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청산은 어이하여 만고에 푸러르고

<수필의 날> 행사 다녀와서

김현거사 2013. 9. 12. 13:18

    <수필의 날> 행사 다녀와서

 

 

 함양 산청에 물레방아가 많은 것은,계곡에 물이 철철 넘쳐흐르기 때문이다. 계곡에 물이 많은 것은 산이 높기 때문이다. 산 높고 물 좋으니 정자도 많다. 정자 많은 것은 음풍농월 선비들이 많이 살았단 이야기다. 그래서 함양은 선비의 고장이라 자랑한다. 이 함양군 중에 정자 많은 계곡이 화림동 계곡이다. 준수한 소나무와 기이한 반석과 옥류 굽이치는 절경을 보려면 여길 가봐야 한다. 달을 희롱하며 놀았다는 농월정, 조선 5현의 한 사람인 정여창 선생을 위해 세웠다는 거연정을 비롯해서, 영귀정 군자정 경모정 람천정이 5킬로에 걸쳐 줄지어 서있다.

 

 화림동 계곡에 황석산 청소년 수련원이 있다. 2백여명 쯤 되는 것 같았다. 이곳에 문인협회가 대한민국 수필가 모두 모이도록 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방장산 신선이 조선 팔도에서 내노라 하는 수필가가 누구더냐, 어디 얼굴 한번 보자고, 시피엑스를 걸었던 것 같다. 하필이면 지리산 작은 고을 함양에서 왜 이런 큰 행사를 했느냐. 연암(燕巖) 박지원이 이곳 안의(安義) 현감으로 있을 때 '열하일기'를 썼기 때문이다. 열하일기 속에 처음으로 수필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행사를 주관한 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장 정목일은 진주고 출신이다. 그가 학교 선배인 천사령 전 함양군수와 이번 <수필 세상 만들기> 행사를 계획했다.

 

 서울서 버스 3대로 내려간 남녀작가들과 부산 광주 등지서 승용차로 온 작가들은, 전부 개성이 뚜렷했다. 동기인 목일군 소개한 인산 김일훈 선생 아드님 김윤수 박사는 나처럼 턱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 나누고, 함양 문화원장 김성진씨의 <연암 박지원의 삶과 문학> 강연을 들었다. 올해의 수필인으로 선정된 김시헌 김병권 두 분 작품이 낭송되었고, 밤에는 친목 다지는 여흥이 있었다. 열명이 자도 될 큰 방에서 호젓이 함께 밤새도록 물소리 들으면서 호강한 사람은  전 고려대 부총장 전병훈 박사다.

 

 이튿날 가본 연암공원은 흡족하게 잘 가꿔놓았다. 주차장에서 바라뵈는 하얀 안개 덮힌 푸른 산이 기백산이란다. 공원 입구는 사람 키 네배나 될 육중한 물레방아가 물을 안고 돌아가고 있다. 그 옆에 연암 좌상이 있다. 연암은 실학파다. 그가 중국 여행에서 본 물방아 양수기 베틀 풍구 같은 기계들을 처음 이곳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변강쇠의 고향이라고 장승도 세워놓았다. 분재같은 노송 옆에 사암정(思巖亭)이란 정자도 있다. 연암을 생각하라는 사암정 이다. 오솔길 따라 잠시 올라가니 작은 폭포 있다. 산바람은 에어컨 바람 보다 차다. 썬그라스 낀 여류들이 섬섬옥수 물에 담그고 그리 즐거워 할 수 없다. 연암이 집무하던 관사가 있던 안의초등학교 자리 둘러보고, 정여창이 안의 현감으로 부임하자 백성들이 오리까지 나와서 환영했다는 오리천도 구경했다. 이날 요순시대같은 함양의 순수한 인심을 자랑하던 문화 해설사 인기가 높았다. 해설을 잘해 그런지 미남이라 그런지, 어떤 여류가 갑자기 '오빠' 하고 소녀팬처럼 큰소리를 지르자, 앞에 있던 또다른 여류는, ' 오빠는 먼저 찍는 사람이 임자지?' 장단을 맞춘다. '함양 산천 물레방아는 나를 안고 돌고요, 우리 집의 우리 님은 나를 안고 돈다' 신이 난 문화해설사 노래에 수많은 여류 작가들 앵콜이 버스 속을 뒤집어 놓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고향 와서 그냥 가리. 나는 행사 후에 혼자 덕산으로 갔다. 시카코서 돌아온 친구가 중산리에 산다. 산청휴게소는 '한방라면'이 명물이다. 약초 넣고 끓인 국물은 한약냄새 진하고, 밑에 인삼 대추 밤 절편들이 많다. 동의보감을 저술한 허준이 살던 지리산 답다. 휴게소 뜰의 분재들도 볼만했다. 주먹덩이만한 모과를 단 나무는 20만원이요, 뿌리 잘 생긴 느티나무는 10만원이다. 중산리 도착하니, 참외와 야생복숭아주와 복분자주 싣고  진주 친구가 덕달같이 달려온다. 오태식 교장이다. 닭과 감자를 삶고, 지리산 품에서 자란 고추와 깻잎 안주에 마신 과일주도 좋았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밤에 별 총총하고 바람 시원한 중산리 언덕에서 내지른 오교장의 시조 창이었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긋지 아니하는고...' 

 

   다음날 새벽에는 법계사에 올랐다. 셔틀버스로 학습원으로 가서 산을 오르는데, 새벽비에 젖은 푸른 잎들은 바람에 살랑이고, 물소리는 심신을 아늑하게 한다. 모든 소리 중  파장이 사람을 가장 행복하게 해준다는 물소리다. 나무 하나하나 생긴 모습 다 살펴보고, 면경처럼 맑은 물 속에 서있는 바위 하나하나 모습 다 살펴보고, 나무잎 사이로 보이는 푸른 하늘 다 보고, 들어누운 와폭도 싫컿 보고, 2단 3단으로 떨어지는 층층폭포도 보고, 초록 이끼 아래로 떨어지는 실폭포도 보고, 죽어나자빠져서 흙이 되기 직전인 고목도 보고, 되도록이면 천천히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르는 것은 기도여야 한다. 한걸음 한걸음에 마음을 비우고 발끝까지 정신을 집중하며 조용히 올라가야 한다. 이런 참선 보행은 몸 속의 만병을 치유한다. 등산으로 땀 흘려 살 빼는 일이 속인의 염원이지만, 마음의 때를 빼는 것이 배우는 사람의 염원이다. 푸른 비로드같이 이끼 앉은 너럭바위에 앉으니, 짙고 옅은 초록잎 사이로 금빛 햇볕이 투과하여 비친다. 하얀 나비도 춤추며 날라다닌다. 가져온 커피 마시고 참외 깍고, 계류의 수석 감상하는데, 오교장이 이번에는 대금을 고요히 불어준다. 신선의 산에 신고 제대로 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 모신 법계사 적멸보궁에 가서는 아홉번 절을 올렸다. 여기 보살님 덕분에 63년도 봄에 나는 죽음 일보 직전에서 살아났다. 고교 졸업한 바로 그 해다. 진주 밀림다방에서 작당한 우리는 눈 쌓인 천왕봉에 올랐었다. 당시는 등산로가 희미했다. 눈은 가슴께까지 빠지는데, 계곡에서 길은 잃었다. 해는 지고, 체력이 고갈된 그 깊은 밤, 법계사 보살님이 절 마당에서 등불로 산을 이리저리 바춰주지 않았다면, 나중에 엘지 씨름 감독을 한 이중권, 진주서 건설업하는 유창환, 지금은 소식을 모르는 이한탁 군과 이 글 쓴 사람 거기서 동사했을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고인이신 보살님 극락왕생 하소서.

 

 법계사서 천왕봉은 2킬로 거리지만, 단풍 물드는 철에 다시 오기로 하고, 11시에 법계사서 점심 공양 마치고 하산했다. 저녁에 덕산 냉면집에서 한때 삼장면 이름난 부자집 아들 조재현 친구를 근 50년만에 만났다. 그는 명함의 주소 전화번호 밑에 취미난을 적어놓은 별난 친구다. 시골길 걷기, 바둑, 탁구, 서예, 가요, 민요, 클래식, 시조라고 적어놓았다. 시골길 걷기는 자기가 자전거 타고 지리산 둘레 마을 트래킹한 원조라 한다. 젊을 때 피아노도 치고 드럼도 쳤다고 한다. 과연 함께 노래방에 갔더니, 남인수의 <추억의 소야곡>을 놀랠만치 정확한 박자로 부른다. 남명선생 후예답게 총끼도 대단하다. 문화회관 강좌란 강좌는 모두 다 수강한단다. 바둑책 저술한 도종하 아마 7단 친구와 두마리 칫수로 매일 인터넷 바둑 둔다고 자랑한다. 그는 객지서 떠돌다 돌아와 이곳 특산물인 곶감 밤 등을 거래하며 어머님 모시고 살았다고 한다. 노후에 나물 먹고 물 마시고 즐거움을 찾는 모습이 현명해 보였다. 

 

 이튿날은 토끼재를 넘어 서상으로 갔다. 터미날서 한참 기다리니,웬 꽁지머리에 솔밭처럼 빽빽한 털 많은 사람이 오토바이 타고 달려온다. 서정민 이 친구는 최근 서울서 귀향했다. 친구 사는 곳 찾아가니, 동네 돌담에 무궁화가 곱게 피었다. 호두는 열매를 주렁주렁 달았고, 멋진 노송밭도 있다. 산은 서울 백운대 인수봉만 산이더냐. 내 친구 사는 여기 풍수도 범상찮다. 좌청룡 우백호 이룬 백운산과 약수봉 산세는 알프스 같다. 기름진 들판 끝머리 노적봉 이름은 우락산이고, 그 뒤 삼겹의 능선을 이룬 산은 황석산이다. 분지라 공중에서 보면 이 일대가 마치 연꽃 같고, 우락산은 그 연꽃의 꽃술처럼 보인다고 한다. 천여평 뜰에는 간에 좋은 노나무, 슈퍼오디, 불루베리, 대봉시, 둥시, 홍매, 청매, 산수유, 오미자, 포도 등을 심어놓았다. 도연명은 시인이라 귀거래사를 남겼지만, 그는 각종 과일나무를 남길 작정인 모양이다. '우짜던지 건강 조심해라.' 집을 돌아본 후, 서로 한번 포옹한 후 천리 밖에 그를 두고 왔다. 

                                                                                                             

                                                                                                                      (2010년 8월)