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전자책·내가 만난 대통령

내가 만난 대통령<완결>

김현거사 2016. 9. 17. 07:10

내가 만난 대통령

 

 

목차

 

내가 만난 대통령 제1편 (노무현. 김대중씨 편)

내가 만난 대통령 제2편 (전두환. 박충훈 대통령 권한대행 편)

내가 만난 대통령 제3편 (박정희 박근혜씨 편)

 

내가 만난 대학총장 제1편 (k대 김총장님)

내가 만난 대학총장 제2편 (y대 박총장님)

 

 

  내가 만난 대통령 제 1편 (노무현. 김대중씨 편)

 

 

옛날에는 그들을 ‘상감마마’라고 불렀다. 드라마에선 신하들이 그들과 대화할 때면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하고 머릴 구부린다. 시대는 바꿨지만,그들은 옛날이라면 왕이다. 왕과 알현한 사건은 옛날엔 양반도 족보에 올릴 대사건이지만, 요즘은 시대가 변하여 꼭 그렇진 않다. 여기 그들과의 짧은 스침을 소개한다.

처음 이 글의 발단은 문우들과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가면서 차 안에서 시작되었다. ‘요즘은 스피드 시대라 수필도 분량이 길다고 잘 읽지 않는다. 함량미달 작가의 횡설수설한 수필이 많다.’ 그래서 내가 ‘그러면 이런 이야기는 어떻소’하면서,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 내가 만난 대통령 이야기 몇개였다. 그랬더니 동석했던 여류시인이 '그런 이야기는 재미라도 있어 좋다'는 반응이라 글로 엮은 것이다. 

 

 나는 남의 비서 노릇을 20여년 하였다. 이런저런 일로 노무현, 김대중, 박충훈, 전두환,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만났고, 박정희 대통령은 근처에만 가보았다.

 

 노무현 씨는 노래방에서 만났다. 한번은 비서실 직원들과 회식 하다가 3차로 한남동 필하모니란 노래방에 갔는데 그때 술은 이미 만취상태였다. 거기서 안면있는 사람이 보이길래, 반갑다싶어 청하지 앉는 그들 좌석에 털썩 앉고보니, 노무현씨와 손숙씨 였다.

 손숙씨는 학창시절 연극한다고 교정에서 멋 부리고 다니던 여학생이다. 내가 먼 발치로 꽤 이쁘다고 여기던  같은 63 학번이다.

 '이 아줌마가 내가 안암동에서 보던 안면 있는 아줌마네. 여긴 웬일이셔?' 

 말을 걸자 미인은 생각보다 붙임성 있다. 당장 동문인줄 눈치채고,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아는 체를 해준다.

 그런데 안다고 착각한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다. 신문에서 자주 본 얼굴을 아는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다.

'선생은 안면은 많은데, 지금 가만히 보니, 신문과 TV에서 본 사람이요. 실수했소.'

 사과하니, 그 남자는 옆에 앉은 미인을 고려했던 것 같다. 화통하다. 신문과 TV에서 자주 보았다는 말도 기분 나쁘지 않던 모양이다.

 '아!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동포 아닙니까. 자! 잔 받으시오.'

 양주 잔 권네준다. 이렇게 남의 자리 앉아 계속 한 일은 실수 밖에 없다.

 '어! 잔 비었네. 앞에 앉은 신사숙녀 두 분! 이러시면 곤란하지. 어이 이쁜 아줌마! 내 잔이 비었어.' 

 술 따라 달라고 야단법석 떨고 결국 양주 한 병을 완전히 비워버렸다.

 또 노무현씨 노래 지명이 와서 그 양반이 무대로 올라가자, 나는 그가 마치 나의 친한 친구라도 되는 양 같이 올라가 마이크 잡고 노래 세 곡을 함께 불렀다. 그리고 노래 끝나자, 주정뱅이가 무슨 짓을 못하나? 마이크를 쥐고 취한 목소리로 사회자를 불렀다.

 '어이 사회자 양반! 이 사람이 우리나라 가요계의 황태자 남인수 고향 진주 사람인 줄은 잘 모르시네? 내 노래도 한번 넣어보소.' 

 이러곤 순서에 없는 노래 세 곡을 연속곡으로 불렀다. 이런 걸 안하무인이라 한다. 

 그때 보니 노의원도 나름대로 멋 있다면 멋 있다. 니가 내 노래 같이 불렀으면, 나도 니 노래 같이 부른다 싶었던 모양이다. 함께 마이크 들고 남인수 노랠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그날 운 좋았다. 임자 잘못 만났으면 시비 붙어 챙피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속된 말로 남자였다. 나중에 비서실 직원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죄송합니다. 저희 그룹 비서실장님인데, 만취해서 결례 많았습니다. 오늘 계산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사과 했을 때 그 양반 댓구가 맘에 들었다.

'나도 술 좀 하는 사람이요. 계산은 필요없소.'

였다.

 그날 나는 완전히 뻗어 직원 네 명이 은마아파트 우리 집에 엎고가서 놓고 갔다.

 훗날 나는 손숙씨를 뽀빠이 이상룡이 사회를 본 대학 홈컴잉 자리에서 만났다.

 '전에 필하모니에서 결례한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올시다. 기억 나시지요?' 

 그랬더니 손숙씨는 빵긋 웃었다.

 '아니네요, 정말로 재미있는 분이시던데요.'

이런 연유로 나는 노무현 손숙씨께 지금도 호감 갖고 있다.

  

 김대중씨는 속초에서 만났다. 대통령 유세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한번은 관리부장이 내 방에 와서 오피스텔 두개와 강당을 김대중씨가 쓴다고 보고했다. 부장 생각엔 우리 빌딍의 빈 공간 빌려주고 얼만가 사용계약금 받은 일 칭찬받고 싶었던 같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어? 돈을 받아? 그쪽에 연락해서 돈 돌려주시오.'

 그러자 부장은 선뜻 이런 지시가 이해 안가던 모양이다. 쭈삣거리며 눈치를 본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김대중씨는 우리나라 3김 중 한 분이요. 그런 분한테 돈 받으면 쓰나? 오히려 우리 백화점에 와서 강연해줬으니 백화점 피알해준 것인데... 우리가 도로 그 양반한테 광고비 줘야지...' 

 그랬더니 금방 속초 당 지부장한테서 전화가 온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조치를 선생님께 보고했다느니 어쩌니....'

돈 없는 야당 신세 하소연 겸해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나야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는 지붕 위 닭처럼 보는 사람이다. 관심 없다. 그러나 같은 호남 출신 우리 그룹 회장은 어떨까 싶었다. 그래 미리 보고는 해두는 것이 좋겠다 싶어, 전화를 드렸더니, 노회장이 무척 반가워 한다.

'그랬어? 그럼 김대중씨 오시면 자네가 한번 만나소. 내 안부도 좀 전하고....' 

말하자면  만나서 자기 생색을 좀 내라는 것이다.

'그러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속초 당 지부장에게 연락했더니, 얼마 않되어 선생 면담 시간 알려준다.

 그러자 우리 그룹 종합조정실에서 난리 나버렸다. 김대중씨를 절대 만나선 안된다는 것이다. 아들 회장이 대통령 출마한 이회창씨와 경기고 동창이다. 선거 자금도 좀 건넨 것 같았다.

'알았어요.'

 일단 이렇게 대답 했지만, 일은 꼬여버렸다. 아버지는 만나라 하고, 아들은 만나지 말라고 펄펄 뛴다. 그날 그룹 본사는 밤 10시까지 만나지 말라는 다짐 전화를 무려 세번이나 나에게 하였다. 또 김대중씨 쪽도 문제다. 멀쩡히 면담 신청해놓고 금방 어떻게 그걸 취소시키나? 

 '아따 호떡집에 불 났어? 골치 아프게. 만나고 안만났다고 보고하면 그만이지.' 

이게 한참 골치 썩이다가 내가 내린 결론이다. 

 

 이튿날 김대중씨 만날 때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노회장 안부만 전하려고 면담 신청했다긴 뭔가 싱거워서 궁리해서 낸 것이 내가 당시 출판한 책 한권을 증정 하겠다는 구실이었다. 

 대통령 나온 사람이란 그런 정돈가 싶었다. 15층 복도 전체가 그 분 만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 이었다. 한없이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니 정동영 정희경 두분이 수행하고 있었다. VIIP라고 우리 직원이 방에 병풍도 하나 갖다 놓았다. '백화점 사장님 이십니다.'

  속초 지부장이 나를 소개하자, 

'서로 인사하세요.'

 김대중씨는 손을 뻗어 뒤에 배석한 두사람을 가리킨다.

 '아! 이분들 제가 잘 아는 사람 입니다.' 

 생판부지인 내가 이리 대답하니 정작 당사자가 더 놀랬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도 따져보면 틀린 말 아니다.

'이분들은 요즘 신문과 TV에 맨날 나오는 분들 아닙니까?'

 그래서 모두 웃고 말았다. 

 다 바쁜 처진데 우물쭈물 할 필요없었다. 나는 바로 본론에 들어 갔다.

 '평소 제가 듣기로 선생님은 책 많이 읽는 어른으로 알고 있어, 혹시 지방 다니실 때 비행기 기다리는 시간에 보시라고 책 한 권 올리려고 왔습니다. 제가 쓴 책인데, 동양 고전 40여 편을 간략히 소개한 책 입니다. 그리고 저희 노회장님 안부 전해 올립니다.'

 그러자, 김대중씨는 책을 척 펼쳐보더니,

 '아 출판사가 김영사군요. 김영사 좋은 출판사지요. 얼마 후 내 책도 거기서 나오는데....'

그러면서 배석한 사람에게 자기 책을 가져오라해서 즉석 휘호하고 건네준다. 한길사에서 나온 <나의 길, 나의 사상>이란 책이었다.

 

 

 

 

 

곁들여 본인 이름 새겨진 탁상시계와 만년필도 선물한다. 나는 책 하나 주고 책과 탁상시계 만년필 셋 얻었으니 장사 잘 한 셈이다. 훗날 이 만년필은 살갑게 구는 호남 출신 후배에게 주었다. 김대중씨 휘호 새겨진 만년필은 그에게 귀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이날 강연 마치고 돌아갈 때, 선생은 나에게 또다른 선물을 하나 주고 갔다. 내 집 찾아온 손님이라 가신다고 배웅 차 백화점 입구로 나갔더니, 수많은 인파 속에서 어떻게 나를 보았던지 모르겠다. 인파를 헤치고 내게 닥아오더니, 손바닥을 입에 대고 가만히 귓속말을 건넨다.

'회장님께 잘 다녀갔다고 안부 전해주시오'

내용은 별 거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정치 9단의 그 제스쳐의 의미를 몰랐다. 이튿날 아침에야 깨달았다. 새벽에 대명콘도 골프연습장에서다. 경찰서장 만났더니,

 '김사장!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소? 아침마다 만나는 사람이....'

 이상한 소릴 한다.

 '아니 서장님 무슨 말씀입니까?' 

물으니,

 '친한 사람한테 숨기고 그러지 맙시다. 수사과장한테 어제 일 다 보고 들었소. 김대중 선생과 귓속말 한 거...'

 한다. 보고 받고, 나를 서울의 무슨 대단한 거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 참 군중 앞에서의 정치인 귓속말 하나가 이처럼 약빨이 강하다. 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경찰서장과 같이 운동하던 세무서장 이다. 그는 호남 분인데,  그날 아침밥을 사겠다고 나섰다. 지방에서 경찰서장 세무서장 백화점 사장이 만나는데, 세무서장이 물주겠는가. 그런데 서열 역전된 것이다. 그 뒤부터 두 서장이 날 대하는 태도는 백팔십도 은근 정중으로 변했다. 다 선생님 덕이다.

 

내가 만난 대통령 제2편

 (전두환. 박충훈 대통령 권한대행 편)

 

 전두환 사령관을 만난 곳은 신당동 이다. 박정희 대통령 빈소 앞에 별을 단 군인이 퍼런 잠바에 권총을 차고 앉아 있었다. 살벌한 표정으로 앉은 그 모습은 '누구라도 고인의 존엄을 훼손할 수 없다. 만약에 그런 자가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대통령이 피살된 그 당시 재벌들은, 그동안 신세는 졌지만 혹시 잘못 나섰다가 찍힐까봐 전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서울의 그 유식하고 잘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만히 뉴스 돌아가는 사태만 주시하고 있었다. 한심한 시간이었다.

 그 당시 회장실에 들어갔다. '회장님! 그동안 박대통령은 우리가 반도체 사업 한다고 얼마나 호의적이었습니까? 신당동에 조문 가시지요.' 

 그러자 회장은 '가도 괜찮을까?' 되려 물었다. 뭔가 찜찜한 것이다.

 '회장님!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박통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2-3년 지나면 확실히 달라집니다. 경제발전과 나라 혁신시킨 그 분 치적을 누가 다시 이루겠습니까? 조문 가서 설사 지금 우리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는 우리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것 입니다.'

 이 말에 회장이 결심하여 향촛대 준비시키고 신당동에 조문을 갔다.

 

 그러나 정작 나도 이 일로 나중에 우리 회사의 패가 그렇게 잘 풀릴줄 몰랐다. 당시 전두환 사령관은 자기를 키워준 박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자, 일생일대의 모진 결심을 하였을 것이다. 누구도 박대통령을 모독해서는 안된다는 맥락에서 12.12사건도 터졌을 것이다.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나서서 결국 일개 군인이 대통령 자리를 거머잡고 올라간 것이다.

 당시 각료들은 그 때 장관했다고 자랑할 수 없다. 다 소신없고 나약했다. 훗날 우리 회장과 TK 대부 신현확 총리가 회장 단골 마담집에서 한잔 하던 자리에 수행한 적 있다. 당시 각료 전체가 벌벌 떨고 한마듸 말도 못했다고 한다. 심지어 TK 대부로 불리던 자신도 총 차고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는 전통이 무섭더라고 했다.

신총리는 자유당 때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민주당 구호에 '갈아봤자 별 거 없다. 구관이 명관이다.'란 재치있는 구호로 되받아친 장관 출신으로 총리 퇴임 후도 양주 한 병 비우시던 배짱 좋던 분이다.

 여하간 그때 우리 회사가 신당동 다녀가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저 사람들이 누구야?'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분 머리 속에 우리 회사를 재벌 중에 유일하게 조문한 의리있는 회사로 각인한 것이다. 그 후 대통령이 되자, 우리 회사를 확실하게 밀어주었다.

 

  전통이 일본 재계의 대부 마스시타고노스케를 한국에 초청했을 때 였다. 청와대서 연락이 왔다.

 공항에 영접 나가라는 것이다. 고노스께의 한국 방문은, 말은 전경련 초청이지만, 실은 청와대 초청이었다. 와서 분단 현실을 보고 일 재계에 대한국 협력 무드를 조성시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우리 회사는 마쓰시타의 칼라 TV와 오디오를 생산하던 회사다. 공항 접견, 전방 시찰, 청와대 방문, 전경련 강연, 새마을 본부 방문 등 모든 스케쥴을 주관했다.

 새마을본부 전경환 회장을 방문케 한 것은 원래 스케쥴에 없던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부탁해서, 새마을본부로 모셔갔다. 그 바람에 옹의 강연을 들으려고 여의도 강당에 빽빽히 모였던 사람들과  방송사 취재진들은 한시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했다.

 전회장은 운동한 사람이라 단순하고 겸손한 편이었다. 연로한 분에 대한 예우가 특별한 분이다. 새마을본부를 방문하면 돌아올 때 반드시 3층 집무실에서 1층까지 내려와, '회장님 잘 모시고 가시오.' 하며 차 문을 열어주던 분이다. 반드시 비서와 악수까지 한 후 올라가곤 했다.  

우리 회사는 청와대와 연락끈을 만들어놓으려고 전회장 고등학교 동창을 이사로 영입해놓고 있었는데, 그 분이 일 없이 월급만 챙기기가 미안했던 모양이다. 한번은 비서실장인 나를 그분들 단골이던 청파동 룸싸롱에 초대한 적 있다.

나는 더러 룸싸롱 초대에 가본 적 있지만, 노는데 그들처럼 도통한 고수들 처음 보았다. 맥주병을 흔들어 병뚜껑 열면 테이불 저쪽 사람들 맥주 잔에 한 잔씩 가득 따라지곤 했다. 그런 묘기 술자리를 얼마나 많이 했으면 그럴까? 말솜씨는 구봉서 배삼룡이 왔다 울고갈 판이었다. 하도 재미있어서 룸싸롱 아가씨들이 오히려 그 방에서 공짜술 마시고 웃고 즐긴다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은 룸싸롱 아가씨를 고가의 팁을 주는 대신에 노골적인 성희롱 대상으로 삼거나, 아예 노예처럼 비인격적으로 다루는 경우를 본 적 있다. 전회장 동기들은 달랐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약자에게 세심한 배려를 베푸는 인간미가 있었다.

 

 전통 형제의 정치에 대한 것은 나는 모른다. 군인 출신 대통령이라 찬반 이견이 많겠지만 나는 그들을 의리를 중하게 여기고 선이 굵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전통이 하야하여 백담사 계실 때다. 대학 강의 차 일주일에 한 번 속초에 다닐 때, 한번은 백담사에 들린 적 있다. 왈가왈부 말은 많겠지만, 나는 남자다운 스타일을 좋아한다. 눈 쌓인 절에 계시니 위로라도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백담사 입구에서 차를 돌렸으니, 대구서 온 뻐스들이 이미 너댓개나 절 근처에 와서 온통 북새통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 아니라도 전통 팬이 이리 많았다.

 

 나는 박충훈 전 대통령 권한대행 하면 우선 그 분 인품부터 생각한다. 내가 내외경제 기자를 지냈으니, 무역협회장이신 그 분 산하에 있었다. 그러나 직접 대면한 적은 없고, 훗날 대통령 권한대행 임기를 마친 후 회장 지시로 그 분의 성복동 자택을 방문하여 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날 그 분이 나에게 전화를 주신 일이다. 성북동 밑에서 차가 밀려 약속 시간보다 10분 늦겠다는 전화다. 그 전화는 일국의 정상에 있던 분이, 일개 기업체 회장 비서에게 할 전화는 아닐 것이다. 교통체증으로 10분 늦는 것은 보통 사람들도 흔한 일이다.

 박충훈 대행 사모님도 너무나 인자하신 분이었다. 손님 왔다고 굳이 대청에 나오셔서 말상대 해주시고, 기품있는 며느님은 공손히 차를 내오셨다. 낮선 손님에 호기심 발동하였을 것이다. 옆에 왔다가 '선생님에게 인사 드려!' 하던 할머니 뒤로 숨던 순한디 순한 손자가 있었다.'아! 참 잘생겼구나. 이름이 뭐냐?'고 하자, 얼굴을  내밀던 귀엽던 모습 기억난다. 그 집은 할머니 며느리 손자 모두가 따뜻하고 인간미 있었다.

 그날 박충훈 대통령 권한 대행을 찾아간 용건은, 회장 막둥이 아들이 서울대 교수가 될려고 추천을 받고자 한 것이다. 그 어른은 오시자말자, 냉큼 인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미리 작성한 추천서에 날인 해주시며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서 어려울 것인데...' 하셨다. 덕이 높은 분은 일을 이리 처리 하시는 구나 싶었다. 설사 않될 일이라도, 이렇게 호의로 처리하시는구나 싶었다. 소인배는 될 일도 생색부터 먼저 내기 바쁜데, 대인은 일을 매사 이리 처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르는구나 싶었다. 그때 많이 배웠다.

 

 나는 비서라는 직업상, 장안의 벼슬 높고 돈 많은 집은 거의 가보았다. 그 중에는 권력 맛에 취해 자식들까지 방자한 집도 더러 있었다. 공직 때 숨겨놓은 대궐같이 넓은 호화주택에 은토하자말자 이사가는 그런 몰인격자도 보았다. 부인이 가수와 간통사건 저질른 부총리도 있었다. 장관이던 총리던 그들도 인간이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벼슬 높은 것과 인품 하고는 별개다. 

 그 중에서 국민의 사표로 존경할만한 가문을 딱 세 군데 짚는다면, 박충훈 대통령 권한대행,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 아웅산 사태로 타계한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세 가문이다. 

 김정렴 비서실장은 형인 김정호 한일은행장과 청와대 근처 주택에 나란히 살았다. 형제간 우애도 아름다웠지만, 천사같이 예쁘고 기품있던 며느님 행동거지도 인상 깊었다. 보통 그런 집에서는 심부럼 간 사람을 하인처럼 대한다. 그러나 김비서관 집에선 심부럼 간 사람에게 공손히 차를 내왔다. 한가지를 보면 열가지를 안다.

 김재익 청와대 비서관은 반포 아파트에 살았다. 그의 재능은 항간에 널리 알려졌지만, 어머님이 참으로 훌륭한 분이다. 그해 비서실에선 추석 선물로 봉투와 양주 한 병씩을 보냈다. 청와대 경고가 있어 대개는 눈에 않보이는 봉투는 받고 눈에 보이는 양주는 거절했다. 딱 한 곳 김재익 비서관 댁은 눈에 잘 띄는 양주는 받고 눈에 안보이는 봉투는 거절했다. '아들을 혼자 어렵게 가르쳐서 청와대에 근무하는데, 술 한 병이야 선물로 어떻겠습니까? 봉투는 비서님이 도로 가져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인자하신 그 말씀이 지금도 감명 깊다.

 요즘 고위공직서 물러나면 흔히 벤츠 타고 골프 친다. 제 잘났다고 멋대로 돌아댕기는 사람 많지만, 참으로 국민의 사표가 될만한 분은 드물다.  

 

 내가 만난 대통령 제3편 (박정희 박근혜씨 편)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대채로 두가지다. 하나는 독재자라는 것이며, 하나는 나라 살린 애국자라는 것이다. 요즘 와서 그에 대한 평가는 5천년래 가난의 역사를 탈피시킨 민족 영웅으로 보는 사람 많다. 그러나 내가 대학 다니던 70년대는 달랐다. 그때는 데모하면 애국자요, 박정희 반대하면 사상가였다.

 

 요즘 매스컴에 유명한 도올 김용옥이 같은 철학과에 다녔다. 그는 생물학과서 편입한 학생이고, 나는 철학과 군 제대 복학생이었다. 그는 얼굴에 냇천자 긋고 침 튀기며 데모 주장하는 학생이고, 나는 신문 사설을 외우던 기자 지망생 이었다. 나는 데모망국론 주창한 사람으로, 도올과 같은 과에 있었으니, 물과 불의 관계였다.

 하루는 강의실에 갔더니, 그가 무슨 애국자라도 되는양 뜨거운 눈빛으로 급우들을 모아놓고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보나마나 뻔한 뉴스를 인용하여 이껀 저껀 박정희 트집 잡으며. '이제 우리 학교가 데모 나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학생이 공부나 하지, 데모는 무슨 놈의 데모?' 하고 내가 핀찬하여 그와 말싸움이 붙었다. 원래 그는 한 성질 하는 사람이다. 지고는 못산다. 자기 분위기에 찬 물을 끼얹자 맨체스타 다연발총 설탄을 내게 마구 퍼부었다. 나는 복학생이라 나이로 보면 과의 큰형님이다. 그래 젊잖게 '우리는 그래도 ‘학문 중 학문’이라는 철학을 배우는 대학생이다. 대중들 군중심리에 놀아나면 않된다. 사람들은 집권자 욕을 하면 좋아하지만, 그건 냉철한 역사의식이 없는 행동이다.' 하고 응수해 논쟁에 불이 붙었다.

당시 K대는 장안의 대학 데모를 주도하던 데다. 급기야 급우들이 중재에 나섰다. '그러면 빈 강의실로 가서, 거기서 두 사람이 데모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서 차분히 연설을 해보시오. 그걸 들어보고 다수결 결과에 따라 과론을 정하고 데모를 하던지 말던지 행동 통일을 합시다' 한다.

 그래 넓직한 빈 강의실로 자리를 옮겨 먼저 그가 시국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이젠 학생이 교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 2단계는 안전 욕구, 3단계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존경취득 욕구,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 이 욕구는 피라미드형으로 이뤄져 생리적 하위욕구가 가장 강하다. 그 중 가장 강한 생리적 하위 욕구를 충족키 위한 경제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독재니 뭐니를 따지는 일은, 춥고 배고픈 우리 현실에선 사치에 불과하다고 했다.

 결과는 찬반 거수투표로 결정했는데 도올의 완패였다. 그러나 그는 굽히지 않았다. 그는 내가 잠시 도서관 간 사이에 장난을 쳤다. '김형은 우리보다 나이도 많고, 아무래도 중앙정보부 끄나풀 같은 냄새가 난다. 어디서 그런 이론을 배워왔겠느냐?'며 급우들을 꼬득였다.

그래 급우들 끌고 시계탑이 있던 서관의 한 강의실을 점령하고 출입구에 책상과 걸상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고 K대 최초의 데모에 돌입했다. 나는 백번 양보하여 행동통일은 해야한다고 교실에 합류했는데, 그 뒤 도올이 또 딴길로 새버렸다. 하루 쯤 지나 k대 교수였던 그의 형님이 와서 설득하자 강의실에서 나가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데모대가 흐지부지 해산된 적 있다.

 나중에 그는 하바드대 철학 박사로 귀국하였다. 머리는 좋은 친구다. 그 덕분에 그는 해박한 언설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지만, 나는 그 이름만 보면 지금도 시큰둥하다. 철학을 한 사람은 통찰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도 그의 역사를 읽는 안목은 의심스럽다.

 그 당시 반정부 인사로 유명하던 김지하 시인이 있다. 그는 도올과 다르다. 그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근래 백팔십도 전향되었다. 스므살에 반정부 운동 안하면 병신이고, 40대 되어 그러면 병신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는 하는 법이다. 김지하씨는 인끼에 연연하지 않고 과거의 실수를 인정한 면에서 용감한 사람이다.  

 

 군대 시절에도 나는 박대통령 지지파였다. 대학생 데모대를 싫어한 적은 없다. 대학생 데모는 일종의 유행이기 때문이다. 윤복희가 미니스커트 입자 미니스커트 입는 여성들 많았다. 유행을 탓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학생들의 현실참여는 그게 맞던 틀렸던 일종의 유행이요 애교로 봐야하기 때문이다.

 운전병으로 부산서 근무할 때다. 나는 데모집압 차량을 운전하고 다녔는데, 경찰이 부산대 현장서 학생을 잡아 GMC에 실어주면 동래경찰서로 가던 도중에 차를 세우고 풀어주곤 했다. 학생이 무슨 죄 있는가? 철 없는 것이 죄라면 죄다. 서대신동 동아대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찰이 차에 태워준 학생을 모두 중간에서 풀어주었다. 문현동 고개 너머 수산대에서도 모두 풀어주었다.

상부 지시 받고 진압나온 경찰도 나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데모대 학생을 다 자기 아들이나 친척 조카로 생각했다. 그래 내 행동을 따지지 않고 넘어가주었다. 경찰은 상부 명령이라 진압은 하지만 반감은 별로 없던 걸로 기억된다. 

 

 복학하여 학교에 돌아와서 나는 취재나온 미국의 모 언론사와 박정희 지지 인터뷰를 한 적 있다. 40년 전 그 일을 나는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시 K대는 데모 할려는 학생이 대다수였다. 데모 반대하는 나 같은 학생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서 그 외국 언론사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나를 찾아와서 인터뷰를 청한 것이다. 그래 나는 과열 데모 진행 중인 교문 앞 돌벤치에서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진, 어찌 보면 변절자로 취급할 수도 있는 과열 데모꾼들 중인환시 속에서 약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태연히 인터뷰 하였다.

 

  인터뷰 요지는 대략 이런 것이다. 나는 맑스의 구조이론을 읽은 적 있다. 경제란 하부구조가 결국 정치 문화 등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우선 먹고 살게 된 이후가 중요하다. 

 독재란 개념을 이렇게 생각하였다. 가난이 가장 큰 독재이다. 나라가 가난하면 온 국민이 희생양 된다. 자식은 취직 못하면 부모에게 죄인이다. 노는 젊은이는 얼굴 펴고 살 수 없다. 부모는 직장 없으면 자식에게 죄인이다. 먹고 살 길을 찾지못하면, 자식도 부모도 다 죄인이 된다.

 가난이야말로 전국민을 죽이고 살리는 무소불위의 독재이다. 정치판에 제한된 독재는, 보통의 선량한 국민과는 전혀 상관 없다. 그건 정치판의 독재지, 선량한 국민에 대한 독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라가 잘 살면 그때는 저절로 민주화 자유화가 온다. 회사원은 상사에게 할 말 다하고, 수 틀리면 다른 회사로 당당히 갈 수 있다.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요, 자유이다. 

  박대통령은 경제 발전을 방해한 정적들을 엄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국민은 아무도 그에게 고통 받은 적 없다. 오히려 국민들은 일자리가 많아 호강을 누렸다. 가난은 호랑이 보다 무섭다. 박통은 그 호랑이 퇴치를 위해 열심히 싸워준 투사다.

  

 지금 와서보면, 당시 K대 데모꾼 박계동은 나중에 국회의원 되었다. 성공회 이제정 신부도 K대 학생이었는데, 나중에 사회 나와서 야당하다가 박통 반대당 부총리를 챙겼다. 모두 반정부 운동으로 한 몫 챙겼다. 감방 다녀온 것을 무슨 훈장처럼 자랑했고, 사상가인양 행세했다. 이 무슨 이해불가의 해괴한 풍토인가?

어쨌던 큰 테두리에서 보아 그것이 잘하는 일인지 못하는 일인지는 불문하고 국민의 불만을 부추켜서 일단 표만 얻고보자는 논리는 말없는 다수 국민의 논리는 아니다. 경부고속 도로 놓지말라고 길바닥에 드러누운 사람이 나중에 대통령을 했다. 독도를 일본에게 팔아먹은 사람이 나중에 대통령을 했다. 나라 발전을 그렇게 사사껀껀 방해한 사람들이 국민을 선동하여 표를 얻고 대통령한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 집은 박통의 피해자다. 일제 때 '화랑전기'란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책을 집필한 아버님은 5.16이 일어나자, 이를 군사쿠테타라고 섭섭하게 표현하여 수사기관 조사를 받고, 진양군 교육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후 기관원들이 항시 찾아와 아버지 근황을 살펴보고 가곤 했다. 그러나 아버님은 나중에 박통이 정치를 잘 하자 한번도 대통령을 비난한 적 없다. 나 역시 경제신문사 기자 노릇을 하면서 경제를 잘 이끄는 걸 보고 평생 박통을 존경했다. 

 

 박통에 호의적인 이유로 사회 나와서 덕도 보았다. 신문사서 기업체로 옮길 때다. 자서전 써 줄 사람 채용한다고해서 모 그룹 회장을 직접 면담 했는데, 그 분 질문이 특이했다. 현존하는 사람 중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당장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말이 딱 그분이 원한 답이었다.

 회장은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 편지를 써 줄 사람이 간 것이다. 뭐라고 용건을 말하면서 편지를 한 통 써오라고 하고, 이튿날 그 편지 읽고나더니 '내일부터 비서실로 출근하라.'고 바로 결정했다. 그후로 나는 '박정희 대통령 옥궤하(玉机下)' 란 존칭으로 청와대에 보내는 편지 만드는 일로 밥벌이 했다.

 

 애초에 나는 그 회사에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신문기자가 남의 비서 노릇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참에  작품 소재가 될지 모르니, 재벌이란 사람 구경이나 싫컷 해놓자는 생각으로 입사한 것이다. 그 분은 한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한 분이었다. 자서전을 빌려 발전하던 70년대 한국 경제를 기록해놓는 것은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회사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그 양반 비자금 조사였다. 명목은 보안점검차 파일 정돈이었다. 그러나 실은 이 양반이 돈을 어디 누구에게 갖다바쳤을까를 조사한 것이다. 

  비밀 금고 안에는 대통령과 관료들, 은행장, 법조계 인사에게 보낸 서신들이 있었다. 선물 받는 사람 명단과 주소, 연락처, 선물 내역이 있었다. 나는 그런 편지를 일주일 동안 전부 읽어보고나서 박정희 대통령이 참으로 청렴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항간에선 박통이 그 회사를 봐줬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투자 지분이 있다는 루머도 있었다. 그러나 편지를 모두 읽어보니, 그 모두 말짱 할일 없는 사람들 카더라 통신이었다. 박통은 그 회사 방위성금도 면제해주었지만, 단 돈 10원 한장 받은 적 없었다. 세상에 이런 깨끗한 분도 다 있나 싶었다, 

 회사가 갖고있던 앨범에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던 근혜씨가 단발머리 하고 그 회사에 찾아와서 라인 투어 하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근혜씨 서강대 은사인 임태순 교수와 주고받은 편지도 있었다. 청와대와 친한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박통은 오로지 그 회사가  국가 장래를 위한 반도체사업을 하고 있었기 땜에 호의를 베풀어준 것이다.

  

  박통 밑에서 오랜 재무장관을 한 김용환씨 이야길 직접 들은 적 있다. 그가 우리 회장과 청진동에 있는 <장원>이란 요정에서 식사를 할 때다.

박통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 월남 파병 때, 여론과 국민에게 시달리면, 혼자 잠들지 못하고 청와대 뜰을 거닌다고 했다, 시바스리갈이나 폭탄주 마신다고 했다. 야당은 독재라고 사사껀껀 쌍지팡이 들고 나서지, 철 없는 대학생은 데모로 괴롭히지, 참으로 고독했을 것이다. 간혹 김장관한테 새벽 2시에도 잠못들 때 전화가 온다고 했다. 

박통이 독일에 차관을 얻으러 갔을 때 그곳에 있는 파독 광부와 간호원들을 만나 눈물 흘린 이야기, 정주영씨와 의기투합해 경부고속도로 뚫은 일 들은 우리가 다 아는 이야기지만, 그 뒤 대통령 해먹은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이런 감동적인 일화를 남긴 적 없다.

차지철이 한 원양회사서 상납받은 집이 수유리에 있었다고 한다. 4,19탑 방문하고 오던 길에 차지철이 자랑스럽게 박대통령 모시고 가서 집들이를 했는데, 음식이 엘리베이터 타고 2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자,

‘음, 자네도 이런 식으로?’

화를 벌컥 내는 바람에 차지철이 황급히 이 집을 반납하고 연희동으로 도로 이사간 일화도 있고 한다.  

 김장관은 집이 녹번동에 있었는데,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론, 장관이 12시 이전에 집에 오는 일도 없고, 공휴일도 없다고 했다. 박통 김장관 모두 Workaholic(일 中毒)이었다. 두 분 다 참 멋진 분들이다. 

 

 나는 박통을 간혹 좀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리셥센이 있을 때다. 청와대는 재벌에겐 초청장을 보내는데, 회장이 년세를 핑계로 매번 나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 자리는 재계 거물들만 초청한 그야말로 V-VIP 모임이다.

 거기서 칵테일 잔 들고 박통 근처 갈 수 있는 사람은 정주영 이병철 박용학 같은 사람이다. 새끼 재벌들은 대통령 경호실과 안기부 눈치 보느라고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나는 방명록에 대필서명 해놓고 멀찍이서 구경하고 와서 회장께 누가 왔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보고했다.

  

 한가지 기억 남는 일은 10,26 사태로 박통이 서거하기 한 달 전에 회장이 박통에게 경옥고 한 단지를 보낸 일이다. 경옥고 만드는 일은 경동시장 한약 심부럼 전담인 내가 맡았다. 꿀 인삼 생지황 백복령을 사오고, 충북 영동에 가서 뽕나무 뿌리 구해와서 약을 다렸다. 닭 우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용인 연수원에 조수 하나 데리고 가서 며칠간 만들었다.

 경옥고는 그 약을 먹으면,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며, 말처럼 뛰어다니게 해준다는 명약이다.  첨부 서신과 함께 김도룡 총무비서관에게 전달했는데, 김비서관은 우리 선물은 검사 거치지 않고 바로 올려주었다. 나는 박대통령이 서거하시기 전에 내가 만든 그 경옥고 몇 숟갈 드셨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박근혜씨는 아버지 서거 후, 우리 회사 옆에 있던 어린이공원 안 육영재단 사무실에서 몇번 만났다.

 세상 인심이 고약해서 아무도 그를 찾지 않던 때다. 그 때 내가 회장을 설득해서 설 추석에 금일봉 들고 찾아가곤 했다. 가서는 10.26 이후 재벌들이 아무도 가지않던 신당동 빈소를 찾아간 이야기, 매년 기일이면 회사 전 중역을 대동하여 국립묘지 참배한다는 이야기를 전한 적 있다.

 그 이야길 듣고 근혜씨는 무척 고마웠을 것이다. 그는 회장님께 안부 전해달라는 말도 하고, 돈이 없어 절전하고 난방비도 줄인다는 이야기도 했다. 박통이 거액의 돈을 감춰두었단 루머는 말짱 유언비어다. 만일 그랬다면 대통령 사후 따님이 그런 경제적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그런 면에서 박통은 한 아들이 문제된 김영삼씨나 세 아들이 비리로 문제된 김대중씨와 판이하다.

 

 박근혜씨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 타계 후 퍼스트레이디 한 경험 때문인지, 대화 한마듸 한마듸가 바늘 틈 꽂을 틈 없이 빈틈없고 치밀했다. 신중하여 결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차거운 얼음공주였는데, 대통령에 당선된 지금은 전혀 다르다. 여성다운 면모가 살아나 얼굴에 화기가 돌고 미소도 이쁘다. 패션도 잘 골라 외국 어느 정상 부부 만나도 돋보인다. 신의로 국정 잘 다스리고, 유창한 외국어로 우방과의 관계를 다져간다. 몇가지 문제도 불거졌지만, 줏대없는 정치로 일관하는 사내들보다 낫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당 간부들도 지금처럼 친박이니 뭐니 하면서 남자들이 슬슬 대통령 눈치만 봐서는 않된다. 바지 속에 불룩한 뭐가 달린 사내답게 대통령이 소신있게 훌륭한 업적 남기도록 목슴을 걸고 과감히 직언을 해야 한다.

 이제 세월이 지난 후 생각해보니, 그때 근혜씨가 어려울 때 왜 내가 워커힐 식사라도 몇번 초대하지 않았나 싶다. 그때 좀 더 친했다면 지금 직언을 해드릴 수 있는 처지일 것이다. 당시 그는 아무나 만날 수 있는데 누구도 찾지 않았고, 지금 그는 아무나 만날 수 없는데, 사람들은 모두 만나려고 애쓴다. 이게 소위 세상 인심이란 것이다.  

 

내가 만난 대학총장 제1편 (k대 김총장님)

 

 흔히 인생을 남가일몽 (南柯一夢)이라 한다. 남가일몽은 당나라 때 이공좌(李公佐)의 소설 남가기(南柯記)에서 유래한 것이다.

 광릉 땅에 순우분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집 옆에 커다란 회나무가 있었다. 어느날 술에 취하여 그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두 남자를 만났다. 그들 따라 괴안국이란 곳으로 가서 국왕의 사위가 되어, 그 나라 남쪽 남가국 태수로 20년 잘 살았다. 그후 이웃 단라국과 전쟁이 벌어져 참패하고, 아내도 병으로 죽자,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하도 이상하여 홰나무 뿌리를 살펴 보니, 그곳에 과연 구멍이 하나 있었고, 그 구멍을 더듬어 들어가자, 수많은 개미떼와 왕개미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괴안국이었다. 남가(南柯)란 남쪽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의미한다.

여기서 크게 깨달은 순우분은 그 후로 집밖을 나가지 않은 채 사람 멀리하고 도학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나 역시 남가일몽 칠십년 살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되었다. 순우번처럼 사람 멀리하고 도학에 정진하지는 않지만, 꿈속의 일을 기록이나 해놓자고, 지난 번 <내가 만난 대통령>이란 글을 썼다. 이왕 쓴 김에 이번에 <내가 만난 대학총장>을 써본다.

 

 K대 김총장님은 그분이 대학원장 하던 시절 처음 만났다. 한번은 내가 다니던 회사 회장 셋째를 K대 경영대학원에 보내려고 찾아가서 부탁을 드렸더니, 원장님은 무슨 청탁이라 싶은지 처음엔 조금 주저하셨다. 그래,

'원장님!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재벌 아들이 여길 다니면, 사원 채용 때 그가 최종면접을 하는데, 이 대학 학생들이 다 동문 되는 것 아닙니까? 팔이 안으로 굽겠습니까? 밖으로 굽겠습니까? 제가 k대가 모교라서 일부러 여기 찾아와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드려 입학시켰는데, 그 뒤 김원장이 K대 총장으로 영전했다.

 아주 작심하고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분재원 석부작 분재를 보내놓고, 셋째를 데리고 총장실에 갔더니, 수백개 난화분 모두 바닥에 내려놓고 내가 보낸 분재 하나만 달랑 집무실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총장님은 축하 화분 고맙다고 인사하시는데, 더 반가운 것은 그 옆에 웃으며 서있는 비서는 내 학생시절 미식축구 선수 한 해 선배란 점이다.

 이렇게 좋은 인맥 깔아놓고 후에 그룹 건설사 상무로 가보니, 이 무슨 칠년대한(七年大旱)에 단비인가? 마침 K대 혜화동 의과대학 매각설이 있었다. 그래 술 익자 임 모시는 형용으로 급히 총장님을 인터콘티넌탈 호텔 일식으로 모셨으니, 그곳이 총장님 단골집이다.

 그런데 K대가 유명한 것은 그 곳 출신 모두 술을 잘한다는 점이다. 두사람이 양주 한 병 비우자. 총장님 호칭은 어느새 선배님으로 바뀌었다. 흥이 난 총장님은, 카운터에 맡겨놓은 자기 양주까지 가져왔다. 양주 두 병 들어가면 남자들은 술 3백잔 마다한 이태백이처럼 호탕해진다. 거침없고 걸치적거리는 건 없다.

 '선배님 혜화동 병원장은 우리가 잘 아는 분 입니다. 저희 건설회사가 그 병원 부지를 매입할려고 알아보니, 병원장이 총장님 눈치만 봅니다. 후배가 한번 회사에서 큰 공을 세우도록 밀어주십시오.'

 그러자 속담에 건너다 보니 절터라는 말 있다.

 '그야 나는 실무는 모르고, 병원장이 아는데, 그 분이 좋다면 나야 찬성이요.'

하신다.

 '그럼 총장님께선 병원장이 결재 올리면, 도장 꾹 눌러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해놓고 병원장을 찾아갔다.

 '원장님! 이번 병원 매각 건 말 입니다. 총장님은 제가 전부터 잘 아는 선배님이신데, 위에서 먼저 뭐라고 말씀 드릴 수는 없는 처지고, 병원장님 결정만 기다리는 눈치인 것 같습니다. 소신대로 결재 한번 올려 주십시오.'

 이렇게 양방면 공작이 성공되어 혜화동 병원 부지는 A 건설로 낙찰되었고, 지금 거긴 A건설 아파트가 서있다. 

 그런데 현대 정주영 회장은  K대맨 이다. 정회장은 젊은 시절 K대학 도서관 지을 때 공사장 인부로 일한 인연이 있는 분이다. 그래 K대를 모교같이 생각하던 분이다. K대 건물 지으라고 40억을 기증한 적도 있다. K대 출신 이명박씨를 건설 회장에 앉히기도 했다.

그러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 있다. 사또 떠난 후 나팔 부는 경우가 이런 경우다. 현대는 당연히 자기 몫인 줄 알았던 혜화동 병원 부지를 이런 히든스토리로 날릴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