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과 오간 편지

동방문학

김현거사 2016. 10. 8. 07:45

요즘 시라는 것이 '난해한 말작난'이라는 그 말 참 시원합니다.

공감합니다.

 

요즘 시인들은 아무런 감흥도 없는 걸 쓰며 그냥 말장난만 합니다.

독자들은 영리해서 아무도 그런 시를 읽지 않습니다. 

독자가 없는 시, 독자에게 처참하게 버림 받은 시가 현재 한국 시의 현주소이지요.

소설 수필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전부 자기의 시집 수필집을 자비로 출판해야 합니다.

아무도 돈 주고 그걸 사가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 시집이 시집일까요?

그 결과 문인은 대중가요 작사자, 하다 못해 삼류 코메디안보다 대접받지 못합니다.

 

좋은 시는 천년 2천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두보나 이태백이 그렇지요.

반성해야 합니다. 뜯어고쳐야 합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동방문학 운영자" <dongbangsi@hanmail.net>
받는사람 :
날짜: 2016년 10월 07일 금요일, 18시 21분 15초 +0900
제목: 난해한 말장난이 현대시란 이름의 최고 시가 되다


Daum 카페

 
난해한 말장난이 현대시란 이름의 최고 시가 되다

난해한 말장난이 현대시란 이름의 최고 시가 되다

-두 ‘미당문학상’ 수상작 두 편의 시를 분석적으로 읽고 난 후 나의 생각 정리하기


이시환(시인/문학평론가)



 과연, 시(詩)란 무엇일까? 시란 ‘당대인들이 시라고 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궁여지책으로 말하곤 한다. 시의 개념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시의 날개에 해당하는 형식으로부터 알몸에 해당하는 본질적 요소에 이르기까지 바뀔 수 있음을, 아니 바뀌어 감을 실감한다. 모든 것은 필요에 의해서 정하기 달려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시를 쓰는 사람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면 맑고 깨끗한 언어를 부리게 되어 있고, 머릿속이 복잡한 사람은 복잡한 시를 쓴다는 점이다. 그렇듯, 인간 사회의 불합리나 모순 등 현실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내용으로 즐겨 쓰게 되지만 자연현상에 대한 경이(驚異)나 아름다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그러한 내용으로 즐겨 쓰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한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그 시인의 바람[願]과 꿈[希望]은 물론이고, 심성(心性)과 관심(關心)과 지력(知力)과 성격(性格)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시란 것도 근원적으로는 사람이 서로 공감(共感)공유(共有)하고자 하는 욕구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이기에 그 결과인 작품이 가지는 대사회적대인간적 영향력의 크기에 따라서 작품의 우열(優劣)이나 가치(價値)가 매겨지는 경향이 짙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무리 완성도가 높은 작품일지라도 상대적으로 똑똑한 소수의 독자인 평론가들로부터 외면 받으면 호평 받지 못할 뿐 아니라 다수의 독자들에게서 나오는 인기를 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평론가’라는 사람들이 작품과 독자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논리(論理)’ 내지는 ‘궤변(詭辯)’으로써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적극 유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가 하면, 광고(廣告)나 기사(記寫)나 문학상(文學賞)이나 먼저 이름을 얻은 유명시인의 찬미(讚美) 문장(文章) 등이 그 평론가의 기능을 일정 부분 대신하기도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많은 시인들은 넓은 의미의 독자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 노력이 ‘꼼수’가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시가 시인의 경험적 자극에 대한 느낌감정생각의식 등을 솔직하게 혹은 가공해서 짧게 표현하기 때문에 그 수단인 언어가 다분히 정서적이고 음악적이고 함축적인 속성을 띠게 되는데, 특히 문체(文體)에 반영되는 수사(修辭)의 역할이 매우 크다. 하지만 시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믿음이 부분적으로 깨어지고[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과 환경이 바뀌어가면서 시에 기대하는 효과나 시가 놓이는 자리 곧 그 위상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된다.


 나는 요즈음 주체가 다른 ‘미당문학상’을 수상한 두 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상기한 나의 개인적인 시관(詩觀)을 재확인하게 되어 씁쓸하기 그지없다. 솔직히 말해, 나는 시를 시로서 고집하고 싶은데 다른 사람들은 ‘변화가 창조인 양’혹은 시에 대한 이해도 차이로 기존의 틀을 자꾸만 깨기 일쑤이다. 이러한 내가 심사했다면 문학상은커녕 아예 예심에서조차 제외시켰겠지만 역시 심사위원들에겐 변화가 창조적인 발전으로 이해되었는지 거창한 이름의 문학상을 준 것이다.


 차제에, 나는 그 두 작품을 다시 한 번 더 면밀히 읽으면서 감상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시 읽기를 좋아하는 여러분들도 그 두 작품을 동일선상에 놓고 나름대로 감상해 보기 바란다. 두 작품은 이미 언급했다시피, ‘미당문학상’이란 같은 이름의, 수여자(授與者)가 다른 상(賞)을 각각 받은 것들인데, 하나는 김행숙의 「유리의 존재」라는 작품으로 중앙일보 2016년 9월 22일(목) 지면에 소개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정례의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라는 작품으로 「미당문학」통권 제2호에 소개된 것이다.


 두 수상작을 낸 심사위원들의 명단이나 그들의 심사평이나 수상자의 말[수상소감 내지는 이들 작품과 관련 뒷얘기 등] 따위는 생각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작품의 전문(全文)만을 꼼꼼히 읽으면서 나름대로 느끼어 보기 바라며, 나 역시 그러할 것임을 약속한다.


 생각해 보건대, 이런 돌출 제안은, 우리 ‘현대시의 경향’ 내지는 ‘두드러진 특징’을 가늠해 보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만약 여러분이 나의 분석적인 판단에 동의한다면[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는다면] ‘현대시’라는 이름으로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해 주는 시문학 관련 지성인들(?)의 시관(詩觀) 곧 변화 당위에 대한 논리(論理) 내지는 궤변(詭辯)에 대한 분별(分別)이자 재확인(再確認)이 될 줄로 믿는다. 따라서 어떠한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메이지 말고, 여러분 개인의 독자적인 눈으로써 읽고 마음으로써 먼저 느껴 보기 바란다. 그런 연후에 이들 작품 관련 심사평이나 시인의 말이나 다른 사람들의 촌평 등을 확인해 보시라. [계속]

'문인과 오간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一峰 鄭泰秀 學術賞」 제정  (0) 2016.12.13
혜림선배님. 좋은 시집 잘 읽었습니다  (0) 2016.11.25
김영사 출판문의  (0) 2016.08.29
의암 시비 건  (0) 2016.08.13
의암 시비  (0) 2016.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