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건너의 추억
사람들은 거길 배건너라 불렀다. 목가적인 나룻배가 다녔던 모양이다. 강 건너는 바위가 층을 이룬 절벽에 촉석루가 있었다. 이쪽엔 대숲과 백사장이 있었다. 동네는 비단띠처럼 아름답게 구부러지며 흘러가는 강을 끼고 있었다. 그 위로 하얀 백로가 날라다녔을 것이다. 물에 흘러온 흙이 쌓인 과수원에는 복숭아꽃 살구꽃이 만발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곳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를 갔다. 문산중고등학교 교장에서 진양군 교육감 당선되신 아버님을 따라 문산 촌놈이 도시로 간 것이다. 집집마다 다투듯이 빨갛게 감이 익어가던 감나무가 기억난다. 하늘에 떠다니던 꼬추잠자리 떼가 기억난다. 봄이면 하얀 탱자꽃, 가을이면 노란 탱자 볼만하던 탱자나무 울타리 기억난다. 부산서 목포가는 경전남부선이 진주를 통과했다. 칙칙폭폭 주약동 턴넬에서 까만 석탁연기 품으며 기차가 배건너에 들어오던 기억이 난다. 배건너는 초등학교 하나와 역전파출소 하나가 전부인 작은 동네였다. 대충 15분만 돌아다니면 동네를 다 볼 수 있었다. 시내로 나가려면 배다리를 건너갔다. 통나무를 뗏목처럼 엮어서 만든 가설다리 였다. 배다리를 통과할 때는 누군가에게 얼마씩 돈을 내고 건너갔다.
6.25전쟁 끝난지 얼마 않되던 때다. 우리는 임시 천막교실과 해인고등학교 교실에서 수업을 받았다. 당시 가장 기억나는 것이 배고프던 기억이다. 우리는 지금 스리랑카나 아프리카 난민촌 아이들 같았다. 머리에는 쇠똥 가득했고, 팔다리는 여위었다. 당시는 배가 나오고 기름기 번들번들한 사람을 사장티 난다고 부러워들 했다. 학교 이름은 강 앞에 있다고 천전학교 였다. 학교에 가면 우리는 우리 운동장 두배나 더 넓은 옆의 뽕밭에 들어갔다. 입술 까매지도록 오돌개를 따먹었다. 전에 과수원이던 교정 안의 감나무에 올라가 익지 않은 풋감을 따먹기도 했다. 하교길에 남의 집 울타리의 노란 탱자도 혹시나싶어 따먹어보고 얼굴 찡그리기도 하였다. 탱자는 밀감이나 유자는 비교가 안될만치 시고 쓰다. 근처 방직공장에 떼지어 찾아갔다. 금방 삶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번데기를 얻어먹었다. 산에 가서 칡 캐고, 송쿠 꺽고, 찔레꽃 새순 껍질 벗겨 먹었다. 집은 아무리 뒤져봐야 먹을 것 없을 것이 뻔한 터였다. 우리는 밖에서 자력갱생 하였다. 들판에서 삐삐 뽑고, 고구마와 감자 캐먹었다. 논에서 메뚜기 여치 잡고, 고동 잡고, 미꾸라지 잡아서, 고무신에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이 모두가 요즘은 웰빙식품이라며 대접받으니 참 다행이다.
당시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은 연필과 연필깍기 등 원조물자는 천국발 선물이었다. 그걸 보내준 미국은 천국 보다 잘 사는 나라 같았다. 선생님이 가루우유를 나눠주곤 했다. 우리는 그걸 집에 가져와서 밥에 쪄서 딱딱하게 만들어 먹었다. 쬬크렛을 처음 먹어본 그 황홀하던 촉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미제껌도 그렇다. 그것은 우리가 밭에서 꺽은 풋밀을 씹어 만든 껍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더 쬰득쬰득하고 탄력있었다. 아까운 미제껌을 우리는 책상 밑에 붙혀놓고 몇날 며칠씩 씹고 또씹었다. 어른들은 그때 처음 커피 맛을 보았을 것이다. 맥주와 C레이션 맛도 처음 접했을 것이다. 나중에 고등학생이 되자,우리는 모두 카리비안의 해적이 되었다. 밤에 남강을 헤엄쳐 건너가, 도동의 수박과 참외를 서리해 왔다. 낭만과 모험심을 키웠다.
그 당시 미국공보원에서 제공하던 활동영화를 기억 못한다면 말이 않된다. 별빛 아래 운동장에서 영사기가 돌아갔는데, 이때 모여든 인파는 인산인해였다. 아이들, 청년과 처녀, 노인네와 부인네 모두 집을 비워놓고 나왔다. 어른은 아이를 찾고 아이는 어른을 찾고, 울고불고 난리 피웠다. 영화는 무성영화였다. 그땐 변사가 있었다. 다분히 신파쪼였지만 사람들은 변사를 좋아했다. 변사 흉내를 내곤 하였다. 대동강 부벽루와 이수일과 심순애를 기억할 것이다. '김중배의 다이어몬드가 그렇게 탐나더냐' '순애야! 이 손을 놓아라. 놓지않으면 발길로 차 버릴 것이다.' 집에 돌아가며 사람들은 <장한몽>의 하이라이트 대사를 외곤했다. 그 당시 배건너 총각들은 다 초보 신파극 배우 같았다. 이태리 쏘렌토나 베니스 총각 비슷하기도 했다. 모두 세레나데의 명수였다. 맘에 드는 처녀를 따라가서, 그것이 비록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이긴 했지만, 떨리는 음성으로 세레나데를 불렀다. 그러다 혹시 일이 성사되면 어느날 둘이 별빛 아래서 만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영화 상영 중 간혹 필림이 끊기곤 하였다.그럼 어떻게 되는가. 어둠 속은 난장판이 된다. 휙휙 다들 손가락을 입에 넣고 휘파람 불었다. 누가 큰소리로 맹랑한 야유 한방 터트리면 잠시 장내가 웃음바다 되기도 했다. 끊긴 영화가 다시 시작될 때도 거치는 과정이 있다. 화면에 1234 숫자가 하나씩 나온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목소리로 일제히 그걸 읽었다.
나는 아직도 배건너 밤거리에서 들리던 총각들의 유행가 소리를 기억한다. 깊은 밤 진주극장 영화나 유랑극단 천막의 써커스 악극단 구경하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던 총각들 발자국 소리를 기억한다. 만약 물의 도시 베니스에 곤돌라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돌아오라 쏘렌토로'라는 명곡이 없었다면 쏘렌토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낭만도 멋도 없는 도시일 것이다. 진주에 총각들 유행가 소리가 없었다면, 진주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진주는 자고로 평양과 쌍벽을 이룰만치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 중 백미는 촉석루와 서장대다. 안개 끼고, 꽃 피고, 달 뜨는 그 풍경을 일년 사시사철 구경한 사람이 누구이던가. 항상 다리 위를 내왕한 배건너 사람들이다. 뒤벼리 절벽도 마찬가지다. 배건너의 칠암동 대밭 앞에서 건너다 보아야 가장 아름답다. 황금빛 가득하던 평거들판도 마찬가지다. 배건너 망경산에 올라가서 굽어보아야 가장 자세히 보인다. 내가 배건너 총각에게 감성 점수를 후하게 매기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배건너 소년들은 남강 은어처럼 민첩했다. 강변에 움 트는 버들처럼 싱싱했다. 대밭 속 죽순처럼 부드럽고 거침없었다. 소년들은 배건너의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바람을 사랑하고, 비를 사랑하고, 강을 사랑하고, 구름을 사랑하였다. 숲속 매미를 사랑하고, 남강의 버들피리를 사랑하고, 하늘의 종달새를 사랑하였다. 소녀에게 바치려고 봄에는 망진산 절벽 꽃 꺽으러 올라가고, 소녀에게 보낼려고 가을밤 늦도록 편지를 쓴 것이 그들이다.
그러나 사랑하던 배건너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지금 그들은 어디로 갔는가. 남강변에 흔하디 흔하던 갈가마귀떼처럼 떠나갔는가. 집집 울타리에 흔하디 흔하던 탱자나무처럼 사라졌는가. 모든 것은 한여름밤의 꿈이었던가. 가난하던 그 사람들, 낭만 가득한 그 사람들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꽃 피면 꽃 핀다고, 낙엽 지면 낙엽 진다고, 강둑에서 남인수 노래 부르던 총각들은 떠났다. 맘보바지 나팔바지 입고 멋부리던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앵도같이 곱던 우물가 그 소녀도 볼 수 없다. 이제 그들이 떠난 배건너엔 누가 사는가. 지금 배건너에 가면, 아무도 아는 이 없고, 다리 위에 구름만 흘러간다.
'3)전자책·고향.집. 아이들.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촉석루에서 13년 12월 (0) | 2014.05.11 |
---|---|
남강 소묘 (0) | 2014.05.11 |
아내와 진주를 다녀와서 (0) | 2014.05.11 |
김여정 선배님 시전집 (0) | 2014.05.11 |
두류동 친구의 허름한 오두막 (0) | 2014.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