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건너 육거리 풍경
김창현
진주시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앞에 육거리가 있었다. 습천에서, 역전에서, 천전학교에서, 남강 철교에서, 망경북동에서, <지수>에서 오는 길이 있었다. 육거리에는 한약방과 구멍가게가 있고, <부산여관>이 있고, 이발소와 약방이 있고, 추모씨 방직공장 긴 담이 있고, 다리 쪽으로 좀 가면 성수네 방앗간과 해인고등학교가 있었다.
여름에는 남홍이네 푸른 탱자나무 울 밑에서 흘러온 물을 바가지로 길바닥에 시원히 뿌렸다. 그리고 우리는 대평상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보는 일 외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정촌 나가는 <쎄비리모티>에서 내가 꺽어다 심은 수양버들은 그늘이 좋았다. 그래 우리집 평상은 항시 행인들이 잠시 엉뎅이 붙이다 가는 휴게소였고, 동네 사람들 모이는 사랑방이었다.
이 육거리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큰 단감나무 네 그루가 있던 우리 뒷집이다. 우리집에도 두 그루 늙은 감나무가 있었지만 떡은 항상 남의 떡이 커보이는 법이다. 우리집 떫은 감도 가을에 빨갛게 홍시가 되면 달기가 꿀이었다. 그러나 표피에 하얀 서리가 덮힌 그렇게 빨갛고 아름다운 걸 어떻게 따먹겠는가. 애꿎은 건 뒷집 단감이다. 초가을부터 좋은 노략질 대상이었다. 주인 몰래 뒷집 감나무에 올라가 스릴 있게 감 따먹던 그 가을들이 행복한 가을 이었다. 탱자나무도 나는 주로 뒷집 것을 애용했다. 그 집 탱자나무 밑둥만 자치기 작대기 대상이었고, Y짜형으로 뻗은 가지만 새 잡는 고무총 재료였다. 우리집 탱자나무는 보호수였다. 뒷집 가장이신 남홍이 아버님은 체구가 으젖한 교장선생님이고, 어머님은 우리 어머님과 같이 절에 다닌 단짝 계꾼이었다. 막내 남홍이는 나보다 한 살 위 죽마고우로 어릴 때 온갖 재작을 나에게 가르쳐 준 장본인이다. 큰형님은 진중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최남덕 선생이고, 둘째는 병역기피자로 한동안 우리집 대청 밑방에 숨었던 남두형이다. 남두형은 모처럼 진주에 내려온 우리 외삼촌을 따라 서울 가서 출세했다. 모 제지회사에 취직했다가 나중에 그 회사 회장 사위가 되고 그룹사 부회장이 되었다. 그 밑이 우리 형 동기 남철이형이고. 그 밑이 사범학생인 남순이 누나다.
길 건너 구멍가게집은 인물 잘 생기고 늘씬한 몸매로 처녀들에게 인끼 좋고, 진주 주먹들이 알아주던 장수형이 살았다. 그 집 어른 박포수는 진주 산청 다니는 버스 기사였다. 운전대 위에 사냥 총 걸어놓고 다니다가 지리산 기슭 어디던지 꿩이 나타났다하면 승객 기다리게 버스 세워놓고 총질하던 분이다. 그 집 사냥개는 늘씬한 포인터였다. 우리집 잡종 진돗개 만나면 항상 꼬리 내리고 달아나서 그 집 사람들 체면을 여지없이 꾸겨주곤 했다. 장수형 여동생 장미는 이름 그대로 장미처럼 이뻤지만, 나는 장수형이 무서워서 장미에게 말 한번 걸어보지 못했다. 천전초등학교 쪽으로 한 불럭 떨어진 곳에 살던 삼식이형도 주먹으로는 진주서 알아주던 형이다. 그의 조카 성복이는 경희대 음대를 나왔다. 여름철 당미에서 따이빙 하며 목욕하며 놀 때, 카루소처럼 가슴 가득 숨 들이키고 아름다운 미성으로 벨칸토를 그렇게 멋지게 잘 불러 나를 감동시키던 그는 진주교대 교수를 하다가 마지막엔 대학원장을 했다. 그 집 길 건너 <하고약>집 삼촌은 우리 큰형과 하고한 날 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거나, E마이너 F마이너니 하면서 <애수의 소야곡>을 키타 연주하던 한량이다. 이 한량님의 조카 <하고약>집 아들 위수는 내 동기이다. 지금 진양호 옆에 멋진 호텔을 짓고는 이런 곳은 구라파나 외국에 가도 별로 없다고 자랑하곤 한다. 주먹으로는 신원균형도 알아주는 육거리 스타였다. 중년 넘어 내가 진주에 갔다가 여전히 여럿이 어깨를 쩌억 펴고 신작로 한가운데를 휩쓸고 다니는 원균형 모습을 보았다. 선거에 관여한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와 친하던 또한분 계꾼은 역전파출소 근처 제재소집 안주인이다. 그 집 아들 재식이는 고등학교를 서울로 진학하여 나중에 한국유리 사장을 했고, 가족끼리 삼천포 해수욕장에 같이 갔던 재식이 누나와 여동생은 하도 이뻐서, 사천 공군들이 물 속에까지 줄줄 따라다녔다. 역전파출소 근처에 살던 우리 고모님은 울산에서 손으로 껍질 벗기면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밀도 과수원을 했었다. 어느날 트럭에 가족을 몽땅 싣고 고향으로 귀향했는데, 천부적인 만담가라, 한번 입만 떼면,주위 사람들이 배꼽 잡게 만들곤 했다. 고종사촌 기주형은 진농에서 알아주던 주먹이었다. 나중에 법원경매에 손을 대어 원지에 작은 집을 장만하기도 했다. 여름날 오후면 나는 우리집 평상에 누워 빈둥거리며 하늘의 구름을 보거나, 밤하늘 북두칠성 북극성 등의 별을 헤곤 했다. 그 때 항시 창가 커텐 뒤에서 창밖의 우리 모습을 훔쳐보던 두 소녀가 있었다. 그들은 한약방집 두 딸인데, 수줍어서 집 밖에 잘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이름을 모른다. 우리집 앞을 지나다니다가 간혹 우리 평상에 앉아 몇마듸 말도 건네던 내 한 해 위 박모라는 여학생도 생각난다. 나중에 그의 동생 철이는 한국은행 부총재를 했는데, 철이는 용인시 수지, 내가 이사간 아파트 근처에 살다가, 내가 이사가기 직전에 이사를 가버렸다. 습천 못은 배건너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그 곳에서 유명한 여학생은 영자였고, 애교라면 진주여고 교장으로 계셨던 외삼촌댁 이종사촌 민자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배건너 육거리의 가장 명물은 <청깨>다. 지금 생각해도 그의 부모님이 왜 그에게 청깨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어줬는지 모르겠다. 한쪽 눈이 애꾸눈인 청깨는 집이 가난해서, 늘상 길에서 놀았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싸움판에는 반드시 그가 끼었다. 꼭 카리비안의 유명한 해적 애꾸눈잭 같았다. 이 청깨가 노인이 된 지금도 아직 육거리에 살고있다 한다. 초등학교 동기인 오태식교장 말에 의하면, 청깨가 아직도 동창회 모임에 잘도 나온다는 것이다. 그 소릴 듣자, 나는 갑자기 청깨가 보고싶어, 언젠가 진주 가서 그를 꼭 한번 보자고 약속한 적 있다.
길 건너에 약방과 이발소가 있었다. 약방은 평행봉 잘하던 내 동기 조규용의 형이 주인이다. 규용이 형은 우리 작은형과 진고 동기다. 약방 안주인 용환이 엄마는 우리 평상 단골 손님이었다. 키 크고 성격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어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 우리집 아랫채에 세들어 살던 진주 농대 교수 부인 은경이 엄마도 평상 단골손님 이었다. 서울 출신이라 표준어를 구사하던 은경이 엄마는 미인인데다 한때 문학소녀였다. 나는 그가 소개해준 헷세나 투르게네프를 지금도 좋아한다. 우리집 가게방에 세들어 살던 필년이 엄마는 한많은 여인이었다. 물장사 출신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신문사 지사장 첩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항상 세모시 적삼을 깔끔하게 입고 있었다. 양녀인 필년이한테는 작은 일에도 그렇게 성질을 부리면서도 나한테는 총각 총각 해싸면서 밤늦어도 평상에서 일어설 줄 몰랐다. 그러면 배뚱뚱이 중늙은이 남편이 컹컹 헛기침을 해서 불러들이곤 했다. 그렇게 구박덩이로 자란 필년이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한번 보고싶다.
부인들에게 인끼 많던 이 몸이 왜 그 당시는 항상 이발소 앞에만 가면 작아졌던지 모르겠다. 스스로 못생겼다는 열등감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던지 모르겠다. 그 당시는 머리에 쇠똥이란 것이 왜 그리 많던지, 머리 감아주는 이발사한테 왜 그리 매번 챙피한 생각이 들던지 모르겠다. 이발소 안가겠다고 떼 쓰다가 어머니한테 혼쭐 나던 기억도 새롭다. 이발소 거울 위엔 멋진 그림이 걸려있었다. 숲이 있고 폭포가 있고 물방아간이 있는, 소위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이었다. 그 이발소 그림은 나에겐 말못할 감동을 준 추억의 명화다. 그 그림은 내가 군대 갔다가 제대하고, 대학을 복학하여 졸업하고, 장가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강산이 다섯번이나 변한 오십년 후에도, 갈 때마다 거기 있었다. 골동품이 된채 여전히 그 거울 위에 내 소싯적 기억을 담고 유유히 걸려있었다.
남홍이네 탱자나무는 봄이면 하얗게 꽃이 피었다가 가을이면 노란 탱자가 열렸다. 탱자나무 울 위로 감이 주렁주렁 익어갔다. 육거리 건너 터 넓은 집 감나무도 늦가을 홍시 달린 모습이 볼만했다. 간혹 길가에 늘어진 감을 따먹던 기억도 새롭다. 내가 다닌 천전학교 운동장은 한쪽이 감나무 과수원이었다. 곁엔 넓은 뽕밭도 있었다. 그 옆에 대밭과 백사장과 남강도 있었다. 다리 없던 시절 배 타고 건느던 <배건너> 다. 그 아름다운 전원의 소년으로 성장한 것이 지금도 나는 자랑스럽다.
여름방학이 되어 하루종일 할일 없던 우리에게 구경꺼리 제공한 것은 사천 함티장사 아줌마들 이다. 진주역에 내린 그들은 한 줄로 우리 평상 앞을 지나가곤 했는데, 시내를 돌기 전에 짐을 가볍게 할 요량으로, 으례 우리 평상에서 짐을 싸게 팔았다. 그러면 물동이 이고 우리 우물에 오던 동네 아낙들이 흥정을 벌이곤 했다. 우리 평상에서 잠시 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함티 속에서 가장 비싼 것은 갈치와 게지만, 사천에서 유명한 것은 개발(조개)과 싱게이(파래)다. 나는 그 싱싱한 남해의 웰빙 먹거리를 싫컿 먹고 자랐다. 늦은 오후가 되면 서장대 밑을 돌아 철교를 넘어, 십리도 넘는 평거의 사범학교에서 돌아오는 남순이 누나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나는 그 얌전한 남순이 누나가 어딘가 신비해서 항상 좋았다. 약골 우리 고모부는 커다란 누렁소가 끄는 달구지를 끌고와서 볏짚으로 마개를 한 나무 장군에 인분을 퍼가곤 했다. 사촌동생 정태를 소 등에 태우고 온 적도 있다. 그 어린 정태는 나중에 산청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고모부는 어머니가 막걸리를 대접하면 원없이 신세타령을 하시다 가시곤 했다. 일찍 고모님을 여위었기 때문이다.
가만이 회상해보면 고향의 풍경처럼 정답고 그리운 것이 없다. 타향의 그 무엇이 고향에 비기랴. 한없이 그리운 것이 고향이다. 나의 음악과 문학에 대한 관심은 그 시절 그 평상에서 싹 텄지 싶다. 밤에 키타 반주 맞춰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남인수 노래에서 나의 음악은 시작되었다. 부채 부쳐가며 은경이 엄마와 나란히 앉아 들은 헷세와 투루게네프 작품 해설에서 문학은 시작되었다. 대개 우리는 진주극장 영화보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다 지나간 자정 넘어서야 촉촉한 밤이슬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아마 그 평상은 내 예술적 감성을 최초로 싹 튀운 온실이었지 싶다.
이제 나이 들어 타향의 노인이 된 지금, 나는 이상하리만치 소년 때의 감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지금도 비가 개고 산들바람 불면, 비온 후 고향산천, 산들바람의 감촉을 기억해낸다. 그만치 정든 배건너 망경남동 육거리였다. 그런데 육거리 근처에 살던 사람들은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여름 그 평상 옆에 피운 모깃불 연기처럼 육거리 추억은 지금도 모락모락 가슴 속에 피고 있건만.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 있지만,이제 그 말이 무색할만큼 많은 세월 흘렀다. 산 첩첩 물 첩첩 아득히 먼 곳에 흘러온 것이다. 50여년 세월은 갔다. 언젠가 가본 육거리는 무정하리만치 변해 있었다.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없는 낮선 삼층 건물만 서있었다. 정만 남겨두고, 어째서 사람들은 모두 뿔뿔히 흩어져 가버렸을까. 한참 무심한 세월을 느끼다 돌아온 적 있다. 그들은 그 겨울밤 배건너 육거리를 울리고 허공 속에 사라진 찹쌀떡 장수의 '찹쌀떡!' 소리였을까. 애절한 추억 속 메아리일까. 무엇이 모든 걸 삼켜버린 것일까. 고향은 이제 쓸쓸한 한 노인의 가슴에 찍힌, 세월에 빛바랜 한장의 흑백사진에 불과한 것일까.(남강문학 2011년 게재)
배건너 육거리 풍경
김창현
진주시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앞에 육거리가 있었다. 습천에서 오는 길, 역전에서 오는 길, 천전초등학교에서 오는 길, 남강 철교에서 오는 길, 망경북동에서 오는 길, <지수>에서 오는 길이 있었다. 육거리에는 한약방과 구멍가게가 있고, <부산여관>이 있고, 이발소와 약방이 있고, 커다란 추모씨 방직공장 담이 있고, 다리 쪽으로 좀 가면 성수네 방앗간과 해인고등학교가 있었다.
여름에는 남홍이네 푸른 탱자나무 울 밑에서 흘러온 물을 바가지로 길바닥에 시원히 뿌리고, 우리는 대평상에 앉아 한가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보는 것이 낙이었다. 정촌 나가는 <쎄비리모티> 벼랑에서 내가 중학생 때 꺽어다 심은 수양버들은 그늘이 좋았다. 그래 우리집 평상은 매번 사람들이 엉뎅이 붙이고 잠시 쉬어가는 휴게소였고, 동네 사람들 모이는 사랑방이었다.
이 육거리에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큰 단감나무 네 그루가 있던 우리 뒷집이다. 우리집에도 두 그루 늙은 감나무가 있었지만 떡은 항상 남의 것이 탐나는 법이다. 우리집 감은 떫은 감이라도 가을에 빨갛게 홍시가 되면 먹을만 했지만, 따먹지 않고 아껴두고, 나는 그 집 단감을 애용했다. 밤에 주인 몰래 뒷집 감나무에 올라가 감 따먹는 스릴은 참 짜릿했다. 우리집에도 탱자나무가 있었지만, 나는 주로 뒷집 것을 애용했다. 그 집 탱자나무 밑둥만 짤라 자치기 작대기를 만들고, Y짜형으로 뻗은 가지만 짤라 새 잡는 고무총 만들곤 했다. 뒷집 식구는 가장인 아버님은 체구가 으젖한 교장선생님이고, 그 집 어머님은 우리 어머님과 늘 같이 절에 다닌 단짝 계꾼이었다. 그 집 막내 남홍이는 나보다 한 살 위 죽마고우로 어릴 때 온갖 재작을 나에게 가르쳐 준 장본인이다. 큰형님은 진중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최남덕 선생이고, 둘째는 병역기피자로 한동안 우리집 대청 밑방에 숨어 살던 남두형이다. 남두형은 모처럼 진주에 내려온 우리 외삼촌을 따라 서울 가서 모 제지회사에 취직했다가 나중에 그 회사 회장 사위가 되고 그룹사 부회장이 되었다. 그 밑이 우리 형 동기 남철이형이고. 그 밑이 사범학교에 다닌 남순이 누나다.
길 건너 구멍가게집 안집은 인물 잘 생기고 늘씬한 몸매로 처녀들에게 인끼 좋고, 진주 주먹들이 알아주던 장수형이 살았다. 그 집 어른 박포수는 진주 산청 다니는 버스 기사였는데, 운전대 위에 사냥 총 걸어놓고 다니다가 지리산 기슭 어디서던지 꿩이 나타났다하면 승객을 기다리게 해놓고 버스 세워놓고 총질하던 분이다. 그 집 사냥개는 늘씬한 포인터였는데, 우리집 힘쎈 잡종 진돗개 만나면 꼬리 내리고 달아나서 그 집 사람들 체면을 꾸겨주곤 했다. 장수형 여동생 장미는 이름 그대로 장미처럼 이뻤지만, 나는 장수형이 무서워서 장미에게 말 한번 걸어보지 못했다. 천전초등학교 쪽으로 한 불럭 떨어진 곳에 살던 삼식이형도 주먹으로는 진주서 알아주던 형인데, 내 동기인 그의 조카 성복이는 경희대 음대를 나왔다. 여름철 당미에서 따이빙 하며 목욕하며 놀 때, 그는 카루소처럼 가슴 가득 숨을 들이키고 아름다운 미성으로 벨칸토를 그렇게 멋지게 잘 불러 나를 감동시키더니 끝내 교대 교수를 하다가 대학원장을 했다. 그 집 길 건너 <하고약>집 삼촌은 우리 큰형과 하고한 날 평상에 앉아 바둑을 두거나, E마이너니 F마이너니 하면서 <애수의 소야곡>을 키타로 치곤했다. 그 한량님 조카 <하고약>집 아들 위수는 내 동기인데, 지금 진양호 옆에 멋진 호텔을 짓고는 이런 곳은 구라파나 외국에 가도 별로 없다고 자랑하곤 한다. 주먹으로는 신원균형도 알아주는 육거리의 스타였다. 중년 넘어 내가 진주에 갔다가 여전히 여럿이 어깨를 쩌억 펴고 신작로 한가운데를 휩쓸고 다니는 원균형 모습을 보았다. 선거에 관여한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와 친하던 또한분 계꾼은 역전파출소 근처 제재소 집 안주인이다. 그 집 아들 재식이는 고등학교부터 서울로 진학하여 나중에 한국유리 사장을 했고, 가족끼리 삼천포 해수욕장에 같이 갔던 재식이 누나와 여동생은 하도 이뻐서, 사천 공군들이 줄줄 물 속에까지 따라다녔다. 역전파출소 근처에 살던 우리 고모님은 울산에서 한입 베어물면 단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밀도 과수원을 하다가 돌아왔는데, 천부적으로 뛰어난 만담가였다. 한번 입을 열었다하면 주위 사람들이 배꼽을 잡지않을 수 없게 했다. 고종사촌 기주형은 진농에서 알아주는 주먹이었고, 나중에 법원경매에 손을 대어 원지에 작은 집을 장만하기도 했다. 여름날 오후에 우리집 평상에 누워 빈둥거리면서 하늘의 구름을 보거나, 밤하늘 북두칠성이니 북극성이니 별을 셀 때, 항시 창가 커텐 뒤에서 창밖의 우리 모습을 훔쳐보던 두 소녀가 있었다. 그들은 한약방집 두 딸인데, 수줍어서 집 밖에 잘 나오지 않는 바람에 이름을 모른다. 우리집 앞을 지나다니다가 간혹 우리 평상에 앉아 몇마듸 말도 건네던 내 한 해 위 박모라는 여학생도 생각난다. 나중에 그의 동생 철이는 한국은행 부총재를 했는데, 철이는 용인시 수지, 내가 이사간 아파트 근처에 살았지만 그는 이사를 가서 만나지 못했다. 습천 못은 배건너 청춘들의 데이트 코스이기도 했다. 그 곳에서 유명한 여학생은 영자였고, 애교라면 진주여고 교장으로 계셨던 외삼촌댁 이종사촌 민자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뭐니뭐니해도, 배건너 육거리의 가장 명물은 <청깨>다. 지금 생각해도 그의 부모님이 왜 그에게 청깨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어줬는지 모르겠지만, 한쪽 눈이 애꾸눈인 청깨는 집이 가난해서, 늘상 길에서만 놀았다. 구슬치기 딱지치기 싸움판에는 반드시 그가 끼었다. 꼭 카리비안의 유명한 해적 애꾸눈잭 같았다. 이 청깨가 노인이 된 지금도 아직 육거리에 살고있다고 한다. 초등학교 동기인 오태식교장 말에 의하면,청깨가 아직도 동창회 모임에 잘도 나온다고 한다.나는 갑자기 청깨가 보고싶어, 언젠가 진주 가서 그를 꼭 한번 만나려고 작정한 적 있다.
길 건너에 약방과 이발소가 있었다. 약방은 평행봉 잘하던 동기 조규용의 형이 주인인데, 규용이 형은 내 작은형과 동기다. 약방 안주인 용환이 엄마는 우리 평상의 단골 손님이었다. 키 크고 성격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어 누구나 그를 좋아했다. 우리집 아랫채에 세들어 살던 진주 농대 교수 부인 은경이 엄마도 평상의 단골손님 이었다. 서울 출신이라 표준어를 구사하던 은경이 엄마는 미인인데다 한때는 문학소녀였다. 나는 그가 소개해준 헷세나 투르게네프를 지금도 좋아한다. 우리집 가게방에 세들어 살던 필년이 엄마는 한많은 여인이었다. 물장사 출신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신문사 지사장 첩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항상 세모시 적삼을 깔끔하게 입고 있었다. 양녀인 필년이한테는 작은 일에도 그렇게 성질을 부리면서도 나한테는 총각 총각 해싸면서 밤늦어도 평상에서 일어설 줄 몰랐다. 그러면 뚱뚱하게 배 나온 중늙은이 남편이 컹컹 헛기침을 해서 불러들이곤 했다. 그렇게 눈치덩이 구박덩이로 자란 필년이도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 한번 보고싶다.
부인들에게 인끼 많던 이 몸이 왜 그 당시는 항상 이발소 앞에만 가면 스스로 못생겼다는 열등감에 그렇게 빠지곤 했던지 모르겠다. 그 당시는 머리에 쇠똥이란 것이 왜 그리 많던지, 머리 감아주는 이발사한테 왜 그리 매번 챙피한 생각이 들었던지 모르겠다. 이발소 안가겠다고 떼를 쓰다가 어머니한테 혼쭐이 난 후 간 기억도 새롭다. 이발소 거울 위엔 멋진 그림이 걸려있었다. 숲이 있고 폭포가 있고 물방아간이 있는 소위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이었다. 그 이발소 그림은 나에겐 말못할 감동을 준 추억의 명화다.그 그림은 내가 군대 갔다가 제대하고, 대학을 복학하여 졸업하고, 장가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강산이 다섯번이나 변한 오십년 후에도, 갈 때마다 여전히 그 거울 위에 걸려있어,내 소싯적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남홍이네 탱자나무는 봄이면 하얗게 꽃이 피었다가 가을이면 노란 탱자가 열렸다. 탱자나무 울 위로 주렁주렁 감이 늘어져 있었다. 육거리 길 건너 터가 넓은 집에 있던 감나무도 가을이면 홍시 달린 모습이 볼만 했다. 여름방학이 되어 하루종일 할일 없던 우리에게 구경꺼리 제공한 것은 사천 함티장사 아줌마들 이다. 진주역에 내린 그들은 한 줄로 우리 평상 앞을 지나가곤 했는데, 시내를 돌기 전에 짐을 가볍게 할 요량으로, 으례 우리 평상에서 짐을 싸게 팔았다. 그러면 물동이 이고 우리 우물에 오던 동네 아낙들이 흥정을 벌이곤 했다. 우리 평상에서 잠시 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함티 속에서 가장 비싼 것은 갈치와 게지만, 사천의 가장 유명한 것은 개발(조개)과 싱게이(파래)다. 나는 그 싱싱한 남해의 웰빙 먹거리를 싫컿 먹고 자랐다. 늦은 오후가 되면 서장대 밑을 돌아 철교를 넘어, 십리도 넘는 평거의 사범학교에서 돌아오는 남순이 누나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나는 그 얌전한 남순이 누나가 어딘가 신비해서 항상 좋았다. 약골 우리 고모부는 커다란 누렁소가 끄는 달구지를 끌고와서 볏짚으로 마개를 한 나무 장군에 인분을 퍼가곤 했다. 어린 사촌동생 정태를 소 등에 태우고 온 적도 있다. 정태는 나중에 산청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했다. 고모부는 어머니가 막걸리를 대접하면 원없이 신세타령을 하시다 가시곤 했으니, 일찍이 고모님을 여위었기 때문이다.
가만이 회상해보면 고향풍경처럼 정답고 그리운 것이 없다. 타향의 그 무엇이 고향에 비기랴. 한없이 그리운 것이 고향이다. 그 시절 나는 그 평상에서 음악과 문학에 대한 관심이 싹텄지 싶다. 밤에 키타 반주 맞춰 <다시 한번 그 얼굴이 보고 싶어라> 같은 남인수 노래에서 음악은 시작되고, 은경이 엄마와 부채 부쳐가며 나란히 앉아서 들었던 헷세와 투루게네프 작품의 해설에서 문학은 시작되었지 싶다.대개 우리는 진주극장 영화보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다 지나간 자정이 지나서야 촉촉한 밤이슬 맞으며 각자 집으로 돌아가곤 했었다. 아마 그 대평상은 나의 예술적 감성의 싹을 틔우는 첫 무대이었을 것이다. 이제 나이 들만큼 들고도 타향에 사는 지금도, 비 개이고 산들바람 불면, 비온 후 고향의 아름답던 산천과, 산들바람이 피부로 느껴진다. 비온 후 소년 때 느낀 그 감성 그 느낌이 생생히 재현된다. 그런데 육거리 근처 살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여름 평상 옆에 피운 모깃불 연기처럼 육거리의 추억은 지금도 모락모락 가슴 속에 피어나건만.
이제는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무색할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다. 산 첩첩 물 첩첩 아득히 먼 곳에 온 것이다. 언젠가 가본 육거리엔 누가 주인인지 알 수 없는 낮선 삼층 건물만 무심히 서있었다. 정만 남겨두고, 어째서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져 가버렸을까. 그들은 그 옛날 겨울밤 배건너 육거리 울리고 간 찹쌀떡 장수의 '찹쌀떡!'소리처럼 허공으로 사라져 간 것일까. 고향은 이제 그리움 가득한 한 노인의 마음에 찍힌 바래진 한장의 흑백사진 일까.(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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