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사와 오간 편지

고향의 달 /경남미디어신문 이선효 편집국장

김현거사 2018. 12. 30. 16:46

고향의 달 
    

                                                                                                    수필가   김창현            

 

  지금도 서울의 달은 고향 달과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공중에 뜬 달이 무슨 서울 달 고향 달이 따로 있겠냐마는, 젊은 시절 뼈져린 가난의 경험 때문인지 서울 달은 고향 달과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결혼 후 집은 창동에 있고, 직장은 명동에 있었다. 퇴계로서 버스 타면, 차는 남대문, 시청 앞, 중앙청, 혜화동, 미아리, 수유리를 거쳐 두 시간만에 창동에 닿았다. 거기 지하 전세방에 살던 나는 박봉이고 전망도 어두웠다. 칼바람 귓전 때리던 벌판이 있었다. 얼어붙은 땅에 비치는 달빛은 차거웠다. 허공에서 전선은 웡윙 날카로운 소릴 내고 울었다. 땅바닥에 찍힌 시커먼 전붓대 그림자가 내모습 같았다나는 왜 이런가. 울고싶은 심정으로 포장마차를 찾아가곤 했다. 잔소주에 뜨껀뜨껀한 오뎅 국물을 목구멍으로 넘길 때, 목 메이게 그립던게 배건너 우리 집 앞 육거리 달빛이다.

 육거리 한쪽 길가에는 여름 내내 평상이 놓여있었다. 달은 항상 평상에서 빤히 보이는 길 건너 한약방집 양철지붕 위로 떴고, 그 집 창문 커텐 뒤에는 숨어서 밖 내다보는 수줍은 두 딸이 있었다. 평상엔 매일 세 여인이 나오곤 했다. 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은경이 엄마는 농대 전임강사 부인으로 서울 사람이다. 처녀 때 문학을 좋아해 항시 그 듣기 좋은 서울 말로 문학을 이야기 하곤했다. 약방 안주인 키 크고 성격 시원한 용환이 엄마는 항상 드링크 들고왔고, 모시 적삼 즐겨입던 오십대 길년이 엄마는 빼어난 미인이었다. 의붓딸만 있고 자식이 없어서 그런지 항상 먹성 좋은 나에게 친절하게 뭔가 챙겨주곤 했다. 모인 사람들 모두 한가족 같았다. 지금 그 사람들은 어디 사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모기향 피워놓고 부채 부쳐가며 참외 깍았고, 밤 이슬이 내려야 평상에 눕혀놓은 잠든 아기 안고 집에 돌아갔다. 그 시절 달빛은 그처럼 다정했다.

 간혹 나는 바다 건너 영국을 습격한 바이킹처럼, 간혹 강 건너 도동을 습격하곤 했다.  수박 서리하여 물 건너 오느라면,  달빛은 물 위에 영롱하여 산과 들을 홍건히 비쳤다. 도둑질 중에도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흐르는 금빛 노을에 배를 맡겨 봅니다. 이호우의 달밤‘을 외곤했다.

 이태리 청년의 벨칸토 세레나데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칠암동 어느 소녀네 집 울 밖에서도 트롯트이긴 했지만 세레나데가 바쳐지곤 했다. 추워서 외투 깃을 세우고 떨면서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곤 했다. 지금은 없어진 용사회관, 국보극장, 진주극장은 이제 이름만 정답다. 다 없어져 버렸다. 과외지도 선생님 눈 피해 도둑영화 보고 스릴 있게 진주교 넘어올 때, 다리 위를 서성이던 달빛은 얼마나 밝았던가.

  그러나 지금 서울의 달은 뭔가 허전하다. 희뿌연 달이 스모그 속을 헤매다가 보는 사람 없이 서해로 실종된다. 서울의 달은 잊혀진 여인 같다. 고향의 달처럼 잊지못할 달이 아니다. 더 이상 그리운 존재가 아니다. 이제 사람들은 달을 잊고 살고, 나 혼자만 고향 달 생각하며 허전해 하는 것 같다.

(경남미디어 2019년 1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