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전자책·내가 만난 대통령

내가 만난 대학총장<완결편>

김현거사 2016. 9. 17. 07:18

내가 만난 대학총장 제1편 (k대 김총장님)

내가 만난 대학총장 제2편 (y대 박총장님)

 

내가 만난 대학총장 제1편 (k대 김총장님)

 

 흔히 인생을 남가일몽 (南柯一夢)이라 한다. 남가일몽은 당나라 때 이공좌(李公佐)의 소설 남가기(南柯記)에서 유래한 것이다.

 광릉 땅에 순우분이란 사람이 살았는데, 집 옆에 커다란 회나무가 있었다. 어느날 술에 취하여 그 밑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 속에서 두 남자를 만났다. 그들 따라 괴안국이란 곳으로 가서 국왕의 사위가 되어, 그 나라 남쪽 남가국 태수로 20년 잘 살았다. 그후 이웃 단라국과 전쟁이 벌어져 참패하고, 아내도 병으로 죽자,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하도 이상하여 홰나무 뿌리를 살펴 보니, 그곳에 과연 구멍이 하나 있었고, 그 구멍을 더듬어 들어가자, 수많은 개미떼와 왕개미가 있었다. 그곳이 바로 괴안국이었다. 남가(南柯)란 남쪽으로 뻗은 나뭇가지를 의미한다.

여기서 크게 깨달은 순우분은 그 후로 집밖을 나가지 않은 채 사람 멀리하고 도학에 정진하였다고 한다.

 

 나 역시 남가일몽 칠십년 살았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 되었다. 순우번처럼 사람 멀리하고 도학에 정진하지는 않지만, 꿈속의 일을 기록이나 해놓자고, 지난 번 <내가 만난 대통령>이란 글을 썼다. 이왕 쓴 김에 이번에 <내가 만난 대학총장>을 써본다.

 

 K대 김총장님은 그분이 대학원장 하던 시절 처음 만났다. 한번은 내가 다니던 회사 회장 셋째를 K대 경영대학원에 보내려고 찾아가서 부탁을 드렸더니, 원장님은 무슨 청탁이라 싶은지 처음엔 조금 주저하셨다. 그래,

'원장님!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재벌 아들이 여길 다니면, 사원 채용 때 그가 최종면접을 하는데, 이 대학 학생들이 다 동문 되는 것 아닙니까? 팔이 안으로 굽겠습니까? 밖으로 굽겠습니까? 제가 k대가 모교라서 일부러 여기 찾아와서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드려 입학시켰는데, 그 뒤 김원장이 K대 총장으로 영전했다.

 아주 작심하고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분재원 석부작 분재를 보내놓고, 셋째를 데리고 총장실에 갔더니, 수백개 난화분 모두 바닥에 내려놓고 내가 보낸 분재 하나만 달랑 집무실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총장님은 축하 화분 고맙다고 인사하시는데, 더 반가운 것은 그 옆에 웃으며 서있는 비서는 내 학생시절 미식축구 선수 한 해 선배란 점이다.

 이렇게 좋은 인맥 깔아놓고 후에 그룹 건설사 상무로 가보니, 이 무슨 칠년대한(七年大旱)에 단비인가? 마침 K대 혜화동 의과대학 매각설이 있었다. 그래 술 익자 임 모시는 형용으로 급히 총장님을 인터콘티넌탈 호텔 일식으로 모셨으니, 그곳이 총장님 단골집이다.

 그런데 K대가 유명한 것은 그 곳 출신 모두 술을 잘한다는 점이다. 두사람이 양주 한 병 비우자. 총장님 호칭은 어느새 선배님으로 바뀌었다. 흥이 난 총장님은, 카운터에 맡겨놓은 자기 양주까지 가져왔다. 양주 두 병 들어가면 남자들은 술 3백잔 마다한 이태백이처럼 호탕해진다. 거침없고 걸치적거리는 건 없다.

 '선배님 혜화동 병원장은 우리가 잘 아는 분 입니다. 저희 건설회사가 그 병원 부지를 매입할려고 알아보니, 병원장이 총장님 눈치만 봅니다. 후배가 한번 회사에서 큰 공을 세우도록 밀어주십시오.'

 그러자 속담에 건너다 보니 절터라는 말 있다.

 '그야 나는 실무는 모르고, 병원장이 아는데, 그 분이 좋다면 나야 찬성이요.'

하신다.

 '그럼 총장님께선 병원장이 결재 올리면, 도장 꾹 눌러주셔야 합니다.' 

 이렇게 해놓고 병원장을 찾아갔다.

 '원장님! 이번 병원 매각 건 말 입니다. 총장님은 제가 전부터 잘 아는 선배님이신데, 위에서 먼저 뭐라고 말씀 드릴 수는 없는 처지고, 병원장님 결정만 기다리는 눈치인 것 같습니다. 소신대로 결재 한번 올려 주십시오.'

 이렇게 양방면 공작이 성공되어 혜화동 병원 부지는 A 건설로 낙찰되었고, 지금 거긴 A건설 아파트가 서있다. 

 그런데 현대 정주영 회장은  K대맨 이다. 정회장은 젊은 시절 K대학 도서관 지을 때 공사장 인부로 일한 인연이 있는 분이다. 그래 K대를 모교같이 생각하던 분이다. K대 건물 지으라고 40억을 기증한 적도 있다. K대 출신 이명박씨를 건설 회장에 앉히기도 했다.

그러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 있다. 사또 떠난 후 나팔 부는 경우가 이런 경우다. 현대는 당연히 자기 몫인 줄 알았던 혜화동 병원 부지를 이런 히든스토리로 날릴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만난 대학총장 제2편 (y대 박총장님)

 

 

 내 일찌기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다가  문왕(文王)을 낚은 강태공 여상(呂尙)은 아니지만, 화양동 한강변에서 미끼 드리우고 기다리다가, Y대 총장님을 낚은 적은 있다. 

 내가 이 은린월척(銀鱗越尺)을 걸고 밀고땡기는 짜릿한 손맛 본 경위는 이러하다.

 

 내가 모시던 분은 국회의원 출신으로 재벌이기도 했다. 자식 셋이 박사인지라, 돈과 명예,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것 없었다. 단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전남 강진의 한 초등학교를 졸업한 자신의 학벌 이다.

그는 이력서에 대학 중퇴라고 썼지만, 아무래도 찜찜한 부분이었다. 내가 이 분 자서전 쓰면서 보니, 그는 일본 모 대학 통신강의록을 2년 공부했다고 대학 중퇴라고 했지만, 상황은 아무래도 미심쩍었다. 그래 내가 이 양반에게정식 명예박사 학위를 얻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여 직원을 시켜 서울 H대, S대, J대의 명예박사 학위 단가를 조사해보았더니 대개 10억원 정도였다. K대, Y대는 명문이라고 40억 정도였다.

 

 우선 K대에 문의했더니 K대는 돈 받고 학위 판 적 없다는 자랑부터 한다. 그런건 내가 모르나 자기가 모르나,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사항이다. 문과대학장이란 사람이 말이 안통하는 사람이다. 그 학교가 개교 이래 국가적 공훈이 있는 소수에게만 학위 주었지 기업인에게 준 적 없다는 건 학교 연혁에보면 적혀있다. 그걸 내게 리피트 하는 이유는 뭔가?

'대학도 이제는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기업인에게는 명예 박사학위를 주고, 그 대신에 기업은 돈을 학교에 기부하여 학교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는 말을 해주며 뭉텅이돈을 학교에 보내줄려는 뜻이 분명한 사람한테 그 말이 할 말인가? 재단은 항상 학교 운영을 위한 자금마련에 항상 허덕인다. 그런데 교수들은 항상 이 모양이다. 이런 순진한 교수 잡고 이야기 해봐야 헛일이다. 번짓수가 틀렸다. 그래 시간 낭비할 것 없이 딱 한마듸 하고 전화 끊었다.

'내가 명예박사 얻을 곳 없어서 전화 한것 아닙니다. 모교라서 전화 한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는 하지마세요.'

 전에 나는 모교 출판부에 회사돈을 기부하도록 적 있다. 당시 나에게 찾아온 교수님은 그 공덕으로 기획처장인가 뭔가로 승진 하였다고, 일식집에 나를 초대해서 거나하게 대접하고 간 적 있다.

 

 그런 어느날 Y대가 저절로 찾아와 낚싯대 찌를 건들였다. 공대 건물 짓는데 기부금 좀 내라는 것이다. P학장은 회장 둘째 아들 만나자고, 날이면 날마다 전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압구정 무슨 교회 같이 다니는 교우라고 했다. 둘째는 그 대학에 입학만 했다가 금방 미국 건너간 사람이다. 별로 그 대학에 대한 정도 없고 기부금도 내기 싫었다. 그래 어느 날 여비서를 내 앞에 데려와 그런 전화 오면 자기 바꾸지 말라고 짜증을 낸다.

그러나 나로서야 얼마나 반가운 전화인가. 그래 내가 '어이 미스김! 앞으로 그 전화 오면 무조건 나 바꿔!' 했다. 사장은 그 소릴 듣자 옳치 되었다 싶은지, '그래 앞으로 그 전화는 반드시 실장님한테로 돌려' 하고는 자기 방으로 신나게 가버렸다.

 어쨌던 고기가 미끼를 문 것이다. 반가운 일이다. 이제 찌가 수면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보다가 적당한 시기에 딱 잡아채면 된다. 

 그렇게 멋진 한판 승부 벌어진 어느 날, 그날도 긴가민가하고 우리 회사에 전화한 P학장은 이게 꿈인가 생신가 싶었을 것이다. 금방 비서실장 바꿔주질 않나, 비서실장이란 사람의 첫 말은 '기업은 자금으로 대학을 도와주고, 대학은 연구로 기업을 돕는게 산학협동 의 근본정신'이라고 하질 않는가? 

 뒤에 P학장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그는 그동안 수차례 여러 재벌 비서실에 전화해보았는데, '산학협동' 그 한마듸만 떨어지면 그 모든 회사가 미꾸라지보다 미끄럽게 빠져나가버리고 다시는 통화가 되질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긴 웬일인가. 순진한 비서실장이 하나 있어, 통화도 쉽게 해줄 뿐더러, 산학협동이란 말도 먼저 한다. P학장은 흥이 나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싶었을 것이다. 고진감래란 말도 떠올랐을 것이다.

이틀 멀다하고 나에게 전화했고, 나는 이틀 멀다하고 싱싱한 미끼 갈아주었다.

'하바드는 학교 운영이 거의 후원금으로 충당된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산학협동은 해야지요. 그래야 나라가 발전합니다.'

 연신 꼬리 살랑살랑 쳐주자 그쪽은 듣기가 얼마나 감미로왔겠는가. 이후로 나를 착 물고 늘어지면서, 시간 내주시면 자기가 회사를 방문해도 좋고, 아니면 밖에서 좀 뵐 수 없느냐고 조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낚시는 원래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몇번 거절하여 애를 한참 좀 태워주고, 나중에 못이기는체 시간과 장소를 합의해주었다.  

  장소는 압구정동 '어유도' 였다. 그 집은 부자 동네 압구정에서 괜찮은 횟집이다. 찾아가니 년배가 한참 위인 학장님이 아래에 앉아 나를 상석에 앉히고, 지극정성으로 술과 안주를 권한다. 술이사 내 전공이라, 나는 사정없이 마셔주었다. 끝판에 이렇게 일러드렸다. 

'우리 회장님은 재계에서 왕소금으로 소문난 분입니다. 갑자기 큰 돈은 승인하긴 어려우니, 앞으로 학장님과 내가 공동작전으로 이 일을 마무리 지어나가도록 하십시다.'

그 말을 듣고 학장님은 일이 50프로 쯤 진척되었다고 무척이나 기뻐하며 돌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금방 되던가. 한없는 정적의 세월이 이어졌다. P학장님은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기다린 동백아가씨처럼 되었을 것이다. 그러다 참다참다 못참아서 두번째 '어유도' 만남을 제의했다. 두 번째 만남 장소엘 가보니 이번에는 상석의 내 방석 옆에는 시중드는 미인까지 앉혀놓았다. 그날도 생선회와 양주 잘 먹고 마시고 헤어질 때 내가 한 말은 '회장님께 말씀은 드려놓았습니다. 그러나 두서너번 조심해서 다시 잘 건의 드려야 일이 성사될 것이니, 아무튼 조급히 하시지 말고 좀 더 기다려 봅시다' 였다.  

그러고 헤어지면 자기는 다시 동백아가씨, 이쪽은 '막걸리도 시간이 걸려야 부글부글 괴는 법입니다. 조금 더 기다립시다.' 였다. 학장님은 인내심 가지자는 이야기는 이해되지만, 꼭 혼삿날 기다리는 노처녀 심정 같았을 것이다.

 그런 3개월이 지나자 학장님이 드디어 마지막 카드를 흔들었다. 카드는 먼저 흔드는 쪽이 항상 불리한 법이다.

 '내가 총장님 모시고 귀회사 근처의 워커힐호텔을 예약해놓고 갈테니, 회장님 모시고 나와달라'는 것이다. 그 정도면 일은 잘 된 것이다. 총장께 보고했으니, 고기가 미끼 제대로 문 것이다. 확 잡아채면 된다.

 그런데 이 내용을 회장에게 보고하니, 회장님이 갑자기 딴청을 피운다. 그동안 모든 과정을 보고받았으면서, 자기는 총장 만나러 나갈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의 본뜻인즉, 자기는 명예박사 학위 같은데는 관심이 없어 가만히 있다. 그런데 왜 주변에서 성가시게 이리 권하느냐는 뜻이다.

역시 회장은 노련하다. 이왕 받을 학위 자기는 한 발 쑥 빼고 받으려는 것이다. 회장의 이런 상투적 수법은 그 옆에 20년이나 있었던 내가 한두번 겪어본 것 아니다. 나도 요령은 있다.

'대학총장이라면 인격적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대통령보다 높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Y대 총장님이 회장님 인품을 알고 일부러 우리 회사 옆 워커힐까지 찾아와서 모시겠다니, 나가서 인사라도 받으시는게 예의겠습니다.'

마치 유비가 제갈공명을 삼고초려하는듯 옆구리를 살살 긁어주어 마침내 승낙을 받았다.

 이렇게 일이 성사되어 y대 총장님을 워커힐에서 만났다. 

 그분은 Y대 철학과 출신으로 김해 사람이다. 외모는 어딘가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비슷하고, 성품은 봄바람처럼 따뜻했다. 나는 K대 철학과 출신이고 진주 사람이다. 그분은 Y대 철학과 출신이고 김해 분이다. 서로 학교는 달라도 같은 철학과이고, 동네는 달라도 같은 경상도 사람이다. 굳이 딱딱하게 굴 필요없었다.

 내가 단도직입으로 박 총장님께 물었다.

'Y대 공대 대학원에선 매년 졸업식 때 박사학위 몇 명 배출합니까?'

그러자 총장이 몇명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우리 회장님은 년간 20억불 반도체 수출 하면서, 휘하 종업원 만여명을 데리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모토롤라, TI, 페어차일드 등 세계 최첨단 회사의 기술자를 상대할 수 있는 수십명 전문가들을 길러내었습니다. 그 모두가 국제무대에서 어깨를 펴고 자랑스럽게 일하도록 만드신 분입니다.

총장님께 한번 묻고 싶습니다. 한국의 첨단산업 미래를 놓고 볼 때, 귀교 공대 대학원 출신 박사들과 우리 회장님 한 분 중 어느 누가 공헌도가 높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말 뜻을 못알아들으실 총장님이 아니다. 우물쭈물 않고 대번에 시원하게 대답한다.

 '내가 돌아가서 책임지고 회장님 명예박사 학위 껀을 재단과 교수진에 설득하겠습니다.'

 박총장님 이 말 한마듸로 모든 일은 끝났다.

 후에 문교장관을 역임하신 총장님은 교내 신망도 두터워 일은 일사천리 진행되어, 나중에 Y대 졸업식 며칠 전에 연락이 왔다. 

우리 회장님은 그날 가족, 그룹 전 중역 대동하고 Y대 켐퍼스에 가서 꿈에 그리던 사각모자를 쓰고 기념촬영하여 사진으로 증명 남기고, 그 학교 동문된 기념으로 교내 식당에서 식사 한 후 기분 좋게 돌아오셨다.

 이로써 P학장을 바라던 바 소원을 성취했고, 나는 나대로 월척 낚았고, 회장님은 회장님대로 일생일대의 숙원을 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