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하여 사는 멋/ 신흠(申欽)의 '야언선(野言選)'
대학시절에 읽은 명수필 하나를 소개한다. 원래 한문으로 된 것이었지만, 옛 선비들의 멋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어, 요즘 내노라 하는 수필 보다 더 깊이 있고 청아하고 운치있다. 원래 '야언(野言) 1-2편은 상촌집에 실려있지만, 고려대 고(故) 김춘동 교수께서 한문강독 시간에 강의한 '야언선(野言選)'을 풀어본다.
신흠은 조선 인조 때 사람이다. 자는 경숙(敬叔), 호는 현헌(玄軒) 상촌(象村) 현옹(玄翁) 방옹(放翁)이다. 임진왜란 때 신립(申砬)장군의 조령(鳥嶺) 싸움에 참가했고, 강화 체찰사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도 있었다.
훗날 병조판서에 오늘 날 국무총리격인 영의정까지 지냈다. 영의정이라면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이다. 요즘 총리 지낸 분 중에 이런 수준급 멋을 추구한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야언선(野言選)
모든 병을 고칠 수 있으나 사람의 속된 병을 고칠 수 없다. 속된 병을 치유하는 것은 오직 책이 있을 뿐이다. 책을 읽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으며, 시내와 산을 사랑하는 것은 이로움만 있고 해로움은 없으며, 꽃과 대나무와 바람과 달을 완상하는 것은 이익은 있지만 해는 없고, 단정히 좌정하여 참선하며 침묵에 잠기는 것은 이익은 있지만 해는 없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루에 착한 말을 한 가지라도 듣거나, 착한 행동을 한 가지라도 보거나, 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행한다면, 그날이야말로 헛되게 살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꽃이 너무 화려하면 향기가 부족하고, 향기가 진한 꽃은 색깔이 화려하지 않다. 그러므로 부귀를 한껏 뽐내는 자들은 맑게 우러나오는 향기가 부족하고, 그윽한 향기를 마음껏 내뿜는 자들은 적막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서 군자는 차라리 백세(百世)에 향기를 전할지언정 한 때의 요염함을 구하지 않는다.
글을 써 세상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기를 바라면 그 글은 지극한 문장이 아니고,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바른 인물이 아니다.
산 속에 사는 것은 멋진 일이로되 거기에 잠시 마음이 매이게 되면 그것은 저잣거리나 권모술수가 판치는 궁궐 속처럼 속된 것이요, 서화는 아취있는 일이로되 잠시 탐염에 빠지면 장사꾼과 다름없고, 술을 마시는 것은 아취(雅趣)가 있지만 남을 의식하면 지옥과 같고, 친구를 좋아하는 것은 달통한 일이지만 속물들과 놀면 고해(苦海)와 같다.
현실 생활과 거리가 있어도 의기(義氣) 높은 친구를 만나면 속물 근성을 떨어버릴 수가 있고, 두루 통달한 친구를 만나면 치우친 성벽(性癖)을 깨뜨릴 수가 있고, 박식한 친구를 만나면 고루함을 계몽받을 수 있고, 광달(曠達)한 친구를 만나면 타락한 속기(俗氣)를 떨쳐 버릴 수 있고, 차분하게 안정된 친구를 만나면 성급하고 경망스러운 성격을 제어할 수 있고, 담담하게 유유자적한 친구를 만나면 화사한 쪽으로 치달리려는 마음을 해소시킬 수 있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공손하고 삼가는 공부를 해야하며,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은 마땅히 온후하고 마음을 가라앉히어 깊이 생각하는 침잠하는 공부를 해야 할 것이다.
차가 끓고 청향(淸香)이 감도는데 문 앞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도 기뻐할 일이지만, 새가 울고 꽃이 지는데 찾아 오는 사람 없어도 그 자체로 유연(悠然)할 뿐이다. 진원(眞源)은 맛이 없고 진수(眞水)는 향취가 없다.
흰구름 둥실 산은 푸르고, 시냇물은 졸졸 바위는 우뚝. 새들 노랫소리 꽃이 홀로 반기고, 나뭇꾼 콧노래 골짜기가 화답하네. 온갖 경계 적요(寂寥)하니, 인심(人心)도 자연 한가하네.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말하고 제 때 그치는 것은 천하의 지언(至言)이다. 그러나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다 말하지 않고 그치는 것은 더욱 지언이라 할 것이다.
객이 문 앞에서 흩어져 간후 문은 닫혔고 바람은 선들선들 불고 해는 떨어졌는데, 술동이 잠깐 기울임에 싯구 첫 장을 짓는 경지야말로 산인(山人)의 희열을 맛보는 경계라 하겠다.
굽이쳐 흐르는 물에 돌아드는 오솔길, 떨기 진 꽃 울창한 대숲과 산새들과 강 갈매기, 질그릇에 향 피우고 설경(雪景) 속에 선(禪)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경계인 동시에 담박한 생활이라고 하겠다.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는 것, 이것은 세간법(世間法)이고, 할 일도 없고 해서는 안 될 일도 없는 것, 이것이 출세간법(出世間法)이다. 옳은 것이 있고 그른 것이 있는 것, 이것은 세간법이고, 옳은 것도 없고 옳지 않은 것도 없는 것, 이것은 출세간법이다.
사슴은 정(精)을 기르고 거북이는 기(氣)를 기르고 학은 신(神)을 기른다. 그래서 오래 살 수 있는 것이다.
고요한 곳에서는 기(氣)를 단련하고 움직이는 곳에서는 신(神)을 단련한다.
봄이 장차 짙어지는 시절, 걸어서 숲속으로 들어가니, 오솔길이 어슴프레 뚫려있고, 소나무 대나무가 서로 비치는가 하면 들꽃은 향기를 내뿜는데 산새는 목소리를 자랑한다. 거문고 안고 바위 위에 올라 두서너 곡조를 탄주하니, 내 몸은 마치 동천(洞天)의 신선인 듯 그림 속의 사람인 듯하다.
뽕나무 우거진 숲과 일렁이는 보리밭은 아래 위서 나란히 수려함을 다투고, 봄 날 꿩은 서로를 부르고, 비오는 아침 뻐꾸기 소리 들리는 이것이야말로 농촌 생활의 참다운 경물(景物)이다.
스님과 소나무 숲 바위 위에 앉아 인과(因果)와 공안(公案, 우주와 인생의 궁극적 질문)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흘러 어느새 소나무 가지 끝에 달이 걸렸기에 나무 그림자 밟고 돌아온다. 마음에 맞는 친구와 산에 올라 가부좌(跏趺坐) 틀고 내키는 대로 이야기하다가 지쳐 바위 끝에 반듯이 드러 누웠더니,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둥실 날아와 반공중(半空中)을 휘감았는데, 그 모습을 접하면서 문득 자적(自適)한 경지를 맛보게 된다.
서리 내리고 나무잎 떨어지는 철에 때때로 성긴 숲 속에 들어가 나무 등걸 위에 앉으니, 바람에 나부껴 표표히 떨어지는 단풍잎은 옷소매에 내려앉는데, 새들이 사람을 엿보는듯 나무 끝에서 날아와 나의 모습을 살피니, 황량한 대지가 청명하고 초연한 경지로 바뀌어지는 느낌이 든다.
문을 닫아 걸고 마음에 맞는 책을 읽고, 문을 열고 마음에 맞는 손님을 맞아 들이고, 문을 나서서 마음에 맞는 경계를 찾아다니는 것, 이 세 가지야말로 인간의 세 가지 낙이니라.
차그운 서리 내려 바위가 드러났는데 고인 물은 잠잠히 맑기만 하다. 깎아지른 가파른 암벽, 담쟁이로 휘감긴 고목, 모두가 물 속에 거꾸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지팡이 짚고 이곳에 오니 내 마음과 객관세계가 일체로 맑아지누나.
거문고 연주는 오동나무 가지에 바람 일고 시냇물 소리 화답하는 곳에서 해야 마땅하니, 자연의 음향이야말로 이것과 제대로 응하기 때문이다.
살구꽃에 성긴 비 내리고 버드나무 가지에 바람이 건듯 불 때 흥이 나면 혼자서 흔연히 나서 본다. 일 많은 세상 밖에서 한가로움을 맛보고 세월이 부족해도 족함을 아는 것은 은둔 생활의 정(情)이요, 봄에 잔설(殘雪)을 치우고 꽃씨를 뿌리고, 밤중에 향을 피우며 도록(圖籙)을 보는 것은 은둔 생활의 흥(興)이요, 벼루로 글씨를 쓰는데 글이 멋지게 잘 써지고, 술을 마심에 주곡(酒谷)에 언제나 봄 기운 감도는 것은 은둔해서 사는 사람의 맛(味)이다.
고요한 밤 편안히 앉아 등불 빛 은은히 하고 콩을 구워 먹는다. 만물은 적요한데 시냇물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릴 뿐, 이부자리도 펴지 않은 채 책을 잠깐씩 보기도 한다. 이것이 첫째 즐거움이다. 비바람 몰아치는 날 문을 닫고 소제한 뒤 옛날 서적들을 앞에 펼쳐놓고 흥이 나는 대로 뽑아서 검토하는데, 왕래하는 사람의 발자욱 소리 끊어진 가운데 옛 절인(絶人)과 뜻이 왔다갔다 통하는듯 하고, 주변은 그윽하고 실내 또한 정적 속에 묻힌 상태,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다. 빈 산에 한 해도 저물어 가는데 눈은 펑펑 쏟아지다가 어느듯 싸락눈으로 내리며, 마른 나무가지는 윙윙 바람에 소리내며 추위에 떠는 산새는 멀리서 우짖는데, 방 속에 앉아 화로를 끼고 앉았노라니, 차는 향기롭고 술도 잘 익어 있는 것,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
한 척 배를 작만하여, 짧은 돛에 가벼운 노를 장치하여 그 속에 도서(圖書)며 솥이며 술과 차며 마른 포(脯) 등을 싣고, 바람 순조롭고 길이 편하면 친구들을 방문하기도 하고 명찰(名刹)을 탐방하기도 하며, 노래 잘하는 아름다운 소녀와 피리 부는 동자 한 명과 거문고 타는 사내를 태우고는 안개 감도는 물결을 헤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왕래하면서, 적막하고 고요한 심회를 푸는 이것이야말로 가장 기막힌 운치라 할 것이다.
초여름 원림(園林) 속에 들어가 뜻 가는 대로 아무 바위나 골라잡아 이끼를 털어내고 그 위에 앉으니, 대나무 그늘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오동나무 그림자가 구름 모양 같다. 얼마 뒤에 산속에서 구름이 건듯 일어 가는 비를 흩뿌리니 청량감(淸凉感)이 다시 없다. 탑상(榻床)에 기대어 오수(午睡)에 빠졌는데, 꿈속의 흥취 역시 이와 같았다.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소한(小寒)의 3신(信, 소식)은 매화(梅花), 산다(山茶), 수선(水仙)이고, 대한(大寒)의 3신은 서향(瑞香), 난화(蘭花), 산반(山礬)이고, 입춘(立春)의 3신은 영춘(迎春), 앵도(櫻桃), 망춘(望春)이고, 우수(雨水)의 3신은 채화(菜花), 행화(杏花) 이화(李花)이고, 경칩(驚蟄)의 3신은 도화(桃花), 체당(棣棠), 장미(薔薇)이고, 춘분(春分)의 3신은 해당(海棠), 이화(梨花), 목란(木蘭)이고, 청명(淸明)의 3신은 동화(桐花), 능화(菱花), 유화(柳花)이고, 곡우(穀雨)의 3신은 모란(牡丹), 다미(茶蘼), 연화(楝花)이다.
사람이 사는 동안 한식(寒食)과 중구(重九)만은 삼가서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사시(四時)의 변화 가운데 이들 절기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대나무 안석(案席, 앉아서 몸을 뒤로 기대는 방석)을 창가로 옮긴 뒤 부들 자리를 땅에 폈다. 높은 봉우리는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시내는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맑기만 하다. 울타리 옆에 국화 심고 집 뒤에는 원추리를 가꾼다. 둑을 높여야 하겠는데 꽃이 다치겠고, 문을 옮기자니 버들이 아깝다. 구비진 오솔길 안개에 묻혔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주막이 나타나고, 맑게 갠 강 해는 저무는데 고깃배들 어촌에 정박한다.
산중 생활을 위해서는 여러 경적(經籍)과 제자(諸子)의 사책(史冊)을 갖추어 둠은 물론 약재(藥材)와 방서(方書)도 구비해야 한다. 좋은 붓과 이름있는 화선지도 여유있게 비치하고, 맑은 술과 나물 등속을 저장해두는 한편, 고서(古書)와 명화(名畵)도 비축해두면 좋다. 그리고 버들가지로 베개를 만들고 갈대꽃을 모아 이불을 만들면 노년 생활을 보내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깊은 산중에서 고아(高雅)하게 지내려면 화로에 향 피우는 것 또한 빼놓을 수 없는데, 벼슬길에서 떠나온 지도 이미 오래되고 보니 품질이 괜찮은 것들이 모두 떨어지고 없다. 그래서 늙은 소나무와 잣나무의 뿌리며 가지며 잎이며 열매를 한데 모아 짓찧은 뒤 단풍나무 진을 찍어 발라 혼합해서 만들어 보았는데, 한 알씩 사를 때마다 청고(淸苦)한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충분하였다.
죽탑(竹榻, 대평상), 석침(石枕, 돌벼개), 포화욕(蒲花褥, 갈대꽃을 넣어 만든 요), 은랑(隱囊, 화문석 퇴침), 포화피(蒲花被, 갈대꽃 이불), 지장(紙帳, 방 안의 종이 휘장), 의상(欹床), 등돈(藤墩, 등나무 의자), 포석분(蒲石盆), 여의(如意, 등 긁는 막대), 죽발(竹鉢, 대나무 바리), 종(鍾), 경(磬, 옥이나 돌로 만든 경쇠), 도복(道服), 문리(文履, 무늬 신), 도선(道扇, 부채), 불진(佛塵, 먼지떨이개로서 일종의 지휘봉으로 쓰이는 拂具), 운석(雲舄, 등산용 신발), 죽장(竹杖), 영배(癭杯, 나무 혹으로 만든 술잔), 운패(韻牌), 주준(酒罇, 술동이), 시통(詩筒, 시객(詩客)이 한시의 운두(韻頭)를 얇은 대나무 조각에 써넣어 가지고 다니던 작은 통), 선등(禪燈, 절에서 쓰던 등) 등은 모두 산중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물건들이다.
신흠의 묘는 경기도 광주군에 있다. 1651년 인조묘정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춘천 도포서원(道浦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저서 및 편서는 상촌집과 현헌선생화도시(玄軒先生和陶詩), 낙민루기(樂民樓記), 고려태사장절신공충렬비문(高麗太師壯節申公忠烈碑文), 황화집령(皇華集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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