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신문사 시절 친구

김현거사 2021. 8. 25. 11:34

 

신문사 시절 친구

 칠십평생 살다보니 여러 종류 친구가 있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가 있고, 군대와 직장, 문우가 있다. 신문사  시절 김헌수란 친구가 있었다. 일간 내외 경제는 박대통령이 일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처럼 만들라고 무역협회 박충훈 회장에게 지시해서 만들어 월급을 동아, 중앙 정도 수준으로 지급했다. 나는 불교신문에 계속 있어 불교학자로 갔어야 하는데, 거기가 주간지라고 일간지로 옮겼으니, 지금 생각하면 실수였다. 수백 대 일 경쟁을 뚫고 입사했는데 수습기자 지나자, K대 선배들이 전직하라고 충고했다. 당시는 기자가 더 이상 '사회의 목탁'이 아니었다. 평범한 월급쟁이로 전락하여 이젠 사회 정의 외치는 자는 없고, 기자 정신도 없어져 갔다. 지조도 없어져 데스크에 아첨해 좋은 출입처 나가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또 당시 박통이 유신 반대하는 기자들 콧대를 꺽기 위해서 기자증도 바꿔버렸다. 처음 문공부 장관이 발행하던 기자증은 뒷면에 붉은 횡선 두 줄 쭉 그여있고, 거기에 '이 증 소지한 사람에게 취재 협조를 부탁드립니다'란 장관 멘트가 달려있었다. 그걸 이때 신문사 사장이 발행하는 신분증으로 제도가 바뀐 것이다. 장관이 발행한 신분증과 신문사 사장이 만들어준 신분증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많다.

'박통이 장기 집권 하는데, 너희 제1기 수습기자 네 명 중에서 편집국장 나오겠지만, 편집국장 하면 뭐하느냐? 일찌감치 기업체 가서 처자식 밥이나 굶기지 않는 것이 좋다'라고 선배들이 충고했다. 나라는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던 때다. 그렇찮아도 마음 흔들렸는데, 마침 선배 한 분이 타계해서 길음동 초상집에 가보고, 그때 대학원 진학해 교수 되자고 진로 변경을 결심했다. 그 선배는 서울대 출신이다. 기자 경력 15년 결말이 저런 거구나 싶었다. 초라한 단칸 방에 유난히 미인이던 부인이 혼자 눈물짓고 있었다. 그래 대학원 등록금 마련하려고 사내 해외홍보부란 곳으로 자릴 옮겼다. 국내 상품을 해외 공관과 기업에 소개하던 영문잡지다. 

거기서 김헌수를 만났는데, 헌수는 단국대 학생회장 출신이다. 늘씬한 키에 시원시원한 말재간이 좋았다. 그는 한번 광고 낼 회사 찾아가면 실수하는 일 없었다. 매처럼 날아가서 계약서를 움켜쥐고 나왔다. 당시 기자 월급 5만원 하던 때다. 그가 백만 원짜리 광고 한 껀 물어오면 리베이트가 10프로 10만 원이고, 한 달에 5건 물어오면 50 만원 수입이다. 승용차 배정도 당시 100명 넘던 편집국은 편집국장 차 포함해서 취재 차량 5대 배정되는데, 헌수는 운전수 딸린 차 매일 배정되었다. 광고가 신문사 주 수입원이다. 전무도 복도에서 헌수 만나면 아는 척 했다.

나는 그 헌수와 항상 같이 다녔다. 내겐 기자증이 있기 때문이다. 헌수는 기자 시험엔 낙방해서 자기를 '아랫도리 기자'라 불렀다. '아랫도리 기자'란 신문 하단을 메꾸는 광고부 직원을 말한다. 그 헌수가 머리는 비상했다. 한 번은 '창현아 오늘 삼양팔프 가보자' 면서 따라와 취재만 하란다. 그래 가보니 그 회사 기획실장이 기다리고 있다가 '사장님이 인터뷰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다. 사장 만나니, 회사 사진과 타이핑한 회사 연혁, 사장 이력서 주고, 종업원 수, 주 생산제품, 업계 동향 등을 소개한다. 내가 취재해서 적고, 헌수는 이 인터뷰는 전 페이지 특집으로 나간다고 설명했다. 사장은 인터뷰 끝난 후 두툼한 봉투를 건네주며, 기획실장 더러는 저녂 모시라고 지시 내렸다.

그 내용이 며칠 뒤 신문 전면 한 페이지 특집 기사로 나갔다. 헌수는 윤전실에서 막 찍은 아직 잉크 냄새 가시지 않은 신문을 들고 와서 보여주었다. 막상 기사를 쓴 내가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문은 뉴스 밸류로 기사 크기와 위치를 조정한다. 가장 중요한 뉴스가 톱기사 되고, 그다음 뉴스는 중 톱으로 싣는다. 올챙이 기자는 1단짜리 자기 기사 하나 싣기 힘든다. 데스크는 무자비하게 가위질 하고, 잘못 쓴 기사는 본인 앞에서 구겨지고 휴지통에 버려진다. 그런 무정한 곳이 신문사다. 독자들은 무심히 읽지만, 적어도 전 페이지 특집은 12.6 궁정동 박 대통령 피살 사건 정도 되는 큰 사건 아니면 불가능한다. 그런데 내 글 삼양 펄프 특집이 전면기사로 나간 것이다.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헌수에게 까닭을 물어보니, '창현아! 이거 봐라' 헌수가 손가락으로 신문지 위를 가리키는데, 거기 '전면 광고' 자그만 글씨가 박혀있다. 원래 이 '전면 광고' 수법은 정부 기관지 서울신문 작품인데, 헌수는 서울신문 출신이다. 기사 나간 후 신문 들고 삼양 펄프 찾아가 건네고 수금 끝나자, 헌수가 내 몫 50만 원 노놔주었다. 덕택에 다섯 달치 월급 챙겼다.

한 번은 헌수와 '한신공영'에 들렀다. 그 회사 창업 때다. 남산 1호 터널 앞에 책상 서너 개 전화 한 대가 전부였다. 반포에 무슨 수영장 만든다고 했다. 사무실엔 사장을 포함한 직원 서너 명 밖에 없다. 이야길 나누다가 점심 같이 하자, 사장은 홍보 맡을 사람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에게 와서 총무 맡아달라고 했다. 그때 내가 실수했다. 건설업은 막일로 불량배도 있던 시절이라 그 회사 창업주 제의를 거절했다. 후에 한신은 반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 세웠고, 고대 나온 사위는 요지에 백화점 세웠다. 헌수는 한신아파트 입주권을 여나믄개 들고와서 사라고 했고, 내가 돈이 없다고 하자, 은행 대출 주선해주겠다고 했다. 지금 한신 아파트 한 채 몇 십억 하는가. 그걸 미심쩍어 거절했으니, 나는 역시 현실엔 먹통이다.

당시 무교동에 '월드컵' '초원의 집'이니 하는 술집이 유명했다. 날더러 술 한번 사겠다고 헌수가 가보자 했다. 가서 웨이터더러 '오늘 저녁 매상 최고로 올릴 테니 가장 비싼 술과 안주 챙겨 오라' '사장 좀 불러오라'라고 지시했다. 그 집 사장은 무교동과 명동에 술집 두 개나 있는 캐디락 타고 다니던 암흑가의 보스다. 기자가 부른다니, 보디가드 두 명 대동하고 왔다. '이 분이 김 00 기잔데 인사나 하세요!' 헌수가 날 소개하고, 내가 문공부 장관 직인이 찍힌 기자증 보여주자, 사장은 당장 정중해졌다. 기자는 경찰, 세무공무원, 술집, 탈세 기업주가 꺼려하는 존재다. 헌수는 우물쭈물 않는다. '언론 피하면 곤란하다', '내가 사장에게 전화 연락 몇 번 했는데 소식이 없다'라고 말한 뒤,  며칠 전에 신문에 실린 '뎃포' 광고와 요금청구서를 내밀었다. 그들은 언론에 약하다. 결제 요청하자, 사정사정하면서 값을 반으로 깎자고 한다. 그래 그 자리서 요금 일부는 현금으로 받고, 나머지는 신문사 회식 때 와서 먹기로 했다. 그날 술과 여자 팁은 물론 무료였다.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였을 것이다. 헌수가 후암동엘 가자고 했다. '인마! 니 뿅 갈 거다. 화보 편집장인데 미인이다'. 당시 후암동은 부자 동네다. 집은 일본식 목조주택이었다. 현관 문이 열리자 붉은 카펫 위에 나이트가운 슬리퍼 차림 여인이 나타났다. '이 친구가 내가 말한 철학한 그 친구' 헌수가 나를 소개하자, 30대 미인이 안다는 듯 눈웃음을 친다. 인사 끝나자 외국 영화에 나올법한 응접실로 안내하여 오디오 틀자 빙 크로스비의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나온다. 양담배 꺼내 손톱에 톡톡 두드리고 입에 문채 신호를 하니, 일하는 아줌마가 조니워커 한 병, 글라스 세 개 테이블에 놓고 간다. '반갑습니다' 건배할 때, 나는 그 여인의 새카만 눈썹과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보았다. 'I'm dreaming of white X-mas' 헌수와 그녀가 험잉할 때, 나는 그들 둘의 화음이 수준급이란 걸 알았다.

그 시절 집에 오디오 있는 집 드물었다. 치즈 안주로 조니워커 마시는 여인도 드물다. 서울 끝 창동 남의 집 전셋집 살던 내 처지엔 주눅 들만 했다. 이때 헌수가 '이 친구 기자로 입사한 후, 돈 벌어 대학원 간다고 우리 부로 온 친구야. 창현아 니도 한 곡 뽑아봐라' 권하는 바람에 나는 낫 킹 콜의 '모나리자'를 불렀다. Mona Lisa, Mosa Lisa men have named you(모나리자, 모나리자, 사내들이 그대를 그렇게 부른다오) You’re so like the lady with the mystic smile(그대는 그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닮았구려). 내 노래 시작되자 그녀가 반색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K대 미식축구 선수 시절 종로 2가 '디세네' 음악실에서 배운 솜씨다. 자기도 그 노래 아는 모양이다. 곁에 오더니 같이 노랠 부르는데, 함께 노래 불러보면, 상대의 박자, 감정, 호흡처리가 생생히 느껴진다. 영어 발음 들으면 상대 수준도 안다. 내가 미식축구 선수 출신으로 체격 좋았던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노래 끝나자 여인이 내 손 잡더니 춤추자고 한다. 년상의 여인이다. 따뜻한 그녀 입김이 귓불을 간지럽혔다. 꺾어질 듯 가는 그녀 몸에선 짙은 향수 냄새 풍겨왔다.

크리스마스이브라서 간혹 남자한테서 전화가 왔다. 중앙청 국-과장 전화라고 했다. 당시 서울엔 화보가 대한 화보 **화보 등 세 개 있었다. 그 여잔 그중 하나 편집장이다. 관리들은 화보 인터뷰하면 고과가 유리하다. 그런데 여긴 미인 화보 편집장에다, 술자리 사양 않고, 술값도 자기가 내는 여자다. 관리들에게 광화문 최고의  매력 있는 커리어우먼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공동 연인이던 그 여자도 아는 재부무 상공부 중앙청 국-과장이 필요했다. 그녀가 광고 유치하는 기업체 사장에게 재무부가 어딘가? 은행 할아비 아닌가? 상공부가 어딘가?  재계 간판스타 정주영도 주사 서기부터 굽실대고 살랑거린 데 아닌가? 그들에겐 관료란 황공무지한 사람이다. 그런 사장들에게 관료가 전화 한 통 해주면 그녀를 만나기 싫다는 먹통은 없다. 셋 다 공생 관계다. 그런데 우리 셋은 언론 쪽 동업자다. 꺼릴 게 없는 처지로 노래와 춤으로 열이 오르자 그녀 제의로 무교동으로 나갔다. 통행금지 임박해서 후암동에 돌아와 마타하리처럼 요염한 그녀와 밤새 놀고 이튿날 헤어졌다. 그녀는 나중에 **화보 사장이 되었다. 1970년대 초 광고계의 전설적인 샛별이 되었다.(계속)

헌수는 내외경제 광고부장을 너무 일찍 맡았다. 그 후 국장 진급이 어려워지자, 미국으로 이민 갔다.

 몇 년 뒤 헌수는 미국 이민 가서 샌프란시스코 위 포틀랜드서 살았는데, 서너 번 한국 들락거리며 날더러 미국서 같이 살자고 한 적 있다.

 첫 번째는 그가 포틀랜드서 관광 매점할 때다. 내가 A그룹 회장 자서전을 쓰고 있을 때인데, 어떻게 소식 알았던지 화양동 회사로 찾아와 ‘이 사람아 우선 자네 부인은 우리 와이프와 기념품점서 함께 일하면 되네. 관광 기념품점 하나 열었더니 생계는 지장 없더라고. 옛날 신문사 시절 생각 안 나나? 같이 가서 살자'며 권하다 갔다.

 시내서 멀리 떨어진 화양동까지 찾아와서 내 취향 염두에 두고, 록키산맥 광대한 풍광과 태평양 쪽으로 흐르는 계류에 낚시만 던지면 올라온다는 팔뚝만 한 연어 이야기 해준 그 정이 고마웠다.

 두 번째는 소공동 롯데호텔로 몇 분만에 나올 수 있겠냐고 급히 나오라고 해서 로비에 갔더니, 그곳 포틀랜드서 미 합중국 연방 의원에 한국인으로 처음 출마한 오 모씨를 소개했다. 동행한 운동복 차림의 오 모씨는 퍽 의욕적인 인상이었고, 사람 구슬리는 재주 많은 헌수와 퍽 친한 모습이었다.

 헌수는 당시 한국일보 현지 지국장과 교포신문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야당이란 항시 춥고 배고픈 직업 아니던가? 재야 때 미 서북부 찾아온 김영삼 씨 잘 대접해준 인연으로 이날 그들은 대통령 면담 약속 있어 청와대 들어간다고 했다.

그 시절 회상해보니 영어나 공부 잘한 것 실력 아니다. 컴퓨터처럼 복잡한 사람 마음 휘어잡는 재주가 더 실력이다. 그땐 그걸 몰랐다. 그날 헌수는 ‘기사 쓰고, 편집하고, 광고 얻어오고, 신문보급하느라고 힘들다'며, '광고와 지국 운영은 네가 알다시피 내가 자신 있으니, 니는 그 좋은 글 솜씨 썩이지 말고 기사 작성만 맡아주면 된다'며 '미국 와서 날 좀 도와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인생사에 만약이란 건 없지만, 그때 만약 그가 중국 서화 골동에 홀딱 빠져있던 나에게 중국서 같이

살자고 권했으면 얼씨구나 지화자 두말 않고 따라나섰을 것이다. 소주 항주는 서울 30평짜리 아파트 한 채 값이면 대지 천여평에 경주 최부잣집 보다 더 오래된 고래 등 같이 운치 있는 고가옥에 살 수 있었다. 담 너머 운하에서 보트 젖고 뜰에는 천하에 둘도 없는 기묘한 태호석 놓고 살면서, 한 달 월급 20만 원 주고 중국인 식모 운전수 데리고, 기름진 중국 음식 향기로운 중국술 맘대로 즐기며, 골동품 시장 돌아다니면서 서화 도자기 수집할 수 있었다. 그걸 컨테이너 베이스로 한국에  2-3년 날아오기만 하면 몇 년 뒤 한재산 손에 거머쥘 수 있었다.

 마침 그때 김영사와 동양 고전 다이제스트 책을 만들던 중이라 사양하고 말았지만, 좌우간 헌수는 족집게처럼 사람 잘 찾아낸다. 그 후 이모 씨는 연방 의원 당선되었다.

 세 번째 왔을 때는 내가 직장 은퇴하고 주에 한번 속초 모 대학 겸임교수 다닐 때다.

 헌수는 그곳에 한인방송 세운다며 현지서 호텔 운영하는 이대 출신 묘령의 여인을 동행하였다. 이 날은 체면상 두 사람 골프 접대 내가 맡고, 라운딩 끝나 강남 음식점에서 저녁 먹었다.

‘헌수 이 친구 때문에 또 이런 미인 만나 뵙게 되어 무쌍의 영광입니다.’

내가 슬쩍 말에 뉘앙스를 깔자, 여인이 냉큼 걸려든다.

‘또 미인 만나셨다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김헌수 사장님 바람피운이야기 예고편인가요?’

'저분이 토네이도 급은 아니라도 동남아 휩쓰는 태풍급은 되지요.'

‘아이고 창현아! 이 인간아! 숙녀 앞에서 이 무슨 망발이십니까요?’

‘신문사 때 내가 따라갔던 후암동 화보 편집장이 사실 요화 배정자보다도 예뻤지요.’

‘하여튼 이 친구 말로 사람 죽이는데 뭐 있다고!’

'이 사람아 댄스 못 치는 날 양주 먹이고 니들은 꽉 껴안고 난리부르스 쳐놓고 지금 오리발이여?'

'하여간 이 친구는 아주 소설가로 나가야 해!'

 

 다음 날 헌수는 KBS 방송 최고참 여성부장 소개로 신참 여 아나운서 하나 뽑아 가려고 지망자를 무교동 낙지집에서 인터뷰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방송국 채리면 이제부터 더 바빠지니 아예 이참에 와서 신문은 날더러 맡으라고 한다.

‘나야 머릿속에 공자 맹자만 가득한데, 그런 사람 미국서 뭐 하겠니?’

‘우리 이대 동기 중에 여류작가 있어요. 지금 압구정동 개네 집에 묵고 있는데. 개도 싱글이고 곧 이민 올 거예요. 글 쓰는 사람끼리 이야기도 잘 통할 것이고... 미국서 넷이 골프 치면 딱 한 팀 되겠네. 페이 부담 없는 미국 골프장 얼마나 좋아요?’

‘헌수 이 친구 두 번이나 와서 권하다가 이번에 미인까지 대동해서 미인계로 나가는군요. 뜻이야 뼈에 사무치게 고맙습니다만....'

 그리고 말꼬리를 삼천포로 돌려 버렸다. 속초 이야길 끄집어냈다.

'속초는 영랑호, 진부령, 파브릭 코스 나인홀에 3만 원 합니다. 설악산 경치 오직 좋습니까. 거기 여교수와 한 조 새벽이슬 밟고 잔디밭 나가면, 고지대라 들꽃 향기 좋지요, 올려다보면 설악산 울산바위, 내려다보면 시퍼런 동해 아닙니까? 한 주에 두어 번 쳐도 부담 없습니다.'

'속초서 살았습니까?'

'네! 5년 살았지요.'

'이 친구 거기서 백화점 대표이사했지.'

'백화점 오픈이 열시니까, 현지 경찰서장 세무서장 그리고 여교수가 한 팀 멤버였어요. 아침 여섯 시

티오프 해서 나인홀 돌고. 영금정서 4인분 2만 원 하는 매운탕 먹고, 출근하면 10시 전입니다. 담배 한 대 물고 신문 보고 있으면 직원들 출근하지요.'

'신선놀음하셨군요. 골프는 그렇다 치고, 록키마운틴 가보셨지요? 빙하에 덮인 산, 숲과 호수, 천국이 따로 없어요.'

미리 작당한 듯 여자분이 계속 발동 건다. 

'속초는 록키마운틴만 못하지요. 그러나 천불동, 공릉 능선, 백담계곡 아십니까? 천하절경입니다. 콘도마다 온천 있습니다. 오색 탄산온천, 일성콘도 맥반석 온천,척산 알칼리 온천, 한일콘도 해수온천, 입맛 따라 골라가며 온천 가능해요. 모두 4천 원 합니다. 골짜기마다 약수 아닙니까? 오색약수, 갈천약수, 추곡약수, 삼봉약수 있고. 호수도 화진포, 영랑호, 청초호, 거기다 해수욕장은 고성에서 속초 주문진 강릉 부산 해운대까지 줄줄이 해수욕장입니다. 거기 푸른 파도 보면서, 통나무집 카페에서 진토닉 한잔하면 속초도 낙원이지요. 언제 글 쓰는 그분과 같이 한번 같이 가십시다.'

'헌수 씨 말대로 역시 선생님은 각설이 형님이고 약장수 저리 가라네요. 아주 관동팔경을 청산유수로 읊으시네?'

이렇게 노닥거리다, 핸드폰 통화 끝에 숙녀 한 분이 나타났다. 압구정동 그분이다. 부드러운 연초록 바바리코트 걸친 모습과 선이 갸름한 얼굴이 잘 어울렸다.

 2차는 창 밖 가로등이 진주 목걸이 같은 한강 야경과 한남동 옥수동 아파트 불빛 보이는 압구정동   아파트로 옮겼다.

 작가라더니 책이 많았다. 의사 남편이 남긴 아파트와 병원 빌딩 처분했고, 얼마 전에 포틀랜드 교외에 호텔과 갈빗집 하나 매입했다고 한다. 

 

 술 한잔 걸쳤겠다 돈 많은 과부집에서 뻥 치지 않는다면 그는 남자 아니다. 없던 이야기도 지어낼 판에 있던 이야길 왜 못하는가.
'대형 갈빗집 매입하셨다니 내 밥장사 한 이야기 하나 하지요. 밥 장사도 손님 많으면 재미있다고요.

 우리 건물 20층에 양식 중식 한식 식당 셋이 있었는데, 부임하니 가슴이 철렁해요. 손님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한쪽은  동해, 한쪽은 설악산 보이는 20층 스카이라운지면 뭐합니까? 사실은 완전히 물먹는 하마더라고요. 시설비 오십억 든 것인데, 15명 직원 인건비 월 2천만 원이 안 나와요.

 남들은 20층 건물만 보고, 이곳 사장은 좋겠구나 하지만 사실 죽을 맛이지요. 점심시간에 올라가면 가슴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요. 손님 없으니 딴짓하고 놀다가 사장 눈치 보며 비실대는 종업원들 보고 가물에 콩나물처럼 온 손님이 밥 맛 나겠어요? 왔다가도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 서울서 요식업 경험 30년 쌓았다는 부장, 서울서 스카우트 해온 조리과장과 몇 번긴급회의란 것도 해봤지만, 화타가 와도 병 고칠 재주 없어요.

그래 회의도 아무 소용없다 싶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칠 딱 두 달 내 방식대로 하고, 안 되면 전원 해고하고 문 닫겠다는 비장한 결심 했지요.

이런 이야기 아세요? 주방장이 주인 망하라고 막 퍼준 식당이 오히려 돈 번다는 이야기. 그걸 실행하기로 했지요.

 계산서는 이래요. 한 끼에 8천 원짜리 음식 백 그릇 팔면 마진 4십만 원입니다. 그런데 한 끼 6천 원받고 이백 그릇 팔면 75만 원입니다. 그래 음식 값부터 내렸어요. 동시에 품질은 올렸지요.

죽던지 살던지 결판을 내려고 시각적으로 보기 좋고, 실제 원가는 싼, 상추 배추 같은야채는 대바구니 가득 담아내고,젓갈도 변산반도의 줄포만 곰소 것이 최곱니다. 곰소로 사람 보내 사 오도록 했지요. 새우젓, 황강달이 젓, 갈치젓, 조개젓 큰 것 네 통이면 몇 달 갑니다.

 입에 단물 고이는 당귀잎 양양 보내서 구해오고. 새벽에 대포항 가니 꽁치 한 통 만원 합디다. 그걸 통으로 구워 한 마리씩 서비스로 상에 올리고, 해물탕의 그 감질나는 가리비 조개 손바닥만 한 큰 놈으로 바꿨어요. 문어도 중짜, 게도 큰 놈 알짜배기, 이걸 그냥 생짜로 내놓지 않고 주방에서 반쯤 익혀서 시뻘겋게 익어 효과 만점일 때  내놓도록 했지요.

 

 이래 놓고 사장은 시도 때도 없이 속초 기관장들 불러 술타령에 빠졌지요. 술 좋아하는 사장 메뉴 푸짐하게 바꿔놓고 맨날 기관장들 불러 퍼마신다고 부하들이 걱정했지요.

 그러나 진로 초창기 직원들 판매 전략 아시지요? 회사 돈 가지고 술집 다니며 ‘진로 한병 주시오’ 하면서 술 사 먹은 홍보전략. 그걸 직원들이 알 턱 없지요.'

'좌우지간 창현이 이 친구 뱃장은 옛날부터 알아준다니까.'

'그러다 문 닫으면 직원 가족 전부 실업자 가족 되잖아요?'

'그렇지요. 문제 심각하지요. 그러나 적자 내면 기업은 망합니다. 대수술 해야 해요. 하여튼 음식 막무가내로 퍼주는데 묘미가 있어요. 손님들이 보니 음식이 싸고 먹음직해요. 그래 물어봅니다.

‘김 사장 해물 매운탕 4인분 얼마요?’

‘4만 원입니다.’

‘김 사장 안 계셔도 이리 나옵니까?’

그래 내가,

‘어이 조리과장 이리 와봐!'

그러면 허연 터번 머리에 둘러쓴 조리과장 허리 굽히고,

'사장님 안 계시면 더 잘 나옵니다.'

장단 맞춥니다.

따지고 보면 해물 매운탕 1인분 만원 꼴입니다. 이만한 데 없어요. 직원 가족회식 겨냥한 맞춤 요리예요. 그 전략이 성공했지요. 웬 공짜냐 싶어 기관장이 부하 데려오고, 부하들은 가족 데려와요. 슬슬 동남풍 불기 시작했고요. 인구 10만 밖에 안 되는 속초에 금방 소문났어요. 금방 한 달만에 확 뒤집어 버렸지요.

 

 신나는 김에 여기에다 한 수 더 썼지요. 원래 음식은 기본이 김치 아닙니까? 하루는 식사하다가 식당 모든 사람에게 들리게 조리과장 불렀지요.

‘어이! 누가 이 김치 담갔어?’

 화내는 것처럼 말하니 과장이 뭐 잘못되었나 하고 내 눈치만 보더군요.

‘누구야? 누가 이 김치 담았어?’

재차 고함지르니 과장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합디다.

‘한 아무개 아줌마가 담았습니다.’

‘그래? 한 아줌마 불러와.'

그래 아줌마가 오길래, 

‘홍 과장! 이 아줌마 이 달부터 월급 5만 원 올려.’

 뚱딴지 부렸지요. 그리고 조회에서 일장 연설했어요.

'음식 솜씨? 그것도 원가입니다. 우리 식당 월 5천만 원 식재료 원가를 생각해봅시다.

 솜씨 좋게 맛있게 만들면 가치가 7천만 원8천만 원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솜씨가 나쁘면 가치가 3천만 원으로 내려갑니다. 고객은 맛없는 음식은 싫어해요.

 오색 그린야드 호텔 음식 좋지요? 거긴 양은 적고 가격은 비쌉니다. 도라지를 예로 들어 봅시다. 기름에 튀겨서 딱 서너 점만 깔끔하고 기품 있게내놓아봐요. 손님들 다 좋아합니다. 음식은 정성이 부가가치를 창조합니다. 그냥 무쳐서 한 접시 가득 내놓는 짓은 아무 소용없는 짓입니다.

 재료 적게 쓰고 값 비싸게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따따불 이익입니다. 솜씨와 정성이 식당 원가의 중요한 요인입니다.

사장이 여기서 하나 약속드립니다. '음식은 예술이고 창의입니다.앞으로 음식 만들 때 이번 김치처럼 창의력 있고 맛있으면 그분 월급 그 달 즉시 인상시킵니다.'

일장 웅변 토하고 난 그 며칠 뒤 바로 응답이 와요. 식탁에 도라지 튀김이 떠억 오른 거 있지요? 그 자리서  '이 도라지 튀김 누가 했소?' 조리과장에 세 물어보니, 또 그 아줌마네요. 쇠 뿔 단김에 빼야지요?

‘홍 과장 한 아줌마 월급 오만 원 더 올려.’

일하던 식당 아줌마들 모두 이소리 듣고 놀래 얼이 빠졌어요, 월급이 한 달에 두 번 오른 거지요.

빅뉴스 금방 손바닥만 한 속초시에 퍼졌고요. 이 소식 듣고 방문객이 나타났어요. 전에 주방 책임자였지요. 그는 월급 적다고 설악파크호텔 주방으로 갔는데, 전에 자기가 데리고 있던 우리 아줌마보다 월급 2만 원만더 올려주면 다시 돌아오겠단 겁니다.

 '2만 원 같은 소리 하네. 시시한 소리 마시오. 5만 원 올려줄 테니 와서 함께 해봅시다.'

그분이 찍소리 못하고 옮겨왔어요. 그 후 우리 주방은 속초 최고가 됐지요.

 이게 비법입니다. 

 

 직원 전체 임금도 올려버렸지요. 봄에 임금 인상철 와서 부장 과장 모아놓고 인상폭 말해보라니 한참 눈치 보다가 4%면 좋겠다고 우물쭈물해요. 그 이유는? 하고 물었더니 시시한 대답 하더라고요. 사장님은 전에 비서실장 하신 분이라 소신대로 하실 수 있다나요.

그래 내가 월 매출 5% 올려주면 임금 7% 인상하겠으니 어떠냐고 물었지요. 모두 어안이 벙벙 입만 벌려요. 이러면 속초 4개 대기업 중 수준이 어떻게 되냐 물었더니 중간된다는 겁니다. 그 전엔 꼴찌였어요. 

 직원들에게 돌아가서 뭐라고 하겠냐고 했더니, '사장님께서 결단을 내려... 어쩌고' 하는 대답 합디다. '에이! 사람들아 자네들이 사장한테 요구해서 올렸다고 왜 말 못 하나? 그 대신 월 매출 5% 올리겠다고 약속했다고 왜 말 못 하나?'

딱 이렇게 조치하고 그 달 실적 보니 매출 5% 거뜬히 올린 겁니다. 매출 5% 오르면 블랙 이븐 포인트가 팍 올라갑니다. 3% 임금 인상액보다 순익 훨씬 큽니다. 목표 달성 부서엔 보너스 100 만원 씩도 주었지요. 그게 뭔 줄 아세요? 다음 달 총매출이 또 5% 올라가요. 서너 달 보너스 지급하다 보니, 매출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직원들이 모두 죽기 살기 회사 일에 매달리는 거 있지요?

사기와 풍토를 완전히 바꿔놓았지요.  

 

'창현아! 그 피아노 치던, 네가 반해서 사죽을 못쓴 그 아가씨 이야기는 왜 빼먹나?'

'우리 양식당에 피아노 치는 아가씨가 있었어요. 포크와 칼로 랍스터 스테이크 자르는데, 무드 잡히라고 그랜드 피아노 놓고, 생음악 치게 한 아가씨가 있었어요.

그런데 손님이 음악 듣습니까. 아가씨 얼굴 봅니까? 무조건 음악학원 다 뒤져 얼굴 이쁜 애 구해오라고 했어요. 황당했을 거예요.

지금 그 노처녀가 음대 나왔다나 뭐래나 소릴 하데요. 그런 소린 무시하고 무조건 얼굴 이쁜 애 구해오라 했어요. 그 후 구해온 아이 보니, 얼마나 순진하고 이쁜지 나도 놀랬어요. 면접할 때 노닥거리며 나부터 말 좀 오래 붙이고 싶더라니까요.

 피아노 위치도 손님이 아가씨 얼굴 볼 수 있도록 방향을 180도 돌려버렸어요.

그랬더니 속초 한량들 난리 났어요. 밤 10시까지 커피 마시며 가질 않아요. 양식당 매상 쑥 올라갔어요.’

 

'대중심리를 잘 파악하셨군요?'

'다들 겉으로야 교양 찾지만, 남자들 본질은 원래 늑대 아닙니까?'

'지피지기라 이 말씀이지? 니처럼 늑대....'

 

'종업원 임금 문제, 원재료 원가 문제, 가격 책정 문제 요점 잘 짚으시고 잘 해결하신 거 같아요. 선생님 말씀, 정말 저에게 큰 도움 됩니다.'

'애숙아! 순진하게 그러지 마라. 티 난다. 다음에 김 선생님을싸부로 모시든지 말든지 네 맘이지만, 처음부터 이래서 쓰겠나? 속도 조절 좀 해라.'

'아니다 애! 지금 출가한 애들한테 상의하겠나? 김 선생님 너무 고마운 분이셔!'

'재가 아주 춘향이 이도령한테 하듯 팍 엎어지누먼!'

 이러고 꼭 미국 오시라 신신당부하고 그분은 헌수팀과 함께 물 건너갔다. 그 시절 회상해보니 영어나 공부 잘한 것 실력 아니다. 컴퓨터처럼 복잡한 사람 마음 휘어잡는 재주가 더 실력이다. 그땐 그걸 몰랐다. 

 황혼에 자기 알아주는 친구 하나쯤 세상 어디 산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