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중국

김현거사 2022. 1. 30. 15:11
중국
김창현추천 0조회 022.01.30 15:10댓글 0
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흔히 우리나라 역사를 외침이 잦았던 역사라 한다. 언뜻 보면 그렇다. BC57년 혁거세가 신라의 임금이 된 처음부터 왜인 침입이 있었고,  고대 삼국시대에는 만주 강역을 차지하면서 이에서 여진족, 거란족, 몽골족, 한족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였고, 고구려 보장왕 때 당 태종이 50만 대규모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고, 1254년 고종 41년 몽고 군사가 침입하여 잡혀간 사람만 해도 30만 6천이라 한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년 4월 13일 일본의 풍신수길이 400척의 범선을 이끌고 부산을 쳐들어와 반 달이 못 되어 서울이 떨어졌다. 또 병자년(1636) 12월에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했다. 형제의 관계를 바꾸어 군신관계로 하고 해마다 조공을 더 바치라는 청의 요구를 거절하자 청 태종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불과 열흘 만에 서울을 점령 인조는 왕비와 왕자를 강화도로, 자신은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가 다음해 1월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다. 또  1910년 8월 28일에 한일합병이 되어 나라가 아주 망해버렸다. 이번에는 이름이 아주 없어지고 남의 식민지가 되어버렸다.




  고려시대에는 500년 동안 외침을 당한 것을 찾아보면 거란 족의 요나라 침입을 세번 당하였고, 13세기에 몽골족이 세계 대제국으로 팽창하면서 우리나라는 11차례의 침입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14세기에 왜구의 침입을 여러 차례 당하였습니다. 고려왕조에서 전쟁이 적었던 것은 통일국가였던 것이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3000년 역사 중 수천 번이 넘는 외침을 당하였고, 온 나라가 외국에게 수백년을 빼앗긴 것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사방이 적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남쪽으로 부터의 침입이 적었을 뿐 서쪽, 북쪽, 동쪽으로부터 전쟁에 시달렸습니다.
북쪽의 거란과 여진의 세력이
약화된 송 조정을 수시로 몰아 세웠다.
오랑캐와 싸울 힘이 없었던 송은 
숙부, 백부로 오랑캐를 모시면서 
뇌물을 바쳐 연명해야 했다.
결국 1127년 여진족의 금나라에 의해 송나라(북송)가 멸망함으로써 
9대 167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출처] "중국의 역사(송대)" (스도 요시유키, 나카지마 사토시)|작성자 존재이유
 조선시대는 500년 역사 중 왜란과 호란을 당한 것 이외에는 전기 200년 후기 200년 장기간의 평화 시기를 가졌습니다.
만주족의 금나라, 몽골의 원나라
의화단 사건은 지금의 소수민족과는 다른
​서구 열강, 즉 빼도박도 못한 외세에게청나라는 이미 영국과 일본 한테 전쟁으로 씹털린 상태라
​당시 열강들의 숨은 맛집으로 소문이 난 상태였어​등장한 세력이 바로 ​'의화단'​ 이라는 단체야

이들은 뒤에서 청 정부의 사주를 받아
 
'청을 돕고 함께 양이들을 물리치자'
 
라는 부청멸양(扶淸滅洋) 이라는 구호로 내세우며
 
외국인들이나 각국 공사관에 공격을 가했어
 
결국 188명의 서구 선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무참히 희생되었고
 
45,000여명에 달하는 중국인 기독교인들마저 살해되었지


그래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다른 열강들과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는 중 이였지기록된 의화단의 만행들을 몇가지 정리하자면


1) 서양 남녀를 벗겨서 남성의 성기를 자르거나 여성의 음부를 짓뭉갰다.


2) 남녀를 벗겨서 불속에 넣어 아주 태우지 않고 익혀서 먹을 정도로 구웠다.


3) 끓는 물에 서양인 아이를 삶아서 익혀 썰어먹었다. 


4) 사람을 산채로 묻어 죽이고, 팔과 다리 각을 뜨고, 칼이나 작두로 머리나 허리를 통째로 싹둑 자르는 등의 살해 방식이 이루어졌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일본, 미국
등 8개국은 동맹을 맺어 청나라에 연합군을 파병했어
재 미국과의 패권경쟁에 대항할때
"우리는 120년전의 중국이 아니다" 라며


과거와 달리 현재 G2로 성장한 중국의 힘을 과시할때 반면교사로 언급하기도 해


심지어 같은 서양세력에 대한 싸움이라 중국에겐 의미가 깊기도 하지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