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달/문학저널 2009년10월호

김현거사 2011. 6. 16. 17:01



                김창현

언제부턴가 타관의 달은 고향 달과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밤에 정원의 달을 보면서 왠지 그런 생각을 한다.아파트 1층이라 그런가.여기도 소나무 매화나무 있고,은행나무 단풍도 있고 그 위로 달이 지나간다.그러나 살풍경한  건너편 아파트 때문에 그런가.젊은 시절 뼈 아픈 고독을 느끼게 한 서울의 달이 생각나서 그런가.배고프던 신문기자 시절,버스에 흔들리며 명동에서 창동까지 두시간을 가서,지하 전세방 있던 창동 버스 종점에 내리면,칼바람은 윙윙 귓전을 때리는데,그 겨울 얼어붙은 땅에 떨어진 달빛 아래 시커먼 전붓대 그림자는 꼭 내모습처럼 처량했었다.나는 왜 이런가.울고싶은 마음으로 포장마차에 들어가 따뜻한 오뎅국물 안주로 혼자 소주 마시던 그 차가운 달빛 생각나서 그런가. 

풋청년 때 떠난 내고향 진주 배건너 육거리 우리집 앞의 달은 무척 밝고 따뜻했다.길 건너 염소처럼 꼬장꼬장하던 한약방 영감님집 양철지붕 위로 달이 떴고,길에 펴놓은 우리 평상에서 빤히 보이던 그 창문에 한약국집의 나보다 한살 아래던 얌전한 딸이 커텐 뒤에 숨어서 항상 날 훔쳐보곤 하였었다.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진주농대 전임강사 부인,은경이 엄마가 천사같이 이쁜 딸을 안고 나와 수박과 참외를 깍으며 그 듣기좋은 표준어로 총각 총각 해싸면서,나에게 밤늦도록 문학 강론 펴던 그때 달빛도 그리 밝고 고왔었다.보름달은 풍성해서 좋았고,초생달은 애처로워서 좋았다.

늦은 밤 푸른 남강물을 도강하여 그 넓디넓은 도동 백사장에 영국을 넘나들던 바이킹처럼 습격하여 수박 서리 해오며 헤엄쳐 건너오던 강물 위 그 달빛도 그리 밝았었다.상평서동 자두밭 습격하여 자두를 런닝에 가득 따오다가 동네 청년들에게 잡혀서 혼나던 그 밤 그 고갯길 그 달빛도 거울처럼 그리 환히 밝았었다.

달빛은 넓은 들을 혼건히 적셨고,산 위에 고고히 비쳤고,푸른 강물 위에 영롱했다.<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좀도둑답잖게 교과서에 실린 이호우의 시를 외기도 했고,달빛 아래 나는 영웅처럼 해적처럼 용감했었다.무성한 뒷집 감나무에 올라가 달빛 비치는 잎새에 몸을 숨기고 단감을 따먹곤 했다.

진주는 겨울 달도 얼마나 좋던가.지도 선생님 피하려고 어른 옷입고 진주극장에서 잉그릿버그만의 <가스등>을 보고 돌아오던 스릴있던 그 밤 다리 위 달빛은 얼마나 좋던가.달빛 아래 해인고 담 위에 앉아 지나가는 여학생 향해,혹은 촉석루 건너 이슬 내린 망경북동 대밭가에서 가장 이쁜 누군가가 들어주길 바라며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을 부르곤 했다.그때 나는 성악가였다.세레나데 부르는 이태리 청년이었다.그 시절 그 달빛은 그리 낭만적이었다.

모깃불 태우며 부채 흔들다 평상에서 잠들었던 신안동 우리 할아버지 대밭 속을 환히 비치던 달빛도 그리 밝았었다.내가 <그윽한 대숲 속에 홀로 앉아,거문고 타다 길게 휘파람을 부네.깊은 숲 속이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밝은 달빛만 살며시 닥아와 비추어준다.>란 王維의 <竹里館>이란 시를 읽자말자 하도 공감이 되어 금방 왼 것도 신안동 대밭 속을 환히 비치던 그 달빛 체험 때문이다.체험없이는 눈으로 피부로 느낌으로 완전 공감할 수 없다.

달은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건만,나는 항시 타관의 달에는 뭔가 허전함을 느낀다.사람은 가장 사람하던 사람도 대개는 사라져 갔다.생과 사로 이별했고,정서가 달라져 헤어졌다.그러나 달은 항시 그 달이다.만월이나 초생달로 비록 몸이 변해도 달은 매일 밤 찾아온 평생의 친구이다.그러나 왠지 타관의 달은 낮설다.서울의 달은 희뿌연 스모그 속에서 헤매다가 서해로 실종되곤 한다.사람들은 달을 쳐다보거나 찾지도 않는다.나만 밤마다 달을 보며 허전해한다.
(2009년 2월)

Moon River
달빛이 흐르는 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