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 천리 길 1

고향 친구의 맛

김현거사 2018. 4. 30. 09:17

 

 

 고향 친구의 맛

 

 전어는 남해 선소방파제에서 콩대불로 구으면, 고소한 냄새가 삼천포까지 날라간다고 한다. 10월3일 '남강문학' 2호 출판기념회 차 진주 가서 그처럼 고소한 고향 친구 맛을 보고왔다.

 먼저 고속버스 터미날 옆에 있는 고려병원 원장실에서다. 그는 내 전화 받고 뭘 선물할까 생각해봤다고 한다. 캐비넷 열더니 담배 몇 갑 꺼냈다. 단종된지 1년 된 도라지 담배다. 담배는 아편보다 끊기 어려운 것이다. 내가 도라지 피우는 걸 알고 그 아까운 귀물 내놓는 맘이 짜릿하게 느껴졌다. 복도에 대기하는 환자들 많았다. 병원장 붙들고 오래 노닥거리면 안되는데 잠시 얼굴만 보고 간다는 것이 3시간이나 지체되었다. 부인이 함양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좋은 스님 있으니, 가서 하루 밤 같이 보내자고 한다. 나 역시 불교신문 기자 출신이다. 가서 하루 밤 묵으며 스님 목탁소리 음미할 기회를 시간이 없어 누리지 못해 섭섭했다.

 그날 밤 '남강문학' 2호 출판기념회 끝나니 가을비 내리고 있다. 숙소 이동이 문제인데, 합천 이영성 시인이 전화를 걸자 한 친구가 차를 가지고 나타나더니 우릴 숙소에 태워준다. 마산 MBC 전무 퇴직한 병화 친구다. 그는 남강문학회 선배님들 대접하라면서 맥주를 한보따리 사주었고, 이튿날 아침엔 진주시청 뒤 해장국 맛을 보여주었다.

 개천예술제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온 유안진 교수와 점심하고 나오니, 50년 전 친구 볼려고 밖에 초등학교 동기 셋이 기다리고 있다. 덜덜거리는 고물차 끌고온 오교장이 좌중의 눈치를 보며 이랬다.

 '가을 아이가? 북천 코스모스 꽃 구경가자.'

 키가 일미터 팔십 삼. 함께 온 원호란 친구는 육거리 우리집 근처에 살았다. 얼굴 하얗던 여동생은 남해로 시집 가서 병원집 안주인이란다. 삼영이는 ‘옥경이’ 같다. '언젠가 어디선가 본듯한 얼굴'인데 50년 전 친구 이름이 한참 생각나지 않는다. 뒤에 그가 문학 좋아했던 게 기억났다.

 북천역은 공기가 맑아 그런가. 코스모스 꽃빛이 그리 맑고 향기도 좋다. 꽃은 고향꽃이 더 곱고, 친구는 고향 친구가 더 좋다. 

 나선김에 다솔사도 둘러 보았다. 다솔사 최범술(崔凡述) 스님은 망경남동 우리집 근처에 사셨다. 교육감이시던 아버님과 알던 분이다. 나는 해인대학에 평행봉 하러 가곤했다. 고리삭은 양복 입은 대머리 땅달보가 해인대학 학장 효당(曉堂)스님 이다. 우리는 스님을 우섭게 보았다. 한길에 지나가는 여학생 볼려고 담 위에 앉아 히히덕거리면, 퇴근하던 효당스님이 이를 보고 쫒아온다. 담에서 내려오라고 새 쫒듯이 손짓발짓 하며 뛰어오지만, 우리는 못본체 눈도 깜짝 않는다. 태연히 앉아놀다가, 스님이 곁에 오면 담 넘어로 훌쩍 뛰어내렸다. 동작 느린 스님은 닭 쫒던 개처럼 멍하니 섯다가 돌아간다.

 우리가 놀려먹던 스님이 나중에 알고보니, 대단한 인물이다. 성철스님을 출가시킨 분이 효당스님이다. 총각 성철은  절에서 독서 하다가 효당을 만났고, 그 후 해인사 찾아가 출가했다. 만해스님과 소설가 김동리의 형 김범부와의 교류도 그렇다. 해방 전 다솔사는 그분들 교류처다. 소설가 김동리는 그분들 옆에서 중국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이야기 듣고,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썼다. 김동리는 화개에서 면서기도 했다. 거기서 낳은 아들이 대한문 박근혜 탄핵 반대 집회서 명연설한 김평우 변호사다.  

 다솔사는 우리나라 차의 발원지다. 화개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가 있지만, 다솔사 적멸보궁 뒤 차밭은 효당이 가꾼 차밭이다. 내가 꼭 한번 가보고싶던 곳이다. 효당은 초의스님 이래 근세 한국 최고의 차 이론가다.  초의스님의 '동다송'은 차에 대해 문의하는 지인에게 편지로 답한 글이다. 중국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발췌한 내용이다. 그러나 효당의 저술은 그렇지 않다. 1975년 보련각에서 나온 '한국의 차도'는 이런 면에서 주목 받아야 할 저술이다. 근세 한국의 차인으로는 전라도 무등산에 의제 허백련이 있고, 경상도 봉명산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이 있다.

 효당은 반야로(般若露)란 이름의 차를 만들었는데, 나는 한번 인사동에서 스님 부인을 만난 적 있다. 그분은 진주여고 출신으로 연세대 사학과를 나왔다. 나보다 두 살 아래다. 다솔사를 자주 찾다가 효당 부인이 돌아가시자, 시중을 들었다. 스님 입적 후 인사동에서 반야로(般若露) 차회(茶會)를 운영하며, 다도 배우러 온 여대생에게 노자를 가르키고 있었다. 나도 동양철학 전공한 사람이다. 마침 어릴 때부터 스님을 잘 안다. 스님이 일본 황태자를 척살하기 위해서 상해에서 폭탄을 날라 박열의사에게 전한 에피소드를 신명나게 소개했다. 여대생들 반응이 의외로 좋자, 채원화 원장이 날더러 같이 차회를 운영하자고 했다. 그 차회는 그후 발전하여 주한 외교사절 부인들 중심으로 년중행사 갖고있고, 지방에도 지회가 있다. 그때 응했다면 지금 효당본가 반야로 차도문화원 부원장 쯤 하고있을까.

 돌확에 고인 약수 한사발 맛보고, 진교 백련리(白蓮里) 백자 가마터 찾아갔다. 일본에서 국보로 치는 찻잔 '이또다완'(井戶茶碗)이 이곳에서 간 거라는 설이 있다.  동네 이름이 새미골인데, 샘은 한문으로 정(井)이요, 정호(井戶)는 일본말로 ‘이또’다. 백련리에서 16세기 막사발 굽던 가마터가 발견되었는데, 분청, 상감, 철화백자도 나왔다.

 이 백련리에 두 사람이 가마터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서 요정을 하던 진주여고 출신 장금정 씨와 대아고 이사장 박종한 씨다. 그 옆은 내 동기 전춘식 사장 골프장 세울려고 확보한 부지다. 전사장이 장금정씨에게 연꽃차 대접받은 적 있다 했다. 전사장한테 전화로 위치 물어가며 찾아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다. 일요일이라 가마터는 문을 닫았고, 취화선 촬영지란 팻말만 보인다. 백련리는 동네 논이 전부 연밭이다. 연 중에 하얀 백련만 키우는 연밭이다. 마침 거기 연밭 안에 새댁이 한 분 서 있다. 그래 일행에게 이태백의 채련곡(採蓮曲)을 소개했다.

'약야계 물가에서 연꽃 따는 아가씨, 작은 조각배를 타고 웃으며 연꽃 너머 사람과 이야기하네. 햇빛이 새로 화장한 얼굴 비치니 물밑까지 환하고, 바람은 향내 나는 소매를 날려 공중에 올리누나'.

 연꽃 이야기 끝나자, '지리산 흑돼지가 좋나, 삼천포 사시미가 좋나?' 오교장이 저녂을 살 모양이다.그러고 간 곳이 역전 근방 어느 횟집이다. 상 위의 우렁쉥이, 개불, 전어, 도미, 우럭이 놀랍다. 서울 횟집에 나오는 그런 것과 비교되지 않는다. 너무나 싱싱하고 감미롭다. 어제 밤 남강문우회 술로 녹초가 된 농파 시인은 상 앞에서 졸기만 했다. 차 속에서 심호홉으로 기력 회복한 나는 원기왕성 고향 미각을 완벽히 음미했다.

 잠을 장대동 오교장 집에서 자고 아침에 여뀌꽃 붉은 선학산(仙鶴山)을 올랐다. 남덕정(覽德亭) 사대(射臺)에 올라가 국궁(國弓) 몇 발 날려보았다. 풍세(風勢) 가름하며 고요히 숨을 멈추고 복식호홉 해보았다. 국궁이 건강에 좋다고 한다.

 산에서 내려오니 아침 밥상에 노릇노릇 잘 구워진 팔뚝만한 생선이 놓여있다. 생선 이름 물어보니 민어조기란다. 어릴 때부터 삼천포 갈치에 입맛 들인  거사다. 50년 전  맛이 살아나 완전 감복해버렸다. 생선아 반갑구나 너 본지 얼마더냐. 부인이 저간의 사정 짐작한듯 또 한마리 민어조기와 김을 구워준다. 이런 품위있는 손님 대접이 옛 진주 풍속이다. 간장게장과 버섯구이 맛은 또 어떻던가. 사람 사는 곳에 다시 돌아온 기분을 느꼈다.

 그날 아파트 나설 때 부인은 지금도 귀에 쟁쟁한 마지막 인사말을 던졌다.

 '간밤에 선생님이 주무신 그 방은 선생님 방입니다. 이제부터 진주 오시면 언제던지 그 방을 쓰시이소‘.     (2010년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