기는 뻐꾹뻐꾹 이산 저산 옮겨가며 울고,꾹꾸르 날개짓하며 산비둘기는 머리 위로 나른다. 한적한 길에 살 빼러 온 아줌마들과 하얀 보드라운 털북숭이 강아지 끌고온 귀여운 꼬마애들이 보인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나려도 나는 그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못하지.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마른잎은 떨어지고 마른잎은 흙이 되고 마른잎에 쌓여서 우리들 사랑은 사라진다해도.'  

시인 박인환의 무덤이 나온다. 종군기자 출신으로 '명동 백작'으로 불리었다던 박인환이다. 일류양복점 라벨 붙은 외제 초크리트색 싱글에 버버리코트를 걸치고, 붉은 넥타이 커피색 양말, 검정 박쥐우산을 든 박인환. 술도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죠니워커를 가려 마셨다던 박인환이다. 전후 파리의 살롱에서 검은 옷에 검은 머리 하고 낮고 음울한 음색으로 샹송 '장미빛 인생'을 호소하듯 부른 쥴리엣그레꼬좋아하고, '고엽'의 이브몽탕에 심취하고, 돌아오지않는 애인 폐르킨트를 눈덮힌 노르웨이 숲속 통나무집에서 기다린  '솔베지의 노래'를 항상 불렀다는 박인환이 거기 흙 속에 누워있었다. 길가 돌에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생은 외롭지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시인의 묘소 옆에 새겨진 글은, 전후의 명동에서 최불암씨 모친이 운영하던 주점 '은성'에서 그가 즉석에서 시 쓰고 현인이 노래 부른 '세월이 가면' 이다. 이 시는 그가 '마리서사'란 서점을 운영할 때, 서점에 찾아온 키크고 날씬한 몸매의 이지적 외모를 가진 문학소녀 이정숙에게 바친 시다. 이순(耳順) 앞 둔 나 역시 박인환처럼 '장미빛 인생'과 '고엽'이란 노래를 좋아한다. 그래서 대학 강의차 속초 다니던 시절엔, 그의 고향 인제 상동리 소양호가 보이는 길가의 박인환 시비(詩碑) 옆에 가면, 차를 세우고 31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그를 생각하곤 했었다.  

 

 박인환의 묘 근처에 화가 이중섭의 묘가 있다. 둘다 북향이지만 시인과 화가가 바로 곁이라 덜 외롭겠다. 곧이어 독립운동가 서동일 오재영 선생 묘소가 나오고, 1K 지점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니 능선 위로 올라간다. 산이 높아지자 아카시아 밤꽃 냄새가 짙어지고 사위가 조용해진다. 길가 나무벤치에 앉아서 보온병 기울여 커피 마시는 사람, 나뭇가지 당겨 오디를 따먹는 사람, 반바지 차림에 허리에 달랑 수통 하나만 차고 달리는 처녀, 꺼꾸로 걸음하여 올라가는 노인이 보인다.    

 

 능선 조금 못미친 곳에 우리 키 높이의 돌에 '독립투사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란 이름과 그가 동아일보 창간사로 쓴 '주지(主旨)를 선명하노라.'라고 새긴 글이 보인다. 장덕수 선생은 와세다대학 시절 전일본 대학생 웅변대회서 일등을 하였으며,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최두선 신익희 김병로 백관우 김준연 등 그 시대 기린아들과 교류하며, '청춘'에 수필과 번역문을 싣고, 타고르에 대한 논문을 쓴 문학도다. 콜롬비아대학서 철학박사를 받았으며, 김활란에게 구애하여 실패하자 이화여전 교수 난석(蘭石) 박은혜와 결혼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깝다. 최근에 일본 학도병 강제동원을 독려한 친일파로 낙인되었다. 박교수와 합장(合葬)한 무덤 앞 석인(石人) 얼굴 한부분이 날라갔고, 석주(石柱)도 반쯤 쓰러져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결국 죽어 한 줌 흙이 될 인간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 잊어선 않된다는 생각이 든다.  

 

 능선에 올라서니, 멀리 토평 들판 위에 하얀 띠처럼 한강이 보인다. 강 넘어 우측은 남한산성이고 좌측은 검단산이다. 가운데 미사리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태조가 망우리 고개서 이 활달한 명당의 기운을 보고 근심을 잊을만 하다 싶었다.

 여기 남향판에 죽산(竹山) 묘소부터 만해(卍海) 위창(葦滄) 호암(湖巖) 소파(小波) 송촌(松村) 묘소가 쭈욱 있다. 앞에는 한강이요 뒤는 한조각 흰구름 걸린 푸른 숲이다. 어렵던 시절에 큰인물들이 공동묘지 꼭대기에 묻힌 것은 섭섭하나, 이렇게 좌향이라도 반듯한 남향에 시야가 넓은 것이 다행이다.  

 

 죽산 조봉암은 1959년 진보당 사건으로 자유당의 국가보안법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정치가다. 무덤 앞 돌에는, '우리가 독립운동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않될 일이기에 목슴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는 어록이 새겨져 있다. 죽산은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해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을 구형 받았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을 조직했으나, '노동자계급의 독재나 자본가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공산당과 결별한 후, 전향한 분이다.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국회부의장을 하다가 진보세력을 규합, 두번 대통령에 출마한 것이 화근이었다.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정적들에 의해 제거된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 서울에서는 매년 그의 추모회가 열리고 있고, 북한에선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와 나란히 죽산의 허묘(墟墓)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서, 이같은 본성은 남이 꺽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않는 것이다. ' 만해스님 묘소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출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한귀절이 새겨져 있다. 만해는 대쪽같은 절개를 지킨 선지식(善知識)이다. 육당(六堂) 최남선과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3.1만세 사건 이후 변절한 육당이 중추원 참의 관직을 받았다. 스님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마음으로 이미 절교를 선언했다. 어느날 육당이 길에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그를 보고도 못본체하고 빨리 걸어갔다. 육당이 따라와 앞을 가로막아서며 인사를 청했다. '만해선생 오랜만입니다' 그러자 스님이 물었다. '당신 누구시오?'  '나 육당 아닙니까?' 스님이 또한번 물었다. '육당이 누구시오?' '최남선 입니다.잊으셨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외면하면서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葬送)했오.'  뒤도 돌아보지않고 가버렸다 한다.  친구였던 화가 일주(一洲) 김진우와의 일화도 있다. 스님은 일주가 배정자 집에 기숙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찾아갔다. 배정자가 나와 반가히 맞았으나 스님은 아무 대꾸없이 따라 들어갔다. 일주가 정말 기숙하는지를 기웃기웃 살폈다. 배정자는 이또 히로부미의 양녀이자 정부(情婦)였다. 고종황제를 비롯한 이완용 등 대신을 홀린 고급창녀다. 일주가 배정자를 시켜 상을 차려와 술을 따르자, 스님은 일주를 물끄럼히 보고있다가 술상을 뻔쩍 들어 일주에게 집어던졌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그 집을 나왔다. 그후 스님이 별세하자, 일주는 통곡하며 끝까지 호상하여 누구보다도 스님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만해스님 묘소는 세월에 풍화된 삼단 시멘트 계단 위에 부인(夫人) 유재우(兪在右)님 묘소와 나란히 있다. 초라하지만 이 정도나마 묘소를 가꾼 것은, 40여년 전에 처음으로 당시 풍전상가에 있던 대학생불교연합회가 망우리 귀퉁이에 있던 스님의 묘소에 관심둔 덕택이다. 당시 불교신문에 근무하던 내가 만해스님 망우리 묘소를 탐방하고온 대학생들 이야기를 기사화하던 기억이 새롭다.  스님 묘소 앞에서 한가지 섭섭한건 스님은 시인인데, 스님의 묘소 앞에 시비(詩碑)가 없음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 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얼마나 깊고 아름답던 스님의 시였던가.

 

    망우리 산보기[下]

       

                                                                                                                                              김창현


 

 만해스님 묘소를 지나면, 독립운동가 서병호 선생 묘소, 그 옆에 3.1운동 때 33인 민족대표였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과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선생 묘소가 나란히 있다.

 오세창 선생은, 비석글을 명필 김응현이 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식민지 조선 화단의 방향을 결정한 전예(篆隸)의 대가요, 추사 이후 유일한 금석(金石)학자이다. 후세의 어떤 학자는 그의 서예를, '금석문(金石文)에서 비인위적인 치졸과 천진스런 자연스러움을 추구했고, 와당문(瓦當文)에서 질박과 전아(典雅)의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며, 전서(篆書)에서는 규율을 지키는 자체(字體), 굳건하고 묵직하며 짜임새가 엄밀하면서도 변화있는 필획(筆劃), 그리고 유려(流麗), 단아함을 추구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 듣고 누가 선생의 보물같은 금석문(金石文)과 와당문(瓦當文)과 전서(篆書)를 욕심 내지않겠는가. 선생은 약관 20살 때 한강변 정자에서 박영효 윤치호 등의 눈내리는 풍경을 즐기는 모임에 참석할 정도였고,  서재필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했으며, 조석진 안중식 같은 근현대 미술의 중심축으로 볼 수 있는 거장들과 탑골공원에서 자주 어울렸으며, 천도교 교주 손병희가 창간한 '만세보(萬歲報)'사장을 역임했다. 3.1운동 후 옥살이에서 풀려나자 해방 때까지 서화에 몰두하셨다. 해방 후는 건국준비위원회 고문, 한국민주당 고문, 대한민보 서울신문 사장 등 서예가 독립운동가 언론인으로서 활동한 분이다. 6,25 동란 중 대구서 서거하니, 국회는 일분 묵념을 올리고 세비 일할을 거출하여 조의금을 전달하여 국가 규모의 조의를 표하였다.

묘소 위치가 높아 우측 용마산이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인데, 다만 정면의 나무들 키가 높아 그걸 가린게 좀 험이었다.


 오세창 선생 묘소 조금 아래 진단학회(震檀學會) 발기인 중 한사람인 호암(湖巖) 문일평(文一平) 선생 묘소가 있다. 진단학회는 일제 식민사학에 맞서 우리 학자들 민족사관에 입각한 역사를 연구한 학회다. 선생은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 교사를 하다가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부로 들어가, 일본 내 조선인 유학생들의 비밀결사 조직인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다. 동제사는 시민적 민족주의와 대동(大同)사상을 지향하고 국혼(國婚)을 중시한 민족주의 역사관 대종교(大倧敎) 신앙을 공통이념으로 하였다. 중앙 중동 배재학교 교사와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역임하고.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신간회'를 발기하고, 이은상 이희승 최현배 선생과 진단학회를 발기한 분이다. 묘기(墓記)는 정인보(鄭寅普) 선생 글이었다.


 좀 더 가자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 선생 묘소가 나온다. 묘소에 올라가면 한글로 '소파 방정환 선생의 비'라고 새긴 비석이 있고, 묘는 돌과 시멘트로 만든 특이한 것인데, 돌에 '어린이의 동무' '동심여선(童心如仙)'이라고 쓰여있다.

손병희 선생의 사위 방정환은, 아동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이'라는 존칭어를 만들었고, 세계 최초로 '어린이 날'을 제정하여 어린이 인권 선언을 한 분이다. 아동잡지 '어린이'를 만들어 동요 동화 창작을 싣고, '개벽''유심''신청년' 등에 작품을 발표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들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있는 이 어린이날 노래는 윤석중 선생 작사다. 곡은 '색동회' 4대 회장(73년) 윤극영 선생 작곡이다. 소파 방정환이 작사한 원조 노래말은 이렇다.


'기쁘다 오늘날 오월오일은 우리들 어린이의 명절날일세.

복된 목슴 깊이 품고 뛰어노는 날. 오늘이 어린이의 날.

(후렴)

만세 만세를 같이 부르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갑시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기쁜 맘으로 노래 부르며 가세.


 조금 더 가서 '동락천'이라는 약수터 옆에, 세브란스 의학전문 초대 교장 오긍선선생과 독립운동가 문명훤 유상규선생 묘소가 나란히 있다. 이 근처 정자에 올라보니, 아래 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다. 여류작가 박완서씨가 사는 아천리와 구리 먹골배 배밭이 보인다.


 끝에 종두법의 창시자 송촌(松村) 지석영(池錫永) 선생 묘소가 나온다. 마마로 알려진 천연두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가하면, 인류 역사상 전쟁과 다른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들 숫자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희생자를 낸 병이 마마 였다고 한다. 천연두는 5억여명 희생자를 낸 인류 최대의 재앙이었다. 기원 전 1160년 이집트에서 파라오 람세스5세가 천연두로 사망했고, 남미의 잉카와 아즈텍 문명도 천연두로 붕괴되었다는 설도 있다. 현재는 군사용 생화학 무기로 북한과 이락이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으며, 미국의 애틀란타시의 '질병통제예방센터'와, 러시아의 '시베리아 바이러스 생명공학 연구센터'가 이 가공할 바이러스를 키우고 있다.

 종두법(種痘法)은 송촌이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서 배워와 서울에 우두국을 설치, 1879년 소의 질병인 우두(牛痘)를 주사놓아 이 땅에 처음으로 실시한 것이다. 송촌은 후에 관립의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으며, 주시경 선생과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하고,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펴내어, 고종이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 팔괘장을 내렸다. 그러나 재승덕박(才勝德薄)인가? 이런 이력에도 불구하고, 2003년 과학기술부에서 고려시대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혁혁한 과학기술 업적을 쌓은 분들의 생애와 업적. 유품을 전시하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을 개관 할 때. 최무선(崔茂宣) 장영실(蔣英實) 허준(許浚) 등 14명만 선정하고, 송촌은 제외시켜 버렸다. 친일행적이 문제시 되었던 것이다.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疎而不失)'이라는 말이 명언이다. '하늘의 그물은 넉넉하고 성근듯하여도 하나도 빠트리지 않는다.'


나는 5킬로 망우리 공동묘지를 산책하며 주변에 향기로운 풀냄새를 풍기며 어디서 왜애앵! 벌초기 돌리는 소리를 몇 번이나 들었다. 물론 이름없는 민초(民草)들 무덤에서다. 어떤 묘는 잘 관리되었고, 어떤 묘는 떼가 말라 흙만 들어난 황량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후(死後) 커다란 돌에 어록을 새긴 사람이나, 초라한 봉분의 민초나, 죽어서 지하의 한 줌 흙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군 내무반에선 사회의 지위가 필요없고, 망우리선 생전의 모든 것이 필요없다. 옥같은 이쁜 얼굴 단장한 아름다운 숙녀나, 만권서를 가슴에 넣은 천하문장이나, 민족 위해 목슴을 버린 지사(志士)나, 천금을 쌓은 재력가나, 가난한 민초나 사후(死後)엔 다 한 줌 흙이다. 죽음은 모든 걸 평등으로 되돌려 놓는다. 생전의 이러쿵 저러쿵은 바람 타고 날라가고, 시비(是非) 고하(高下)없는 평화만 망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