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전자책·고향.집. 아이들.산

강변에 서면

김현거사 2014. 5. 11. 15:21

강변에 서면

 

 전에는 강물과 대화를 할 줄 몰랐다. 그냥 강에서 멱감고 물고기하고 놀 줄만 알았다. 버들숲에 떠오르는 흰구름 보고, 종달새 소리만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강변에 서면, 강물이 속삭이는 말이 귀에 들린다. 하얀 물안개 피어오르는 새벽 강이나, 별이 찬란한 강을 보면  속삭이는 말이 더욱 크게 들린다. 돌담길 사이 감나무 우거진 동네, 달빛 아래 은모래밭 곱던  산 너머 고향 떠오르고, 햇볕 빤작이던 물속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친구, 시원한 강둑 아름답던 노을이 환영처럼 또렷하게 눈앞에 나타난다. 나 이제 동구 밖 고목처럼 늙어 그런가. 구비구비 먼 길 떠나온 나그네라 그런가. 다정한 물결소리가 말로 들린다. 그리움 주체할 수 없어, 가을밤 새우며 우는 귀뚜라미같은 심정이 된다. 전에는 그렇치 않던 강이다.그러나 이제 강은 말을 한다. 

 

  세월이 갈수록 강이 신비로운 친구처럼 느껴진다. 생각하면 강도 나처럼 구비구비 길 없는 길 헤쳐오면서, 산의 바위를 사랑했고, 숲속의 꽃을 사랑했고, 새소리를 사랑했다. 물결에 흔들리는 나룻배를 사랑했고, 반석 위의 정자를 사랑했고, 절벽의 소나무를 사랑했고,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사랑했다. 강도 나처럼 도시 보다는 한가한 시골을 좋아했고, 이끼 덮힌 오래된 성벽을 좋아했고, 다리 위의 외로운 가로등을 좋아했고, 기적 울리며 떠나는 기차를 좋아했다. 강도 나처럼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신세였고. 한번  이별한 사람은 다시 만나볼 수 없는 신세였다. 때로 탄식하고, 때로 울부짖고, 때로는 환희의 노래 불렀지만, 그 모든 감정은 다 물결 속에 잠재웠다. 그들 중 간혹은 잊어버렸고, 간혹은 별이 되어 가슴에 남았다.

 

  이제 강변에 서면 내마음 속에도 하나의 강이 흘러내림을 깨닫는다. 강의 물결 위에 수많은 별이 찬란히 비치듯, 내마음 속에도 밤마다 얼마나 많은 그리운 별이 비쳤던가. 강이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탄식하듯이 나 역시 얼마나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탄식했던가. 강과 나는 애초에 고향 등지고 세상 길 나선 나그네였고,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밤하늘에 사라지는 유성같은 존재였다. 그래 강과 나는 간혹 서로 마주보고 한탄의 노래를 부른다. 그것은 세상 누구도 듣지못한  둘만의 노래다. 강과 나는, 마음은 계절 따라 얼었다 녹았다 하는 변덕쟁이란 걸 알았고, 세월은 쏜살같이 달아나는 심술쟁이란 걸 알았다. 그래 때로는 강이 다정한 목소리로 좀 더 옆에 가까이 닥아오라고 손짓할 때가 있다. 사람 떠난  쓸쓸한 공간을 강이 친구되어 주겠다고 말을 걸 때가 있다.

 

  강은 때로 쓸쓸한 미소를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주로 묵묵히 듣는 입장이다. 신비스런 푸른 눈으로 , 밑바닥이 훤히 보이는 수정처럼 맑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강은 여신처럼 깊고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조용히 마음을 열고 주의 깊게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그 시선이야말로 가장 맑고 아름다운 시선이다. 이 세상 누구도 그런 시선을 가진 사람은 없다. 나는 강에게 말을 건넨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뭉게구름같던 젊은 날 꿈을 이야기 한다. 피로와 허기로 고생한 세상 이야기, 명예와 부귀가 물거품같던 이야기를 한다.그러면 강은 부드러운 물무늬로 미소처럼 응답한다. 강은 나의 참회를 듣는 신부님이고,명상을 지도하는 스님이다.

 

  강은 남풍에 실려온 봄날처럼 갈 곳 정한 데 없이 가고, 나 역시 그렇다. 강은 이정표 없는 길을 유유히 흐른다. 강은 소리없이 아래로만 흘러간다. 몸을 낮추고 흘러갈 뿐이다. 말 없는 말로 깊은 뜻을 표현한다. 강은 입을 여는 일이 없다. 강은  몸으로 말 할 뿐이다. 몸짓으로 아가를 다루는 어머니 같다. 나는 이제 그 신비롭고 다정한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것이다. 나 이제 강변에 서면, 강에게 길을 묻지 않는다. 나 역시 강이 된 것이다. 다만 여신처럼 부드럽고 신비로운 강의 속삭임 들으며, 말 없이 강을 지켜볼 뿐이다.(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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