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이즈하라로에서 최익현선생 추모비가 있는 수선사를 방문했다.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볼모로 유배되었다.그후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순국하셨다.

선생이 단식한 방 앞에서
대마도는 일본서 제일 오지라 한다. 인구는 3만7천. 16세기에 양주 허씨, 관매도에 살던 강릉 함씨 후손들이 옮겨와서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는데, 현재 거류 한국계 인구가 얼마냐고 물어보니, 모르쇠로 일관.
일본인은 오지도 않고, 방문객 95%가 한국인이라 한다. 전복 진주조개 양식, 낚시가 주 수입원이라는데, 전부 외지로 팔려나가고, 현지엔 도미나 바다장어 사시미 파는 집 하나 없다. 멋진 해물바비큐나 꼬치구이, 가라오케 기대했으나 기대한 사람만 잘못. 부산서 낚시꾼이 많이 온다고 한다.
이즈하라는 인구 1만 2천의 손바닥처럼 작은 동네였다. 동네 중심 가로의 수로 속에는 복어떼가 많이 헤엄쳐 다녔다. 조선통신사 유적비, 신라국사 박제상 순국비,高麗門 표지석 등 몇군데 유적들을 걸어서 돌아댕겼다.
이곳이 쓰시마섬의 島主인 백작 '소오 다케유키'와 덕혜옹주가 살았던 곳이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고종이 회갑연에 얻게 된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일본 왕 왕족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양귀인은 유방암으로 죽었고, 아버지 고종 역시 뇌진탕이라고 일본사람들은 말했지만 알 수 없는 사유로 붕어한 후였다.일본 아이들은 옹주를 '조센징의 공주' 라며 심한 이지메(왕따)를 했다고 하며, 식수조차 독이 있을까봐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이제 내 곁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쓸쓸해.무서워.어마마마.아바마마.보고싶어요.'
결국 망국의 왕녀로서의 외로움으로 정신이상이 생겼고, 1931년 5월 쓰시마섬[対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오 다케유키(宗武志) 당시 동경제대 학생과 강제 결혼하여,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를 낳았으나, 덕혜옹주의 딸 정혜 역시 20대 초반에 연애결혼 하였으나 어머니의 결혼생활 못지 않게 불행하여 2년 뒤 유서를 남기고 가출하였다. 그의 행적은 현해탄 투신자살 설. 해방 후 종가 사람들에 의한 살해설.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설로 끝난다.
덕혜옹주는 다케유키 家의 모든 사람이 일본황실이 보이는 쪽으로 엎드려 절을 했으나, 혼자 꿋꿋히 조선의 자존심을 지켜 절하지 않았다고 하며, 정신병원에 있다가 1962년에 한국으로 귀국하여 창덕궁 낙선재에 이방자 여사와 같이 살다가, 1989년 77세로 타계했다.
슬픈 비운의 공주였다.

이번 대마도 여행은, 갈 때는 윤심덕의 자살, 올 때도 덕혜옹주의 슬픈 이야기로 끝을 맺았다. 이즈하라 항구 고속 페리 타는 부두 사무실 앞에 핀 하얀 동백꽃이 너무나 곱다.
(201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